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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6 11:22:06 조회 : 212         
54강-엡 5장 22-24(아내들이여)191215-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06.240.236.10)
54강-엡 5장 22-24(아내들이여)191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5장 22-24입니다. 신약성경 314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5:22-24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성경자체가 에베소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창세기부터 시작한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그리고 창세기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인간이 처음 출발할 때 인간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있었던 에덴동산에 다른 요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장치를 왜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서 두게 되었는가? 그 많은 장치들 가운데서 중요한 장치, 주님께서 의미를 두는 장치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입니다. 둘 다 동산가운데 있었습니다. 한 가운데의 자리를 차지했지요.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동산의 한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것은 인간이 그냥 태어났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취지가 담기는 조건하에서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간주하겠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그 선악과를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서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악과의 특징이 뭐냐? “따먹지 말라.”였어요. ‘따먹지 말라’를 따먹은 순간부터 인간세계에 모든 금지가 해소된 것이 아니고, 이제는 우리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금지가 확산되고 확대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독약을 먹은 거예요. 죽는 약을 먹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 온 곳이 다 금지에요. 인간이 사는 모든 곳이. 악마는 금지를 없애려고 해서 ‘따먹으면 너희에게 더 이상 금지는 없다’는 아이디어를 줬지만 악마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기 때문에 인간을 이용해서 결국은 인간을 인질로 삼았지요. 인간은 멋도 모르고 악마 편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악마를 버릴 패로 간주한다면 인간도 하나님께서 버릴 패로 간주하십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죽은 자는 생명과 같이 할 수가 없다는 원칙에 준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하고, 일시적 추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생명나무로 돌아올 수 없도록 불을 갖고 있는 천사로 하여금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 버렸습니다.

그 금지된 것, 차단된 것, 차단된 상태에서 인간세계는 뭘 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모든 것이 거기에 담겨 있게 됩니다. 뭘 해도 책벌받게 되어 있어요. 심판하게 되어있습니다. 심판의 근거를 너희들이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이 모든 금지의 법은 오늘 성경 본문에 봐도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꼭 이래야 됩니까? 안하면 안되겠어요?”라고, 우리 개인적 입장에서 봐서는 너무 과도한 금지법으로 다가옵니다.

그 중 하나가 특히 여성들에게 부담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이 대목입니다. 남편은 ‘음매 기살아.’ 하고 있고 여자는 ‘음매 기죽어.’ 하고 있는 그런 처지에 있는 거예요. 누구 말대로 “이러려고 대통령했나?”하는 말처럼 “내가 이럴 것 같으면 결혼 안하고 말지 구태여 남자의 노예가 되어가면서까지 결혼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물론 이 대목 때문에 결혼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과도한, 감당 못할 일을, 그렇지 않아도 연약한데 거기다 더 짐을 지우는듯한 느낌이 들어서 까만 매직이 있다면 다른 구절은 살려둬도 이 구절만큼은 덧입히든지 아니면 가위로 째버리고 싶은 것이 여성입장의 생각이겠지요.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세상은 마치 전부다 지뢰밭 같아서 금지가 멈춰진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모든 천지가 금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안된다, 그러면 안된다, 가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법령처럼 그렇게 된 거지요. 그러면 “아내들이여”할 때 그 아내, 남편이라고 할 때 그 남편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내와 남편인가? 그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모든 성경말씀은 복음을 위해서 해석되어야 되고, 예수님을 위해서 해석되어야 되지 “나 이렇게 복종했으니 나 정당하다고 해줘요. 나 착하다고 해줘요. 천국 넣어줘요.”이러한 자기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경준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잘남과 나의 완벽함, 온전함, 그런 것의 증명서류로서 이 본문 준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아내들이여 자기남편에게 복종하기를……” 할 때 이렇게 해석하시면 되는 겁니다. ‘여자는 자진해서 복종할만한 남자를 찾는 자가 진정한 복음 안에서의 여성이다. 아내다. 복종할 만한 남자가 있으면 복종하지 말래도 알아서 복종할게.’ 문제는 그런 남자가 없다는 거예요.

