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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6 06:00:04 조회 : 120         
서울의존강의20190712a 베드로전서3장 1절(몸의 여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61.102.247.43)
서울의존강의20190712a 베드로전서3장 1절(몸의 여분)-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3장 1절

1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하나의 인간의 몸을 갖고 있으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몸이죠. 자기 몸이니까 자기로부터 의미가, 모든 것이 모아지는 겁니다. 내 몸이니까. 그러면 내 몸이 있는 이상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같은 것도 자기 몸 중심으로 구조가 되는 겁니다. 가정이라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가정이 존재한다. 이러한 생각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죠.

누구의 아내라고 한다면 갑자기 무엇을 상실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느냐 하면, 내 몸이 내 주인이라는 점이 날아가 버리고 ‘누구의 아내입니까’, 그 남편에 종속되었다는 느낌이 들죠. 어떤 입장에서, 아내라는 지위, 위치를 갖고 있으면서 ‘내가 ~에 종속되었다’라고 문장을 쓰게 되면, 이 문장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종속되었다’하고 ‘내가’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종속되었으면 ‘내가’라는 말을 구태여 할 이유가 없어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야 돼요. ‘~에게 종속된 나’, ‘남편에게 종속된 나’라고 했을 때 이것이 아내가 되는 겁니다. 아내는 뭐가 앞에 나오면 안돼요? ‘내가’ 누구의 아내라고 말을 하면 곤란하죠? 마치 남편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현대에서 누구의 아내라고 했을 때는, 내가 누구의 아내라고 말하기 싫고 내 남편이 누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해요. 자기는 어떤 경우라도 종속되었다는, 한 수 아래 있다는 의식은 우리 내부에서 용납을 안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이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는 아예 안따져 보는데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서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내된 자들아” 이렇게 시작해요. ‘독립할 생각하지 말아라’ 그런 뜻이죠. ‘아내된 자들아. 너희들은 너희들의 몸이 있더라도 독자적으로 나를 위한 몸은 아니고 가정이라는 조직에 필요한 몸으로 네가 거기에 살고 있다. 이 점을 놓치면 안된다.’ 그런 뜻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네 몸보다도 뭐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가정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너는 너를 위한 몸이 아니고 가족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너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아내된 자들아” 이렇게 하는 겁니다.

현대인들이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서도 상당히 기분이 별로 안 좋죠. 독자적인 자기의 존재가치를 애초부터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 뒤에 아무리 좋은 이야기해도 별로 달갑지 않은 겁니다. 예를 들면 1절 끝에 보면 “자기 남편의 말로 말미암지 않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은 아내로 인하여 남편이 구원을 얻으면 아내된 자로서 기분이 좋지 아니하냐, 기쁘지 아니하냐라는 조로 기분 좋으라고 이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천당가면 되지 꼴 보기 싫은 거 같이 가서 여기서도 살기 싫은데 천당가도 같이 만나야 되나 해가지고... 남편이 구원 받든 말든 나만 구원 받으면 되지 왜 남편 구원까지 신경을 써야되냐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나는 남편에게 매인 몸이 아니고 종속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고 니는 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초반에 이야기 했죠? 아내라는 그 몸은 독자적인 몸의 의미를 가질 권한이 없다는 말이죠.

이 베드로전서 성경 말씀을 볼 때에 현대인들이 보기에 상당히 거북스러운 거예요. 3장 1절 ,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순복하라” 되어 있어요. 여기 네거리에 보면 열녀비 하나 있거든요. 옛날에 열녀비를 왜 세워놨겠습니까? 아내는 절대로 독자적으로 튀면 안된다는 것을 그 사회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자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결혼해야 되고 결혼했으면 반드시 열녀가 네 삶의 표준이 되어야 된다. 열녀냐를 가지고 여성의 가치를 측정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고 해가지고 열녀비를 세운 겁니다.

