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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9:18:17 조회 : 89         
대전-112강 마태복음26장 26-28절(운구 중)20190625-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대전-112강 마태복음26장 26-28절(운구 중)20190625-이 근호 목사

 

마태복은 26장 26절부터 28절입니다.

 

26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절,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너무 일방적입니다. 제자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겁니다. 의논해서 도출된 결론이 아니에요. 그래서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돼요. 왜냐 하면은 내 의견이 거기에 개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강제로 나한테 “이거는 내 뜻이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청소해!”라고 하면 청소는 해요.

 

근데 “청소해!”라고 지시한 그 높은 사람의 의도를 청소하는 사람이 온전히 알까요? 아니죠. ‘빨리 청소하고 집에 가야지.’ 이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청소는 해주되 건성 건성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은 청소하는데 있어서 나의 의견을 타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근데 주님께서 일방적이라고 할 때, 그럼 주님께서는 그만한 권한이 있느냐 하는데, 문제는 이 언약성취에 있어서, 언약체결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도 섞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피, 살, 피와 살이 들어가면, 이건 뭐냐 하면은 곧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죠. 언약을 체결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죽음을 재료로 집어넣습니다. 보통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약속,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둘 다 계약하고 난 뒤에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계약이 돼요. 살아있는 사람이 도장이나 지장을 찍고 사인할 때에 둘 다 살아있는 거예요. 계약 끝나고 난 뒤에 둘 다 살아있어야 계약이 유효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계약한다고 하면서도 계약 당사자가 죽어버립니다. 죽는다는 말은 소실되고 소멸된다는 말이죠. 없어지는 거죠. 없어져버리면, 결국 무엇이 없어지는 겁니까? 계약한 당사자가 없다는 말은 뭐가 없어진다? 언약 자체가 죽음과 더불어서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이 성취가 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언약이 끝나버리면 안 되고, 언약대로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나타나줘야 뭐가 되느냐 하면은, 아, 주님 말씀하신 언약이 그냥 일방적인 엄포도 아니고,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게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렵지 않죠. 언약 당사자가 마치 무대 뒤로 사라져버리면 언약이 죽어버리잖아요. 그런데 그 무대 뒤에서 다시 등장하게 되면 언약은 유효한 게 되는 겁니다. 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이것은 전부다 산 사람들이죠. 세상에서의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산 사람과 산 사람들끼리 하는 거예요.

 

약간의 극단적인 예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여자와 남자가 언약식, 다시 말해서 결혼식을 한다고 합시다. 할 때, 둘 다 살아있는 사람이 결혼이 했다는 말은, 언약식 끝나고 난 뒤에 둘 다 살아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계약하는 거예요. 근데 계약을 하는데, 남자는 여자한테 반지를 줬는데 여자는 갑자기 자기의 살과 피를 주겠다고 이래 하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살과 피를 주겠다고 하면 이게 죽겠다는 말이잖아요. 한쪽이 죽었는데 언약이 유지될 리가 있습니까? 한쪽이 죽어버렸는데. 이거 무슨 의미가 없잖아요. 살아야 의미가 있지, 죽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뭘 보호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보호하고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죽음을 보호해요. 자기 죽음을. 자기 죽음을 보호한다는 말은 이게 죽는 하나님이 따로 있고 산 하나님이 따로 있을 경우나 가능한 이야기죠.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될 경우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이 말이죠.

 

근데 인간은 어딜 봐도 나는 하나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주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하나인 내가 뭐로 된다 이 말입니까? 1이 아니고 2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2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해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게. 누굴 닮아서? 예수님을 꼭 빼닮은 거예요. 죽으면 뭐가 된다? 살리라. 죽으면 살리라. 아, 이거는 위안이 오죠.

 

다시 이야기할게요. 언약이라는 것은 둘 다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조건하에 언약이라는 게 성립이 됩니다. 둘 다 살아있다는 조건하에. 근데 한쪽이 죽어버리면 자연적으로 뭐가 됩니까? 죽음자체가 언약자체도 같이 깨져서 성립이 되지 않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어버리니까, 인간들보기에, 제자들보기에 이 언약은 무효가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 언약하겠다는 분이 없어졌으니까. 애초부터 이 언약은 유효하지가 않은 거예요. 계속 언약이 살아있어야 돼요.

 

근데 언약하신 분이 돌아가셨으니까, 제자들에게는 언약을 하나마나 언약자체는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뭐, 믿을만한 언약이 없어요. 왜? 언약자체가 사라졌으니까. 이제 개가 깨어났으니까, 개한테 사료를 줍니다. 먹으라고 하면 개는 일단 눈으로 봐요. 자기 눈앞에 먹을 것이 있는 것을 보는 거예요. 근데 빈 접시에 빈 그릇으로 해놓고 먹으라고 하면 개가 갸우뚱하죠. 뭘 먹어? 뭐 있어야 먹지? 안 먹죠. 그럼 개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왈왈! 막 짖죠. 달라고.

