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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8 10:35:00 조회 : 94         
광주강의20200522b 마가복음15장 6-15절(반성적 행위)-이 근호 목사 이름 : 이미아(IP:122.43.170.138)
광주강의20200522b 마가복음15장 6-15절(반성적 행위)-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여기 투명한 유리가 있다고 합시다. 투명한 유리. 투명한 유리가 있고 유리 바깥쪽 여기에 사람들이 여러 명이 서 있다. ABCD.. 여러 명 서있고. 유리 안쪽, 여기 예수님이 계시다 합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예수님은 따로 이야기하고 사람들은 따로 자기이야기를 하겠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서로 통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원숭이하고 인간하고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서로 통하는 사이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데, 예수님께 유리막이 되어 있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모른다 칩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경만 하죠.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십자가지셨단다. 사흘 만에 부활했단다.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사흘 만에 부활했다. 승천하셨대. 구름타고 오신대. 그래서? 그걸로 끝나요. 그런데 우리끼리는 서로 이야기가 통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유리 바깥 여기에 있는 A가 유리 안 여기에 이렇게 가있어요. 그러면 유리 바깥에 있는 A는 없어지겠죠. 분명히 못 가는데 예수님이 계신 저쪽 세계에 가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에 있는 BCD라는 사람들이 몸짓 발짓으로 물어보게 되죠. 니 어떻게 갔느냐? 이 말이죠. “니 어떻게 갔어?” 혹시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있나 봐도, 막혀있어서 이게 없어요. 없는데 거기에 가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이런 마술도 없고. 카퍼필드도 아니고. 이거 만리장성 통과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떻게 이게 만리장성 통과하는 것도 아니고 갈 데가 없는데 여기에 가있는 거예요. 이 A가 누구냐 하면은 사도바울입니다. 본인이 전에는 사울이었을 때는 유리 바깥쪽 여기에 있었어요. 있었는데, 아니 유리 안쪽 여기에 가있다니까요. 우째 이런 일이!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이!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일이 일어났는가도 중요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이쪽으로 건너가는데 실패한다면? 벌써 지옥불이 활활 타들어오고 있어요.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어요. 이거는 지옥이라. 지옥. 지옥이 막 밀려들고 있다면. 근데 뭐 어떤 갈 방법이 있어야죠.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건너갈 수가 있어요? 참 이거는. 이거는 뭐냐 하면은 건너갈 수 있는 연속적이 아니고 불연속적이죠. 연속되지 않고 불연속적이죠. 그럼 우리 인간들끼리는 서로 통하니까 연속적이죠. 인간들끼리.

인간들끼리 서로 통한다는 것을 오늘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전부 다 세 명, 네 명, 열 명이 되도 이거는 뭐냐 하면은 같은 몸이 돼요. 한 몸이에요. 같은 몸으로 엮여져있어요. 인간은 따로따로 되어있지만 따로 된 게 아니고 같은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 할 때 어떻게 죽었어요? 많은 사람이 죽었죠. 그때 다윗이 인구조사해가지고 많이 죽었어요. 사무엘하 24장 15절에, 역대상 21장 14절에 보면 칠만 명이 죽었어요. 많이 죽었어요. 많이 죽었거든요. 많이 죽을 때, 이 사람들이 성질이 나빠서 죽었습니까? 아니면 성질 나쁜 사람들만 골라죽였습니까? 아니에요. 한 몸으로 간주해요. 누구의 몸? 다윗과 같은 몸으로, 한 몸으로 간주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따로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따로가 아니고 같은 몸이 돼요. 같은 몸. 남이 한 일도 누가 한 일이다? 내가 한 일로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왜? 어차피 천국에 갈 수 없는 입장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차피. 제가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남이 뭐 죄지었다고, 윤리도덕으로 나쁘다고 욕하지 말라고 했죠. 어차피 아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어차피 아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잖아요. “그래도 뭐 교회는 안 나가도 자식들한테는 얼마나 잘하는데.” 잘하면 뭐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는 마찬가지고. 쇼윈도. 쇼윈도. 가는 길이 없다니까요. 가는 길이 없어요. 믿음으로 못 들어가면 끝나는 거죠. 믿음으로도 안 돼요. 우리 서로 믿자! 믿어봤자 그거는 어디서 나오는가, 내 몸에서 나온 믿음이거든요. 내 몸에서. 행함이거든요. 내 몸에서 나온 행함, 육체의 행함은 절대로 이거는 연속적이지 불연속적인 것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어려운 말로 인간은 반성적이다. 반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행동해놓고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반성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반성을 하게 되면 이게 정반합인데, 정반합. 반성을 하게 되면 누구한테 실망을 하더라도 누구한테 다시 기댈 겁니까? 실망한 내가 나에게 다시 기대를 걸어서 다시는 그런 실망스런 행동을 안 하면 될 게 아니냐? 안 해야지. 결국 어디로 소환이 되고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 자신에게 돌아와요. 하늘에다가 침 뱉기에요. 그 침을 뱉어봐야 자기 얼굴에 떨어져서 신종코로나 걸리게 되죠. 이걸 반성적 태도, 행위라고 합니다. 반성적행위.

