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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6 00:40:25 조회 : 79         
200824 여수특강, 인자의 형상(에스겔 1장, 10장) 2강, 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200824 여수특강, 인자의 형상(에스겔 1장, 10장) 2강, 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하나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형상 없는 형상. 보통 형상이라 하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형상 없는 형상. 형상 없는 형상이니 이것이 뭐로 나타내요? 그냥 기능으로 나타내지요. 인간은, 자연세계의 일부인 인간은 항상 일을 할 때에 형상을 그리면서 생각을 해요. 모양을 그리면서.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는 이유가 이거예요.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없어져 버려요. 반대로 형상 자체를 깨버려요. 형상을 깨버린다고요. 형상을 깨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모든 형상을 깨버려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형상을 깨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된 본질적 기능이 된다는 겁니다.

그 말은, 우리는 형상이 없으면 죽어 흙이 되어야 하는가? 자, 인간이라는 것이 형상이 있잖아요. 인간의 형상이라는 것이 나중에 뭐가 됩니까? 흙이 되지요. 중간에 흙이 되기 전에,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인간은 죄인의 형상이 되어야 돼요. 인간형상에서 죄인의 형상으로 되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 죄인의 형상에 누가 합류하느냐? 형상 없으신 분이 죄인의 형상에 합류가 되어버려요. 하나님 자기영광 받는 그 절차와 과정에 본인이 쑥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회사 회장님이 포장부에 와서 노동자와 같이 일하는 거예요. 그것처럼 아무도 회장님을 몰랐지요. 아무도 회장님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일해 버리면 회사 회장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노동자들의 세계지요.

그러나 회장이 마지막 포장부에 거기 끼어들게 되면 모든 앞에 있는 제품의 절차가 누굴 위함이냐 하면, 회장님 본인을 위한 절차로 전환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죄인으로 인정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들아, 그런 말도 있잖아요. “영광으로 알아라. 이것들아!” 하듯이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아는 이것은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입니다.

왜냐하면 감히 주님이 하는 절차에, 주님이 먼저 인간 속에 들어왔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주님이 들어온 그 모습 속에 우리가 감히 합류가 되었다는 이 영광스러움, 주님의 죽으시는 그 고귀한 가시는 길에 감히 우리가 합류가 되었다는 겁니다. “임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우리가 거기에서 무슨 자격으로 같이 동행이 됩니까? 최 성수의 <동행>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어쨌든 동행을 하게 된 거예요. 주님 가신 길에.

그 주님의 이름이 뭐냐? 인자잖아요. 풀이하면 무엇의 아들? 사람의 아들. 사람의 아들도 아닌데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는 그 말이거든요. 내가 사람의 아들 될 이유도 없지만 사람의 아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사람의 아들로 여겨온 것은 사람이다, 아니다?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의 형상이 아니고 자기를 뭐로 봤다는 말입니까? 자기를 인간으로 봤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신으로 봤다는 겁니다. 나를 신으로 본 인간들은 내가 용서하지 않고 전멸해버린다, 저주해버린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관성이 에스겔에 묻어 나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 자신의 형상됨을 이 지상에서 가시적인 형상으로 주신 적이 있어요. 그 이름이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이 인간을 관여할 때 이 자연세계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뭐냐? 무엇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느냐? 아버지와 아들의 그 사이, 그 관계, 그 연결, 이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좀 보여야 되는데 전혀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관계에요.

제가 지난 오후 설교에서 한 것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문제를 던져보겠어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했지요.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을 연결해 보세요. 이게 연결이 됩니까? 연결이 안 되지요.

십자가는 과거에 한 번 지나가 버린 사건입니다. 그래서 보인다는 말이 성립이 안 됩니다. 그것도 ‘보인다’를 강조하기 위해서 앞에 뭘 넣었습니까? 밝히 보인다. 밝히 기억하고 있느냐,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마세요. 밝히 보고 있다는 겁니다. 밝히 보고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형상화 된 거예요. 기능화 된 거에요. 기능화.

이것을 제가 수련회에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초과적인 것이라고 했지요. 초과적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초과적인 것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 영적 사람이 되는 겁니다. 본인이 본인을 설명을 못해요. 성령 받은 사람은. “나도 몰라.” 왜 내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후설교에서는 이렇게 했잖아요. 주님한테 고백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고. 저는 이렇게 바뀌어진 것을 이야기하라고. 내가 아는 것 말고 “전에는 내가 이렇게 나를 알았는데 지금은 그 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라는 그 바뀐 부분을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하는 것. 이것은 내가 스스로 나를 달라지게 한 것이 아니겠지요.

