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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5 11:46:39 조회 : 109         
32강-엡 4장 4-6절(하나)190714-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32강-엡 4장 4-6절(하나)1907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4-6절입니다. 신약성경 313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도가 이런 편지를 쓰고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도의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사도의 일방적인 주장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계시라고 하지요. 사도의 이런 자기 의견이 일반 보통 아담의 후손들이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같은 생각이라면 사도는 계시라는 말을 하지를 않습니다.

“너희들 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타고났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이 아는 생각을 내가 대표로 이야기해줄게.” 이러면 그것은 계시 아니지요. 누가 사도를 찾아올 이유도 없고 찾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가,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부르심도 하나’라고 이야기할 때는, “너희들이 기를 쓰고,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그래. 나보고 욕해라.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라고. 욕해.”

그런 일방적인 생각이 예수님의 계시라면 어떻게 할 건데요?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서,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라는 이 말씀을 우리 식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성품가지고 따라잡으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계시가 아닙니다. 사도가 이렇게,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라고 이야기할 때는, 사도바울이 옛날에, 예수님 찾아오기 전에 자기가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어요.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하나’라는 것.

그런데 우리가 함부로 이것을 흉내 낼 생각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몸이 하나요, 성령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는 그 ‘하나’라는 이야기를 우리가 알려면, 그 ‘몸도 하나요, 성령이 하나’라는 그 말의 반대말이 무엇이냐를 먼저 아시면 이해하기 굉장히 쉬울 겁니다. 반대말이 뭐냐 하면, 나의 윤리, 나의 도덕, 나의 최선도 하나가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도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정답은 뭐냐 하면, 내게로 돌아오는 것은 무조건 정답이 아니에요. 마지막 최종적으로. 내 믿음, 내 소망을 검증해주는 것, 그것을 인정해주는 쪽으로 돌아온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나의 평소의 본성, 본인들의 평소의 본심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계시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사도가 ‘…… 하나요, ……하나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에게 알려준 것인데 몸도, 성령도, 부르심도, 주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는 일의 형식이라면 그 내용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 내용이 하나이기 때문에 형식도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죄도 하나요, 의도 하나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두 사람이 있다면 그 두 사람이 각각 지은 과거가 다르기 때문에 죄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쁜 사람은 교도소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교소도 가지 마.’ 벌써 이것은 다르잖아요. 교도소 가는 사람은 우리보다 죄가 더 많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 죄는 하나가 아니고 벌써 다수가 되겠지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거기에 대한 각자에 해당되는 그 죄, 그 의, 그걸 담으려는 자신의 형식, 그 모든 것도 각자 각자가 하나기 때문에 오늘 본문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라는 이것이 성립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전체가 하나라고 언급할 때는 그러한 계기가 있는 겁니다. 그 계기가 뭐냐 하면, 너희들이 각자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과연 잘났을까? 잘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부당할 요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겁니다. 개별성, 개인성이 죄가 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계시받기 전까지는 개별성, ‘나 하나 착실하게 살면 되지 않느냐?’ 혹은 “나는 내 할 도리 다 했습니다. 목사님!” 이런 것. “주님, 저는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별성이 죄가 될 줄이야 누가 상상했겠어요? 아무도 상상 못한 거예요.

남편과 이혼하고 고생고생하면서 열심히 애 셋 잘 키웠다. 누가 이걸 죄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제가 두 개의 문장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릴 테니까 이것이 죄가 되는 이유를 여러분이 속으로 생각해 보세요. “바닷가에서 해파리에 물렸을 때는 알코올을 바르지 마시고 바닷물로 씻으세요.”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죄입니까?

우리는 평소 삶에 있어서 이것은 삶의 팁이고 지혜지 죄라는 의식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안동에 숙취 제거하는 음료공장을 설립한답니다.” 죄입니까? 이걸 죄라고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무딘 채로,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채 우리는 평소에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죄라는 것은, 내가 나쁘다고 생각할 그 때가 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선악적으로. 그러나 그 선악적인 기준자체를 천국에서는 안 받아준다면 우리의 그 기준자체가 수정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논하는 선악, 잘못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든, “바닷가에서 해파리 잡을 때는 이런 지혜를 가져라.” 그런 것도 몰랐다든지, 또는 숙취제거음료공장이 있든지 없든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개별적인 이익과 개별적인 생각을 갖고 산다는 것이 죄라고 규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대리자를 보내서 그 대리자를 통해서 일괄적인 죄를 알려주는 사건을 유발하면 돼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이런 것 너희는 몰랐지롱?” 이런 것. “죽었다 깨나도 이런 것은 몰랐지?” 하는 것. 그게 십자가사건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걸 쫙 깔아놓았는데 우리는 그걸 무슨 이유로 발견 못하지요.