새벽기도 설교 듣고 뭐 교회 다니고, 전부 다 뭘 하기 위함이다? 반성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관리하기 위해서. 관리해봤자 이 유리벽 이쪽인데. 못 들어가요. 이 유리벽에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초월적이라고 합니다. 초월적. 영어로 트랜스trans에 접두어를 붙여서 transcendtal, 뛰어넘는 거예요. 점프하는 것. 어떤 아무런 다리도 없고 사다리도 없고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없는데 그냥 저쪽에 와버린 상태.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이런 쪽으로 예수님이 구분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같은 몸을 가지고 열심히 같이 그 사람의 심정에 호소하고, 양심에 호소하고, 연속성이죠. 우리 인간이 반성적으로 해서 바르게 점점 더 나아지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한 그 결과가 뭐예요? 결과가 주님한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로 자기한테 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사형시켜도 자기들은 여전히 천국 못 가고 지옥에 간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고 난 뒤에 반성적이 아니고 초월적이 됐잖아요. 예수님이 죽을 때 ‘내가 참 잘못해서 죽었구나.’ “아버지! 다음에는 안 죽게 일 잘하겠습니다.” 이래가지고 부활되었습니까? 성도가 구원받을 때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고 각오를 하고 반성을 잘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니죠.

그거는 지옥 갈 사람들이나 그런 짓하지, 천국 가는 사람은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벌써 이쪽에 와있는 거예요.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이 와서, 그냥 성령이 오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니까 이래 된 거예요. 부활하신 주님을. 그래서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끝에 이랬잖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십자가 다음에 부활로 보이는데, 이 세상에서는. 그런데 실제로 주님이 일할 때는 부활의 영, 부활하신 주님이 사도바울을 만나듯이, 부활의 영-성령이 와가지고 그 다음에 우리는 어디로 간다?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왜 십자가냐 하면은 이게 개인구원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구원 같으면 부활이 마감이 돼버려요. 부활되면 다 된 거예요. 얻을 것 다 얻은 거예요. 그러나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 개인구원을 위한 성도가 아니라 십자가 주님 하신 일을 증거 하기 때문에, 성령이 와서 십자가로 가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진짜 유리벽 저쪽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지, 아니면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그런 부질없는 짓을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그 방향성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 쪽으로 가게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십자가 이거 뒷전이고 어디에 참여하려고 합니까? 멋진 새 생명, 부활의 새 생명에 소유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고 있죠.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애를 쓰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아까 배웠으니까 또 써먹으면, 이런 방법은 이게 무슨 적이다? 반성적이다. 반성적. 반성적 인간. 반성적 행위. 제목을 반성적 행위로 할까? 반성적 행위로 나와요. ‘그래, 이거는 믿음이 아니야.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야지.’ 맨날 똑바로 한대. 똑바로 해도 자기 자신의 점검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채점하고 본인이 점검하고 본인이 시험치고 모의고사 치고 본인이 다 해요. 이거 안 되죠.

이미 구원된 사람은 도대체 내가 이렇게 생뚱맞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구원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몰라요. 보니까, 아, 나의 행함 말고 주님의 행하심이 있다. 그걸 감 잡고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예가 사무엘하 21장을 한번 찾아봅시다. 사무엘하 21장 1절.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아, 사울의 집에, 다윗은 잘못이 아니에요. 다윗의 전임 왕 사울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삼년 동안 현재 다윗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억울한 죽음이 있었던 거예요. 갑자기 광주 5.18이 생각이 나네. 기브온 사람을 죽였습니다.

2절,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히 있으므로 저희 죽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3절,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속죄라는 말이 나오죠. 내가 한 게 아니고 사울 왕이 오버해서 그렇게 한 일인데 어떻게 속죄하겠느냐? 하니까, 4절,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그래서 사울 사람들 가운데서 몇 명을 죽이자고 6절에 나오죠. 사울의 자손 일곱을 죽이니까 가뭄이 그치고, 10절에 보면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졌다. 그리되어 있어요.