열녀 중에서도 이런 열녀가 있을 거예요. 카메라 위치를 잘 잡아놓고 2살 아이하고 구석에 딱 앉아가지고 남편이 때릴 때 다 찍히도록 하는 열녀, 남편 팔뚝의 문신까지 다 찍혀 나오도록 하는 열녀. 베트남 열녀. 열녀났다 열녀났어, 베트남 열녀. 남편 하나 구원시키겠다고 지는 얻어맞는 열녀... 남편 구원 때문에 자기가 카메라 찍고 했겠습니까? 얻어맞았으면 왜 고소 안하고 왜 신고 안했는지, 그 전부터 그렇게 했으면. 무슨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어떠한 자기 노림수의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여러 가지가 예상될 수 있죠?

그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아내라는 자체를 ‘아내다운 나’가 아니라 ‘내가 한번 아내 해볼까? 아님 말고’ 아내라는 자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간단히 말해서 사랑이라는 것은 일단 나부터 사랑하고 남는 여력으로 남 사랑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거든요. 지부터 챙겨야지 지 손해 보면서 남 사랑할 거 어딨어요.

구원 받는다 그러면 일단 나부터 구원시키고 남는 시간 있으면 남편 구원시켜볼까 이거거든요. 중요한 것은 나는 어디에 소속되거나 어느 구조의 일부가 되기를 내가 거부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몸은. 그래서 여기 베드로전서 3장에 나오는 이 “아내된 자들아”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의 몸이 아니에요.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듯이 성령받은 사람들에게만 이해가 되고 무슨 뜻인지 수긍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특히 3장 1절에 보면 “남편에게 순복하라” 하는데 순복이라는 말이 오랜만에 듣지 않습니까? 누구 개 이름인 것 같기도 하고. 옛날 촌이야 딸이 순복하면 밥이나 먹고 산다고 애 이름을 순복이라고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순하게 복종하라고. 지금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해가지고 집안 꼴이 되겠습니까? 남편이 기고만장하게 설쳐가지고 잘된게 뭐가 있어요? 아내가 단도리 잘해줘서 그나마도 자식하고 밥먹고 살지, 남편 지 혼자 돌아다니면 맨날 나가서 논다, 등산 간다고 해서 자기가 돈 벌었다고 혼자 다 써버리고 나중에 실패하면 아내한테 기어 붙어가지고 살려줘 하고 달려오고...남자나 여자나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모든 기력은 내 사랑에 다 몰입시키고 혹시 남는 거 있으면 그 다음에 남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할 때는 여기서는 그냥 순복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순복할 때도 순복하는 이유가 있어요. 네가 나한테 순복할만한 짓거리를 하게 되면 순복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너한테 재롱부리고 뿌잉뿌잉하든지 할 용의가 있지만 네 하는 행세, 꼬라지가 영 마음에 안든다 하면 재롱이고 뭐고 각방 쓴다, 넌 끝났어, 나 너 용서하지 않아, 내가 너 같은 남자 만나가지고 내 인생 조질 이유가 없어. 내 인생 뜻대로 될 조건 하에 너는 내 남편이고 안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 갈라설 준비를 하자. 이런 식으로. 그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순복이라는 것이 무슨 이야기이죠? 거기에 순복이 왜 튀어나옵니까?

순복이라는 것은 나는 누구에 종속될 존재, 이럴 경우에만 순복이라는 말이 의미가 있지, 모든 것은 우선 나부터 챙기기, 그런데 거기에 무슨 순복이라는 것이 같이 결합이 될 수 있는 뜻이겠어요? 안되죠. 그리고 순복하는 것도요, 같이 신앙생활 잘하고 아내가 보기에 존경할 만한 어떤 요소가 있으면 순복하죠. 현대인들에게 진짜 이상적인 남편감이란 뭐냐하면 아내가 보기에 날마다 새로운 존경할 것이 새록새록 나오는 사람, 가장 이상적이죠. 존경스러운 게 나온다는 말은 ‘나는 그대 앞에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지’ 그거거든요. 내가 못하는 걸 다하는 거예요. 형광등도 어디 고장났나, 착착착 뭐 다 고쳐. 못하는 게 없어요. 개똥 다 갈아주고.

