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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3 16:43:54 조회 : 204         
안양20191212a야고보서 정리(꿈과 현실)-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19.207.152.148)
안양20191212a야고보서 정리(꿈과 현실)-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 했지요. 야고보서를 일단 하긴 했는데 야고보서를 백날 해봐야 여전히 남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야고보서를 천 번을 해도 끝까지 버티고 남는 게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이건 끝까지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서 1장 1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건 나가 아니고요. 나가 아니고, 뭐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이스라엘에 대해서 꾸준히 이야기했던 그 이야기한 바가 신약에 야고보서를 통해서 그게 완성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야고보서에서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던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이 대단히 미흡했고 문제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을 완성시켰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늘 마음속에 느끼는 것은 이스라엘일까요? 나일까요? 나이지요. 나. 그 나가 이스라엘 구성에 대해서 이걸 방해물이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은 관심사에 이스라엘에 있는데 우리는 나를 포기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아무리 봐도 포기가 안 되는 겁니다.

이러한 차이성, 이러한 대립구조가 이미 구약 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출현하면서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바로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뜻하는 이스라엘 말고 계속 나를 포기 못한 그 이유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망하거든요. 그래서 야고보서를 끝내고 난 뒤에 다시 야고보서를 정리하면서 이스라엘이 도대체 무슨 동네인데 이스라엘이 뭐기에 일체 나를 인정하지 않는가, 그거부터 우리가 아셔야 되겠지요. 방해할 때 방해하더라도 도대체 내가 왜 방해하는지, 하나님의 계획에 왜 방해되는지, 아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구약에 보면 인간은 두 번째서 태어난다 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인간은 흙에서 태어났다. 흙에서 태어난 이유가 죽을 때는 어디로 돌아가지요? 흙에서 왔기 때문에 흙으로 죽는 것이 흙으로 돌아감, 이게 죽음인데요. 왜 죽어야 되느냐 하면 환원된다는 거예요. 흙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간다. 이게 창세기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니가 왜 흙으로 돌아가느냐, 흙에서 나왔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간다. 흙이 인간을 만든다. 이게 창세기2장 그리고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을 합니까?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성경대로. 아멘이지요.

두 번째. 사람은 여자가 만든다. 갑자기 2번 나오니까 도중에 어느 게 맞는지 혼란이 일어나지요. 인간은 여자가 만든다. 이 둘 사이에 연결될 수 없는 이 갈등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유명한 요한복음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 장면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할 때에, 니고데모는 1번 흙에서 태어난다고 주장한 게 아니고, 2번을 주장했고, 주님은 1번을 주장한 거예요. 왜, 이게 십자가 죽음이니까.

지금 니고데모는 안 죽고 다시 태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했고, 주님은 십자가 죽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죽음 안에서. 벌써 니고데모하고 예수님하고 의견 차이가 나잖아요. 거기서 니고데모는 책망을 받고, 책망을 받는데 책망 받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니고데모가 예수님한테 이의를 걸지요. how?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어떻게?

이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보고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태어난 것은 내가 태어난 것이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로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로 태어나는 방법 외에는 우리는 모릅니다. 어떻게 태어납니까? 라고 할 때에 우리 주님의 뜻은 뭐냐, 어떻게 니가 이스라엘 유대인 선생이면서 어떻게 그걸 모를 리가 있느냐, 양쪽 다 어떻게. 양쪽 다. 어떻게 니가 율법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느냐 이 말이죠. 기본적인 것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말이지요.

요번에 수능 만점이 15명이죠. 15명 모아놓고 한 번 내가 수능문제를 출제하면 이렇게 내겠어요. 인간이 거듭 태어난다. 다시 어떻게 거듭 태어나는가, 인간이 다시 태어난 다면 어떻게 태어나는가, 그 똑똑한 애들한테 한 번 물어보라고요. 인간은 태어나는 그 지점을 흙에서가 아니고 여자로 태어난다고 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육에서 육의 연속 또는 영속되는 그것이 우리가 인간이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육에서 육으로.

