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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9 23:54:11 조회 : 137         
강남-요한복음 21장 18절(불신자 되기)190716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요한복음 21장 18절(불신자 되기)190716b-이근호 목사



문제는 고정적인 것을 내 자신을 고정적으로 생각했다는 그게 이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 자신을 고정적으로 생각한 것. 인간은 뭔가를 믿게 되어있다. 인간의 내면 속에 바깥에 그것을 끄집어내서 하기 때문에 인간은 날 때부터 뭐냐 하면 신자다. 인간은 불신자 된 적이 없습니다. 항상 뭔가 믿습니다.


그걸 자기 최면이라고 하죠 자기. 계속해서 자기 최면 거는 거에요. 항상 믿어요. 믿을 때 그 내용이 뭐냐? 그 내용은 자기가 채웁니다. 이렇게 이렇게 현실이 이렇게 진행되면 참 좋겠다는 현실을 자기가 만들어놓고 거기에다가 자기가 만들어 놓고 거기에 자기가 절하지요. 믿습니다 하고 염원해요 간절하게.


그래서 인간은 불신자 된 적이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항상 신자입니다. 그런데 여기 오늘 요한복음 21장 16절 17절 보면서 베드로가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을 주님이 보증하십니다. 주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할 때 이게 이런 말이 우리한테는 낯설기 짝이 없어요. 왜냐 하면 주님이 보증하신다 라면 주님에다가 이걸 타인이라고 봅시다 타인. 남이 나를 보증하는 거에요.


남이 나를 보증한다면 이걸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보증 안 해주면 어떻게 할 건데? 보증 안 해주면. 여기서 갑자기 의심과 회의가 들고 막 불안한 거에요. 왜냐하면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내가 믿던 내용들은 결국 나한테 의미가 돌아와야 비로소 나는 믿는 것이 확증이 되고 단단해 지는데 도중에 인터셉트 해가지고 주님이 “너 믿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알아서 할게.”가 들어보면 상당히 위로가 되지만 안 해주면 어떻게 할건데 안 해주면.


그래서 이 본문이 어려운거에요. 아까 방금한 것을 다시 한번 해보겠습니다. 천천히 해볼게요. 내가 알아서 할게. 자식과 부모 사이에 “엄마 어떡해?”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게.” “여보 어떻게.” “내가 알아서 할게.” 보통 알아서 할게 하지요. 보통 남자들이 운전하게 되면 제일 운전할 때 운전의 적이 뭡니까? 조수석이죠.


조수석 때문에 운전이 힘들어요. 옆에 있는 다른 차 때문에 힘든게 아니고 조수석 때문에 힘들어요. 조수석 때문에. “걱정하지마. 나도 운전 나도 나 지키고 싶어. 그러니까 나를 믿어. 내가 알아서 운전할게.” 옆에 있는 보통 아내가 하는 말이 믿도록 운전을 해야지 이렇게 나오거든요. 믿도록. 이미 옆에 신자가 있다니까 신자가.


자기가 원할 때 이렇게 운전해야 그게 나는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고 이미 믿을 내용이 확정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것에 어긋나니까 못 믿겠다는 거에요. 못 믿겠다는 말은 뭡니까? 나는 나만 믿겠다는 겁니다. 고르기아스라는 소피스트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도 그렇게 이야기 했고요. 소피스트 하는 얘기가 인간은 모든게 상대주의라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가 하는 것은 자기가 무조건 옳다는 겁니다. 자기 견해는 무조건 옳다는 거에요.


그 말이 맞지요. 자기가 내뱉은 말이니까. 그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자기를 믿는 신자들이다. 이미 믿음이 있는 거에요. 내가 알아서 할게 할 때 내가 알아서 할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베드로가 이런 말은 안했지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이 알아서 한다는 것을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주께서 먼저 저에게 이렇게 사랑해줬잖아요 하는 그 고백이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건 베드로 이야기고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주님이 그 현장에 우리가 베드로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봅시다. 지금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에 예 우리는 선뜻 뭐가 나옵니까? 우리가 신자이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을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럼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죠. 세 번씩이나.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안 될 때 만약 그게 잘못이라면 주께서 알아서 할게 할 때 “예 주님이 알아서 할 것을 저는 인정을 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베드로가 이 베드로가 그 베드로가 아닐 경우에요.


이 베드로가 어떤 경우에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베드로가 뭐로 바뀌어야 하면 되냐면 이게 목자로 바뀌어야 됩니다. 이 점이 어려워요. 양을 치는 목자. 양을 치는 목자. 목자의 자격은 목자가 될 자격은 일체 내가 목자 알아서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 그것을 확신해야 돼요. 그럼 그걸 확신하려면 전에 나는 주님 오기 전에 나는 뭐가 아니다? 나는 목자가 아니다. 주님 오기 전까지 나는 목자도 아니고 나는 신자도 아니다. 신자 아니죠. 예수님 보고 세 번씩이나 배신하고 했으니까 신자 아닌거죠.