그러니까 현대 여자에게 가장 좋은 남자라고 하는 것은 말하기 전에 아내가 뭘 원하는지 미리 캐치해가지고 두 말 안하더라도 착착착착 내 속을 훤히 꿰뚫어서 미리 딱 해놓으면 저녁에 콩나물밥이고 뭐고 원하는 거 내가 다 해줄게, 순복하지 말라고 해도 내가 알아서 순복할게. 존경스러운데 뭘 못해, 존경스러운데. 내 눈치 착착 챙기고 해야 하는데 이거는 남편이라는 게 눈치가 있나 코치가 있나, 대화가 되나. 복음이야기 하면 절이야기 해버리고...안되잖아요, 이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이 말은 뭐냐 하면 말빨 세운다고 남편이 감동받아서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야, 네 행위 보니까 나도 예수 믿어야겠다’ 그런 태도를 아내 쪽에서 가져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구원도 바쁜데 남편 구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남편 구원 신경 쓰다가 내 구원에 소홀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되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여기 성경에 나오는 아내의 특징은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유’. 같은 말은 ‘심리적인 안정성’. 여유와 안정성. 남편되는 당신이 아내되는 나에게 이렇게 해주면 당신에게 해주겠다는 것은 아직도 이건 결핍이에요. 미비해요. 당신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나는 내 아내된 도리를 다하겠다. 왜? 나는 이 집안의 구조상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당신한테 아내라는 연결망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내 포지션의 역할은 다 해주겠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남자인지 그런 것에 나는 신경쓰지 않고. 이게 뭐냐 하면 안정성, 여유잖아요.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어떻게 구원했습니까? 조건보고 구원했습니까? ‘똑바로 하면 구원해주고, 천당가고 안 그러면 지옥간다’ 그렇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드로전서에서 제시한 것은 한글로 딱 한 자에요, 뭐겠어요? 뭐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 또는 거룩하게 된다, 씻음 받는다. 뭐였습니까, 딱 한 글자로? 빨간 건데. 예수님의 피로!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1장 2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씻어서 영생을 얻었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이런 게 참 오늘 강의 어렵게 하려면 정말 어렵게 되요.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몸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음의 실제성’, 몸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음이라는 것이 허황된 거예요. 손에 안 잡혀요. 그러면 주님께서 ‘나는 복음을 전하러 왔다’ 하면, 사람들이 ‘뭐 내놔봐, 복음이 어딨는데? 어디에 감춰뒀는데? 어느 동굴에 복음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내 몸에서 흐르는 피, 내 몸에서 나오는 그 살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것은 허황된 것이 아니고 이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어느 특정 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 사건과 결과들. 이게 상당히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복음이라는 게.

