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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8 14:03:38 조회 : 75         
20191004b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떡 이름 : 한윤범(IP:221.147.126.52)
20191004b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떡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걸 천천히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떡이라 하는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보장하는 가공물이죠.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서 떡으로 만들어서 자연을 통해서 양식을 만드는 게 떡이라면, 인간이 떡을 먹는 방식 그대로 하나님 쪽에서 그걸 이용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너희들만 떡 먹나 나도 떡 먹자.

그런데 떡 먹자는 것이 성소에 있는 탁자 위의 열두 개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왜 열두 개며 왜 안식일마다 교체가 돼야 되고 그걸 먹는 사람이 왜 제사장이어야 하느냐고 따져볼 때 하나님께서 정작 먹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떡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선 새로운 피조물과 살고 싶은 것을 떡을 먹고 싶다는 식으로 표현하신 거예요.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기존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솜씨는 뭐냐? 없는 것을 되게 하신 거예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솜씨. 없는 것을 있게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옵니까, 할 때 현재 이스라엘에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고 약속의 땅의 산물로 떡을 만들라 하거든요.

그럼 없는데서 새로 만드는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 기존에 인간들이 먹고 있는 떡으로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게 더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미 있게 되면 거기에 죄가 스며들기 때문에. 그냥 없는 데서 있는 걸 만들면 되지만 주님이 원하는 것은 없는 게 아니고 죄가 있는 곳에서 의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죄를 자체적으로 해소해야 될 필요성이 추가적인 일이 필요한 거예요.

더러운 떡이라니까요. 인간들은 기껏 상투적으로 했는데 그게 주님 앞에선 더러운 떡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떡을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이미 너희 마음은 안일한 거예요. 반복되는 제사, 지겹다. 매뉴얼대로 하지. 계속 반복하다보면 그 반복에 의해서 인간에게 새로움이란 의식이 날아가 버려요. 오십 년 동안 교회 다녀도 하던 행세대로 했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고 나온다니까요.

부부란 것도 그래요. 부부생활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내나 남편이나 상대방을 볼 때 날마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늘 신혼 같아. 새롭고 신선하고. “당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당신이 이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이렇게 나오면 늘 신혼 같지요. 그런데 연애할 때는 늘 즐겁게 해주고 늘 나를 웃게 만들고 나를 늘 편하게 만들어서 파도파도 새로운 것이 나올 것으로 여겨서 결혼했는데 신혼여행 갔다 끝나버렸지, 뭐.

1960년에 애니타 브라이언트란 가수가 부른 올드 팝송이 있어요. 종이 장미란 노래가 있었어요. 우리 나이 대에는 굉장히 많이 불렀어요. 그 노래 가사에 보면, 당신이 나에게 장미를 줬어요.


Paper Roses - Anita Bryant

I realize the way your eyes deceived me

With tender looks that I mistook for love

So take away the flowers that you gave me

And send the kind that you remind me of

Paper roses, paper roses

Oh, how real those roses seemed to be

But they're only imitation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I thought that you would be a perfect lover

You seemed so full of sweetness at the start

But like a big red rose that's made of paper

There isn't any sweetness in your heart

Paper roses, paper roses

Oh, how real those roses seem to be

But they're only imitation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이게 오늘 본문과 적절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떡을 줬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그 떡은 종이 떡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생생한 붉은 장미를 줬지만 당신의 마음을 실었는지 여부를 따져볼 때 그것은 마치 뭐와 같나 하면, 진짜 장미가 아니고 가짜 종이 장미라는 거예요. 그 가사에 보면, But they're only imitation 전부 다 모방이다. 이-미테이션~ 대목이 나와요.

페이퍼 로즈 거기에 보면 이미테이션이에요. 문제는 그 대목에서 우리가 놀라야 돼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다? 이미테이션이에요. 모방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모방이라는 것은 합치된다, 안 된다? 절대로 합치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줬는데 떡을 바쳐라. 인간은 떡을 바치는데 떡을 바치라는 그 말씀에 담겨있는 함유된 의미와 인간이 만들어낸 떡은 합치될 수 없습니다.

