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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14:33:21 조회 : 72         
20191014a 부산강의 : [시편]22(14편)-죽음 사건 이름 : 한윤범(IP:221.147.126.19)
20191014a 부산강의 : [시편]22(14편)-죽음 사건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4편 5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일단 제가 읽겠습니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아멘.

이 본문이 너무나 너무나 많은 것이 함축돼있고 함축됐다는 것은 깊이가 깊다는 것이죠. 그때는 위에서 표면에서 뚫고 내려가야 되는데 우선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면 7절에 보면, 포로된 것을 돌이키신다고 했는데 아예 포로 안 되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 생각에.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 기뻐하지 마시고 아예 적들에게 안 잡히면 좋지 않을까, 우리 생각이거든요.

포로된 일이 없을 경우에 그냥 기뻐한다면 무엇이 누락되고 무엇을 건질 수가 없는가?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됐다가 탈출시키는 과정이 만약에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점을 모르게 되고 빠트리게 되느냐고 질문을 던져야 되겠지요.

여기서 죽음도 사건이 포함된다, 라고 제가 말을 썼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태어나서 죽잖아요. 죽음이 있단 말이죠. 이건 출생이고. 출생에서 죽는 것까지 인간이 생각한 전부에요. 만약에 부활이 있다. 다시 삶이 있다면 출생이 끝이 아니고 부활이 끝이기 때문에 죽음은 이 가운데 있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여기서 모든 것을 결정하려고 해요. 이것을 사람들은 사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의미란 것은 시간에서 끊어지는 것이 있을 때 거기서 의미가 생기는데 그 의미는 죽음 이전에 여기서 다 모아놓은 것, 집합한 것, 구성된 의미죠. 여기에서 탈출해야 된다는 겁니다.

죽음에서 점점 부활의 세계로 간다면 우리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죽음이란 것을 경유해야 된다는 거죠. 죽음이란 사건이 없으면 하나님이 생각한 영생의 나라가 우리 속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여기서 어려워요. 진짜 정말 어려워요. 제가 어렵다고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활의 세계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부활을 상상하는 것과 하나는 실제 하는 것. 죽으면 부활한다.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꽝이에요. 이거는 백날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실제 한다면 이건 동그라미에요. 그러면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겠지. 이거는 꽝이에요. 이건 말도 안 돼요. 이건 해봐야 헛수고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활이 있다면, 이 부활은 미리 이 앞에서 의미가 덮치는 겁니다. 이걸 선취라고 하는데요. 미리 경험한다, 미리 맛본다, 미리 취한다, 미리 갖게 된다. 선취라 합니다. 이걸 가져다주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죽기 전에 맛보아야 될 부활을 이건 상상밖에 안 되니까 상상은 쉽게 말해서 착각인 거예요. 보통에 교회에서 이걸 많이 하지요. 죽어도 믿습니까? 이런 건 착각이에요.

이게 실제가 되게 되면, 지금 여기 부활의 삶에 미리 들어가게 됩니다. 그럼 두 개의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하나는 빨간 것으로 썼고 하나는 까만 것으로 했지요. 나라는 인간 안에 두 개의 의미가 작동하고 있어요. 이 의미는 뭐냐 하면, 탈출할 수 없는 이유와, 점점 말이 어려워지더라도 참으세요.

이 의미는 죽음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서 못 벗어나는 것들로 모여 있는 의미에요. 죽음에서 못 벗어나는 이유들로 모아진 의미죠. 사람이 왜 죽는가 하면 죄 때문에 죽고, 죄가 뭐냐? 자기 의로움이거든요. 자기 의 때문에 죽는단 말이죠. 선과 악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게 바로 죽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런데 이 의미 때문에 죽음에서 탈출이 못 돼요.

그런데 이쪽 의미는 이게 용서거든요. 용서,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건 선악이 아니고 생명나무, 그리고 이건 사랑이고. 앞에 있는 죽음은 율법이란 말이죠. 율법 안에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죽음 심판 안에 있기 때문에 의미는 이 의미가 전부에요. 여기서는 두려움과 무서움, 공포, 걱정근심 나오지요. 아까 두려움 나온 것 같은데요.

제가 지금 5절 강의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은 위쪽에 있는데 아래쪽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죽는 게 무서워서 이것이 끝장났으니까 나는 죽음이 주는 공포의 의미가 앞의 의미로 가득 채우는 겁니다. 벌벌 떨면서.

