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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9 23:53:28 조회 : 108         
강남-요한복음 21장 18절(불신자 되기)190716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요한복음 21장 18절(불신자 되기)190716a-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21장 15절부터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다라는 그 보증을 제 쪽에서 찾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보증해주셨잖아요 라고 하는거에요.


주님이 내가 주님한테 사랑받는 것을 내 쪽에서 검증에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그런 주님 쪽에서 보증을 해주셔야지 내가 주님 사랑합니다 외친다고 해서 그것은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라고 하는거에요.


이거는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이겁니다. 자신의 그 자기 기초를 내가 두지 않겠다. 나의 기초를 내가 두지 않겠다는 거에요. 내가 둔 기초 위에 나를 세우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가 둔 기초 위에 나를 세우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이게 나올 수 없어요. 모든 인간에게. 사람이 산다는 것은 단단히 자기 기초를 다지고 다지는 일이 그게 일상의 일이에요. 내가 나됨을 위한 기초를 먼저 다져놓고 그 위에 계속 거기에다가 쌓는 식으로 계속 쌓아나가는 식으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내 기초 위에 나를 세우지 않겠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이유는 자기에게 찾아온 예수님이 자기하고 동일한 세계 속에서 옆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이미 죽으셨잖아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분이잖아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분이라면 그 기초가 내가 여기 있는 이 쪽 기초로서는 주님과 연관지을 수 없고 함께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베드로가 아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의 어떤 주관이 있으면 주관에 맞추어서 그 주관을 증명할 객관적인 사실을 자꾸 잡아당겨요. 내가 내 주장이 옳다. 내 주장이 옳다. 옳은 이유가 이런 이런 것 때문에 옳다. 이런 이런 것 때문을 객관이라고 하고 내 주장이 옳다라는 것을 주관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뭔가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 너 예수 믿는 증거를 대라고 하면 여러 가지 기도해서 병 낫는 거부터 해서 끌어모으잖아요. 객관적인 요소를 끌어모은다고요. 남들에게 납득이 되도록. 그런데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이게 객관이 없어요. 오직 주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세상에는 어떤 객관을 찾지 않고 객관을 누구한테 넘겨버리느냐 하면 주님 자체가 나의 주관에 객관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이 이야기는 바로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하고 똑같은 거에요.


내가 나 된 것은 참 이런거 참 이런거 참 시험치고 싶어. 이 대목 나오면. 어떻게 시험치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괄호. 다음 괄호 안에 들어갈 적합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번,2번,3번,4번,5번. 요새 수능 5번까지 나오니까. 나의 착함, 나의 성실, 나의 인내성, 나의 침착함, 나의 믿음 이런거.


이 중에서 내가 나 된 것은 들어갈 적당한 것은? 6번 이중에는 없다. 정답 몇 번이에요? 그냥 없다가 아니고 지우면서 나가야 돼요. 나의 착함, 내가 나 된 것은 나의 착함이 아니고 나의 성실 나의 노력도 아니죠. 나의 인내성, 참을성도 아니고 나의 침착함도 아니고 나의 믿음도 아니고 뭐냐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자, 은혜의 구체적인 객관성은 뭐냐 하면 구체적인 객관성은 은혜라고 하면 모호하잖아요. 구체적인 객관성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심. 이게 객관성입니다. 이걸 두자로 이걸 가지고 ‘복음’이라고 하고 이걸 좀 넓게 깊게 하면 십자가 복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이라고 사도 바울이 한 이유가 뭐냐 하면 십자가가 오고 오는 모든 성도의 유일한, 더 이상 둘이 필요 없는 유일한 only 유일한 객관이에요. 다른 객관에서 오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다른 객관에서 오면 신앙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사는 이 현실 속에서는 내 믿음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십자가를 믿는다는 뜻이.


인간이 말하는 이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이란 내 존재의 장이 확장된거에요. 내 존재의 장이. 내가 존재하는 그 장이라는 영역이 자꾸 넓혀진겁니다. 이 점을 좀 설명해보면 전에 어린이집에 가면 누가 어르신이냐 하면 6살 먹은 애가 어르신 되거든요. 왜냐하면 1살 2살 들어오니까. 진짜 6살 먹으면 어르신이라고 이야기해요. 어린 동생을 궁딩이 닦아주고 다 해요.


자, 그러면 2살의 현실과 6살짜리의 현실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6살은 그만큼 확장되어 있는거에요. 현실이. 확장되어 있어요. 확장되어 있고 2살 짜리는 그만큼 그 6살짜리보다 덜 확장되어있어요. 2살 짜리가 노는 놀이가 정해져 있고 6살 짜리는 그것을 포함해서 봐도 게임까지 확장되어 있어요. 단어 구사하는 어휘력도 제한되어 있고.


