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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3:58:11 조회 : 102         
20191004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떡 이름 : 한윤범(IP:221.147.126.52)
20191004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떡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4장 1절부터 9절까지 하겠습니다. 1절부터 보게 되면 제단 중에서도 성소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성소구조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약간 큰 텐트라고 보면 됩니다. 동쪽으로 입구가 나 있는 큰 텐트.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가서 찍은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적이 있지요. 우리교회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동쪽에 문이 나있고 제단이 있고 물두멍이라 해서 손 씻는 데 있고. 성소 입구에서 삼분의 이 지점에 지성소 입구엔 커튼이 쳐져 있고요. 지금 레위기 24장은 성소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체 입구가 동쪽이라면 성소 북쪽에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 떡이 한쪽에 여섯 개씩 두 줄로 모두 열두 개 떡이 있고, 안이 어둡기 때문에 남쪽에 조명시설을 해놨어요. 중앙 가지가 있고 양 옆으로 세 개씩 총 일곱 개의 등잔을 준비하고, 레위기 24장은 등잔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감람유, 기름이죠. 기름 이야기부터 나와 있어요.

지금 레위기 24절 1절에서 9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이야기할 때 유일하게 생물의 가공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떡입니다. 나머지는 생물이 아니지요. 곡물에 인간의 손을 가해서 만든 것이 여기 열두 개의 떡이 있습니다. 이 떡은 칠일마다 교체가 돼요. 이 떡은 누가 먹게 되느냐 하면, 곰팡이 폈다고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들이 먹게 돼있다. 그런 식으로 레위기 24장에 돼있습니다.

오늘 강의 초점은 바로 떡에 관한 문제에요. 논리적으로 길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떡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어디서 근거 되느냐 하면, 여기 떡의 개수가 근거가 되겠지요. 떡이 몇 개지요? 열두 개. 열둘 하면 떠오르는 게 뭡니까? 이스라엘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떡이라는 개념은, 이걸 누가 먹게 돼있어요? 거룩한 인물의 양식으로 소비가 된단 말이죠.

아론 제사장이 거룩한 존재니까 거룩한 대변자로 이 땅에 나타났으니까 이 떡은 결국 하나님의 음식과 하나님이 잡수시는 음식물(땟거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뭘 먹어야 살듯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계속 산다는 것은 땅에서 계속 공급하는 게 있어야 되겠지요. 그 떡을 계속 하나님이 잡수심으로써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이라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계속 지속시켜 나가겠다는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레위기 24장 당시에 그냥 떡이에요. 곡물을 가공한 떡입니다. 송편 정도는 아니겠지만 호떡도 아니지요. 그냥 떡이지요. 이 떡이 곡물의 가공물이 성소 안에서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지만 바깥에서는 특별히 제사장의 용도로 추가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떡의 떡 됨은 성분과 관계없이 어디에 놓였는가? 위치와 관련돼있습니다.

이 떡이 어디에 놓여있기에 하나님이 의미 있게 수용하느냐는 겁니다. 떡 자체가 잘 만들었다, 맛있다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모양이 둥글다, 네모다, 관계없습니다. 이게 어디에 있는 떡이냐? 이 떡이 하나님의 성소 탁자 위에 놓인 떡이에요. 성소라는 거룩한 곳. 이게 왜 거룩하냐 하면, 일반인들이 못 들어가니까 거룩한 곳이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거룩한 거예요.

거룩한 장소에 놓인 떡이니까 이 떡이 성분상 바깥에 나가면 일반인도 먹을 수 있는 떡이에요. 하지만 위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다른 사람들, 비 거룩한 자가 먹을 수 없는 떡으로써 제사장,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잡수시는 떡으로써 규정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드리는 이 떡이 성소라는 위치가 그렇게 떡의 모든 본질 가치를 둔다면, 만약에 성소가 확장된다면 우주까지 성소가 팽창되고 확장된다면 덩달아 뭐도 확장되느냐 하면, 떡이라는 것이 점차 뭐로 바뀌느냐 하면, 떡이 인물 또는 사람들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떡은 그냥 곡물 찐 거죠. 사람일 수 없어요. 떡이 왜 사람입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6장 48절에 가면 이 떡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인물로 바뀌어요(“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 떡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뀝니다. 요한복음 6장에도 나와 있고 여러분들의 너무나 잘 아는 기존 교회에서 일 년에 두 차례씩 하는 정기적 하는 성만찬이 있어요. 이것은 내 떡이요 내 살이요.

