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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1 17:58:39 조회 : 56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요한복음 8장부터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b-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175.195.96.96)
강남-요한복음 총정리(2)-요한복음 8장부터 (인간공간 하나님공간)191001b-이근호 목사



요한복음 8장 봅시다. 요한복음 7장에 말한 너희가 나를 찾지 못하는 곳에 간다는 공간, 다시 한번 볼까요? 예수님의 공간과 그 다음에 무슨 공간이라고 했어요? 인간 공간이 계속해서 그 증거들을 예수님의 공간과 인간 공간의 그 존재의 근거와 그 차이점을 계속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흔히 말하는 이 간음이라는 것이 간음죄가 예수님의 공간에 필요한 간음죄냐? 아니면 인간 공간에 필요한 간음죄냐를 주께서는 구분하기 위해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등장하게 되지요.


예수님의 공간에서의 간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 믿지 않는게 간음이에요. 예수 믿지 않는 것.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그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간음자이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는 것이 곧 간음이기 때문에 예수님 공간에 못 들어오면 모두 다 뭐가 됩니까? 간음자가 되는 겁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간음한 여인를 잡아온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렇게 쉽게 풀립니다.


바리새인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왔어요. 그 말은 뭐냐? 자기들은 간음했다? 안했다? 간음을 안했다. 간음을 안했다는 거에요. 지금 이렇게 본문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은 나 같으면 그 바리새인들이 여자를 끌고 차라리 예수님한테 안 왔으면 참 좋았겠다라는 거에요.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으면 계속해서 뭐가 돼요? 자기는 간음 안 한 자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간음한 여인은 간음한 여인이 되고. 자기는 간음죄에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 복습해 봅시다. 왜 인간은 간음 안하기를 원할까요? 바리새인들은 왜 간음 안했음을 원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자기가 조율 한번 해주세요. 자신의 건전함을 계속 조율하는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 실력대로 시험 쳐서 천당 가겠다는 거에요.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고 얼마나 완벽하게 살려고 애를 쓴 그 실력을 좀 알아달라는 겁니다.


이게 수평적이라고 했지요. 수평적. 수직적이 아니고 수평적이에요. 인간의 바운더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바운더리. 아까 첫째 시간 복습 해 볼까요? 그런데 그 인간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누가 들어갔지요? 죽음이 들어왔지요. 그럼 인간은 죽음을 실어나르는 운반체라면 인간이 하는 내가 건전하게 살겠다하는 그 자체가 뭐다?


죽음을 유발하게 되고 저주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그 저주를 유발했던 요인을 확정 짓기 위해서 뭐가 들어오냐면 율법이 들어온거죠. 율법이 들어오니까 율법 안에 뭐가 들었죠? 7계명 뭡니까? 간음하지 말라 들어가있지요. 간음하지 말라 들어 있으니까 사람들은 간음 안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율법에서 걸어놓은 경품이죠 경품. 율법대로 살면 뭘 받는다? 복 받지요. 그 복을 따내고 싶은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중립이니까. 자기는 저주도 아니고 온전한 저주도 아니고 온전한 복도 아니지만 내 실력 발휘에 따라서 복도 될 수 있고 저주 될 수 있다라고 믿기 때문에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다 누굴 위해서다?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본인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겁니다. 그 선배가 누구에요? 그 선배가 한국교회고 한국교회 선배가 바리새인들이죠. 바리새인들이고 모든 인간들이 다 그거입니다.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전부 다 악마와 한통속이다. 악마의 품 안에 있는 자식들이다.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보면 돼요. 인간 자체가. 그들이 그 자체가 죄고 그런 거에요. 인간 공간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로마서 3장에 의하면 율법을 행한 것은 그들의 입을 막고 저주받게 하게 함이죠. 아까 동영상 첫번째 강의 뭐였어요?


욕심내기 위해서 다윗은 욕심 안내다가 욕심을 낸 게 아니고 처음부터 다윗은 욕심이 있었는데 그게 밧세바를 보는 순간 비로소 욕심이 발현된 거에요.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그 제목이 ‘욕심내기’에요. 욕심낼 때가 구원의 순간이죠. 욕심 안 내는게 아니고 욕심이 꾸준히 욕심이 있는데 그게 계기가 되게 되면 욕심이 욕심으로 툭 튀어나오는 거에요. 나중에 녹취 보세요.


인간 자체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하지말라에 하지말라가 인간 속에 가득 들어있습니다. 내가 하지말랬잖아 이 인간들아. 인간이란 뭐냐? “주께서 하지말랬잖아 이 존재들아” 가 뭉쳐져서 뭐가 된다? 인간이란 개념을 구성하는 겁니다. “뭘 해도 죽는다고 했잖아 너”. 이게 인간이에요. 어이구 인간아 할 때는 이런 뜻이란 말이죠. 실제로 성경에서 인간이라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인자라고 이야기해요. “인자야 네가 무엇이관대” 이렇게 되어 있지요. 네가 아무것도 아닌 인자. 헛되고 그림자 같은 인간들. 그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님께서 인자로 오셨잖아요. 세상에.


