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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5 21:13:39 조회 : 148         
수련회 교재 이름 : 서경수(IP:211.197.182.6)
천국의 틈

- 룻 속의 그리스도-

Ⅰ 서 론


1. 세상에 대한 정중한 진단

욕망은 바람직하고, 사회는 개선될 수 있으며, 지식은 진보하고, 끝없는 욕구로부터 선(善)이 나온다. 사탄은 은유에 불과하며, 마음속의 악은 오류에 해당되고, ‘사적 악덕’은 ‘공적 혜택’으로 보충한다.

욕망은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고, 재난은 자신감을 키우고, 변덕스러움은 절대기준에 대한 야유며, 종교는 상업으로 대체하고, 진리는 일개 견해가 되고, 구원보다는 실리가 우선이고, 가장 좋은 일은 내가 잘사는 것이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시73:12).”

2. 언약 속의 인물상

이런 세상과는 달리 언약 안에서의 인물은 언약 밖의 인물과 비교할 수 있다. 언약 안의 인물은 자기 계몽이 없다. 반면에 언약 밖의 인물들은 자기에게 몰두하고 독자성에 취해 산다. 비순응성의 풍조가 관례가 되고 자기 몰입을 높이 평가한다. 타인을 보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면, 적어도 나는 저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는 결의를 통해 자기를 규정한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남성 아이콘의 우상화이다.

의심스러운 것이 확고한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되고, 불완전한 것이 완결된 것보다 낫고, 거친 것이 부드럽고 순한 것보다 먼저요, 유난 떠는 것이 꾸준한 것보다 더 사랑받는다. 유동성, 분투와 노력, 변하기 쉬움은 모두 새로운 두근거림으로 다가온다. 이런 것들이 개인적으로 마주치는 딜레마를 극복하는 요령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란 모두들 자기 개량에 나선다는 점에서 합의를 이룬다. 극히 개인적인 것들이 공적인 사항이 된다. 하지만 언약 속의 인물상에서는 이러한 한도를 넘어서 예견하지 못한 것이 나온다. 창조성이 개인주의를 무시하고 헤집고 나오는 것이다. 언약에서 나오는 창조는 천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3. 문명은 발전인가 이면(裏面)의 노출인가?

세상은 건설적인 것이 아니라 징벌적이다. 파국을 맞을 이유를 스스로 말해야만 한다. 노아 홍수 이후, 무지개의 등장이 바로 이점을 알려주는 감시용이다(모든 것은 무지개 아래 갇혀 있음). 감시는 편재적이다. 무지개 아래에서 바벨탑 건립은 저지당한다. 세상이 휴식에 들어갔다는 말이 아니다. 새로운 감시자가 따로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즉 무지개 취지가 가려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등장은 언약의 살아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 무지개 아래서 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펼침을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즉 인간에게는 유의미한 자기 결정권이 없다는 말이다.

땅에서 우러나는 비언약적인 내용은 제거의 표적으로 철저하게 지배받는다. 이 언약적 조치는 땅으로 쏟아지고 전개된다. 언약의 개입으로 저주와 축복이 가려지고 등장하고, 저주는 축복을 보여주기 위해 종노릇을 해야 한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창 9:25-26)”

종교가 되었든 문명과 문화가 되었든 모든 것은 언약 아래 종이 되어야 한다. 정신세계가 아무리 표피적으로 확장되어도 내부는 한결같이 굴욕적인 신세가 되어야 한다. 뭘 해도 불모적이고 암울하다. 그곳이 악마가 의도한 세계다. 인간은 공포를 걷어내기 위해 자기들끼리 결합을 도모한다. ‘대중(大衆)’이라는 이름으로. 자치적이고 자발적이다.

4. 전체에서 개인으로

인간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태어난다. 신체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출생의 의미가 아니라 선재하는 아버지의 존재와 그 정신적 성격 안에서 태어난다. 태어나면서부터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통일된 체계를 자신의 출생을 통해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 존재로서 ‘개인상’은 살아가면서 거꾸로 찾아나서야 가능하다. 이미 바깥세상은 나를 교화시키는 데 치중한다. 곧 ‘아버지의 이름’의 재현, 혹은 반복 작용이 한창이다. 자립적인 ‘어른’이 된다는 말은 세상과의 대결에서 고된 시달림의 결과이다. 세상은 진공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 쥐게 되는 것이 ‘어른’으로서의 삶이다. 예견된 희열과 나만의 자유는 세상에 눌려 현저하게 자신감이 상실된 상태다. 그럴수록 더 챙기고 싶은 것은 ‘자기’다. 자기애는 상상의 결과다. 자기를 사모하는 것이다. 살아남는 게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자기애는 강렬하다.

