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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1 20:45:34 조회 : 70         
15강-빌 2장 15-16절(그리스도의 날)20053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15강-빌 2장 15-16절(그리스도의 날)2005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2장 15-16절입니다. 신약성경 318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2:15-16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성도에서 특이한 시간이 뽑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을 성경 빌립보서 2장 1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날’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서는 이 시간이 뽑혀 나오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나름대로의 자신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거든요. 사람들이 자기의 완성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저는 나의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천당 가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생각에서 못 벗어난 겁니다. 하나님이 계산한 것은 그리스도의 날이지 나의 날이 아닙니다. 만약에 나의 날, 그저 죽었다가 그냥 그리스도와 합해진다면 도중에 십자가라는 것이 필요치 않은 것이 되어버려요. 십자가가 개입했다,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는 이유가 나의 날에서 그리스도의 날로 일치감치 교체가 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모든 시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몸이 어쨌든 간에 건사되어야 되고, 자기 몸은 안 다쳐야 된다. 내 몸을 잘 보관하고 지키고 싶은 그러한 나날이 모여서 자기 날이 되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어려운 단어는 아니지만 들으면 약간 골치 아픈 단어,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스토리, 나의 이야기, 우리 집안, 가문의 역사, 가문의 이야기, 교회역사, 우리 교회 이야기, 전부 다 정당성이지요, 우리 민족의 역사, 안 중근 의사가 그렇게 몸 바쳐 지키려고 했던 민족의 역사, 한민족의 역사, 그게 바로 다 인간의 날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역사, 그들의 나를 지키려고 했지요.

그러나 그 역사들을 고집하다 보니까 십자가로 통해서 가는 그리스도의 날과 연결이 안돼요. 스스로 그 궤도에서, 레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그 사람들은 분명히 고기 잡던 사람이었고 자기 할 일이 있었고 세리였는데 주님께서 불러내는 겁니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제자가 되어라.” 부르는 순간 기존의 자기 이야기가 의미 없게 되었어요.

자기 이야기가 의미 없게 되었다는 말은,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목적과 자기의 완성 이런 것은 전부 다 배제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선상에서 탈락된 거지요. 세상에서는 그걸 탈선이라 하는데 그게 탈락된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역사에서 배제되고 역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집합체, 그걸 교회라고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라고 이야기하고 그 흠 없고 순전한 집단, 그 교회라는 집단이 세상을 볼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느냐?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로 보이는 겁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세상에 기대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큰일 날 뻔 했다는 이야기지요. 그 쪽 세대에 속했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감을 느끼는 겁니다.

주께서는 나를 강제로 그 쪽 세계에서, 합류된 그 역사에서 빼내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성도는 이 교회는 제대로 보고 있는 겁니다. 거기다가 15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우리 성도 입장이라도 너무 과분한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흠이 없고, 그자체가 빛이라는 겁니다. 상당히 터무니없어 보이지요. 왜 ‘흠이 없고, 빛의 집단’이라는 호칭을 해도 우리가 거북스럽게 느껴지느냐 하면, 평소에 이 세상에 살면서 나름대로 자기인생을 꾸려가는 방식이 몸의 기억으로 장착이 되어 있어요.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모든 수완이라 할 까, 또는 방법이 다 내가 스스로 잘되기를 원해서 하는 버릇들이 우리 몸에 다 배이다 보니까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은 완전을 추구하지만 역시 부족한 것이 많다는 생각을 늘 느끼는 겁니다. 열심히 바르게 살아도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고 환경에 내가 휩쓸려서 살다 보면 잘못도 내가 많이 저질렀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나는 흠이 없어. 나는 빛 자체야.” 그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건방져 보이고 허세 떠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 자신이 용납이 안 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미 규정합니다. 네가 스스로 흠이 없고 빛의 자녀로 보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계, 대항하는 세계라고 그렇게 규정을 했건만 여기에 동조를 안 하네요. 왜? 정이 너무 들어서. 손 놓기가 너무 아까워서. 주님께서 비난하는 세대 속에서 우리가 거기에 부합되는 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15절과 16절이 남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어요. 특히 15절이 남의 이야기가 되다 보니 16절 그리스도의 날도 이것 뭐 시큰둥해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살다보면 주께서 재림하는 날이 오겠지. 그게 내 소관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그냥 후딱 넘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려서, 이 설교 가운데서, 인간 속에서 시간을 뽑아낸다. 시간을 뽑아낸다는 것은 무엇을 포기하느냐 하면, 삶의 공간을 포기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할 때 네 번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시계를 만들었어요. 해와 달과 별. 시계가 없는 공간에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시계를 만들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날이 되게 되면 그 시계는 다시 사라져 버려요. 해도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고, 별도 필요 없어요. 해, 달, 별이 필요 없다는 말은 해 달 별을 보면서 살아가는 인간도 천국에서는 필요치 않습니다. 오지 말라는 겁니다. “시계 보면서 살았던 인간들아. 오지 말라. 너 아직도 시간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느냐?”