이게 괴리가 일어나고 벌어지면서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곧 우리의 멸망 같은 거예요. 결국 레위기 24장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정성껏 성의껏 준비해서 드려도 하나님 성에 차지 않는 거예요. 나는 그런 떡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건 신약 때 이야기하지만 구약 때는 그 이유도 모르면서 더러운 떡 냈다고 구약 마지막 대목에서는 그런 이야기하지만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이야기해도 소용없지요.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이미테이션 밖에 없는데. 모방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회에서 1년에 두 차례씩 하잖아요. 독일에 가보니까 한인교회는 성만찬을 한 달에 한 번하고 독일교회는 매주해요. 목사가 아니고 공무원들이에요. 뭘 하느냐? 이미테이션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1장 보면 나오거든요. 11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그러니까 이미테이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명동성당에서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성만찬하는 거예요.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인간들은 이걸 함으로써 이게 뭔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이 대목을 설명했는데 기념하란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살아 있음을 감지하란 뜻이에요. 그냥 기념이 되면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추도예배 드린 것밖에 안 돼요. 죽은 귀신을 기억하면서 회상하면서 자기들끼리 지금 노닥거리는 것밖에 안 돼요. 지금 주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인간이 성만찬을 하던 뭘 하던 간에 인간은 무슨 존재다? 이미 죽어 마땅함을 생각해야 된다. 왜냐하면 이게 구약이 아니고 신약이니까요.

구약 때는 이스라엘을 계속 살게 한다 해서 멸망할 때까지 그들로 계속 살게 해서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이 드린 제사에다 새로운 신약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신약에 준한 의미를 거기다가 계속 부여를 한 거예요. 너희 봐라. 이사야에 나오는 대로 너희가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켜도 마음이 딴 데 가 있잖아요.

마음이 딴 데 가 있도록 누가 그렇게 조종했습니까? 하나님이 조종했지요. 이스라엘 근처에 막강한 나라들을 만들어서 우리는 제사 드리고 여호와 믿어도 저 나라만큼 못 사네. 그래도 하던 대로 하지. 그러니까 억지로 할 수밖에 없도록 인간의 마음의 본질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 이미테이션 모방해도 모방에 그친다는 것은 주변 환경을 통해서 점점 더 무르익도록 몰아가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까. 처음에 절에 가다 교회 나오면 복 주리라 생각하고 아이들 공부 잘하고 하는 일 잘 될 거라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망하도록 하는 거예요. 교회 다녔는데. 괜히 종교 바꿨어. 바꿔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 시어머니는 핍박이 난리 나고. 종교 바꿔서 그런지 해서 또 다시 교회 갔다가 절에 가보고. 절에 가니 더 엉망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내 자신이 누군지를 원래 우리가 모르고 있었는데 율법으로 건드리니까 그래서 이미테이션하게 만드니까 인간은 노림수가 튀어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뭔가 추가적으로 복을 주셔야 주고받는 게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아닙니까, 라는 식으로 자기위주의 본색이 튀어나온 거예요.

그럼 여기서 이게 필요하지요. 점차 교체가 필요합니다. 떡을 바치는 것이 율법이죠. 레위기 24장에 있으니까. 이 율법을 어떤 식으로 실행에 옮길 것인가? 인간들은 떡을 바치라 해서 떡을 바쳤는데 율법은 점차적으로 실행에 옮길 때 떡을 바치는 게 아니고 그따위 것 때려치우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 제사와 번제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시편 51편.

뭔가 인간은 자기한테 스스로 잔뜩 기대하기 마련이에요. 누가 자기한테 명령과 지시를 하게 되면 그 명령과 지시에 준해서 그 타인이 나를 우수한 존재, 괜찮은 존재로 봐주기를 기대하면서 뭔가 움직이게 돼있어요. 인간은. 뭔가 지시를 하게 되면 지시에 억지로 따르고자 합니다. 왜? 따를 때 내 능력과 자질이 남한테 인정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정받는 것.

그걸 지난 주일에 사회성이라 했지요. 다시 한 번 해볼까요. 개인은 뭘 원하고? 행복을 원하고. 개인이 사회에서 뭘 원하느냐? 인정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행복을 원하고 인정받는 이 둘을 합치면 자기 의에요. 인간은 목표가 있어요.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그것이 나의 행복으로 여겨질 때 인간은 사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의. 율법으로 자기 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의에 의해서 하나님께선 어떤 환경을 가져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지 않아요. 인간의 자기 의에 포위돼서 죽어요. 자기 의란 것이 결국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으로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도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누굴 죽인다? 하나님을 죽이니까 인간을 지옥 보내는 것은 합당한 조치지요.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인간을 지옥 안 보내면 하나님께서 직무유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뭐냐? 사람 죽이는 겁니다. 뭔 상처를 받아요. 죽이는데 무슨 상처를 받아요. 분리수거해서 쓰레기장에 불태우러 가는데 이 비닐을 왜 태우십니까? 왜 하필이면 이 비닐을 죽이십니까? 비닐이니까 죽이지. 쓰레기니까 죽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죽여야만 하나님다워요. 지옥 보내야 하나님답다고요.