그것은 뭐냐?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성소의 확장입니다. 성소의 확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거죠. 성소 안에 있는 떡과 성소 바깥의 일반인들이 명절에 먹는 떡과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떡으로 보지 마라. 이는 하나님이 지정한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 장소에서는 모든 의미가 거룩한 의미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착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 마시고요 우리가 어디 안에서 살아가는지 봐야 돼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습니다. 기도 제목으로써 인간은 선행으로 구원을 바꿔서는 안 된다. 현찰 주고 상품 얻듯이 선행 주고 구원을 받아내는 그런 방법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장소가 날아가 버려요. 나 있는 장소가 괜찮은 장소라고 스스로 자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장소는 뭐냐?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더러운 장소에요. 장소가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니까. 거룩한 장소가 아닌 데서 아무리 착하게 바르게 살아도 그 인간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장소로부터 어떤 혜택을 입지 못하면 그 인간은 거룩한 떡이 될 수 없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떡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그럼 그 장소가 왜 이스라엘 내에 생겼습니까, 라고 질문을 할 만 한데 원래 그 장소는 어떤 장소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이렇게 보면 쉬워요. 성소, 크게 보면 성막이라 할 수 있는데 성소, 성막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없는 장소에요. 없는 장소가 이미 기존에 있는 장소, 인간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없는 장소가 침범하고 이게 이깁니다. 승리하죠.

장소 싸움에서 기존에 없는 장소가 새로 생기면 그 장소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없는 장소가 있는 장소에 파고 들어왔다는 말은, 기존에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아담의 자손들 틈바구니에서 분명히 아담의 자손에서는 이런 인간이 태어날 리가 없어, 라고 하는데 이게 태어난다고요. 그런 특수한 하나님의 백성이 태어난다고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모세가 성소의 모든 모형이나 성소의 모든 규격이나 성소의 모든 설계도를 지상에서 인간들과 협의해서 만들어낸 게 아니고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애굽에서 경험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괜찮은 곳이라고 여기시겠지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계실만한 장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설계된 장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만들어져야 돼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대리석 깔고 파이프오르간 설치하고 성가대석 웅장하게 만들고 고딕양식으로, 서양 중세 13~15세기를 대성당의 시대라 하잖아요(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표곡, 대성당의 시대). 대성당의 시대, 절대군주에서 자금이 들어오니까 삼포제로 인하여 잉여 생산물이 나오고 잉여 생산물들이 국가재산으로 모이니까 백성들을 하나의 종교,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해서 저 천국을 내다보는 첨탑의 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게 고딕이에요. 로마네스크가 아니고 고딕이라고요.

건축양식이 바뀌면서 권력구조도 병행해서 표상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성당 짓는데 130년 걸리고 이래요. 유럽에서 제일 높은 성당은 제가 알기론 독일의 퀄른대성당이에요. 가보니까 아직도 수리하고 있어요. 맨날 청소해요, 맨날. 지금은 대단한 관광수입이죠. 인간의 모든 기술과 모든 지혜가 거기에 다 집약돼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성전이라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왜?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잖아요. 그런데 그 성전을 주께서 인정을 안 했습니다. 이 땅의 성전은 아예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저는 성전의 파괴라고 봅니다. 성전을 폭탄장착해서 파괴되는 걸 인정 안 하고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파괴돼야 돼요.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파괴될 때 이 성전은 복 받은 겁니다. 왜? 파괴된 그 폐허에 비로소 성전이 되기 때문에. 왜 이런 원리가 있느냐 하면, 주님 자신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성전이 있고 더 어렵게 말해서 두 종류의 시간의 있습니다. 하나의 시간은 멈춰진 시간이고 또 하나는 불확실성 속으로 끌려가는 시간이 있어요.

