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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8 20:38:48 조회 : 126         
2020 춘천 여름 특강 1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름 : 정인순(IP:112.167.88.133)
2020 춘천 여름 특강 1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근호 목사

저 혼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절에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방금 긴 이야기가 이렇게 순서 지으면 아주 간단합니다. 처음에 공간 나와요. 공간. 두 번째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 나옵니다. 세 번째 나온 게 뭐냐 하면 인물 나와요. 인물.

여기에는 너희, 또는 사랑하는 자들아 그런 식으로 되어있는데 네 번째가 뭐냐 하면 공간→시간→인물, 이렇게 순서로 되어있으면서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시간 공간은 인물과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과 결합해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사랑이 생깁니다. 사랑. 그러면 마지막에 사랑 안에는 공간과 시간이 사랑 안에 전부 다 종속돼요. 왜냐하면 맨 마지막이 사랑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사랑하는 사이에는 기다릴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사랑하는 사이에는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에는 기다릴 수 있다는 동시에 사랑하는 사이에는 보낼 수도 있어요. 보낼 수도 있고 기다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물에도 괜찮고 불에도 괜찮아요.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불속에서도 기다리고 물속에서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러면 사랑하는 사이라면 반드시 누가 등장해야하느냐 하면 사랑하고픈 대상, 인물이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걸 여러분들이 염두에 두시고 신은 무엇인가? 신은 관념이에요. 관념. 관념의 대상입니다. 그냥 추상의 대상이에요. 신은 관념의 대상 추상의 대상이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건 인간이 만들었다, 이렇게 보시면 인간이 만들었다.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신은 인간 속에 복속이 되고 신보다 뭐가 크지요? 인간이 더 크지요. 왜냐하면 인간이 신을 만들었으니까. 인간은 신을 만들었으니까 신은 피조물이고 누가 창조주? 인간이 창조주고. 인간이 자기의 자기 자신의 평안함과 정신적 안정성을 위하여 신을 만든 거예요. 추상적 관념이니까요. 관념의 대상이니까.

인간이 신을 만들어놓고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을 경배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건 전형적인 트릭을 쓰는 거예요. 트릭 알지요. 속임수. 수요일 날 저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inversion이라고 했어요. inversion, 전치되는 것, 뒤엎는 것, 주객이 뒤엎어지는 것.

인간이 신을 만듦으로서 비로소 인간다워지는 겁니다. 내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인간다움이 뭐냐? 반드시 신을 만들어서 inversion, 다시 말해서 신을 경배함으로서 누가 완성을 보는 겁니까? 인간이, 내가 완성을 보는 거예요. 내가. 그래서 춘천에 와도 교회가 많은 게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해가지고 오면서 주욱 큰 교회가 그렇게 많은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해가지고 입구에 보면 나오지요.

내가 어디까지 절대화 될 수 있는가? 내가 어디까지 완성될 수 있는가는 같은 인간끼리는 시시해서 안 되고요, 반드시 신을 다루어야 돼요. 신과 협의가 끝났다가 되어야 해요. “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었어.” 그 이야기가 성립이 되어야 되고 전제가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이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은 자기의 완전을 향하여 뭘 만든다? 대상이 있어야 되고 그 대상이 그냥 친구 동료 동창생 아는 이웃사람 그래가지고는 인간은 미흡해요. 인간은 영 칩칩해. 인간 같지도 않은 것하고 내가 볼 게 뭐 있노? 그러면 여기 대상에다가 대상을 높인다고요. 그러면 뭐냐? 자식에다가 부모, 그리고 형제 부모한테 잘하고 형제한테 잘하고 자식에게 잘함으로서 내가 좀 더 나아진다, 이것도 괜찮은 방법이지요.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야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영 성이 안 차.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대상에다가 이걸 어렵게 말하면 타자라고 말하는데 신을 집어넣으면 신이 나를 대단한 존재라고 규정을 했다는 것이 신과 이미 협의가 끝났어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로 확정했고 나는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최고의 자리를 신이 보장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나는 최고의 궁극적인 자리에 도달되는 겁니다.