오히려 살려준 것은 웬 떡입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됩니다. 살려준 것을 자꾸 의심해야 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믿음 없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지옥 간다는 말은 나는 믿음 하나도 없음의 고백이에요. 그건 오직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나오는 인식입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걸 몰라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마지막까지 작은 쪼가리라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나는 잘났다는 것을 꼭 쥐고 싶어 해요.

그런 인간 찾으라 하면 울산시내 가면 20대, 30대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철딱서니 없는 애들의 정신은 뭐냐 하면,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서 이 땅에서 성공하려는 그 생각 말고 다른 생각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엄마, 내가 제대하고 취직해서 엄마 잘 모실게.” 엄마를 모시는지 자기 마누라 모시는지 분간이 안 되지만 부모는 그것 듣고 기특하다고.

기특하면 뭐 합니까. 새 아파트 대출받아서 돈 거기 다 들어갔는데. 엄마 용돈, 차비도 안 주는데. 자기 아이 낳으면 계산하는 거예요. 바깥에 맡기면 150만원, 엄마한테 맡기면 20만원. 엄마가 낫다. 애들이 결혼하게 되면 돈에 빠져버립니다. 절약에 빠져요. 갑자기 돌변해요. 그 애가 그 애가 아닙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말로 못해요. 결혼하면 입 싹 닦아버립니다. 조건부에요. 부모가 내 애 맡아주는 조건 하에 잘해줍니다. 엄마가 아프든 말든 관계없이.

본색이 드러납니다, 본색이. 이스라엘이 갈수록 본색이 드러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도 갈수록 본색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고 행복 하고 싶다. 이게 뭐냐? 자기 의고 그 자기 의로 인하여 결국 우리는 뭐냐 하면, 완전히 평행선이에요. 하나님 생각 따로 있고 내 생각 따로 있고 만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 와서 하는 모든 것이 이미테이션이에요. Paper Roses 종이 장미들이에요. 오늘도 시간 때웠다. 오늘도 예배 참석했다. 끝. 예배 참석하는 것도 귀찮아. 누구 만나는 것도 귀찮고. 집에서 인터넷 들으면 되지. 처음에는 반듯이 들어요. 경건하게 듣습니다. 나중에 보면 인터넷 틀어놓고 듣지도 않고 할 것 다하고 택배 다 받고 가스 불 다 끄고 나중엔 잠 오고 다리 책상에 올려놓고 듣고. 뭐 나쁜 짓해도 천당 가면 됐지.

천당은 누가 갑니까? 문제는 내가 간다는 게 문제에요. 내가 가는 천당은 없습니다. 주님이 실어줘서 가는, 주님이 바구니라면 우리는 그 안에 계란이거든요. 주님이 만든 천국에 내가 놓여있지 내가 가는데 주님 도와주는 그런 법은 없어요. 그 생각은 옛날 이스라엘의 잘못된 생각이란 말이죠. 주님 품 안에서 가는 거예요. 우린 주님 밖에서 독립할 수 없어요. 독립되지도 않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떡을 철폐하되 떡을 예수님 안의 떡, 그걸 성소 안의 떡으로 만드는 거예요. 떡은 실패했습니다. 실패작이에요. 그럼 뭐냐 하면, 성소를 만들어서 성소 안에 주님이 스스로 떡이 되시고 이 떡으로 안에 집어넣으면 되지요. 그러면 성소도 이뤄지고 떡도 영원히 영광 받는 떡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받으시는 양식이 되는 거예요. 이 방식을 주께서 사용하신 겁니다.

떡 될 자격도 없어요. 우린 이미테이션밖에 안 되니까.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몸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율법이 완성이 되면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해서 남겨둔 모든 레위기 24장을 비롯해서 23장, 22장,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완성될 때 다 딸려 와요.