따라서 뭐도 취소가 되느냐 하면, 복종이라는 말도 날라가버리는 거예요. 복종할 가치도 없는 남편에게 복종하지도 말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남자들은 복종할 가치도 없고 왜 복종할만한 입장도 못되는가? 이것이 창세기 2장의 입장이 아니고 창세기 3장의 금지에 둘러싸인, 그것을 범죄했다, 또는 타락했다고 하는데 이미 타락한 남성, 이미 타락한 여성 입장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선악과 따먹고 악마처럼 자기잘난체를 하거든요. 자기잘난체 하면서 여성을 보고, 자기잘난체 하면서 남성을 보니까 둘 다 오늘 본문의 조건으로서는 탈락입니다. 해당사항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해당사항이 없는 이런 남자 여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로서 구분지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에요.

아무리 오늘날 과학자들이 연구를 해도 왜 남자는 여자가 아니고 왜 여자는 남자가 아닌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물학적으로 왜 차이 나는 신체를 가졌는지 그걸 속시원하게 해석하고 해명할 어떤 이론도 없어요. 진화되었다, 단성에서 양성으로 되었다는 그런 소리들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수십억 년 걸린다는데 그 자체가 구라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어떤 해석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겨두는 것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복음 달성을 위해서, 예수님을 주되게 하기 위해서 계속 인간을 이 땅에서 생식하게 하는 겁니다. 간단한 이야기에요. 아주 간편한 이야기에요. 주님 편에 선다면 간편한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위해서 인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누구냐, 남자가 누구냐를 묻지 말고 여자는 무슨 일을 하게 되고 남자는 무슨 일을 하게 되느냐를 물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나보고 누구냐고 물을 입장도, 자격도 못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최종적인 의미가 나에게로 스톱이 되니까, 내가 있다는 자체가 나의 최종의미로 간직할 어떤 권한이 있는 것처럼 정지가 되니까 안되지요.

이 세상은 날 위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달과 별이 날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입니다. 달은 달이고 나는 나거든요. 나 생각할 때 달 잊어버리고, 나 생각할 때 별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뭔가 다 품어야 될 사실을 나를 위해서 잘라내 버리는 거예요. 내가 잘났음을 증명해줄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잘라버릴 때 잘라낸다는 것은 그만큼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해요. 거짓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정도가 아니고 그 자체가 엉터리지요.

세상과 다 연계를 시켜야 되는데 연계하지 않고 그냥 눈감아버리고 내 잘남을 증명해줄 것만 추려서 나 여기 있다고 우기는 것은 정직한 태도가 아니지요. 정직한 삶의 태도, 자연속에 사는 인간의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너 왜 여자냐고 물으면 이유가 없어요. “너 왜 여자야? 너 왜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남자보고 “너 왜 여자가 아니고 남자야?” 할 때 어떤 변변한 이유가 없다고요.

그것도 모르고 정치한다고 하고 그것도 모르면서 노벨상 받는다고 해요. 근본적인 것은 다 놔버리고요. 남자는 여자가 아닌 것이고 여자는 남자가 아닌 것이다. ‘아니다.’라는 말을 한 그것이 바로 단절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창세기 2장 때 범죄하기 전까지, 선악과 따먹기 전까지는 남자는 여자가 아니고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는 말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왜냐하면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한몸적인 차원에서는 남자 여자를 구태여 구별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각자 선악과나무, 각자 절대적존재로서 행세하고 있으니까 ‘저거 뭐지? 나와 신체가 다른 저게 뭐지? 아, 남자라고 하는구나.’ 혹은 ‘저건 뭐야? 아, 저걸 여자라고 하는구나.’ 전부 다 상대화하는 거예요.

상대화라는 것은 너 없이도 나는 단독적으로 나다움에 지장이 없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걸 누가 하느냐? 처음에 아담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은 여자가 없을 때 아담을 만든 거예요. 아담을 만들고 여자를 그 다음에 만든 이것은 숨어 있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거기에 담기 위해서 그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범죄하고 난 뒤에는 남자는 하늘의 비밀은 날라가버리고 나를 위해서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남자는 뭐냐? 남자는 곧 인간이라는 거지요.