우리들끼리만 인간이어야 하는데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와버렸어요. 끼어들어 버렸어요. 그것은 뭐냐? 네가 누구라는 것은 네 선에서는 모르고 내 선에는 안다는 거에요. 외부에서 끼어들면서 비로소 아시는 거에요. 잠시 다녀갔잖아요. 다녀가고 단절되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성령오지 아니하면 누구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왜 죽는지도 몰라요.


그러면 성령이 딱 오게 되면 아까 그 성령이 오게 되면 영광을 받아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능력으로서는 구원될 수 없었다를 이미 구원받은 기쁨 속에서 감사 속에서 그걸 확인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 나는 내 힘으로 안돼. 그런데 그게 너무 좋아. 나 그게 너무 가벼워. 그것이 그대로 요한복음 8장까지 이어집니다. 간음을 통해서 등장하는 결과는 뭐냐 하면 이미 그 여자는 자유인이다. 자유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자유를 얻어라가 아니라 진리가 그렇게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진리가 진리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는 자유 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한테 필요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에게 필요한 거에요. 그러면 주님이 자유인이죠. 주님이 자유인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뭐 해야 돼요? 주님이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간음자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간음자 안되려고 애를 쓰잖아요. 잘나지도 못하면서. 간음 안한 것을 자랑이라고 여기고 있어.


만약 여러분들이 간음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간음했다고 치면 여러분들이 내가 간음했다 거기서 파생되는 그 결과에 대해서 여러분이 다 알고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한 가정이 파탄나지요. 한 가정이. 나는 내 즐거움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울게 되지요. 자기는 자기 좋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은 마음의 고통이 씻을 수없는 고통, 평생 씻을 수없는 상처를 주지요.


어떤 남자가 나는 너하고 헤어지고 나는 새로운 여자한테 가겠다 하면 여자가 남자보고 하는 말이 너는 네 생각밖에 안하나? 너는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해? 이런 말하겠지요? 그 말 듣고 가슴이 편하지 않겠지요? 괴롭겠지요? 이런 모습 있잖아요. 이런 도덕적, 윤리적 모습 모든 것을 다 고려하잔 말이죠. 고려하는데 그게 간음죄에요. 이게 간음죄라고요. 이게 상상이 됩니까? 표정들 보니까 강의 진도 못나가요. 7장 다시 해야 돼요.


자,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예수님의 공간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감사와 기쁨이 없어요. 왜 감사와 기쁨이 왜 없느냐? 이 초월받았다는 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이게 일반화되지를 않았어요. 일반화 되지 않을 때 주께서 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여자를 보고 음란을 품는 것은 무슨 죄다? 간음죄다. 이걸 율법에 집어넣어버렸어요.


집어넣으면 우리는 자신의 선량함과 건전함과 내가 훌륭한 남편으로서 가정을 이만큼 지켜왔다는 그의 노력과 그 하나의 여자로서 남자로서의 정절을 지켰다는 그런 노력들이 총 동원해서 내가 조율 한번 하는 거에요. 나의 건전함을 조종하는 거에요. 내가 이만큼 평생동안 간음하지 않고 살인, 남을 미워하지 않은 덕으로 그 보상으로 내가 가정을 이만큼 건사하고 산다라는 것과 결부를 시키고싶은 거에요.


그럼 그것은 결국 그것은 뭐를 유발하느냐. 초조함을 유발하죠. 왜? 쌓아놓은 모래성은 밑에만 탁 건드리면 다 무너지니까. 다 무너지까. 그런데 아주 건전한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유혹의 손을 내밀 때 남자가 뭐라고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겠지요. 내가 이 가정 꾸리기 위해서 수십년동안 했는데 네가 한방에 다 하느냐? 이 십자가 마을, 우리교회 이만큼 건사하기 위해서 얼마나 내가 노력하고 내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건전함을 유지했기 때문에 아 목사님 존경해요. 존경한다는 말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고 그래 더욱더 거룩해야 되고 그것도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지. 이러고 있을거라 이 말이죠.


그게 기쁨이에요? 그게 감사입니까? 아니면 마귀의 노예에요? 악마의 노예죠. 악마의 노예 다른 말로 그게 바로 간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거에요. 간음죄를 안 졌는데 계속해서 안 저질렀기 때문에 뭡니까? 계속 간음이 얼쩡거리고 있는 거에요. 계속해서 얼쩡거리고 있는 거에요.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면 "간음 저리가!! 간음 마귀 저리가 저리가!!"


제가 옛날에 박사교회 12년 동안 있으면서 여자 성도한테 악수 한번 안했어요. 왜냐하면 적어도 이정도로 지켜줘야 주께서 나를 쓰실 거 같아서. 그 행위 자체가 간음인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워낙 많이 선배 목사들이 여자 밝혀 망하는게 한방에 간게 하도 많으니까. 물론 작은 교회가 다 넘어가지 큰 교회는 끄덕도 없지만. 그것도 권력과 관계되가지고.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 그게 다 누굴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까? 누구의 건전함? 누구의 의? 나 자신이 내 실력발휘해서 천당가겠다는 그야말로 이미 내 안에 죽음을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죽음을 내 실력으로 걷어내도 그걸 생명으로 바꾸자하는 그 노력자체가 선악적인 그 노력자체가 말씀으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절대화시키는 악마의 앞잡이 노릇한 것도 모르고 이래야 내가 훌륭한 목사다라고 누구 앞에 자기를 자부한다는 것은 결국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하겠다는 수법에 지나지 않는 거에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이미 선배들이 이 짓을 했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상대적으로 우수하고 상대적으로 착하다를 하기 위해서 누가 있어야 돼요? 간음한 여인이 필요했던 거에요. 그런 사례가. 왜? 그래야 확일하게 자기가, 우리는 바로 죄를 죄라고 지적할 정도로 우리는 얼마나 의로우냐 이 말이죠. 우리는 얼마나 오직 정의, 오직 정의밖에 모르는 거에요. 정의가 죽은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뭐 정치적 발언은 하지 않겠습니다.