쇳가루가 멀리 있을 때 떨어져있다가 강력한 자석 하나 중간에 놔두면 흩어져있던 쇳가루가 전부 다 예수님 몸에 달라붙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순간 구약의 레위기 24장뿐만 아니고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게 돼요. 떡이든 성소든 향단이던 향유든 뭐든지 다요.

요한계시록 1장 12절에 보면,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예수님이 금 촛대를 새롭게 구성한 거예요. 그리스도 중심으로.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인자 같은 분이 있지요. 예수님 몸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모든 시간은 스톱이 된 겁니다. 완성이 된 겁니다.

그리고 공간은 어떻게 되는가? 크라운프라자호텔, 백두산 밑에서 해외특강 네 번째 동영상에 보면 은은한 조명 아래 강의한 게 있습니다. 그 강의내용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내용이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 그 대목을 제가 짧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스테인리스 돔 커버, 서양 파티에서 음식 내올 때 그걸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 말은 두세 사람이 있는 예수님 합세해서 세 사람 된다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되면 두세 사람 기도하다 흩어지면 예수님도 자기 집에 가야 돼요. 너희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겠다는 말은, 스테인리스 돔 커버로 접시 위를 덮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 장소는 이 세상에 없는 장소에요. 없는 장소란 말은 여기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제가 주일에 설교하면서 예수님 무덤을 지키는 것이 두 부류가 있다고 했어요. 하나는 로마군인 두 명이 있었고 또 하나는 천사가 지키고 있었거든요. 마리아는 천사와 이야기했으니까. 로마군인은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지만 천사는 들어오지 말라고 지키기 있었던 거예요.

예수 안에는 아무도 못 들어온다. 왜? 그게 창세기 3장에 보면,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겠다는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 있어야 돼요. 내 백성, 내 이스라엘 아니면 못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누가 이스라엘이고 누가 지옥 가느냐? 그건 예수님의 고유권한이에요. 우리가 거기에 압력을 가하면 안 돼요. 빨리 정경심 교수 구속하라고 압력하면 안 되듯이, 그건 윤석열 검찰총장의 고유권한이듯이 심판주이신 주님의 고유권한이에요.

백 쓴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래 성도가 없어야 돼요. 다 지옥 가야 됩니다. 사람 죽이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누굴 건지고 안 건지고 하는 것은,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고 난 뒤에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가 마련되거든요. 긍휼의 자리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이뤘기 때문에 혼자만의 고유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요. 아버지 앞에 유일하게 모든 말씀을 지킨 분이 예수님 딱 그분이거든요.

그분이 알아서 너, 너, 너 나와. 들어와, 하면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인간들의 어떤 자질과 권한과 실력 그런 것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예수님의 긍휼로 호출 당한 사람만 주님의 긍휼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긍휼 받은 사람이 긍휼 티를 낸다는 것은 뭐예요? 이건 내가 뭘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불쌍히 여겨줬어, 라는 말을 함으로서 내 구원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노릇하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제가 긴 이야기했는데 떡을 먼저 만드는 게 아니고 성소부터 먼저 만든다 이 말이에요. 성소부터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단독행위에요. 단독행위로 주변에 뭐가 피어나는가? 성소가 피어나요. 일곱 촛대부터 영광스런 모든 성전의 영광이 아우라가 퍼지거든요. 그 속에 예수님 자신은 뭐냐?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구약에서 이야기했을까? 미리 이야기했어요. 이야기하기 전에 첫째 시간에 제가 놓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소가 확장되면서 이 점을 다시 봅시다. 성소가 확장된다. 구약은 점점 더 확장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떡을 바칩니다. 율법이니까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바쳐요. 성전이 있으니까 바치고 성소 있으니까 바치는 거예요. 바쳐야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니까. 우리는 다른 민족 달리 안식일 지키고 제사 드린다. 그래서 복 받는다는 그러한 고유한 정신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구약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반복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점점 더 와해되지요. 깨지지요. 이상하게 제사를 드렸는데 율법대로 살았는데 왜 되어진 상황은 이상스럽게 이스라엘 역사가 꼬여서 제대로 되는 법이 없지요. 어디서 문제가 됐을까요?

새롭게 추가되는 요소를 무시한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율법을 줄 때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이 율법을 담당해서 지키는 방법이 있지요. 두 번째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예언자 또는 선지자가 지키는 방법이 있어요. 선지자의 방식이 추가되는 요소에요.