내가 내 달라짐을 설명할 수 없는 그 부분을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그래야 그 초과적인 것은 누구 몫이 됩니까? 찾아오신 주님이 개입의 몫이 되는 거예요. 인자처럼, 에스겔처럼. 그러면 죄인의 형상이니까 죄인의 형상에서 죄인은 필이 저주받아, 벌 받아 죽어야겠지요. 죽는 형상이지요. 인간들의 목적은 뭐냐? 죽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사는 게 목적이에요.

인간들이 말하는 인간형상과 죽음의 형상과는 충돌이 되고 대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땅에 내가 온 것은 죽고자 왔고 그 예수님 외의 모든 인간은 살고자 하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도 예수님 배신한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더 살고 싶다는 겁니다. 더 살고 싶다. 그러면 형상은 모양과 모양의 대결이 아니고 목적과 목적의 대결 방향과 방향의 대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의 방향, 추구하는 것은 살고 싶다. 예수님은, 나는 죽어야 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나는 죽어야 된다. 그러면 결국은 주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죽음이 살아 있는 것이고, 인간은 살아있는 것이 곧 죽는다는 뜻이고,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죽음 자체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케 하는 거예요. “너 지금 죽은 자다. 어차피 죽을 것이지만 지금 벌써 죽었다. 어찌 기쁘지 아니하냐.” 이런 거예요. 내가 지금 죽어 있다는 사실, 포도를 먹어도 죽었다는 사실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냐? 우리는 포도를 먹을 때 살려고 먹는데 성도는 그게 아니고 포도 먹어도 나 죽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먹는 거예요. 뷔페를 먹든지 뭘 먹어도. 어찌 신나지 아니한가? 뭘 해도 죽는다는 이 축복을 마귀가 와도 변개하지 못하니까.

내가 주님의 길에 동참했다는 것,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이 사실을 어떤 환란이나 곤고, 코로나 아니라 뭐가 와도 이게 변하지 않아요. 아이스크림 먹어도 안 변해요. 사우나 가도변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390일 동안 모로 눕고, 그렇게 해도, 그렇게 했다고 해서 에스겔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에스겔은 이미 자기는 인자의 형상이기 때문에 자기는 이미 마땅히 포로 잡혀야 되고 마땅히 이스라엘은 멸망되어야 된다는 것을 미리 당겨서 아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 9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을 표시하는 것이 나와요. 4절에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즉 “예루살렘에서 멸망하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이마에 표를 해라. 그 사람만 살 것이라.” 이 세상은 마땅히 전멸당해야 돼, 라고 인식하는 사람, 이게 나중에 구원될 사람이고 나머지는 끝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왜 멸망당해야 되고 왜 저주받아야 되는가? 인자와 연관성이 끊어졌기 때문에 진짜 이 우주의 주인공, 중심 되는 분과 관계성이 끊어졌어요. 끊어지고, 인간이 세상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자기라는, 나라는 우상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해버리는 것, 그걸로 달라졌거든요. 우리는 그걸 보고 섬뜩해야 됩니다. 인문학강좌에 나오는 소위 공부 좀 했다 하는 사람이 강의할 때 우리는 소름이 돋아야 돼요.

‘저 마귀 봐, 저 마귀.’ 무슨 혜민스님인지 뭔지 나와서 멈춰야 보인다나? 멈추면 뭐가 보입니까? 멈춰야 보인다는 그런 소리, 저게 마귀 소리거든요. 섬뜩해야 돼요. 어떤 식으로 살고자 하는 그 소리가 전부다 악마의 소리입니다. 여기까지 여러분이 아신다 치고 그러면 어떻게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가, 그걸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요, 중첩된 나라에요. 어떤 것이 중첩되었는가? 땅과 하늘, 이게 중첩된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들어온 하늘의 요소가 뭐냐? 율법이 들어왔습니다. 그 인간들은 철저하게 육신적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내부가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닥뜨리면서 굉장히 심한 불일치를 보여주는 기능, 그 기능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기능과 동일하지요.

하나님으로 왔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로부터 밉상당하고 거부당하는 하나님, 하나님을 모를 것 같으면 거부 안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그것 때문에 거부당하는 하나님, 그것도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다 거부당하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거부를 어떻게 뚫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완성시키느냐?