인간들은 그 어떤 시간이 있던지 간에 현재와 비교해 볼 때 미래는 공허한 동굴 같아. 지금에 대해선 알겠는데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특히 주식투자한 사람들한테는 내일이 늘 조마조마하지요. 주식투자라고 해봐야 쪼는 것과 같은 거니까. 언제 사고 언제 팔면 되느냐. 그게 일종에 도박이고 투기거든요. 말이 투자지 투기잖아요.

지가 그 회사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투자합니까? 그냥 판돈 던져놓고 빨리 챙기는 것뿐이죠. 주식이 바로 자본주의의 꽃이고 인간은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중소기업해서 상품 팔아 돈 버는 것보다 부동산 투기나 그것도 옛말이고 주식투자해서 돈 버는 거 버는 거라고 사장들 자기들끼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회사 돈으로 해서 안 되면 말아먹으면 그만이니까.

이게 뭐냐 하면, 불확실성이에요. 모든 게 투기성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은 뭐냐? 투기, 도박하는 거예요. 나는 뭔가에 도박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도박하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에. 매일 한 순간 한 순간이 도박이에요. 여자들은 말리지요. 남자들은 지루하다는 거예요. 교사 때려치우고 장사할까? 맨날 그 생각이에요. 교사보다도 주식투자하자. 셋째 시간 있고 일곱 째 시간 있다면 그 사이에 컴퓨터로 주식 얼마나 올랐는지 보지요. 교감 선생님은 혹시 그런가 하여 지켜보고.

이 세상의 불확실성에 기대를 거는 반면에 이미 멈춰진 시간이 있어요. 멈춰진 시간이 되게 되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자체로서 없다가 됩니다. 없다가 이해 안 되면 앞에 가치라는 걸 집어넣어요. 나는 가치 없다. 나는 무의미하다. 내년 되도 무의미하고 5년 후도 무의미하고 죽어도 무의미하고. 따라서 사전에 가치 있는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홀로 있으면 가치 없어요. 이건 하나님이 받아주질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니까.

기존의 시간에 시달리고 기존의 공간에 시달려요. 계속해서. 여기 살다가 캐나다 갈까? 캐나다 갔다가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캐나다 물가가 우리나라 두 배에요. 이게 살 수가 없어요. 세금 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방법은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파괴하고 친히 파괴시킨 그 장소를 성소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성전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존 성전을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성전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전 파괴인데 개인적으로 하면 자기 몰락입니다. 오늘 제목은 이건 아닌데 이것 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인간은 자기가 몰락하지 않으면 천국이 안 보여요. 주님이 안 보이게 돼있어요. 인간은 아까 투기하는 재미로 산다 했는데 저는 자기가 몰락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나는 없는 존재였어요. 자꾸 있음을 붙들면 안 돼요. 있음은 미래를 기대해서 내가 괴로워서 못 살아요. 내년은 잘 되겠지, 후년에는 잘 되겠지. 있기 때문에 자꾸 그런 걸 기대한다고요.

주머니에 돈 좀 있으면 근질근질해서 가만있질 못해요. 자꾸 도박판을 기웃거리면서 이것 바쳐서 여섯 배, 열 배 따볼까? 자꾸 그런 생각해요. 아예 주머니에 돈이 없어야 쓸데없는 생각 안 한다고요.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의 모든 카드들을 다 조회하고 전화번호까지 조사해서 남편한테 돈 한 푼 안 주잖아요. 특히 퇴직하게 되면. 하나하나 검사 다 받고 현찰 안 주고 카드 쓰게 해서 카드사용내역 다 알도록 만들어요. 쓸데없이 다방 마담한테 쌍화차 몇 잔 사줬는지. 나이 많은 영감들 이야기죠. <낭만에 대하여> 해서 쌍화차 사주고 커피 사주고 매일 출근하면 곤란하거든요.