복음이라는 것이 몸이 존재함으로써 구체화되는 거예요. 몸+복음=구체성, 구체화. 몸에 복음이 결합되게 되면 나오는 것이 여유와 안정성이에요. 그렇다면 여성의 몸이라는 것은 내가 지정한 몸이 아니고 가정이라는 곳에 어떤 포지션, 위치가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가정’이라는 포지션을 위해서 이 여성이 있으면 이것은 남편에게 종속된 게 아니고 누구한테 종속된 거예요? 가정이라는 몸으로 표현되어야 될 복음의 실제성에 여성이 종속되는 겁니다. 복음에 종속된다니까요, 복음에. 남편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고.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순복하는 거예요. 남편 볼 거 뭐있다고 순복해요. 자기는 지 좋다고 바깥에 돌아다니는데. 그러니까 복음에 순복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가정이 갖는 특수한 구조에 대해서 성경 한 구절 찾아봅시다. 여호수아 7장 24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그 외투와 그 금덩이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딸들과 그의 소들과 그의 나귀들과 그의 양들과 그의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우리가 여호수아, 아간을 보면서 하나님의 물건을 훔친 사람, 아간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간 혼자 잡아다가 죽이면 그만이라 생각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뽑고 뽑고 계속 뽑는 가운데서 최종적으로 유다지파에서 계속 선택하고 또 선택했는데 그 선택이 17절에 나오죠. 여호수아 7장 17절,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지파, 유다지파가 뽑혔고 그 다음에 유다지파 중에서도 세다 족속이 뽑혔고 세다 족속에서 삽디가 뽑혔고 18절,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아간이 뽑혔으니까 아간만 죽이면 된다 생각하겠죠. 그러나 아까 24절에 보니까 그의 아들들과 딸들도 죽죠. 가족이 죽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의 최소단위가 가족 단위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이라는 것은 없고 네 가정에서 구원의 포지션을 제대로 수행했는가를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우리의 위치의 구원이지, 내 구원이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위치 구원이라고요. 어떤 인간이든 가족 없이는 태어난 사람이 없죠. 흔히 교회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눈에 보이는 아버지나 제사지내지 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섬기냐고 하잖아요. 그들도 무슨 중심입니까? ‘니 아버지, 어머니 없으면 너 없잖아. 그러면 아버지께 효도해야지 왜 하나님 섬기느냐, 아버지께 효도 안하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효도하는 것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하고 이게 충돌되는 겁니까, 같은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같이 보는 거예요. 문제는 효도가 뭐냐, 효도의 질이 뭐냐 그게 문제되는 거예요. 아버지 술 드시는데 술값 드리는 게 효도냐 이 말이죠. 안 그러면 아버지보고 ‘지옥갑니다’ 이야기 하는 게 효도냐, 어느 쪽이 효도겠어요? ‘아버지, 그리 살면 개같이 사는 겁니다.’ 이게 효도입니까, 아버지 헝가리 여행 보내가지고 물에 빠져 죽게 하는 게 효도입니까, 어느 쪽이 효도에요? 아버지가 원하는 걸 해 주는게 효도입니까? 그것은 효도가 아니고 아버지 개인적인 욕심을 한 패되어서 같이 들어주는 거예요. 아버지의 욕심에 대해서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 안에서 부모를 섬기는 게 아니죠, 주 밖에서 섬기는 겁니다, 주 밖에서.

주 밖에서 섬기는 것과 주 안에서 섬기는 게 다르죠. 주 밖에서 섬기면 나는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존재하지만 주 안에 들어오면 주의 이름을 위해서 존재하는 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이름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서 나혼자 천당가는 것을 노리라는 말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지만 내게 준 하나님의 위치, 포지션은 뭐냐. 누구의 아들 포지션, 누구의 아내 포지션, 누구의 남편 포지션을 줬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위치는 나 하나 즐거우라고 준 게 아니고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 구체화되는 몸을 통해서 이 몸은 복음을 구체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사회적 최소단위에 나를 위치시킨 거예요.

논산 훈련소 마치고 난 뒤에 군인들이 제대하는 게 아니고 자대에 간다고 하죠. 훈련소는 어디까지나 훈련이고 훈련받은 것을 써먹어야 되지 않습니까. 국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요새에 자리잡고 있는 그 부대를 자기부대, 자대라고 해요. 군 생활을 마무리 지을 거기에 가서 군 생활을 하는 겁니다. 군에 있다는 말은 본인의사와 관계없이 함부로 집에 오고 외출하는 게 안돼요. 그 조직에 매여 살아야 되요, 힘들지만.

부대에 끌려가는데 부대에 있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힘들지만 다 군대에 가는 겁니다, 유승준 빼놓고. 유승준은 미국가서 내가 군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오겠습니다 서약서 쓰고 간 사람이에요. 내 진짜 안 오면 개입니다 할 정도로 가면 옵니다 해놓고는 가서 안 오잖아요. 내가 비겁하게 군에 빠질 그런 남자 아닙니다 해놓고. 이제 군에 가고 싶은데 40살 넘어서 군에 못가게 됐어요. 얼마나 군에 가고 싶겠어요. 그게 뭐냐면 한국이 주는 포지션이 없어요, 그 사람은. 위치가 없어요, 자기 몸은 있어요.