그럼 선지자는 어떤 때 추가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율법을 지켰다 했지만 율법이 실효성이 없을 때 전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이 흡족하지 못할 때 그걸 지적하는 식으로 누가 오느냐? 선지자가 오는 겁니다. 다윗은 율법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율법을 알았지만 밧세바와 간음했지요. 간음만 했습니까?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했지요. 그래 놓고 다윗은 율법을 모르는 게 아니고 알아요.

어떤 사람이 자기는 양이 많아요. 그런데 손님이 오니까 자기 양 놔두고 하나밖에 없는 종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다고 죽여 버렸어요. 그걸 듣고 누가 화가 났느냐 하면, 다윗이 화가 난 거예요. 이스라엘에 그런 인간 있으면 율법대로 하면 네 배로 갚아야 되고, 아니 네 배고 뭐고 간에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 했거든요.

그때 이름도 유명한 선지자, 나단이 그게 당신이야.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남 지적할 것 없이 지적하게 되면 구멍이 나고 그 구멍에 하나님이 성령을 담는 방식이 바로 주께서 새롭게 추가한 요소에요. 내가 지켰다, 내가 믿었다, 내가 행했다, 내가 섬겼다, 내가 순종했다가 아니라 그게 빵꾸나야 돼요. 진즉에 죽어야 될 인간이 아직도 버티고 살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일상을 살면 이것 못 느껴요. 가끔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정신 버쩍 차려요.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고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내가 노력했다고 해서 그 보상으로 천국 가는 게 아니구나. 나는 내 의, 내 잘남밖에 이미테이션 외에는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어요. 우리는 자기 잘남 외에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것만 할 줄 알아요. 자기변명하고 자기수습하고 나의 캐슬 지키고 나의 의를 지키고 그것밖에 할 줄 몰라요.

우리는 점잔해도 건드려보세요. 대번에 그 본색이 유감없이 노출되지요. 네가 뭔데 날 건드리나. 시비 걸지 말라고 나오지요. 이건 교회를 몇 년 다니고 교인 수가 몇 명이고 목사든 장로든 직분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이미테이션으로 자기변명과 자기핑계 외에는 우리가 나올 게 없습니다. 그것밖에 안 나와요.

왜 주께서는 그렇게 나오시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허접스러운 우리를 계속 질질 끌고 다니는 겁니다. 평생을 두고서. 결국 우리는 너무 끌고 다녀서 닳아 없어져요. 나중에 화장터에 가면 닳아 없어진다고요. 지난 낮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사람은 닳아 없어지면 배와 등짝이 붙는다고. 들러붙어서 원래 폭이 없어져요.

그런데 폭이 생겨버리면 이게 아까워. 폭이 생긴 내 덩치가 아까워서 이것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 과정을 이스라엘 역사가 다 보여준 겁니다. 하나님 제사 드렸잖아요. 성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이렇게 힘듭니까. 하나님 이제는 할 도리 다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없이 잘 머고 잘 사는 옆의 나라 다른 신 섬기겠습니다. 그렇다고 욕하지 마세요.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우리 책임 아닙니다, 라는 식으로 우상숭배로 쉽게 나가버린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복음 들을 때 그렇게 기뻤지요. 기뻤지만 숨 좀 트고 살만하면 뭐가 탐나던가요? 삼성재벌이 어떠니 현대가 어떠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정치를 하고 서초동에 모이고 광화문에 모이는 이유는 단 하나에요. 복수심이에요. 알 수 없는 복수심. 그런데 구약에선 이 복수심은 한 곳에 나서서 자기 몸으로 받아 챙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에요.

우리나라는 그 복수심을 받는 쪽이 없어요. 구약에서는 인간의 본색은 끄집어내고 그 본색이 오는 것을 다 받아먹어요. 이스라엘이 죄를 본인이 담당하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처럼 우리는 양 같이 제 갈 길 갔거늘. 주께선 누굴 파견했느냐 하면, 그들이 하는 불평과 불만과 오만함과 자만을 네가 나서서 온 몸으로 다 거둬들여라.

구원은 뭐냐? 더러운 죄를 대신 수거해서 가져가신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모습으로 온 거예요. 지저분한 모습으로 온 거예요. 꼴도 보기 싫은 모습인데 그 꼴 보기 싫은 것이 누구 때문에 꼴 보기 싫은 거예요? 주님은 죄도 없는데 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까?