그래서 주님께서 주의 일을 하려면 늘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은 나는 목자 아니고 나는 신자 아니다 해야 우리가 불신자 되어야 뭐냐 하면 일이 돼요 일이. 주님의 목자 일이 되고 주님의 양의 일이 돼요. 주님이 찾아와서 내가 나 된 것은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은혜라고 할 때에 그게 우리가 믿어지고 동의된다고 하는 것은 뭐를 이미 포기한거에요?


내가 나서서 애써서 인생 이만큼 일구었다는 것을 포기한 경우에만 그런데 그걸 어떻게 내가 알아서 어떻게 포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포기 못해요. 그게 오늘 두 번째 강의의 어려운 점이에요. 일은 뻔해요. 주께서 오셔서 일을 하신다. 그러면 내가 내 인생에 손 댈 필요 없다. 이론은 뻔한데 내가 어떻게 내 인생에 손을 안대요? 우째 그런 일이. 어떻게 그런 일이. 내 인생에서 걱정을 왜 안합니까. 눈만 뜨면 하는게 내 걱정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집니까?


여기는 추가적인 하나님의 사명과 업무가 주어지게 되요. 주님의 업무가. 그게 베드로한테 뭡니까? 너는 내 양을 치는 목자라는 새로운 업무가 부여가 되는 겁니다. 업무가 부여되면 그 업무 앞에서 나는 뭐가 아니다? 나는 결코 네버 결코 나는 결코 스스로 목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그것은 일체 주의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인간은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뭘 하잖아요. 셀프하세요. 셀프하세요. 물 셀프하듯이. 하세요. 스스로 하는데 이 스스로라 하는 것은 어디에 쓸모 있느냐 하면은 무엇무엇이 아니다에 꼭 적절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합니다. 이걸 스스로 하는 것을 저는 늘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막 살자. 막 삽니다.


우리는 그냥 내 이기주의 내 욕심대로 막 사는 거에요. 그게 꼭 필요합니다. 주님한테 꼭 필요한 거에요. 전에는 우리가 신자 아닐 때는 누구한테 필요했어요? 나한테 꼭 필요했지요. 이 쓰레기같은 생활이. 그러나 이제는 안 하는게 아니고 주님의 꼭 필요한 소재가 되요. 주의 일에 소재가 된다고요. 그 음식쓰레기 퇴비죠. 더럽죠? 냄새나죠? 그런데 그게 비료하는데는 꼭 필요한거잖아요.


일산, 질산 이렇게 사료 만들 때 퇴비 만들 때 꼭 필요하잖아요. 우수한 퇴비로서 필요하듯이 쓰레기 같은 우리 이것도 쓰레기인줄 아시고 가져가는겁니다. 음식쓰레기 가지러 온 사람 이 음식쓰레기 안 가져가! 이런 음식쓰레기 차 봤습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죄인의 모습을 지신 이유는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라도 네가 죄 지은 것이 그 사랑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다 활용해주시는 거에요.


그러면 이제 진도 나가 봅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주신 목자와 양 이것을 하게함으로서 우리는 목자가 아니고 양도 뭐 양도 될 자격도 없지요. 자격도 없다는 것을 날마다 반복해서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주님하고 베드로하고 이루시는가? 아니에요. 주님이 주신 현실 속에서 주님이 주신 새로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다른 현실을 새로 만들어요. 다른 현실을. 만약에 아주 쉬운 천박한 예이지만 저의 예는 항상 천박해요. 천박한 예지만 어떤 막내 여동생이 셋째 여동생이 아파 누워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언니도 오고 둘째 언니도 왔는데 첫째 언니가 하는 말이 “야야 보약 달여 왔다. 네가 아파서 밑반찬 없을까봐 밑반찬 해왔다.” 하면서 와요. 그럼 언니 고마워하겠지요. 두 번째 언니가 와가지고 야야 네가 주께서 십자가 지고 오셔서 복음이야기 했어요.


자, 둘 중에 어느 것이 허망합니까? 2번이 허망하지요. 지금 2번 언니는 낯선 세계 낯선 현실을 소개하는거에요. ‘낯선 현실’. 아픈 현실에 전혀 안 맞는 다른 현실을 이야기한다고요. 그걸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걸 어떻다? 허망하고 허황돼요. 지금 그 일을 하는거에요 지금. 허망하고 허황된 속에서만 뭐가 나온다? 양이 생산돼요 양이.


그 허황되고 허망한 것이 뭐가 좋다고 그냥 그 이야기가 도는 순간 자기 자신은 그 순간 나는 이 땅에서 사실은 내 세계 속에서 내 세계를 움켜쥐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불신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 찾아오게 되면 순서가 이렇게 돼요. 주님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항상 졸지에 불신자가 돼요.


왜냐하면 내가 잘되는 내 기초를 다지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현실만 움켜쥐고 있는 아주 돈독한 신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들통나기 때문에. 노출되거든요. 이미 주님이 찾아왔다는 증거에요. 주여 내가 내 인생 가꾸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걸 우리가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주님이 찾아오셔야 가능한거에요.