그런데 이미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죽는 것이 마땅함을 받아주는 의미가 두 번째 의미에요. 죽음을 겪지 않고서는 부활이란 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의 의미는 뭐냐 하면, 인간의 한계를 말해줘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부활은 누구 손을 타느냐 하면, 바로 주님이 친히 손을 대줘야 돼요. 주님의 공로가 되고 주님의 일방적인 자기 작업이 들어가야 돼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안 돼요. 빨리 공부하고 일하러 가셔야 되니까. 일해야 먹고 살지요. 잘리면 무섭잖아요. 두렵고 두렵잖아요. 잘리면 자식들 뭐 먹고 살고 나는 노후대책 하나도 안 돼 있는데 걱정근심이 가득하단 말이죠. 이거거든요. 이것을 필히 간직해야 돼요. 이게 노른자라면 흰자가 있어줘야 되거든요. 노른자가 뭐냐 하면,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 그냥 죽으면 안 되지요. 죽는 이유가 있어야 되지요. 자기 의, 율법, 법대로 바르게 살자. 그러면서도 계속 쫓기 벌벌 떨며 살아가는 것.

거기에 대해서 성령께서 알려주는 바는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 에요. 대신 다 이루었다. 처리했다. 끝냈다. 그런 것이 성도한테는 중복돼있습니다. 중복현실이라 하는데. 현실인데 불신자에겐 없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부활의 선취성, 부활의 능력이 죽음과 함께 있으면서,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시작은 죽음의 두려움부터 그리고 그것의 끝은 이겼다는 것. 내가 법이라는 것, 법의식, 양심이라든지 거기에 구애받지 말라. 그걸 어제 낮에 주눅 들지 말라. 그런 겁니다.

그럼 우선 성도라 치고, 성도니까 선취된 입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그렸던 것이 하나의 철학이론 같으면 우리는 참고하면 그만인데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시고 실제로 사흘 만에 부활했어요. 그러면 이야기 끝난 거예요. 정말 이거는 부활이 없다는 인간들이 거짓말쟁이에요. 그들이 가짜 인간이고.

예수님이 부활 안 했고 우리가 부처를 믿는다든지 어떤 철학자를 믿는다면 이건 참고사항으로 하겠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버리면 우리가 아는 세계보다 포괄적이죠. 범위가 더 넓은 거예요. 사는 운동장이 더 넓다. 좀스럽게 사는 게 아니고 활짝 핀 거예요. 전체가. 그 운동장에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살려둘 때 그 살려둔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그 점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출발은 인간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인간은 항상 자기를 생각하지요. 이걸 주체성이라 해요. 나는 누군가, 나는 어떻게 사는가? 출발은 이건 신자건 불신자건 관계없어요. 살 때 주체성을 이야기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타인으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고 관심을 받게 되고 시선을 두게 됩니다. 이 타인을 개체성이라 합니다. 주체가 있으면 반대에 개체가 있거든요.

그래서 항상 주체성이 주목을 받으니까 나라는 인간은 내가 뭘 어떻게 살까, 하는 것은 항상 곁눈질하게 돼있지요. 이웃이나 주변사람. 주변사람이 대표적으로 누구겠어요? 가족, 심지어 강아지, 고양이까지 포함해요. 내가 행동 잘못하면 고양이가 얼마나 화를 내는지를 하면서 자기 행동을 수정해 나가기 시작해요. 그게 뭐냐? 개체라 합니다. 개체가 인간뿐만 아니고 환경까지 다 포함되지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인간이 고분고분할까요, 안 할까요? 안 합니다. 네가 그걸 요구해도 참다참다 나도 폭발한다. 나는 더 이상 네가 시키는 대로 끌려가는 인생 하기 싫다고 자기 나름대로 공격을 타인에게 시선을 주겠지요. 너는 나에게 달라지라 하지만 나는 말한다. 네가 달라져라. 이걸 시선투쟁이라 해요.

시선투쟁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피곤함을 유발한다는 것. 공장이나 회사에서 주인 된 사람들, 감독된 사람들은 항상 이런 입장에 있어요. 공장에서 일할 때는 일사천리로 모든 직원들이 집중해줘야 돼요. 안 그러면 하자가 생기니까요. 하자 생기면 수출할 때 클레임 발생해서 안 되거든요.