그러나 자아를 유일하게 받드는 신체는 덧없이 망가진다. 자아의 말을 듣지 않고 조금씩 허물어지고 변형된다. 마지막 기댈 자연물은 소실되고 흩어지는 것은 ‘기억의 편린’뿐. 자연의 쇠퇴함이 자아의 일관성을 이긴다. 나의 욕구가 맥을 추지 못한다. 끝까지 의지할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개인이나 전체나 죽음이 대신한다.

5. 잘못 없는 죽음

인생이 증발하면 죽음이 된다. 흘린 눈물은 경솔하고 튀는 색조는 천박하다. 죽음의 도움이 필요하다. 죽음이 와서 내게 목줄을 걸고 매일 같이 뛴다. 시간이 만든 관이 저만치 다가온다. 죽음 속으로 내가 사라진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내 안에서 흐르는 것이다. 죽음이 현실이지 내가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시간에 잘못이 없듯이 죽음에도 잘못이 없다.

언약은 죽음과 연계한다. 시간 안에서 언약은 유효하다. 언약을 맞이하고 고개 숙이고 굴복해야 한다. 나의 어떤 알리바이도 소용없다. 시간은 나의 말을 듣지 않듯이 언약도 나의 말을 안 듣는다.

시간은 특별한 인물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을 실어 나른다. 시간 안에 그분의 죽음을 위하여 소멸의 자리를 마련한다. 그 소멸된 공간은 빈자리(공백)로 나타난다. 진리는 공백에서 피어난다. 그래서 끝없이 미완결적이고 무한한 세계를 엿보게 한다.

이로써 죽음은 우리에게 ‘자리 비켜라’고 한다. 진리는 죽음과 통하는 것이다. 우리를 제친다. 진리를 가리는 것에 대해서는 재난이 야기되고, 하나님의 이름, 거룩의 이름으로 테러가 자행된다. 이 공백의 자리에서 나오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잘못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공백을 막아설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인간에게는 ‘죽음’ 외에 달리 지킬 것이 없다.

인간은 기존의 언어로 이 십자가에 맞서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구분과 대립이 사라진 장소, 존재라고 볼 수 없는 사건이 언어의 땅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를 선언하는 순수한 이름(언약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자리다. 이때의 존재 형식은 공백이다. 언어는 이러한 공백을 포착하기에 무능하기 때문이다.

6. 해석의 오류

인간의 폐위(廢位)는 그동안 진리 점유에 대한 폐위로 이어진다. 이 폐위를 인정한다면 그동안 인간들의 해석 규칙에 속아 넘어가자. 이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도리어 방황하게 된다. 인간이기에 같은 인간들에게 충분히 속자. 그리고 그 속임수에 본인이 충성스레 기여했음을 인정하고 빠져나와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가지고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구원의 질서를 다듬어 나가는 것을 지켜보셨고 그 허위성이 극단에 이르도록 아들을 보내시어 죽음을 당하게 하셨다. 도대체 인간 속에서 어떤 가짜가 활동하는가?

인간의 몸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휘감긴 계시 사건에 의해서 ‘육화한 몸’으로 다루어진다. 진리가 등장하는 것이 ‘인간의 몸’으로 이미 고정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일한 몸들에서 상충되는 해석이 나오도록 언약이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해석이 치열하게 싸운다.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세밀화된다.

같은 편이라고 여겼는데 언약의 추가로 인해 여지없이 차이가 발생한다. 진리는 이 차이에서 얼굴을 내민다. 무한한 차이를 유발하는 실체는 최종 ‘육화된 몸’을 통해서 확정된다. 세상은 그분을 죽였다. 이로써 오류로 넘치는 환경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예외자로 빼놓을 수 없다. 바른 해석이란, 자신을 가짜로 규정하게 하는 해석이다. 이것이 사랑이요 긍휼이다.

7. 사랑의 해석

뭔가를 준다 해도 주지 않는 이가 됨으로써 사랑할 수 있고, 뭔가를 받는다 해도 받지 않는 이가 됨으로써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단지 어떤 것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빈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내 것이다’라고 가져갈 게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다. 사랑은 출현하는 구멍만 쳐다보게 한다.

사랑은 ‘만남’에 의해서만 창설된다. ‘만남’을 대외적으로 입증할 수 없게 하는 ‘만남’이다. 해석이 불가하게 만드는 흔적, 덧없이 사라지는 흔적만을 남기는 ‘만남’이다. 매사 나를 오류자로 덜렁 남기게 하는 ‘만남’이다. 이런 예상치 못한 결과를 성도된 자만이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모든 기존의 해석과 규범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처럼 주님과의 만남은 파괴를 미리 본다.