몸은 있는데 그 위치가 없으면 그것은 구원의 구조에 의하면 마찬가지에요. 몸은 있는데 구원을 보여주려고 하는 장소가 없어버리면 그것은 구원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나만 천당가면 되지 이런 식이 돼요. 얽히고 설킨 게 있어야 되는데... 예수 믿는다고 해서 기도원에 가서 혼자 도 닦는다고 혼자 천당 갈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직장 같으면 내가 알아서 빠질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는데 가족이라 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니까요. 부모 없이는 못 태어났잖아요. 태어나보니까 부모란 분이 내 눈앞에 보이더란 말이죠. 그리고 부모는 내가 너를 낳았다고 이야기하고. 그런 줄 알았더니만 그다음에 보니 나를 낳은 게 아니라 길러줬고, 낳은 엄마는 돈보고 뒤늦게 와가지고 내 니 낳았다 해가지고 니 아프면 생명보험 내가 탄다 이런 식으로 나오죠.

혼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이미 있는 육이라는 토대 위에서 나왔기 때문에, 구원은 육에서의 영이죠. 육이 없으면 영이 나올 수 없습니다. 육이 있고 난 뒤에 영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몸+α에요. 이 몸은 분명히 마리아의 몸에서 나왔지만 성령으로 만들어진 몸이기 때문에 +α, 여분의 몸을 통해서 천국의 여분의 것이 여기서 방출되고 발산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라 하는 것은 뭘 받았습니까, 성령 받았죠? 따라서 성도가 하는 이 몸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이 거기서 필연적으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성령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말씀에 관한 일, 또는 말씀과 엮여졌다는 그러한 관계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아간만 처벌받은 게 아니고 아간의 가족이 처벌 받죠? 아버지 아간의 잘못으로 그 가족이 다 처벌 받잖아요. 이 가정이라는 것은 가장한테 종속되는 거예요. 자,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께 한 번 질문해 볼게요. 아간의 몸이 돌무더기에 쌓여서 처벌 받았죠. 그러면 아간의 몸에서 보여줄 수 있는 복음적 요소, 영적 요소가 뭡니까? 처벌받음이죠, 처벌받음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면 아간은 자기 아버지한테 매인 것이 다에요,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 아래 매인 것이 진정한 아간의 위치입니까? 율법 아래 매인 것이 진정한 위치죠. 아버지 같으면 자기 아들이 그랬다 해도 ‘내 아들 왜? 내 아들이 좀 욕심냈다 그래. 갚아줄게. 외투 가져가. 됐지? 내 자식이 누가 뭐래도 제일 귀하다.’ 이렇게 나오면 할 말 없잖아요. 아무리 아들이 나쁜 짓해서 이웃에게 해악을 끼쳐도 춥다고 나중에 솜내복 사가지고 유치장에 넣어줄 사람이 누굽니까? 엄마죠. 엄마가 ‘아들아,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은 귀하다. 누가 아무리 욕해도 나는 너를 믿는다.’ 뭘 믿는데? 그걸 약간 더 길게 이야기하면 ‘네가 언젠가는 개과천선할 줄 믿는다, 아니 개과천선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는 천성적으로 착해, 난 이걸 믿는다.’ 그렇게 착한 자식이 술먹고 나쁜 짓해요?

부모가 자식을 얼마나 일방적으로 영적 요소를 빼버리고 육적 요소만 했으면, 자식이 술을 먹어도 그걸 방치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술 먹어도. ‘아이고 내 아들 술 먹는다’ 그걸 자랑스럽게 여겨요. ‘드디어 남자 됐다, 남자. 남자는 술 먹어야 큰일한다’ 큰일하지. 강지환도 성폭행했다고 뉴스에 크게 나왔잖아요. 모두 술 먹고 하는 짓이잖아요. 여자 패는 것도 술먹고 하는 짓이잖아요.

부모가 왜 안 말립니까. 자식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을 해도 다 이뻐. 왜? 그게 부모의 포지션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영적인 요소가 없어요, 구원의 요소도 없고. 무슨 요소 입니까? 육적인 요소에요. 결국 믿는 사람에게 구원의 가정의 포지션을 가졌다는 것은 영과 육이 싸우라 이 말이에요. 싸울 때 몽둥이 들고 싸우고 야구 방망이 들고 싸우는 게 아니고 여유와 안정성을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여유와 안정성. 차분함. 호들갑떨지 않는 것. ‘아이고, 어짤꼬’ 이러지 않는 것. 긴장되지 않는 마음자세. 흔들림이 없는 것. ‘뭐 죽으면 그만이지’ 이런 것. 죽으면 천국이지 뭐. 이런 자신감.