로마서 4장 17절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방금 제가 이야기하는 문장과 하나의 사례로 연결시켜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대리자를 보내서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개별적으로 이미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공시하는 일을 하셨다고 제가 방금 언급해 드렸습니다.

죄가 하나라면 이것은 곧 뭐를 의미하느냐 하면, 의도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리고 죄도 하나, 의도 하나라는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이 세상의 형식들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그런 거예요. 이러한 발언을 할 때는 철저하게 인간의 개별성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뭐라고 나와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대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왔어요. 그걸 오늘 본문 식으로 하면, 너희를 부르심이 하나라는 말이지요. 부르심이 하나. 불러주심이 하나가 되려면, 아브라함 불렀고, 이삭 불렀고, 야곱 불렀고. 그러면 하나가 아니고 세 명이 되는 거예요. 분명히 그렇지요?

만약에 내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면……, 설교 하는 것도 겁나요. 또 잊어버릴까 겁나는데요. 어떤 정답은 반드시 나에게는 와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나는 부르심을 입었어요, 하는 것은 땡! 그것은 정답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브라함 부르고, 이삭 부르고, 야곱 부르심이 세 가지가 됩니다. 부르심이 세 가지, 3이 아니고 1이 되려면, 아브라함 부르시고, 이삭 부르시고, 야곱 불렀다면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엘리야 + 이사야 = 예수님’ 이에요.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가 되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 짐으로서 죄가 하나인 것을 알려줬다면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이것은 ‘죄인 + 죄인 + 죄인’이 되는 거예요. ‘실패자 + 실패자 + 실패자’ 다르게 하면, 형식 빼버리면 ‘죄 + 죄 + 죄 = 죄’ 그게 십자가에요. 성경 그렇게 안보시지요? 성경 그렇게 볼 줄 모르지요? 왜냐하면 개별자가 이익 얻기 위해서 성경 보잖아요.

내가 예수 믿어 천당 가면 좋겠다고. 또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요. 내가 구원받았다. 내가 천당 간다. 개인으로 돌아와 버려요. 우리나라의 큰 교회, 성락교회가 교인 수 5만 명인데, 김 기동 목사가 횡령했다고들 하는데요. 도대체 평소에 그 사람이 교인 5만 명을 어떻게 통치했는가? 그 사람 설교 들을 필요도 없는데 설교의 한 부분이 그 사람 입에서 나왔어요.

“너희들 그렇게 하면 복 못 받는다.” 이게 5만 명을 통치한 그 힘이었습니다. 그렇게 목사한테 대들면 너는 복을 못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5만 명이 왔을 때 그 사람이 온 이유가 드러납니다. 뭡니까? 복 받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복 받기 위해서 교회 왔으니까 목사는 복 주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이것은 그 교회의 개별성이지요.

복 받는다는 것은 개별적으로 복 받는 거예요. 도대체 개별적인 것을 가지고 정답으로 본 겁니다. 성락교회가 그렇겠어요? 성락교회가 어디 출신입니까? 한국교회 출신이잖아요. 그 나물에 그 밥이잖아요. 거기서 나온 거예요, 전부 다. 실익 없이, 이익 없이 교회 안 나온다. 그들이 교회 나올 때의 마음가짐이 그래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다 갔는지. 그들은 자기 개별성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대리자 아브라함을 보내시고 그에게 자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자식을 얻게 만들어놓고 네 몸이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일러주고 죽은 자에서 이삭을 낳게 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 대리자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른 옆에 있는 사람들이 “따라 오려면 따라와 봐. 흉내 내려면 흉내 내 봐. 흉내 안 되지? 못 따라 오겠지? 네가 감당할 수 없지?”

나의 개인성이 죄다, 내가 내 생각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네가 아무리 노력하고 모방해도 그것을 죄라고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죄인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대리자인 아브라함이 보여준 겁니다. 십자가를 믿는다고요? 십자가 믿는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본인이잖아요. 그러면 또 본인으로 돌아왔잖아요. 또 본인으로.