 

예수님의 이 땅의 마지막 모습은 죽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섞었다는 말은 죽음인데, 결국 뭐냐 하면은 나의 죽음을 믿어라! 이거거든요. 죽음이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나의 없음을 믿어라! 더 줄이면 니 없음을 믿어라! 이거거든요. 없음을 믿으려면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자리에 있어줘야, 내 아들은 죽는 것이 언약의 완성이라는 것을 아버지의 안목에서나 그걸 받아들이지, 그 예수님 앞에 있는 인간들 안목에서는 이게 지금 무슨 시추에이션인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려면 제자들 없을 때 혼자 계실 때 자살하면 그만이지, 왜 제자들 앞에서 언약을 세운다고 왜 선포를 하느냐? 이거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제자들 없는데서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된다 이 말이죠. 만약에 어떤 아버지께서 자식들을 모아놓고 “나 죽는다.”라고 하면 자식들이 “어쩌라고요?” “나 죽는다.” “아니, 뭐 어쩌라고요? 말릴까요?” “말리면 사탄이다.” 예수님께서 했죠.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너, 나 죽는데 말리면 사탄이다.” 그러면 사탄이 안 되려면 죽는데 안 말려야 되잖아요. 또 안 말린다고 문제가 돼요. “나 죽는다.” “어쩌라고요? 그래?” “내가 죽는 것이 나의 완성이다. 이 아버지의 완성이다.”

 

그럼 그 소리를 들을 때 제자들은 뭡니까? 우리가 살아있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거는 결코 진짜 예수님 모습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내가 구사한 이 현실 속에 내가 일부로서 내가 예수님을 억지로 끼어 넣어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현실이 이게 가상이고 이게 환상이고 이게 망상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이들 제자들의, 인간들의 의도에 놀아나면 안 되겠죠. 뭐로 빠져나왔느냐 하면은 죽음으로 빠져나와버린 거예요.

 

빠져나오면, 믿는 대상이 빠져나와버렸기 때문에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그동안 예수 믿은 게 믿음이에요?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이 아니고 뭘 믿었느냐 하면은 본인이 원했던 바를 믿는, 자기가 자신을 믿는 그런 환경을 망상적으로 환경적으로 조장한 것 밖에 안 돼요. 내가 그리고 내가 원했던 현실 속에 예수님이 들어가 계시다고 여기고 싶은 거예요. 인간들은.

 

만약에 22살 때 예수 믿었다, 라는 이 말은 뭐냐 22살 때까지 나는 살아있었는데, 22살 때 군에 가서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22살 때까지 이건 살아있고, 예수 믿었을 때의 나도 살아있고, 앞으로도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내가 살아있다는 이거는 별 탈이 없고 이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왜? 내가 생각하는 현실 속에 그냥 예수님이 추가적으로 하나 더 끼어들었다고 보는 거예요.

 

근데 이게 망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 다음에 인간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아직도 죽었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에요. 이미 죽었는데, 22살 때 까지 이미 죽어있었는데, 내 살아있음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진짜 살아있는 것처럼, 누가? 예수님이 와서 확인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예수를 믿은 거예요. 예수를 믿을 때 순수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나, 지금 정상이죠?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 그대로의 현실이 맞죠? 이거 망상 아니죠?”라고, 그렇게 자부하면서 예수님을 내 현실 속에 끼어들게 한 겁니다. 그게 주님은 꼴 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으로, 나는 니가 구성한 현실 속에 안 놀아나겠다고 빠져나와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 구성에 있어서의 제자들은 하나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망상가로서 참여하는 거예요. 현실도 아닌데 현실이라고 우겼던, 그러한 헛된 가상적인 세계를 진짜 현실로 고집하는 그 역할이 주님의 언약의 완성에 한 몫을 담당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예수는 가짜였다.

 

진짜 예수님은 어떤 예수냐 하면은 주님 만나게 되어 내가 죽어있음이 확인 될 때, 그때 진짜 예수님이에요. 진짜 예수님은 나중에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진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아직 성령이 오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 제자들은 자기가 꾸며낸 가짜 예수를, 내가 이해하고 내가 믿을만한 그런, 나를 부정하지 않는 가짜 예수를 붙잡고 믿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자들의 이러한 한계는 오늘날 우리들의 한계를 앞장서서 미리 다 보여준 게 돼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내가 믿으면 믿는 거지, 라고 우기잖아요. 그러면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에 대한 변화는? 나에 대한 변화는 내가 또 착해지겠지, 이거잖아요. 제가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고 성령이 없으면 어떤 걸로 무장하느냐 하면은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해요.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하는데, 그냥 무장도 아니고 중무장이에요. 윤리와 도덕이 뭐냐 하면은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 이 힘으로 천국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 힘으로. 착해서, 이만큼 의로워서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착함을 하기 위해서는 누가 이 착함을 만들어냈을까요? 내가 만들어내죠. 그럼 나는 죽어야 돼요? 살아야 돼요? 계속 살아있어서 이런 착함을 만들어낼 때, 그 착함을 보고, 그 평가를 보고, 사람들은 내가 착하기 때문에 천국 간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교회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할 걸요?