그래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육의 구조 밖에 못 벗어난다. 육에서 난 거 육이다. 이건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육에서 난 건 육일 때, 여기서 이게 뭐냐 하면 도대체 이스라엘이 인간들이 생각한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생각한 이스라엘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은 육의 연속성을 두고 이스라엘이라고 본 거예요. 육의 연속성을 두고. 부모님이 나를 낳고 내가 자식을 낳고, 결혼해서 애를 낳고.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역량 또는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인간이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 육에 속한 인간을 하나님을 보려면 그런 육은 안돼요. 교회 열군데 개척하고 얼마나 봉사하고 소용없어요. 목사 돼도, 장로 돼도, 집사 돼도 소용없습니다. 육에서 육으로 같으면 옛날 이스라엘이 안 망했지요. 망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자손인데. 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의식 그 자체가 아무리 해봐야 하나님이 생각하는 아브라함 자손에 도달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배척해버리지요. 아브라함 자손을.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을 거부해 버리는 요소가 이 육 안에 들어있는 걸 이스라엘은 몰랐던 거예요. ‘우리가 이스라엘이다.’ 라는 생각 안에 문제 있다는 생각을 감이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 인간은. ‘나는 교회 다닌다. 따라서 구원 받는다.’ 라는 생각이 이게 하자가 있고 문제 있다. 이게 오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오류라는 생각을 감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오류 있는지를.

여러분들이 실력이 있으니까 진도를 팍팍 나가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친절함이 동원되어야 돼요. 친절함이. 친절함이 동원됩니다. 이스라엘은 육의 영속성이라 합니다. 영속성이 어려우면 연속성이라 합시다. 체인. 연속성이거든요. 그러면 나는 어디 있느냐 하면 아버지 계시고 자식 있고, 같은 동료들 있으면 나는 이게 후손들이 있으면 조부가 있으면 육의 연속성 속에 내가 여기 놓여있지요. 육의 연속성 속에.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사람이 어디서 태어난다? 여자로 인하여 태어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육의 연속성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육에서 만약에 영의 세계로 가려면 뽑아내려면 양쪽에서 다 잡아당기겠지요. 양쪽에서. 연속성이니까. 체인, 연결되어있으니까. 몸 하나 못 빠져 나와요. 빠져 나갈 수가 없다고요. 나를 있게 한 이 분이 누구냐 하면 아버지거든요. 아버지.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은 두 개의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 두 개의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던 거예요. 두 명의 아버지를. 두 명의 아버지를 섬기면서도 두 명의 아버지가 모순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 섬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만나면 죽어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면 죽는다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서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으면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은 물론 듣기는 들었지요. 기드온도 그런 이야기했고, 마노아입니까. 삼손의 아버지도 그리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버리면 우리는 죽는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밤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천사와 만나고 난 뒤에 자기는 어떤 처지에 있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라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화 시켜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죽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왜 안 죽느냐가 문제가 돼버려요. ‘왜 안 죽지?’ 가 돼요. 왜 안 죽지?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게 되면 죽게 돼있는데, 만나면 죽게 되어있는데, 왜 안 죽지? 라는 그 질문부터 다시 해야 되는 거예요. 성막, 성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이스라엘이 다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되는데 성막에 있는 그 일하고 있는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벌벌 떨면서 하지만.

어쩠든 간에 성막 안에서는 벌벌 떨고 무섭고 두렵던 간에 바깥에 텐트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멀쩡하잖아요. 그 연유, 그 이유가 뭐냐를 그들은 제대로 파악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방민족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저는 땅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올 리가 없다는 게 이방민족의 우상들이에요. 마치 예배당 세워 놓고 우리 예배당에 오늘 예배드리는데 주님이 거기에 있을 리는 없어. 우리 인간들 모였잖아. 왜, 인간들의 연속성이니까. 보통 교회가면 자기 집안들 많이 오잖아요. “아이고, 아재요!” 언니, 올케 막 오잖아요.

그러나 주일날 가가지고 예수님 만나고 오십니까? ‘아이고, 예수님 하늘에 계신데 뭐. 귀찮게 땅까지. 이 천한 이 땅에 미세먼지도 많은데. 오셔가지고 마스크 쓰고 오실 리는 없지.’ 그게 편한 거예요. 이 연속성이 편한 거예요. 여자로 인하여 태어났다는 게 이게 자기 현실을 생각하는데 이게 아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래서 망한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왜 육의 아버지를 섬기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계속 살려주는지 그 이유를 놓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이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다른 이스라엘을 생각한 겁니다. 다른 이스라엘.