그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도 믿음이라는 말이 왜곡되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말하기가 겁이 나요.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하니까 또 지 혼자 천당간다고 설치는 게 믿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좋은 말인데도 요새는 쓰기가 뭐해요. 그 대신 자신감, 안정감, 담대함 이런 식으로 다른 걸로 해야 되요. 요동치 않는 흔들림이 없음. ‘집에 불났어? 그럼 다 탔겠네’ 이런 거. 세상에 미련과 집착하지 않는 것.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걸 늘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남편이라는 것은 뭐냐?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 하나님께서 허락한 아내라는 위치가 제대로 영적으로 아내다운 모습을, 복음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대비하면서 충분하게 보여줘라. 이게 베드로전서 3장에서 아내된 자에게 말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처음에 베드로전서 3장 강의하면서 오늘날의 아내에 대해서 언급했지요? 여기서 기억을 다시 새롭게 한다면, 나는 누구의 아내가 아니라 남편의 아내가 바로 나다. 그래야 종속의 의미가 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만약에 누구의 아내라고 내 중심으로 세워버리면 남편이 만약에 제대로 남편값을 할 경우에만 아내할 용의가 있다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포지션, 위치는 누가 정해요? 내가 정한 거잖아요. 내가 정하고 싶고. 왜? 영적인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사랑을 나부터 먼저 사랑하고 남아도는 사랑, 기력이 있으면 남한테 주는 거거든요, 인간의 본성상.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챙기고 남아도는 찌꺼기를 구원하라고 준 게 아니고 예수님께 가장 귀한 게 뭐냐면 예수님의 살과 피잖아요. 그걸 우리에게 허락하신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얼마나 친절하게 해주시냐면 컵에다 포도주를 담아놓고 “이것이 너희들 보기에 포도주로 보이냐?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피다. 이 피를 마시라.”고 한 거예요. “네가 방금 마신 게 내 피야.” 이게 무슨 뜻이에요? 피라고 하는 것은 너는 나 없이는 영생없다는 뜻이거든요.

왜 그런 말씀을 하셨냐 하면, 12제자들은, 오늘날 우리들은 공통적으로 나부터 챙기는 거예요. 내가 우선이에요, 내가. 이 세상은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몸을 줬는데 생각하는 것은 나보다 귀한 게 없다고 하니까 주님께서는 나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그런 정신이 몸에 붙어있는 것을 강제적으로 찢어야 되지요. 찢어서 ‘예수님의 생명보다 귀한 건 없다’로 이동시키는 그 작업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하시는 거예요.

육이 없으면 영이 없다고 아까 얘기했으니까 그건 말씀 안 드리고... 육이 있어요. 세상은 육입니다. 그냥 살면 똑같이 모방하고 그렇고 그런 흉내내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을 왜 줬냐하면 말씀 세계가 따로 있어요. 말씀 세계가 따로 있는데 육에서 그냥 못나오고 찢어져야 되요. 찢어진 틈에서 몸은 몸인데 말씀의 세계에 속한 몸으로 벗어나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된다. 그러면 주께서, 영적인 분이 주신 너의 위치와 입장을 거기서 네가 알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일상생활을 할 때, 시장에 가서 누구를 만나거나 할 때, 길에서 동네에서 아는 아줌마를 만나든지 누구를 만났을 때 이것을 그대로 적용시켜 보세요. ‘아이고, 철희네 엄마’하고 수다 떨려고 준비하고 있다면 이쪽의 영적인 사람은 ‘주께서 저 아주머니를 왜 만나게 하셨지?’ 주께서. 보세요, 생각으로. 같은 육인데 찢어져서 벌써 그걸 탈출했잖아요. 탈출한 입장에서 주님의 안목으로 ‘저 분을 왜 만나게 하셨지?’라고 보게 하는 거예요.