그 죄에 누구 죄가 섞여있습니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죄가 섞여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죽였고 우리가 죽인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과 성도 사이는 뭐냐? 죽음이라는 관계 외에는 다른 관계는 필요 없습니다. 나 너를 위해서 죽었고 네 죄 때문에 나는 죽었고 너는 네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그걸로 끝이에요. 헌금이고 선교고 필요 없어요. 오직 죽음의 관계뿐이에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요 근래 이걸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이야기할 때마다 제가 은혜 돼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제가 말하는 건 15절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모든’이라 해놓고 ‘산 자들’이죠. 산 자들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산 자가 아닌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죽음이 또 나와요)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간에 너를 위한 몸이 아니고 그 자체가 주를 위해서 아팠고 주를 위해서 나았고 주를 위해서 밥을 먹고 있고 주를 위해서 조깅하고 에어로빅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결혼했고 주를 위해서 헤어졌고 주를 위해서 열심히 지금도 싸대고 있다 이 말입니다. 모든 게.

여기서 여러분 다음과 같이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 믿었으니까 주를 위해서 살자. 이런 식으로 오해하면 안 돼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 직분과 어긋납니다. 선지자의 존재 의미는 선지자 등짝에 주님과의 천상회의와 연관돼있어요. 선지자는 꼭두각시에요. 그걸 구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성신이라고 돼있다고요. 이 성신이 신약에 오면 성령으로 완성됐다고요.

그럼 성령이 뭘 하느냐 하면, 이제 같이 사신 자로 하여금 주를 위해서 살도록 조치하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알아서 우리가 정신 차려서 살자가 아니라 살도록 하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사는 방법 중 하나가 골프 치는 거고 크루즈여행 가는 거예요. 백두산 관광 가는 거고. 왜? 성령이 하게 되면 감사가 나오게 돼요. 그런데 억지로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주를 위해 살자가 되면 전부 다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자기 의가 나오고 억지가 나와요. 비자발적이 나온다고요.

그래서 제가 막 살자고 안 합니까. 사세요. 어차피 지옥 갈 것 막 살지, 뭐. 막 살게 되면 성령께서 옛날 구약 선지자처럼 조정을 해주게 되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들도 막 살고 싶지요. 막 살지 못하게 했는데, 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그 당시 구약대로 하면 언약을 위해 살도록 그렇게 주께서 인도하신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과 관련해선 뭐냐? 아예 떡이 되게 하셔요. 참 맛있다. 너란 인간 볼 때마다 내가 맛있어. 그러면 사도 바울처럼 이야기하지요. 제가 뭘 했다고요. 각도가 요 각도거든요. 제가 뭐했는데. 니가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그게 예쁜 거예요. 만약에 내가 헌금을 해야지, 하면 안 예뻐요. 헌금을 하면 내가 한 게 의식이 돼서 오른손이 할 걸 왼손에 다 들통 난다니까요.

그냥 살아가는 것이 성령이 임하면 그 자체가 선지자에요. 왕 같은 제사장 삶이라니까요. 그러면 그냥 막 사는 것과 차이가 뭐냐? 감사가 나오지요. 고마움과 감사가 순간순간 터져 나오게 돼있습니다. 참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또 해외여행을 가게 하시고 효도관광하게 하시는구나. 헝가리까지 아무것도 아닌 나를 가게 하셨구나. 그런데 배가 자꾸 갈아않네. 아무것도 것을 여기서 인생 마감하라고 헤엄도 못하는 걸 뻔히 아시면서 배를 타게 해서 이걸로 인생 끝내자. 죽으면서도 감사해요.

“이러면 안 돼, 안 돼. 주여, 왜 나에게.” 이것 아닙니다. 이미테이션, 그건 종이 장미지요. 그동안 지가 지 믿음 생활한 그걸로 천당 가려는 흉내 내기에 열중한 거죠. 작은 것에 감사한 것이 큰 것에 감사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작은 것을 흉내 내면 큰 것도 흉내 내요. 그러니까 작은 것에서 깊은 감사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어떤 일도 감사가 나올 사람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기념물. 이제 기념이란 말 아시겠지요. 누구 작품, 누구 솜씨란 말이죠? 바로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자기가 스스로 이루는 기념물로 떡을 바치라는 거예요. 기념물로 여호와께 드리라. 이게 화제다. “유황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하지니”

모든 떡부터 유황, 화제, 등잔 모든 것이 세팅돼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념물 되기 위해서. 기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기념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또 감사하게도 우리가 주님의 그 기념물에 일부로 참여돼있다는 것,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보통 신분이 아닙니다. 대단한 거죠.