자, 이 이야기하고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하고 여러분들이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세요. 어떤 나라에 세자가 있는데 그 세자가 자꾸 시름시름 아픈 거예요. 그래서 나라에서 몰래 유명한 무당을 찾아갔는데, 무당이 딱 하는 말이 “지금 세자한테 원귀가 많이 달라붙었는데, 그 원귀가 억울함을 풀겠다고 세자의 꿈에 자꾸 나타나니까, 세자가 그 원귀 때문에 잠을 못자고 지금 시름시름한데, 그 원귀들을 달래주고, 그 자손들을 달래주고 묘 자리를 옮기시면 다시 세자는 건강해질 겁니다.” “아이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서 그렇게 했더니만 과연 원귀가 없어지고 세자가 건강해졌다. 자, 이 차이점이 뭐예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에서 부활은 누구의 코스냐 하면은 주님의 코스, 주님이 가신 길이죠. 주님이 죽고 부활하고. 그런데 인간들은 이 십자가부활이 없는 이유가 인간의 죽음은 지옥으로 가는 죽음이지 십자가로 가는 죽음이 아니에요. 그들은 율법의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이 코스, 언약의 완성코스로 접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유리벽 앞에서 백날 호소하고, “예수님! 저 보이죠? 손들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구원 못해줍니다. 죽어야 될 자가 죽기 때문에, 마땅히 죽어야 될 자가 죽기 때문에 못해줘요.

그리고 그 유리벽 앞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을 줘도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 하면은 그 말씀을 반성적 행위로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 율법을 지키면 더 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 나라에 넣어주겠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초월적이 안 되는 거예요. 초월이라는, 단절을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혜택 같은 것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한 몸이니까. 그러면 이 한 몸에, 인간들은 모두 한 몸이라는 것을 대표로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 속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왔죠. 들어왔으면 예수님 육신도 죄 있는 육신과 동일한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언약대로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왜 인간이 천국에 갈 수 없고, 그들은 왜 구원될 자격이 없는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확실하게 보여줬죠. 이게 단절입니다. 확실하게 보여줬습니다. 따라서 구원은 있다, 없다? 구원은 없는 거예요.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했거든요. “분명히 너는 끊어졌다. 끊어진 상태다. 아담이 끊어졌으니까 너도 끊어졌고, 에덴동산에 못 가는 것처럼 너희도 마찬가지야.”라고, 분명히 해주는 겁니다.

이래 이야기하면 “그럼 에녹은 왜 갔고 엘리야는 왜 갔습니까?” 뭐 그렇게 할 거예요. 그것은 말씀의 연루 때문에 그런 것인데. 십자가에서 그 다음에 부활로, 아버지께서 부활로 일으켰잖아요. 그러면 이거는 어떤 코스냐 하면은 유리벽 저 안쪽,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 이쪽 자체에서만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리벽 바깥쪽, 이쪽에서는 나도 넣어주세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유리벽 때문에 말도 안 통하지만. 뭐 수화로 할까요? 한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운 손을 손바닥으로 받친 것이 주라는 뜻의 수화예요. 그 받친 손바닥에 엄지손가락을 세운 손을 원 그리듯 돌리면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쪽, 유리벽 안쪽에서는 이쪽 나름대로의 코스가 있는 거예요. 이쪽 나름대로의 코스가 있다 이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들은 모두 한통속인 것처럼, 여기 예수님과 천국에 있는 모든 자도 예수님의 몸의 한통속이다. 몸의 같은 신체가 되는 거예요. 같은 몸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처럼,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볼 것은 이 엘리야와 모세 사이의 예수님과 뭐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면 되죠. 뭐로 연결되어 있는가, 이것은 제가 아까 말씀이라고 했고,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는 언약이 있는데, 이 언약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자의권, 자기 스스로 선택한 사람을 골라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부여돼요.

아버지께서 심판한다는 것은 분류한다는 뜻이거든요. 아버지께서 심판권을 예수님께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다 심판하셔도 돼요. 되지만, 예수님께서 택한 자, 원하는 자를 따로 뽑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은 인물을 보고 뽑느냐, 인물을 보고 뽑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나 아브라함이나 이미 예수님과 관련된 자들이 있어요. 예수님과 관련된 자. 그 중의 하나가 지금 이야기하는 다윗입니다. 이미 다윗이 통치하고 있는 통치성을 발휘해요. 뭐냐 하면은 사울 때, 다윗이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사울이 한 짓이거든요. 그래서 사울에게 책임을 물어야 되는데 사울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이라고요.

이미 사울은 죽었는데,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들게 하느냐? “기브온 사람들아! 과거는 과거다. 니가 죽든 말든 한때 억울했다.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잊어라!” 이러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갑자기 3년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는 식으로 다윗에게 어떤 행위, 행동으로 나서기를 촉구하는 그 이유가 뭐냐, 다윗이 그만한 권한을 하나님께 부여받은 거예요.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긍휼로 “너! 우리 천국에 와!” 하고 불러내는 것처럼.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권한이 있을 때, 기브온 사람이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은을 요구했어요? 금을 요구했어요? 뭐 소녀상 세워달라고 했어요? 뭘 해달라고 했어요? 죽음이죠. 죽음. 사울의 자손들 일곱 명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죽음이라는 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장차 올 예수님의 죽음 안에는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은 복수성, 보복성이 포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해서 그 택함의 취지를 모르고 함부로 굴었던 자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윗은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기어이 처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살인사건에 연루된 자를 그냥 묵과하지 않겠다. 그냥 못 본 체로 쉬쉬하고 넘어가지 않겠다. 반드시 보복하고 복수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주되심이에요. 그게 만군의 하나님이고.