죄에서 의로 나가야 되는데 죄가 계속 죄안에서 맴돌고 있는 겁니다. 자기 메아리에 갇혀 있는 거예요.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는지 모릅니다만 저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동굴이나 그런데서 기도해 본적이 있어요. 남이 하라고 하니까 했지요. 해보니까 통성기도를 하면 할수록 내 입에서 나온 보이스, 소리가 도로 나에게 자꾸 입력이 돼요.

그러면 자꾸 나는 뭐가 되느냐? 위대한 기도의 성자가 되어버렸어요. 붕 떴으니까. 메아리가 쳤으니까요. 내가 내 안에서 노는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종교도 하나요, 그게 내 종교에요. 내 종교 안에 푹 잠겨서 살아온 겁니다. 보통 문제 아닙니다. 벗어날 길이 없지요. 주님께서 예수님을 죄로, 하나로 묶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비로소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 다음에 의인은 어디 있느냐? 의인은, 죄에서 의가 될 수 없어요.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대리자를 보내셔서, 물론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이신데, 뭘 했느냐 하면, 의라는 것은 너희가 따라오려고 해도 따라올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있는 거예요. 다른 세계에 있어버리면 그 세계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을 받아서 그 쪽 세계에 있다면 그쪽 세계에서 이쪽세계, 자기가 떠나온 세계를 보자는 말이지요. 그 세계가 다양한 것이 아니고 전체가 통합해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1과 1의 만남이에요. 그 쪽도 하나에요. 이미 하나 된 세계에 오니까 저쪽에서 다수라고 우기는데 다수가 아니고 하나에요.

우리는 각자각자 다르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다른 것이 아니고 동일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은 같은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같은 방향. 어떤 버스? 만원버스. 만원버스, 같은 코스인 사람들은 거기 다 탑니다. 운전사는 대목 본다고 태우고 또 태웁니다. 만원버스에요.

갑자기 옛날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나네요. 얼마나 비좁은지. 그 때는 버스가 왜 그렇게 없었는지. 가방에서 김칫국물 다 흐르고요. 안내양 모자는 어디로 날라 가버리고 “오라이!” 하기 바쁘고. 차벽 두드리고, 배치기 해서 안으로 밀어 넣기 바쁘고요. 이젠 그만 태울지 알았는데 또 태워요.

그러면 버스 안은 이미 아우성이에요. 아우성 사태. 그걸 두자로 지옥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옥은 그냥 관람하는 데가 아닙니다. 관광하는 데가 아니에요. 그 자체가 아우성이에요. 왜 아우성이냐?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 인간들을 거기에 다 모아놨기 때문에. 생각이 똑같아요.

“이 버스 어디 갑니까?” “저쪽으로 갑니다.” “좀 탑시다.” “비좁은 데요” “그래도 탑시다.” 왜? 방향이 같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만의 영광과 자기만의 출세를 위해서 똑같은 만원버스에 아우성을 지르면서도 태우고 또 태우고 또 탑니다. 사고방식이 어찌 그리 같은지요. 꼭 시편 같아요. 인간의 생각이 어찌 그리 같은지요? 똑같아요, 똑같아.

나만 살겠다는 그 삶의 의지. 이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똑같아요. 최고가 되겠다는 사고방식. 교회 만들어도 마찬가지에요. 주께서는 교회를 부수어서 말씀을 살리고자 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이 똑같은데 그 똑같은 것을 동일성이라 합니다. 동질성, 동일성.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의식의 동질성으로 아브라함을 이해 못하듯이 우리는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이 동질성으로 저쪽세계의 동질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못되는 겁니다. 딱 하나가 되겠다는 것, 모든 이익이 나에게 최종적으로 돌아와야 마땅하다는 그 나 위주의 동질성. 그것은 내 생각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저쪽 생각도 다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보십니다.

‘이 쓰레기 어디 치울꼬?’ 쓰레기를 치우는 그 장소가 지옥이기 때문에 지옥에 감으로서 지옥이 무섭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쓰레기라 하는 것을 미리 알게 해주시는 거예요. 이번 이사야 수련회 하는데 첫 시간 강의 제목을 미리 정해봤습니다. ‘하나님의 욕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짐승 다루듯이 다뤄요.

“소는 주인을 알건만 소 같지도 못한 인간들아. 내가 너에게 욕하고 그리고 심판한다.” 성경을 펼칠 때 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는 욕설로 들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성경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네 몸 중심으로 네가 하나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그것은 네가 지금 만원버스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다.”