그래서 인간의 삶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내가 기초가 되는 현실을 계속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자기 기초를 확장시켜 나가는 것. 60 되도 마찬가지 70 되도 마찬가지 고집 고집 왠 고집이 그리 센지. 80 되도 마찬가지. 기초가 이미 나를 위한 기초거든요. 이걸 이 기초를 무너뜨릴 생각은 안하고 있고 이걸 버티기에 들어가요. 네가 고생좀해라. 나는 꿈쩍도 안할란다. 꿈쩍도 하지 않겠다.


이번에 수련회 이사야 하는데 이사야 공부하면서 제가 정리하고 있어요. 시온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충돌하는 산이에요. 시온이라는. 시온이 우뚝 섰잖아요. ‘시온’. 시온이라는 원래 뜻은 높은 고지에 있는 요새라는 뜻인데 이사야에 보면 우뚝 섰다고요. 우뚝 서있으니까 비행기고 뭐고 다 충돌하는 거에요. 그게 시온이에요. 시온의 기능이고.


이사야는 그때는 만국이 높은 곳에 온다는 거에요 높은 곳에. 다니엘에 보면 꼭 태산같애. 꿈쩍도 안 해. 그런데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사람도 현실이 뭐냐? 이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가? 그건 자기의 기초가 뭐냐에 따라서 현실을 보는 눈이 달라져요. 기초가 뭐냐에 따라서.


축구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뭐냐 하면 손흥민이가 지금 몸값이 얼마며 다음 리그에 몇 골 넣느냐 그게 자기의 심각한 현실이 되는 반면에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류현진이가 언제 11승하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단 말이죠. 사람마다 현실에 보는 현실이 달라요.


따라서 주님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는 말은 아예 자기 기초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기초 자체를 자기가 없애버리는거에요. 없애버리면 이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사람이 뭔가 남한테 내세울 때는 자기가 나 이 정도다 자기 객관에 입각한 주관을 내세워야 이 현실세계 속에서 일원이 되는데 자기 기초가 없으면 이건 두자로 뭐냐 하면 공허함이에요. 공허함. 공허함이다 ‘공허함’.


일본의 아베 총리가 요한복음 21장 16절보고 깜짝 놀랍니까? 오늘 읽었던 오늘 본문보고 아베가 벌벌 떨고 이럽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본문보고 은혜 받고 그래요? 아니죠. 그 아베 그 사람한테 이 요한복음 21장은 뭐냐 하면은 공허함이에요. 다시 다른 말로 하면 비현실, 비현실. 전혀 현실점이 아니에요.


그러면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는데 뭐를 맡겼냐? 공허함을, 공허함을 전파하라는 일을 시킨거에요. 공허함을 전파하라. 사람한테는 절대로 먹혀들게 전혀 없는. 절대로 채우지 마라. 공허함이 계속 공허함으로 계속 남는 일에 네가 전파하라는 거에요.


사람은 각자 자기 기초를 자기가 다지기 때문에 공허한 것은 뺍니다. 내 기초의 질과 내 기초를 더욱 우수하게 만들 것만 골라잡아 쇼핑하듯이 골라잡아서 그 정보를 계속 자기 유리하게 채웁니다. 이게 든든할거야. 이게 내 삶에 아마 실익이 있을거야. 이익이 있을거야. 내 삶을 더욱더 보장해 줄거야. 그런 것만 잔뜩 끌어모으거든요.


그런데 베드로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텅 비어있는 거에요. 텅 비어있어요. 이 말은 베드로가 하는 말은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인간은 절대로 베드로에 대해서 혹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말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뜻이에요. 바로 그 일을 네가 하라는 거에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믿고자 해도 안에 텅텅 비어 있는 내용같으면 사람들은 외면하려고 하지요. 거기에 기죽지 말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에 대해서 겁먹지 말고 기죽지 말고 거기에 대해서 쫄지 마세요.


왜냐하면 여러분 일에 성공하신거에요. “그래 예수 믿어줄게. 그럼 예수 믿으면 내가 어떻게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답변하지 마세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될까가 결부가 안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데 그 다음에 ‘나’라는 것을 못 붙여요. 왜? ‘나’라는 것은 기초 자체가 무너졌기 때문에 내가 더 쌓을 수 있는 ‘나’가 용납이 안 되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나’라는 것은 그것은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연결이 안 되는 거에요.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나의 미래와 나의 운명은 이미 객관이 주님 쪽으로 넘어갔잖아요 하는 거에요. 주님 쪽으로. 그게 믿음이에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님 쪽으로 넘어갔고 주님 쪽으로 넘어간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하느냐? 나는 멍해 그냥. 왜 사는지도 모르겠어. 내 자신으로 봤을 때는 왜 사는지 모르겠어.