그러면 이 어리석은 인간들은 결국 뭐냐 하면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은 정신이 어디에 팔렸습니까? 같은 동질들, 같은 패들, 같은 한통속인 인간과 인간끼리 서로 단합하고, 우리 서로 친하게 지내고, 통하는 게 많다고, 그 일 하기에 지금 바쁘잖아요. 바쁘죠. 어떤 남녀가 결혼식 할 때, “우리 모여서 주님의 십자가 연구하세.” 이래가지고 결혼식 하는 것 봤습니까? 어떤 주례선생님이 주례하기를 “이제 너희들은 십자가연구하면 된다. 딴 거 할 거 없어.” 이래가지고 주례 끝. 이렇게 하는 주례 봤습니까? 그렇게 하면 주례보고서 뷔페권도 못 얻어요.

적을게요. 오늘 강의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나왔는데, 뭐냐 하면은 ‘인간은 인간의, 본인이 하는 그 일로 망한다.’ 본인이 열심히 하는 그 일이 결국 자기가 하나님 앞에 복수당하는 짓거리를 계속 축적하고 있는 거예요. 계속 찾고 있는 겁니다. “나는 교회에 관심이 없어. 나는 교회 다녀도 왔다갔다만 하지 말씀에 관심이 없어.”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지만, 사실은 본인이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계속해서, 축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로마서 1장에서는 그게 뭐냐 저주를 쌓는다. 애들이 레고 쌓고, 쌓고 쌓으면서 놀죠. 계속 쌓아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나이가 80이 됐는데도, 80가지고 싸우고 어떤 사람은 90을 자랑하네. 무게가 더 나가. 자기 망하는 지옥 가는 짓을 더하기에다 더 곱하기 더 제곱으로 계속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n제곱방? n제곱방이 아니고 그걸 비난하고 판결내리는 판사 니도 마찬가지다. 전부 다. 다 마찬가지에요. 자꾸 인간이 단합하려고 하고 하나가 되려고 하고 있어요. 우리 가정은 화목하기. 화목해서 뭐하는데? 뭐 할 건데? 어차피 화목해봐야 유리벽 바깥에서 노는데요. 아니 누가 누굴 가두는 거예요? 인간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갇혀있다고 보지만 예수님이 보기에는 본인들이 갇혀있어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에 들어갔죠. 불에 들어갔는데, 그 다니엘 세 친구를 불에 집어넣은 느부갓네살 왕은 굉장히 세 친구에 대해서 측은하게 생각해요. 이런 바보 같은 생각. 입장이 누가 누구를 처단할 입장입니까? 누가 누구 걱정해야 돼요. 다니엘 세 친구는 불에 가서 안 타 죽었잖아요. 자, 불에 들어가도 안 타 죽는 게 낫습니까? 불 겁내는 게 낫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아니, 군에 갔다 군 제대한 사람이 낫습니까? 군에 안 가고 벌벌 떠는 사람이 낫습니까? 이미 군에서 제대한 사람이 낫잖아요. 반성적 행위에서 이미 제대를 한 사람이 최고 아닙니까? 그게. 최고거든요.

반성적 행위에서 초월적으로 벗어난 거예요. 누구 덕입니까? 다윗 같은 주님,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거든요. 다윗에게 일어난 일을 되풀이 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걸 완성시키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다윗에게 일어난 그 자의적, 자발적인 그리고 본인이 그 의사에 의해서 일어난 그 결정처럼, 예수님께서도 자기백성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다 건져냅니다. 오죽했으면 어린양이라고 자기 이름부터 새겨놓고, 그 이름에 맞춰서 우리를 끄집어내시거든요. 주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주님한테 선택받고 싶어요! 하는데, 선택받고 싶다고 하지 말고 니가 지금 달리는 길이 어디냐는 거예요.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보이는 쪽으로. 뭐 인간은 누굴 판정할 수 없고 하나님이 다 판정한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오냐, 니 겸손하다는 그런 소리를 들으려고. 내가 진리를 깨달아보니까 어떤 인간도 대단한 인간이 없다. 그게 복음이에요? 아니잖아요.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차라리 모르겠다고 하면 되는데.