집중할 때는 감독을 해요. 집에서 피자 포장지 접는 것하고, <기생충> 영화에서 온 식구가 피자 포장지 접는 일을 하다가 20퍼센트 하자나서 피자집에서 화내는 것 있거든요. 또 인형 눈 붙이는 것. 그렇더라도 이거는 피곤해요. 왜냐하면 감독관이 있기 때문에. 감독관 시키는 대로 하려하니까 또 감독관 살아온 인생이 있잖아요.

그럼 나는 내 인생 없습니까? 이걸 돈이라는 이유 때문에 억지로 맞추려고 하니까 피곤해 미치는 거예요. 단지 돈인데. 더러워서 안 한다고 식당 같으면 앞치마 던지든지, 사표를 내든지 더러워서 못하겠다. 이것 아니면 내 못 먹고 사냐고 하지요. 왜냐하면 네 인생 있는데 네가 뭔데 내가 니 인생 따라갈 필요 있느냐? 이쪽에선 말하기를, “돈 주잖아, 돈. 너 딴 데 가면 이만한 돈 주는데 봤나?” 이래 된다 이 말이죠.

우리 목사님한테는 해당이 안 되지만 다른 노회 목사들은 다 해당이 돼요. 돈 때문에 목사하기 때문에. 심지어 목사들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돈 안 주는데 꼭 목회할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돈 많이 벌면 목회 안 할래. 놀러 다닐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든다고 단언을 안 했습니다만 들 수도 있어요. 그 정도 피곤하다.

여기 시선투쟁에서 주목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시선투쟁에서 법이 생깁니다. 율법이 생기죠. 자, 율법이라 하는 것이 인간은 법이 있지만 타인을 인간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으로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한다. 이게 시내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뭘 받아와요. 뭘 받아옵니까? 십계명+율법+제사법 받아오지요. 이걸 율법이라 합니다. 더 크게 이야기해서 선지자의 발언도 율법에 들어가요. 더 크게 이야기해서는 사도 바울이 하는 명령도 율법에 들어가요.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뜻이 법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법의 형식으로 주어진다는 말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라 또는 하지 말라. 딱 두 종류 명령법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하라 하면 안 하고, 하지 말라 하면 하고.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탐내지 말라는 순간 갑자기,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는 말로 우리를 후비고 작업하게 되면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탐내고 싶다는 욕망이 나온다는 거예요. 제 이야기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 나와요. 탐내지 말라는 순간 탐을 내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고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면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면 우리는 그게 사는 걸로 알아요. 그게 물건이지 사는 거가. 짐승도 아니고. 먹는 것으로 산다고?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 대번에 이게 나오게 돼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봐야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죄가 나와요. 말씀을 안 보면 자기 의로움이 돼버려요.

어제 오후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아무 의미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관계는 내가 죄의식을 가질 때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삼위일체고 이래서는 하나님은 이론 하나님이고 실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누가 놀래느냐 하면, 내가 놀라는 거예요. 내 속에 이런 반발심이 내 허락도 없이 들어앉아있었구나. 이건 진짜 내 진심이 아닌데 왜 이게 들어앉아있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로마서 7장에 보면, 내가 선을 원해도 내 속에 원하지 않는다는 게 있다는 그게 뭐냐 하면, 원하지 않는 악이 짓밟고 까불지 말라고 선을 억누르면서 튀어나오게 돼있는 이것이 바로 인간이며, 이 인간인 것을 아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성령 받은 성도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는 악이 안 나오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는 내가 악 덩어리인 것을 다윗처럼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그것에 눈을 뜹니까? 이게 아까 이야기한 부활의 세계에서 오는 시선이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가능한 거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시선에 동참해서 나를 다시 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란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착한 사람 된다는 그런 낭설을 믿지 마세요. 그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착한 사람이 지옥 가는 거예요. 이삭에 아들이 둘 있지요. 에서와 야곱. 둘 중에 누가 거짓말했습니까? 누가 의도적으로 속였어요? 야곱이 속였지요. 천국 갔습니다. 에서는? 착실하지요. 아버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했지요. 지옥 갔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 유산 빼돌려서 기생들과 다 말아먹고 탕자 된 그 사람과 평생토록 아버지 옆에서 착실하기 그지없지요. 아버지 곁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들, 누가 하늘나라 칭찬받습니까? 탕자가 칭찬받아요. 반전입니다. 역전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회계담당직원이 횡령을 했어요. 횡령한 사람과 횡령하지 않은 사람 중 누가 천국 갑니까? 횡령한 사람이 천국 가지요. 그걸 불의한 청지기라 하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아, 네가 네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그걸 교묘하게 덮고 있다. 평생을 덮는 인생이에요. 그래서 어제 오후 설교에서 자기로부터 개종하라 했지요.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밖에 있는 것을 속으로 집어넣어야 돼요. 내 종교로부터 개종하는 거예요. 전에는 예수를 믿어도 기독교를 믿어도 이게 내 종교였어요.