에스겔 11장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주의 신이 성읍을 떠나요.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을 떠납니다. 에스겔 11장 23, 24절에 장에 보면 떠나갑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

그랬다가 에스겔 43장 4, 5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44장 4절에도 나와요.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지라.”

동쪽문은 하나님의 성신이 들어오고 에스겔은 북문으로 들어와요.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스라엘을 다시 만드느냐? 보게 되면 성신이 이미 범죄 한 예루살렘을 떠나버려요. 하나님의 문지방에서 떠나서 성전 입구에 있다가 떠날 채비를 합니다. 에스겔 9장 3절에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그러니까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청와대가 부산으로 피난을 준비한다는 겁니다. 가장 중심 되는 것이 떠나버리지요. 그러면 성전의 성전 됨이 건물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느냐? 어느 조건이 성전 됨의 조건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야 그게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고린도전서 3장이나 6장에 보게 되면 우리의 몸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고 했지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에스겔 1장과 10장에 보면 그룹들, 천사들의 바퀴가 있지요. 바퀴가 부지런히 이동합니다. 쉬지 않고 일하지요.

이동해서 뭘 만드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 만들기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이스라엘을 심판하면서도 성신까지 심판하면 안 되잖아요. 성신으로 하여금 적절하게 다시 들어올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천사들이 일하면서 만들어주는 거예요. 성신께서, 신약에서 성령이지요, 성령께서 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원리는 간단해요.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자와 부딪혀서 깨어지면 그 깨어진 현장이 성신이 임하는 현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안 죽으면, 안 죽고 그냥 고난이나 받고 끝나버리면 왜 주의 일이 안되느냐 하면, 주님이, 육신이 완전히 죽어버려야 그 다음에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부활이라는 것이 있게 돼요.

부활, 다시 사는 것이 있어요. 십자가에 죽게 되는 것도 성령께서 하셨고, 부활하게 하신 것도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자체적으로서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면 자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일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개인에 의해서는. 예수님은 더 이상 인자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자가 아니고.

인자라는 말은, 사람의 아들이니까 죄인, 죄인의 모습이지요. 기능은 이 땅에 와서 형상이 됩니다. 어떤 형상? 죄인의 형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모든 몰골과 그 허약한 육체와 아픔을 느끼는 이 모든 것은 죄인이 갖고 있는 감각을 그대로 다 갖고 계시는 겁니다. 배고프고, 기도하면서 힘들어 하시고, 뺨 때리면 아파하시고, 이 아프면 밤새도록 이 아파하는 이것은 전부 다 육신의 한계를 주님께서 보여주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0장에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지요. “네가 만질 몸이 아니다.” 이제는 네 육신과 내 육신이 접촉할 수 있는 그게 아니에요. 초과적이에요. 아, 이것은 다음 주 낮 설교 할 건데 거기 보면 우리 몸이 영광스러운 몸이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은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께서, 없는 형상이 죄인의 형상이 되었지요.

그러면 죄인의 형상이 되었다는 말은, 이것은 우리 죄인 된 몸이 영광스러운 몸이 될 수 있는 바탕이 확정된 거예요. 어쨌든 간에 우리가 죄인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눈치 채야 됩니다. 그게 수에요. 우리가 죄인이 형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땅에 살아가고 회를 먹든지 포도를 먹든지 뭘 먹어도 이게 뭐가 된다?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뭐가 된다? 죄인임을 아는 그게 바로 성도의 기능이에요.

‘오늘 목욕탕에서 목욕한번 해볼까?’ 그게 죄거든요.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목욕탕 왜 가느냐? 죄인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아, 깨끗한 죄인 봐. 오늘도 때를 확 벗겨서 깨끗하고 가벼운 죄인, 한 달 묵은 죄가 다 벗겨진 가벼운 죄인. 아, 좋다! 이 죄인.’ 이런 것.

성도의 할 일은 평생토록 뭐만 발산하면 됩니까? 죄만 나타나면 돼요. 죄만. 죄만 드러내면 돼요. 아, 어려워요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자기 의가 자꾸 방해해요. 구차한 변명과 핑계가 자꾸 방해합니다. 남들에게 안 지려고. 사람의 악마적 본성은 뭐냐 하면, 완전히 게임판으로 생각해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가 자살할지언정 남에게 지기는 싫다.’ 이게 인간의 자존심이거든요.