그런데 세상에 있는 교회 보면 이렇게 성령 온 사람들은 잘 없어요. 없고 교회 와서 전부 흉내내요. 그걸 대구 강의에서 제목을 뭐라고 했던가요? 코스프레라고 했지요. 일본 만화에 나오는 그 세일러문복 입고 짧은 치마입고 막 화장 이상하게 하고 막. 만화인데 그걸 실제로 일본 청소년들이나 20대들이 그걸 그대로 화장하지요. 그걸 코스프레라고 하지 않습니까.


교회 전부다 코스프레하러 전부다 교회 나와요. 흉내내기. 모방하기. 그럴싸하게 신앙 티내기. 왜 그렇게 합니까? 내 내면에 있는 신앙인 이상적인 신앙인을 바깥으로 모방해서 내 행함으로 그걸 코스프레 하고싶은 거에요. 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내가 거기에 반하고싶은 겁니다. “아 내가 이정도 신앙이였었어. 아이고 기도 한시간반 해도 중간에 쉬는 시간이 없었네.” 이런 식으로 자기 기도에 자기가 반해서 미친 거에요.


자기 착함에 자기가 완전히 뿅하고 가는 겁니다. 이게 코스프레거든요. 흉내내거든요. 코스프레 이것은 사실 정신병자로 볼 수 있어요. 반할 사람 없어서 자기가 자기한테 반하는 것. 그러나 주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에서 주님의 현실은 솟아나는 현실, 솟아나는 현재에요. 날마다 현재가 솟아나는 반면에 인간의 현실은 이게 항상 이게 과거가 됩니다.


과거의 다른 말은 몰락이죠. 몰락. 달의 몰락이라는 노래 있지요? 몰락하는 것. 돌아서면 과거에요 이미. 돌아서면 과거. 아무리 해도 돌아서면 과거에요. 다시 하라고 하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왜? 이미 내 기억 속에 해봤기 때문에 에이 시시해 신선함이 떨어졌어 어쩌구 저쩌구. 특히 남편들이 아내가 밥해주면 하여튼 미역국 세끼를 못 넘겨. “또 미역국이야? 맨날 생일이야?!” 여자들은 스트레스 받는 것이 날마다 반찬을 새로 해야 되고 이렇게 해야 돼요.


물론 전업주부 같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같이 돈 버는데 지는 뭐라고 그냥 차려먹으면 되지 나는 마누라라고 그냥 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바꿔야 되고. 바꾸는 방법은 있어요. 바꾸는 방법은 내가 요령 하나 알려주게 되면 마트나 이런데 가면 홈쇼핑 보게 되면 볶음밥 25가지 나옵니다. 25가지 여러 가지 볶음밥. 매일 볶음밥 볶음밥 볶음밤.


볶음밥 한번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컵밥. 컵밥 9가지 나오니까 컵밥. 그거 지나면 햇반 사오고 그 다음에 미역국 오뚜기에서 나온 미역국 있어요. 한 1500원이면 사는거. 그거 사주면 돼요. 사람들이 절망 안 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사람들이 미치듯이 새로운 것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든게 자꾸 몰락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얀 쌀밥에다가 소고기국 하면 북한사람들의 여망이잖아요. 지금 서울 사는 사람들은 보리밥 찾는다고 난리에요. 이게 유행이거든요. 유행. 돌고 돌고. 돌아도 똑같이 안 돌아요. 나선형처럼 이렇게 돌아요. 조금 변화를 주면서 계속 돌게 되어 있다고요. 왜 그래요? 이게 뭔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목말라서 그래요.


계속 나는 믿고 싶어요. 믿으려면 신선한 것을 누가 공급해줘야 됩니까? 내가 알아서 노력해서 내가 만족할만한 것을 내가 가져와야 돼. 어디서 쟁취해와야돼요. 골프쳐봤다가 빠라빠라 빠라밤 이거 해봤다가 난 쳐봤다가 다도한다고 도 닦는다고 온갖 해도 그 재미 하나도 없어요. 성경공부 해봤다가 성경공부도 재미없어. 교회 나와봤다가 나오고. 전부다 이게 편의시설이고 유락 시설이에요 전부다 교회가.


나를 위해서. 왜? 나는 존경받아야 되니까. 되도 않는 꼴에 지가 교주라고 자기는 존경받아야 돼. 나는 행복해야된다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본질 자기 현실이 자꾸 과거로 몰락 꺼져가는 거에요. 지진 나면 땅이 꺼지듯이 자꾸 거기서 막 달리고 점핑점핑해도 점점 더 내가 딛는 이 땅은 어디론가 꺼져가고 있습니다. 자기 허물을 자기가 이길 수가 없어요.


자, 그렇다면 베드로의 경우는 어떠냐? 그럼 양과 목자가 양과 목자가 어떻게 사명이 어떻게 허무한 과거로 자꾸 소멸해가는 이 인간사에 대해서 거기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양이 목자를 살립니다. 양이.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하는게 아니에요. 구원받았다는 그 사람이 나를 살려요. 전도 받은 사람이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내 존재성을 내가 어디에 위치해 있냐를 깨닫게 만듭니다.