나를 위해서 예수 믿고 나를 위해서 부처 믿고 하는 그 종교에서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종교로 바꿔야 되겠지요. 차라리 나를 까발려주시옵소서. 노골적으로 다 드러내게 하옵소서. 위층에 있는 중복된 현실이 아래층에 있는 우린 눈에 보이는 현실, 보이지 않는 현실이 보이는 현실을 완전히 뒤집어 주시옵소서. 그리 되겠지요.

인간들은 하나님 빼놓고 인간들이 나에게 요구할 때 처음에는 협력합니다. 뭔가 있을까 싶어서. 협력하다 나중에는 거절해요. 협력하다 거절하는 이유는, 너무 타인에게 끌려가는 인생이 돼버리면 내 주체성이 제거된다는 위협이 있어요.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너무 남한테 끌려가면 내가 제거가 되지요. 제거 위협을 받고 여기서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 반발이 바로 악마의 심술이에요. 우리 안에 사실은 아담 안이에요. 우리라는 게 없습니다. 나라는 게 없어요. 사실은 아담의 덩어리 중의 일부에요. 터럭 하나. 성경대로 하면.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내 죄가 아니고 누구 죕니까? 아담의 죄. 핑계 좋~지요. 나쁜 짓해놓고 내가 죄 지었나 아담의 죄지었지. 믿음 좋지요. 선악과 내가 따먹었나? 아담이 따먹었어요.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아담이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아담 안에 죄가 들어온 거예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 차이가. 이 차이 모르면 정말 성경 이해 안 됩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게 아니고 죄가 아담을 덮쳤지요. 그러면 아담을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고 자식을 백날 낳아도 큰 단지 안에 있는 쥐새끼처럼 그 단지를 못 벗어나요. 로마서 5장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아니면 그 실정을 어느 누구라도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정리할게요. 타인이 요구할 때는 그냥 요구하는 게 아니고 법적인 체제를 가지고 요구합니다. 법적인 체제는 뭐냐?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이 하지 말고. 그래서 엄마가 자식에게 게임 그만 하라, 스마트폰 그만 봐라, 공부해야지, 숙제해야지. 벌써 어릴 때부터 부모라는 타인이 나라는 아들에게 계속해서 시선하고, 시선이란 다른 말로 하면, 관찰이죠. 그 아들의 스케줄을 파악하는 거예요.

아침에 학교에 몇 시에 도착했고 끝나는 시간은 몇 시야? 전화할까, 딴 데 빠지는지? 학원가야 되는데 몇 시에 갔어? 학원선생한테 전화해볼까, 몇 시에 끝났는지? 친구와 어디 갔어, 이실직고해. 완전히 장악해서, 너 그래서 좋은 대학 가겠어? 벌써 목표까지 다. 이 목표는 누구 목표입니까? 엄마 목표에요. 이 세계를 엄마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엄마의 나라가 확대되는데 있어서 자식은 기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엄마의 나라를 다른 말로 엄마의 주체성의 나라에요. 엄마의 주체성을 위해서 엄마는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누구냐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아들이 엄마한테 대들면 그 다음부터 엄마는 자기 과거 스토리가 나오지요. 네 아버지 독일 가서 죽고 난 뒤에 나는 너와 시장바닥에서 시래기 줍고 살았다고 하면서 <하얀 나비> 부르면서 <수상한 그녀>란 영화에 나와요. 이렇게 키웠다고 늘어놓는데 이건 한 번만 더 들으면 구백구십 번 듣는 이야기라.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고요 다만 엄마는 술 안 먹고 이야기하고 아버지는 술 먹고 이야기한다는 그 차이. 술만 먹으면 아버지는 그 이야기하고 엄마는 술 안 먹고 맨 정신에 한다는 거예요. 그 차이뿐이에요. 그걸 기억의 횡포라고 합니다. 과거의 횡포. “엄마, 왜 그렇게 사는데?” 안 그러면 우린 죽거든.