인간들이 육의 연속성 속에 있는 생각하는 이스라엘 말고 다른 이스라엘을 육의 이스라엘 속에서 계속해서 끈기 있게 그게 구성해 왔던 거예요. 구성했던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남은 자. 레멘트. 남은 자. 깎아내고 남아 있는 거예요. 계속 깎아 나가는 거예요. 계속해서. 콩나물 한 소쿠리에 얼마입니까? 삼만원입니다. 깎아주세요. 이만원입니다. 더 깎아주세요. 만원입니다. 오천원. 더 깎아주세요. 삼천원. 더 깎아주세요. 천원. 더 깎아주세요. 에이, 다 가져가거라.

깎고, 깎고, 깎고 하게 되면 뭐가 돼요? 삼만원하던 가격이 얼마였습니까? 콩나물 가격이 제로가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육적인 이스라엘과 만나면서 육적인 이스라엘을 뭘로 만드느냐 하면 제로로 만들어요. 제로는 뭐냐 하면 바로 흙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무로 돌아가는 거예요. 없음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없음으로 돌아가야 없음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의 아버지가 기대한 이스라엘을 없음을 통해서 새롭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면 육적인 이스라엘은 뭐냐 깎는 과정이에요. 삼만원, 이만원 계속 깎는 거예요. 깎을 때 남은 자에서 또 남게 되고, 남은 자에서 또 남게 되겠지요. 그렇지요. 여러분이 수준이 있더라도 성경을 찾아봅시다.

이사야6장13절 한 번 봅시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아멘. 거룩한 씨가 남아있다. 제가 지난 낮 설교 때 헬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고 그 중에 진짜 하나님께서 뽑아내고자 하는 그 귀한 것들이, 귀한 것이 있어요. 귀한 것들이 아니고 귀한 것이 있어요. 단수에요.

그 귀한 그 분은 뭐냐 하면 제대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럴 때 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아들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나머지는 깎아내기.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 자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의 지체라는 몸의 구성 요소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몸의 한 부분이라는 이유 때문에 성도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 구원 또는 성령 안에서 구원, 십자가 안에서의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혹시 칠곡의 가시나들 하는 다큐멘터리 들어봤습니까. 다큐멘터리 있어요. 그게 유명한 영화제에 초정 받은 건데요. 80넘은 할머니 7명이 새삼스럽게 뒤늦게 한글 배우면서 한글사랑에 빠진 다큐멘터리로 찍은 거예요. 여성감독이 했는가. 그걸 보니까 받아쓰기를 하거든요. 받아쓰기를 하는데 저한테는 의미 있는 받아쓰기였어요.

받아쓰기하면서 젊은 선생님이 문제를 냅니다. “자, 받아쓰기 하세요.” 여러 가지 죽 이야기하면서 ‘매실’ 하면 할머니 7명이 받아 적는 거예요. 선생님이 매실 할 때 아에 이와 어에 이를 구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그 선생님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고 작대기가 바깥으로 나와 있는지, 아니면 안으로 들어있는지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할머니는 ‘메실’ 이리 썼다 말이죠.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유념하라. 유념하라 에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우리가 뭐가 되느냐 무가 되어버려요. 이게 죽음이 된다고요. 죽음. 또는 제로. 이건 점. 포인트가 돼요. 그냥 점. 점은 위치만 있을 뿐이지 딴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람이 재산이 얼마인지, 키가 몇 센티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니가 지금 어디 있느냐를 표시하는 징후가 되는 겁니다. 표현방법이 점이에요. 점.

예수 안에 있다는 말과 예수 밖에 있다는 말이 이것으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운명 또는 미래가 보장되고, 예수 밖에는 지난 수요일 어제 이야기했지만, 내가 없는 곳에 너희가 있게 하리라. 예수님이 없는 곳에 그들이 있게 한다는 말은 결국은 그들이 어디에 간다는 말입니까. 예수 밖에서 쫓겨 가는 게 돼요. 그 쫓겨 감이 육적인 이스라엘 역사에서 충분하게 보여준 거예요.

내가 쫓아낸다는 것. 이 약속의 땅에서 쫓아낸다는 것이 니가 무슨 의미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그게 간음이에요. 니가 있기도 싫어하고, 나도 너하고 있기도 싫어하는 것. 서로가 있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무가 아니니까. 나는 있음이니까.

