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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3 23:47:47 조회 : 78         
44강-호 11장 8-11절(은혜로 남은자)200603-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44강-호 11장 8-11절(은혜로 남은자)2006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11장 8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5페이지입니다.

호세아 11:8-11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새삼스러운 이야기인 것처럼 선지자를 통해서 선언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이 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그 이상을 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지요. 그러면 사람은 무엇까지가 그 한계치인가? 사람의 한계치, 맹렬한 분노와 화 그리고 그 맹렬한 분노와 화의 끝은 사정없는 징벌이 있다. 이것까지는 인간들이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이 끝이라 하는 그 끝, 마지막 뒤에 마지막까지 알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된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는 것까지는 알 수가 없어요.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이 아는 그 너머까지 아시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분으로 오늘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아, 너는 인간일 뿐이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아, 너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야.”

마귀는 인간에게 신이 된다고 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인간은 인간이지 선악과 따먹었다고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악마가 인간에게 속인 겁니다. 거짓말 한 거예요. 인간들이 아무리 지혜를 짜내고 신에 대해서 탐구하고 연구해도 하나님은 그 이상까지 다 내다보고 계획을 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그 계획이 무엇이냐? 그 계획이 바로 긍휼이라는 겁니다. 여러 번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 보고 먼저 질문하듯이 던져놓고는, 8절 끝에서부터 보게 되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긍휼을 언급하면서 긍휼을 뭐라고 묘사하느냐? 맹렬한 진노를 나중에는 다 거두어들이겠다는 겁니다. 맹렬한 진노를 다 발휘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그렇게 하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한다는 거지요. 8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옥까지도 없다, 하면 곤란하거든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를 내시는구나.’ 그것까지 그들은 알고, 그렇게 아는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기억이에요.

그 다음에 그 맹렬한 진노로서 내 인생은 끝장났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보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몰랐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이 뭐냐? 하나님께서 그 진노를 돌이켜서 긍휼 사랑으로 베풀어주는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긍휼이라는 것은 앞에 절차가 반드시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야 되고요. 그 하나님의 진노, 분노는 인간의 어떤 행위로도 취소가 되지 않는 진노여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 반성했습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그래, 네 회개와 반성을 보고 내가 진노를 거두어줄게.” 이런 식의 진노 같으면 그것은 진노 시작도 안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어떠한 마음낮춤과, 반성과, 회개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래, 우리는 진노 받아 마땅해.”까지 이르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진노 받는 것은 당연하지 뭐.” 거기까지 이르게 하는 거예요.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천국 넣어주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다움의 결정이지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까지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안돼요.

예를 들어서 부모가 화가 나서 애를 때리려고 하고 벌을 주려고 하는데 애는 부모마음까지 다 간파가 되어서 “엄마, 미안해요. 아빠 죄송해요.” 생각하는 의자에 앉아서 헉헉 울면서 “아빠, 미안해요. 엄마, 미안해요.” 그렇게 울면서도, 시계 보면서 배시시 웃으면서 ‘이제 이만큼 반성했으니 아버지가 날 용서하는 거지요?’ 요런 수작, 이것은 어디까지나 수작에 불과한 겁니다.

그럴 때 아버지는 말하기를 “아직도 내 분노, 내 징벌은 시작도 안했다. 네가 그럴 줄 내가 알았기 때문에. 네가 진노 너머의 긍휼까지 계산에 넣고 행동할 줄로 내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네가 생각하는 긍휼은 나는 개시도 안했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되는가?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데도 불구하고 진노를 내리시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간단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간택되었거든요.