처음에 강의 뭐라 했습니까? 죽음이 죽음 되면 더 이상 사건 없다는 거예요. 사건은 죽음이 사건이 아니고 출생과 죽음 사이가 사건이라 보고, 이게 만약에 부활까지 영역이 확장이 되면 죽음도 반드시 치러야 될 사건에 포함이 되지만 만약에 부활의 현재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죽겠다는 거예요. 죽음은 사건이 아니니까 일단 내가 있어야 의미가 생기고 죽으면 의미 없기 때문에 죽기 전에 나의 나됨을 극대화시키자. 이게 악마의 심술이고 악마의 발악입니다. 네가 신인데 죽기 전에 신 노릇하고 죽어야지,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나 외에 주변에 둘러싸여있다. 그때부터 교육받는다. 말이 좋아서 양육이지 이거는 아빠 엄마의 세계에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너,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고 물을 때 아이들은 이미 이런 법적인 권력체제를 알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누가 서 센지 보고, 엄마가 세면 엄마가 좋아, 하고 아빠가 세면 아빠가 좋다고 하는 거예요. 경제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겠지요.

그러면서 애들은 주체성이 드디어 나중에 청소년기, 사춘기라 하지요. 사춘기가 되면 반발합니다. 반항아 되어 반발하면서 자기의 주체성을 살려주는 친구를 찾아서 엄마의 눈을 피하고 아빠의 눈을 피하면서 드디어 자아성이 형성이 돼요. 주체성이 형성됩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그런 여자를 데리고 왔느냐고 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수준 낮은 여자를 데려오면 집안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이런 식으로 갈등이 생기는 이유가 전부 다 이러한 과정을 겪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보면 내 안에 나라고 형성된 것은 사실은 내가 아니고 남, 타인의 생각이 나에게 꽉 차있고 나는 그냥 포장지에 지나지 않아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주체성이 없어요. 인간은 주체라고 했는데 어설프게 포장한 것뿐이고 뜯어보면 남들이 나를 수정하고 개선하고 남들의 눈에 맞춤에 따라서 형성된 것들이 가득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생활 해보다가 가끔 명절에 고향에서 아는 친구들, 가까운 일가친척들 만나면 이상하게 이야기가 잘 되지요. 서울에서는 점잖아야 되고 행동 똑바로 해야 되고 할 말 안 할 말 가려야 되지만 촌에 옛날 어릴 때 물가에서 놀던 순자고 뭐고 그런 친구들은 허물없이 사이기 때문에 옛날이야기하면서 명절이 후딱 지나가요.

그래서 이런 말 있잖아요. 대화가 된다는 말은 고생을 같이 한 경우에 한한다. 역경이 같이 이겨낸 경우에는 대화가 돼요. 왜냐하면 같이 고생했기 때문에 스스로 설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의지했거든요. 의지한 쪽의 도움 받는 것이 내 기억에 차고 있으니까 그 기억에서 언어가 나와요. 개념이 나온다고.

지금까지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면서 모아놨던 모든 개념이 그때 나에게 도움과 고마움이 섞인 채 개념이 나온단 말이죠. 만약에 도와준 사람이 안경 쓴 사람이라면 이상스럽게 안경 쓴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만약에 사기 친 사람이 안경 쓴 사람 같으면 두 번 다시 안경 쓴 사람 만나면 죽여 버린다. 그런 게 있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과거의 횡포에 시달리는 겁니다. 이게 악마의 횡포에 시달리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하느냐? 우리에게 성가신 악마를 수사하라. 우리에게 형사 일을 맡기는 거예요. 악마를 수사하라. 보통 교회에서는 악마를 피하라고 하잖아요. 악마를 피하라, 도망치라 이러잖아요.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포로된 것, 네가 재수 없어서 잡혔다가 아니라 의도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악마의 목구멍에 캡슐로, 천사 가브리엘과 같이 노는 게 아니라 우리가 기피하는 악마의 목에 우리가 침투하는 겁니다. 뭘 보라 하느냐 하면, 바로 악의 발악을 보라는 거예요.

요나가 배에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배를 파손시키는 원인제공자로 보고 요나를 바다에 빠뜨리죠. 인간의 악은 바다처럼 깊어요. 그러면 요나 선지자가 예수님을 대행해서 바다에 빠져야 돼요. 그러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저 사람 죽었다고 하죠.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이게 요나의 표적이에요.