그리스도의 날이 되면 시간이라는 것은 흘러가지 않습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정지되어서 없어요. 그걸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께서 미리 알려주신 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그 특이성, 기이함, 그리고 제자들의 삶의 아주 특이함, 낯섦, 이것은 인간 속에서 마지막 그리스도의 날을 뽑아내는 하나님의 특이한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의 표준으로 기준으로 만들었고요.

신약에서는 인간들 가운데 제자들을 표준으로 삼아서, 그들을 선택해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일, 노선을 일방적으로 따르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살아가는 것과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고, 또 이스라엘이 인도받는 것과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에 있어서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몸 또는 자신의 몸의 완전성, 또는 자신의 몸의 구원성을 위해서 인간은 시간들을 매일같이 활용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몸을 위한 시간이지 그리스도의 날과 연관된 그 시간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시간이 둘이 될 수 있는지, 상당히 제가 말씀을 드리면서도 여러분이 낯설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공간에 두 개의 원이 따로 있다 합시다. 원이 따로 있으면 두 개의 면적을 따로 차지하지요. 그런데 그 두 개의 면적을 중첩을 시켜보자 이 말이지요. 원1과 원2가 중첩이 되어버리면 분명히 두 개의 원인데 면적은 하나로 차지하지요. 그게 특이점이 되는 겁니다.

이쪽에 원이 있을 때는 이쪽 원은 그 쪽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규정이 되지만 이 시간과 공간에 규정되지 않는 새로운 요소가 그 원 뒤에 같이 중첩이 되면 기존의 원이 하나 소멸되는 그 순간에 비로소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는 새로운 노선의 몸이 딱 등장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가장 기이한 일이란 이겁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시간 따라 살다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 이게 가장 기이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 비로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는데요. 성령받기 전에는 복음을 전파할 수 없어요.

성령 받고 난 뒤에 복음을 전파했던 그 사도들의 집중관심사, 관심을 딱 두는 것은 딱 두 개의 사건밖에 없어요. 십자가와 그리고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것. 십자가의 죽음과 사흘 만에 살아났다. 이것을 집중 이야기함으로서 성령 받은 사람만 사도와 같이 모든 관심사가 십자가와 부활에 두고 세상을 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은 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인 것이 비로소 파악이 되게 되어 있어요.

수요일에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요. 이 대지에는 분출공이 있다고요. 분출공이라 하는 것은 내부에 있던 것이 외면으로 분출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니면서, 두 발을 딛으면서 곳곳에 다니면 그 다니는 순간마다 거기서 이 대지를 지배했던 악마의 그 정신이 예수님의 작업과 말씀과 만남으로서 분비물이 나와요.

이 대지의 분비물, 그 분비물이 나오는 분출공이 되겠지요. 분비물이 나오는데 그 분비물이 그동안 이 대지를 장악했던, 악마가 인간을 지배했던 원리원칙이 나온다고요. 그건 뭘 뜻하느냐 하면, 레위기에 보면 더러운 것은, 오염된 것은, 부정 타는 것은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약속의 땅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사람들은 자기가 말씀대로, 율법대로 지키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이곳은 정화되어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공간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검사관이 되시는 주님께서 발로 밟는 거예요. 과연 이 대지가 오염되었는지 아니면 깨끗한지 밟아보자, 하고 말씀 전하시고 일을 벌이니까 거기서 귀신 튀어나오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 땅이 더럽다는 말은, 이 땅만 쳐다보고 이 땅에 운행되는 시간과 공간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도 추접해서 천국에 안 넣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더러워서, 오염되어서, 부정 타서. 레위기 보신 분 혹시 계시지요. 레위기를 보게 되면 계속해서 지루할 정도로 따분해서 힘들어요. “더러운 것들은 내 백성 아니다. 정화작업해라. 그리고 더러운 것들을 만진 인간도 더럽다.”