왜? 기초가 날라가버렸기 때문에. 기초가 없기 때문에. 살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어요. 세상 사람 보기에도 그렇고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공허해요. 그 공허함, 그 공허함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그 공허함을 사도가 아주 충실하게 이행하지요.


어떤 거지가 앉은뱅이 거지가 와서 조금 주세요 라고 하니까 그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참 싸늘한 이야기를 해요. 차가운 반응을 보입니다. 나에게는 네가 원하는 돈은 없다. 나한테는 은도 없고 금도 없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나는 줄 용의가 전혀 없다.


마치 오늘날 우리 소위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그거에요. 이것 주시옵소서. 저것 주시옵소서. 주님이 응답하시기를 나는 네가 달라는 것을 일체 줄 마음이 없다.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주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주 예수 이름. ‘주 예수 이름’.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얼마나 공허한 대우를 받았습니까? 아무.. 이 땅에..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 서려고 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존재가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이에요. 내가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존재가 일단 있고 내가 원하는걸 채워줄 때 그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이라는게.


그러니까 예수가 됐든 뭐든 간에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익히 내 기초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 요청한게 있다면 이미 나 자신이 나에게는 이미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 한번 정리할까요?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우상이란 내 속에 내면이 바깥에서 형상화된게 우상이에요. 내 내면이. 왜 사람들은 이 우상을 좋아하느냐 하면 바로 그 우상이 전에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공지능이죠. 인공지능. 로봇 같은거. 다리가 하나 교통사고로 날라갔는데 걷고 싶다. 기다려봐. 똑같은 다리를 만들어서 보조를 하게 되면 자 뛰어봐라. 되지요? 그러면 그 다리가 얼마나 좋겠습니다. 왜? 내 원티드, 내가 원하는 내가 소망하는 것이 가시화됐잖아요. 그게 우상이 되는 거에요.


나는 이 복음교회가 교인수 한 100명이 좀 됐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교회 옆에 있는 사람이 자기 교회 목사 못 살겠다 해가지고 100명 몽땅 와가지고 귀순해서 왔다. 주일날 100명 넘어버렸어. 바로 그 교회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슬픈 이유는 사람이 근심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우상을 치워줄 때 슬퍼요. 절망을 느낍니다.


이것 가지고 가시면 안됩니다. 이런 거에요. 주님 주신 것은 전혀 귀하지도 않고 그건 좋아하지 않고 내 내면의 것이 눈에 가시적으로 눈에 보일 때 그것 꼭 쥐면서 그것 못 놓겠다고 닦달내는 거에요. 딴건 줘도 이것 만큼은 이것 만큼은 좀 데려가지 말아달라는거죠.


그 대중가요 가사에 보면 그런 가사 그런 노래들이 들어 있어요. 임재범의 고백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노래에 보면 이랬어요. 홍도야 울지마라는 아니고요. 어떤 노래에 보면 정말 사랑한 여자가 있어서 이제 그 여자만 있으면 나는 평생 행복하겠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아파요. 그때 그 가사 내용이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딴 건 다 데려가도 좋은데 저 여자만큼은 제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그때 여러분들은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창세기 22장과 연관시켜야됩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누굴 바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요구해요? 저기 말 안 듣는 이스마엘 죽으라고 합니까? 누굽니까? 이스마엘이 아니고 가장 사랑하는 이삭. 이삭을 잡으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제들에게 미움받게 하잖아요.


요셉이 누구냐 하면 특별하게 옷을 입은 거에요. 채색옷을. 티 나도록. 다른 형제들에게 티 나도록. 손 대지마. 쟤한테 손 대지마라고 유난히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 사랑을 다 집어넣는 거에요. 야곱이 요셉을 지극히 사랑한 것은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랑했어요. 언니 레아는 사랑 안 했어요. 1+1로 세일할 때 들어갔기 때문에. 그건 꼴보기 싫어요. 끝까지 라헬을 사랑해요. 끝까지. 한결같아요.


그 아내 죽고 난 뒤에 그 자식을.. 다른 자식은 자식도 아니에요. 그 요셉과 그 동생 베냐민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죽여버렸잖아요. 야곱 눈앞에서. 야곱에게 있어서 요셉은 죽은 자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을 경유해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냅니다. 인간을 경유해서.