 

그러나 주님보시기에는 뭐냐 하면은 현재 이것을 두 번째 시간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운구중이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시체를 지금 운구하는 중이에요. be동사+ing입니다. 시신을 관에 넣고 천사 여섯 명이 동원해서 지금 데려가는 중이라고요. 이미 죽었음을 옆에 있는 천사는 다 아는데 관속에 있는 우리만 다 모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운구중이라는 것을. 천국은 보람상조입니다.

 

죽음 속에 쌓여 있는 존재를 가지고 언약 안에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또는 다른 말로 십자가 안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관이 되고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구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천사로부터 또는 성령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그래서 성도끼리 대화할 때는요, 둘 다 관속에 누워가지고 대화하시면 돼요. 둘 다 죽었어요. 왜 죽었습니까? 죄로 죽은 거예요. 그 죄가 뭐냐 망상이거든요. 우리는 내 중심을 따로 챙기는 그 망상, 망상이 뭐냐, 나는 안 죽었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 당시의 제자들이 뭐냐,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만지고 했을 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수시로 이야기했어요.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라고 해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니가 차라리 소경이 됐으면 보는 자인데, 니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라는 거예요.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이게. 바리새인들은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해가지고, 어디 상대적으로 간음한 여자가 없나 해가지고 현장에서 잡아가지고 다리 질질 끌고 와가지고 이 여자를 돌로 칩시다, 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들은 대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돌을 누가 맞아야 됩니까? 간음하도록 조치하신 주님에 속한 그 아줌마를 쳐야 돼요? 아니면 개목줄 풀려가지고 주님과 관계없고, 나는 내 잘난 맛에 천당 가겠다고 하는 그 사람이 돌을 맞아야 돼요? 누가 돌을 맞아야 돼요? 바리새인들이 돌을 맞아야 돼요.

 

진즉에 죽어있으면서 지금 사는 짓을 오버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죽었는데 자꾸 살아있다고 오버하는 과도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전부 다, 민주당, 한국당 전부 다, 애국당까지 합해가지고, 세종시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집값 비싸게 받는 그 사람들 전부 다. 그 사람들은 자기 집 있고 문고리 있고 어딜 봐서 죽었냐 이 말이죠. 그들이 말하는 죽었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숨 끊어져가지고 아무 행동도 못하는 것을 죽었다고 하잖아요.

 

주님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주와 함께 있지 않은 그 공간이 죽음의 공간이에요. 악마가 살아 있잖아요. 그게 죽은 거예요. 죽었다는 말은 심판 중에 있다. 저주 중에 있다. 마치 뭐와 같이? 악마가 설쳐대고, 귀신이 설쳐대고, 마귀가 설쳐대는, 그 꼬락서니가 죽어있는 꼬락서니에요. 마귀는 전지전능하죠. 못하는 게 없어요. 그게 죽어있다니까요. 그게.

 