그래서 신이 없이 부모한테 효도하고 이런 사람, 이래 가지고서는 그래도 이 세상 살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내 성에 영 차지 않는 겁니다. 이왕이면 갈 데까지 가는 거예요. 신마저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 때 가장 인간다움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임수지요. 일종의 트릭인데 트릭이라는 것은 속임수라 하는 것은 내가 위에 있는 분에게 경배한다는 그 자체가 실은 그 위에 있는 분이 내가 다룰 수 있는 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나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전치, 전복 되는 거예요. 갑이라고 하면서 내가 갑이 되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 신에게 겸손하면 할수록 나는 신을 쉽게 다룰 수 있다. 신도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수련회 때 했지만 선행은 곧 뭐라 했습니까? 복수님이라 했어요. 남한테 착한 일 한다는 것은 내가 착한 일 한 만큼 나한테 보상하지 않으면 나는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착한 일조차는 너를 위함이 아니고 나를 위함이기 때문에 가만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지옥이고 사탄이고 이 모든 것도 일단 나 건드리면 이렇게 지옥 간다는 이야기지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너희들이 건드렸다.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잘못 봤다. 나를 건드리지 말아야 되는데 건드렸잖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신은 뭐냐 하면 추상적 관념의 대상이다. 관념의 대상이라는 말은 곧 신은 실제로는 신은 없다. 신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이 신을 만들 때만 신은 없다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없다의 반대말은 있다죠. 누가 있느냐? 신을 믿는 내가 있는 거죠. 내가. 나라는 인간이 있는 겁니다. 인간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렇게 신은 없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만드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어디에 오느냐 하면 바로 내가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이 최고의 자리에 하나님이 여기에 들어와 버리죠.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뭐가 되느냐 하면 육신이 되었다고 했잖아요.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방금 이야기한 말로, 말씀이 인간이 된 겁니다.

인간이 되었으니까 인간들끼리 섞여있으니까 누가 하나님인지 누가 인간인지 압니까, 모릅니까? 알 길이 없지요. 왜냐하면 신은 추상적 개념이니까. 신은 추상적 개념이니까 허황된 개념이에요. 허황된 개념이니까 허황된 개념은 전부 다 나는 신을 믿어, 나도 믿어. 이건 아무 차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인간 대 인간의 차이예요. 인간 대 인간의 차이.

인간들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인간들 사이가 차이가 있다고 봅니까, 없다고 봅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동양철학이나 어떤 모든 철학에서도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끝. 똑 같다. 살 동안에 얼마나 행복하느냐가 중요하지 죽고 나면 모든 것은 똑같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과연 똑 같을까, 하고 등장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건 제가 하기 전에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겁니다. 모든 인간은 사람이다.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 inversion 역전이 생기는 거지요. 죽는다는 건 맞아요. 죽는데 여기에 안 죽는다가 아닙니다. 이게 어려워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Ok 맞아. 그래서 누가 죽었어요? 예수님도 죽는다에 합류했습니다. 그래, 너도 죽고 예수님도 죽지요. 그러면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다 죽으니까 90 살다가 다 죽어요. 끝났어요. 별 다른 것 없습니다. 특이 사항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아났다가 되어버렸어요. 안 죽고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었는데 살아났다. 죽었는데 살아났다는 이것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초과적인 겁니다. 그럴 수는 없느니라.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전한 복음은 뭐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 동의하지? 동의하지?” 이렇게 한 거예요. 사도가.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자기 손으로 죽였으니까 그거 맞네. 맞아. 죽었는데 그 분이 살아났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명들을 해보시지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해명들을 해보라는 거예요.

어떤 분이 우리 가운데 있는데 어떤 분이 다 같이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살아났다고 한다면 이 지금 생수가 백산수냐 삼다수냐가 문제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이게 지금 곡물이냐 밀가루냐가 문제가 됩니까, 안 됩니까? 전혀 안 되지요. 당신 어느 대학 나왔어? 이게 문제가 돼요, 안 돼요? 지금 그건 전부 다 시시한 문제예요. 너무나 하찮은 문제예요. 사람이 어느 대학이든 죽으면 똑 같은데 그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일이 똑 같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속이 시원한 거예요. 잘 살아봐야 재벌 되어봐야 죽으면 헛되지. 우린 그런 줄 알았지요.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이거지요. 살아나면 반칙이지요. 우리 가운데 살아나면 안 돼요. 살아나게 되면 처음부터 어느 캔디를 먹을 것이냐부터 문제를 다시 규정을 해가야 되는 겁니다. 다시 규명해야 돼요.