‘너한테 지느니 차라리 죽겠다.’ 이게 인간의 자존심이에요. 죄인 되기 싫은 거예요. 기어이 할 말이 나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주일 낮 설교로 이야기하면, 내 안에 율법 지킬 요소가 아직도 있다는 거예요. 이걸 간직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죄인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착한 일도 했잖아.’ 하는 이것. 율법을 지킨 적이 있다는 그 기억을 나의 최후로,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보루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디를 공격하겠습니까? 성도라면 성령은 어디를 공격하겠습니까? 어디를 공격해야 십자가의 취지가 살아나겠습니까? 내가 마지막 지키고 싶은 자존심을, 그걸 죄로 만들어버릴 때 그게 바로 내 안에 쑥 십자가가 들어온 거예요.

이거 진짜 없으면 나는 진짜 살 이유가 없다, 하는 그 지점, 그 지점에 쑥 십자가 사건을 터트려 버립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힘들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연결시켜 주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기 전에 우리 안에 우리의 성전은 뭡니까? 나를 고이 모시는 성전이 뭐겠어요? 그게 바로 에스겔에서 마음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음 안까지 뭐가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새언약이 들어오는 거예요. 에스겔 17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음속까지 주께서 들어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양심, 또는 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그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나의 의가 들어있고, 내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올시다, 비록 내가 사람은 열두 명 죽였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었다, 사람 죽이되 약 먹여서 죽였지 칼로 난도질 한 적은 없다, 이런 식으로 끝까지 나도 인간다움이 있다는 것. 인간다움이 있으면 안 되는데 자꾸 ‘그래도 난 짐승은 아니잖아. 인간이야.’라고 우기고 싶은 그 요소 있잖아요.

그게 화근인줄 모르는 거예요. “나는 인간도 아니야.” 이렇게 하면 끝나는 것을 가지고 “아니야. 그래도 막가지는 않았어.” 뭘 막가지는 않았어요. 사람이 자살을 왜 합니까? 자기가 인간답고 싶어서 자살하는 거예요. 장렬하게 죽을 때 가장 인간답다는 거예요. 인간답다는 그것은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한대로 그건 뭐답다? 우상답다는 거예요.

인자(Son of Man, 人子)하고 연계가 되어야 하는데 인자가 누군지를 몰라요. 주님이 누군지를 몰라요. 태어나서 아는 것은 나밖에 없어요. 내가 안 지키면 누가 나를 지키나, 이것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생각하는 방향이 나를 살리되 멋있게 살아보자는 식으로 가요. 모든 관심사가, ‘이번에 영국에 가서 유학해볼까?’ 모든 생각이 ‘신이시여, 도와 주소서. 무탈하게 영국에 가게 하옵소서.’

모든 관심사가 자기가 잘되게 하는데 그 잘된다는 그것이 뭐냐? 이미 인간이 한통속이기 때문에 남들이 보는 시선과 눈이지요. 나 이 정도였어, 라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북한에 왜 유학 안 갑니까? 이것은 김 정은에게 맞아죽을 일이잖아요. 그것은 나중에 엄마가 볼모로 잡힌 그 값을 치러야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안 그러면 수용소에 가기 때문에. 우리 집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거든요. 돈도 없을뿐더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없애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 죽여 버리고 전멸해 버려요. 전멸하는 방법은 성전에서 성신이 떠났으니까 그건 전멸이에요. 성전이 중보자였는데 성신이 떠났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성전은 그냥 부동산이에요. 건물이에요. 이방민족과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잡히지요. 그러면 이방민족 되었지요. 자, 이방민족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이방민족은 뭐가 없습니까? 율법이 없지요. 이미 죽은 자지요. 죽은 자인데 이 안에 뭘 집어넣는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이 안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남은 자, 잠시 그들이 성소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어 있어도 누구는 활동합니까? 바퀴를 돌리는 그 그룹, 그리고 그 그룹은 누구 지시를 받아요? 중간에 사람의 형상, 인자, 주님의 지시를 받고 천사들이 활동하는 것, 그게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에요.

진즉에 그랬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보고 죄인인줄 알고, 그 제사법에 있는 어린양의 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사하고, 그랬었어야 돼요. 이스라엘이. 그래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좀 살만 하니까 어떻게 살려주느냐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이만큼 살았다는 것을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거예요.

살려줌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소중하고 아까운 거예요.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해놓고 사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신 것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날 이때까지 하나님이 이렇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것은 자기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밖에 안되지요.