그냥 줘버리면 인간은 자기가 필요한 것 챙겨가지고 자기 것 만들기 쉽거든요. 아예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유해버리면 인간이 내면 속에 본인도 모르고 있는 자기 내면이 이렇게 추잡한지를 온전히 다 드러내게 만들어요. 내 속에 더러운 것들을 그대로 주님한테 주님께서 그걸 자기 온몸에다가 그걸 쳐발라버려요. 우리 속의 죄를.


그래서 그걸 가지고 로마서 8장에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 이 말이죠.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가지고 그 죄는 주님의 죄가 아니고 우리에게 있던 죄에요. 우리 내면에 죄에요. 그러니까 네가 진짜 네 내면을 믿으려면 딴거 믿지말고 네 내면속에 있는 네 죄를 믿어라. 네가 죄인임을 믿어라 이게 믿음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자의 고백이잖아요. 시편 51편에.


십자가가 빠진 것은 이것은 진리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에요.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십자가가 빠져 버리면 이것은 교회도 아닙니다. 그냥 절이에요. 사찰이고 절이에요. 전에도 수십번했어요. 교회 올 때만 완전히 우리 내면을 완전히 엑스레이 사진 찍듯이 다 들통나야 돼요.


내 기초 내 숨겨 놓은 이것은 뺏기고 싶지 않은 그 기초 하나 숨겨놓고 그걸 어떻게 더 윤기나게 빛나게 끌어모으기 위해서 또 오늘도 어떤 좋은게 있는가 그것 전부다 내 것 차지하려고. 하나님께 복받아가지고 내가 더욱더 나로 인하여 살맛 느끼는 그런 삶을 계속 영위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이 은혜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없는 거에요. 그럼 어디 있느냐?


이땅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다른 인간세계에 바깥에서 여기 부활의 세계 또는 영적세계 또는 생명나무의 세계 다른 말로 생명의 세계 이런 새로운 세계가 우리는 모르는 현실을 만드신 분이 우리를 내왕했을 때 왕림했을 때 찾아왔을 때 여기에 바로 이것이 옴으로서 우리 자신은 나의 기초를 내가 여기에 그냥 둘 수가 없지요. 나의 기초가 이쪽에 있어야지 이쪽에 있으면 안되잖아요.


그래서 주께서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항상 정답은 마지막에 나에게로 의미가 종결되면 정답이 아니라고 했지요. 마지막 정답은 주님의 하신 일에 참여되는 방식으로 엮어져야 돼요. 내 일은 없고 내 일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주님의 일이고 그 의미는 주님의 지금 살아서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니까 부활하셨으니까 살아계셔서 일하신다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21장 같은 경우에는 요한복음 20장에서 이미 부활하고 난 뒤에 그 이후의 일이에요. 베드로를 지금 상대하는 사람이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봤을 때 지금 베드로는 귀신하고 상대하는거에요. 지금 베드로하고 지금 예수님하고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은 네가 죽은 귀신하고 이야기하는 거하고 똑같은 거에요.


죽은 귀신하고 이야기 안하면 네가 신자가 아니라는 거에요. 오늘날 성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성도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제가 어제 대구강의 하면서 인간이 성도되는 퍼센트가 몇 퍼센트라고 했습니까? 0%. 0%. 사람이 교회가주는 것은 몇 퍼센트라고 했어요? 앞면 바꾸고 50%라고 했지요.


그동안 잘해줬으니까 너희 교회 구경 한번 가볼게.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고 반반이에요. 그러나 성도되는 퍼센트는 제로에요. 0%입니다. 교회와서 놀기는 잘 놀지. 식사당번 누구고 표 짤까 말까 쓰잘데기 없는 그런 것 가지고 논쟁하지. 교인되기는 쉬워요. 그러나 성도라고 하는 것은 0%라고요.


왜냐 하면 성도의 주도권은 성도되는 나한테는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주도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요리해서 내가 나를 관리해서 성도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걸 요한복음 20장 지나서 20장, 21장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살아서 찾아오지 않으면 베드로는 결코 구원받은 베드로가 될 수 없다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앞으로 베드로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베드로의 일이 아니고 뭐냐 하면 베드로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고 해도 되지만 다른 말로 주님의 현실이다. 주님의 현실. 아까 주님의 현실을 뭐라고 했습니까? 공허함이죠. 그래서 주님의 현실의 특징은 늘 공허함 또는 다른 말로 하면 허망함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지 않고 교회 한 50년쯤 다닌 사람이 어느날 생각해보니 “내가 예수 믿는 것이 다 이거 뭐지? 예수 믿는다고 해 놓고 예수님 한번도 안 만나보고. 에이 예수 믿는다는 것 때려치우자. 이게 믿고있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 세상 사는 자기 자신의 입장에서는 공허함의 연속이에요.