따라서 베드로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남을 구원하는게 아니에요. 구원받은 자가 매일같이 베드로를 구원해냅니다. 매일같이. 사도에게 구원받은 사람이 매일같이 사도를 사도답게 만들어내요. 왜냐하면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어떤 목자 자리나 어떤 양의 자리도 자력으로 여기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는 양을 줌으로써 우리 할 일을 깨우치고 목자되게 함으로서 양 귀한 줄 알게 만들고 목자와 양 사이에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목자도 양되고 목자도 뭐된다? 주님 앞에 한 마리의 양이 되지요.


따라서 목자 양, 양 목자 이렇게 될 경우에 여기서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은 ‘나’라는 베드로가 뭐로 바뀌느냐? WE. ‘우리’로 바뀌어요. 이것은 바로 성도와 성도끼리 사이에는 나, 너가 없고 모두 다 죄인과 죄인의 만남에서 있게 하는 이음새에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만날 사명도 없고 의미도 없고 만날 필요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는 사이를 성도라는 이름으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서로 만나게 해주는 것, 주님의 계획은 만나게 해주는 거에요.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요한1서에서 특히 요한1서 2서 3서 요한복음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해요. 사랑. 오직 하나의 only 하나의 계명 마지막 계명은 뭡니까? 사랑. 사랑은 1이 있어서도 안 되고 뭐가 돼요? 사랑은 반드시 2가 있어야 성립되는 관계 자체가 사랑이에요. 사랑. 제가 지난 지난번에 물었죠. 여러분 지금 사랑하십니까?


그게 현대인이 안 되는 이유가 모든 관심이 나한테 다 있어요. 나한테 다 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소유 또는 소유욕. 뭘 소유하느냐? 내 자랑거리 내 자랑거리 소유하는데 환장해버렸어요. 미쳐버렸어요. 사랑한다는 것은 이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는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리고 내가 내 인생 꾸려나가야 되고 여기에 정신 다 홀려버렸어요.


1811년 영국에서 벌어진 운동이 하나 있어요. 무슨 운동이냐? 러다이트 운동. 우리말로 번역하면 러다라는 사람들의 집합. 이 운동이 무슨 운동이냐 하면은 살 빼는 운동 그런 운동 아니에요. 다이어트 운동이 아니고. 기계라는 기계는 다 때려부수는 운동이에요. 그당시에 노동자들이. 기계들이 자동화됨으로 말미암아 손으로 가내수공업하던 그 시대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가지고 공장에서 모아가지고 해버리니까 집에서 하는 모든 것이 없어져버렸거든요.


그러면 수입이 떨어지는거에요. 그 원수가 누구냐? 원수가 바로 기계인거에요. 그래서 도끼들고 전부다 망치들고 공장에 기계 다 때려부순 그 운동이 러다이트 운동이에요. 지금도 이 비슷한게 있지요. 택시를 공유하자. 이걸 신공화주의라고 합니다.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 신공화주의로 나가야한다. 신공화주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소유가 아니고 공유다. 뭐든지 나눠쓰고 뭐 아나바다 운동인가? 아껴쓰고 있잖아요.


그래서 기업들이 협동주의 정신 이거. 이 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있어요. 택시공유하자고 하니까 누가 반대한다고 했습니까? 누가 반대해요? 개인택시부터 해가지고 이 사람들이 반대하는거에요. 왜? 개인택시 따는데 오천만원 일억 주고 샀는데 여기서 택시값 안 나오면 자본금 다 날리잖아요. 개인택시 자기가 자본주이기 때문에.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 소유가 아닌 거에요 소유가. 집도 공유해서 쓰자 공유해서. 집도 차도 뭐 이렇게 정수기도 모든 것도 같이 함께 쓰자. 커플하듯이 이렇게 함께하자 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랑이 없으면 뭐가 돼요?


사랑의 반대는 뭡니까? 소유죠. 소유. 소유를 많이 하는 것이 인간이 성공이다 보니까 자식들 양육하고 교육할 때도 뭡니까? 많이 끌어모으려면 네가 공부를 해야 돼 라고 전부다 소유주의로 나가버리는 거에요. 우리 교회 교인수가 많아야 돼 이것도 소유잖아요. 그러면 그 소유 때문에 당했던 자들이 있어요. 이 소유의식 때문에 당했던 자들.


구약에서 에스겔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피해 입은 자들이 있었어요. 그게 양들이에요. 목자가 양들을 소유하다 보니까 양들이 진짜 목자를 잃어버린거에요. 그래서 진짜 양은 마지막 때에 다윗의 자손에 와서 진짜 목자로서 오는 거에요. 다윗의 자손 예수님은 양을 하는데 양은 없어요. 지난 시간에 했지요. 양이 없다고 했지요? 양이 없는데 목자가 있으니까 비로소 뭡니까? 목자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양이 되는 거에요.