있음이니까 내 것으로 꽉 차 있는 있음을 나는 우선적으로 생각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파고들어오면 내 있음의 영광과 있음의 즐거움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 바깥에 세워두는 겁니다. 하나님을. “나부터 우선이지 뭐 하나님 들어올 자리 없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육의 연속성이기 때문에. 타고났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 계시고 나 여기 있고 잘 섬기면 되고 실천하면 되고 순종하면 되고, 순복하면 되고, 사랑하면 되고, 주님에게 겸손하면 되지 않느냐, 이리 생각해요.

다시 말해서 나 있음과 하나님 있음으로서 이것이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성입니다. 잘못된 거예요. 주님이 있음이 있으면 나는 있음에서 포기하고 없음이 되어야 돼요. 주님이 있음으로서 그게 내 존재에 충족되어야 돼요. 주님 한 분만 있으면 저는 더는 소원 없습니다. 주님으로 만족해야 되는데 그걸 성령의 충만이라 합니다.

스데반집사가 돌아 맞더라도 성령에 충만하기 때문에 자기 걱정 안했잖아요. 더 맞다가는 내가 죽을 수가 있겠구나! 그런 걱정 안했지요. 성령에 충만하기 때문에 돌이 날아오던 주님이 이렇게 하늘에서 기다리는 거 보고 그걸로 만족한 거예요.

고린도후서1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잖아요. 삼층천에 올라갔었다는 또 있다는 주장이 있어요. 전광훈 목사라고 지도 삼층천에 올라갔었다고 하는데 그건 믿을 게 못되고.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 특징이 뭐냐 하면 나를 나라고 보지 않고, 그라고 it 그라고 표현했다고요. 어떤 분이 있는데 어떤 he 또는 어떤 그가 있는데, 그는 봤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하면 되니까. 주님 안에 내가 있다면 그 주님의 나가 내 나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려면 갈라디아서2장20절이 적용되지요. 나는 죽고 끝이냐, 아니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다른 식으로 표현한다면 주님께서 날마다 나를 없애고 있어도 무로 돌리는 방식으로 주님은 내 안에 계시다.

밥을 먹더라도 주님이 주신 거, 잠을 자더라도 주께서 잠자게 했던 거, 주께서 하신 작용은 그 나가 아니라 주님에게 그 의미가 도로 회수가 되는 그런 방식으로 주께서 일하십니다. 주님 덕분에 잠을 잘 잤습니다. 가 아니라 “주께서 잠을 자게 하셨는데 그것이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라고 주님께 돌려드리는 거예요.

이것은 신약에 성령 받은 교회가 할 일이지, 구약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것을 성사시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본으로 해야 됩니다. 이 구약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다. 라는 것이 이렇게 전제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평소에 우리의 삶이 우리의 평소의 삶이 예수님하고 일대일로 맞먹는 식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항시 십자가를 앞장세우지 십자가 빼고, “주님 거기 계시지요. 나 여기 있습니다. 또 연락할까요?” 이런 식은 없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이 원칙을 이렇게 한 번 봅시다.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똑같은 말이 하나님의 언약을 만나면 죽습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 만나도 죽고, 하나님 언약을 만나도 죽어요. 이건 변동이 없어요. 변동이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지금 육에 있기 때문에 육은 영을 만나면 죽게 되어있어요. 이미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 원리를 위반했기 때문에 죽게 된다는 말보다도 더 정확한 말은 내가 죽었음이 확인되지요. 멀쩡하게 숨 쉬고 골프치고 운동해도 그 자체가 죽은 거예요. 쫄바지 입고 다이어트 한다고 뛰는 게 이게 지금 죽어있는 거예요.