아우성치는 그 이유가 있어요. 내 몸은 내가 절대자고 내가 최고이고 싶은데 환경이 안받쳐주니까 아우성치는 거지요. 인간이 아침에 눈만 뜨면 하는 일이 뭐냐? 내부적인 아우성을 바깥으로 소리 지르고 때로는 그것을 억지로 누르는 그 일 외에는 하루 일과가 없습니다. 모든 일과는 아우성이에요. 여러분, 전에 이야기했지만 박카스광고를 언급해 드렸지요.

여직원이 피곤해서 책상에 엎어져 있습니다. 사장님이 박카스 한 박스가 가지고 와서 “박카스 먹고 힘내라.” 하니까 여직원이 하는 말이 “사장님! 박카스도 좋지만 직원 하나 더 뽑아주세요.” 하는 그 광고거든요.

그렇게 힘든데 왜 그 직장에서 사표를 안내느냐? 사는 것 자체가 아우성이기 때문에 박카스 한 병 먹고 또 잔업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직원 뽑을 생각은 없고. 그 CF의 마지막장면이 뭐냐? 그 다음날 되니까 사장님이 박카스 또 사들고 왔어요. 직원은 안 뽑아주고 박카스만 또 들고 온 거예요. 사는 것 자체가 아우성이에요. 금요철야 기도 한 번 가보세요. 아우성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죽은 몸을 주시고,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자식을 낳도록 해서, 로마서 4장 22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했어요.

하나님의 죄와 의는 누가 와서 알려주느냐?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그 행위, 하시는 그 역할, 그 일을 통해서 우리자신이 전혀 천국과 동떨어진, 하나님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다 보여주신 거예요. 그게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 대한 욕설이에요. “알기는 네가 개뿔을 알아?” 하는 욕설이라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는 자기의 본성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이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밖에 없는 죄, 하나밖에 없는 의, 이것을 이 세상에다 가시적으로 주께서 보여주는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이미 사도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입장에서 바라볼 때 세상은 하나가 되겠지요. 인간의 모든 다수는 다수가 아니고, 다양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될 때 여기 본문 6절에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어려워요.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말이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과연 그냥 계시는가를 한 번 생각해 봤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그냥 계시겠는가? 그냥 가만히, 자기 몸을 그냥 가만히 부처처럼 두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무슨 활동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계시면서 그냥 계시지 않고 어떤 활동을 할 것인데 그 활동하시는 취지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하나로 묶는 거예요.

다수라고 여기는 이 인간세계를 하나로 묶었을 때 그 묶은 배후세력을 노출시키고 들춰내는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만유에 계시면서 우리 배후의 실체를 등장시키는 쪽으로 주께서는 일을 하시면서 만유 가운데 계셔요. 만유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십니까? 그러면 매일매일 계신다. 그것도 어려우면, 아니 계신 곳이 없다.

화장실에도, 피서지에도 아니 계신 곳이 없는 거예요. 아니 계신 곳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아무리 교회를 버리고, 복음을 버리고, 자기 맘대로 설치거나 싸대도 결국은 누구한테 호출을 당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 주님 앞에 호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주님은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에 빠져나갈 곳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것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모든 것을 돈 벌기 위한 산업시설, 즐기기 위한 편의시설, 위락시설, 또 택지조성, 아기자기하게 이렇게 꾸미면서 살아왔어요. 그걸 우리가 문명이라고 하지요. 인간이 이 땅에서 움직거리는 것은 개인적인 편의시설을 위해서, 편하게 살고 싶어서 모든 것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불바다가 되는데요. 무슨 편의시설이 어디 있어요? 산업시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불바다 되고 결국은 전부 다 “이리 와? 너희는 다 못 빠져나가.” 결국 주님 앞에 호출당합니다. 호출당해서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는데 동의 안하고 순복 안한다고 해서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 사람들 갈 데 없습니다. 갈 곳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자기 취미생활 하고 즐기기 위해서 사는 모양인데 가봤자 다 그 바닥이 그 바닥이에요. 만유 안에 계시는 주님의 가슴팍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어차피 그 동네는 하나의 동네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허용을 하는 이유는, 네 몸의 본성을 그렇게 확장하고 또 확장해 봐야, 의미를 부여해봤자 그것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맨 날 다수로, 다수로 갈라져도 결국 하나로 모이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묻는 것이 뭐냐 하면, 너의 배후가 누구야, 하는 그걸 묻는 거거든요. 이쪽이 하나기 때문에.