그러면 이 양과 양의 특징은 뭐냐? 양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본인 것이 아무것도 여기에서는 본인 게 아무것도 여기에 끼어들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어요. 자기 선행이나 착함이 여기에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사랑받아서 구원받았는데 자기 선행이 왜 끼어듭니까? 주제파악도 못하고. 이 현실이 어떤 현실인데.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찾아오신거에요. 왜 찾아왔는가? 목자가 목자답게 되기 위해서 한 거에요. 이사야 53장에 이사야 준비한다고 공부해보면 나타나는데요. 거기 나와있어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속건제로 십자가를 속건제로 봤거든요. 이사야 53장. 속건제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그냥 지신게 아니고 어떤 보상을 바랬는데 그 보상이 뭐냐 하면은 자기 백성이에요. 자기가 택한 백성.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그 지셨다는 그 보상으로 아버지께 받은게 뭐냐 하면은 내 백성 전부다 용서하기에요. 우리는 그 이야기 들으면요 “아 그거 믿을래.” 하잖아요. 그런데 그거 믿을래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지요. 믿는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 내 기초를 더욱더 다지기 위한 조치거든요. 나를 포기 못하겠다는 소유의식에서 소유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믿음은 나쁜 믿음,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이에요.


나 예수님이 용서했으니까 십자가 믿을래. 믿어봤자 그 십자가는 자기 소유가 되는데요. 이거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 밖에 몰라요. 사랑할 줄을 모른다고요. 그러면 주님께서 믿음을 주시되 결과가 뭡니까? 소유에서 벗어난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주겠지요. 그게 뭐냐? 양과 양. 양과 양 사이. 목자는 누구 밖에 없다? 주님만 목자고 우리는 다같은 그분의 양과 양이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그것을 주님께서 뭐냐 하면은 사랑으로 배급합니다. 사랑의 배급. 이거 괜찮네. 제목 또 바뀌었다 ‘사랑의 배급’.


사랑으로 배급한거에요. 배급아시죠? 외화 수입 업자가 각 지방 시네마 모든 영화관에다가 뭡니까? 배급하잖아요. 배급. 배급하는 회사 있잖아요. 한쪽에서 수입해서 다 배급하잖아요. 주님께서 주님의 자기의 사랑을 배급한거에요. 하기 때문에 배급하게 되면 배급받는 사람은 뭘 갖고 있습니까? 소유욕이죠. 소유욕은 자기가 자기를 믿는 신자지요. 소유욕이 뭐로 바뀌어요? 죄로 바뀌고 이 신자됐다는 이 자체가 뭐로 바뀝니까? 죄로 바뀌는 거에요. 신자 자체가 불신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안돼요. 양이라는 것은 소유에서 나오지를 않아요. 죄인이 죄인되었을 때 비로소 양이라는 것이 부여받지 목자나 양이나 죄인되었을 때 부여받는 것이지 자기가 괜찮았을 때 부여받는 사명이 아닙니다. 일부러 주님께서는 일부러 제자들과 제자들한테 배신당하고 일부러 제자들과 헤어졌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이 안 찾아온다. 그러면 그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요. 문제는 찾아와서 뭐냐 하면 너는 목자가 되고 너는 양을 먹이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그 양과 목자 일을 개입하면서 그 베드로는 어떤 사고방식이 유지됐느냐 하면은 나는 주님을 배신했다. 나는 나만 챙겼다. 그것이 늘 유지되는 조건하에 주님께서는 목자 되게 하시고 양 되게 하시는 겁니다. 철저하게 죄인이 죄인 되게 하시는 거에요. 그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랑할 줄 모르는 나만 사랑하는 그 죄인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 어떤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꾸 자기 죄만 자랑하고 자기 죄만 사랑하면 안 되잖아요. 하는데 그게 왜 안되지요? 묻고 싶어요. 그게 왜 안되지요? 그렇게 되면 뭐가 손해지요? 그러면 나 천당가는 기초가 위태위태하잖아요. 나 천당가는 기초가 부실하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말을 막 하고 싶을거에요.


왜냐하면 그게 우려가 된다는 것. 내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나는 지옥간다는 것은 내 미래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챙겨야 된다는 내 기초를 포기 못하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렬한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문제는 그걸 선하게 보는게 문제가 되는 거에요. 선하게 본게.


자, 다시 보겠습니다. 러다이트 운동은 내가 일거리를 잃어버려서 일거리의 원인을 찾아서 그 기계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애매한 도끼들고 기계 부수는 운동이 1811년에 있었다. 산업혁명 시대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행동을 오늘날 우리는 그런 행동 안합니까? 내 인생 망가졌다. 도끼들고 누굴 쳐야되지 않겠습니까? 누구 칠까요? 칠사람 많지요. 지금 현재 칠 사람 누구냐 하면 문재인이에요. 그 다음에 강경화. 왜 내 소유의 나라를 왜 못 있게 만드느냐. 잘못되면 미국으로 이민 간다 이런 식으로. 도망치겠다는 겁니다.