저는 이걸 공허함의 생산이라고 하는데요. 어렵게 말해서 계속 공허함을 만들어줘요. 뭔가 객관적인거 뭔가 손에 쥐고 남한테 이야기할 객관적인 것이 있으면 참 좋겠는데 이게 있으면 이게 안 좋아요. 있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내 기초의 이게 편입되가지고 내가 나를 관리하고 내가 나를 지키는 쪽으로 가버리면 이건 믿음이 아니고 이건 자기가 주관 만들고 자기가 객관 만드는거죠.


이건 뭐냐? 이건 어떤 현실이냐? 주님의 부활의 현실이 아니고 누구의 현실입니까? 나의 아까 그 유치원 이야기했지요? 현실은 뭐라 했다고요? 내 기초가 확장되는 거에요. 뭐 천당 갈라고. 죽어서 좋은데 갈라고 내 기초를 확장시키는 어떤 작업의 프로젝트의 일환이 되어 버려요. 그것만 계속 진짜 남 앞에 객관적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교회 장로된지 50년 됐다. 장로 50년은 너무 심했다. 나이 90먹어야 되는데. 장로 된지 20년 봉사했다.


계속 자기에게 몰입하는 그 현실을 현실의 경계선을 자꾸 넓힐려고 애를 쓴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아오시면 주님의 현실은 공허하잖아요. 이 세상에서 공허해요. 없는 거에요. 없다는 말은 아무리 인간 쪽에서 주님을 만나고자 해도 주님을 면회가 안 됩니다. 주님은 호출이 안돼요. 주여 주여 쌍시옷, 쌍지읒 해봐야 주님께서 쪼르르 해가지고 그건 알라딘 영화에서 주님 저를 불렀습니까? 알라딘 영화에는 나오지면 실제에서 주님이 쪼르르 오지를 않아요.


왜냐 하면 예수님 가실 때 이 땅을 떠날 때 홀로 떠났기 때문에 그래요. 그 홀로가 계속 유지되어야 그 홀로가 홀로만이 영광받아야 그게 천국이라는 현실입니다. 영적 현실이에요. 주님 영광받고 나 영광받고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현실은 없어요. 그건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오직 주를 위해서 만들어 진거에요.


우리가 그 일에 협조도 안 되고요. 우리가 동업도 안돼요. 주님 일에 협조해드리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을 붙들고 가지마세요 라고 붙잡을 수도 없어요. 이런 이야기는 여기 요한복음뿐만 아니고 열왕기상,하. 열왕기상에 엘리야 나오지요. 열왕기하에 엘리사 나오잖아요.


그 엘리사 엘리야가 기적들을 베풀 때에 그 기적을 받은 사람이 항상 일단 기분은 좋아요.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항상 엘리야 엘리사를 자기 소유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자기를 위한 어떤 매니저처럼 그렇게 부릴려고 합니다. 그런 것을 엘리사와 엘리야는 계속 거리를 두지요. 나아만 장군이 왔을 때 엘리사가 뭘 안 받습니까? 예물을 안 받지요.


왜냐 하면 그쪽 세계의 현실, 나아만 현실에서는 병을 고쳐줬으면 예물을 받고 하든지 그쪽 현실의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는 그것이 옳은 일이거든요. 그러나 엘리사 입장에서는 나아만 장군을 보낸 것도 고친 것도 엘리사는 목격자일 뿐이지 본인은 한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주님의 현실에서는 뭐가 없느냐? 옳고 그름이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찾아왔기 때문에.


뭘로 찾아왔어요? 뭘로 찾아왔습니까? 사랑으로 찾아왔거든요. 우리나라 노래에 그런 노래 있잖아요. 사랑을 줄로 꽁꽁 묶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어떤 외국 여자가 우리나라 노래에 그 묶는다는데 남자를 왜 묶습니까? 사랑으로. 아 그런 뜻이구나. 사랑으로 꽁꽁 묶고싶다는 거에요.


주님께서 사랑으로 묶어놨기 때문에 이 사랑 앞에서는 뭐가 없습니까? 내 자신이 했던 옳고 그름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옳고 그름을 생각해버리면 그 순간 나의 주관과 객관을 자꾸 확보하려는 의도밖에 안돼요 이게. “저 어때요? 저 괜찮지요? 그러니까 저 벌 내리면 안돼요 주님.” 지금 자기 관리를 계속 이어가는 거에요.