원귀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묘 자리를 옮겨라. 자, 여기서 차이점은? 원귀들이 나타났으니까 묘 자리를 옮기라는 이 이야기하고 아까 사무엘하 21장에서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복수를 대신해주는 것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다윗의 이야기에는 뭐가 개입이 되었느냐 하면은 죽음이 개입되잖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묘 자리 옮기는 것이고. 이거는 위로받게 해주는 거예요. 위로받게. 달래주는 거예요. 이거는 달래주는 것이 아니고 이거는 역사적으로 실제적입니다. 왜냐하면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기 때문에. 3년 동안 실제로 가뭄이 들었다 이 말이죠.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도 뭐 원귀가 많아서 비가 안 온다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속성을, 백성과 왕이 한 몸이 되겠다는 연속성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거는 철저하게 연속성이 아니고 불연속적이에요. 기브온 사람이 그렇게 나선 것도, 다윗도 억울한 사람을 그렇게 찾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시그널을 보내줬잖아요.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이 기도했고, 기도를 해보니까 “니가 나서서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정당한 죽음으로 심판을 해버려라.” “왜요?” “니가 그만한 권한이 있다.” 다윗의 자리가 그러한 자리거든요.

다윗의 자리가 그런 자리라면 우리 주님의 자리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됩니까? 다윗의 자리에, 이 유리벽 저쪽의 사이의 연속성가지고 설명을 해야 돼요. 언약적 연속성. 다윗의 자리가 죽음을 명령할 권한이 있다면, 그 다윗의 자리를 이어받은 예수님도 지옥 보낼 자와 천국 보낼 자를 임의로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얼마든지 그럴 권한이 있고, 오직 그런 권한에 의해서만 구원이 되고 구원이 안 되고 결정되는 겁니다.

결국 제가 하는 말은 뭐냐, 이 유리벽 바깥쪽에 있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구원을 요청할 권한이 있다, 없다? 구원을 요청할 권한이 없는 거예요. 아니, 성경을 볼 자유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보든 교회를 다니든 그건 니 맘대로 하세요. 해봐야 그거는 들리지 않는 아우성이죠. 왜 갑자기 이게 제목으로 하고 싶지. 뭐, 몸부림치고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뭐, 난리도 아니에요. 기도하는 것을 옆에서 들으려고 해서 듣는 게 아니고 고함지르니까 들리죠. 들어보게 되면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구원해달라는 거. 아이고, 참 기가차서. 심지어 꼬마 애까지. “코로나바이러스 악한 마귀가 돌아다녀요.” 그거 이창섭 목사님이 올려놨죠. 십자가마을에. “악한 마귀가 돌아다녀요. 빨리 교회에 가서 모이게 해주세요.” 막 이래요.

그렇게 기도해놓고 막상 바라바는 살리고. 막상 현장에서 예수님이 오니까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이라고 했죠.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유리벽 앞쪽에 있는 그 성질이 어디에 갑니까? 그대로 유감없이 발휘해요. 유감없이. 앞쪽에.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자기 쪽에서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어서 천당에 가고 싶어도 막상 하나님께서 조치한 것은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을 딱 들이밀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제키고 내 귀한 것이 손상되지 않으려고, 내 귀한 것이 뭐냐, 나의 의로움. 나의 의로움과 나의 정당성, 나의 옳음, 여기에 대해서는 양보 없이 우리는 버티고 있다. 이 나의 의로움과 나의 옳음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숱한 친구를 사귀고 있으며, 그들과 헤어질 마음은 조금도 없는 거예요.

부부로 둘이 결혼을 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의 의로움이죠. 이쪽 신랑도 나의 의로움이죠. 자,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됐다. 둘이 합쳐서 하는 짓거리가 뭡니까? 나에서 어디로 바뀝니까? 우리의 의로움이에요. 거기다가 자식을 낳았다. 우리 새끼 의로움이죠. 딴 자식은 다 죽어도 내 자식만큼은 안 된다. 딴 자식은 스쿨존에 깔려죽어도 내 자식이 스쿨존에 깔려죽으면 나는 법까지 만들 거야. 민식이법. 법도 만들고 7억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누가 압력 넣을지. 보상보험금도 7억 요구하고.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이게 뭐냐 하면은, 왜 그래야 되는지 물으면 “나는 정당하니까. 나는 의롭기 때문에.” 나는 의롭다는 이 말이 결국 나에서 뭐로 뭉치게 해요? 나에서 우리게 되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부부싸움은 전부 다 우리 내부에 있는 나의 의로움 때문에 하는 거고. 이 부부싸움에 남들이 개입하면 갑자기 나에서 하나가 되죠. 다섯 개로 있었던 그 분체가 갑자기 지구에 적이 오게 되면 크로스해가지고 독수리오형제가 하나로 뭉치잖아요. 자기들끼리 싸웠다가 갑자기 적들이 오면 같이 온 식구가 하나가 되어가지고. 자신의 정당성이에요. 자기정당성뿐입니다. 이건.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인간이 사는 것은 남 깔보기 위해서라고. 깔보기 위해서 사는 이 원칙은, 진짜 육이 있는 한 영원합니다. 우리 애국가 가사를 바꿔야 돼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남을 깔보기 위한 쾌감은 영원하리라. 영원한 거예요. 왜, 우리나라가 잘 되어야 돼요? 왜, 우리나라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있어야 되는 이유가 뭐예요? 우리나라만 정당하기 때문에. 그걸 확장하게 되면 아시아인은 정당하기 때문에. 모든 게 이미 단일신체에요. 단일신체. 신체가 나 하나가 아니고 오직 하나의 신체에요.