방금 여러분들이 제 말을 이해했다면 이 문제를 내줄 테니까 문제를 풀어보세요. 북대서양 고기압, 이 말을 왜 사용합니까? 북대서양 고기압을 왜 사용하는데요? 정답은 내가 안 죽고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언어와 의미와 개념은 그냥 단어를 규정하는 게 아니에요. 이걸 앎으로서 내 사는 데 보탬이 되기 때문이에요. 북대서양 고기압 이거 모르면 하와이 낚시하다가 죽는 수가 있어요. 이게 태풍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태풍이 얼마나 강렬하느냐 적으냐 거기에 영향을 주거든요. 오래 가느냐 방향 트는 것까지도 영향이 있다고요.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의미 하나의 개념이라 하는 것은 이건 구분 짓기입니다. 구분을 짓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질서 잡기예요. 질서를 잡는다는 말은 내가 위험한 곳에 덜 가고 더 살기 유리한 곳이 어디냐를 찾을 수 있는 인간들의 WAY, 삶의 방식이에요. 독약과 그리고 독약이 아닌 것, 성경에 나오는 신약과 진짜 약국에 나오는 new drug, 약국의 신약이 같은 한국말인데도 그 차이를 모르게 되면 그 사람은 약사가 아니에요. 교회 와서 신약 안 주고 교회에서 설교하십니까, 이렇게 따질 수가 있어요. 우사당한다고요.

모든 개념의 층층이 누적된 개념은 북대서양 고기압이라는 이 사실을 알면 사는 데 유리하고 정말 초등학교 안 나와가지고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사는 데 불리한 거예요.

예를 들게 되면 회사 면접을 볼 때 뭘 면접을 보느냐 하면 얼마나 그 개념 차이를 촘촘히 구분하느냐를 할 수 있느냐로 뽑아요. 특히 KBS나 이런 언론 매체 할 때 성우 시험까지도 일반상식을 치지요. 일반상식이란 게 뭐냐 하면 촘촘히 개념과 개념 사이를 남들은 두루뭉실하게 하는 걸 촘촘히 구분 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기자 시험 칠 때 단어 선정에 있어서 자칫 하게 되면 잘못 기사를 쓰게 되면 북한의 운명이 바뀔 수가 있거든요. 그 차이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공부할 때 이 개념과 마이밀 바나나하고 바나나 우유하고 차이점 있잖아요. 이런 차이점을 세밀하게 본다는 것은 그 만큼 이 세상을 심도있게 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 층층이.

의미 층이, 수요일 날 이야기했는데 그거 할 필요 없고요. 이 세상은 떠돌아다니는 개념의 세상이라고 했지요. 개념 층이 있으면 두루뭉실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 더 밑에 들어가면 이 개념들이 더 심도있게 중간 중간 끊어져서 더 심도있게 나가요. 더 들어가면 더 심도있게 들어가요. 점점 갈수록 더 심도있게 쪼개집니다. 가장 심도있게 쪼개지는 게 뭐냐 하면 법학이죠. 국가 엘리트는 전부 다 법 출신들이에요. 법 출신들은 전부 다 옛날식으로 하면 뭘 다뤘느냐 하면 언어를 다루는 직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트입니다. 언어를 다루는 직업은 전부 다 엘리트라니까요. 개념들.

성경 볼 때 초신자의 특징은 두루뭉실 가요. 지 은혜 받은 것 무조건 우기면서 편지 써가지고 목사들은 회개하라.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했잖아. 요한복은 3장 16절밖에 몰라. 두루뭉실 들어가요. 점점 더 들어가게 되면 더 세밀해져서 그 말씀이 이 말씀하고 충돌 될 때 그러면 두 충돌 되는 개념이 조화를 이룰 때 조화 되는 제 3의 요소는 그 밑에 들어가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모든 성경 개념들을 볼 때 성경을 한 번 쭉 읽었다. 알 것 같지요. 다시 읽어보게 되면 모순 된 게 등장하지요. 그 모순 된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 방법도 성경 안에 더 깊이 들어가면 또 거기 나오거든요.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전체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뭔가? 이것을 캐낸다는 것은 보는 그 사람의 삶의 의미도 그만큼 안정권에 들어갔다는 말이죠. 안정권에. 성경 몇 구절가지고 휘둘리고 성질 급하게 감정으로 투여하지 않고 점점 침착한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놀라지 않아요. 세상에 어지간한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않아요. 그런 상태에 들어가요.

그래서 오늘 베드로후서 지금 강의했습니다. 강의 하면서 제가 죽 읽었는데 처음에는 물로 심판했다, 그 다음에는 불로 심판했다. 그 다음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이야기했고 마지막 9절에서 13절까지는 체질이 모든 물질이 불에 녹아진다. 그러니까 12절에서 13절까지.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되느냐? 우리가 그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새하늘과 새 땅의 의를 바라보자, 그 내용이거든요.