쿠팡인가 작업장에서 바이러스 오염시키는 것 같아요. 모든 세상이 전부 다 오염되어 있다. 오염되어 있는 판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그것을 분명히 언급하고 레위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제사가 얼마나 신랄한지 몰라요.

우리 보기에는 제사를 뒷짐 지고 구경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막상 그 뜨거운 숯불 가운데 들어가는 어린양의 심정을 헤아려보세요. 불 위에 그냥 노출되어서 피부부터 타 들어가는 아픔을 온몸에 지고 가는, 그 아무 흠도 죄도 없는 어린양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라는 것을 보시라 이 말이지요.

물론 우리가 ‘개인적으로 나쁜 마음을 가져서 그렇게 저주의 불구덩이에 들어가고 지옥 불에 들어간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난 것 자체가 오염된 세상에서 태어나서 듣고 보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오염된 것만, 부정 탄 것만,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만, 주님 보시기에 거스르는 것들만 우리가 교육받아서, 우리 몸에 스며들어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극렬하게 제사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극렬함으로 너 자신의 본질을 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가 얼마나 무모합니까? 무모한 짓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무모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살아가요. 마스크 하고, 나갈 때도 손 씻고, 들어와서 또 씻고. 우리는 사는 것이 그렇게 무모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간에 가느다란 이 생명 유지해보려고 모든 갖은 노력을 다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무모했거든요. 심지어 제자들도 무모했어요. 제자들은 도중에 주님이 너무 무모해서 갑자기 급브레이크 잡으면서 핸들 돌려서 u-턴해서 나는 주님 모른다, 하고 전부 내뺐지만. 끝까지 갈 줄 알았지요. 현재 자기노선의 살던 식으로 살면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영생 천국 누릴 줄 알았지요. 베드로가 마지막 순간에 핸들을 급하게 틀어버렸어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머리가 기억하는 그 기억이 있는 반면에 그것보다 더 센 몸이 기억하는 기억이 있어요. 머리로는 성경 백독 했어요. ‘흠이 없고 빛의 자녀다. 좋은 말씀이다.’ 어쩌라고? ‘그리스도의 날이 온다. 좋겠네.’ 그러나 실제 우리의 몸은 대지와 한통속이 되어 있어요. 이 넓은 땅과. 더러운 것이 나와요. 그 더러운 것이 무슨 이야기냐? 정치 이야기에요. 경제이야기고, 사회이야기고, 교회 이야기고. 우리 가정이야기고, 마이 스토리, 나의 몸, 내 몸의 이야기.

주께서 발로 우리를 지그시 밟아줘야 돼요. 백인 경찰이 흑인 목 밟듯이 꽉 밟아줘야 돼요. 이게 얼마나 무모한지. 눌러주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우리 내부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선악체계가 바깥으로 번져 나옵니다. 그동안 내가 정치, 경제, 문화, 이 모든 이야기 한 것이 결국 무슨 이야기냐? ‘나는 정당하잖아요.’ 하는 자기 잘남의 표현이었어요. ‘나는 더 이 땅에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자기커버하기 위해서 그런 짓 했다 이 말이지요. 인간이 자기 몸 위주로 살다 보면 항상 이스라엘특이성이 날라 가버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시간이라는 날카로운 칼날로 인간의 몸 위주의 시간을 전부 다 토막 내 버립니다. 텍사스 전기톱 같이 날카로운 칼로 전부 다 토막 내 버립니다. 어떻게 토막 내느냐? 일주일 단위로 토막을 냅니다.

그게 안식일이에요.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왜 안식일이 있는지? 그 안식일에 왜 의미가 있는지? 성경에 안식일이 있다고 하면 ‘그냥 한주 지내다가 놀면 되겠지. 하루 쉬고 또 열심히 나머지 6일 일하겠다.’ 이렇게 편하게 생각들 하시는데 그게 아니고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날과 관련되어 있어요. 이사야에 보면 모든 율법은 없어져도 안식일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했다는 그 말이지요.

제 7일 안식일 교단은요, 그 이야기 믿고 아직도 안식일 지키고 있어요. 토요일에 쉬고 있다는 말이지요. 안식일이라 하는 그 시간은 7일 단위로 계속해서 순환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몸 위주의 시간에서는 순환이라는 것이 없어요. 윤회도 없고 순환도 없어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갈 때까지 계속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대자연의 변화가 그러니까. 그걸 토막 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시간이 토막 났다는 말은 매순간 인간들은 자기의 출생과 종말을 되풀이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여러분이 아주 뜨거운 사우나에 간다고 해 봅시다. 사우나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사람이 문에다 못을 박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들어가지도 않겠지요. 사우나에 들어가서 모래시계 거꾸로 놓게 되면 한 5분 가잖아요.