자,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그냥 빈말하신 게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지금 제자들은 못 알아들어요. 망상가니까. 멍하니 지금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그들은 살아있다고 여기고, 일단은 내가 안 죽고 살아있다고 여기고 산 사람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바짝 붙어요. 바짝 붙어서 예수님이 가는 곳이 뭐 서울, 대전 찍고 부산하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그 정도의 각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붙어있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그걸 믿음이라고 본 거예요. 자기가 자기에게 소속되어 있으면서. 계속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니까 여기서 필히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기대가 나옵니다. 예수님께 하는 말이 우리 열두 제자 중에 천국에 가면 누가 높겠습니까? 이런 거 하죠. 이게 뭐냐 하면 기대죠. 기대. 우리가 죽어있다는 증거를 어디서 찾는가? 우리가 은근히 기대가 있어요. 아침에 눈만 뜨면 항상 기대합니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우리는 맨날 롤러코스터를 타고 그걸 되풀이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자연은 누구 말을 들어요? 자연은 선악체계가 아니고 철저히 주님 앞에 매여 있죠. 자연은 보이지 않는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그럼 우리가 이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 속에 뭘 합니까? 기대를 하는 거예요. “내가 다음에 야유회 가는데 날씨야! 좀 봐줘. 날씨 좋아야 돼.” 이런 거. “내가 해외여행 가는데 비 오고 하면 안 돼. 망치는 거야.” 이런 거. 은근히 압력을 가하는 거예요. 압력을 가하는 이유는 그 여행지에서 본인이 어떻게 돼야 됩니까?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TV홈쇼핑에서 여행상품을 판다 이 말이죠. 헝가리하고 오스트리아를 가는데 10박15일에 450만원이 나와요. 좀 더 기다리면 더 싸게 나오거든요. 그럼 390까지 땡겨 가지고 계 모아서 가거든요. 그러면 다뉴브강 유람을 하는 거예요. 유람할 때 와! 밤경치가 끝내준단다. 밤경치가 끝내주는데, 그들이 본 것은 뭐냐 죽음이죠. 죽었죠. 그럼 죽으려고 여행한 겁니까? 그들의 기대 속에 뭐가 포함이 안 됐어요? 경치 좋다, 헝가리 야경이 어떻고, 다 좋은데 뭐는 빠져있습니까? 내가 그걸로 내 인생 종친다는 것은 빠져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누가 주관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 기대대로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이 내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 그것보다 더 큰 망상이 어디에 있어요? 그게 망상이 아닌가요? 하나님은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안 지킵니다. 하나님이 지키는 것은 아들의 죽음밖에,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만 보호하셔요. 아들의 죽음만. 왜? 그게 새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아들의 죽음만 보호합니다. 악마에 속한 것을 보호한다면 큰일 나죠. 악마를 보호하는 셈이 되니까. 악마로부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죽어 가는데, 하나님께서 “아담아, 괜찮아.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창세기 5장에서 악마의 후손들의 특징이 뭐였어요? 직업이 뭔가 나옵니까?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은 누굴 낳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죽었더라. 그 다음에 누굴 낳고? 죽었더라. 그러면 그 공통점을 뽑아서 줄로 한번 이어봅시다. 꽁지 잇듯이. 이어보면 무엇과 무엇의 연결이에요? 죽은 자들의 연결이 아닙니까? 그 속에 우리가 끼어들어가 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아직도 나이 90은 안 됐다마는 그래도 벌써 피부에 균열이 오고 온 천지가 아프기 시작하죠. 벌써 죽음의 소리가 가깝잖아요. 죽음이 많이 느껴지잖아요. 나는 청춘이고 싶은데 몸이 안 들어준다니까요. 청춘 같으면 계단에 오르락내리락 하고 싶은데, 왜 말을 안 듣지? 아이고, 관절이 아프고 뭔가 이상해. 내 기대치와 그렇게 현실이라고 여겼던 내 몸과 현실적으로 이게 아귀가 안 맞아요. 아귀가 안 맞는다니까요.

 

나이 많은 사람은 거울을 안 봐요. 왜? 너무 실망스러워서. 사진도 물론 안보고. 본인사진을 보면 너무 경악스러워서 눈 가리고 이럽니다. 뭐 귀신사진이 왜 끼어 있노? 맨날 말하는 게 그럴 리가 없어. 왜냐하면 나의 기대는 26살, 28살이에요. 내 기대는. 꿈속에 있는 내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청춘입니까? 그게 어디서 나옵니까? 꿈이죠.

 

지금 우리는 잠자도 꿈이지만 깨서도 꿈속에 있어요. 꿈속에. 죽음이 현실감이 없다니까요.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나 누구는 실감하고 있어요? 내 몸은 내 자아와 동떨어져서 내 몸은 “주인님,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라고 나한테 해요. 우리는 내 몸은 죽음을 아는데 이 자아는 고집스럽게 장밋빛, 또는 아름다운 빛으로 해가지고 자기를 포장하는 거예요.

 

뭐, 사랑하는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요? 그런 노래가 있어요. 보랏빛처럼~~♬ 맨날 나이 80넘어서 보랏빛이래. 살며시 다가와~~♬ 어떤 사람은 나이가 60이 되도, 나이 60된 사람은 꼴 보기 싫다고 안보고, 뭘 보느냐 하면은 방탄소년단 봐요. 나이 60이 됐어도 방탄소년단 보고 프로듀서101명의 프로를 봐요. 젊은 애들 나오거든요. 왜 60먹은 사람은 안 봐요? 늙은 꼬라지 꼴 보기 싫다고. 안 봐요. 아이고, 늙어빠진 게 화면에 나와 가지고. 좀 들어가지. 자기는 젊디젊은 애들 찾아요. 그리고 어디에 가도 같은 나이대하고 안 놀고 젊은 애들하고 놀아요. 문제는 젊은 애들이 밀어낸다는 것. 왜? 냄새난다고. 분명히 향수를 뿌렸는데 냄새가 커버가 안 되네. 그 죽음의 냄새를. 운구중이거든요. 썩은 냄새가 커버가 안 돼요.

 

주님의 언약은 제발 우리가 위선 떨지 말고 위장하지 말라는 겁니다. 모방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죽음이 주는 그 위세, 그 위력, 그 능력, 아무리 해도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그 죽음을 준다는 말은 곧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중심 또는 심장부, 핵심, 이거는 이미 정해진 거예요. 중심, 핵심, 중앙부, 이건 일종의 세상에 난 구멍이라면, 환상적인 자리에 구멍을 뚫었다면, 그 구멍 난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은 바로 내 살과 내 피를 바친 사건의 자리죠.