이 긴 내용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공간부터 먼저 등장해요. 공간부터 등장한다는 말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공간에서 정적 상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상태,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본질은 변함이 없는 상태, 정적 상태가 공간으로 이미 확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공간은 확정된 거예요.

물로 심판, 그 다음에는 불로 심판. 세상이 아무리 젊은 세상이든 늙은 세상이든 관계없이 심판 된다는 사실은 요지부동 변함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 정적 상태지요. 확정된 대상이고 확정된 운명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게 공간입니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이 나와요. 공간에서. 봐 줄게. 자꾸 시간이 지연되는 거예요. 봐줄게 하면서. 여기서 뭐냐 하면 시간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서 공간의 소멸, 공간 개념의 소멸이 일어나는 겁니다. 확정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변화가 일어나요. 확정되었는데 변화가 일어나요. 확정된 것에 변화이면서 공간은 보이지 않거든요. 대부분 공간은 보이지 않아요. 공간은 안 보여요. 변화만 보인다고요. 산에 단풍나무 있지요? 단풍나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소나무인지 단풍나무인지. 가을 되면 시간이 흐르면 변하지요. 그러니까 공간이 어디에 종속된다? 시간의 흐름에 공간도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니까 시간이 주가 되고 갑이 되고 공간은 을이 되는, 종속되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런가 묻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데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요. 과연 그럴까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지금 공간이 너희들 보기에는 시간이 우위고 공간은 시간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공간은 없고 시간의 흐름 따라서 그냥 흘러가듯이 인생 살면 그만이야, 할 때 과연 공간의 운명은 확정되지 않았을까 되었을까를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거예요. 그 물으시는 것이 뭐냐? 물 심판이고 불 심판입니다.

시간을 허용해놓고 인간에게는 봐주기로 시간을 허용하는 거예요. 시간을 허용 해놓으니까 인간은 뭐라고 곡해하느냐 하면 역시 시간이 주야. 시간이 주고 공간은 시간따라 늘 변하기 때문에 공간 붙들면 안 돼. 시간은 흘러가면 인생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돼, 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까?

여기 한 번 봅시다. 3장 4절에 주의 강림하심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 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같이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일부러 의도적으로 잊으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공간이 확정 되었는데 시간을 부여하니까 인간은 공간에 매달리지 않고 시간 가지고 공간을 재해석하는 겁니다. 시간 가지고 공간을 재해석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해석의 주체자가 누구냐 하면 본인이 주체자가 되는 거예요. 본인이 해석의 주체가 된다는 말은 내가 세상에 대한 해석의 주체자가 된다는, 세상의 주체자가 된다는 말은 나는 죽고 싶다는 말이에요, 살고 싶다는 말이에요? 살고 싶다는 말이에요. 내가 살고 싶다는 겁니다. 이걸 크게 쓰면 이걸 가지고 세계관, 인간의 세계관. 세계관은 반드시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죽고 싶다가 아니고 살고 싶다를 전제로 깔고 있습니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가 되니까 여기서 반칙이 나오는데 나는 공간에 속하지 않고 공간 바깥에 나가서 공간을 보는 거예요. 심지어 어디까지 보느냐 하면 시간 속의 나가 아니라 시간 밖에 나가서 초월적인 존재로 나를 설정해놓고 시간과 공간을 임의로 내 사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건 인간이 아니고 신 수준이에요. 인간은 날 때부터 애도 신이에요. 거의 신입니다. 안 그래요? 키워보니 그렇지요? 신이에요. 아빠가 목욕탕 가자. 하니까 애가 나는 가기 싫어. 왜 가기 싫은데? 내가 싫다니까. 무슨 말을 더 하리요? 내가 싫다니까 내가 싫다니까. 거기다가 내가 지금 나이 열두 살까지 누가 키워줬느냐? 그런 논리는 소용없어요. 먹히질 않습니다. 내가 싫다는데. 내가. 왜 싫은데? 그게 애들이 크면 얘기합니다. 그게 나의 세계관이라는 거예요. 나의 세계관이에요. 니 세계관이 뭔데? 나는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해석해. 이렇게 해석한다는 거예요. 그건 나이 70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나이 70 되고 80 되고 90 되어도 마찬가지, 90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홍천에서 농사해도 마찬가지예요. 마찬가지예요.