인간은 누구 위주냐 하면, 항상 인간위주가 됩니다. 성경에서는 ‘자기를 위해서’라고 표현하는데요. ‘자기를 위해서’가 되어버리면 그게 명칭이 여호와가 되든 예수가 되든 상관없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인간이, 개인이 개인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 그것은 백프로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은근히 기대하고 그 하나님을 믿겠다, 하는 것은 결국 수익자, 수혜자로, 혜택자로 누구를 설정했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설정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인간은 하나님에게 뭐라고 대드는 셈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난 그런 것은 모르겠고 당신이 어떤 하나님인지 나는 모르겠고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어떤 신이든 나는 신에게 사랑받을 권한이 있다. 나는 이것만큼은 어떤 신 앞에서도 나는 고집부리고 이것을 외치고 싶다.’ 그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또 천지를 창조하시고 해봤자 인간들은 ‘그것 됐고, 그것은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어떤 혜택을 줄거요? 어떤 죄용서를 해줄겁니까? 어디서 용서를 받는가는 난 모르겠고 결과적으로 어떻게 용서하든, 어떻게 자비를 베풀든 나는 모르겠고 어쨌든간에 최종적으로 나에게 이익을 줄거요, 말거요?’ 달랑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인간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의 한계치를 보여주는 기능자에 속하는 겁니다. 그들은 일종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거예요. 벌 받는 사명, 하나님의 진노를 온몸으로 다 받아서 그 결과를 세상만방에 유감없이 노출시켜야 될 사명, 그 사명을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이 먼저 감당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하는 것과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의당 자동적으로 나오는 생각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진노가 먼저 있고 진노가 있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분명히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것을 분명히 하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동의가 될 때 그 인간은 사명을 감당했다고 간주가 되고,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진노가 합당하다는 것을 동의한 이후에 하나님의 긍휼을 그 사람에게 주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이고 하나님은 진노 후에도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참 증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기획하신 프로젝트에요. 그러면 인간의 계획은 뭐냐? 인간의 계획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 비록 지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으나 나중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애로운 성품에 의해서 진노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 라는 것이 인간의 계획입니다. ‘똑같네요.’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지금 하나님이 벌 내려도 끝까지 벌주시는 분이 아니고 언젠가는 사랑을 베풀 하나님이라고 믿을 때 그것은 인간으로서 오늘 본문에 위반되는, 곧 우상을 섬기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똑같이 보이지요. 똑같은 게 아니에요. 제가 귀찮게 또 이야기할까요?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인간을 진노아래 두고 그 다음에 그 ‘진노 아래’가 동의가 된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거든요.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계획은 하나님의 계획을 내가 알아차려서 그 계획을 나한테 적용하게 되면 나한테는 결국 종국적으로 결과적으로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계획이에요. 이상하게 같은 것 같은데 느낌상 이상하게 뭔가 누락이 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분은 단 한명 뿐이라는 사실을 인간들은 계산에 넣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으신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외친 이야기는 그겁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체험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체험이고 어떤 인간도 아무리 유사체험을 해도 그 본래의, 아버지와 아들사이에서만 통하는 그 체험에 가담될 수가 없어요. 그냥 연기는 할 수 있어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분들만 고유하게 체험할 수 있는 체험에서 모든 인간은 배제됩니다.

그래서 신학을 알고 성경을 아무리 알아도 결국은 인간이 생각하는 여호와, 예수, 삼위일체는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우상이기 때문에 아무리 신학을 하고 성경을 봐도 인간은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 받아야 돼요. 성경을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하나님의 저주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이 그 사명자가 된다면 이스라엘이 받은 사명은 뭐냐? 죽어 없어지는 것이 사명이에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아픈 것도 사명이라 했지요. 그것은 맛보기고 오늘은 좀 더 나갑시다. 안 아파도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주 고귀한 사명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죽어 없어지는 것이 사명이에요. 오늘도 뭐하다 죽어 없어지지? 돈 좀 있으면 골프 치다가 죽어 없어지면 돼요. 골프 치는 그것도 사명이니까. 어차피 방향이, 죽어 없어지기 위해서 골프치기 때문에. ‘골프 치다 죽을래. 골프 치다 저 호수에 빠져 죽을래.’ 좋아요. 골프 치다가 호수에서 악어가 나와서 악어에게 물려 죽는다면 그것도 사명이라니까요.

어쨌든 간에 사명은, 이 땅에서 내가 존재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면서 뭘 알아야 되느냐? 왜 죽어 없어져야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알아야 되는데, 인간은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는데 왜 그런지는 사적으로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다만 이 땅에 살면서 인간은 어떻게 죽어 없어지는가? 곱게, 조용하게, 솜사탕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온갖 고생 다하면서, 마음의 괴로움 다 겪으면서 죽어 없어진다는 그것을 인간은 체험하지요. 그러니 인간은 나름대로 이 땅에서 죽어 없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 없어지는 이것이 성경의 사명이건만, 인간은 이상하게 알 수 없는 반항기가 있어서 “그래도 나는 끝까지 살고 싶습니다.”가 나오는 거예요.