인간은 가지고 있으면 없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있으니까 내 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자아가 피어납니다. 난 이만큼 있는 이게 나다. 재산이 이만큼 있는 그게 곧 나야. 그러니까 그것은 특별한 나를 계속해서 미래까지 이어지니까 멈춰진 시간이 아니고 이것은 영원히 끌려가 미래로 그것도 불확실한 어두운 미지 동굴 속으로 끌려가는 가련한 영혼이 되는 겁니다. 미리 완전히 멈춰야 돼요. 이미 종결돼야 돼요.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는 미리 확보돼야 되지 가보면 알겠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인생 살면 안 됩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성막의 구조를 다 보고 땅에 없는 곳에다 없는 건축물을 할 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찾아온 줄 알지요. 그게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을 없애기 위해서 온 거예요. 없음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자기 계실 곳이에요. 이게 주님의 자기 처소에요. 이 성막이.

그래서 성막에 있는 모든 구조는 누굴 증거하느냐 하면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새로 생겼으면, 없는 데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화살표 여기에다 이 관계 주님이 계실만한 곳이라는 취지가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야 돼요. 이어져져야 이스라엘이 되지 몇 번 드리고 그 다음부터 이만하면 됐다고 하면 단박에 관계 자체가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이라 할 때는 한 번 소유하면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이 성전답게 만들어가는 친히 작업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작업의 원칙이 뭐냐? 그것이 바로 오늘 레위기 24장 본문이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 안에서 주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레위기 24장을 봐라. 24장 대로 내가 일할 테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뭡니까? 너는 이익 없어. 내가 네 속에 거한다는 것뿐이지 주님 이익, 내 이익 따로 이익이 없어요. 주께서 내 마음의 평수를 넓히면 우리는 주님 안에 들어있는 셈이 되지요. 내 안에 주님은 들어오지만 내 안에 들어왔다는 나는 점점 더 없어지고 주님이 전체를 차지하고 그 주님 안에 내가 새롭게 등장하지요.

마술사가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보자기에 집어넣고 손을 넣으니까 비둘기 하나 나오잖아요. 여수에서 누가 벌인 마술하곤 차원이 다르지요. 카드 숨기는 마술, 어설픈 아마추어가 생전 처음 하는 마술하곤 달라요. 마술사는 정말 없는데서 비둘기 하나 만들어냅니다. 주님의 솜씨가 그거에요. 분명히 나는 주님 앞에 죽었는데 왜 죽은 내 대신 새로운 자아가 주님 안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그게 떡이란 말이죠. 떡을 빚은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로 빚은 거예요. 누가 맛있게 드시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맛있게 드시기 위해서 그 떡을 빚은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그 떡은 늘 있습니까, 며칠 만에 교체됩니까? 칠일 만에 교체되지요. 칠일은 안식일을 이야기합니다. 레위기 24장 8절에 보면, “항상 매 안식일에” 안식일이 등장하거든 여러분, 이것 하면 됩니다. 창조, 새 창조.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는 거예요. 안식일마다.

그러면 안식일마다 뭘 하느냐? 제사 드리거든요. 제사 드릴 때마다 새로운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은 제사를 몇 번 드립니까?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몇 번 드리는 게 아니고 뭐예요? 그걸 단번에. 단번에 드리심으로서 주께서는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 안에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 단번을 단번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존에 육신을 가진 인간세계의 시간관으로서는 이 단번이 단번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고 반복으로 드러나요. 그러니까 매 안식일이죠. 현재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 땅이 지니고 있는 보여주고 있는 시간성 속에 있어요. 기존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거든요. 그런데 여기 성소에 있는 시간은 안식일마다 반복이 되는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쭉 가면 동그라미, 큰 회전차 있지요. 뺑뺑 돌면서 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는 방향성이고 지상에서는 칠일마다 바뀌는 반복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선 실감이 안 나지요. 그렇다면 제가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한 초월 – 일반성 – 초월 – 일반성, 이런 식으로 반복을 설명했어요.