제일 인간이 뭐냐 하면 제발 Please 제발 누구든지 나를 해석 좀 해주세요. 제발 내가 누구라고 해석 좀 해달라는 거예요. 여러분 해주면 안 됩니다. 해주면 트릭을 쓴다니까. 신이 하나님이 나를 해석해주면 그 때부터는 내가 그 하나님을 임의로 변개시켜가지고 저 신은 맘에 안 들어. 이 신 말고 다른 하나님 갖고 와. 그 해석을 할 때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는데 막상 해석이 되니까 이상하게 해석 듣는 순간 저 해석은 나한테 맞다 안 맞다가 판단이 개시가 되었어요. 커트가 돼요. 저 해석은 너무나 맘에 안 들어. 다른 해석 가져와.

춘향전에 보게 되면 사또가 있어요. 춘향전의 사또. 변사또지요. 갑자기 변 사또가 왜 거기서 나와. 변씨가 왜 거기서 나와. 춘향전을 해석할 때 춘향이 해석이 있고요, 그 다음 이 도령 해석이 있고요. 그리고 변 사또 해석이 있고 거기 매니저 있잖아요. 이방 해석이 있고 또 이방의 애인이 있다는 그런 설이 있어요. 원래 춘향전의 탐본이 200개 정도 돼요. 백설 공주가 500개 정도 돼요. 아주 엄청나거든요. 모든 탐본이 있어요.

여기서 변 사또 입장에서 한번 봅시다. 변 사또 입장에서 보게 되면 오늘날 너무나 이 도령 춘향이는 현실 세계에 안 맞아요. 변 사또 버전이 해석이 가장 맞아요. 왜냐 하면 그 중에서 계급이 제일 높거든요. 춘향전에서 계급이 제일 높아요. 계급이 높다는 말은 이 세상에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욕하지만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 욕하면서도 그 자리에 앉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 높은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결국 출세 가도를 달려서 그 사람 자리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밑에서 헐뜯는 사람은 그 자리에 못 앉아요. 적어도 서울 시장 되려면 서울시장 되기 전부터 비서실장 때부터 서울 시장이라는 안목을 가져야 서울 시장 될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이죠. 변 사또가 뭐냐 하면 그 동네에 남원 동네에 아가씨들한테 전부 다 하나씩 앞에 통과시키지요. 임월이! 으음. 춘심이! 으음, 이렇게 고개 저으면서. 이게 변 사또 자리가 수요일 날 왕의 자리고 오늘날 우리의 자리입니다.

베지밀? 으음, 마이밀? 으음. 바나나 우유? 으음. 딸기 우유? 그거! 이게 어린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신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가 중요하지가 않아요. 내 마음에 드는 신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해석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시간에서 공간, 공간에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인물을 등장 시킵니다. 이게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기적은 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합쳐서 하나의 인물화 되는 거예요. 자연의 의인화, 이것이 제일 기적적인 이야기예요. 성경에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베드로후서 3장 5절에 보면,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씀이 세상의 모든 말씀이 자연이 하나의 인물 속에 들어온 거예요.

오늘 이번 강의에 핵심부분에 우리가 접어들었습니다. 핵심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사 부사로 설명하면 꾸역꾸역, 이게 오늘 강의에 핵심입니다. 꾸역꾸역. 종이 신문지 이만한 걸 가지고 내가 손으로 구멍을 만들어놓고 이걸 집어넣을 때 모양새가 어때요? 꾸역꾸역 집어넣지요. 전체가 자연이라는 부분 속에 들어올 때 어떻게 들어옵니까? 구겨져서 꾸역꾸역 들어오는 거예요. 꾸역꾸역.

따라서 물 심판이 그게 심판의 다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부분이니까. 전체가 부분이 전체를 보여주는데 기껏 물심판밖에 보여주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물이 아니라 불로서 심판할 때 비로소 그 전체를 심판이라는 양식으로 전체를 보여주는 게 불 심판이에요. 물 심판 때 꾸역꾸역의 그 전모를 다 못 보여줬다는 거예요. 물 심판 때에는. 물로서만 심판했기 때문에 아직 남아있는 게 있어요. 전체가 꾸역꾸역 다 집어넣는데 이걸 다 못 집어넣거든요. 이걸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나중에 새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인물은 작지만 전체를 보여주는 거예요. 작지만 전체를.