자, 진도 나가 봅시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있어서 베드로에게 그다음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고 18절에 그 말씀을 왜 하셨는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함으로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이미 주님 앞에 이미 소집 당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미 모든 세상에.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요. 부활하시면서 여러분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부활하시면서 어떤 현실관을 가지고 왔는가 하면 그 현실관을 저보고 묘사하라면 요한복음 1장입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복음 마지막장 하잖아요. 1장 다시 한번 볼까요? 길게는 말고 짧게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주님의 현실입니다. 옛날에 베드로가 몰랐던 현실이에요.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지요. 그새 소집당했잖아요. 모든 만물이 주님 앞에 소집당했지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지요. 그럼 이 세상은 뭐냐? 소집당할 때 이 사람들은 뭐가 돼요? 어둠이 되는 거에요 어둠. 어둠이 되는 거에요. 이 어둠이라는 현실 속에 빛의 자녀 베드로를 보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이 세상이든 저 세상에서 쫄지 말아야 돼요. 기죽지 말아야 돼요. 이들이 이 세상에서 돈 많고 부자 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거에요. 본인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엄청난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어둠의 세계에서 볼 때 이 빛의 세계는 뭐냐? 공허하고 허망합니다.


왜냐하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빛이 왔으매 어둠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걸 우리는 각오해야 돼요. 우리는 그들의 무시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참 고집 센 부모 복음 안 들어가지요. 왜? 그들은 그들의 세계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고집 센 부모는 평생동안 살아오면서 나름 자기 현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신자입니다. 누구에 대한 신자입니까? 내 자신은 절대로 선하다. 나는 괜찮은 존재다. 나는 하자 없다. 내가 별로 나쁘지 않다. 죽어도 아마 천당 갈걸? 이런 이미 자기 교리신학 자기 조직신학이 갖추어져 있어요. 그 사람들 신학자들이에요. 안 믿는 사람들도 신학자들이에요. 안 믿는 친구한테 교회가자고 하면 “내가 들어는 볼게.” 하거든요.


뭐냐 하면 내가 구축한 철학과 신학에 네 소리가 들을 여지가 있는지 한번 보자. 내가 한번 검토해볼게. 검토해 볼게 이렇게 되는 거에요. 대구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주님이 하는 원칙은 마태복음 11장 4절에 나와요. 이것은 아무도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받은 것 외에는 이것을 알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사도행전 마지막에 뭐로 끝납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지요.


이사야 6장에도 나오지요.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이 백성은 알지 못한다. 그걸 세자로 공허함이에요 ‘공허함’. 너무 허황되다 야~. 어떤 객관적인 예수 믿고 잘됐다는 어떤 객관성을 내놔라. 객관성을. 자꾸 객관성을 요구하는 거에요. 그것은 누구에게 이바지 하는 객관성? 내가 인생 제대로 산다는 것을 증명해줄 보증해줄 객관성을 가져와보라는 거에요.


이거는 누구를 믿는거에요?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한 신자입니다. 그 사람들 이해하는데 뭐 우리는 어렵지 않지요. 우리는 맨날 그렇게 사니까. 복음 알아도 우리 사는 행세가 남아 있잖아요.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으면 나는 내 인생 조진다. 어쨌든 울며불며 관리해야 된다는 것. 안 그러면 누가 내 인생 책임져 주느냐. 우리의 삶은 그거 외에는 못 벗어납니다. 그것 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의 엉터리 현실이에요.


현실인데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이 들어가 버립니다. 이 현실의 주인공은 이 가짜 현실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나’지요. 나는 사랑이 있다? 없다? 사랑 안하지요. 지금 나 사랑하기도 바쁜데 누굴 사랑해요. 대구 공부 때 했는가? 사랑이란건 뭐냐 하면 내가 일단은 나부터 사랑해놓고 남는 여력 있으면 남 사랑하지요.


아내가 남편 사랑한다는 말은 일단 자기부터 챙겨보고 자기부터 챙기고 남는거 있으면 남편 넥타이 자기 화장품부터 사고 남편 넥타이 사줄지 모르겠지만 모든 인간은 나부터 챙기고 난 뒤에 해요.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개도 마찬가지에요. 어린 애도 마찬가지고. 아빠가 좋아 엄마 좋아 까불 때는 뭐 사탕 얻을까 싶어서 까불지만 막상 자기 밥그릇 뺏겨보세요. 아빠고 엄마고 물려고 하지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에요. 부모가 내 인생 왜 힘들게 하느냐고.


나름 나 신자인데 나름 나를 지키는 자 아닙니까. 지키는 자인데 엄마 아빠가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괴롭게 하느냐. 네가 뭔데 이런 식이에요. 말은 미처 못 하지만 나중에 크면 말을 조리있게 할거에요. 전에 설교시간에도 했지만 병든 부모가 뭔데 내 청춘을 갉아먹습니까? 남은 미래가 창창한데. 내 자식 키우기도 힘든데 그 많은 돈 어디 갖다 다 날려먹고 요양병원에 가니 안가니.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고요? 참내 개가 웃겠다. 인간은 사랑할 줄을 몰라요. 인간은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이사야 1장에 나오는 거에요. 짐승보다 못해요. 소는 지 주인을 알건만 너는 어떻게 된게 네 창조주도 모르느냐.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주님께서 사랑이라는 현실로 온 거에요. 사랑의 원형은 뭐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목자에요. 그 목자다운 목자 되어라. 그다음 그 목자의 양이 되어라.