내가 부모한테 이렇게 효도 했으니까 제가 은근히 필요한거 주께서 아시지요? 이런 꼼수 안돼요. 옳고 그름이 없다니까. 옳다 그르다가 없어요. 사람들은 말하지요. 네가 복음 안다는데 복음 알고 난 뒤에 얼마나 나아졌으며 수입은 얼마나 늘어났는가? 라고 묻지요. 네가 진짜 하나님을 믿고 기뻐했다면 뭔가 얻은게 있어야지 얻은게.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공허함을 얻었어. 공허함을. 아무것도 없음을 얻은거죠.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 안에 뭐가 아무것도 없느냐? 내가 잘했다 못했다. 나는 죄 지었다 안 지었다도 그 안에 없어요. 그걸 우리가 용납해야 되고 그걸 수긍해야 되고 그 세계 위에 놓여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를 사랑해서 구원받은게 아니고 주께서 먼저 나에게 이 공허함을 주셨단 그 자체가 은혜요 사랑이잖아요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베드로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이걸 그대로 하는 거에요. 이 공허함을 확장시키고 이 하나님의 현실을 확장시키는 거에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여기에 봅시다. 18절 한번 봅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라고 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이 보면 이 자체가 공허함입니다. 공허함. 그러나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이것은 주님의 현실에 의해서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주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그렇게 다루었다를 아는 거에요. 주님의 객관성이에요. 주님의 객관성은 주님한테 있음을 자기 인생을 통해서 마음껏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오늘 강의에서 핵심으로 등장합니다. 어떻게 핵심이 되느냐 하면은 베드로는 어떻게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느냐 이 문제. 베드로는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있느냐? 라는 질문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물을 때 베드로는 뭐라고 이야기하겠느냐? 베드로는 이렇게. 나는 공허함과 함께 다니고 있는 중이다. 나는 공허함과 함께 다니고 있는 중이다.


왜냐하면 공허함은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거든요. 제일 싫어하는거에요. 그 싫어한 바가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느냐에 대해서 주님은 주신 적이 없거든요. 그럼 나한테 이익이 없다면 내가 배척해야 될 대상이에요. 내가 멀리해야 될 대상이에요. 그걸 인간들은 감당을 못하게 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했으면 더 추가적으로 이익이 있어야 되는데 전혀 이익이 없이 그 공허함이 오히려 나를 깎아낸다면 내가 남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평생 내가 일구어낸 농사에 대해서 어떤 결실물이 없잖아요. 없으면 나는 인생 헛산게 아니냐.


인생 헛살았다는 것을 내 진작 알았으면 참 좋았는데 내가 어떻게 인생 90을 살아도 인생 헛사는걸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는 그야말로 주의 종이 되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사는 겁니다. 부질없는 책임감. 자기 의로움에 대한 그 무게.


자기는 의로워야 되고 그리고 나는 뭘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 된다는 그걸 사람들은 뭘로 보느냐 하면은 하나님이 주신 중압감으로 느끼는 거에요. “아이고 또 잔소리네 또 잔소리네.” “이것 죄잖아 이것 죄잖아 또 잔소리 똑바로 하란 말이야. 네가 빛과 소금이 되야지.” “또 잔소리 잔소리.” 감당 못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감당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죽기 전에는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저들과 다른 우리는 특별히 아주 용병이나 된 것처럼 하늘나라의 정예부대인 것처럼 착각했지요. 친위부대 그 중에 하나가 가룟 유다니까 쿠데타 일으켜서 예수님 돌아가셨잖아요. 나중에는 그냥 할 일없이 바닷가에 고기만 잡고 있을 때 그냥 오셨잖아요.


그럼 어느 쪽이 공허해요? 바로 제자들 쪽이 공허해요. 공허한 것을 공허하게 하신 그것. 그 공허함이 뭐냐 하면은 바로 경계. 너무 어려운 것 같으면 다른 말로 바꾸겠습니다. 벽. 오늘 제목은 뭐냐? 벽의 생산입니다. 제목 쉽게 해도 못 알아듣고 어렵게 해도 뭐. ‘벽의 생산’.