인물이 여러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말씀이 육신을, 예수님이죠. 저는 이것을 발전시키겠습니다. 성도입니다. 성도는 부분입니다. 부분인 성도에게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전체가 나와요. 이게 성도의 고귀한 기능입니다. 개뿔도 아무 것도 아닌데 그냥 보통 인간하고 똑 같아요. 밥 먹고 그냥 늙어 죽는 것하고 똑 같아요. 하지만 그 작은 성도 속에서 전체가 꾸역꾸역 나오는 거예요.

과산화수소 가정에 있는 세제 있잖아요. 그 세제하고 섞어버리면 코끼리 치약 효과라고 해가지고 거품이 풀장을 덮어버려요. 풀장을. 나중에 쉬는 시간에 코끼리 치약 실험 한번 쳐보세요. 그게 어떤 건지. 작은데 온 천지를 덮는 꾸역꾸역이 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지구 전체를 삼킵니까? 여기 보면 체질이 불에 왜 녹아집니까? 그것은 이미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한 몸으로 다 집어넣었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설움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그 만한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함유되고 있는 그러한 효과가 이 우주 전체에 확산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지요. 지극히 당연한 거예요.

과산화수소를 이만한 데다 집어넣었는데 일부러 실험할 때 풀장에다가 실험해요. 왜? 거품이 풀장을 가득 차니까. 유튜브에 나와요. 제가 왜 그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MBC 아침에 보니까 해외토픽에 그게 나와가지고 저거다. 바로 저거다! 저게 춘천 강의다. 왜? 작은 데서 전체가 나오니까, 작은 데서. 다 나와서 이 세상 다 휩쓸어버리는 거예요.

성경 히브리서 12장 봅시다. 12장 21절에 보면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산에 등산하는 게 그게 뭐 무섭고 떨립니까? 산에 등산하는 것이. 그런데 거기 보통 산인데 주께서 말씀으로 울라 하니까 그 산 정상이 진동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26절에 보니까 그 때에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내가 한 번 아니라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한다, 땅과 하늘이 진동한다는 것은 아까 한 말로 꾸역꾸역 네 자로 설명하면 돼요. 부분이라는 것이 피조 된 부분이 창조자 전체를 감당을 못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베드로후서 3장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천지를 만든 말씀을 만들어진 이 피조 세계가 감당을 못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시간 공간에 대해서 시간 공간을 이렇게 봐줬거든요. 다시 말해서 공간은 뭐냐? 공간은 이미 확정 된 거예요. 공간은 정적 존재예요. 확정 된 거예요. 심판 받기로.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을 지연시켜서 시간을 주니까 인간은 시간 이건 본인이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가지고 시간 위주로, 공간보다 시간 위주로 나간 거예요. 아직 안 끝났는데 뭐? 아직 안 끝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인물이 오니까 인물은 시간+공간, 시간과 공간을 한 인물이 함축한 인물이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예요.

인물이 왔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르게 산다가 아니라 그 인물에 대해서 그 인물을 나라는 존재가 시간 공간 아무 것도 모르는 누구든지 나를 해석할 사람 없이 나는 누군지도 모르고 살아온 내가 그 함축된 시간 공간의 모든 걸 말씀으로 함축된 인물을 내가 사랑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해버리면 무엇을 극복한 사람이 돼요? 공간과 시간을 이미 극복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언제 오더라도 지구가 불바다 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이기는 거예요. 사랑이.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간단한 것 같아서 제가 여러분들이 잘 아는 노래 하나 준비했어요. 여기에 보게 되면 오늘 강의 내용이 다 나와 있습니다. 제목은 준비 없는 이별.

지난 시간 내 곁에서 머물러
행복했던 시간들이 고맙다고
다시 또 살게 되도 당신을 만나겠다고
아 그 말해야 할 텐데
떠나는 그대라도 편하게 보내줘야 할 텐데

여러분들이 아시는 노래예요. 그 노래 중간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게 줘

이건 뭐냐 하면 공간과 시간을 누가 함축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함축 했지요. 이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순간부터는 시간 해석과 공간 해석이 내 세계관이 바뀌어지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보통 인간의 세계관, 저 애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의 세계관은 그 전제가 뭐가 깔려 있다고 했습니까? 누가 사는 것, 니가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누가 사는 것? 내가 살기 위한 세계관이에요. 모든 세계관은. 북대서양 고기압 그걸 왜 알아요? 그 단어를 아는 의미가 뭡니까? 그걸 아는 것이 내가 사는 데 보탬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도 모르고 기상캐스터 하려고 이렇게 해가지고 면접시험에서 탈락하는 수가 있어요.