남자를 1로 치고 여자와 결혼을 해도 여자를 ‘0’으로 봐요. ‘1+0=1’이 되는 거예요. ‘나는 여자를 필요로 해서, 내가 여자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대표자다. 대표가 여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남자여야 된다.’라는 그것을 증명하려면 여자는 1이 되면 안되지요. 1+1이 되면 대표를 갈라먹기 해야 되니까 남자의 성격에 그런 것이 없어요. 남자는 전체가 곧 나고 내가 전체라는 그쪽으로 치환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의 하나가 남자는 모든 것을 숫자화하는 거예요. 그걸 디지털화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서 남녀공학고등학교에 기숙사가 있다고 합시다. 여기에 남자기숙생이 100명 여자 기숙생이 100명이 있다 합시다. 그러면 여기에는 남자 100명이 아니고 여자 100명이 아니고, 짜장면을 시키게 되면 저쪽 100그릇, 이쪽 100그릇을 주는 거예요.

남자짜장면이나 여자짜장면이 없잖아요. 그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교장선생님입장에서는 숫자가 중요한 거예요. 남자나 여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100명의 남자가 아니고 그냥 사람 100명, 이쪽에 여자사람 100명이에요. 그렇게 숫자화 시켜버리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남자이어야 하는 이유도 빠져버리고 여자 이어야 하는 이유도 빠져버려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남자가 세상 보는 안목이에요. 남자는 세상을 남자 중심으로 총괄하고 그것을 전체로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담은 여자 없을 때 만들어졌으니까. 아담 혼자 있어도 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사람은 남자가 대표하는 거예요. 아담이라는 단어가 사람도 되지만 남자도 되고 남자가 곧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만약에 남자가 TV라면 여자는 TV의 받침대정도. 그것을 배필자라고 합니까? TV를 돋보이기 위해서 받침대가 있는 거예요. 받침대 따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남자를 받쳐준다는 의미 하에, 그런 보조적위치하에 보조적작용으로서 여자가 있다, 라고 범죄하고 난 뒤에 남자들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해석해 오는 겁니다.

‘여자는 남자의 시다바리다.’ 남자는 말은 안하지만 항상 여자를 볼 때 보조적 위치에서 여성을 대하거든요. ‘여자여, 아내여, 너는 나를 위한 몸이다.’ 하지만 직접 여자가, “나는 복종해야 될 남자를 위해서 있지 나를 위해서 있지 않다.”는 말을 직접 나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거 머리 나쁜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있다는 말을 내쪽에서는 하되 여자가 “나는 남편을 위해서 있다.”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왜? ‘그렇게 말 해버리면 마치 내가 강요한 것처럼 되잖아. 그러니까 여자를 이용은 하되 내가 시켜서 이용했다는 그러한 허점조차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네가 직접 말은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라. 왜? 나는 네가 나를 아무리 위한다 할지라도 나는 여자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기 때문에.’

이게 남자의 본성이거든요. 남자의 본성과, 창세기 3장의 타락하기 전에 남자가 여자와 한 몸이 되었다는 말과 벗어나니까 그 다음부터 남자가 본심으로서는 여성을 그렇게 보면서 여기서 뭐가 발생되는가? 죄책감이 발생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성은 남자에게 죄책감을 고백해야 될 하나의 낌새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무척 잘해주려고 애를 써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자꾸 돌아가지고. 여성을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그 죄책감이 있다는 것을 기회로 여겨서 내가 평소에 나는 너에게 평소에 잘해주는 괜찮은 남자라는 인상을 계속해서 여성에게 심어줌으로서 그런 식으로 여성을 장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잘해준다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해서 “사랑하니까 너는 내 곁을 떠나지 마.” 횡포지요. 그래서 잘해준다는 그것으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상쇄될 수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시도하게 돼요. 그러면서도 남자는 때려죽여도 다시 이 땅에 태어난다 할지라도 여자로 태어나기는 싫어요. 내가 전부니까.

여성, 또는 아내, 여자는 두 번 태어난다고 해요. 여자로 태어나고 또 아내로 태어나는데요. 아내로 태어날 때와 여자로 태어날 때가 달라요.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에서 구세주를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그 의미는 뭐냐 하면, 그 뒤에 그 담긴 의미가 너무나 함축되어 있어서 성경을 통해서 계속 보여주는데요.