이쪽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하나로 뭉친 그 배후자가 누구냐 하면 주님이잖아요. 그러면 이쪽동네를 그대로 닮았다는 말이지요.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다수라 하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말이지요. 그 배후자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배후자가 있어서 인간들은 그 배후자의 성격을 닮아서 나는 나다, 라고 최종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있어야 정답이라고, 진리라고 우기거든요.

주님께서는 “바지사장 말고 진짜 사장 나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맨 날 바지사장이에요. 나에게 그걸 지시한 사람이 누구냐 이 말이지요. 아까 그 문장 다시 하면 “바닷가에서 피서하다가 해파리 물렸을 때는 알코올로 씻지 마시고 비눗물로 씻으세요.”라는 마음을 들게 하는 배후자가 누구냐 그 말입니다.

왜 그런 발상이 옳다고 이야기하느냐? 네가 알코올로 씻지 않고 바닷물로 씻으면 너는 건강해진다. 결국 너는 건강해진다. 최종적으로 나의 실 이익으로, 진짜 이익으로 돌아오거든요. 그렇게 나의 이익으로만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행동을 하게 만든 그 배후자가 누구냐? 진짜 사장이 누구냐? 그것은 마귀지요. 악마지요.

지금 그런 관점에서 이 본문이 쓰인 겁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지금 한국에 대한 수출을 규제하는 일본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드를 견제하려는 중국과 싸우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성도의 싸움은 뭐냐 하면, 육과 혈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자에요. 공중권세 잡은 자는 모든 다수, 2백 몇 개의 나라를 전부 다 하나로 통합시킨 거예요. 다니엘서는 그걸 가지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사도요한도 못지않은 이야기를 해요. 요한 1서 2장 16절에 보면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이라는 영역과 아버지라는 영역과 단절되어 있고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느냐 하면, 세상에서 살고 있거든요. 세상에 적합한, 아주 세상에 적합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그런 존재가 너라는 겁니다. 그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쓰레기통에서 살아온 거예요. 자식 세 명이 있다면 쓰레기통에서 자식 세 명을 쓰레기로 만든 거예요. 애가 네 명이다. 그러면 네 명 다 쓰레기 만든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재주밖에는 없어요. 쓰레기로 태어난 인간쓰레기로 살 재주밖에 없어요. 다른 재주가 없다니까요. 나에게 무엇이 이익일까?

안동에 숙취제거음료공장 세운다고 하면 대구 사람이 “그래서 뭐? 그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데?”라고 하지만 안동사람은 안동에 있는 사람은 난리에요. 왜? 땅값 오른다고. 자기 동네 공장 세우면 땅 값이 오른다고. 그러니까 이게 개별자라니까요. 똑같은 사건 하나 있어도 “우리 동네에 공장 들어선다. 우리 동네 발달한대.”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남들에게.

이게 자랑이잖아요. 이게 무슨 자랑입니까? 육신의 자랑, 안목의 자랑, 이생의 자랑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자랑 외에는 할 줄 아는 재주가 우리한테 없는 거예요. “우리 교회는 사법고시 합격한 사람이 많다.” 그 이야기를 왜 해요? “우리교회 청년들 중에 변호사 합격 세 명 되었다.”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우리 교회 여 집사들 중에서 네 명이 이혼했다.” 그 이야기는 안할 것 아닙니까? 우리의 의식자체가 나에게 이익이 되면 의고 나에게 손해가 되면 죄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 배후에서 누가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그 인식이 옳다고, 그게 자연스럽다고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그것은 만원버스에서 방향이 동일한 방향이에요.

사람들이 다 타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서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은 멸망의 길이다. 주의 뜻은 뭐냐 하면, “가거라. 그쪽으로” 그런 뜻이에요.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가거라. 왜?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넓은 길 아니면 안가는 거예요. 왜? 사람은 남들에게 배운 대로 하고 의식이, 생각하는 것이 동일하게 때문에 합류하려는 생각이 강해요.

좁은 길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유일한 생명의 길은 예수님 간 그 길밖에 없으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내 길 가려하면 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해야 돼. 안되지? 안될 거야 아마.” 주님께서, 인간배후에 보이지 않는 악마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대리자는 어떻게 실시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합니다.