 

사도바울은 그걸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너는 구멍이 눈앞에 보이는데 너는 안 보이냐? 이거에요. 이 구멍만 없으면 이 세상의 현실이 현실 맞아요. 근데 현실에 구멍이 나버린 거예요. 그 구멍이 그냥 멀쩡한데 구멍이 난 게 아니고 그 구멍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졸지에 시커멓게 무슨 세상이 되느냐 하면은, 이게 죽음의 세계가 되었어요. 요한복음에서는 이 세상을 무슨 세상이라고 하느냐 하면 죽음의 세상이라고 하지 않고 이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어두움이라고. 어두움.

 

요한복음 9장에 나오잖아요. 본다고 하니까 너는 지금 어두움 속에 있다. 어두우니까 소경이죠. 깜깜한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주께서 데려옵니다. 데려왔을 때, 소경이 절차가 1단계 있고 2단계 있어요. 1단계는 뭐냐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줘요. 2단계는 뭐냐 하면은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1단계로서 소경이 온전히 벗어났다? 안 벗어났다? 눈 뜬 데서 소경이 벗어났어요? 안 벗어났어요.

 

문둥병 열 명이 있는데, 열 명이 문둥병이 다 나았거든요. 열 명이 나았지만, 이 사람들이 몸은 나았는데, 그 몸이 나아봐야 어디에 있습니까? 나아봐야 죽음에 이끌려가는 몸이니까. 돌아온 사람이 그중에서 한명이 있었어요. 그것도 사마리아 문둥병이 돌아와서 뭐냐 하면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일이 우리의 병을 고치러 온 것이 아니고 죄 사함을 주러 오신 거예요. 죄 사함.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할 때, 우리가 죽는 것이 힘이 빠져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뭐하기 때문에? 죄와 죽음과 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는 거예요. 따라서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되게 되면 우리는 숨이 끊어지는 죽음 정도가 아니고, 두 번째 죽음에 들어가요. 두 번째 죽음에. 두 번째 죽음을 잠시 한번 볼까요? 여러분이 아시지만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복음 21장 8절 한번 봅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 전부 다 뭡니까? 개목줄 풀린 자들이죠. 자기 혼자 독자적으로 사는 사람이죠. 이거 분명히 명심하셔야 됩니다.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이 말은 아담으로 인하여 물려받은,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성격이, 이 사람은 간음으로 나오고 이 사람은 우상숭배로 나오고 이 사람은 여러 가지 살인으로 나오는 거예요.

 

살인한 사람은 살인이 전공이 아니고, 나이 70넘어서 딴 게 또 튀어나올 수가 있고. 80넘으면 딴 게 또 튀어나올 수가 있어요. 그 사람뿐만 아니고, 조용하게 평생 동안 그야말로 점잖게 살았던 사람도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아담에게 물려받은 이런 죄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사망이라” 이것이 뭐다? 둘째사망이죠. 둘째사망.

 

자, 아까 하나님은 살아있는 하나님과 무슨 하나님이다? 죽은 하나님으로 둘로 나눠지죠. 그러면 언약된 성도는 뭡니까? 죄로 죽었던 성도 있고 또 무슨 성도? 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성도 있죠. 하나가 둘이 됐죠. 그러면 이 언약으로 인하여 지옥 간사람, 그 사람은 이 땅에서도 죽고 또 어디서도 죽고? 지옥에 가서 참여해서 죽고. 근데 그 죽는 모습이 우리가 아는, 언약이 없을 때에 아는, 환상 속의 현실 속에 아는 것은 숨 끊어진 것을 말하잖아요. 그럼 지옥 간 사람이 지금 숨 끊어져있습니까? 아니죠.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부자는 지옥에 가서 뭡니까? 뭐 말도 하고 아이고, 목마르다고 이러면서 살잖아요. 그게 숨 끊어진 거예요? 차라리 숨이 끊어졌으면 좋겠어요. 살다 힘들면 자살하면 그만이니까. 번개탄 값만 올라가겠다. 번개탄하고 펜션 찾아서, 인터넷 쳐서 같이 죽는 사람 찾아서. 죽는데 왜 또 같이 죽어? 외로웠던 모양이라. 계모임해서 같이 죽을 사람 불러가지고, “우리는 죽어서 좋은 데서 만납시다.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천사가 우리를 받아줄 거야.”하면서 이러는 거. 그 자체가 왜 환상입니까?