여자가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은 남편 없이 자식을 낳을 때 그게 두 번째 인류가 된다는 겁니다. 인류가 두 개에요. 하나는 기존의 아담의 인류가 있는 반면에 아담의 인류가 아무리 해도 생명나무 가는 길의 단절을 극복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통보해주는 새로운 인류의 등장. 인간이 아무리 교회 다니고, 노력하고, 기도해도, 아무리 해도 구원 못받는다는 것을 충분히 밝혀주는 새로운 인류, 두 번째 인류입니다. 인류는 이렇게 두 종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자의 일은 뭐냐? 남자는 기존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저 통합해서 그걸 전체로 삼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리고 여자를 보고 ‘이 전체에 네가 한 몫을 해라. 너는 기여하라. 보조적 역할이지만 도와줘라. 여자의 고유한, 자체적인 전체 그것은 내가 절대로 용납 못하겠다. 다만 남자가 벌여놓은 판에 너는 시다바리로, 보조로 도와주게 되면 내가 너를 사랑해주마.’ 하는 기존의 세계 그것이 전부거든요. 전체지요.

영어로 하면 all, 전부인데 여자는 마치 기린의 목 같아서 뭘 쳐다보느냐 하면, 이 전체에 없는 예외적인 것을 바라보는 겁니다. 남자는 전부를 추구하고 여자는 이 세상에 없는 예외를, 빠져있는 것을, 결핍을, 그리고 이 세상의 실패를 내다보는 거예요. 여자는 이유없는 그런 본성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심어준 거예요.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그 영화에 잭과 로즈라는 주인공이 나와요. 여자는 부잣집 딸이고 남자는 집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우연히 한 배를 타고 가게 되지요. 처음에는 신분적, 계급적인 차이 때문에 ‘우리가 연애할 수 있을까, 사랑할 수 있을까?’ 남자는 객기가 넘쳐서, 우리가 배에서 내리면 뉴욕에서 다시 결합하자고 하지만 그 주변상황은 신분과 계급이 다른 이 두 남녀의 사랑을 용인해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런데 영화의 주제가, 이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계속해서 사랑하느냐 마느냐에 있지만 그 순간에도 배는 빙산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습니다. 망하고 있어요. 이 세상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남녀의 연애가 드라마나 영화의 주된 내용이지만 이 세상전체가 타이타닉처럼 지금 파멸직전에, 파멸에 돌입하고 있어요. 파멸된 거예요 이미. 무너지고 있는 거예요. 배는 기울어지고 있어요. 운동장이 기울어진 거예요.

여기서 말하는 여자라 하는 것은 성도를 말하는데, 성도 자체가 여자를 대표하거든요. 성도를 여자의 형으로 이야기하지 남성형으로 이야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남편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 말고 어떤 숨어 있는 대륙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 그 원천과 근본을 여자는 공유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내가 복종하지 말래도 알아서 복종하는 그 남편감, 그 남편감은 처음에 죄짓기 이전의 원천과 근본을 공유하실 남편이기 때문에 그분의 자리에서는 어떠한 허물과 어떤 죄책도 없어요. 여성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거예요. 이 세상은 금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뭘 해도 책잡히고, 뭘 해도 잔소리를 듣고, 뭘 해도 책임을 져야 될 세계이기 때문에.

남자는 그것을 수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이렇게 힘드니까 “나만 믿어. 오빠 한 번 믿어봐.” 맨날 오빠를 믿으래. “못 믿나?” 그런 식으로.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거예요. 여자는 담 너머를 봅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곧추서서. 너 말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준 그분의 세계. 남자가 왜 남자며 여자는 왜 여자이어야 하는 그 의미와 이유를 제시하는 그 세계, 있는데 숨어 있는 대륙같이 뭔가 낌새를 느껴요.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라 하는데 남자가 자기자신이 남자임을 떠벌이려면 여자가 필요한 거예요. 약한 여자 앞에서 나의 남자다움이 빛이 나니까. 그러나 여자한테는 남자가 구축한 전체, 그 전체에 가담할 의사는 없습니다. 없고 그 전체 말고 예외, 그 전체에 포함되지 않은 남아 있는 무엇, 숨어 있는 무엇, 그것은 ‘+1’이 아니라 반대로 ‘-1’이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남자들이 구축한 그 전체가 구멍이 나버리면 그 구멍난 지점이 하나 구멍난 것이 아니고 현재 번듯하다고 우기는 남자들이 구축한 그 세계가 아무런 쓸데가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다 폭로시키는 그 자리, 그걸 여자가 본성적으로 느끼고 있는 거예요.