누가복음 20장에 나오지요.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라.’ 농사가 너무 잘되었어요. 자기 영혼을 다독거립니다. ‘이제 평생 죽을 때까지 넉넉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넉넉했어요. 왜냐? 그날 밤 새벽 두시 40분에 죽었으니까. 그날 밤에 죽었으니 죽을 때가지 넉넉했어요.

그 말이 맞아요. 시간의 문제입니까, 지점의 문제입니까? 지점의 문제에요. 시간은, 이것은 나중에 춘천 가서 강의할 것인데,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지점의 문제에요. 시간이 아니고 지점입니다. ‘앞으로 5년 뒤에 잘 되겠지.’ 혹은 10년 뒤에 “어머니, 보세요. 이만큼 되었습니다.” 이런 것 필요 없어요. 나라는 지점이 5년 뒤에나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지금……, 그래서 나오는 노래가 있지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지금, 지금, 나는 죽은 자 맞습니다. 그러면, 내가 죽은 자라면 간단해요 내가 죽은 자라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살려주는 식으로, 죽은 자인데 초과적인 은혜로 살지요.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뭘 해도, TV를 보거나 잡담을 해도 이것은 초과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선물이 되는 겁니다.

바로 주님의 기능이 되는 겁니다. 인자의 기능, 그래서 인자와 우리하고의 관련성, 연결이 되어버립니다. 뭘 해도 우리는 선지자가 돼요. 성령을 받으니까 에스겔 같아요. 이 땅의 인자 같아요. 성신이 온다는 것, 성신이 오신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성신을 성전에서 빼돌리신 분의 지시에 따른 성신이 이 땅에 오신 거거든요.

그러면 성신의 움직임은 바로 보좌에 앉아계신 사람의 형상, 이 사람의 형상이 나중에 신약에 오면 아들의 형상이 되는데 어쨌든 간에 형상이라 하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왔지만 사실은 기능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니까 하나의 기능이지요. 기능으로서 제대로 된 사람 만들기에 천사들이 활동을 했고 천사들의 활동은 뭐냐 하면, 성전 새로 만들기.

성전을 새로 만들어버리면 이전의 성전은 만들어졌다가, 성신이 참석하다가 거기서 빠졌잖아요. 성신이 더러워라, 해서 함께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할 수 없다는 창세기 6장의 말씀대로 빠져버렸잖아요. 빠져버렸으니까 인간은 더 이상 죽은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인간이 아니고 흙이지요. 진멸당해야 되고 전멸당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신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인자 되시는 분과 관련된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야 돼요. 그래서 에스겔 제일 마지막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지막에 이렇게 끝납니다. 에스겔 48장 35절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여기 지금 이 순간, 여기 계시다. 하나님은 여기 계시다.

결국 인간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자신의 거주지를 만드는 용도로 누굴 만들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만드신 거예요. 오늘날 성도를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의 자기거주지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거주지가 되지요. 하나님의 거주지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일은 그리스도가 하신다는 것.

왜? 나는 죽은 자로서 다뤄지기 때문에 제대로 살아서 ‘지금 이 순간의 이 지점, 이 환경은 주님의 솜씨다.’라는 것을 언급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투입되어야 될 게 있어요. 에스겔 43장 봅시다. 2, 3절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벌써 우리 에스겔 1장 봤잖아요. 10장도 봤지요? 그 형상을 그대로 본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오지요. 그러면 하늘이 땅을 뭉갰다. 또는 하늘이 이 땅을 친히 방문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구상한 새로운 성전 그리고 그 성전이 마련되게 되면, 에스겔 47장에 성전이 마련되거든요, 그 새로운 성전, 그리고 새로운 성전 한가운데서……, 새로운 성전이 이렇게 생겼는데 보통 성전하고 똑같아요.

특징은 뭐냐? 남쪽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오는데 강물이 흘러나와요. 처음에 강물이 흐르는데 그 강물이 점점 더 깊어져서 나중에는 막 물이 차고 넘친다는 그 대목 여러분 기억나지요.

에스겔 47장 1-4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 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 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 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 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물이 나와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내리다가 북문으로 가서 거기서 꺾여서 동쪽 바깥으로 나오는데 나중에는 물이 넘쳐서 건너지 못한다고 되어 있지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렇게 에스겔 47장의 성전을 보니까 뭐처럼 보입니까? 형상처럼 보이지요. 눈에 보이지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형상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7장 한 번 봅시다. 여러분이 지금 따라오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냥 달립니다. 요한복음 7장 37, 38절이요.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 배에서 강물이 흘러나와요.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여기는 배에서 나와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성경에 일렀다고 하니까 에스겔 47장에서 예언한대로 물이 나온다는 거예요. 복수처럼 배에 물찬 것 아니에요?