누구 죄를 지적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지적을 했다는 자체가 나는 그 지적당할 죄에서 벗어나 있는 정의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리와 창기를 어디 보냅니까? 천국 보내잖아요. 너희보다 먼저 천국가리라. 주님은 인간 공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 공간에는 어떤 식으로도 천국에 갈수 있다? 없다? 인간 공간 자체가 갇혀있는 거에요.


갇혀있다는 자체를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자유라는 표현을 쓰면서 표현하는 겁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씀으로서 바로 갇혀있는 모습이 바리새인이 하는 짓거리가 반복해서 매일같이 나오게 됐다는 거에요. 정말 간음한 여인을 체포하지 않더라도 지나가는 구경꾼이라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아휴 나는 간음 안해서 천만다행이다." 쓸어내린 자는 누구하고 한패에요? 바리새인과 한패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한패가 된다는 말은 이거는 갇혀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2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됐습니다. 너희는 어디서 났다? 아래에서 났지요. 아래라는 말을 예수님이 쓴다는 말은 아랫동네라는 말은 이거는 갇혀있다. 아랫동네라는 자체가 지옥이라는 뜻이에요. 그다음에 요한복음 8장 다른 분이 한번 요한복음 8장 44절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아멘.”


악마가 노리는게 뭐냐 하면 인간을 노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자기 수하이기 때문에 노릴 필요 없어요. 악마가 노리는 것은 인간을 내가 다루는데 예수 네가 뭔데? 내 자식을 빼내고자 하느냐 하는 것이에요. 인간은 못 빠져나오는데 못 빠져나오는 인간을 그냥 못 빠져 나오게 놔두지 왜 빼내느냐 하는 겁니다. 왜 그걸 빼내느냐에요.


주님께서 인간을 빼내는 방법은 나를 믿으라해서 빠지는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간음자가 될 때 빠지는 거에요. 우리가 그렇게 기피하는 간음자. 주님이 간음자가 되는 겁니다. 율법에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주님은 착한 분해서 율법에 선한 것만 했다고 생각하지요. 율법에 저주받는 것도 같이 했다는 생각은 못합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율법의 저주에요? 율법을 다 지켜서 그런 거에요? 율법을 율법에 저주마저도 율법의 지킴 속에 그게 항목으로 들어가 있잖아요. 율법에 위반해서 주어지는게 뭡니까? 저주지요. 주님이 다 지켰다면 저주받을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주님은 율법의 위반자로 들어온 거에요. 율법의 위반자. 거꾸로 들어가지요. 처음부터 뭐 예수님께서 간음하고 선지자 된게 아니고 저주부터 받아놓고 거꾸로 들어가는 거에요.


율법에 위반자 저주부터 들어가게 되면 여기 누가 기다립니가? 자기 백성이 지금 악마한테 사로잡힌게 보이겠지요? 이미 저주를 다 받았다니까. 예수님 쪽에서 다 받았어요. 민수기에 두번째 강의 들어보세요. 이미 예수님은 어린양은 이미 저주를 다 받았단 말이죠. 내가 대신 받은 저주에 해당되는 사람을 찾으러 가는 거에요. 그런데 이들은 뭐냐 하면 지금 이들은 저주아래 있잖아요. 율법아래 있단 말이죠.


그중에 한사람이 누구였다? 오늘 요한복음 8장에 누굽니까? 간음한 여인이거든요. 간음한 여인의 간음했다는 이 저주성을 예수님께서 이 저주를 품고 간음에 해당되는 저주를 품고 간음한 여인과 한패가 되어버린 거에요. 한패. 한패가 되지요. 한패가 되고 난 뒤 예수님 빠져나가 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그 간음한 여인이 뭐가 되버렸습니까? 자유인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자유인.


이게 이제 여기서 설명하려고 하면 긴데요. 길더라도 해야되겠어요. 자유라하는 것은 보통 그 전에 속박, 억압 이걸 전제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그 자유라는 언급을 하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요 8장 34절을 보게 되면 “예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되어 있지요?