남자는 자기죄책감으로 여자한테 잘해주고, 입에 발린 사랑을 한다고 예쁘니, 뭐가 필요하냐느니, “오빠는 돈 밖에 없어. 이 돈 너를 위해 다 쓸거야.” 물론 결혼 전의 이야기지만, 퍼주고, 또 퍼주고, 또 퍼주고, 남자의 알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계속 퍼주고 하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내가 자발적으로 존경할 만 해야 돼.’

그리고 사랑은 어떤 탓이나, 어떤 잔소리나, 금지가 사라진 것이 사랑입니다. 해라, 하지 말라가 성립이 안되는. 내가 뭘 해도 다 용납이 되는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세계에요. 여자는 그걸 그리워하는 겁니다. 마치 도박판에서 남자와 여자가 도박을 하게 되면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자기 것으로 꾀이려고 하지요. 마음하나 뺏는 것이 힘들거든요.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온갖 아양을 떨고, 때로는 협박, 때로는 회유, 당근과 채찍의 방법을 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보고 ‘그것 일단 받고 나는 네가 내민 판돈 말고 다른 더 뒤엣것을 바라본다.’ 일단 받고요. 밥은 먹고 살아야 되니까. 고맙지요. 남편이 애를 쓰니까. ‘일단은 받고 나는 네 요구에 호응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 복종하는 척은 하지만 부부생활 한다는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처음에는 기대를 하지만 나중에는 그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니까. 그래서 혼인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남자는 그 무의미한 것을 억지로 의미있게 바꾸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여자는 그 애씀에 대해서 굉장히 좋게 받아줘요. ‘그래. 남자가 남자값은 하는구나. 자식과 나를 위해서 이렇게 밤새도록 잔업도 하고 코피까지 흘려가면서 일하니 고맙고 또 고마워. 그런데 음, 존경하지는 않아. 하여간 고마워.’ 사랑하지는 않아요. 그냥 고마운 거예요.

남자는 모든 것을 숫자로 하고, 숫자로 되어야 숫자화시키는 나만이 전부기 때문입니다. 숫자화한다는 것은 내가 다룰 수 있는 기호가 되거든요. 이 기호는 어디에 사용하느냐 하면, ‘내가 남자다. 나는 전체를 포용하고 전체를 다 꿰뚫어 내다본다.’는 그 것을 증명하는 게임, 놀이에 들어가요. 남자는 평생을 뭐하냐? 이 세상을 게임판으로 봅니다. 노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이게 남자의 자존심이거든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역대상 21장에 나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계수, 숫자를 세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숫자를 세버리면 여기서 빠진 구석이 나와버려요. 뭐가 빠졌느냐? 여성적 요소가 빠진 거예요.

그게 뭐냐? 남자가 지배해서 이스라엘이 된 것이 아니고 어떤 자발적인 복종에 의해서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남자가 설친다고 바빠서 그걸 빼먹는 거예요. 복종한다는 것은 자기를 아낌없이 바치는 것, 희생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자는 오해하기를, 내가 잘해줬으니까 잘해준 남자를 위해서 복종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여자는 미지의 남편감을 위해서 복종하는데 남자는 내가 잘해준 그 대가로 보상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남자가 자기전체라는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자기작업의 논리에 허점이 없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잘해주니까 그걸 받고 잘해주는구나. 그러면 앞으로 더 잘해주면 나에게 더 잘 복종하겠지.’ 이러한 일관된 논리가 있어줘야 남자가 이 세상에 살 마음이 나고 집구석에 들어올 마음이 생긴다니까요.