요한복음 7장 39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성도에게서 물이 나온다는 말은, 복수가 배에 찬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성도에게서 물이 나온다는 말은, 먼저 성도 이전에 예수님의 몸이라는 조건하에서 물이 나와요.

인간의 몸에서는 물이 안 나오는데 예수님의 몸에서는 물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리 되려면 ‘예수님 = 뭐(?)’가 되어야 돼요?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몸에서 무슨 물이 나오는가? 예수님의 몸에서 웬 물이 나오는가? 아직도 우리가 땅에 있는 형상, 눈에 보이는 우상화된, 눈에 보이는 것, 눈에 형상화 되는 것은 우상화에요.

거울에 비취는 내 모습을 내가 우상화시키는 그것이 시작이듯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저게 저거다.’라고 일치시키는 우상화작업이 있는 사람한테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먼저는 예수님의 몸에서 생수가 나오고,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에 같이 붙어 있는 그 사람은 자기 몸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몸의 일부로 간주되어 가지고 그 사람 몸에서도 뭐가 나와요?

영원한 생수의 강이 나온다고 하면서 이걸 믿으래요. 이걸 믿는 사람은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믿는 사람은. 그러면 이걸 믿으려면 인간이 살아 있으면 안 되지요. 왜?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자기를 우상화하고 형상화하기 때문에 안 되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살아 있는 우리를 뭐로 바꿔야 됩니까? 우리를 죽여 버려야 되지요.

우리를 죽인다는 말은, 우리가 죽는 순간, 내가 나 쳐다보는 것이 없는 순간 보이지 않는 인자의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기능화 되는 거예요. 내가 죽어있는데도 이렇게 살아서 말을 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기능화 된 거예요. 주님의 기능이 이렇게 말하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보통 연애할 때 이런 말을 쉽게 하잖아요. “어떻게 그 많은 여자가운데 그 많은 사람가운데 어떻게 너 같은 여자를 만났느냐?” 또는 “너 같은 남자를 내가 어떻게 만났느냐?” 하잖아요. 그 말은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만나게 해 주신 거예요. 만났으니까 헤어지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하여튼 그렇게 만나게 해줬다는 말이지요. 헤어지는 그것도 주님 뜻이고.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하는 노래가 있거든요. 이 선희가 부른 <그 중에 그대를 만나> 라는 노래가 있어요. 노래에 안 걸리는 것이 없지요. 왜? 이 세상은 형상화되어 있으니까. 이 세상은 인간이 설명할 수 있으니까. 노래로 설명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을.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인간이 형상, 모든 것을 우상화 하니까 죽여 버렸다는 말이지요. 죽여 버렸는데 우리가 꼼지락거리고, 밥 먹고, 움직이고, 할 짓은 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보이지 않는 분이 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앉은뱅이를 누가 낫게 했습니까? 앉은뱅이를 누가 낫게 했느냐?

첫 번째, 앉은뱅이다. 두 번째, 베드로와 요한이다. 세 번째, 주님이다. 몇 번 입니까? 주님이지요. 그러면 앉은뱅이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눈에 보이잖아요. 보이는 것은 이미 눈에 형상화되었지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십자가가”, 그 다음에 “밝히 보이거늘” 이게 말이 돼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식이 돼요. 회 먹는 것이 아직도 밝히 보이거늘. 벌써 회 다 치웠는데 뭐가 밝히 보여요? 회는 1회성이지만 십자가는 계속 이어지거든요.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회는 나를 안 죽입니다. 이게 명언이에요. 좀 받아 적으세요. 회는 나를 안 죽여요. 그러나 십자가는 나를 죽이는 겁니다. 나를 죽여야 주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방해를 안 할 것 아닙니까?

주께서 살아계셔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지금 나에게 심장을 뛰게 하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모든 것을 다 하게 해주시는데 꼭 우리는 그걸 우상화시켜서 그걸 누가 했다고? ‘오늘 청소 내가 했어. 이불 내가 갰다고.’ 이불을 누가 갰어요? 내가 갰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뒤에서 내손 비틀게 해가지고 “똑바로 개. 정신 차리고 다시 개야 되겠어.” 해서 개게 하셨습니까?