아까 오늘 녹화한 첫번째 강의에 다윗이 욕심을 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욕심 안에 살고 있다가 거기에 노출된거죠. 욕심이 어떤 계기가 되어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노출된거죠. 그렇다면 이 말은 34절은 뭐냐 하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처음부터 죄 안에 있는게 티가 난거에요. 티가 났는데 이 여인은요 이 여인이 간음한 것은 이 여인이 간음할 수 있는 속성을 이미 지니고있었던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간음에다가 누굴 집어넣느냐 하면은요 이 바리새인들을 다 갖다 집어넣은거에요. 간음 안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 다 집어넣은거에요.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글로 쓰시면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했거든요. 자, 돌로칠 때는 뭐냐 하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돌을 치게 되어 있어요. 이 바리새인의 율법관에 의하면 간음한자는 돌로 치게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럼 그 돌 맞는 현장에 누가 있습니가? 여자만 남아있지요. 여자만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여자 옆에다가 돌로 치는 당사자들을 다 집어넣고자 하는 거에요. 글 쓰면서. 그 글을 쓸 때 바리새인들이 글을 쓰니까 예수님께서 글을 쓰니까 그게 무슨 글인지 볼게 아니겠습니까? 그거 볼거니까 자기가 숨겨놓은 모든 과거의 죄가 거기 다 있더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이 말도 안했는데 네가 남편 5명 있는거 알지요.


또 요한복음 5장인가 나오지요? 왕의 신하가 아프다는 것을 미리 아시잖아요. 4장 끝에. 주께서는 인간에게 증거를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가 인간의 속을 다 아심이라 되어 있다고요. 다 알고왔다고 다 알고. 형사가 검사가 심문할 때는 다 아는 거에요. 그걸 자백하기를 고백하기를 원하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찾아올 때 이미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 알고 들어왔기 때문에 “주여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이 말만 하면 돼요. 그 말도 하게 되면 하지마세요. 유구무언이다 하면 돼요 욥처럼.


믿습니다 말도 하지마. 뭘 믿어. 그냥 들켰다 하면 되지 뭘 믿어요. 믿는다고 해서 이쁘다는 소리 안와요. 주님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는 우리 들통날건 다 들통난거에요. 그 저주는 우리가 받을 저주잖아요. 이게 이미 단절된 상태에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실정을 한꺼번에 다 알려주는거에요. 이게 아까 초월이라고 했지요. 그 기쁨이 오래가면 좋겠는데 기껏 3초, 4초 간다고요.


다시 "야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이제부터 남은건 나는 복 받아야지." 이렇게 나가다가 또 바닥을 쳐야 될 우리가 다시 또 높아져 슬금슬금 또 높아지는 거에요. 네가 믿음 좋으냐 내가 믿음 좋으냐 이래 가지고 또 시합하는 거에요. 또 바닥을 치게 만들죠. 이 여자가 간음한 것에 다 집어넣어버려요. 다 집어넣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마저 이 여자의 간음 속에 들어가버립니다. 그러고 이야기합니다. “여자야 다 어디 갔느냐” 이야기하지요. 다 어디 갔느냐.


바리새인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율법을 사용했다는 말은 자기는 건전하다 자기는 건전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못한 여인을 발견하고 아주 좋아라 하면서 거기에 돌을 던지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만 바리새인들이 그냥 돌을 던졌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건전함이 유지가 되는데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한테 시비걸라고 일부러 질질 끌고왔더니 모세의 율법에 돌로 치라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칠까요? 말까요? 돌로 칠까요? 안 그러면 당신이 율법 어기고 풀어줄까요? 라고 이렇게 온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잘났다는 인간들을 글로 쓰면서 그들의 과거를 다 노출하면서 여자 돌 치거든 그 다음에 돌 맞은 그 여자 자리가 네가 한번 앉아라. 내가 쳐줄게.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죠. 그럼 죄 없는 자가 여기서 예수님이겠느냐? 아니죠. 예수님도 버림받았으니까 예수님은 충분하게 아주 충실하게 죄 있는 세계 속에 흠뻑 빠졌어요. 목만 내 놓고 발만 죄가 아니라 전부 다를 여기에 집어넣은 거에요. 전부 다를.


그 간음죄 속에 바리새인부터 예수님부터 여자까지 다 들어온거에요. 왜? 이래야 뭐가 생기느냐 하면 여기서 탈출이 되어야 여기서 여자와 함께 탈출이 되어야 이것이 바로 무슨 공간이냐? 예수님의 공간이에요. 이게 천국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는 없어요. 예수님의 나라는 없어요. 예수님 이 땅에 죄와 더불어 있어야 탈출이 되어야 비로소 생기는 것이 뭐냐? 예수님의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공간은 죄를 적시지 않으면 발생되지 않아요. 죄 없이 따로 있는 것이 예수님의 공간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는 예수님의 공간에 꼭 필요한 존재에요. 따라서 이 땅에서 우리는 간음죄를 지어야 되는 거에요. 왜? 무슨 무슨 공간 때문에? 말씀이 말씀되라는 공간을 위해서 주께서 타이밍 맞춰서 우리를 이 땅에서 몇년몇월부터 몇년까지 살도록 되어있는 겁니다.


그 살면서 한시라도 간음죄 아닌게 없고 살인죄 아닌게 없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니까. 10계명 죄 실천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탐냈고 전부다 내 중심이 된 이상은 한순간도 10계명 하나라도 지켜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왜 그렇게 하는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의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씀의 공간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시는 거에요. 타이밍 맞춰서 사건 맞춰서.