이제 여러분들이 이 정도 아니까 어려운 것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 답변해보세요. 자동차 타이어 가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그것도 여러분이 하는 게 아니고 전문가들이 자동차 정비소에서 타이어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쉬운 일이지요. 내게 하나님의 요소가 타이어 갈아 끼우듯이 이식되는 게 가능 하냐, 가능하지 않느냐고 제가 묻는 겁니다. 이식이 될까요, 안 될까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지요.

어떤 회사 높은 임원의 은퇴하는 기념으로 어떠한 선물이 가장 좋을까요? ①난, ②기념패, ③새로운 간이식, 몇 번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선 생명을 집어넣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어요. 문제는 그 생명을 집어넣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주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됐으니까 그 원칙을 그대로 살립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요셉의 부인, 이름이 뭐지요? 마리아. 마리아 몸에 들어오지요. 얼마나 신비로운지. 성경에서 이해 안 된다, 어렵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다시 태어날 때 이 육으로 태어난 것은 안 된다는 조건 하에 육으로 태어난 것은 내가 인정 안 한다는 조건 하에 다시 태어나보세요.

뒤에 정답은 모른다 치고 주님께서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본다고 언질만 주시고 우리가 니고데모라 여기고, 육은 안 된다. 네가 다시 태어나는 그건 안 돼. 다시 태어나야 돼. 그러면 니고데모가 고민하면서 어떤 아이디어를 내세우겠습니까? 내세울 아이디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거에요. 우리 쪽에서 할 게 있어요, 없어요? 없다니까. 그런데 왜 기존교회에서 자꾸 하라고 합니까, 없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선행으로 구원과 맞바꾸는 게 아닙니다. 선행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현찰로 물건 구입하듯이 자기 의로 천국을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경건이나 거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없어요. 없음을 유지해야 돼요. 우리는. 없다는 걸 안다는 것이 보통 성령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은 뭐였습니까? 성령으로 해야 된다. 그럼 성령이 인간 쪽엔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건져주면 건져주는 거야.” 이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렇게 난해합니까? 그게 납득이 안 되지요. 성령이 없는 사람한테만 납득이 안 되게 돼있어요.

그래서 납득이 못 되게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성령 받은 유무로 결정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령 받은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을 저와 여러분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써먹어야 돼요. 마태복음 10장에선 이렇게 합니다.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하시는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약을 올리는 거죠. 얼레리꼴레리 놀리는 겁니다.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이건희는 죽어가니까 이재용한테 가서 얼레리꼴레리 천국 못 가지. 놀리는 거예요. 또 누구한테 갈까요? 조국한테 갈까요. 당신이 복음을 알아, 놀리면서 오는 거예요.

떡의 특징은 뭐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예요. 왜? 그쪽에 없는 게 내 쪽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내가 달라고 안 했는데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오고 난 뒤에 사람이 달라졌어요. 소속이 달라졌다고요. 아까 처음에 했지요. 떡은 어디에 놓여야 된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늘에 속한 위치에 있어야 떡이 떡다운 거예요. 그 위치가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겁니다.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교회 왔다 갔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거는 내 힘으로 안 되는 현상이 나를 가지고 주께서 일으켰다는 거예요. 주님이 오라 했습니까? 그런 적 없어요. 나를 구원하려 했습니까? 그런 적도 없어요. 그냥 내가 육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그 육은 육일뿐이고 지옥 갈 뿐인 것을 내가 그렇게 감사함으로, 그것도 짜증스러워서 고민거리가 아니라 되게 감사한 거예요. 내가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게 된 사실을.

그걸 두 자로, 내게서 손을 떼는 걸 자유라 합니다. 자유의 조건은 뭐냐? 내가 이미 죽었다. 왜 죽었느냐 하면, 구태여 내가 살 이유가 없어요. 사신 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신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 역할은 죽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내가 만약에 살아서 앞에서 얼쩡거리면 이건 주님 영광을 가리는 골키퍼 밖에 안 돼요. 지가 해결 다하려고 설쳐대면 어딜 까불고 있어. 나, 구원받았다고 하면, 까불지 마. 니가 구원받은 게 아니야. 니가 구원 안에 있지. 우리가 소유한 게 아니란 말이죠.