그 때 인간에게는 기다림이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희망이 있어요. 아무리 뜨거워요 5분 지나면 문 열고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꼭 인생과 같아요. 힘들지만 나중에 희망이 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고된 인생 견딜 수 있다. 이렇게 되는데 사우나 갔다가 5분 지나고 나와서 후, 좋다, 하고 있는데 다시 또 들어가래요. 사우나 삶, 지옥 같은 그 뜨거운 불가마 삶이 네 본질에 부합되고 잠시 안식일에 문 열어주는 것은 한 숨 돌리는 막간의 시간이라 보자는 말이지요.

이렇게 보게 되면 이 세상 시간이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되어 있잖아요. 아무리 새싹이 올라와도 겨울에는 다 지기 마련이라는 말이지요. 이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예요? 모든 자연은 순환되게 되어 있고 결국은 파멸되게 되어 있다. 노아언약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준 거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누가 이 순환구조를 계속 지속시키느냐? 근근이. 이걸 봐야 돼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잠간 숨 돌릴 그 때가 전부가 아니고 사실은 어디에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뜨거운 지옥 불에 들어가야 돼요. 뜨거운 지옥 불에서 나올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 현재 인간의형편입니다. 왜? 부정 탔으니까, 오염되어 있으니까, 거스리고 어그러진 세대의 출신자기 때문에 그래요. 또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의 옹호자고.

제가 설교 처음에 그랬지요. 성도 안에서 시간을 뽑아낸다고. 인간은 자기 몸이 아직까지 지옥에 안 갔으니까, 뜨거운 사우나까지는 아직 안 갔으니까, 지옥의 뜨거운 불에는 아직까지 안 갔으니까 지금 살아가는 이것이 당연한 어떤 권리처럼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잠간인데, 막간에 숨 돌리는 그 순간인데 그게 아니고 영원히 이런 식으로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고 6일 동안 막간의 삶을 사는 것은 7일째 안식일 날 어린양의 처참하게 죽어서 뜨거운 불에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아낸 그 혜택으로 그들은 6일간의 휴가를 가진 거예요. 안식이라는 사바스(Sabbath)라고 하는데 그 뜻은 뭐냐? 중지한다는 뜻이에요. 시간의 중지입니다. 시간이 중지된다. 이것은 종말에나 해당되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의 자기 몸의 세계에서는 중지라는 것이 없지요. 왜? 우리가 살아가는 그 기간이 짧기 때문에 내가 사는 동안에 해도 멈추고 달이 멈추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늘 중지였고, 늘 파멸이었고, 늘 파괴였고, 늘 멸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의 대가로 그 다음 한 주 6일 동안 숨 돌릴 시간을 주는 겁니다. “그 숨 돌릴 시간동안에 이방민족과 다른 삶을 살아라. 네가 하나님의 약속 계약되어 있는 민족인 것을 알아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계약이라는 것을 쉽게 말씀드리면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 여리고성 사람이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이에요. 그런데 계약된 이스라엘이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 그 기생 라합이 어떤 결심을 했느냐 하면, 그 입 벌린 계약 속에 기생 라합의 온 식구가 들어가 버린 겁니다. 나는 이스라엘정탐꾼의 운명과 같이 하겠다. 정탐꾼 잡히면 본인도 잡히는 거예요. 정탐꾼이 무사히 빠져나가면 자기도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고.


정탐꾼이 만약에 그 여리고성 경찰한테 잡혀 죽으면 본인도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같이 죽게 되는 거예요. 바로 그게 계약이 이 땅과 접선했을 때 나타나는 특이성이에요. 기생라합은 밥 먹고 살아요. 기생질해서 삽니다. 기생라합은 그걸 사는 것으로 보지 않았어요. 그걸 영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왜 계약이 없기 때문에.