뉴턴의 법칙에 의하면 이것이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에요. 누르면 누를 수로 저항이 더 세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놔두면 저항하지 않는데 강제로 막고 주 방위군 동원하게 되면 미국에 있는 한인상점들이 트럭 채 강탈당합니다. 누르니까 반항이 더 심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 집하고 교회 기름을 넣기 위해서 주유소에 전화를 했어요. “올 수 있습니까?” 그런데 부인되는 사람이 전화를 받아서는 “못갑니다. 우리 아저씨가 아파서 지금 병원에 다닙니다.”라고 했어요. “나중에는 되지만 오늘 당장은 기름배달이 안됩니다.” 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느낀 것이 뭐냐? 그 사람이 기름배달을 왜 하느냐? 살기 위해서 하거든요. 그런데 살기 위해서 죽어야 된다는 이 모순. 죽도록 일해서 살겠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죽도로 일해야 돼요. 왜? 살기 위해서.

이상하게 문장이 연결이 안돼요. 살기 위해서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인가요? 아니지요. 모든 인간이 똑같아요. 성경은 반대입니다. “살아라. 왜? 죽기 위해서.” 이거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없어지기 위해서. 그 없어지는 이유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죽는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저의 반성과 회개도 안 통한다는 말입니까?” “소용없어. 네가 회개 반성한다고 해서 수명이 10년 20년 더 늘어나는 것 없어. 그냥 회개를 하든, 반성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무슨 몸부림을 치든 간에 너는 이미 죽도록, 그것도 죄 때문에 죽도록 확정되었음. 땅, 땅, 땅!”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원인은 어디서 찾는가? 나중에 최종언약이 와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바로 죄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바로 의 때문에 부활되신 거예요. 의가 있는 자는 죽음에 그냥 방치되면 안되기 때문에 의로 살려주시는 겁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죽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의해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은 뭐냐? 호세아의 이 모든 예언의 말씀, 긍휼과 사랑이라는, 네가 진노 속에 있더라도 사랑 때문에 건진다. 누구한테?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 하나님의 계약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사람은 그냥 지옥에 저주에 음부에 머무르게 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가운데 가셨더라도 살려내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요. 예수님이 경험했던 그 지옥, 저주의 체험을 예수님 빼놓고는 어느 누구도 거기에 근접하거나 거기에 참여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죽어 마땅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가 믿는다고 하는데 그럴 능력은 인간에게 아예 없는 이유가, 인간이 개인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그 개인이 의식되는 순간 모든 의미가 예수님처럼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 살아 있다고 여기는 나에게로 다시 환원되고 말아요. 다시 되돌아온다 그 말이지요. 순수하지가 않아요. 회개 반성 그 자체가 순수한 것이 없어요.

저는 이것을 단절이라 하는 겁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메시아를 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만들어내요. 내가 제작해 낸다고요. 내가 구상해내요. 내가 구상한 메시아를 진짜 하나님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고 마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은 아버지와 관계하는데 우리 인간들은 그 메시아를 생각할 때 내가 메시아와 상관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메시아여, 그 혜택을 나에게, 당신을 믿는 나에게 혜택이 주어지게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나서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의 최종성을 스스로 벗고 탈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기로부터 단절되었다.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자기부인이 되지를 않으니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처럼 천국 가는 것도 자기가 나름대로 삶의 요령을 터득하는 거예요. 뭔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예수 믿습니다, 하는 것은 그게 본인 생각이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는 그 내용만 모집해서 그걸 자기가 믿는다고 우기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전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 해석하고 이해한 그러한 조각들을 모아서 ‘이정도 하면 얼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과 일치되겠지.’라고 자기가 이해한 그 예수를 자기가 믿겠다고 하니까 이것은 착각이고, 환상이고, 꿈꾸고 있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그것이 인간의 한계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예수님이 와도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봐서는 안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조치하신 거예요. 이스라엘 가운데, 유대인가운데,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 모신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이에요.