예수님은 누가 봐도 이건 죽었다. 저 사람 끝장났어. 죽으면 그 뒤는 없는 거야. 예수님은 왜 그걸 모를까? 전부 다 측은해하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울고 하지요. 예수님은 말하기를,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딸을 위해 울어라. 예수님께서 죽음의 끝이 되는 바다, 우리는 악마로부터 그렇게 교육받았던 그 세계에서부터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 있네. 몰랐지롱, 해서 나오면서 이 세상을 재수사에 들어가는 겁니다. 화상연쇄살인사건 재수사에 들어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경험한 예수님이 다녀간 이 세계에 대해서 성도들을 보내서 재수사에 들어가요. 이런 적극적 삶의 태도, 내 인생을 수사하는 거예요. 피하는 게 아니고 도망치는 게 아니고 도피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 허무하다. 나는 기도원에서 기도하다 천당 가야지. 이러는 게 아니고 내 인생을 도마에 놓고 재수사에 들어가는 겁니다. 마귀야 정체를 밝혀라. 나를 괴롭게 한 게 너지, 하고 재수사 업무를 형사과에 배정해서 재수사에 들어갑니다. 그 말은 이미 수사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다는 거죠.

성경 찾아봅시다. 로마서 8장 8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 아담의 육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러나 이건 성령 받은 사람의 고백이고요 성령 안 받으면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나님이고 뭐고 관심 없고 육신으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참혹합니까? 지금 그것만 짜증을 낼 뿐이에요. 아까 그게 반발이고 반항이죠.

내가 엄마 아빠와 살 때는 좋았는데 세상에 나가서 힘들 때 내가 어느 타인을 잘못 만나서 이런 사단 났는가를 자기 행복을 위해서 점검해나가지요. 그런데 이미 부활의 능력이, 성령님은 부활의 능력이니까 부활의 능력이 온 사람은 자기를 확정지어버려요. 나는 죽어 마땅함을 확정시킵니다.

죽는 이유가 뭐냐? 육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구를 기쁘게 못했다? 하나님을 기쁘게 못하면 지옥 가야 돼요. 이 원칙에 토 달지 마세요. 하나님, 저만 빼주세요. 또는 제 딸은 빼주세요. 제 아들은 봐주세요, 없어요. 그건 어떤 외부의 압력, 어떤 수사 압력도 통하지 않아요. 그냥 원칙이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 사람은 지옥 가야 돼요.

그럼 천국은 어떤 사람이 간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만 가는 거예요. 둘 사이에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어중간한 지역은 없어요. 양 다리 걸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관심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되느냐? 그게 9절부터 나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이렇게 돼있지요. 그 뒤의 말은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있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요. 제가 이것을 설교시간에 서랍장에 있는 보물이라 했는데 이사 가는 사람이 서랍장을 옮길 때 옛날 서랍장 놔두고 가지요, 하는데 서랍장이 문제가 아니고 서랍장 열어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귀한 보물이 들어있거든요. 그 보물 보고 옮기는 거예요.

우리는 구닥다리에요. 이 세상 육신에 속하고 우리는 어떤 면을 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요소는 없고 그럴 재주도 능력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쓰레기 같은 육신에다 귀한 걸 집어넣은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뭐 됐다? 육신이 된 거예요. 육신이란 더러운 거고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신 거예요. 죽어야 마땅할 육체에다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육신을 그 다음에 성령에 의해서,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 된다.

성령 때문에 죽을 우리가 성령이란 요건 때문에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내가 도로 뺄 수 없는 이미 들어와 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나가라고 빌어도 사정해도 안 나가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활의 세계에다 집어넣어준다 이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걸 복음이라 해요. 로마서 1장에서. 나는 복음을 위해서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겁니다. 정말 이 시대에 이슈가 돼야 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따라서 수사가 가능한 것은 성령의 입장이기 때문에 육신을 놓고 본격적으로 내가 나를 놓고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거예요. 성령이, 내가 어느 점에서 미처 모르는 죄들이 내 육신으로 과거에 저질렀고 앞으로도 저지르게 되는지를.