죽어있다는 말은 육 안에 육만 있고 영은 없다는 상태가 죽어있는 상태에요. 아까 이스라엘의 연속성이지요. 좌우를 둘러봐도 전부 다 똑같은 인간들밖에 없는 거예요. 그 자체가 주님은 발견되지 않지요. 주님은 발견할 수 없지요. 살아있는 자가 발견될 수 없지요. 주님을 만나면 죽으니까. 그리고 주님의 언약을 만나도 죽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어요. 하나님을 만나면 죽지만, 언약을 만나면 죽이고 이 안에 살리지요. 죽은 채로 다시 주님과 만나는 게 성사되도록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레위인들이 벌벌 떨고 제사장이 벌벌 떨면서 그들의 어린양의 피를 하나님의 성막에서 잡을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제단에서 벌건 불로 받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바깥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편안하게 농사 잘 짓고, 편안하게 결혼식도 하고, 뛰 놀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농사도 잘 짓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 농사 지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누구한테 바쳐라? 레위인에게 바치고 레위인은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바치고, 제사장은 십분의 일을 누구한테 바쳐라? 하나님에게 바쳐라. 왜? 그 모든 소득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과정 속에서 살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희에게 풍성한 소출을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되려면 항상 무엇이 차질 없이 가동되어야 되고 제대로 엔진이 움직여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제사, 바른 제사가 계속 가동되어야 되겠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어디를 쳐다봐야 돼요? 그 피 흘린 제사에 효과에 효력에 자기의 모든 걸 다 걸어야 되겠지요.

만약에 예를 들면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전쟁을 한다. 전쟁하게 되면 자기 전쟁 아니지요. 자기는 죽었으니까. 전쟁을 한다면 누구 전쟁입니까? 주님과 그리고 이방민족과의 전쟁이죠. 그러면 그들은 뭐만 의지해야 돼요? 주님의 자기를 살렸던 그 방식이 바깥에 이방민족에게 동일하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를 봐야지요.

구약의 여로보함 이후에 남쪽의 유다왕 아사왕이 있습니다. 아사왕일 때, 그 때 여호사밧, 아사왕 자기 딴에 믿음 있다는 사람들이거든요. 믿음 있다는 사람인데 공통적으로 대군이 쳐들어왔어요. 이집트의 백만대군. 아랍나라, 모압 여러 가지 주변나라들이 쳐들어왔다 말이죠. 그럴 때 선지자들이 한 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찬송하세요. 그리고 겸손하세요. 자, 겸손이란 말은 나대지 말라는 말이지요. 손 털고 그 전쟁에서 벌벌 떨지 말고 주께서 어떻게 일하는가, 손들고 나오라 이 말입니다.

골리앗 전쟁에서 골리앗 할 때, 사울 왕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군사들은 뭐했습니까?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뭐했어요? 아무것도 안했지요. 아, 했구나! 쳐다봤지요. 그것도 벌벌 떨면서. 그러니 죽은 자가 떤다는 말도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무슨 시체가 벌벌 떨어요. 걱정 근심이 늘어진 거예요. 소년 하나가 또 객기 부리다가 아주 개죽음 당하는구나! 아이고, 애가 오지랖이 넓어도 너무 넓다. 골리앗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소년 다윗을 걱정하지요.

그런데 소년 다윗은 누굴 걱정합니까? 어른들, 사울왕과 그 백성들을 걱정하고 있지요. 다윗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번 전쟁은 사람 대 사람이 하는 전쟁이 아닙니다. 이건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과의 전쟁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이유입니다.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 이유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어떤 식으로 자기 승리를 달성했는가, 그걸 우리가 남은 인생가지고 그걸 온몸으로 절감하라고, 느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옛날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벌벌 떨면 안돼요. 이스라엘은 왜 벌벌 떨었느냐, 이스라엘이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본인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존재가 있어버리면 존재는 반드시 뭘 요청하느냐 하면 소유를 요청한다고요. 소유를. 소유성을 발휘한다고요. 하나님이여, 내 편 돼 주셔가지고 이 이스라엘을 지켜주시옵소서. 이리 나온다고요.

태극기 부대 12월 14일날 지금 문재인 끌어내린다고 난리인데. 태극기 부대가 기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여, 그것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사 이 대한민국을 좌파에서 살려주시옵소서. 나라 망하는 되서 살려 달라 하잖아요. 그 이 잘못을 누가 했다? 구약에서 누가 했어요? 이스라엘이 꾸준히 해 온 거예요. 꾸준히. 그 짓을 월급 받고 전문적으로 해 온 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에요. 가짜지요. 가라에요. 가라. 가짜들이에요.