어떤 단어가 하나가 어느 단어를 골랐을 때 어느 단어를 더 세분화할 때 더 섬세하게 해석이 가능하게 한 것이 나로 하여금 이 사회에 더 유능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는가 그게 공부지요, 공부. 의미 층을 분해해가지고 다시 조립할 수 있는 능력, 그게 공부예요. 물론 철 두드리고 하는 것도 나무 자르는 것도 공부지만 이 세상에 모든 국가를 다루는 엘리트층의 공부는 뭡니까? 말이에요, 말. 법학을 다루는 사람들입니다. 언어. 검사 판사 이 출신들입니다. 국회의원 그 사람들이 주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에요. 법은 모든 변화를 하나로 묶어주거든요. 하나의 의미로 묶어주는 것. 하나의 법이 여러 가지 생길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변화를 묶어줄 때 좋은 법이 되는 겁니다. 법이 많다는 것은 그 법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법이 많다는 것은.

우리 삼촌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축구를 하는데 우리 삼촌이 좀 괴팍한 데가 있어가지고 축구를 보다가 왜 저 월드컵에 축구하는 사람들은 꼭 공이 하나이어야 한다는 그러한 아집에 빠져 있느냐, 선수가 열한 명 스물 두 명이잖아요. 그러면 공을 스물 두 개 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각자 잘 놀거라 이 말이죠. 그 말은 맞아요. 각자 잘 놀면 돼요. 그럴 것 같으면 운동장에서 놀 필요 없고 자기 동네에서 놀면 되지요. 공이 하나가 있을 때에 재미가 극대화 돼요. 발로 차고 태클 들어가고 다리 붙들고 왜 이런 게 됩니까? 공이 하나일 때 가능합니다. 공이 하나 일 때 경쟁의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경쟁의 의미, 공이 하나가 될 때.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2천6백만 명을 뽑아보자. 아무 의미 없잖아요.

놀랍게도 복음은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누가 종합한 겁니까? 오직 한 분이에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그건 뭐냐? 더 이상 의미 캐는 것은 주님 앞에서 무의미 한 거예요. 의미 캐지 말고 세계관 갖지 말고 사랑하라예요. 주님을 사랑하라. 사랑할 때는 반드시 뭘 미워해야 돼요? 나를 미워해야 되거든요. 나의 세계관을 미워해야 돼요. 나의 세계관 밑에는 뭡니까?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남한테 인정받는 사람이고자 하는 그것에 맞추어서 내가 조립된 억지로 조립시킨 나의 세계관이거든요. 나만의 세계관.

나만의 세계관은 뭘 규정하느냐 하면 공간은 곧 내가 공간이 돼요. 왜? 나는 중요하니까. 시간은 나의 변화예요. 이게 중요해요. 계절의 변화? 그것도 맞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계절의 변화도 중요하지 않고 미국이 어떻고 영국이 어떻고 변화도 중요하지 않고 내가 키우는 강아지가 어떻게 변화되는가 이게 미국의 변화보다 다음 대선에 미국에 트럼프 될까 안 될까 그것보다도 내 강아지가 어떻게 될까가 더 중요해요. 왜? 나와 가까운 근접하는 나의 시선의 원근법에 부합되거든요. 나를 지켜보는, 나의 가까운 내가 지켜보고, 또 나를 주시하는 그 대상이 멀리 있는 트럼프 대통령보다 나한테 더 소중하니까.