만약에 여러분이 집에서 혼자 로마서 8장을 보고 기뻐서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주체성 아닙니까. 딸이 있다가 “엄마, 나 공부하는데 시끄럽다.” 하면 조용해야 돼요. 이게 바로 혼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던 뭘 하던 간에 같이 사는 타인이 시끄럽다 하면 말 들어줘야 돼요. 안 그러면 따로 나가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조용히 해줘야 돼요. 동영상 소리 줄여라, 하는 이야기 많이 들었지요. 지 혼자 은혜 받지 남까지 강제로 전도하려 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이게 바로 육신의 연약함이거든요. 아까 제가 딸이라 했거든요. 딸은 내 육신에서 태어난 딸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받기 전까지는 내 딸의 운명은 누구 책임에 있느냐 하면, 내가 낳았기 때문에 내 책임 아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이 세대, 딸이 잘못 되면 내가 힘들다는 두렵고 두려워하는 세대, 딸이 굶어죽으면 안 되지, 하는 죽음 사이에 있는 나의 의미가 이거죠.

그러면 부활의 세계에서 와버리면 딸은 뭐로 보이느냐 하면, 제2의 나에요. 전에는 나만 두고 수사하다가 이제는, 잠간 올래? 날 빼닮았어. 이게 좀 기분 나쁠 때는 수정하겠습니다. 반은 나 닮았어. 그것까지는 양보해주세요. dna가 50%는 닮았으니까. 저거 지 애비 빼닮았어. 나쁜 건 지 애비잖아요. 그러지 말고 반은 나 닮았다고 긍정적으로 표현합시다.

어쨌든 반이 나 닮았잖아요. 그러면 딸이나 아들이나 얽힐 수밖에 없는, 아들 장가 보내놓고 계속 김장해줘야 하나, 마나 김장하다가 집어던지는 것 아닌가, 며느리 눈꼴사납지 않는가? 이렇게 계속 신경 쓰는 이유는, 이게 얽혀야 될 이유는 나의 육신의 확장이에요. 내가 눈 뜨고 살아 있는 한 내 육신으로 번진 결과에 대해선 나의 육신의 연장입니다. 관심 끊을 수가 없어요.

아들이 질질 울고 딸이 울면 찾아가봐야 돼요. 대출 좀 해 달라 하면, 내가 제2금융권이가, 이렇게 화를 내면서도 오빠, 돈 좀 있나? 뭐 할라고? 우리 아들이 뭐 한다 하는데 한 달 되면 갚는단다. 이자 쳐줄게. 이러면서 또 찾아본다고요. 엄마, 이천만 당기면 위기 넘기겠는데, 하면 또 엄마가 나서야 돼요. 무슨 팔자가, 장가보냈으면 끝났는데.

에베소서 5장에 나오잖아요. 자식은 부모를 떠나라고. 안 떠나요. 떠나질 않아. 빨대 꽂고 이용해먹고 있어, 지금. 나는 떠났는데 지는 안 떠났어. 이게 바로 내가 부모한테 했던 타인의 시선에서 본 내 모습이에요. 그것조차도 수사대상에 들어갑니다. 지독하구나. 육신이라는 게 이렇게 지독하구나.

그러니까 오늘 말씀대로 우리가 포로 된 자지요.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포로 된 경우가 있어줘야 더러운 악마의 지배를 받는 세월이 있어줘야 왜 하나님께서 그냥 기뻐하는 게 아니고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 기뻐하는지를, 하나님이 기뻐하면 그만이지요. 그걸 같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겁니다.

인생 구원받고 난 뒤에 그 다음 날 죽으면 참 좋겠는데 주께선 그렇게 하질 않습니다. 밑천 들였는데 본전 뽑아야 될 것 않습니까. 니가 99세까지, 참 지난 금요일에 우리 외숙모님 돌아가셨는데 내가 설교시간에 잘못했어요. 99세가 아니고 백세에 돌아가셨어요. 만으론 99지만 백세 끊고 돌아가셨어요. 돌아가면 뭐 합니까? 본인은 딱 하루인데요. 남들은 백세라 하지만 할머니 본인의 입장은 뭡니까? 기억나는 건 오늘 하루 뭐먹고 사나, 오늘 아침은, 인생은 그거에요. 마찬가지에요. 자기를 기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없어요.

아까 상상하듯이 천당 있다 하지만 상상은 소용없습니다. 꽝이에요. 실제로 죄의식이 있어야 돼요.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육신 자체가 죄고 이젠 나는 느긋한 마음에서 죄 진 나를 의의 입장에서 수사하면 되는 거예요. 긍정적으로. 나는 죄인이다. 빨리 죽어서 천당 가야지. 이러지 마시고 죽여 달라고 하지 마시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어떤 점에서 죄냐? 전에는 내 몸까지인데 이제는 나와 관련된 몸까지, 내 친구까지 확대해서 친구 몸이나 내 몸이나 똑같은 성질이니까 그걸 보면서 악마를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내서 뭐할 건데? 뽑아내서 주님이 이미 승리했다는 것.