그래놓으니까 우리라는 존재가 굉장히 중요한 존재지요?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거죠. 배역을. 되게 중요한 배역을, 간음한 배역, 탐내는 배역 좀 충실하세요. 빼지 말고. 내 공간 아닙니다. 내 위주 공간 나 잘났다 공간 아닙니다. 주님 잘났다 공간을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있는 거에요.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렇습니다. 이 여인이 간음했는데 좀 몰래 하면 좀 어때. 주께서 일부러 들키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아까 실컷 강의해도 소용 없는게 백날 해도 다시 돌아서면 다시 인간 공간으로 돌아와요. "아휴 들키면 안되는데. 내 인생 쌓아놓은거 다 무너지는데."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의 처지나 우리의 형편을 지금 고려하지를 않습니다. 성도는 말씀 공간만 드러나면 자기역할은 끝나는 거에요. 내 자존심, 내 체면, 위신 개나 줘버려라. 그딴거 필요 없어요.


얼마나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를 하고 내가 이렇게 하면 얼마나 주위 사람들이 좌절을 하고 실망을 하고 주님을 버릴 것이고 사람보고 버릴 거 같으면 애초부터 지옥으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내가 가정에서 잘해야 우리 자식들이 나를 본받아서 자식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데." 그런 되지도 않는 소설 쓰지 마세요. 구원 받고 안 받고는 우리 소관 아닙니다. 어디서 주님 핑계대면서 자기 건전함 유지할려고 합니까.


그래놓고 주님 우리가 이렇게 했습니다. 저렇게 했습니다. 그거 자기 성과로서 내밀려고. 이렇게 충성했습니다 그런거 내밀 생각했습니까? 내가 이만큼 착했으니까 내가 이정도로 가정 챙기고 살지. 자식 챙기고 살지 뭐 이렇게 자기 자화자찬하려고 하는 겁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으니까 내가 지금 마음대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안 믿는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여러분 보고 이야기하는거 아닙니다.


제가 그 여행을 가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참석하신 분이 저를 기억하기를 마지막 공항 끝나면서 "목사님 이야기 중에 딱 하나는 기억납니다." "뭡니까?" "막 살아라." 그래서 "그렇습니다. 막 사세요. 막 사셔야 됩니다." 막 산다는 것은 뭘 버린거에요? 자기 체면, 자기 위신, 자기 자존심, 자기 자존감, 갖다 버려. 개나 줘버렸단 말입니다. 내가 개가 된다 할지라도 주위 사람들이 나를 간음한 여인이라 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공간에서 나온 해석이거든요. 주님의 공간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간음한 여인은 얼마나 중요한 연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연기 치고는 좀 괜찮은 연기로 보입니다만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감히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드러내잖아요. 하나님의 타이밍 맞춰서. 9장에 보면 또 나옵니다. 이건 간음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뭐냐? 날 때부터 소경된 거에요. 얼마나 재수 없겠어요.


남들 눈들은 멀쩡한데 왜 하필이면 영어로 why me. 왜 주여 why me. 주여. Lord 주여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고난 시련을 주십니까. 그 많은 사람 놔두고 왜 하필이면. 주께서 이야기해요. "그 역할 너 하라고 너 태어난건데." 말씀이 먼저 있고 말씀 맞추기 위해서 네가 태어난 것이지 네가 있고 너 천당가라고 말씀 있는게 아니잖아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나 아니라도 각자 가정마다 사연들이 있어요. 사연들이. 혼자만 아는 그런 사연들이 있다고요.


그야말로 자기가 성도인 사람은 이런 소리를 안하게 되지요? 나 상처받았다. 이게 얼마나 건방지고 교만한 주장입니까. 네가 뭔데 상처를 안 받아요? 네가 뭔데? 예? 네가 뭔데 왜 너는 안 건드려야 되는데? 죄인 주제에. 죄인 주제에 얼마나 건방진 것도 아니고 시건방진거에요. 나는 상처받았다고. 주님 상처받은거 생각해봐요. 네 상처가 크나? 주님 상처가 크나. 인간 같지도 않은게 상처받았다고 찡찡대지 말고 주님이 주님 상처를 증거하기 위해서 너한테 상처온거에요. 네 상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간음죄가 들킨게 그게 뭐 그렇게 허물이라고 그거 허물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기능과 역할을 맡겨 줬다는 이것이 간음 속에서 간음 속에 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큰 기쁨이고 큰 감사함입니다. 지금 논리가 맞잖아요. 이게 맞는 논리에요. 헛된 논리 아닙니다. 바닥을 쳐야 내가 바닥에 주저앉을 바닥에 내리꽂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을 그것밖에 안되는 것을 알아야 그 뒷배경에 금강산 그림, 주님의 영광, 김일성 주석에 있는 그 큰 그림 다 보이죠.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알짱거리면서 그 그림 가리면서 얼쩡거리고 있다고요. 지 그림 보기도 좋지 않은 그림 가지고. 뭐 기도했니 뭐 헌금했니. 주저앉혀버려. 너는 간음한 자야. 너는 살인자야. 너는 탐욕자야. 주저앉아버릴 때 이런 인간을 그냥 구원해주신 그 주님의 그 십자가 그림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지난 주일 낮 설교할 때 나도 헌금하고 마지막 설교가 이랬어요. 교회 때려치고 여기다 십자가 꽂아버리자.