성령을 받으면 초월합니다. 이 땅에서 새 사람 돼요. 새 사람 되는데 이게 일반화되진 않아요. 나,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에 나가면 일반화되는 게 아니고 갑자기 자기 우월이 돼. 나, 잘났다가 돼버려요. 보편화되지 않고.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인간이 육신이 있으니까 육신적인 욕심과 죄가 들어가게 되면 초월되었다고 까불다가 내가 죄인이지, 하면서 모든 것은 감사로 이어지면서 특별한 감사가 아니라 있는 것 자체가 성도된 자체가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몇 분, 몇 시간 못 가요. 나, 구원받았다고 까불다가, 이게 초월이거든요. 그러다가 새로운 애가 아프다든지 가정에 사업이 안 된다든지 하면 또 짜증을 부리면서 “주님이여,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이야기가 또 나오는 거예요. 주님만 쳐다본다고 하다가 주님 쳐다보지 않아요. 그 다음에 갑자기 자기 잘난 맛에 또 깨져서 역시 주님만 쳐다봐야 되는구나.

그러니까 일반성은 뭐냐 하면, 지상에 나타나는 천국의 모습입니다. 이 천국의 모습을 내 육신이 가리고 있어요. 가리고 있는 것을 성령이 와서 때려치우는 겁니다. 때려 칠 때 악마가 와서 협조해줘요. 악마 없으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악마는 우릴 교만케 하거든요. 자랑케 하고 항상 섰다고 여기고. 섰다고 여기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잖아요. 맨날 우리는 나 혼자 있으면 돼. 나는 잘났어. 계속해서 신앙생활하면서 되풀이돼요. 마치 이스라엘 사람 같아요.

제가 악마가 도와준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 초반기에는 광야가 도와줘요. 일주일마다. 만나가 주어지되 일주일 되면 만나를 끊어버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만나 없이도 주께서 살려주신다는 것.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주님한테 무슨 이득을 뽑을 것이냐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계속 우리로 자기 필요한 것을 뽑아내는 대상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어요.

우리가 반복해서 구원받는 반복해서 은혜 받는 감사가 나오는 것도 우리 좋으라고 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서 쪽쪽 뽑아낼 것 뽑아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릴 홍삼 주스, 맛있는 음식으로 보는 거예요. 이 맛있는 떡 봐. 매 일주일마다 주님은 잡수세요. 성소 안에 있는 테이블 위의 떡 열두 개를 늘 잡사요. 열한 개 잡숫고 배부르다 다음에 먹지. 그런 것 없어요. 열두 개를 늘 갈아치워야 됩니다.

언뜻 무슨 생각납니까? 우리나라 조선시대 제사 드릴 때 제사 지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대문간에 보면 하얀 종이 위에 음식 쪼가리들 있지요. 그건 왜냐하면 지나가는 고양이나 쥐가 먹고 우리 가정에 해코지하지 말라고 귀신한테 좀 떼어주는 거예요. 하여튼 귀신한테 인색해. 이것 먹고 떨어지란 말이죠.

그러니까 지난밤에 자기 조상한테는 밤, 대추 이만큼 세워놓고 아침에 귀신한텐 조금 떼어주는 거예요. 귀신은 아직 구천을 떠도는 미완성 死者에요. 죽은 자거든요. 빨리 니 집에 가라고 보내는 그게 귀신들이란 말이죠. 귀신들이 들어가면 재수 없다고. 그러니 조상들도 신이 뭘 먹는다? 인간이 먹는 음식물을 고기 먹는다는 생각을 조상제사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조상제사가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전 세계 모든 민족에 다 있어요.

신과 인간이 교류할 때 인간이 먹는 음식을 드리면 신은 받아먹고 복을 준다는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세계가 그런 줄 아시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될 때도 하나님이 나타날 때도 인간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인간의 문화와 전통 그 속에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과 교류가 가능하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그만큼 낮아져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범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교류를 하나님 쪽에서 시도한 겁니다. 구약 때는 그래요.