로마서 8절 32절 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까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정죄하리요”를 어디서 끊느냐 하면,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고 끊지 마세요. 의롭다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우리는 서랍장이고 서랍장 안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데 누가 정죄합니까? 내가 정죄하지요. 내 육신이 정죄하는 거예요. 좀 더 완벽했으면 얼마나 좋을꼬, 내가 그때 실수 안 했으면 얼마나 좋을꼬.

실수 아닌 게 없는데 무슨 따로 실수를 고릅니까. 고를 걸 골라야지 모든 게 실순데요. 육신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실수가 되는 거예요. 내 기뻐하는 모든 것이 주님 기쁨과 관련 없다는 점에서 실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육신을 할 수 있는 재주가 실수하는 재주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요. 하지만 느긋하지요. 왜?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몸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성령이 왔다는 것은, 너는 이미 산 자라는 신호란 말이죠. 죽고 난 뒤에 오실 부활의 영이 미리 왔다는 것은, 너는 이 세상의 소속이 아니고 소속이 죽고 난 뒤에 천국에 집합된 그쪽 단체의 소속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주민등록은 하늘나라고 육신은 지상의 주민등록이고. 지상의 주민등록도 필요해요. 그래서 65세 돼야 지하철 공짜로 타지. 주민등록증 있거든요. 이것 없으면 오늘도 돈 주고 타야 돼요.

필요하지만 되게 아쉬워 할 건 없어요. 우리의 시민권, 주민등록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서 3장 20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것도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이에요. 사도 바울의 로마서 8장, 빌립보서 3장, 로마서 1장, 여기에 그냥 덩어리 채 주어지는 이 복음을 구약 시편 14편이나 구약에서는 그걸 단락, 단락, 단편적으로 약간씩 깔아놓은 겁니다. 타일처럼 깔아놓은 거예요.

우리는 지금 타일을 조립하고자 하는 겁니다. 신약의 해답을 이미 아는 입장에서 구약을 보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신약 안 믿는 유대인이라면 그들은 맨날 오실 분만 기다립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립니다. 주여, 우리가 시편을 다 외웁니다. 14편을 알고 있습니다. 시편대로 오시옵소서. 이미 왔는데? 언제 왔는데? 너한테 안 오니까 안 온 거지 나한텐 왔잖아요.

어떻게 확정하는데?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그럼 유대인은 말하기를 인간이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있어. 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기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그러면 우리 안에 성령 왔다는 말은 다 이루었다가 들어오는 거예요. 시편 14편을 다 이루었다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무엇의 증거자가 되느냐 하면, 시편 14편을 다 이루었다의 증거자가 되는 겁니다.

하라, 하지 말라를 다 이룬 증거자가 우리가 되는 거예요. 하라, 하지 말라가 이뤄진 게 하나님의 의거든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서랍장에 보물로 들어오면 우리는 하라, 하지 말라를 다 이룬 거예요. 이룬 입장에서 우리 육신으로 수사에 나서면 되는 겁니다. 아아, 이래서 하라 할 때는 안 했고 안 하라 할 때는 했구나. 우리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죄, 악마에 포로 된 우리를 주께서 이미 십자가로 돌이키셨구나.

시편 14편의 예언대로 딱 맞춤 인간을 주께서 제조하신 거예요. 성도란 이름을 제조하신 거예요. 구두 한 켤레 맞출 때도 종이에 그리잖아요. 종이일 뿐인데 한 3일 지나면 종이에 있는 평면의 구두가 입체화된 구두가 등장하지요. 구약에 있던 성도가 입체화되어 우리가 됐잖아요. 성령이란 보물을 담는 육신.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옅어지고 소멸되고 소멸되면 그 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등반해서 같이 새로워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죽인다. 네가 잘못 죄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주님이 쓸 것 다 쓰면서 소모용으로 제거하는 거예요. 제가 중국에 가서 첫 번째 강의가 달란트 비유했잖아요. 인간은 소모용으로 타는 촛불처럼 사용한 거예요. 그러니까 남길 생각하지 말고 타들어가는 게 남는 거예요. 주님께서 요만큼 제거하고, 요만큼 제거하고, 요만큼 제거하고. 점점 더. 그래서 날이 갈수록 주의 십자가가 더욱 더 고마워지고 감사해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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