주님의 조건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가야 돼요. 우리의 모든 태어남과 행위와 모든 노력은 십자가로 모이게 되어있어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고난이에요 우리가. 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역할을 맡은 거에요. 2018년 역할 따로 있고 2019년 역할 따로 있고 2020년 그때까지 살지 모르겠습니다. 2020년 역할 따로 있어요. 전부다 각자 역할이 있고 그걸 저는 기성품이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했습니까? 수제품이라고 했지요.


기성품은 흉내내면 되지만 수제품은 직접 다뤄요. 그 사람의 형편 따라 사정 따라 사연 따라 가정 따라. 출신이 서울 출신이냐 대구 출신이냐 따라 전부다. (너무 시끄럽다고 하는가 보다. 미안합니다. 가만있다가 복음 다 듣네. 상처 받은 모양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체포해온 것은 그들이 장차 예수님을 체포하는 의식과 동일선상에 있어요. 간음한 여인이 발생됨으로서 자신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살았는가 율법을 어떤 식으로 이용해왔던가가 들통나는 겁니다. 율법은 나의 잘남과 나의 건전함과 내 우수함을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율법이 동원된거에요. 그런데 그게 뭐냐? 죄에 갇힌 모습. 이게 죄에 갇힌 모습이라고 했지요 이게 죄에 갇힌 모습.


(이명직 목사님 지금 벽이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벽이? 김치 냉장고 소리입니다. 아! 그게 김치 냉장고 소리에요? 그럼 좀 떠들어도 괜찮겠네요? 아이~ 이것도 하나의 역할이다. 괜히 쫄았잖아. 이런거까지 녹취하면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 홍민희씨 이런거 녹취하면 재미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간음한 여인을 유발시킨 것은 간음한 여인이 일반 사람에게 돌에 맞아죽을 정도로 간음한 여인은 사람들에게 죄에서 못 빠져나오는 그런 역할을 보여주는 거에요. 너는 이 사회에서 매장 당해서 매장 당했다는 그 점이 뭐냐 하면 바로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결국은 죄에서 못 벗어남을 보여주는 표준 모습이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제품. 시제품. 먼저 시범적으로 모델로 내놓는 상품이죠.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요한복음 8장에서 말고 여러분 주변에서 간음한 여인을 봤을 때 간음한 남자도 아니에요. 간음한 여인이에요. 여자는 약하니까 있을 때 그를 보고 돌로 치고 싶은 생각이 들거든 네가 바로 뭐다? 네가 바로 간음한 자다. 네가 인간의 공간, 율법을 가지고 내가 판단한 판단할 자격도 안되는게 판단하고 돌에 맞아 죽을 죄인이 죄 없는 자가 아니고 죄 있는 자가 과연 죄를 논할 자격이나 되냐 이 말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죄를 이야기할 자격이 되요? 안되지요. 예수님께서 일련의 연출을 하신거에요. 일부러. 간음하게 만들고 그것도 때마침 들키게 만들고. 우사스럽게 만들고 그걸 때맞춰 그걸 바리새인들에게 소문나게 만들어서 그게 하나의 드라마가 멋진 드라마가 되게 하는 거에요. 그 무대를 만드는 거에요. 무대를 세팅하게 딱 만들어놨지요.


세팅하게 만들어 놓고 거기서 뭐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는 이 주제를 탁 올립니다. 그럼 모든 인간들은 간음한 여인이 촉발한 이 죄 문제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못 빠져나오고 있다는 거에요. 빠져 나갈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거에요. 왜? 죄 없는 자가 간음한 죄 바깥에 나가서 돌로 쳐야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율법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한 말은 그것은 앞에 구약에 안 나타나있는데 앞에 예수님이 와서 제대로 앞에 미진한 부분을 마저 채웠지요? 뭡니까? 죄는 없는 자만이 돌로 칠 수가 있다는 조건이 신약에 와서 덧붙여졌지요. 덧붙인데다가 더 확연하게 모든게 완료가 완성된 채 다 드러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묻습니다. 간음한 자가 간음한 본인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간음한 자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질책을 못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자체가 나를 위함, 나의 건전함을 위한 공간이 아님을 아니라 말씀의 공간임을 인식해야지요. 말씀의 공간임을. 야곱이 얍복강에서 누구를 만났지요? 하나님 만났지요. 너 죽고 나 죽고 싸웠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야곱이 자기를 질책해야 됩니까? 아니면 이 사건 자체를 주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봐야 돼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보는 동시에 내가 나의 책임 나의 질책할 권한이 나한테는 애초부터 없었던 거에요.


그게 무슨 공간이냐 하면 이게 바로 자유의 공간인거에요. 내가 나를 정죄하지 않는 공간.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애초부터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그 공간. 그게 나중에 요한복음 7장 전에도 말했지만 이게 단절되고 난 뒤에 주어진 성령이 올 때 우리가 이런 입장에 있다는 것이 그때 완전히 성령이 오게 되면 다 아는 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올 때는 반드시 십자가로 오는 거에요. 그 십자가 안에 누가 들어 있어요? 내 죄를 이미 다 처리했음을.