신약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교류가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신약 때는 이미 구약을 통해서 인간에게 받을 건 없음이 확정됐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무것도 안 받겠다는 거예요. 십일조가 되던 감사가 되던 모든 것은 네 것은 안 받겠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하면 참 편하다고 하는데 편하기는요 죽이는데요. 죽여 버려요. 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죽여 버려요.

아직 떡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안 했어요.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떡을 드린다는 것은 떡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곡물 찧어서 떡 만들면 되니까. 이 떡을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 하나님의 설계도로 만든 성소 안에 인간의 떡이 테이블 위에 열두 개가 들어온다는 사실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을 안 받는다고 하면서 이 떡을 잡수시는 이유는, 인간의 것은 안 받는데 여기서 무슨 의미를 추구하느냐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내가 그것을 받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이 드린 것을 받겠다고 시작하지만 안에 있는 정답은 뭐냐? 나는 새로운 피조물을 받겠다가 돼요. 새로운 피조물이 만든 것을 받겠다, 에서 출발하지만 새로운 피조물 받겠다가 돼버려요.

그러면 인간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떡을 열두 개 만들겠지요.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었으니까 하나님께서 이 떡을 계속해서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안 받겠지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자체를 떡으로 받겠다는 그 취지에 의하면 떡을 안 받겠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점차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그 과정을 인간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거예요. 내가 드리는 떡은 안 받는다는 쪽으로 뭔가 하나님께서 몰아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되는 겁니다.

좀 어렵더라도 참아주세요. 쉽게 하겠습니다. 말라기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여러분, 제사장이 아무리 바보라도 떡 만들다가 떨어져 흙 묻은 걸 털어내고 그걸 제단에 드리겠어요? 아무리 성의 없이 떡을 제단에 드려도 상사의 커피 타면서 침 뱉는 것처럼 떡이 너무 깨끗해서 싫다고 흙 묻혀서 제단에 바치겠습니까?

적어도 손 씻고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제단의 떡은 성의 없이 하는 떡이 아니에요. 성의를 다해서 합니다. 그게 뭐 어렵습니까. 정신 바짝 차려서 떡을 만들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잡티가 없는 고운가루로 고운 떡을 올렸단 말이죠. 전통적으로 올린단 말이죠. 무성의하게 오리는 게 아니고.

그런데 하나님께선 말라기에서 무슨 떡이라 합니까? 아이고, 깨끗한 떡이라 했어요, 더러운 떡이라 했어요? 더러운 떡이라 했거든요.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떡 드릴 때 상투적으로 드리는 거예요. 그냥 늘 하던 마음가짐으로 드린 거예요. 상용 적으로 하던 대로 매뉴얼대로 드린 거예요. 사람의 마음을 그 떡이 표현하는데 제대로 드릴 마음이 없이 드렸다는 이야기에요. 더러운 떡.

그러니까 더러운 떡이 어떻게 마음을 고약하게 먹어서 더러운 떡이냐고 분석하면 안 돼요. 그들은 결코 고약한 마음으로 드린 게 아닙니다. 반복해서 하다보니까 점차 크게 더 넓게 깊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들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고 그냥 반복해서 드린 거예요.

인간이 인간 자체를 문제 삼아야 되는데 인간은 떡 달라 해서 떡 드렸고 제사 드리라 해서 제사 드렸지 나는 지금 이 수준이 괜찮게 보이니까 수준을 유지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그 안일한 정신상태,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을까요, 변화 못 시킬까요? 변화 못 시키니까 그냥 이 수준으로 나가면 받아주겠지, 하는 거예요. 주님은 달라지기를 원하는데 인간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도대체 그 내용에 대해서 알 길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시험 치면 백 점이에요. 처음에는 백 점 맞았다고 엄마가 맛있는 걸 해줬어요. 두 번째도 백 점이에요. 또 맛있는 걸 해줬는데 전에는 맛있는 것 두 접시였는데 한 접시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백 점 맞았어요. 이번엔 맛있는 것 안 해주고 평범한 것 줬어요. 아들이 화가 나서, “엄마, 백 점 맞았는데 왜 전처럼 맛있는 것 안 줘?”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네 마음가짐을 뜯어고쳐야지.” 하는 거예요.