이사야 6장 9절을 보게 되면, 이사야가 사람들에게 외칠 때 여호와께서 미리 반응 결과에 대해서 미리 예언을 했어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렇게 하도록 이사야를 보내신 거예요. 이사야를 보냈다는 것은 이사야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껍데기는 이사야고 속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그냥 추진해 나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방문하실 때 하시는 모든 일은 뭐냐? 자기 백성이 깨닫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도록 일을 하신 거예요. 이거 일 잘 하신 거예요. 그래야 인간의 한계치가 드러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이해하는 메시아 아닌 것에 성공하시거든요. 하나님 쪽에서 말입니다. 인간이 이해하는 메시아 구원자가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가 틀어지도록 그렇게 일부러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세요. 어차피 인간에게 맞아죽어야 될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만약 알아본다면 말릴 사람이 등장할 것 아닙니까?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었고, 말릴 생각도 없었고, 아무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은 하나님의 차질 없는 계획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죽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어떤 인간도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 하는 결론을 분명히 내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은 대성공이었어요.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천국 갈 수 없다, 분명히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게 바로 죄이며 죄에 대한 대가는 맹렬한 진노 받아야 되지요. 진노 받아야 되기 때문에 긍휼이 오느냐, 안 오느냐 하는 것은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 긍휼을 얻어서 본인을 천국 보낸다는 그런 얍삽한 통박은 소용 없어요.

쉽게 말해서 교회 장사 다한 거예요. 구원 장사 다한 거예요. 신천지가 구천지 된 거예요.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이 세상에 있는 천국여행사 전부 다 문 닫아야 돼요. 다 사기꾼들이었습니다. 천국 보내겠다는 여행사들 다 사기꾼들 이었어요. 어느 누구도 사기꾼 아닌 자가 없어요.

그러고 난 뒤에 1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할 때 그냥 전하지 않고 이사야를 보내버려요.

이사야를 보내버리면 모든 이스라엘은 마땅히 다 잘려야 돼요. 10분의 1도 너무 많아. 그것도 잘려야 돼요. 다 잘리는데 “목사님, 그래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잖아요.” 하는데 그 그루터기가 외부에서 들어간 그루터기에요. 이사야에요 그게.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의하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거예요. 아들을 낳는 겁니다, 아들을.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진노하고 지옥 만드실 때 그냥 지옥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자기 아들을 예수님을 합류시켜서 지옥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이 세상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지옥이 되는 겁니다. 일체의 희망 없어요. 일체의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은 없는데, 다 죽었는데 부스럭부스럭 하면서 3일 만에 거기서, 그 지옥에서, 그 음부에서, 그 저주에서 사흘 만에 살아난 분이 계시다면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지요. 긍휼의 시작입니다.

바로 진노 속에서 긍휼이 나옵니다. 저주가 없으면 긍휼도 없어요. 죄 속에서만 의가 나오지 의가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서만 의가 있어요. 왜냐하면 유일한 죄를 아시는 분과 유일한 의인은 이 세상에 없고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분인데 언약의 연속성, 단절 없는 언약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다 잘리게 하시고, 모든 인간의 역사관, 시간관, 혈육적인 인식, 그런 것은 전부 다 하나님 앞에서 다 스톱되게, 끊어지게 만드시고 유일하게 이 땅 혈육에 속하지 않는, 이삭처럼 약속에 의해서 오신 그분을 언약의 연속성이라는 이름으로, 언약의 완성자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거두어내시면 비로소 그분에게 무슨 권한이 있느냐 하면,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권한이 오직 예수님밖에 없음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5장 20-22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아버지께서 심판하지 아니하고 모든 심판을 예수님에게 다 일임했어요. 일임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그 일에 근거해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 믿는다고 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든, 예수를 사랑하든, 예수에 대한 어떤 소망이 있든 간에 그 인간은 그 믿음 소망 가지고 전부 다 소멸해야 돼요. 사라져야 돼요.