누가 하게 하셨습니까? 주께서 사역형(使役形),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틀어막아서 아파트 광고 못하게 만든 거예요.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그래서 우리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닙니다. 살려주셔서 사는 거예요. 아직도 코로나 안 걸렸잖아요. 내일 되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껏 주께서 안 걸리게 해주신 거예요. 마스크 쓴다고 안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스크 단단히 쓰고 있는데 바람 불어서 마스크가 날라 가는 그 타이밍에 코로나 딱 들러붙어 보세요. 바로 걸리지요. 누가 말려요? 말릴 재간이 없어요. 말릴 위인이 없어요. 아내하고 남편하고 이혼 안했다고요? 이혼 안하게 해주신 거예요. 살고 싶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싶다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헤어지려고 하는데 “아빠, 나 결혼해.” 이래서 또 손잡고 예식장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타이밍 놓쳐서 못 헤어지는 가정이 한 두 가정이 아닙니다. 그래도 남들이 보는 눈이 있는데 딸 손잡고 식장에 들어가야지요. 그러다 보니까 다시 갑자기 좋아져서 해외여행도 가고 없던 정도 생기고 그 다음부터 백 년 동안 해로했다는 그런 소리 하는 사람,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모든 세상일은 인간이 손대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하늘에서 손대고 있어요. 천사들이 노는 것이 아닙니다. 되게 바빠요. 굉장히 바쁜데 일에 부딪힘이 없어요. 어설픔이 없어요. 시키는 대로 천사들이 움직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또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들이 옥문을 열어줬잖아요.

우리 같으면 잡히기 전에 안 잡히게 하지 잡히게 해놓고 왜 일을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베드로의 안에 어떤 능력이 없음을 또 다시 깨닫게 될 것이 아닙니까? 또 다시. 어떤 능력도 없음을.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질문하기를 “친정어머니도 복음 안 받아들이고 아들도 안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예수 믿는 것을 기뻐해야 되는데 기쁨보다 짜증이 납니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답변을 올렸어요. “그 자식과도 결별하시고 친정어머니와도 결별하시되 결별해놓고 다시 붙이시기 바랍니다.” 왜 붙이느냐? 나한테 문제 있음, 아직도 내가 누구 몇 명을 전도했다는 그 가치를 내가 아직도 챙기는 그것이 남아 있음을, 말 안 듣는 그걸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누굴 구원하고 누굴 구원 안하고는 예수 믿는 내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인데 갑자기 예수 믿는 내가 살아나 버렸어요. 예수 믿는 괜찮은 나로 살아나버렸어요. 그러면 그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 믿는 내가 나한테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그 실수를 이스라엘이 내내 해온 거예요. 그것은 실수에 해당되는 겁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보좌가 이동합니다. 이동해서 새로 만든 성전 속에 쑥 들어가 버려요. 예수님 있고 예수님 주변에 천사들이 있었잖아요. 에스겔 1장과 10장에서 있었잖아요. 그게 아예 하늘에서 땅으로 이동해 버리는 거예요. 누구 따라? 예수님 따라 이동하는 겁니다. 왜? 중심이 예수님 중심이니까, 예수님이 주님이 되셔야 되니까.

주님이 일을 다 해야 돼요. 처음에 에스겔 1장에 보면 많은 물소리 나오지요. 군대소리 나오지요. 이것은 뭐냐? 땅의 어떤 것도 이 물소리, 군대소리, 그걸 두고 아까 제가 총괄적이라, 총체적이라, 그런 비슷한 표현들을 썼지요. 개별적인 일이 아니고 모두가 하나의 일이라는 것, 한 목소리 낸다는 이야기를 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 땅에서는 개별적인 일이기 때문에 하늘의 일에 침범이 불가한 거예요. 마치 땅이 바다를 침범하지 못하듯이 많은 바다의 물소리가 땅의 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이 가로막음이 계속해서 유지되면서 그냥 땅을 덮쳐버려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덮침, 예수님이 오심이에요.

그냥 예수님은 홀로, 빈 몸으로 왔다 생각하면 안돼요. 예수님의 수하에 있는 수많은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그냥 이 땅을 덮쳐버린 거예요. 게하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엘리사의 종이지요. 아람군대가 엘리사 있는 데를 완전 포위한 거예요. 이건 적절한 비유가 아니지만 서울시 경찰들이 전 광훈 목사, 사랑제일교회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거예요.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미리 이야기했지요.