하나의 신체가 바라바를 살린 겁니다. 바라바를 살린 거예요. 단일신체가. 바라바야! 너는 내편이지만 누구는 내편이 아니다? 저 예수는 우리 편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래 잘했다. 그렇지! 그렇지!” 이렇게 완벽하게 인간과 주님이 단절돼줘야, 주님의 구원이요, 온전히 주님의 자의에 의한 구원으로만 이게 귀결되게 부합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기가 악하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음이,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분명히 드러났기 때문에. “내가 주를 위해서 죽겠습니다.”라고 한 그 말도 주께서는 그걸 믿겠습니까? 베드로의 말, 그 객기를 안 믿죠. 믿을 리가 있습니까? 안 믿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만,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이죠. 시몬의 티를 다 냈잖아요. 결국은. “나 저 사람을 모른다고. 저주한다고.” 역시 유리벽 바깥쪽 사람이에요. 열두 제자조차도 이쪽 사람이에요. 십자가를 어떻게 감히 따라가요? 아무도 못 따라가요. 주께서 따라온다고 해도 오지마라고 했어요. 십자가는 나 혼자 가는 길이지, 너희들이 우르르 따라올 길이 아니라 이 말이죠. 니가 니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따라오기는 어딜 따라와요? 못 따라와요.

예수님의 몸과 인간의 몸이, 예수님의 몸은 죄인의 몸으로 왔지만 이 몸이 인간 몸에 섞이지 않은 다른 초월적인 몸으로 오신 거예요. 그래서 부활한 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언약의 완성된 몸은 우리가 만지지 못해요. 같은 몸이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우리가 만지지 못해요. 부활의 몸은. 그래서 우리의 육체 이거는 우리가 일찌감치 포기를 하셔야 해요. 이 몸 건강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몸이 아픈 것도 뭐라고 했습니까? 아픈 것도 사명이에요. 몸이 아픈 게 낫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아픈 것도 사명이고 건강한 것도 사명이고.

베드로의 이런 몸은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쌍꺼풀수술해도 좋습니다만. 자기 몸에 대해서, 몸이 아프다고 해서 저주받았다니, 주께서 나를 내치는구나,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주님의 십자가지신 그 몸, 그 몸을 바라보면서 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몸이라도, 심지어 내가 나밖에 모르는 이 죄악 된 몸이라고 할지라도,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으면 그 몸은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중의 몸인 거예요. 사명을. be동사+ing, 사명 감당하는 몸이 바로 내가 죄짓고 있는 몸이에요. 어떤 경우의 몸만? 바로 말씀으로 연루된 몸만. 십자가와 연루된 몸이라면 어떤 몸이라도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지금 현 상황을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신 거예요.

사도들이 다 건강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아픈 데 없었어요? 뭐 위장도 안 좋고, 뭐 사탄이 준 가시가 있어가지고 세 번이나 빼달라고 요청했고. 그런 대목이 나오죠. 위장이 안 좋아서 포도주를 마셨다는 그 대목도 있고. 아, 그거는 디모데네! 제 몸이 갈수록 이상해져요. 이상하다고 반성하지 마세요. 디모데한테 위장이 안 좋으면 포도주를 마시라 했고. 디모데가 말씀의 사도인 것은 맞지만, 그 몸이 늘 튼튼하고 건강한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몸은 건강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몸 자체가 누구와 연루되어 있느냐, 주님과 연루되어 있죠. 그런데 이 세상의 몸 가지고는 이거는 반대로 단절되어 있어요.

아까 유리벽에서 A라는 사람이 엉뚱하게 예수님하고 엘리야, 모세하고 있는 쪽에 있다 이 말이죠. 같이 여기에 있을 때, 유리벽 바깥쪽에 있는 BCD는,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특히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이에요. BCD, 이쪽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메섹도상에서 잠시 눈 깜빡거리다가 눈뜨고 보니까, 다메섹 가서, 가는 목적지에서 다른 사람이 돼서 예수님이 바로 주님이시다고 증거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많이 다르죠.