사람이 안 사라지게 되면 그 동안 자기 안에 있는 사랑, 소망, 믿음이 자기 구원받는데 보탬이 된다고, 어떤 영향력이 있다고 계속 그걸 간직하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만약 교회에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교회 20년 있으면서 십일조, 헌금 낸 것 복리로 계산해보니 한 수천만 원 되었어요. 그런데 그 옆 사람은 지난 주 딱 한 번 나왔어요. 헌금할 줄도 모르고, 헌금도 안하고 그저 점심 먹고 가라고 하니 맛있는 황태국만 먹고 갔어요.

그런데 그 다음에 목사가 “두 분 다 나오지 마세요.” 할 때 공짜로 황태국 먹고 간 사람은 룰루랄라 아무 부담 없이 “안 나올게요.” 할 수가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기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것이 없고 아까운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 교회에 수천 만 원 헌금한 사람은 ‘날 무시하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일은 무슨 일이냐 하면, “너희들이 하는 이 땅 어떤 짓거리도, 사실은 너희들이 군말 없이 사라져야 될 죄인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그걸 참조해서, 그걸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는데 수월하게 구원할 수 있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 그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나 없이 아버지하고, 하나님 여호와 상대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일하지 않고 모든 선택권을,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여호와께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권을 나에게 맡겼다.”는 말이지요. “너희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나에게 맡겼다.”

그러면 너희들이 무슨 짓을 했든, 어떻게 했든, 세리가 되었든, 창녀가 되었든 일체 묻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사람을 아버지가 사랑한 것처럼 그냥 긍휼과 사랑으로, 그냥 그 사람을 건져줄 때 그게 뭐가 되냐? 긍휼이 돼요. 값없이 건지기 때문에 그 값에다 인간의 어떤 기대가 그런 것들이 섞이면 안돼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성령 받게 되면 이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살다보니 이런 희한한 일을 다 만나네.”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말이지요.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래. 천국 갈 때.” 다 준비해놓았다는 거예요. 결혼식 비용부터 살림살이, 가전제품, 그런 것은 신랑이 다 준비하지 신부가 새삼스럽게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그냥 죄 된 몸으로만, “저주받은 몸으로만 그냥 와 그냥.” 경상도 말로 기양, 기양 오라는 말이지요. 그냥. 그게 긍휼입니다.

“네가 그동안 예수를 믿든, 여호와를 믿든, 삼위일체를 믿든 뭘 해도 나는 그걸 잘했다고 이야기 안하겠다. 그렇게 이야기 못하겠다.” 긍휼. 신학박사 돼야 구원받습니까? 남은 자라는 것은 예수님뿐이에요. 그래서 남은자는 어떤 자가 남은자냐 하면, 진노 그리고 긍휼의 영역까지 넘어가신 분이 유일한 남은 자에요.

우리가 남은자를 이렇게 오해합니다. 전체 가운데서 일부를 남기고, 즉 일부는 구원되고 나머지는 잘린다. 그러면, 같은 동질의 전체가운데서 일부는 잘라내고 일부는 남겨주게 되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하나님이여, 마저 구원하지요. 우리 구원해주는 것은 기분 좋은데요 저 사람은 왜 버리십니까?” 이렇게 항의가 들어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남은 자가 아니에요. 남은 자라 하면 하나님하고, 말씀하고 자기하고 직접 상대하지 말고 중간에 십자가를 집어넣고 이해해야 돼요. 예수님 빼놓고 남은자가 없다 이 말이지요. 남은자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어떤 장면이 있느냐?

어떤 꼰대가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는데 같이 있던 아가씨가 머리색깔이 검은색인데 꼬리부분은 얼룩덜룩 금발로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꼰대 주인공이 소고기 사준다고 데려가서 고기 자르는 가위를 가지고 꼰대질을 하면서, 도저히 못참겠다, 하면서 꼴 보기 싫다고 아가씨가 딴 짓 하는 사이에 그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남은자라 하는 것은 잘리고 남아 있는 것을 남은자, 영어로 레멘트(remnant)라 해서 그걸 남은자라 하는데 성경의 남은자는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어떤 남은자냐 하면, 어떤 자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긍휼 쪽에서 새롭게 긍휼에 의해서 생겨난 자, 그게 남은자에요. 이 세상 어떤 자도 남아질 어떤 자격이 없음, 이미 다 잘려야 됨을 보여주는 남은자.