이스라엘한테 월급을 받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해서 존재하게 되는 겁니다. 병원에 가면 누가 있지요? 원목. 학교에 가면 누가 있지요? 교목. 군에 가면 누가 있지요? 군목. 교회에 가면 누가 있지요? 당회장. 이 거 다 뭐하는 짓들입니까? 이 사람들이. 뭐하는 짓들이에요? 자기 교회 지키고, 자기 나라 지키고, 자기 군대 지키고, 자기 사립학교 지키고. 자기 병원 지키고. 이게 구약 때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했던 짓이 이 짓이에요. 망하면서 하는 짓이.

이러한 선지자의 기도 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우리는 죽어 마땅합니다.” 가 없어요. 내가 나를 치는 게 없어요. 내가 나를. 내가 기존의 육의 연속성이 있다는 이 자체가 주의 일에 대한 방해물이라는 사실이 없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의식 때문에 주의 일은 지금 훼방 받고 있고 방해되고 있다는 그러한 죄책감도 없어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전부 다 어느 정도 나한테 건질 게 있어줘야 그게 세상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 자체가 주의 일에 훼방하는 짓인데.

제가 아까 받아쓰기 모습보고 예를 들었지요. 모습보고. 점, 선, 점, 선 할 때, 점과 점은 이스라엘 존재라 보고요, 존재와 존재 사이에 선이 있다 말이죠. 주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일을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존재는 점선에 불과한데. 점이 선 역할을 해버리면 주님의 일은 가려지고 없어져버리고 날아가 버리지요. 그냥 나 여기 이유도 모른 채 여기 있습니다. 있음으로 되는데 있어줘야 일은 누가 합니까? 이 점을 가지고 당기던지 밀던지 하던 그건 누가해요? 그건 지금 살아계신 주께서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논리적으로 봐서 이게 더 수월하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이 점선으로 해가지고 이걸 선형적 역사, 또는 선형적 역사 발전이라고 하는 거예요. 선형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라이너 선으로 쫙 되어있는 거예요. 선으로 했는데 이건 안 끊어지겠지요. 예를 들면 “당신 교회 역사 몇 년 됐습니까?” 할 때, 그 역사. 주님께서는 다 토막내버리는 거예요. 전부 다. 이 선은 누가 가져가야 돼요? 주님이 가져가야 될 그 선을 인간들이 자기 예배당이나 자기 사업체나 자기 가정을 만들어놓고 이걸 선으로 쪼개버려요. 그냥 점에 불과한데.

야고보서 한 번 봅시다. 야고보서4장14절, 이건 너무 많이 해서 이거 할 때마다 자꾸 안양 모였던 그 광경이 생각나요. 그 때 이 대목 했거든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질문을 던져요. 너희의 생명은 무엇이냐. 너희 생명은 제로다. 또는 점이다. 또는 없다. 생명 자체가 없는 거죠. 왜? 잠시 있는 거 같은데 목숨이 붙어있는 거 같은데 돌아서니까 없어요. 올해도 얼마나 유명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함중아 죽었지요.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말이지요. 대우그룹의 김우중.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고 김도올 하고 붙어 다니는 거. 도올 김용옥하고 붙어서 책도 나온 거 있어요.

없지요. 발인예배하고 요란하게 하지만 돌아서면 자기 선 긋기 바쁜데 남의 선 그거 기억 안합니다. 지 부모 돌아가셔도 1년만 되면 우리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더라. 이쯤 됐는데. 몇 일이더라. 제사 챙기는 불신자들은 그걸 또 꾸역 챙겨가지고 “형님, 오늘 아닙니까.” “아, 그런나.”

사람이 점이 업적을 남겨버리니까 수십년 지나도 계속해서 기념하고 그 사람을 또 회상하고 그래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김광석. 김광석이란 이 가수는 죽은지 몇 년 됐어요. 33살 때 죽고 난 뒤에 지금 매회 계속해서 되풀이하거든요. 노래는 남아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동영상도 없애야 되는데. 제가 한 게 아니니까 걱정은 안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지금 제가 강의한대로 의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함이 아니고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완성하기 위함이냐 하면 언약을 완성하기 함이라. 하나님은 육적인 범죄한 인간들을 들어가서 그 범죄한 인간이 있어줘야 언약이 돼요. 범죄한 인간이 죄가 없으면 의가 나오지를 않아요. 의가 따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죄를 이겼다는 그것이 의가 돼요. 죄 따로, 의 따로가 아니라 악마를 이겼다가 의가 되고, 죄를 이겼다가 되고, 용서가 죄를 이겼다. 그게 의에요.