사랑하는 목자한테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너는 양이 되었다면 그 양을 네가 키워라. 네가 목자 되서 양을 키워봐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내리사랑이 계속 내리사랑으로 확장시키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일을 베드로가 무슨 수로 이 일을 해냅니까? 이 일을 못해요. 못했는데 아까 방법 내가 말씀드렸지요? 예상 못했는데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어렵습니다. 예상 못했는데 양이 출현해요. 출현.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한게 아닙니다. 이것은 베드로 요한의 고백이에요. 사람들아 내가 저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사도행전 3장 16절이요.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그 사람을 걷게 했다. 우리는 그의 목격자다. 목격자. 그 앉은뱅이를 통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또다시 주님이 어떤 일을 지금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그 현장에서 배우는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터진 공간이에요. 터진 공간. 터진 공간. 원래 이 공간은 꽉 차있어요. 눈에 보이는 가시적으로의 이어져있는 공간이에요. 그런데 공간에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하나의 아주 짧은 번개같지만 아주 짧은 사건 하나 터집니다. 그 사건이 뭐냐 하면 도저히 안 믿을 사람이 믿어져 버리는 거에요.


고집이 왕고집이라서 지 잘난 체 하는 인간이 그냥 무심코 던진 전한 사람도 무슨 하는 줄도 몰라. 그냥 무심코 던진 그 말에 십자가 복음이나 예수님 죽었다가 살아난 모습 우리가 죄사함 받는다 그 무심코 던진 말이 그 사람의 성령이 임하니까 그 사람이 그걸 믿어버린 거에요. 그러면 성령은 뭐냐?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이 꽉 차있는 공간하나가 터져버린거에요. 바깥에 있는 이 인간현실, 소유와 자기 잘남의 세계 이 어두운 세계에 빛이 들어온거에요.


빛이 들어왔는데 이걸 인간이 보려고 한다면 이미 이 터진 구멍은 다시 원상복귀되서 그 현장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뭐냐 하면 날마다 불신자가 되어야 되는 거에요. 난 지난 5일전에 어디서 은혜받았고 어디서 복음 전하는데 은혜 받더라 나 신자 맞지? 그렇지? 이미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간다고 했습니까? 현재에 남아있지 않고 어디로 간다고 했습니까? 과거, 소멸되가고 몰락해가는 거에요.


어제 있던 믿음도 몰락해야 돼요. 이미 지나가버려서 없어요. 지금 없는 거에요. 계속해서 주께서는 턱턱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통해서 우째 저런 일이. 저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이게 불가능성이거든요. 계속 불가능함. 허망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허망함, 불가능함 이거 같은 말이에요. 있을 수 없음. 그러한 믿을 수 없음. unbelievable. 그러한 그 사건들이 계속해서 현실 속에서 터질 때 주님께서 하나님의 그 천국의 모습을 생성하고 있는 겁니다.


그 현장에는 뭐가 생깁니까? 양이 생기는 거에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고 뭐 그거 어렵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이제 어려워요. 뭐냐 하면 이 양이 다시 양이 아닌 걸로 변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만약에 내가 양이 되어 버리면 나는 양을 소유하게 되어 버려요. 나는 신자가 되어 버려요. 신자인 나를 내가 소유해서 나의 삶의 기초로 삼아버려요. 이건 옛날에 했던 행세에요. 옛날 내가 스스로 나의 인생을 끌고 갔던 그 버릇을 똑같이 해요.


그러면 양이 양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여기에 새로운 계시를 줘버립니다. 새로운 말씀이라는 것은 다른 말씀이 아니고 그 말씀을 새로운 각도로 이해하는 이해의 폭을 넓혀 버리고 신선함을 줘버려요. 그 말씀에 대해서. 이걸 제가 수련회 때 두 번째 제목을 정했습니다. 제목 정해도 믿지 마세요. 언제 바뀔지 몰라요.


첫 번째 제목이 뭐냐 하나님의 욕설이고 두 번째 제목이 뭐냐? 예언의 변경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변경이에요. 분명히 한다고 해놓고는 안해버려요. 앗수르한테 망한다고 해놓고 안 망해요. 바벨론한테 망해버립니다. 예언이 변경됩니다. 왜 예언이 변경되느냐 하면 인간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인간은 괜찮다 싶으면 내 소유로 만들어 버려요. 자기 자랑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주님이 더 이상 필요 없어요.


그러면 모든 것이 요한복음 21장 18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알아서 내가 살아가요. 신앙생활 내가 알아서 합니다. 띠 띄고 원치 않는 곳으로 가는 것 그건 존재하지 않아요. 왜? 내가 신앙이라는 새로움에 내 기초를 확장시켜서 그걸 나를 위해서 새로운 현실로 이미 변조됐기 때문에. 이 현실이. 주님이 구멍 뚫은 현실이 아니고 “주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제 신앙인입니다. 제가 말씀 잘 지키고 순종하겠나이다.” 이렇게 나와 버려요. 이래가지고 교회 10년 20년 계속 다니는 거에요. 이래가지고. 가짜인데.