엄마는 그때 점수 보고 한 게 아니에요? 점수 보고 한 게 아니고 처음에 백 점 맞을 때 마음가짐이, “나 같이 실력 없고 머리 나쁜 학생이 어떻게 백 점 맞았지?”라는 그런 겸비하고 겸손한 마음가짐 보고 내가 두 접시나 맛있는 게 했단 말이죠. 그런데 계속 백 점을 맞다보니까 걔가 어떻게 됐어요? 교만하고 자만한 거예요. “나 원래 실력이 백 점 아니면 안 돼. 백 점이 내게 딱 맞아.”라는 건방진 마음을 보고 엄마는 두 번 다시 맛있는 것 안 해주는 겁니다.

제 예가 이해가 되셨습니까? 이해된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주님이 요구하는 수준과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의 생명의 떡이라고 요한복음 6장 48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떡을 드렸데, 자기가 떡이래. 왜? 열두 개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받아먹겠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매 안식일마다 떡을 바꾸면서 정성을 다하여 올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말라기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 더러운 떡은 안 받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 마음가짐이 너무 안일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안일하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안일 말고 내놓을 마음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첫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주께서 원하는 심령과 영혼을 갖고 싶어도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재주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그런 재주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몰락하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보낸 악마한테 얻어터지면 되는 거예요. 내가 잘 되겠다, 내가 뭔가 잘하겠다는 말은, 적어볼게요. 내가 제대로 된 존재이고 싶다. 참된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할 때 앞에 뭐가 꿈쩍도 안 합니까? ‘나는’이라고 붙어있지요. 주님께서 이걸 친다니까요.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하는 이상은 이 괜찮음을 자진해서 철회할 마음이 없어요, 나는. 나는 죄인 되기 싫어요. 나는 의인되고 싶어요. 하늘나라 칭찬받고 싶고 남한테 욕 얻어먹기 싫어요. 그래서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신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화근인데요? 그게 문제에요.

표준이 예수님이 표준이 아니고 누가 표준이 됐어요. 예수 믿는다는 어제의 내가 나의 표준이 된 겁니다. “시켜만 주이소. 다 할게요.” 이런 정신머리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진짜 성도는 시키는 대로 다하고 바르게 살았는데 하는 인생 꼴이 말이 안 되네. 바닥을 쳤어. 내가 있다고 여겼는데 없는 순간이 와버렸지요. 암 걸리는 것, 내가 사라진다는 것을 전에는 고려 안 했는데 지금은 고려해야 돼. 내가 자식 낳고 내가 없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그게 기분 좋던가요, 아깝던가요? 기분 더럽지요. 남들은 나보다 못한 인간은 멀쩡히 돌아다니고 내가 왜 죽어야 되느냐. 아까워서 때가 아닌 것 같아.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말라고 그렇게 해도 기도가 안 나올 수 없어요. 살려만 주이소. 헬프 미. 살려만 주세요. 앞으로 똑바로 살겠습니다.

자기 죽을 땐 그런 생각 별로 안 들 수 있는데 아들이 죽을 때 딸이 죽을 때 자식이 죽어버리면 부모는 환장을 합니다. 세월호 물에 빠진 게 벌써 몇 년 전입니까? 갈수록 세월호 부모들은 악에 바쳤어. 광화문에서 보수 집회를 하는데 하다보니까 세월호 유족들을 포위하게 된 거예요. 상황이. 하늘이 열리던 날, 개천절이죠. 세월호 유족들은 하루 종일 울었어요. 왜? 포위됐기 때문에. 니 때문에 정권 바뀌었다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루 종일 울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맺힌 거예요. 상처받은 거예요.

상처받았다는 게 뭔 뜻입니까? 나는 내가 아깝다는 겁니다. 나는 상처 안 받아야 될 존재라는 거예요. 이 추잡하고 더러운 본성이 악마가 와서 치니까 비로소 들통 난 겁니다. 나한테 믿음이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나를 믿었지 절대로 나 외에 다른 것을 최종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그 진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지요.