그래서 인간은 죄 속에 있어야 되고 주님이 찾아와야 돼요. 주님이 찾아와서 주님의 아버지와 나라는 육신의 아버지와 또 내가 다시 아버지가 되니까. 육신의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이것은 육신적으로 존재감 있는 안정감 때문에 그래요. 안정감. 아버지가 없으면 어느 조직이든 아버지 같은 권위, 아버지 같은 위치가 없으면 어느 조직이든 혼돈에 빠져버립니다. 혼돈에 빠져요.

부부싸움 할 때 하잖아요. 남자들이. “이 집안에 도대체 어른이 누구고?” 어른이 누구고 백날 쳐도 세월가면 “저 어르신네 세상 버렸습니다.” 이런다고. 한 번 적어볼게요. 장례식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르신네 그 다음에 세상 버렸습니다. 하지요. 세상을 포기했다. 이 말 아닙니까. 세상을 손을 놨다 이 말 아닙니까.

이걸 하나님을 만나면 죽으니까 또는 하나님의 언약을 만나면 죽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냥 죽지 않고 언약을 통해서 죽게 하셔서 세상 버렸다는 사실을 언약 속에다가 완성태로 이 안에다가 같이 동참시켜 버리는 거예요. 언약 안에서 우리는 이미 세상을 버린 사람이에요. 날마다 죽노라, 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을 버린 사람이에요. 세상 버렸는데 자꾸 세상에서 벨이 죽은 사람한테 자꾸 오네요.

자, 주님의 언약이란 말씀을 안 보게 되면 또 이해 못하게 되면 인간은 아버지가 없으면 혼돈에 빠지잖아요. 그러니 어쨌든 간에 나의 존재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아버지 역할 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을 의지하고 인간에게 기대는 거예요. 인간을 의지하고 인간을 기대요. 교회에서 목사를 의지하고, 회사에서는 사장님을 의지하고, 그 책임자를 의지하고 이렇게 해서 사람에게 기대는 겁니다. 좋아서 기대는 게 아니고 자신의 육적인 안정감을 도모하기 위해서 기대는 거예요.

자신의 육적인 안정감을 도모하지 못할 때 그 때 나온 감정은 3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가지고 ‘외로움’이라 해요. 외로움. 외로움의 반대는 뭐냐 하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겁니다. 외로울 때 우리는 주께서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요. 주께서 함께 있었던 사람의 고백이 이겁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외로움이고 뭐고 다 날아갔어요. 외롭다는 말은 아직 배부르다는 말이에요. 아직 나 육적인 안정감을 포기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여기 나라는 것은 그냥 나가 아니고 육적인 나. 이걸 기본으로 한 그게 나에요. 영적 나가 아니고 육적 나를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이 육적 나를. 있는 육을 왜 포기해? 이런 식이에요. 나는 지킨다. 뭘 지키느냐, 육적인 나는 나를 지키고 싶어. 평생토록. 이건 구약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고요.

혈육에서 우리는 벗어나는 법을 몰라요. 그리고 벗어날 수도 없고요. 벗어나가지고 친구들 떠나면 갑자기 여기에 허전함과 외로움이 나타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외로워진 거예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나의 지분을 일부를 제공한 그 쪽이 내 앞에 눈에 띄지 않으니까 갑자기 나한테 결핍이 생기는 거예요.

70년 동안 한 부부로 살다가 남편이 먼저 죽었다. 그러면 여자가 뭘 느낍니까? 외로움을 느끼겠지요. 이 말은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혼자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고 타인의 것이에요. 그 타인이 없으니까 자기의 살 이유를 없어져버린 거예요. “아이고~ 이 영감쟁이. 영감쟁이. 그렇게 병들었다고 나를 애를 먹이더니 왜 그렇게 훌쩍 가노.” 죽은 사람에게 없는데, 훌쩍 가노.