“당신 참 고생했어요.” 먼지 털어주고 막 향 뿌려주면서 수고했다고 하면서 “여보, 내가 당신 좋아하는 갈치조림 해놨어.” 이렇게 하게 되면 ‘나는 이 가정을 위해서 뼈가 으스러지도록 희생할게’라는 자기환상에 빠져버려요. 여자한테 이용당하는 것도 모르고. 갑자기 아침까지도 있었던 자기죄책감이 확 해소가 되는 느낌이 든다고요.

‘주여, 제가 이 여자를 이렇게 가련하게 두지 않고 열심히 했는데도 모자랐지만 오늘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거요. 만약에요, 여자가 거듭나지 못하고, 여자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여자는 그냥 남자에 복속된 여자일 뿐이에요. 이 여자를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 음녀라고 합니다. 음녀는 남자가 가진 것이 자기의 목표의 전부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거예요.

거듭나지 못한, 성령이 없는 여성 같은 것은 ‘남자 너만 다 차지하면 안돼잖아. 여자도 남자 좀 하자.’ 해서 여자도 트랙터 운전하고, 여자도 비행기조종하고. 다시 말해서 남자가 자기들 좋은 것 다 해먹고, 여기서 나쁜 말은 좀 그렇지만, ‘남자들이 다 해 처먹고 여자를 시다바리로 여기는데 이제는 여자가 일어설 때다. 여자도 이제는 자기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리더가 되어야 된다.’라고 부르짖으면서 남자가 차지했던 영역을 여자가 다 하나씩 점령해나가지요.

특히 그중에 하나가 여자목사. 여자가 목사 되면 왜 안되는데? 성경에서 여자는 잠잠하라고? 그것은 구닥다리 옛날 그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남녀가 평등하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이 말은 원래 1789년 프랑스혁명 때 민중들이 귀족을 하겠다고 외친 구호에요. 그 구호를, 남자가 대표를 하겠다는 그 구호를 여자가 사용해서 남녀는 평등하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미 남자가 권력을 쥐니까 그 권력이 탐이 나는 거예요. 언제까지 여자는 그렇게 울면서 살수 없다.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지샙니다. 여자의 일생. 이 미자 노래 그 가사처럼 그렇게 하면 안돼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여자는 맨날 남자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어요? 돈 벌어온다면 기다리는 것도 괜찮아요. 콜! 일단 받고 그 다음, 하면 되니까.

여자가 바라봐야 될 것은 이 법의 세계, 금지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없는 세계를 거듭난 여성들은 바라보게 돼요. 그리고 그 거듭난 여성에 남성도 나중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여기 남편이 어떤 남편이냐 하면, 24절에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그리고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어떤 남편에게 복종해야 되느냐 하면,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 그리스도같은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이 인간에게는 하나의 금지의 법으로 작용하는 이유는 우리 아담의 몸으로서는 이 말씀, 남편에게 복종하라, 또는 남자는 아내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는 그것이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사랑, 모든 허물과 죄책을 묻지 않는 근본적인, 범죄하기 이 전의 그 사랑, 한 몸 된 사랑이 오게 되면 비로소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둘로 되어 있었다는 것의 의미를 뒤늦게 발견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가지고, ‘당신은 남편이고 나는 아내니까 둘이 한 몸 되는 노력을 하자.’ 노력을 하자는 말이 아니라 사랑만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남자나 여자나 다 이유가 있었구나.’ 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역할을 맡는 거예요. 다 그게 자발성이에요.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어 있고 자발적으로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내가 만약에 찾겠다고 나선다면 그 찾겠다는 자체가 사랑의 자리가 아니고 내 자리를 따로 마련했기 때문에 ‘그런 남편이 있다면 내가 아낌없이 시집갈게요.’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서는 성립이 안되는 거예요.