계속 양은 매일같이 양이 되야 되고 목자는 매일 같이 목자가 되려면 매일같이 사랑을 알아야 돼. 매일같이 사랑. 한번 사랑 안돼. 진짜 사랑은 매일같이 하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매일같이 우리를 신자라고 여기는 우리를 늘 불신자로 바꾸어 주시는 기쁨을 주십니다. 불신자가 왜 기쁘냐 하면 더 이상 나를 안 믿어도 되니까. 나한테 어떤 책임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거 내 인생 아니니까.


짧은 현실이지만 내 인생에 구멍나야 돼요. 구멍이 뚫리고 나는 신자다 하고 보는 순간 이미 구멍은 다시 원상복귀되어가지고 허망해져 버려요. 네가 5분 전에 아 은혜 받았습니다. 5분 후는? 은혜 있었나? 은혜 안 같은데.. 다시 허망해져버리는거에요. 내가 나를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증거는 주께서 주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서 군데군데 내가 일한다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있음을 폭죽 터지듯이 늘 그것을 보게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갈수록 그 믿음의 깊이와 높이라고 하지요. 이제는 옛날 시시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고 시시한 것은 은혜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이제는 온 천지가 폭죽처럼 다가올 수가 있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전라도 가서 이런 연설을 했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아직도 일본이 자꾸 규제하니까 우리에게는 아직도 배 12척이 남아있는 이순신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했어요. 그걸 보고 한나라당 어떤 여자 의원이 하는 말이 문재인 장군은 12척이 아니라 1척 갖고 있다는 거에요. 1척이 뭐냐? 세월호. 1척이 12척을 이겼어. 세월호를 붙들고 정권 교체시켰어요.


마지막 남은 한척도 우리에게는 없어야 돼요. 왜? 주께서 보증했기 때문에. 주께서 나를 하나의 양으로 삼으시고 계속 양답게 우리로 하여금 불신자로 만들어 버리는 거에요. 네가 믿기는 개코 믿어? 사랑할 줄도 모르는게 뭘 믿어. 너는 너만 사랑하잖아 라는 꾸중을 늘 들을 때 우리는 이 주님이 찾아오신 새로운 현실 속에 놓여있음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기 22절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입니다. 무슨 상관이냐? 다시 말해서 사랑받은 사람은 남하고 양과 양 사이거든요. 이게 어려운데 양과 양 사이에서 나도 양이다 나도 신자다 너도 신자다하면 안되고 이 관계가 사랑하고 엮어지면 둘 다 신자고 사랑 없으면 둘 다 신자 아니에요. 한쪽이 사랑한다고 신자되는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뭐가 중요하냐 하면 어떻게 저 인간이 어떻게 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걸 알지? 제 말 잘 들어 보세요. 저 사람이 어떻게 믿음이 좋지? 이 이야기가 아니고 저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죄인임을 알지? 저 미친거 아니야 저거? 저 코스프레 아니야 저거?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인 척 하는거 아니야? 진짜 죄인이야? 할 때 갑자기 나는 뭐가 됩니까? 저 사람 볼 때 나는 뭐가 돼요? 부끄러운 존재가 될 때 이게 바로 양입니다. 양이 됩니다.


그런데 뭐가 양이 아니냐 하면 저 사람이 죄인됐잖아요. 나 죄인입니다라고 진짜 죄인으로 살아가요. 나도 못지않게 죄인되야지 이거는 아니에요. 이거는 양이 아니에요. 이거는 배틀하는거에요 죄인배틀하는거에요. 부끄러움을 느끼는 거에요. “아 참 너는 참 좋겠다. 나는 이렇게 까불고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이게 바로 성도의 고백이에요.


남을 볼 때 나보다 낮춰보는게 아니고 그 남을 보면서 여기서 남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자, 세상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고 성령이 임한 사람이 그냥 아무렇지도 주님 생각하면서 움직일 때 교회 봉사한다고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거에요. 아무 생각 없이. 이거 하면 복을 얼마나 받겠느냐? 이거 하면 내 가정이 잘되느냐? 없이 그냥 할 때. 아이고 집사님은 일을 혼자 다합니까? 죄인된게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할 때 우리가 거기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 둘 사이에는 형제간이고 그 순간만 그래요. 그 순간만. 그 순간만 되는데 그 순간이 어딥니까. 이거는 기적이죠. 보통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귀한 기적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만나면서 우리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 주께서 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어떤 원수라도. 나 자신의 들뜸과 까붐과 신자됐다고 우기는 그런 내 기초를 내가 다지면서 내 인생 따로 챙기는 내 현실을 양보 못하고 고집부리는 것 이거는 사랑이 아니고 양도 아니고 목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로 주님께서 다시 깨우치기 위해서 우리의 그 잘난 것을 과거 현재 깨우치기 위해서 이런 사태를 유발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성도인 것을 우리가 무시했습니다. 남을 부러워했고 세상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탐을 내었습니다. 가장 귀한 것 주님의 사랑과 영생을 받았사오니 이제는 죄인임을 깨닫고 이제는 양으로서 주님의 목자만 드러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강남-요한복음 21장 18절(불신자 되기)190716b-이근호 목사.hwp (187.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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