이론상 어렵지 않은데 실제로서는 같이 저 사람과 같이 육이 되어가지고 열내서 얘기하는 거예요. 일본 때려 죽여야 돼, 일본여행도 가지 말고. 같이 열불 낸다 이 말이죠. 가만히 얘기하다보면 안 찢어졌어. 그 육이 그 육이라. 한통속이 되어버렸어요. 일본 아주 심각하고 어떻게 해. 한다 이 말이죠.

또 한가지 예를 들면 함부르크 팀에 있다가 영국의 토트넘으로 간 선수가 있어요. 손흥민이라는 선수가 있거든요. 손흥민 선수의 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영적일까요 육적일까요? 그 사람들의 모든 관심사가 자기가 원하는 토트넘 축구가 우승하는 것에 다 쏠려있겠지요, 하루 일과가. 그들의 모든 관심사는 내가 응원하는 팀 오늘 이겼나 졌나 그것뿐이죠. 아침에 나오면 축구공차기 바쁘죠. 아침에 나와서 기도하고 성경보는 것 원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 많거든요. 아버지, 엄마는 교회 다니는데 아들은 교회 가라고 하면 힘들다고 해놓고 아침에 보면 일요일마다 축구하러 가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그게 육이죠. 육에서 찢어지지 않고 영의 세계로 못온 거예요. 그러면 복음적인 부모의 안목으로 보면, 저 아들과 나는 영원히 결별해야 됩니다. 하지만 부모로서 그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그 포지션은 뭐냐는 그 일은 여전히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 지옥 잘 가라’ 그러니까 자식이 교회 안다녀도 ‘뭐 알아서 하겠지. 이근호 목사님 말씀 들으면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면 구원 안 받는다고 하는데 뭐 내가 선택하나. 하나님이 선택하는데 하나님 책임이지 내 책임이야?’ 이렇게 하거든요.

말은 이론적으로 맞는데 감정적으로는 뭐냐 하면, 자기자식이 지옥가고 저주받게 되면 ‘잘 갔다 잘 갔어, 내 말 안듣더니 잘 갔어’. 과연 그 정도로 초연할 자신이 있어요? 어디 아프다는 소리 들으면 보약해서 어디 아프냐고 하는데. 아픈 건 저주 아닙니까?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징벌 아닙니까. 사는 것 자체가 저주거든요. 그런데 육적인 자식은 저주받고 있으면서 저주받는 이유도 모르고 그 저주가 어디서 날아온지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죠. ‘이론상 말은 맞는데 내가 한다고 됩니까?’ 그러거든요.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본인이 이 영적 구조의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자식 구원하라는 실적 올리라는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그 위치, 영적인 위치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이지, 내가 말한다고 듣습니까? 내가 말한 것 들어서 구원받은 자식은 이 세상에 단 한명도 없어요. 왜? 성령이 임해서 하기 때문에.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는 부모 노릇을 하면 되요, 부모 노릇을 하면 된다고요. 자기 위치, 주님께 종속된 위치를 감당하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감당한다는 것이, 내가 말 잘 했더니 교회 나왔다고 꼬시는 실적을 올리는 게 아니에요. 현재 자식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늘 생각하는 거예요. 현재 자식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지옥에 떨어지는 넓은 길로 가면서, 그렇게 술담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술담배 하면서, 넓은 길로 가게 되면 우리가 아는 마태복음 7장의 말씀에 보면 구원의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까? 찾는 사람이 많은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죠. 그러면 엄마의 위치는 뭡니까?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말씀이 여기에 장착되어 있어야 된다는 말이죠. ‘엄마, 이번에 백점 맞았어’, ‘엄마, 이번에 사업 성공했어’ 할 때, ‘사업 성공하면 뭐하겠노, 멸망할 걸’. ‘그래 우리 아들 최고다’ 같이 좋아한다면 이건 같이 육적인 거예요. ‘그래, 주께서 돈 좀 벌게 해준 모양이구나. 그러면 뭐하겠노. 너는 지옥 가는데 그냥 가지 말고 부자되서 지옥가라는 뜻이구나’ 그렇게 이해할 때, ‘엄마는 왜 나 돈버는데 안 좋아해?’ ‘내가 평소에 너 돈버는 것을 원했던가?’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하는 그런 부모-자식 간의 관계입니까? 그런 영적인 안목을 가지고 봅니까? 내 자식 최고되어야 되고 부자 되어야 되고 돈 벌어야 되고 자랑거리 되어야 되고. 자식걱정하기는커녕 자기도 자식 못지않게 육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새끼기 때문에 피해자는 관계없고 내 새끼가 누구 패고 와도 피해자는 신경 안쓰고 네가 안맞으면, 때렸으면 잘됐다. 자기 자식 싸고도는 육적인 본성, 그게 전부 아니에요?