그것은 바로 지독한 영감 사랑이 아니고 지독한 자기 사랑이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구성이 안 되니까. 나의 안정성 있는 내가 구성이 안 되니까. 이것들이 모여서 구약의 뭘 이루느냐, 이스라엘을 이루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것들이 오늘날 교회를 이루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바로 주의 일을 방해한다는 거예요. 방해 놓았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육으로 된 인간 연속성. 다시 해볼게요. 육의 연속성. 육의 연속성에서는 육적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찾고 있지요. 육적인 아버지를. 그게 바로 권위자. 권위자를 찾는 거예요. 권위자를 찾는 것은 권위자를 존경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육적인 안정감을 확보하기 위해서 나는 소속이 어디며, 나는 누구 자식이며, 나는 누구의 아버지라는 이 결속력. 육적인 결속력.

이 결속력 안에서는 옷도 비슷하게 입고, 애들도 애들이 그렇거든요. 애들이 자기들이 하게 되면 자기들끼리만 쓰는 언어, 은밀한 단어, 말, 새로 만들어 내고 그리고 옷도 같이 입고. 옷의 컨셉도 비슷하고. 자기들끼리 어떤 결속력을 다지려는 공동체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저희들끼리 그들끼리 육적인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 신천지 같은 거. 나는 성경도 모르는 교회에서 시련을 많이 받았다. 이게 바로 하나의 결속력을 제공하는 그들의 단결심이 되는 겁니다. 기존교회 이단에서 신천지 이단이 돼버린 거예요.

계속 누가 포기를 못합니까? 나는 여기 있다를 계속 이걸 붙들고 있는 거예요. 나는 여기 있다.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기어이. 기어이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인데.

그러니까 여기에 누가 찾아온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뭐로 오신다 했어요? 하나님 그냥 만나면 죽이잖아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것은 진짜 이스라엘을 구상하는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은 죄 속에서 끄집어 낸 사람. 또는 죄 속에서 남은 자들이 현재 진짜 이스라엘을 구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세요. 있다가 보면 주께서 끄집어내 주시는 겁니다. 끄집어내주시는데 끄집어내는 방식이 도저히 육적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끄집어내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라가 나이가 90이 넘었는데 임신을 했다. 이런 거요. 사라가 임신을 해버리니까 이스마엘은 뭐가 돼요? 이건 자식이 아닌 게 판정 나버리고 진짜 자식은, 이삭이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려고 했잖아요. 죽은 데서 부활했잖아요. 죽은 데서 새로 생긴 자식. 또는 없던 데서 왜냐, 임신을 못했으니까. 아예 없던 데서 하나님의 뜻이 약속이 내장되어서 새로 임신해서 잉태된 사람.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런 방식의 언약만 여기다 들이미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육의 사람은 끔쩍도 안하지요. 다시 태어나야 된다. 어떻게 태어날까요.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엄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납니까?” 솔직하게 자기의 본심을 유감없이 발휘하고만 거예요. 주님이 찾아갔을 때 우리도 그렇게 솔직해야 돼요. “저는 저 포기 못합니다. 저는 하나님보다 제가 우선이에요.” 하나님께서 “요거 기특한 거. 요거 기특한 거. 요거 죄 봐! 요거. 요렇게 기특할 수가. 요렇게 솔직할 수가. 이 천하의 괴수 봐! 이거 얼마나 예뻐. 요거. 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아멘. 대화가 돼요. 대화가. 대화가 된다고요. 대화가.

상상의 하나님을 백날 상상해봤자 그것은 도로 육의 안으로 다 떨어져요. 이게 하나의 자기들끼리의 종교적인 언어를 나누는 거 뿐이에요. 그냥 놀이지요. 종교놀이라니까요. 중요한 것은 혈육의 연속성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인간의 버티고 있는 육신의 아버지 사이에 뭘 하냐, 틈을 만들어버려요. 이걸 사이. 틈을 내게 만들어요. 틈을 내버리면 요건 뭐가 되느냐 하면 요건 끊어짐. 단절이 되는 겁니다.

니와 내 사이는 니가 내 쪽으로 건너올 수 없다. 분명히 하자.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갈 때, 예수님이 하는 말이 “니는 현재 니가 있는 그 입장에서는 니 있을 곳이 없다. 니 자리는 없어. 내가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니가 만든 게 아니고 니가 애쓰고 헌금하고 그런 거 말고, 내가 십자가 피로 만든 그 자리에 니가 있도록 내가 조치해 줄게.”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91212a야고보서 정리(꿈과 현실)-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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