세상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져요. 아, “세상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레미야니, 선지자니 그렇게들 누구라 합디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 다수를 하나로 응결시키고 모으는 방법은 질문자체가 예수님 자체에 관심을 두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관심 없지요 우리는. 그러니까 헛소리 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네가 아는 것이 아니야. 너는 세상과 다를 바 없어. 내가 알게 한 것은 하나님이 베드로 너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시면서 결별수순에 들어가십니다. 제자들과의 결별에 들어가십니다. 각자도생. 너는 네 길 가고 예수님 나는 나 홀로 가야 될 길을 간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설교가 이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절망적이겠지요. 우리의 사고방식은 ‘만원버스라도 좋다. 아니 만원버스라서 진리답다. 나는 그 진리를 외면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진리일거야.’라는 생각으로 우리는 양육 받았기 때문에 남들이 많이 가는 그것이 멸망의 길인 줄을 감히 생각을 못한 거지요.

우리의 의식과 옆에 있는 의식이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요. 육신이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거 못 차지해서 환장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동일하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성령이 온다면 이 노선, 이 만원버스에서 내리게 합니다. 그거 타지 말라. 멸망 가는 길이다. 다른 차를 타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 다른 차가 뭐냐? 다른 버스가 뭐냐? 고린도후서 3장 12절에서 18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얼굴에 수건 덮고 오는 대목이 나와요. 이 대목에서 먼저 제가 언급해야 될 것은 출애굽기 33장을 언급해야 돼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되 얼굴을 못 봤다는 그 이야기에요. 그런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언제 느끼느냐? 다리 붙잡고 있을 때는 사랑한다는 것을 못 느껴요. 언제 느끼느냐 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시선을 같이 마주칠 때 그 때 사랑을 느끼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보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3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는데 사람들은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영광스러워서.

사람들이 자기가 중요하니까 자기한테 관심을 둘 때는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만 그 사람에게 잠시 얼굴을 돌려줘요. 이것은 뭐냐? 자기가 제로가 되기 싫다, 0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최종적으로 나의 1을 붙잡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의 영광, 이 세상에서 보지도 못한 어떤 굉장한 영광을 모세가 얼굴에 지니고 내려왔을 때 우리가 지금 모세의 얼굴을 보고 있다고 칩시다.

못 보는데 그 영광의 얼굴을 감히 봉사될 각오를 하고 보고 있다고 칩시다. 그 순간 우리는 제로가 돼요. 우리가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가 되어 버려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버려요. 저쪽이 내 1을 가져가 버리고 내 1을 저쪽의 1이 대신해 버리니까 시선이 마주치는 겁니다.

여러분이 부부사이에서 언제 가장 정다울 때인가요? 바로 얼굴과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에요. “여보, 오늘 직장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물으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류현진이 공 던지는 것 본다고 “별거 없었어.” 지금 얼굴을 안 마주치고 있다고요. ‘너는 설거지나 해라. 나는 야구나 볼란다.’ 그거 아닙니까? 독자적인 1을 고수하는 거예요.

교회 와서 말씀을 보면서 내가 제로(0)로 지워져야 되는데 교회 와서 자기 1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오늘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이번 주일 내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고 있어요. 시선을 안 마주치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는. 말을 할 때 이렇게 (다른데) 쳐다보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공무원들이에요. 가만있는 공무원들 욕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경찰공무원들. 절대로 안 봅니다. “뭐 때문에 왔습니까?” 안와도 될 일을 왜 왔습니까, 하는 뜻이에요. “왜 왔습니까?” ‘귀찮아 죽겠다.’ 속으로 하지요. 겉으로는 말은 안하지만. “예, 예. 알았어요. 서류접수 되면 수사할게요.” 이런 식으로.

지금 우리나라 십만 경찰 분들을 욕보이는 듯한데, 보통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는 아니고 일부가 그렇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거의 대부분이 그래요. 죄수를 다루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의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한 사람이 오지를 않아요. 전부 다 어린양 하는 사람들만 오거든요. 물론 돈 들고 오지만.

어린양 하면서 자기 위로해 달라는 사람들만 오니까 짜증나는 거예요. 돈 버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특히 정신병은 더 하지요. 미쳐서 오는데요. 나 하나를 지워버리려면 강력한 1이 나를 대신하는 1 앞에서 우리는 그동안 내가 추구하던 나의 영광이 죽처럼 그냥 녹아져버려야 돼요.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려서 없어져야 돼요.