그럴 때 전 광훈 목사가 하는 말이, 그런 말 실제로 했다는 것이 아니고요, 교인들에게 “눈을 떠라.” 했더니 경찰보다 더 많은 천군천사들이 경찰들을 포위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참 생각만 해도 신나기는 신납니다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지만요. 빌라도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말 잘 들으면 풀어줄게.”라고 했습니다. “내 풀어줄 수 있다. 그만한 권한이 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너는 나를 풀어줄 권세가 없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천군천사가 이 까짓 거, 내가 체포된 것을 못 풀 줄 아느냐? 내가 지금 힘이 약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줄 아느냐?” 바로 너희들의 권세가 어떤 권세라도 하늘까지 침투하지 못함을 발각시키고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아예 이 지상에 몰고 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여러분 나름대로 성경지식이 정리되잖아요. 그걸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해보세요. 먹혀 들어가던가요. 안 먹혀 들어가지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고” 그러지요.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지.” 하지요. “네 생각 따로 있듯이 나도 내 생각 따로 있음을 존중해 달라.” 그렇게 나오지요.

그럴 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뭡니까? 객관적 증거입니다. 그 객관적증거가 뭐지요? 바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 그것은 네 생각이고 나도 내 생각 따로 있으니까 너는 너 좋은 대로 살고 나는 나 좋은 대로 산다, 할 때 그 다른 사람이 나한테 하는 이야기를 내가 나한테 수시로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맞아. 내가 지금 성경보고 은혜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착각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내가 스스로 나한테 설득을 시키는 희한한 일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필요한 것은 뭡니까? 객관적인 증거지요. 객관적인 그 증거가 뭡니까?

갈라디아서 3장 1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는 네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착각한 것도 아니고, 남들이 그냥 개인적인 사견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모든 다양성으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

십자가 지시고 죽었다는 이 객관적 증거 앞에 남들이 아니라 나 자신만이라도 군소리 하지 말아야 돼요. 이 에스겔이, 이 예언이, 하늘의 보좌가 예수님과 동반해서 땅을 아주 덮쳐버린 거예요. 그러면 땅은 전멸이에요. 전멸이면서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우리는 죽었으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의 몸이 내 몸을 대신 했을 때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주께서 다 이룬 성전이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나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뭘 잘났다고 와요? 주께서 자기 몸이라고 성령을 우리 몸에 보낸 거예요. 참 그걸 생각하면 우리가 황공무지로소이다, 죠. 뭐 볼 것 뭐 있다고. 곧 죽을 몸인데 이게 뭘 활용도가 있다고 찾아오시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그래놓고 우리 속에서 생수가 나오도록 성령이 계속 작용하는 장치 어떤 기계처럼 AI, 인공지능처럼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도.

초과적인 이야기가 막 나와요. 초과적인 이야기.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막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고뤠~? 나도 너를 사랑하는 것이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둘 다 너와 나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뭐로 만나요? 주님과 주님으로 만나지요. 그렇게 만나서 한 2년 사귀다가 “내가 너와 헤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이다.” “고뤠? 나도 너와 헤어지는 것이 주의 뜻이다.” 이래가지고 헤어져버려요.

그래서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할 때도 있고, 헤어질 때도 있잖아요. 뭐가 되든지 누구는 남아요? 초과적인 것, 객관적 사실, 십자가 지셨다는 이 객관적 사실, 이것이 에스겔 1장과 10장에 나오는 그 환상적이고, 몽상적이고,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는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사건화로 완전히 딱딱하게 확정지어 진 거예요.

십자가, 나는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확정지어진 거예요.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가 아니에요. 십자가에요.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성경전체의 예언이 약속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냥 하나의 망상이라고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느냐? 내가 죽은자라는 것, 십자가 복음 앞에서 내가 죽은 자고, 내가 그리스도가 내 안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십자가를 보고서 어떻게 내가 부정할 수 있는가?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때 이게 바로 성령이 생수같이 또 다시 터져 나오는 순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친히 주께서 성전 만드셔서 성전을 자기 몸으로 만드시고 그 몸에서 생수 나오게 하기 위해서 죽어가는 우리를 활용해주신 이 은혜를 너무 감사합니다. 내 몸에서 나오지만 실은 주의 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라는 객관적 사실을 통해서 부정하지 못하고, 불신하지 않고, 기쁨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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