그게 주의 뜻입니다. 구원은 믿음 없음을 가져와야 돼요. 믿음 없음과 믿음을 바꾸는 거예요. 내 믿음 없음을 주고 주님의 믿음이 내 속에 들어와서 그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뽐내고 싶어서 순종했다는 그걸 믿음인양 여기고 계속 괜찮은 믿음, 좋은 사람으로 우기면서 어떤 나쁜 일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 떨어지고 믿음 좋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오면 안 된다는 식으로 버텼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만인 겁니다. 이게 더러운 떡이에요. 우리가 깨끗한 피조물이 아니고 더러운 피조물 된 거예요. 더러운 피조물은 이 땅에서 반복이 돼요. 왜?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더러움이 백 날 살아도 되풀이 돼요. 내가 더러운 떡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오직 구원받은 사람 외에는 없어요. 천국 가는 사람만 알지 지옥 가는 사람은 이걸 몰라요. 지옥 가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를 깨끗한 떡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누가 믿음이 없게 했습니까? 주님이 믿음이 없게 했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스마엘을 자기 아들로 삼는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뭐 이스마엘 있으니까 됐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내를 통해서 남편을 깨우치는 거예요. 아내가 임신이 안 되니까 아브라함의 본색이 튀어나왔어요. 임신 안 되는 여자에게 임신하라는 내가 나쁜 놈이지. 물론 사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내 여종 하갈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뤄보자.

여러분, 약속은 있어요. 문제는 약속을 지킨다는 약속을 못해요, 인간은. 그러면 우리 안에서 약속이 이뤄지는 것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우리의 약속이 아니고 약속을 주신 분이 자기 약속을 자기가 성취할 때 우리는 주님이 스스로 약속을 이룬 결과물로서 우리가 변화될 때 그게 새로운 떡이 되고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로써 우리는 내 안의 주님이 아니라 주님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생산물로서 우리는 그 안에 놓여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소의 확장이에요. 떡의 확장. 떡이 인공적인 가공물로 인물로 바뀌어요. 인물로 바뀌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특별한 일들이 거기다가 주어져야 되겠지요. 그 특별한 일이 바로 떡을 바친 제단이 깨져버립니다.

말라기를 다시 보게 되면, 더러운 떡을 나한테 오지 말라는 말은, 성소는 그대로 두되 성전은 그대로 두되 떡만 갈아치우라는 게 아니라 아예 너희들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무효로 돌리겠다. 이스라엘 자체를 무효로 돌려버려요. 무효로 돌리면서 백성은 어디 있느냐? 백성은 내가 만들게. 누굴 통해서? 엘리야 다시 보내서.

그래서 말라기 마지막은 엘리야가 온다는 이야기에요. 엘리야를 보내서 엘리야가 하는 일이 있어요.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죠. 그러면 만약에 엘리야가 안 오게 되면? 그냥 평행선이죠, 뭐. 그래서 그냥 나란히 가는 거예요. 전혀 접촉점 없이 이스라엘은 계속 떡만 공급하고 양 바치고 소 바치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계속 더럽다, 더럽다고 할 뿐입니다.

그러면 말라기에서 예언된 엘리야가 엘리야냐, 아니냐가 드러나려면 무엇이 먼저 환경적으로 구성되었느냐 하면, 둘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린다는 정황이 주께서 만들어지도록 하겠지요. 대치관계, 하늘과 땅이 완전히 결별된 상태가 될 때 엘리야가 엘리야다운 모습으로 부각이 된다 이 말이죠.

그 엘리야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요한이지만 세례요한이 실패한 임무를 인수받게 돼요. 나중에. 엘리야가 세례요한이지만 세례요한이 제대로 성취를 못하고 다시 예수님이 인수인계해서 예수님이 선지자고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요 인간은 스스로 떡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없기 때문에 주의 약속을 멈추질 않고 계속해서 못난 인간을 통해서 기어이 성취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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