주님만 계시면 나 같은 인간은 없어져도 괜찮아요. 주님 위해서라면 나를 어떻게 써먹어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이게 바로 시선 맞추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서, 옛날에는 모세가 수건을 써서 그 영광을 못 봤다. 보면 죽으니까. 그러면 지금은 뭐냐? 지금은 그리스도,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자유함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내가 나의 1로서 나를 관리 안 해도 되고 내가 내 1을 지키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제가 우연히 유-튜브 보니 제 설교에 어떤 사람이 4개월 전에 댓글을 걸어놨어요. <간음하지 말라> 하는 설교였어요. 2015년도에 했던 설교였습니다. 그걸 보신 분이 4개월 전에 댓글을 달아놨어요.

“목사님의 설교에 억지가 있습니다. 죄를 자랑하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죄 용서받음을 자랑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댓글을 써놓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설교를 한 번 들어봤어요. 들어보니 이 댓글을 쓴 사람이 전혀 제 설교의 취지를 못 알아듣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설교 듣고 내가 얼마나 의롭고 잘났으냐, 하는 그것을 얻으려고 설교를 듣고 있었던 거예요.

분명히 설교에서는, 간음이라는 율법에 매였다는 자체가 아직도 자기한테 1이 있고, 그 1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어요. 나의 최선, 나의 윤리, 나의 도덕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아직 간음 안했다. 내가 간음 안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옛날에 간음했거나 지금 간음중이거나 앞으로 간음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해당하는 겁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잠재력을 이미 내가 부인해도 그 안에 들어 있어요. 간음뿐만 아니고 모든 죄의 잠재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들어있는 율법에 대해서 반발하는 그것은 배후세력, 다시 말해서 변명으로 일관하고, 그래도 나는 의롭다고, 그래도 나는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하는 그 배후의 세력이 있어요. 악마를 보면서 주님께서는 그 전체를 죄로 규정하고 십자가로서 하나의 의를 준비해 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을 줌으로서 우리는 이미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죽어 있음을 인정하면 되거든요. 죽어 있다는 말은, 말씀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더 이상 내 이익을 챙길 여지는 하나도 없어졌음을 받아들여야지요. ‘이 설교 듣고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그런 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지옥 가는 만원버스에 합세해서 있는 거예요. 교회도 아우성입니다. 천당 가려고. 물리적으로 이렇게 따지거든요. 성도가 제로(0)가 되어버리면 어디든지 다 통과할 수 있어요. 물리학에 보면 중성미자가 있어요. 이게 작은 소립자인데 이것은 어디에도 다 뚫고 들어갑니다. 왜냐? 질량이 없기 때문에.

전자도 질량이 없는데 전자에게는 마이너스 전하가 있기 때문에 플러스 전하의 영향을 받아서 굽어지거든요. 그런데 이 중성미자, 이것은 플러스도 아니고 마이너스도 아닌 중성미자, 태양에서 1제곱센티당 660억 개가 날라 온다는 거예요. 이 중성미자의 특징은 어디에도 다 뚫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이게 바로 성도다.’

거기가 나이트클럽이든지 룸살롱이든지 어디에도 상관없어요. 이걸 또 기쁜 소식으로 밑줄 그으면 안 되는데. 술집이 되었든 어디에도, 북한이든 미국이든 남한이든 어디에도 상관없어요. 슬슬 강남에 사는 사람들이 ‘한국이 좌파 세상이 되면 나는 어디로 이민을 갈꼬?’ 이민 갈 생각을 하는 겁니다. 왜? 상관없기 때문에. 내 나라가 엉뚱한 쪽으로 가면 내 몸 하나 살리기 위해서 이민갈 수밖에 없잖아요.

가세요. 중성미자이기 때문에. 이름이 미자에요. 중성미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 나는 제로(0)기 때문에. 질량이 하나도 없어요. 제로(0)거든요. 내 윤리, 내 도덕, 내 소망, 내 사랑 없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 예수님 몸에 플러스 한 거예요.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 죽음 + 죽음 + 제로 + 제로 + 제로 = 1.’ 그리스도 몸은 하나.

그 일을 지금 주님께서 만유가운데 계셔서 벌이고 있는 거예요. 지금의 동질성가지고는 못 들어갑니다. 천국에 옮겨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동질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내 생각이 다를 바가 없어요. 그만큼 수상한 거예요. 나도 수상하고 저들도 수상하고. 어떻게 십자가를 못 박아 죽인 이 세상과 생각들이 동일한 거예요? 자기 몸 편한 것만, 자기편익만 생각하고. 교회 와서 놀 생각만 하고요.