 

자, 오늘 본문 강의한대로, 그게 왜 환상이냐 하면은,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것은 모조리 다 환상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오늘 6월 25일의 삶속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빠지면 6월 25일은 지금 환상을 보내는 날짜에요. 이날 환상이에요. 눈만 뜨면 우리는 환상을 현실로 봅니다. 그렇다면 6월 25일에 우리가 공부했다면 이거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과 관련되어 있죠. 그것만이 환상이 아니고 실제에요. 왜? 십자가 복음은 성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의 현장이기 때문에. 기적의 현장이에요.

 

사람은 자기중심이지, 예수님 중심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기적을 받아버리면, 성령을 받아버리면, 분명히 내가 공부 참석했고 내가 뭐 했다 하는데, 사실은 누가 이렇게 조성한 분위기입니까? 주께서 복음 들으라고 준 분위기라면 모든 공로는 주님 것이고, 주께서 기획자요, 주최가 주님이고, 주최자가 벌인 그 마당에 우리는 그냥 참여할 뿐이죠. 뭐, 오늘 주의 뜻이 있어서 참석 못한 분도 계시지만. 이 이벤트에 참석 못한 분도 계시지만. 뭐, 그것도 주의 뜻이죠. 수련회 이벤트에 좀 참석하셔야 되는데.

 

그러나 아까 제가 뭐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기대하지 말라. 이 현실은 니 소속이 아니고 주님의 언약소속이기 때문에, 언약지지도 않은 니가 십자가마을 생각하고 하면 안 된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참석 안 할 수도 있죠. 말을 좀 잘해야 돼요. 주께서 허락하시면 참석 안 할 수도 있어요. 참석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집안에 누구 돌아가시면 못하죠. 모이기를 힘쓰라(히10:25)는 말씀이 있잖아요. 왜 그런 말씀을 했을까요? 그냥 계모이고 놀러가려고 모입니까? 말씀중심으로. 이게 연관성 있게 연결망이 유일하게 진짜 현실입니다. 주께서 사라진 모습으로 이 땅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접수하신 겁니다.

 

아까 자연은 누가 주관한다고 했습니까? 자연을 주님이 주관하시는 이유가 자연은 선악체계가 없거든요. 다시 말해서 악마의 술책이 자연한테는 손을 못 대요. 능력 밖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성도는 어디서 벗어난 사람이에요? 선악체계에서 벗어나죠. 성도가 선악체계를 벗어나면 성도는 마치 어린애 같고 자연의 일부 같죠. 일종의 하나의 소리, 세례요한처럼, 아엠보이스I'm voice 나는 그냥 소리에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요. 엘리야처럼. 증인의 소리거든요. 우리가 이 땅의 제사장이고 선지자니까. 소리기 때문에 자기 주체는 신경 쓰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나는 쇠하여 되고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흥해야 되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세상이 분명히 망상입니다. 망상인데, 무엇과 관련되어야 해요? 십자가의 복음과 관련 있는 일에 이미 소속되었다는 것. 그거는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이미 언약 속에, 예수님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 나의 하는 모든 일들이 복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렇다면 서로서로, 또는 제가 여러분에게 할 때에, 그 사람을 그냥 일반사람으로 봐야 됩니까? 복음이 장착된 사람으로 봐야 되겠어요? 복음이 장착된 사람으로 봐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그 사람을 이용할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왜? 그 사람이나 나나 전부 다 관속에, 보람상조가 만들어준 관속에. 지금 운구중이기 때문에. 어? 죽은 자인데 복음이 나오네? 아! 저사람 산 자 맞다. 이래 되는 거예요. 분명히 저 사람 자기 자랑 나와야 되고, 자기 자식 인물이 좋아가지고 잘생기고 인기가 좋다는 그런 자랑이 나와야 되는데, 어! 복음이 나온다니! 아, 그것도 제가 만든 환상이에요. 뭐, 자식 해봐야, 자기 인생 자기가 알지. 나는 몰라. 이런 식으로 복음이 나온다면 그 보이지 않는 거미줄 망이 있잖아요.

 

평소에는 안 보이는데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나와 주님과의 끈이, 개줄이 엮여져 있다는 것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티를 내게 될 때, 이걸 가지고 주께서 일으키는 전도요, 선교의 현장입니다. 따로 전도하려고 설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오늘 본문은 하나밖에 없어요. 세상중심은 이미 언약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핵심이 되고 중심부로 자리 잡아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주관하고 있다는 그 내용입니다.

 

자, 그렇다면 진도 한번 나가봅시다.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보이지 않죠. 이게 재미있는 게 하나의 바운더리(경계)라고 할 수도 있고 카테고리(범주)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나의 영역을 생각해봅시다. 이 영역 속에서 주님께서는 빠져나왔죠. 어떤 인간도 못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못 따라갔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놓쳐버린 이쪽 상태에서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죄가 돼요. 죄가 있는 곳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저주가 오게 되어 있어요. 이걸 무슨 사망? 둘째 사망이에요.