공허함이 우리 공허함 느껴지십니까? 아니에요. 천국의 벽이에요. 천국이 가까이 온거에요. 공허함 만지는 순간 우리는 천국에 지금 경계 벽을 만지는 거에요. 내 속에 공허함이 들어왔다는 말은 이미 우리는 천국 안에 들어온 거에요. 옳고 그름을 일체 따지지 않습니다. 오직 거기는 사랑만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랑도 내가 주님을 사랑한 사랑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 주님에게 의미가 있는 사랑. 나는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주신 사랑이에요. 내 자녀라고 주신 은혜가 아니라 주님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살아 있음을 공허함이 살아있어요. 공허함이. 더 어렵게 말해서 죽음이 살아있어요.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죽으신 분이 살아 있어요.


죽으신 분이 살아있기 때문에 곧 이것은 뭐냐 하면 의미있는 죽음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분이에요.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의미있는 죽음만이 진짜 살아있는 거에요. 우리는 죽어도 의미 없어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아무 의미 없어.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내가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남이라”. 그게 바로 그 인간 현실 자기 기초를 자기가 닦고 그걸 현실이라고 우기면서 그걸 다른 사람의 현실과 다투면서 싸울려고 하는 그 현실 속에 예수님의 공허함이 오는 새로운 현실, 공허함이 주는 새로운 현실이 여기 찾아오게 되면 이것이 바로 이제 어려워요. 이제 중요한 겁니다. 이게 뭐냐?


베드로 자체가 뭐냐 하면 이게 두 개의 현실이 있음을 보여주는 벽의 역할을 하는거에요. 베드로 자체가. 베드로 자체가요. 그럼 사람들 보기에는 뭐가 보입니까? 베드로가 분명히 보이겠죠. 베드로 살아 있을 때. 베드로가 보이는데 이 베드로는 소속이 뭐냐 하면 그들 보기에 공허한 세계 속에 이게 소속된 요원이에요.


그래서 베드로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현실은 객관적 현실은 없어요. 베드로가 어떻게 띠 띄고 원치 않는 길을 가든 말든간에 죽던 말든간에 그것은 주님의 현실이지 주님의 일을 보여주는 여파, 파동이지 베드로 잘났다 훌륭히 살았다 그걸 말하기 위한 현실은 아닌거에요.


그래서 뭐 주기철 목사 훌륭하고 뭐 누구 목사 훌륭하고 그건 질문 자체가 이미 불신앙 잘못된 거에요. 주님께서 이 공허한 현실에 초대할 때는 우릴 보고 뭐냐 하면 제발 신자를 신자 되지말고 뭐냐? 우리가 불신자로 초대받는거에요. 불신자로. 그래서 주님께서는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불신자가 되는 거에요. 왜냐? 불신자가 되어야 우리 기초는 우리가 더 이상 기대를 안 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문제가 자기가 신자라고 여기고 하나님 찾는게 제일 큰 문제잖아요. 인간이 찾을 때는 내가 신자될 때 하나님께서 날 알아줄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신자냐 신자 아니냐는 관심 없고 주님의 현실 이 공허한 현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허한 현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항상 신자인 우리를 뭐로 만들어 버리느냐 하면 신자인 자를 우리가 죽여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불신자 돼요.


우리를 불신자로 만드시거든 우리를 신자라고 우기고 싶어도 불신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거든 이미 주님이 찾아온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불신자에요. 날마다 불신자. 얼마나 편해요. 신자라면 오늘 콩고물이라도 기대하는데 아예 나는 우리는 불신자가 되면 이거는 뻔뻔스러워서라도 뭐 달라는 소리를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모든게 감사거리죠. 하나님의 은혜죠. 주님의 목표는 우리의 불신자되는 거에요. 우리가 신자 아닐 때만 주님이 주님다워요. 우리가 신자되어 버리면 주님의 하는 일을 우리가 이렇게 막아서버리는 거에요. 신자니까 이 정도 혜택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아까 이야기한 자기 기초의 확장, 자기 현실이죠. 자기를 위한 현실이죠. 그걸 또 계속 고수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것은 뭐였다고요? 돈이었습니까? 뭐였습니까? 재산이었습니까? 뭐였습니까? 네가 가장 사랑하는 네 아들을 바쳐라. 그러니까 인간 쪽에서 사랑해버리는 것을 두자로 ‘우상’이라고 했지요. 내 내면의 원하는 것을 바깥에 내놓으면 그게 나의 뭐가 된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아까 현대인들을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인공지능이라고 했지요. 인공지능. 이제는 결혼도 할 필요 없어. 여자하나 인공지능 로봇 만들어가지고 살면 돼. 똥 싸고 오줌 싸고 애완견도 얼마나 귀찮습니까? 일본에서 파는 개 있잖아요. 장난감 개. 짖기도 잘 짖지 노래도 부르지 똥, 오줌 안 싸지 아프지도 않지요. 짖으라고 할 때만 짖고 딱 하면 되니까. 늘 밧데리만 갈아주면 돼요.