로마서 11장 6절에 그게 나와요. “만일 은혜로 된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엘리야가 3절에서 나만 남았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4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5절에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은혜로 남은자지요. 그 은혜라는 말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행함이 아니고 은혜, 행함이 아니고 은혜. 다시 말해서 행함의 주체에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고, 은혜 주신 분의 주체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남은자가 있다는 겁니다.

행함 같으면 행함의 주체자가 인간이겠지요. 행함이 아니라는 말은 인간이 주체자가 아니고 따로 인간 본인의 행함에 의해서 남은자 되는 것을 일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저지하시고, 밀어내시고 오직 그 빈자리에 주체자 이신 메시아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로 주신 자들만 구원되기로 남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된 자가 이 땅에서 살아 있으면서 소명이 있고 사명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었습니다.” 그걸 알리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는 이유가 생겼어요. 이제는 사는 이유와 사는 가치가 예수님 때문에 발생된 거예요. 이 말은, 전처럼 나로 인하여 나 잘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이유와 가치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봐주지 않고 배격시켜 버립니다.

죽어서 없어져야 되지만, 나는 지금 늙어 죽어 없어지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저에게 해주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 은혜에 담긴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되었음을 알려주는 그 사명 감당하면서 우리는 세상과 더불어 같이 사라지고 있는 겁니다.

끝으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성경에 보게 되면 또는 세상 보게 되면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메시아닉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인데 예수 믿는 이스라엘,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런 이스라엘, 메시아닉 이스라엘, 또는 메시아닉 유대인이라 해서 미국에도 있고, 이스라엘에도 있고 많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신앙을 펼치는 거예요.

돌감람나무, 참감람나무, 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라 하는데 그 사람들은 뭘 모르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의 연속성으로 보지 않는 거예요. 언약의 연속성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는 역사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가 연속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역사로 전환되고, 그 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한 끊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게 역사를 작살내기 위해서 줬다는 것을 몰라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 사람들은 옛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안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뭘 모르냐? 그들이 말하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나타난 그 역사안의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은요, 그 역사의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적인 이스라엘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런 세상적인 이스라엘은 에베소서 2장 15절에 보면 완전히 십자가에서 막혀버려요. 모든 인간의 역사는. 왜냐하면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육체로. 예수님이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몸은 죽은 몸이고 그 죽은 몸이 갖고 있던 역사관도 이것은 허구적인 역사관이에요.

죽어 마땅한 엉터리 역사관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역사의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고, 인간의 시간의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어떤 역사도 죄 아닌 역사가 없어요. 따라서 그 역사를 따진다는 것은 눈으로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현재 이스라엘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돌아오면서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면 “봐라. 이스라엘이 회복되잖아.” 이렇게 보는데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인지 아닌지 dna 조사를 해봤어요? 잡종인지 어떻게 알아요? 자꾸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를 증거 하는 용도가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덩치, 역사적 덩치가 마지막에 예수 믿겠다고 돌아오게 되면 역시 성경은 진리야 그걸 믿고 싶은 거예요.

성경을 믿고 싶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는 역사관에 의해서 뭔가 확인되는 그 지식을 내가 믿는 것으로 내가 구원받았다고 자꾸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방금 이 부분 이야기한 것은 지금 한국의 모든 성경해석이 눈으로 보고 믿겠다는 식의 그 해석, 그 해석과 같은 해석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여전히 십자가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죽어 없어지고, 나의 한계는 역사를 알든, 무슨 공부를 하든 그것은 구원받는데 아무 보탬이 되지 못한다. 오직 십자가의 일방적인 사랑, 무조건 사랑의 긍휼의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기 때문에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 하는 것이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연속적인 언약적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 당해야 된다는 것은 역사를 살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이미 확연하게 확정된 사실인 것을 저희들이 받아들여서, 이제는 마땅히 지옥 갈 저희들이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는 그것만 자랑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44강-호 11장 8-11절(은혜로남은자)200603-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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