 

그렇다면 구원은 뭐냐 하면은요, 내가 구멍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이게 구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구멍은 없어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에 의하면 십자가사건은 그야말로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이고, 그걸 요한복음 3장에서는 바람같이 불 때만 불어요. 바람은 불 때는 불고 안 불 때는 안 부는 거거든요. 바람을 500그램 주세요, 한 근 주세요, 이렇게 시장에서 살 수가 없어요. 바람은. 사건이라니까요. 사건 현장에 가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살인자가 죽인 시체가 있다. 죽으면 시체를 그냥 놔둡니까? 빨리 치워서, 운구해서 처리해버리면 그 다음에 가면 그냥 풀만 자라죠. 그 사건현장에는 사건이 없어요. 그냥 사건의 현장일 뿐이죠. 주님께서 나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죄로 보거든요. 죄로 보면, 나의 죄에 성령의 바람이 불게 되면 나는 바깥에 있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서 이 땅에 관여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존재가 아니고 뭐다? 하나의 사건이죠. 이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뭐냐, 나는 죽었고, 내 존재는 죽었고 내 안에 주님은 사건으로 살아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을 이론으로 알려고 하면 이론도 바람처럼 날아가 버려요. 그럼 이론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 땅이 진짜 그런지를, 내일 또 6월 26일에 살아있으면 살겠죠.

 

6월 26일에 또 새로운 사건이 부딪혀요. 근데 그 사건은 남들이 보면 그냥 사람 만나는 것이고, 다투는 것이고, 돈 한 푼 아끼겠다는 일이지만, 성도 입장에서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복음을 복음대로, 주님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 현장에서 우리는 뭘 나타냅니까? 나는 이 정도로 죄인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을 알게 만들죠. 그때는 다시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딴따라~ 라라라~ 라라라~~♬ 한번 틀면 마음이 화하죠. 왜냐하면 그거는 선악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남한테 안 채이고 이기려고 하는 것은 뭡니까? 내가 선하기 때문에 내가 그걸 가질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내가 나쁜 짓 했으면, 그걸 탐내면 나는 욕심쟁이인데 나는 착하기 때문에, 복을 받아도 된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그거는 망상 속에 있는 거예요. 나를 좋게 본다는 자체가 망상이에요. 그럼 그만큼 우리가 마음이 높아졌죠. 교만해져있는 거예요. 교만해져있으니까, 이거는 그야말로 악신 들린 사람의 티를 거의 다 내고 있는 겁니다. 교만해져있으니까, 남들이 내 교만의 눈높이에 안 맞추니까, 화를 누구한테 푼다? 사람한테 풀든지 안 그러면 개한테 풀든지. 이게 나 피곤한데 말도 안 듣고.. 발로 한번 차고. 이래 되는 거예요.

 

근데 그 자체가 나중에 성령이 와서 가만히 소급해서 생각해보니까, 죄로 죽은 자가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몇 살까지? 22살 때까지. 아까 예를 든 청년에 의하면. 22살까지 죄만 지어왔던 거예요. 내 현실에 주님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내 망상에 현실적인 주님이 들어오신 거예요. 따라서 나에게 있던 것이 망상이라고 여길 때 그 사람은 주와 함께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참 이론을 이야기하니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뭘 보호하신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보호하신다.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고, 그 죄인이 됨으로서 우리는 어떤 라인에 속했다? 죄가 이미 의인이 되는 그 전개과정에 이미 우리가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 라인 자체가.

 

그 뜻을 좀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야구 어떻게 하시는지 아시죠? 야구. 방망이 들고 공치고 자기 집에 가면 안 되죠. 첫 번째 베이스 돌고 두 번째 베이스 돌고 세 번째 베이스 돌면 1점 나는 것, 이게 야구거든요. 그런데 야구 룰이 있는데 전부 다 야구를 하러 왔다 이 말이죠. 누가? 천사들이. 누가?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야구하려고 왔는데, 이 사람이 1루까지 가면서, 그냥 가면 될 건데 개를 들고 간다. 그러면 이 사람은 야구의 목표와 목적에 위배가 되죠. 개를 들고 어슬렁대면 지금 야구를 하는 건지 공원에 놀러온 건지 분간이 안 되죠.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해요? 너 지금 야구하는 중이라고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유니폼을 입히고, 개는 집에 돌려보내고, 죽으라고 뛰든지, 그러니까 야구 룰, 주께서는 야구 룰에 맞추도록 살게 하겠죠.

 

그 룰을, 오늘 본문에서는 언약인데, 언약의 완성이니까 무슨 언약? 새 언약. 두자로 하면 신약, 새 언약의 룰에 맞추게 하는 거예요. 목적을, 주님이 정해놓은 목적에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끼어 맞추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천국이 야구라면 우리는 뭘 증거 해야 되는가?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 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입장에 있다? 우리는 죄밖에 없었는데 주님의 공로로 의인되었다. 이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역할, 존재의 의미에요. 아시겠죠?