죄가 처리했으니까 내가 나를 처리하면 안되겠지요? 그럼 나는 왜 이 땅에서 육신으로 죄를 질 수밖에 없는가? 그게 역할이고 기능이기 때문에. 뭘 드러내기 위한? 말씀이 스스로 말씀에게 돌아간다는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고 나에게 그런 일을 유발시킨거에요. 소경이 날 때부터 뭐 됐다? 9장에서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거에요.


제자들이 모르고 저 사람은 조상 죄 때문에 소경됐습니까? 자기 죄 때문에 소경됐습니까? 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제자들은 뭐 됩니까? 본인이 소경이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예수님 성령 오기 전까지는 다 소경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내빼지요. 보아도 몰라요. 성경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은 폭로입니다. 인간이 여기에 갇혀있음을 드러내는 폭로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여러분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여러분 잘 아시죠? 28장 마지막에 유명한 말씀. 사도행전 실컷 전도해놓고 초를 쳐버려요 초를. 사도 바울 본인이 초를 쳐버려요. 이 백성이 말하기를 듣기는 너희가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선교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지옥임을 지옥이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이 지옥임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성도를 이 땅에서 만들어낸 거에요.


성도는 착하다가 아니라 완벽하다 아니라 철저하다가 아니라 성도만이 자기 자신이 이건 주님의 주님됨이 드러내기 위한 기능임을 아는 거에요.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다. 왜 앉은뱅이 되었습니까? 남보다 죄 더 지었습니까? 아니에요. 앉은뱅이 된 타이밍에 그다음 대목에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해서 낫게 하는 그 사건을 사건의 역할을 맡기 위해서 앉은뱅이가 되야 되는 거에요.


"사모님 왜 그리 멋있게 생긴거에요?" 정답은 다 주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또 목사님 또 좋아한다. 이쁜데 뭘 이쁜걸 뭐 일부러 흉하게 하지 마세요. 이쁜건 이쁜 티는 내세요. 나의 영광 아니란 말이죠. 이쁜 역할을 맡았는데 어떡하란 말입니까 이쁜 역할을 맡았는데. 못생겨도 배역 잘 맡으면 돈 벌어요. 기생충 보세요. 자기 역할에 충실하세요. 자기 역할에. 우리 집안 거덜났다. 거덜나고 그게 하나의 시나리오에 들어있는 거에요. 주님의 시나리오의 역할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시나리오에. 다시 태어나면 그런 결정 안한다고요? 백번 태어나보세요. 똑같은 길 갈 수밖에 없지요.


사도행전에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네가 깨달으면 네 공로 아니고 네가 만든 기적 아니다. 이거는 난데없이 주어진 언약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물이에요. 이건 뭐 돈 주고 산 게 아니에요. 어디 가서 이 보물 자랑합니까. 그야말로 이 세상 이런 보물보다 더 큰 보물은 없어요. 가장 귀한 것은 그리스도, 그래서 자랑할게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이제 실감 나십니까? (조용할게요.)


그 십자가 앞에서 나의 공간을 잠시나마 잊어버린거에요. 내가 어떤 여자며 어떤 남자며 그런 것은 그런 것 생각하는 자체가 악마의 시험입니다. 주님은 답답한거에요. 내가 맡긴 역할인데 네가 뭐 맘에 드니 안 드니. 이건 뭐 패도 안 되고 패버릴까 이거. 왜 또 들키게 했어요. 들키고 말고 들키는 것도 자기 맘대로 되는게 아니에요. 그 장, 그 간음한 여인과 바리새인의 만남 예수님의 끼어듦 이 모든 장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거에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주되게 하게 위해서 하는 거에요. 내가 왜 왔느냐 하는 거에요. 너희가 마귀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왔다는 거에요. 자유가 없으니까. 평소에 하는 것도 죄지만 계속해서 툭툭 터지면서 그 죄가 나오는 그래서 네가 죄에 갇혀있고 네 힘으로는 못 빠져나온다는 것. 죄 없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죄 없는 자가.


그럼 자유는 뭐냐? 자유란 본래의 자리에 안정되게 앉히는 겁니다 자유란. 본래 어떤 자리에 들어가는 거에요. 내가 자유를 소유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말씀 자유를 소유하지 마세요. 어떤 자리를 마련하는 거에요.


거기에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5장에 네가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어떤 위상을 부여받는 거에요. 빛이라는 자리 소금이라는 자리. 썩어진 곳에 소금으로 버티고 있고 어떤 등경에 두지 않고 위에 선반에 그냥 빛으로 빛나고 있는 거에요. 빛나고 있을 때 내 영광이 아닙니다. 이거는 뭐냐? 말씀의 영광, 말씀의 공간, 주님의 공간을 빛내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하나의 기능이니까 나보고 뭐라 하지 마라. 네가 잘했다 못했다 나보고 그렇게 하지 마란 말이에요. 그걸 이제 안동인가? 씨부려싸지말라는거 있어요. 욕 아닌데 이상하게 듣기에 욕처럼 들리는게 있어요. 씨부려싸지 말라. 나보고 뭐라고 하지 말라는 거죠.