기존의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계약이 없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실어오고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실려 오는 있는 새로운 계약노선에 합류할 수 있는 찬스가 왔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기생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모든 목숨을 포기하고 기존의 살던 삶을 포기하고 계약된 민족 이스라엘의 그 계약 안에, 목구멍 안에 자기 가족을 다 집어넣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야고보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이게 바로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해요. 행함으로 보여준 믿음이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에서는 내가 살길이 없음을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발견한 마음가짐, 거기서 나오는 행위, 이것이 바로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걸 로마서에서는 약속 있는 믿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을 기생라합이 그렇게 보여줬지만 오늘 이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은 새로운 시간이 네 속에서 뽑혀져 나온다는 것을 네가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새로운 시간이. 아까 원 이야기했지요. 중첩되어 있다는 것. 새로운 시간이 그리스도의 날과 연계되어 있는 새로운 시간이 중첩되어 있는 겁니다.

이 새로운 시간에 가려면 기존의 몸 위주의 구원, 이것은 용납이 되지를 않아요. 새로운 시간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가기 때문에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 인간의 몸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늘에 앉혔다고 봅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날의 시간이 우리에게 온다면 주님이 지나간 주님의 히스토리, 주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늘 다가오는 거예요. 가면 갈수록 십자가에 가까이. 십자가 졌던 그 취지와 의미가 세상을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거예요.

미래가, 곧 예수님의 과거 이야기가 우리의 미래 이야기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생은 익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인생은 익어가는 것이 아니고 확인되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를. 늙어가는 것도 익어가는 것도 아니고 확인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냐를.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다보면 그 미래가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가 맞이해야 될 나의 과거가 되어버려요. 우리가 살아야 될 앞으로의 모든 것은 내 몸 위주로 살았던 내 몸의 구원을 추구했던 나의 과거를 우리가 미래에 맞이하게 되는 거예요. 이해 안 될 줄 알았다. 말하는 내가 잘못이지. 우리가 경험해야 될 것은 내가 왜 지옥가야 될 인간으로 태어났는가를 확인하기위해서 계속 수명을 더하여 연장한다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일주일로 계속 자르잖아요. 오늘날은 매일매일 잘라요. 잘라서 토막 낸다고요. 내 자신의 몸을 위한 시간을 잘라버리면 내 몸이 토막 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건질 게 없어요. 토막 난 것을 뭘 건져요? 장어입니까? 토막 냈는데 어딜 건질게 있어요? 단일체가 안되는데, 쪼가리 난 인생인데요. 그걸 자꾸 합치려고 하지 마세요. 매일같이 주님께서는 스톱시키고 잘라냅니다.

죽고 또 살고, 죽고 또 사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에 대한 어떤 모델적인 인물이 있느냐? 있습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와 있는 도착된 시간에서 거꾸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요한복음 1장 15절에 나옵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풀이하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시간은 예수님의 그 몸 그 존재 그 몸을 위해서 시간은 그분에게로 수렴된다. 전부 다 한데 모여졌다. 라는 시간을 세례요한은 미리 앞당겨서 알게 된 거예요.

분명히 세상 시간에서는 세례요한보다 예수님이 6개월인가 늦게 태어났지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저분은 나보다 이 땅에서 후배다, 라는 것을 알면서도 뭐라고 하느냐?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보다 앞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은 나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세례요한의 존재가 뭐가 되느냐? 그 존재는, 예수님의 앞선 그리스도의 날로 인하여 세례요한의 존재는 토막나버려요. 토막나버리면 그게 소리가 되어버립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성도에게 있어서 시간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성도의 몸의 구원을 차단시키고 그걸 조각내서 이미 앞서서 먼저 선착한, 먼저 도착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 분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스피커로 사용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걸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어요. 세례요한이 왔을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례요한에게 보내서 “너 누구냐? 네 몸체는 누구냐? 네 정체를 밝혀라. 네가 그리스도야? 네가 엘리야야 ? 너 선지자야?” 이렇게 물었어요. 20절에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원하는 답변은 “나는 ( )다.”를 원하는 거예요. “나는 (무엇) 이다.”를 원하는 겁니다.

나라는 이 신체, 그리고 그 신체가 하나로 되어 있을 때 “나는 (아무개) 가 된다.” 는 그 것을 원했건 만 세례요한은 답변하기를 “나는 소리다.” 완전히 분해되어 버린 거지요. 소리라는 것, 설명이 좀 필요한데.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냥 온갖 것들이 다 누적이 되어 있어요. 온갖 과거의 체험과 기억들이 누적되어 있습니다.