‘내가 시집간다.’를 위해서 이 본문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는 사랑이 오고 난 뒤에 차후적이에요. 여기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아내된 자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해놓고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아예 결혼하지 말라고 해요. 지금 모순된 말을 하고 있어요. 아예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예수님도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천국을 위해서 결혼 안한 자들이 있다. 결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천국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음을 낯설게 보지 말고 예외적 존재가 우리가 전체라고 여기는 것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예외라고 해서 ‘+1’이 아니라 우리가 ‘이게 전부야’라는 것을 완전히 모독하는 거예요.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쓸데없는 것을 끌어안고 있다고 아주 욕을 해버리는 겁니다. ‘따라서 귀하게 여기라.’ 예외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두고 그것이 근본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 여자의 의미가 뭐냐?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종합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자 여자는 평등이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가 예수님의 머리가 되는 원리를 이 세상에 징조로 인간을 통해서 남겨주신 거예요. 성경말씀은 복음을 위해서, 성경말씀은 주를 위해서 있기 때문에. 그게 뭐냐? 희생의 체인입니다. 희생하는 자가 위에 서는 거예요. 먼저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그런 남편에게만 여인들이여 복종할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아내를 자기 시다바리로 여기는 남편한테는 이용은 하되 복종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 땅에서 어느 남자하고 결혼하고 어느 여자하고 결혼해야 됩니까?” 이 땅에서는 전부 다 무를 수가 있어요. 제가 서점에서 책을 샀는데 하도 책이 많다 보니까 좋은 책을 샀는데 벌써 옛날에 읽은 책이라 집에 있었어요. 그래서 도로 물렀는데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다 무를 수가 있는 겁니다. 갑자기 기쁜 소식처럼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반품 가능해요. 홈쇼핑은 7일전에는 반품됩니다. 반품되는 것을 가지고 책잡을 필요 없어요. 세상에, 결혼할 때요, 연습도 없이 한다니까요. 연습도 없이 한다는 것은 무를 수도 있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왜 안무릅니까? 고집센 사람은 무르고, 스스로 남자가 되고 싶고 자립하고 싶은 사람은 무르지만 왜 안무릅니까? 그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결혼이라 하는 것이 연속되는 것은 무의미하기에 연속돼요. 결혼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되면 전부 이혼 다 해버립니다. 이혼 하나 안하나 그놈이 그놈이고, 그 여자가 그 여자고, 그러니까 긴 목 빼서 어차피 타이타닉은 침몰하게 되어 있는 세상, 그거 뭐 의미 둘 필요 없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의 말씀이 뭐냐? ‘아내 된 자는 없는 자가 같이 하고 복음 때문에 티격태격 하거든 이혼해 버려라.’ 참 사도바울은 과격해요. ‘복음가지고 티격태격하면 같이 살 필요 없어. 복음 다르거든, 말해도 안 듣거든 그냥 헤어져. 무르면 되니까. 어차피 의미 없으니까.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이여. 그리고 남자들이여. 할 수만 있거든 혼자 살아라.’

왜? 꼭 읽어드려야 돼요. 고린도전서 7장 26절. 이거 액자까지는 할 필요 없지만.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네가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거든 결혼을 하고 고난이 싫거든 그냥 사는 것이 낫다.

왜? 사람은 사람과 얽히는 것이 제일 무거운 짐이에요. 무르려 하면 거추장스러운 것이 더 많아요. 물론 빨리 무르면 좋아요. 신혼여행 갔다가 2, 3일 만에 무르면 괜찮은데 오래 살다 무르면요, 해준 게 많아. 그동안 낳아놓은 자식들이 있어요. 부부는 헤어져도 그만인데 자식들은 마음에 트라우마 생기고 골치 아파요 또. 누가 키우냐 하는 문제, 생활비는 주니 안주니 하면서 말썽이 많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차라리 혼자 살아라.’ 하지만 혼자 못살 경우가 있어요. 고린도전서 7장1절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은 희생하라고 준 남자고 희생하라고 준 여자기 때문에. 희생하는데 짐처럼 같이 희생할 필요는 없거든요.

그런데 그래도 ‘혼자서 힘든 것은 욕정, 마음의 음행 때문에 사회적제도상 남발하는 간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사회제도를 잠시 채택하는 식으로 혼인하는 것은 좋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미 결혼했을 경우에 물러도 의미없고 재혼하고 또 재혼을 한다해도 의미없어요.