그래서 준 것도 없이 사랑을 알고, 받은 것도 없이 사랑을 안다. 이 사랑의 지배로 인해 이 세상은 그저 ‘빈자리’에 불과함을 안다.


Ⅱ. 본론

1. 줄거리

사사 시대 때 룻 이야기는 약속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떠나는 이유는 흉년 때문이다(1:1). 어쨌든 엘리멜렉 가문은 일단 이스라엘과는 인연을 끊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인연을 끊은 엘리멜렉 가문이 모압 여인 룻으로 말미암아 다시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4:10), 그 이어짐이 다윗의 출생과 연관이 있다. 이것은 다윗의 출생이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사사 시대는 인간의 자의적 행위에 대하여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18:1, 19:1, 21:25).”는 형식문이 나열되고 있다.

엘리멜렉 가문의 이러한 결정 또한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긴 대로 행동에 옮긴 비긍정적 태도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일어난 그 가문의 몰락은 나오미(기쁨)라는 이름을 가진 시모(媤母)가 마라(괴로움)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할 정도로 심한 충격 속에서 돌아오게 했다.

나오미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배후에는 여호와께서 분명 개입했다고 믿고 있다(1:20-21). 그리고 나오미는 그 여호와를 ‘전능자’라고 부르고 있다. 즉 자신의 소원을 거절하고 여호와 자신의 의도를 위하여 우리 가문에 그런 사태를 발생시켰다는 점에서 ‘전능자’로서의 새로운 의미가 그 가문에 부각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몰락의 와중에서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노렸는가? 그것은 이방 여인 룻의 개입이다. 그녀는 어머니 나라가 자기 나라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곧 자기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나선다(1:16). 도대체 룻은 나오미의 일생을 통해 여호와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녀는 분명히 시가(媤家)에서 일어난 사태를 불행의 측면에서만 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되는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 특성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과의 언약의 진실성과 관련되어 있다. 즉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가문은 끊어지지 않게 섭리할 것이라는 기대감이다(2:20).

엘리멜렉 집안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단순히 가문에 관한 사항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언약의 구현에 관한 문제까지 연결된다. 룻은 바로 이 사실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미미한 자기를 통해 언약은 어떻게 성취의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이 점이 그야말로 여호와께서 전능자라는 인식이 제대로 구체화 되는 열쇠가 된다.

다윗의 등장은 전능자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4:22). “하나님은 왕이시라(엘리멜렉)”는 이름을 지닌 가문은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1:11-13/2:20/4:8-12,14) 보아스의 가문에 흡수되지만(4:9,21) 사람들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4:17)”고 이야기한다.

인연이 끊어진 엘리멜렉 가문은 이방 여인 룻이 다리가 되어 다시 언약 안에서 태동하는 가문으로 회생한다. 신앙적으로 타락한 사사 시대였지만 여호와의 전능하심은 자신의 언약에 대한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역사 안에 맥이 이어진다. 여기에 동원된 것이 이방 여인 룻이다.

다윗의 등장이 진정한 왕으로서의 여호와의 모습을 비춰주는 데 있다면 그 출생의 배후에는 오래전부터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의 손길이 이미 닿고 있었다. 아무리 시대가 악하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왕 되심은 중지되지 않았음이 룻을 통해 증명된 것이다. 이방 여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신 그 자체가 이미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이다.

2. 사사 시대의 언약적 특이성

흔히 쉽게 여기기를 그들(이스라엘)이 곤란에 처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겨 카리스마적인 사사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는 전문가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사기 2:14, 2:19-23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모세 율법(언약)의 완성에 있다.

정복된 땅에 이스라엘이 들어섰을 때 그들은 그 땅의 생리를 알아야 했다(여호수아는 모세 사역의 연속으로 모세에게 예속된 인물로 봐야한다. 수11:15/ 12:6/ 22:5). 하나님의 관심은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걸맞은 약속의 백성이 되기를 갈망하고 계신다. 이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만이 요구되는 곳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대로 망하게 되어 있다.

약속의 땅에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언약이다. 사사 시대의 지파 동맹체제에서도 제단은 존속되었다(19:18/ 20:18).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사사 출현의 원천을 설명해 준다.

즉 약속의 땅을 평정하고 언약의 백성을 고수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열국을 다 추방하지 않고 이스라엘 주변에 배치한 것이다(2:22-23).