나는 뭘 해도 죄인이니까. 못했니 잘했니 칭찬도 할 필요도 없어. 내가 보여줄 것은 내가 못났는데 이런 기능으로 기능을 통해서 못난 나를 통해서 잘난 내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여기에 하나의 불꽃을 보여주는 심지로써 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떨기나무처럼 타고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 너무 이 직분이 황홀해서 세상에 어떤 상금하고도 안 바꾼다 했거든요 사도 바울은. 내가 맡은 직분 자체가 상이라고 했어요.


그러고 보니까 간음한 여인처럼 되고 싶은 생각 없어요? 주님 좀 하게 하옵소서. 주위 사람들에게 들키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나는 아빠한테 실망했어. 난 엄마한테 실망했어. 돌을 막 던지게 하옵소서. 왜?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다시 요한복음 8장을 재현하는 거에요. 그걸 재현배역이라고 재현배우.


구원은 받아놨는데 요한복음 8장 역할을 맡았다 하면 이건 자기 역할에 충실하세요. 연기 잘해야 돼. 연기 잘해야 돼. 욕하면 얻어먹고. 요한복음 8장 8장 봅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해놓고 글을 두 번 썼어요. 두고 보자 하는 거에요. 전부다 어디 나올래면 나와 봐. 돌 들고 나오겠지요 누가. 나온 족족 보자. 너는 이런 인간이구나. 자 돌로 쳐쳐. 쳐쳐 하니까.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주님의 증인하면 핑계거든요. 자기가 저 여자를 우사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더 절실하게 자기 죄가 남의 죄가 드러나는 것보다 자기 죄가 드러나는게 더 우사스럽잖아요. 차라리 퉁 치자. 도망가기 바빠요. 베드로가 도망간 이유가 거기에 있고. 우리 퉁 치는 걸로 하자. 내가 안 때릴께 퉁 치자. 그래서 도망치고만 겁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야” 일부러 물어요. 아무도 없던 것을 알면서도 물어요.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다시금 이야기합니다. 이 여자는 자기변명이라든지 내가 어쩔 수 없이 바람피웠다는 소리 하면 안돼요. 그런 것은 안돼요. 그런 것은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거에요.


그런데 그런 소리할 수 있는 여자에요. 인간이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이미 다 우사스럽게 만들어놓고 입에서 나는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주님의 말씀을 위해서 연기했습니다. 그런 소리조차 안 나오게 만들어요. 그냥 고소당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고소한 사람이 없네요. 이건 뭐에요? 자기 의란 말이에요? 잘났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니죠.


죽어 마땅하다는 말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에요. 아무도 안 들키고 아무도 고소함이 없다 할지라도 나는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돌에 백번 맞아도 쌉니다라는 것. "주님 연기해서 그렇잖아요." 뭐 그런 소리, 그건 주님이 할 소리지 네가 할 소리는 아니죠. 추가적인 주의 말씀을 반사시켜야 돼요.


“나도 널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아라”.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라라는 말은 뭐냐? 착하게 살아란 말이 아니고 아직까지 이 사건으로서 오늘 할 일 다 했다는 말이 아니고 십자가 죽어야 될 일까지 남아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죄 용서받았다 그 죄가 그 죄의 전부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죠. 네가 만약에 십자가를 안다면 간음하지 않았을 때 바람피우지 않았을 때 착실하게 애들한테 젖먹이고 힘들게 일하는 그것 조차도 뭐가 된다? 바로 죄가 된다는 그 조차도 죄가 된다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네가 어떻게 할 게 아니라 예수님이 앞으로 네가 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증거하고 증명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죄였습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 공간에서 유일하게 죄가 아닌 의가 되는 거에요 이게. 의의 증인이기 때문에.


내가 죄 졌다 안 졌다가 아니라 주께서 의가 나오도록 주께서 나를 활용했다는 그겁니다. 나는 죄 안 지었습니다 하면 그건 자기 잘남이 되기 때문에 예수의 증인 아니잖아요. 끝까지 끝까지 주님의 의만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나오는 그 모습, 그것이 뭐냐? 죄 아닌 모습, 유일하게 최종적인 죄 안 짓는 모습이에요.


나를 잊어버리고 주께서 나를 활용하고 계시다는 예수의 증인되는 것, 그 역할을 최종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 여인에게 이런 사태를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끝으로 그러면 우리가 밥을 먹는다. 짬뽕 먹을까? 짜장 먹을까? 이것도 역시 간음죄에 해당되죠. 왜?


예수님 증거하는 거니까. 우리는 그것을 잘났다 하니까. 에이 칠칠치 않게 여기서 냉면 먹다니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게 바로 죄 없는 자가 냉면 먹는 자 돌로 쳐라. 우리는 항상 자기는 오늘 예가 확실하죠. 오늘 중국집 왔으니까. 항상 뭐 할 때 나는 착한데 나는 선량한데 나는 건전한데 저건 나보다 못하다. 이게 바로 우리가 간음죄고 살인죄고 이 자체가 십자가지게 된 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내 공간만 생각했습니다. 주님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주께서 이용함에 대해서 우리가 오히려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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