바로 인간이 반려견을 키우는 이유는 내가 나하고 대화하고 싶어서 그래요. 왜? 내가 나한테 우상이거든요. 내가 나한테 우상이라서 그럴싸한 내가 그리운거에요. 그럴싸한. 나하고 죽이 잘 맞는 나를 원하는거에요. 나에게 위로해주고 나에게 달래줄 수 있는 우상. 그 내면이 바깥에 나오면 우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내 사랑이 예수님이 아니고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아시잖아요. 주님 주신 사랑으로 내가 아니까 나는 나에게는 어떠한 기초도 내면에 어떤 것도 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있어봤자 주님을 추방할 수밖에 없었던 나만의 현실이기 때문에. 나만의 현실에서 쫓겨난 분이 주님의 현실이라면 이제 그 주님의 현실이 나에게 찾아왔잖아요.


주님의 현실이 찾아와버리면 나의 현실은 주님의 앞에서 이게 편입이 되어버리죠. 합세된다고요. 합쳐져버리죠. 합쳐져버리면 베드로라 하는 이 사람은 베드로는 뭐냐 하면 주님의 일을 이 세상에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이건 베드로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냐 하면은 주님의 현실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귀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일 중요한 일이 이겁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


쉽게 말해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걸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 이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어요. 여러분은 뭐하고 있습니까? 누구 일 하고 있습니까? 똑같은 일을 해도 자기 자신 나를 불신자임을 폭로당하는 일이라면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입니다. 주의 일입니다. 내가 불신자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 달라는 소리 합니까? 못 합니까? 불신자 주제에 뭐 염치없게 달라고 해요. 불신자인데. 따라서 주님께 뭘 달라고 하지 않겠지요?


다시 말해서 나의 내면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요구하지 않겠지요? 왜? 불신자니까. 베드로가 주님 보시기에 왜 자기의 사랑의 근거를 기초를 주님한테 넘겼습니까? 자기는 뭐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신자가 아니고 불신자이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불신자는 옳고 그름의 의미 없어요. 나는 잘했지요? 착실했지요? 나는 좀 별로였지요? 그 자체를 아예 묻지를 않습니다. 내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를 아예 안 물어요. 불신자한테는.


여기 요한복음 21지 21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보세요. 무슨 상관이냐?


네가 생각하는 현실관을 여기에다가 집어넣을 수 있는 어떤 여지는 없어. 앞으로 너한테는 없어. 저 사람이 오래 살든 너보다 고생을 덜 하든 네가 왜 상관 그 일에 네가 왜 상관하느냐 이 말이죠. 너는 여기 불신자 자격으로 여기 편입됐는데. 불신자 자격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 믿음이라고 할 어떠한 기초가 내 안에는 없다는 뜻이에요. 그 기초는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주님한테 있지요. 주님이 찾아왔어야 되잖아요. 주님이.


20장에서 주님이 부활했지요? 21장에서 찾아왔잖아요. 끝이잖아요. 주님 쪽에서 찾아왔기 때문에 내 쪽에서 내 구원할 수 있는 어떤 근거를 내 쪽에서 준비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착한일 끌어 모을 이유도 없고 나쁜 일 벌일 이유도 없고 소급해서 착하든 나쁜 일 하든지 전부다 누구 일이다? 주님을 위해서 나는 그렇게 살아왔어야 한다는 그 일만 있다 이 말이죠.


앞으로 내 뜻대로는 되든 안 되든 네가 젊어서는 네 뜻대로 하지만 늙어서는 네 원대로 안되든 말든 그거는 이제 베드로 소관이 아닌겁니다. 그러면 전에 있던 베드로 입장에서 지금 예수님께 찾아온 베드로를 볼 때에 찾아온 베드로는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전에 있는 베드로를 만약에 고수한다면. 허망하죠. 허망한거에요.


“지금은 베알도 없고 뭐 지 인생도 없고 뭐 저리 살지? 네 인생 따로 챙겨야지.” 그렇게 오히려 쯧쯧쯧 거리고 측은하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이 베드로를 이렇게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 세상의 현실, 인간 현실에 대한 뭐냐 하면은 침투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대한 일은 없어요. 공허한 일을 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 내가 하는 일이 다 헛되고 허망하고 공허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것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21장 18절(불신자 되기)190716a-이근호 목사.hwp (174.0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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