전기톱 가지고 통나무 자를 때 소리가 굉장히 요란하지요. 윙, 하고 짜증날만한 소리가 나지요. 왜 통나무 자를 때 소리가 나느냐 하면, 통나무 안에 딱딱하게 에너지장이 결합이 되어 있어요. 그렇게 뭉쳐져 있는 에너지 장을 토막 내려니 얼마나 소리가 대단합니까? 나무 안에 저장되어 있던 에너지가 소리 에너지로 퍼지니까 소리가 아주 요란스럽게 되는 거예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자기 나름대로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이라는 그 순환되는 시간이, 시간은 칼날이에요, 그 칼날이, 그리스도의 몸을 지향하는 그 칼날이 인간의 몸을 전부 다 잘라버려요.

왜 잘라버려야 되느냐? 인간의 몸을 그냥 두게 되면 자기 몸이 노동한 대가로 그 덕택에 자기가 산다고 착각을 하거든요. 안식일은 뭐냐? 안식일에 희생양 때문에 그들은 살았는데 그렇지 않고 그들은 안식일을 버리고, 안식일이라는 계약을 버리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이만큼 살아왔다고 우기게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성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그리스도의 날과 관련된 시간으로 그 몸을 잘라버려야 되거든요. 자를 때 소리가 얼마나 요란스럽게 나겠습니까? scream이라 할까요? 괴성, 비명, 울부짖음, 으르렁거림, “아니되옵니다, 주님!” 이런 거 있잖아요.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질 수는 없습니다. 나 어찌 살라고.” 이렇게 발악을 하는데 세례요한은 모가지가 날라 갔습니다. 세례요한 반항 안했어요. 어차피 소리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만 닦달 내고 있어요. 안 죽으려고. 비명이에요. 우리는 조금 건드리면 아야, 조금 만 아프면 난리도 아니에요.

<부부의 세계>란 게 딴 게 아니에요. 공식적으로 사회적으로 비명 지르는 것을 허용하는 관계, 이게 부부관계입니다. 그래서 배우자가 아프면 살려야 돼요. 안 그러면 비명 지를 대상이 없기 때문에. 고함을 질러야 돼요. “너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질러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내 인생을 굳히는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여기에 축적되어 있습니까? 이걸 안식일이라는 시간가지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그 몸에서 나온 시간이거든요, 그 시간 가지고 십자가로 자르려고 하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다고, 제발 놔달라고, 주님이고 하나님이고 다 필요 없다고, 내가 이러려고 이 나이까지 예수 믿었느냐고, 이렇게 고래고래 고함지르면서 강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이 무슨 모습이냐?

15절에 거스리는 모습, 어그러진 모습, 거스리는 세대의 모습입니다. 내 안에 있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오염되고 부정적인 것이, 이 내면이 막상 주님께서 그 인생을 건드리니까 여지없이 괴성 지르면서, 탄성 지르면서 난리도 아니지요. 귀신 빠져나오는데 그렇게 힘들어요. 귀신이 빠져나오는 것이.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몸 구원받기 위해서, 천당보내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열심히 기도들을 하지요. 그것은 뭐냐? 기도할 때 근거가 뭐냐? 내가 교회 나와서 30년 동안 충성하고 봉사했습니다. 그걸 다 펼쳐놓고 내가 나의 스토리 나의 히스토리, 나의 이야기를 근거로 이 정도로 성실하게 했기 때문에 이 정도 복을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자기 소리 내는 거예요. 주님의 소리가 아니고 자기의 본심을 숨길수가 없어요.

자기소리가 막 나오는 거예요. 나는 이런 인간이 되고 싶습니다, 가 막 나오는 거예요. 하여튼 새벽기도가 문제에요. ‘새벽을 깨우리로다’가 문제라고요. 잠자게 놔두지 깨우기는 왜 깨우나 말이지요. 구약의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출애굽에서 보게 되면 유월절의 특징 중 하나가 뭐냐?

천사가 이런 지시를 받았어요.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여라. 단 한 놈도 살리지 마라.” 이것은 뭐냐?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살아 있어요. 단 한 놈도 살리지 말라는. 그래서 우리가 상상해 봅시다. 처단하고 심판하는 천사의 입에다 카메라를 꽂는 거예요. 그 날개에는 죽음이라는 폭탄이 실려 있고요. 그래서 새벽에 집집마다 다 찾아갑니다. 자는 잠에 맏아들을 다 죽이는 겁니다.