그러니까 오늘 베드로전서 3장에서 “아내된 자들아” 이 말은 아내라는 포지션, 위치는 네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것에 아내가 있다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가정구원이라는 구원의 최소단위가 성사되는 거예요. 어차피 구원받은 사람은 전부다 한 가족이에요, 남이라도. 남이라도 한 가족이거든요. 그러나 그 가족이 부상, 떠오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에서 +α가 나와야 되요, 여분의 것이 나와야 된다고. 몸에서 흔한 세상적인 행위가 나와 버리면, +α가 안나오고 영적요소가 안나와버리면, 저게 진짜 신자 맞는지 의심해봐야 됩니다.

육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육적인 벽이 있으면 거기에 부딪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절망하게 되고 실망하고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육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이 함께 있는 사람은 이 벽을 뚫고 그 다음 세계의 안목을 가지고 이 벽을 바라보게 되죠. 나에게 벽이 있다는 것은 내가 육적인 사람이 아니었구나를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점검차원에서 주신 벽이에요. ‘충분히 실망하고 낙담하고 좌절할 만도 한데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네요.’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고 성령의 생각입니다. 그게 자유거든요.

이 벽이 오기 전까지는 영적 사람이라도 조마조마하죠. 감당할 수 있겠나. 이런 일이 터져버리면 나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살아. 나 이제 죽을 거 같아. 자살할 거 같아. 더 이상 살 힘이 없는데. 그런데 성령이 함께 했을 때는 네가 육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는 못산다, 자살한다, 더는 세상 살 힘이 없다는 것이 영의 깨달음을 주고 보니까 ‘그것도 별일 아닌 걸 가지고 괜히 호들갑을 떨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요, 세상이라는 것이. 주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거예요.

오늘 본문 성경말씀 3장 6절 봅시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그의 딸이 되었다고요?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로 칭함으로써 그의 딸이 되었다는 거예요. 왜 딸이 나와요, 부인 아닌가요? 사라는 아브라함의 부인으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딸이 되었다 이 말이죠. 그것도 순복함으로, 복종함으로.

구원이라는 것을 다시 할게요. 인간의 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양상을 보이길 원합니다. 그게 몸의 기능이에요. 그냥 내 몸 하나 천당 가는 게 아니고 몸을 통해서 영적인 기능이 발산될 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인데 그 때 그 사람은 나 혼자 천당 가는 게 아니고 구원이라는 조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까지 얘기했잖아요, 그쵸? 하나님이 부여한 위치에요.

그런데 아내한테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서 구원의 구조에 기여하는 셈이 되고, 드러난 셈이 되고 남편은 이렇게 해서 드러나는데, 주로 3장 1절부터 6절까지는 아내에 대해서 이야기 한 거고, 7절부터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어떤 포지션을 해야 되는가에 대한 거예요. 베드로전서 3장 7절,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무슨 그릇입니까? 연약한 그릇이에요, 연약한.

그러니까 아내는 아까 여유와 안정감이죠. 그 여유와 안정감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품에 안겨도 그걸 받아줄 수 있는 더 여유로운 어떤 사람에 의해서 누구의 아내로서 그 여유로움 속에서 그 여유로움을 그 아내가 누린다면 그걸 누가 제공해야 되는가? 남편 쪽에서 더 여유로움을 제공해야 된다. 그 관계가 바로 몸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구원의 모습이다, 실제성이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190712a 베드로전서3장 1절(몸의 여분)-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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