의미가 없는데 그러나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성경에서 굉장히 난해구절로 소문난 구절이 있어요. 여자가 해산함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대목입니다. 15절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성에 있어서 그 희생이라는 것이 남편뒷바라지 하는 것이 희생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진짜 희생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그게 희생의 원형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모든 정답은 예수님이 갖고 있어요. 남자나 여자나 예수님이 하는 일의 하나의 증상일 뿐이고 하나의 부분이고 하나의 증거물일 뿐이에요.

예수님께서 성도를 낳는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 낳는 것과 달라요. 있는데서 자식을 낳는 것, 천국은 그런 있는 자식은 안받아주거든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천국 못오도록 주님께서 그 법칙을 단언했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은 넣어주지 않습니다. 이 땅에 없는 인간이 나와야 돼요. 없는 인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친히 만드신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은 순풍순풍 낳지 않고 십자가의 쓴잔, 하나님이 먼저 죽는 고통, 그게 남편이 하는 일이지요, 먼저 죽는 고통이 있어줘야, 생소한 죽음이 있어줘야 그 생소한 죽음에 의해서 응애, 하고 새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그 역할을 여자가 본의 아니게 아담의 몸이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칙, 자식 낳을 때 죽을 듯이 아픈 그 고통을 남성은 모르고 여성이 맛보니까, 여성은 해산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이 땅에서 이렇게 아픈 것은 내가 문제가 있다.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것은 내가 고칠 문제가 아니에요. 금지밖에 없는 이 세상 속에서, 이 금지라는 대나무숲을 뚫어서 금지가 없는 천국으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이 땅에 그런 길이 없어요.

교회에서 말하는 것,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믿는 것이 뭐가 어려워요? 정보하나 획득하면 되니까. 추가가 되는 거예요. ‘+1’로 여기는 거예요. ‘예수 몰랐는데 교회 와서 예수 알았다. 플러스(+), 나는 근사하고, 나는 건재하고, 건재한 나 옆에다가 +1, 이렇게 붙이면 된다. 그러면 이것은 나의 전체다.’ 이것이 바로 남성들이 하는 짓거리거든요.

그러나 성도는 남성이 없어요. 모든 성도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주님이 남편이기 때문에 모든 성도는 여성이 되는 겁니다. 여성에서는 자기자신의 전체성, 내가 평생 이것 하려고 살았다는 내 모든 것을 죽음과 더불어서 다 놔버려야 돼요. 그것은 예수님 외에 십자가라는 예상치도 못한 사건 앞에서 내가 그동안 구성해온, 내 인생이라고 못놓겠다고 잡고 있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돼요. 한평생 살아온 것이.

계급을 뛰어넘은 아주 감동적인 사랑이요? 타이타닉 그 배는 빙산을 박고 있는데? 그 배위에서 어떤 낭만적인 사랑을 하든 말든 그 배는 침몰해요. 이 사실에 눈을 뜬 사람은 성령 받은 성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혼하라는 말은 아니고요.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가 못나고 망해야 마땅함을 가지고 서로 주님 안에서 대화하게 되면 그 마음 자세가 남자나 여자가 다 주님 앞에 복종하는 마음자세가 된다.’라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 하는 거예요.

‘아내 된 자들이여. 너희는 시범을 보여라. 망해야 된다는 죄인의 자세를, 다가올 남편 앞에서 어떤 입장으로 살아가는지를.’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자체가 감지덕지해서, 고마워서 복종하는 거예요. 허물도 묻지 아니하시고, 죄도 묻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용납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그런 남편에게 복종하지 말래도 복종하지요.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진정한 모습이다.’라고 사도바울은 부부를 통해서, 가정사를 통해서 이것을 비취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32절에서 비밀, 숨어 있는 비밀이 바깥에 드러났어요.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내가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 거듭난 사람, 새로 태어난 사람, 예수님 십자가라는 그 죽음 안에서 없었던 내가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두 번째 인류로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교회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결혼이 곧 행복의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실망을 해야 되고, 얼마나 낙담을 해야 되고, 이 땅에서 어떤 기대와 희망도 소용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지금 이렇게 사는 모습, 어떤 형편이든 남편 바라보는 그 기쁨으로 주께서 복종하듯이 세상일에 복종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54강-엡 5장 22-24(아내들이여)191215-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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