카메라 따라서 우리도 같이 밤중에 비행해 봅시다. 사무라이가 따로 없어요. 두건 쓰고 등 뒤에 긴 칼 차고 다니는 사무라이. 그냥 다 죽여 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을 지옥으로 평정해 버립니다. 뜨거운 사우나 바깥이 우리의 삶의 장소라는 그 착각을 착각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잠간 쉬는 이 세상 잠간 쉴 뿐이지 너의 원래 자리는 지옥불이라는 것, 이 뜨거운 지옥불이 우리의 원래 삶이에요. 우리 자리에요.

잠시 한 8. 90년 사니까 괜찮은 줄로 알고 있지요. “들어와 지옥으로. 뜨거운 지옥이 널 기다리고 있어.” 잠시 숨 쉬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인생의 전부라 생각하면 안돼요. 그걸 어디서 보여주는가? 유월절 날 보여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시간을 파종하는 겁니다. 안식일을 파종해요. 파종을 하게 되면 그 안식일이 시간이 증식되지요. 광야 같은 경우에 그 시간 스케줄에 맞춰서 만나가 올 때가 있고 안 올 때가 있었어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새벽에 만나라는 과자가 떨어져 있는데 이 만나라는 과자가 늘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안식일에 모든 것이 종결될 때, 시간이 정지될 때 그 때는 만나를 안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만나를 어디서 얻어야 되는가? 누가 만나가 되시는가? 그걸 생각하는 진짜 원래 합류해야 될 그 자리를 미리 앞당겨서, 만나라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미리 알려준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하늘에서 온 만나라 했어요. 만나라는 말은 뭐냐? 종결, 모든 시간이 마무리 되는 종결의 시간에 따라서 예수님이 이 땅에 십자가의 모습으로 왔다는 거예요. 모든 마무리는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시공간이 마무리돼요.

그것도 모르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 당시 제자들은 떡 주니까 떡 좋다고 우르르 몰려서 따라갔지요. 오늘 점심에도 떡이 있을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어떤 분이 만나를 주고 갔어요. 수박과 만나주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네 육을 위해서 배부른 까닭이라 했어요. 떡을 준 것은 육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네 현재 육은 육이 아니고 그냥 소리에요. 모가지 날라 가도 괜찮아요. 죽어도 괜찮아요. 왜냐? 우리의 시간은 한시적이고, 시원한 바람 잠깐 쐴 때 희생양이 되시는 주님의 혜택에 대해 눈치 채라고 잠시 허락한 기회의 시간을 현재 우리한테 아직 안 죽고 있으니까 부여받은 겁니다.

딴 거 아니에요. 세상이라는 게. 세상이라는 것은 잠시 숨 돌리는 시간이에요. 그리스도의 날이 따로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이잖아요. 그리스도의 날이 따로 있다고. 십자가는 정말 터무니없이 인간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무모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비극인지요. 이 영광, 비극만 보지 말고 유일한 영광이라고 생각해야 돼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우리한테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을 주신지 몰라요. 너무 영광스러워요. 시간이, 그 부활의 그리스도의 날과 너에게 있는 지금의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잠시 사우나에서 나와서 숨 고른다고 해서 다가 아니고요. 천사가 뭐라고 합니까? “살만하냐? 너는 여기까지다 끝.” 끝이에요.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제가 아까 파종한다 했지요.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주님의 시간을 파종하고 그 시간이 증식하게 하는데 그 첫 열매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첫 열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관심 둘 것은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뿐이에요. 다른 것은 있어서는 안돼요. 그렇다면 현재 우리 입장에서는 주님께서 그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 부활의 날, 승리의 날이라 하거든요, 인간의 날과 싸우니까, 그 승리의 날, 모든 것을 지옥으로 평정하기가 마무리 된 그 날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 그것은 지난 오후예배 때 제가 설명했습니다.

단선으로 시작된 나의 완성과 나의 희망만 삼던 내가 그 다음부터는 뭐가 축복이고 뭐가 저주냐 그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축복과 저주라는 달랑 두 개의 종착점만 있지 제 3의 지역은 전혀 없었음을 발견하는 겁니다. 마치 무대가 있는데 세트장이 있을 때 특히 어린애들이 물론 어른들도 궁금해 합니다.

‘저 무대 뒤에 뭐가 있을까?’ 실제로 무대에 가보면 무대 뒤로 통하는 조그만 문이 있고 거기에 시크릿 가든, 비밀의 정원이 있지요. 애들의 상상 속 동화의 세계를 생각하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그 말이거든요. 그 비밀의 정원, 십자가 안이지요.