그리고 십자가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한통속이며, 우리 전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루된 범인이라는 사실이 주님에 의해서 폭로 당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뭐만 이야기해야 돼요? 부활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만 이야기해야 돼요.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려 하셨던 말씀이 뭐였던가? 거기에 모든 계시와 모든 복음이 십자가라는 것을 앞장세우면서 뒤따라 그 안에 다 쏠려있는 거예요.

십자가는 바로 단절성이죠. 단절성. 완전히 인간은 끊어져있다 이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럼 단절되어 있는 그 세계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얼마나 회개할까요? 이렇게 또 반성적으로 나오지 마시고,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 그 다음에 봅시다. 12절에 봅시다.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이래 되어 있거든요. 지금 빌라도의 모든 행동이 어떤 행동입니까? 9절에,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절에, “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라고 되어 있죠.

빌라도와 그 부인은 꿈자리도 사나웠지만,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은 한때 예수에 대해 뭐 그렇게 악한 감정이 빌라도한테는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어쩔 수 없이 빌라도가, 비록 자기가 그 당시의 총독이면서도 가만히 보면 총독 밑에 있는 일반민중들한테 지금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요렇게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를 문장화시키면 이해가 됩니다. 인간들은 왕을 원한다. 왕. 왕 또는 다른 말로 지도자. 지도자를 원한다. 어떤 지도자? 어떤 왕? 어떤 지도자 어떤 왕을 원하느냐? 우리가 군림할 수 있는 왕. 백성이 오히려 왕보다 더 위에 있는 왕을 인간들은 구하고 있어요. 이게 사사기에 나오는 왕들이죠.

인간들은 왕을 구해요. 지도자를 원한다. 우리에게 왕을 주옵소서! 이 말은 왕도 뭐도 우리가 선택하겠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히려 부려먹을 수 있는 심부름하는 왕을, 지도자를 원하는 거예요. 이거는 모든 인간의 신체, 신체성이 이구동성으로 통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의 신으로 최고의 권한을 누리자. 그래서 빌라도가 있지만 허수아비처럼 큰소리만 꽥꽥 쳤지,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잘하십니다.” 가만히 보니까 벌써 민중들에게 놀아났어. 놀아났어요. 자기는 발 빼려고 꿈에 뭐 이렇게 저렇고 해도 백날해도 뭐 소용이 없어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는데 동의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속에 그들이 놓여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0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이야기해요. 내가 스스로 죽는다. 다시 말해서 이 단절성, 십자가라는 단절성. 생명은 나의 생명만 생명이지 너희는 죽어도 생명이 아니야, 라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 업무에 대해서 내가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주께서는 야무지게 일을 하시겠다는 거예요. 기어이 너희들이 나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죽임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거기에 반대자가 없도록, 서로 통하고 한통속이 되니까.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내 죽음과 연관성이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자, 그렇게 되어 있어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올 때 뭘 앞장세웁니까?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것이 말이 되는 거예요. “니 내 죽였잖아.” 그래야 이게 말이 되고 구원이 되고 구원의 내용이 된다고요. 살인자인데 어떻게 구원됐습니까? 라는 말이 서로 통용이 되어야 돼요. 이 유리벽 안에서는. “저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입니다.”라는 자격으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죠. 우리가 뭘 행합니까? “나는 나의 정당성을 보장하기위해서 예수님도 나는 거절했습니다.”라는 그러한 태도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이 유리벽 안에서는 자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지옥가도 마땅합니다.”라는 게, 이게 돼야 돼요. 주께서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죄인이 바로 접니다.”라고 해야 되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할 때에 베드로가 한 말이 뭐였습니까? “동업합시다.” 이렇게 한 거예요? 뭐 어떻게 된 거예요? “주여,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떠나소서.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가치도 없는 인간입니다.”라고 하죠.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게 바로 이미 부활의 영을 받은 사람은 뭐를 쳐다본다? 십자가를 보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분이 저기 못 박혔고, 그로 인하여, 저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무한대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아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어요.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모르게 되면 자기가 다소나마 의인인양 여깁니다. 의인이라고 여기니까, 사람은 거기서 짜증지대로가 되죠. 더우면 덥다고 마스크 때문에 짜증나고. 여름에 날씨 덥다고 짜증내고. 습기 찬다고 짜증내고.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자기한테 있기 때문에 사는데 불편하게 되면, 그 불편에 어느 누구라도 탓을 돌려야 속이 시원하잖아요. 누구 탓을 돌려야죠. 그래서 기도라는 방식으로, 교회충성이라는 형식으로 하지만, 그 내용은 뭐냐 짜증부리고 있는 거예요.