맨 처음 이스라엘이 이 땅에 들어와서 한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여호와께서 ‘붙이시매’ 이긴 전쟁이었다(3:1-2,10,28).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들의 전쟁의 전형(典型)은 기드온 전쟁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여호와와 바알의 전쟁이었다(6:28-32). 즉 현재 이스라엘이 바알의 세력 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의 힘이 아닌 것으로 바알 세력을 친다. 많은 수가 필요 없었다(7:7-8). 적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지만 기드온 부대는 항아리를 깨고 횃불을 들고 고함치면서 나팔만 불어댔다. 기드온은 자신이 여호와 편에 서는 그것으로 여호와의 칼이 된 것이다(7:20). 이상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사의 활동으로 미루어봐서 여호와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이 땅에서 유지하는 데 있었다.

카리스마적인 인물인 사사들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언약을 위해 일했다. 그들은 결코 율법에 순종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율법의 순종 여부로 시비를 걸 수 없었다(예를 들면 삼손 같은 경우). 율법과는 별다른 체계 안에 그들은 놓여 있었다.

그 체계는 인간들로부터 지명받아 지도자가 되는 수순을 벗어난 체계이다. 그들의 등장은 인간들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언약이 이루어지며 다만 인간들이 이방의 학대에 못 이겨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비로소 등장한 자들이기에 그들의 등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뜻을 돌이키심)과 관련된다(2:18/ 3:9,15/ 4:3/ 6:7/ 10:10).

약속의 땅에서 율법 외에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기 보다는 율법을 비치고 있는 보편성에 기인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기 이전에 먼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그들을 건졌다는 것이 선행한다.

율법은 바로 이러한 정신을 구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출20:2/ 신5:5,15/ 삿6:8,13). 그때 그들은 여호와께서 부르짖었기 때문이다(출2:23/ 3:7). 여기에서 자기 백성이란 여호와를 향하여 부르짖는 백성이라는 표상을 가진다. 여호와는 부르짖는 자의 편에 서서 싸우시는 것이다(삼상1:10-11/7:8). 이스라엘의 참전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자기를 부인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사사들의 일은 이스라엘에 위기가 닥칠 때 이스라엘 자체로서는 구원에 관해 전혀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반대로 쉽게 성공을 거두어 버리는 일을 한다. 그 승리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고 있는 진정한 왕이 존재했음에 있지 않을까? 바로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은 그 배후의 왕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선택된 자들이었다.

즉 율법보다 선택이 앞서는 것이다. 율법의 정신도 여기에 종속되는데 무조건 선택에 관한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출20:1-2). 이스라엘에게 따로 왕이 필요치 않은 것은 그 땅의 왕들을 여호와께서 홀로 통합해서 다스리는 왕이 되시기 때문이다(4:23-24/ 8:12).

왕이 없는 이스라엘(17:6/21/25)이 왕 가진 집단을 진멸한 것은 인간 왕의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에 준하지 않는 왕과 백성 사이에는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다. 즉 양측이 다 책임지는 상태에 놓여 있어야 한다(출24:6-8). 따라서 사사의 등장은 언약의 위배됨을 알리는 경고 조치이다.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는 시점은 백성들이 선지자에게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했을 때(삼상8:4-9) 하나님은 그 행위를 마치 자신(여호와)을 버리고 우상을 찾는 것과 동일한 행위로 간주하신다(삼상12:19). 그렇다면 여기서 그것을 고발하는 새로운 사사가 등장해야 한다. 그것이 사사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구원자, 곧 ‘이방인 + 율법 없는 여인’의 등장이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 1:5-6)”


Ⅲ 결론

성령의 시대인 오늘날의 성도들이 사사요, 룻이다. 자기 이름은 없고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만 존재하고 움직이는 자들이다. 이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활동은 재현되고 세상 끝까지 확대된다.

되돌아보면 벌써 현장에서 사라져 버린 국지(局地)적 인물들이다. 누구에게도 승낙받을 필요 없는 삶이다. 이런 점에서 창조를 닮았다. 창조는 후(後)에 온 것들로 마저 채워지는 것이다. 도리어 창조 중심핵을 채우고 막고자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악(惡)이다.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충동이 악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스스로 창조주이어야 하기에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만 꽉 채워서 완전체로 행세하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언약이란 악을 노출시키고 그 악을 처리한다. 정말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허약한 존재, 룻을 통해 이 사실을 알려주신다.
 이근호(IP:119.♡.87.190) 20-06-10 12:30 
서론, 5번과 6번 사이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로 첨부 되었습니다.
 인간은 기존의 언어로 이 십자가에 맞서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구분과 대립이 사라진 장소,  존재라고 볼 수 없는 사건이 언어의 땅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를 선언하는 순수한 이름(언약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자리다. 이때의 존재 형식은 공백이다. 언어는 이러한 공백을 포착하기에 무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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