십자가 뒤에 들어가면 거기서는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나란히 딱 있지요. 그것뿐입니다.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이 있을 때에 그 때 십자가로 통과하지 않고 미리 머리로 그걸 기억해 버리면 이것은 소용없고요. 몸으로 인생 살면서 내 구원 내 몸의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 안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는 뭐가 기다리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은 사람과 미움 받은 사람이라는 두 쪽으로 나눠지지요. 사랑받은 사람과 미움 받은 사람으로.

마태복음 25장 1절에 보게 되면 천국을 설명하면서 이 대목을 설명합니다. 천국을 설명하면서 천국은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혼인잔치 날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결혼식, 여러분 중 결혼 안해 본 분도 있지만 대부분 결혼한 사람들인데 결혼식 때 기쁨이 어디서 오는 기쁨일까요? 왜 결혼식이 기쁘지요? 부조 받아서 기쁜가요?

뭐냐 하면, 결혼식 날 어떤 사람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어요. 저라고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결혼식 날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이지요. 왜 기쁘냐? 왜 감격스러우냐 하면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이 드러나는데서 오는 기쁨이에요. 나를 그냥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나를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봐주는 여자가 있다는 그것이 신기해요.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도 남자구실을 한다니 이렇게 모든 것이 신기해요.

그리스도의 날은 내가 기대하고 예상한……, 제일 중요한 것이니까 마지막에 여러분이 잘 들으셔야 돼요. 그리스도의 날은 나의 날을 탄력 있는 공처럼 훌쩍 넘어버려요. 나의 고충과 나의 하소연을 못 본척 그냥 넘어가 버려요. 넘어가서 우리의 방향으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리게 만들어요. ‘어, 주님이 하는 일이 어디로 가지? 나를 피해서 그리스도의 날로 가네.’ 사랑이 있는 곳으로 혼인잔치가 있는 곳으로 가게 해요.

이 세상에 내가 더 살게 하는 요령을 가르쳐 주는 그런 날이 아니에요. 훌쩍 내 키를 넘어가 버린다고요. 어떻게, 뭐, “이거 잘해주세요.” 그런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내 살기 위한 어떤 원칙도 제공하지 않고 공 튕겨서 그냥 공이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내 시간을 넘어가 버리지요.

넘어가 놓고 그 다음에 그게 주님의 이미 이루어진 일이거든요. 주님의 이미 이루어진 그 과거가 우리한테 미래로 다가오지요. 지금 우리 입장에서는,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 몰라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은. “그 사람 나를 알아도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하지만 원래 사랑이 지나가면 그래요.

조금씩 조금씩 살아가면서 아하, 주께서 하신 그 혼인잔치는 내가 그분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분을 기억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분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분이 나보다 먼저 선착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조금씩 그것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소식을 알려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눈 돌리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반항하고 저질스러운 세상인지, 왜 주님께 대드는 세상인지, 그게 바로 악마의 부정 탄, 더러운 오염된 것들이 분비되어서 온 천지를 정치, 종교, 사회, 과학으로 도배를 하게 만들었어요. 마그마가 올라오는 것처럼 더러운 것들로 이 세대에 가득 차게 만들어요. 왜 이 세대가 그렇게 되었는가?

모조리 다 자기의 몸을 포기하지 않고 십자가 없이 내 몸을 천국 가겠다고 싸대고, 설쳐대고 공들이는 그 모든 짓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그 아픔을 이해 못하고, 그 저주를 이해 못하고 자기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악마의 시도에 불과함을 이제는 우리가 목격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딱 하나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너는 사랑을 받지 못했다. 너는 사랑을 몰라.” 우리가, 나는 더 착해. 나는 더 훌륭해 가 아닙니다. 나는 완전해, 나는 빛의 열매처럼 살았어, 가 아니라 그냥 사랑받은 거예요. 사랑받아서 구원받은 겁니다. 사랑이냐 미움이냐, 그냥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결정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몸 하나 아끼려고 온갖 버틸 대로 버티고 몸부림치다가 뜻대로 안되면 비명 지르고, 주께 대들고, 삐지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감사는 어디에도 없고 내가 잘한 것만 자랑질 하는 저희들, 주여, 눈을 들어서 주의 십자가를 보게 하시고, 십자가의 첫 열매를 보게 하시고, 그 열매가 우리 자신인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5강-빌 2장 15-16절(그리스도의날)200531-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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