우리끼리 하나면 되지 않느냐? 우리끼리 하나가 되고 중첩이 되어 봐도 그것은 킬트라고 해서 천 조각끼리 붙여서 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천 쪼가리를 기워서 이어놓게 되면 하나의 옷 같지만 잡아당기면 결국 다 찢어진다고요. 만유에 계신 주님께서는 일을 할 때 인간 대 인간의 우정과 애정과 혈통과 그리고 인정사정으로 묶어놓은 그 킬트의 꿰맨 자국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하나라고? ‘We are the world’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전부 다 돈 문제 개입하면, 엄마와 딸 관계도, 16억 개입되면 다 찢어져요. 다 찢어집니다. 무슨 하나가 돼요? 내가 하나의 전부지. 친하게 지낸다고요? 주께서 다 찢어놓습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자존심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 자존감, 그거 주께서 다 찢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내가 기댈 하나는 애초부터 없었다.

따라서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으로 질량이 없어져야 돼요. 제로(0)가 되어야 돼요. 내가 제로가 된다는 것은 늘 주님 앞에 관심을 두고 주께서 오늘도 무슨 일을 시키는가? 주님과 사랑의 시선을 맞춰야 됩니다. 얼굴과 얼굴을 본다 했잖아요. 얼굴과 얼굴을 봐야지요. 나중에 천국 가서 “아무개 왔나?” (피하면서) ‘안 왔어요.’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 때 얼굴 바짝 들고 주님 얼굴을 보세요. 죽어서 하지 말고 살아 있으면서 지금, 오늘부터 시작하세요, 오늘부터. “주님, 저 여기 있어요.” 왜 주님 앞에 얼굴을 못 듭니까? 사랑인데. 사랑해주겠다는데 왜 얼굴을 못 들어요. 사랑해 주겠다는데요. 얼굴을 피하는 이유는 뭡니까? 따로, 주님 말고 주님보다 더 귀한 것, 내 소망을 따로 챙겨서 1이 되게 하려고 하니까 주님은 다 귀찮은 거예요. 교회 오는 것도 귀찮고, 말씀 보는 것도 귀찮고, 다 귀찮은 거예요.

나만 편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자신이 세상적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 남을 이용했던 그 꿰맨 자국을 다 터지게 만듭니다. 사실은 목사가 되어서 그런 복음을 전했는데 저는 아주 나쁜 목사가 되어가지고 설교는 이렇게 고함을 지르고 이렇게 했어도 개인적으로 만나면요, 격려해줄 생각부터 하니까 이런 나쁜 목사가…….

자존감을 좀 높여주려고 “아이고, 복음위해서 수고하십니다.” 이게 아닌데, 쓰레기인데. “You are 쓰레기”라고 해야 되는데 차마 뭘 또, 우리교회 하나 되기 위해서, 하나 됨을 노리기 위해서 또 그 짓을 하는지 자꾸 반성이 됩니다만, 죽을 때까지 재주가 그 재주밖에는 없어요. 남의 자존심을 못 건드리는 이 용기는 나쁜 용기입니다.

실상은 그게 아니에요. 제가 만유에 안계시거든요. 저는 제쳐놓고, 저는 나쁜 목사라고 제쳐두고 만유에 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인간 대 인간의 모든, 부모자식관계, 부부관계, 다 그 킬트를 뜯어놓게 만듭니다. 뜯어놓고 다시 제로(0)와 제로(0)로서 다시 만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부부된 것도, 우리가 자식과 부모관계가 된 것도 다 주님의 은혜다.

주님의 은혜다. 그냥 은혜가 아니고 못 볼 얼굴을 보게 하시고, 그것이 천국이거든요, 예수님,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 있다는 것, 영생, 그게 주님이라는 말이지요. 이제부터 나의 하나 됨 증거 하지 마시고 주님이 정답이고 최종적으로 주님이 하나 되게 하시는 쪽으로 모든 정답을 돌려야 돼요. 길과 진리와 생명, 모든 것이 오직 주님이 하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설프게 남 흉내 내고 따라갔습니다. 다수가 진리인 줄 알았습니다. 그쪽 가야 안심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반대방향으로 간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이 개별자 고집이 곧 죄인 것을 우리가 명심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2강-엡 4장 4-6절(하나)190714-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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