욥처럼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래 되어야 하는데, 짜증낼 것 다 짜증부리고 성질낼 것 다 성질부리고. 그것은 뭐냐 하면은 자신이 저주받아야만 마땅한 죄인인 것을 깊이 느끼지 못할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이렇게 짜증이 나오고. 짜증만 나옵니까? 장래가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되고. 망하면 어떻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내가 망하면 어떡하지? 무슨, 망했는데, 벌써 망했는데 망함이 또 있습니까? 이미 망해버렸는데, 뭘 망하면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하지? 맨날 어떡하지래. 뭘 어떡해. 예수님 죽여 놓고 뭘 혼자 자기 착한 척하고, 거룩한 척하고, 의로운 척하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성령으로 연루시키고,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함과 연루된 사람은, 성령을 받아 제대로 죄인 된 사람한테는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만. 자, 끝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여기 바라바는 어떤 입장에 있을까요? 바라바는. 바라바가 구원받았다는 쪽에 있어요. 천주교 쪽에서. 하여튼 그런 것을 잘 지어내요. 바라바는 예수님께 감동받아서 은혜 받고 구원받았다고. 세상에! 감동받아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은 감동받았다고 하는 것은 반성적이기 때문에. 초월적이 아니고.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없어야 돼요.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있을 뿐이지, 내 쪽에서 어떤 것 때문에, 어떤 것을 근거로 해서 구원되는 법은 없습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이 안돼요. 인간은 반성만 할뿐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은 반성에서 반성으로, 그걸 정반합이라고 하는데. 옳았다. 아닌 구석이 있었구나. 그걸 개선하게 되면 더 옳겠지. 이렇게 자꾸 정반이 합이 되고, 정1+반=정2가 되는 거예요. 또 그렇게 계속 나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체적인 반성과 자체적인 자기검토와 점검을 위해서 보다 더 진리에 어프로치, 접근하는 것. 이거 외에는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바라바의 위상은 뭐냐 하면은, 바라바가 이게 죄인이거든요. 분명히 사람 죽인 죄인이죠. 그러나 이 바라바 역할은 뭐냐, 인간의 죄의 끝은, 인간에게 남을 지적하고 자기가 죄라고 반성하는 것은 결국 반성함으로써 반성하는 본인이 의롭고 제대로 바라바를 처리, 처분했습니다, 라는 것을 통해서 전부 다 자기 의로움으로 소환되게 하기 위한, 그러한 빌미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러한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게 바라바예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의로움을 할 때는 반드시 뭘 하느냐, 적을 찾아요. 적을 찾아서 저게 적이라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반대급부로 자기 자신의 정당함을 얻습니다. 이게 이 세상의 정치고 정당이에요.

어떤 표를 얻으려면 누구 하나 잡든지, 윤미향을 잡든지 누구 하나 잡아야 돼요. 정의기억연대를 잡든지 누구하나 잡아서 그걸 조져놔야 상대적으로 자기가 의로워지는 거예요. 상대적으로. 인간은 자기의 어떤 적을 통해서 반대로 그만큼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계속 뭘 찾게 됩니까? 계속 나쁜 놈들을 찾아다니는 거예요. 나쁜 놈들을. 우리 집안은 남편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남편. 이건 내 자식 때문에 그렇고. 전부 다 남 때문에 내 인생 꼬였다는 거예요. 니 때문이다. 내 인생에 태클을 걸지 마! 태클을 걸지 마! 진성이 부른 노래. 모든 게 이게 남 탓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교체해서 들어간 바라바. 바라바가 그렇게 인간의 정당성을 위해서 희생물이 됐다면, 그 바라바 자리에 들어갔던 예수님을 인간들이 믿겠다고 나서는 것은 결국 뭐냐, 역시 나는 옳다. 자기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시늉들을 하는 용도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나 잘났죠. 바라바 대용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등장하는 겁니다. 참 이게, 제가 방금 정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인간은 정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요. 여기 빌라도나 대제사장들도 모든 처리가 정치적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이렇게 언급하면서 모든 처리를 자기정당성과 자기 잘남으로 귀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인간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예수님역할은 못하더라도 바라바 역할을, 본인이 스스로 바라바라 생각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한테 돌을 쳐라. 내가 맞아줄 용의가 있다. 너희들이 얼마든지 잘난 척하고 싶다면 내가 거기에 희생물이 되어주마.” 이거는 뭐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도를 이런 바라바 위치로 이렇게 해줘야 뭐가 드러나는가 하면은 십자가가, 이론의 십자가가 아니라 실제적십자가가. 나 같은 못난 바라바와 예수님이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매일 삶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바가 되게 함으로서, 주님이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그 현장에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쓸데없는 짓거리,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십자가는 옛날이야기고 남의 이야기로 여겼는데, 지금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사오니, 우리가 이 십자가현장에 바라바로 사용되어짐을 오히려 고맙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00522b 마가복음15장 6-15절(반성적 행위)-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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