산다는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이해 안 될 때는 가까운 장례식장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곧 우리 모습이에요. 전에 했잖아요. 관 속에 누워서 입관할 때 죽어서 열어보라니까요. 묶여서 누워있는데 열어보면 자식들 도열돼있고 보람상조에서 와서 할 때 보란 말이죠. 내가 죽어있구나. 그런 자세지요.

그건 관 속에 있지만 우린 예수 안에 있어요. 내가 살았다고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 없다니까요. 주님이 살았으면 되지 주님이 대표자기 때문에 주님 살아 있으면 내 몸으로 보여주면 되지 그걸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거든요. 꼭 구태여 내가 주님한테 나서서 내가 살아 있다고 외칠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햇빛이 더 오는 것도 아니고 비가 울산에 덜 오는 것도 아니고 태화강 범람 할 것이 안 할 것도 아니고 세상에 까마귀가 오고 안 오고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아니라 주님 마음대로 움직이기 우리는 감사, 감사, 감사, 감사로 그냥 공짜로 주는 걸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모든 일상에 대해서.

목사님, 말은 좋지만 사람이 계획이 있어야 되고 사는 목적이 있어야 되는데 계획과 목적을 하지 말란 말입니까, 하는데 하지 말라가 아니라 주께서 목적과 계획도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줘요.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아침이 뭘 해먹지? 그냥 가만있으면 입에 밥 들어옵니까? 주부가 뭘 움직여야 되지 않습니까? 남편은 밥 달라하고. 오뎅탕 해줄까? 어제도 먹었는데. 그럼 뭐 해줄까? 콩나물국 끓여줄까?

뭔가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 생각조차도 주께서 주신 아이디어란 말입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어제 콩나물을 사놓을 걸. 후회하지 말란 말이죠. 어제 생각 안 났는데 어떻게 해요. 주께서 생각 안 나게 했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자기를 자책하고 그놈에 콩나물 내가 꼭 해줄게. 이렇지 마. 그러면 그것은 앞에서 골키퍼가 설치는 것밖에 안 돼요. 생각이 안 나게 하셔서 콩나물 못 산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 말씀 아닙니까.

그게 뭐냐? 성소 안의 떡의 위상이에요. 왜? 주님의 기념물이 돼야 되니까. 계속해서 기념물 돼야 되니까. 후회도 못합니까? 후회하세요. 주의 뜻이니까. 후회해놓고 아, 이게 바로 내가 오만이구나. 이게 자기 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왜 하나님께서 주님의 피로만 용서가 되는지 왜 주님께서 다가와야만 구원을 받는지 왜 설쳐서 구원 안 되는지를 새록새록 아니까 그걸 통해서 새로운 감사거리로 나한테 주입된 거예요.

우리가 교만한 것은 그냥 교만할 순 없고 주께서 보낸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우쭐대게 만들어요. 너는 주의 종이다. 너 죽으면 안 돼. 너를 통해서 할 일이 많아. 이게 마귀의 장난이거든요. 제가 전에 강남강의에서 했거든요. 박사교회 12년 동안 여자 교인과 악수도 안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내가 잘못 생각했지요. 내가 경건하게 살아야 계속 주의 종으로 쓰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떤 여자 분이 간혹 악수하려고 하면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나는 주의 종인데 복음을 전하는 종인데 여자의 손을 만지다니 그러면 주께서 이놈. 네가 그러고도 주의 종이냐? 나는 너를 쓰지 않는다. 이러면 나만 손해인데,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것도 하나의 과정이었지요.

그게 바로 악마가, 내가 쓸모없다는 생각을 안 하고 교만 떨었던 겁니다. 주님 앞에 주님의 영광을 십자가를 모독한 거예요, 그게. 막 살면 되는데. 여자 손과 악수하게 되면 이게 웬 떡이고. 만져야 되는데 그걸 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감사가 억지에요. 억지로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자기 잘 되기 위해서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을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그 짓한 거예요. 하다보니까 사적인 것이 주님 가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떡이 되게 하셨는데 떡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악마성을 주께서 불쌍히 봐주셔서 도리어 그게 있음으로서 십자가를 높이는 감사하는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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