 

자, 저녁때에 저녁하기 위해서 시장을 갑니다. 갔는데, 아무리 봐도 중국산 같아. 중국산인데 국산이라고 우기면서 두 배 값을 다 받습니다. 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야구를 응용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까 뭡니까? 주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뭐로 나타난다? 죄인으로 나타난다. 죄가 뭡니까? 내 중심이죠. 그러면 나는 뻔히 중국산인 것을 아는데 상인이 두 배 값을 받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싸워야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죄가 생산되어야 하는 거예요. 싸우는 목적은 뭡니까? 내가 필요한 에너지, 돈은 적게 들고 내 생존은 유리하게 들고.

 

다시 말해서 나의 유익과 나의 생존에 유리하게, 실익이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싸우고 집에 돌아와 가지고, ‘아무것도 아닌데, 또 지옥 가는 귀신하고 싸웠구나.’라고 알 때, 그건 누구한테만 공로를 돌려요? 주께서 악덕상인을 만나게 해주셨구나! 왜? 그게 야구니까. 그게 새 언약이니까. 자, 새 언약은 그냥 곱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네 죄 때문에 내가 죽는다는 겁니다.

 

죄 때문에 죽는다면 우리는 죄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죽으신 역할은 누구만 해야 돼요? 우리 흉내는 의미 없어요. 누구만? 주님만 죽으셔야 돼요.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만 보호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는 그 보호에 대해서 우리의 그 많은 의와 의미를 그분에게 몽땅 다 양도해야죠. 내 존재 의미를 그분에게 양도해야 돼요. 양도할 때 그냥 양도하지 않고, 일단 왜 내가 양도해야 되는가를 이유를 알아야 되겠죠.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주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보시기에 나보다 누가 더 소중하다? 주님이 더 소중한 거예요. 나보다도.

 

그래서 시편 51편에 사도바울이 그것을 알고, 나의 죄를 나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아, 이거 좀 뻔뻔스럽지 않습니까? 자기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까지 죽였는데 뻔뻔스럽게 뭐라고 합니까? 나의 죄를 나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왜? 그게 주께서 하시는 일이잖아요. 내가 그 전부터 밧세바를 안 것도 아니에요. 밧세바가 뒷모습이 뚱뚱해보세요. 범하라고 해도 안 범합니다. 재수 없다고 가라고 합니다. 너무나 욕정을 불나게 아름다웠어요. 누가 아름답게 했어요? 주께서 아름답게 하셨어요.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것이 다윗의 취미가 아닙니다.

 

하필 나의 행복한 제2의 삶에 누가 거추장스러워요? 고유정의 전남편. 전남편이 걸리니까 이걸 죽여 버린 거예요. 그리고 죽여 놓고도, 왕이 살인하면 안 되기 때문에 쓱 밀어 넣는 거예요. 제일 위험한 곳에 보내가지고. 누가 배후에서 시키지 않고 저절로 죽은 것처럼 만들었거든요. 일이 성사가 잘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계획대로? 잘 됐죠. 잘 된 게 그게 뭐냐 하면은 내 죄를, 나라는 그 환상을, 망상을 깨기 위한 주님의 사건의 연쇄사건이에요. 그래서 내가 잘하는 짓이 나를 망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하는 짓을 했어요. 왜? 망치기 위해서. 망쳐봐야 내 착각과 내 중심의 현실이 망상이라는 것을, 여기서 벗어날 수가 있거든요.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동그라미를 하나의 공이라고 합시다. 이 공에 하나의 구멍이 났습니다. 이 구멍은 찾을 수가 없어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주께서, 성령께서 우발적으로 일으키는 곳곳이 뭐냐 하면은 구멍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는 구멍이죠. 나게 되면,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을 시키죠. 다른 사람을 자기가 잘난 척하는데, 우리만큼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착하고 싶어도 내 악이 발목을 잡고 니가 악한 자로 증명을 해줍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 죄인 같으면 뭘 하지를 않는다? 복을 기대해서는 안 되죠. 죄인 같으면 나를 위한 행복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죄인인 주제가, 뭔가 내가 거창하게 잘 되는 기대를 해서도 안 되죠. 그 기대를 주께서는 내 기대대로 세상이 안 돌아가게 해주십니다. 내 뜻대로 안 돌아가게 해주셔가지고, 안 돌아가도 너는 괜찮아! 그런 식으로 우리를 위로해주죠.

 

왜냐하면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이기 때문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오히려 나를 망치고 위험에 빠지게 만들죠. 계속해서 나를 망상가로 만들기 때문에, 자기가 마치 훌륭한 사람인줄 착각하게 만드니까. 이것은 자기 증거가 되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십자가를 위해서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기도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사라지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우리가 망상인 것을 사라지신 주님 앞에서, 그 사건 앞에서 비로소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112강 마태복음26장 26-28절(운구 중)20190625-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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