모든 것이 누구 중심입니까? 내 중심이지요. 여기서 뭐냐 하면 내 중심이 된 나의 세계관으로 뭘 보느냐? 우리는 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보니까 인간은 무슨 중심이냐? 시간 중심이에요. 주님 오신다면 언제쯤 오십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습니다. 그런 질문을 왜 합니까? 주님 오신다면 언제쯤 오십니까? 왜? 제가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 대비해서 뭐 할라고? 그렇게 해서 구원받고 싶어요. 니가 왜 구원받아야 되는데? 여기서 할 말이 없어요. 니가 왜 구원 받아야 되는데? 태양이 둘이 아닙니다. 이미 시간과 공간은 전 세계 모든 의미는 예수님에게 이미 끝장났잖아요. 끝났으면 예수님 밑에 붙어있는 건 다 떨어내는 거예요. 나조차도 예수님 앞에서 이건 나는 산 존재가 아니라 죽은 존재로 떨어져 나가야 돼요. 오히려 주님 하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됩니다. 내 중심으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모세가 올라간 시내산에서 떨었다 이 말이에요. 모세도 무서워 떨었다는 말은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 만났을 때 하나님 한 분 모세 한 분 두 사람입니다. 산이 떱니다. 산 정상이 벌벌 떱니다. 벌벌 떨어요. 지진이 일어나서. 그러면 모세가 무서워했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서워했습니까? 당연히 모세가 무섭지요. 그러면 이건 모세 중심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당연히 시내산에서만 모세중심이 아닌 게 아니고 모세가 산 밑에 내려가서 나중에 식사를 뭘 하든 간에 식사를 하는 모세조차도 그것조차도 모세중심이 아니다 말이에요. 이미 예수님께서는 죽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세상은 누구 중심이에요. 예수님 중심이죠. 이 모든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러면 하나님이라는 것은 추상적 관념의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것을 시간과 공간에서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냈는데 인간은 자기 세계관 중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변화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찾지를 못 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찾는가? 여기 준비 없는 이별 가사에 보면 하루만 오늘도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나중에 한 번 들어보세요. 시간을 내게 줘, 이렇게 되거든요.

하루만 더 달라는 말은 지금 이 노래 부른 이 남자의 여자가 지금 헤어져요. 헤어지는데 갑자기 헤어졌기 때문에 준비 없는 이별이 된 겁니다. 준비 없는 이별이 되어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발 떠나는 그대라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고맙다고 그동안 같이 살게 되어서 고맙다는 말만 해야 되는데 그 말 할 시간도 없이 그냥 훌쩍 떠났어요. 그러니까 이 남자 입장에서는 자기에게는 많은 시간들이 있어요. 하루 하루가 쳐져있고 많이 있지만 진짜 의미있는 하루는 뭐냐 하면 그 여자에게 당신과 사귄 그 시간은 참 좋았어. 내가 그 말 해 줄 때 떠나는 당신이지만 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어, 라고 그걸 채울 수 있는 그 하루만 허락 하면 안 되겠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간의 개념이 인물에 종속된다는 거예요. 그동안 누구한테 종속되었습니까? 나한테 종속되었지요. 내가 내 살기 위한 하루 하루 스케줄 짠 거예요. 직장 회사 모든 것은 나만 살면 그만이에요. 처음에 강의할 때 했잖아요. 신은 왜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추상적 개념으로 신을 인간들이 만들어냈지요. 만들어놓고 인간이 뭐라고 지금 무슨 속임수를 씁니까? 우리의 창조자여 우리의 경배를 받으소서. 하지요. 이게 얼마나 신을 모독하는 일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신을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필요해서 내가 만들었고 내가 믿은 거예요. 왜? 다른 신을 재끼고 그 신만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거예요. 해놓고 경배해주는 거예요. 경배해준다는 말은 경배받아 처먹었으면 이제는 나한테도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채워달라는 거예요. 죽어서 천당 보내달라는 거예요. 이건 결국 인간의 세계관 기존의 세계관에 어떤 변화 없는 세계관 속에 하나의 숟가락 하나 얹은 거예요. 종교라는 걸 하나 얹은 거예요. 이 나라 국가가 무슨 지금 국가가 복음이라는 것은 전혀 중요시 하지 않습니다.

코로나가 중요합니까, 복음이 중요합니까? 제가 고린도후서 읽어보고 여러분께 질문해볼게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 정세균 집사한테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한테 묻습니다. 그 집사가 무슨 집사인지 모르겠어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 다 같이 읽어볼까요.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걸 한번 바꿔봅시다.
죽음에 넘기우다 이걸 코로나로 바꿔봅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코로나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이미 코로나로 죽은 우리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정세균이나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게 먹혀들어갈까요? 안 먹혀들어가지요. 왜냐하면 그 세계관은 시간의 세계관이에요. 앞으로 시간이 끝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그들은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 하는 것은 살다 죽으면 그만이야. 그거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께 한 게 뭐였습니까? 사람 죽으면 죽었다 끝나는 거야. 이게 본디오 빌라도의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군사 두 명 해가지고 무덤을 지켰거든요. 봉인까지 해가면서 지켰는데 그 다음 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덤이 시신이 없어요. 로마 군대가 추적해가지고 전부 다 시신 숨겨놨다는 제자들에게 다 찾아 갔어요. 제자들도 자기들도 모르는 이야기예요. “살아났어요? 난 모르는 이야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인간의 세계에서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일단 쉬는 시간에 코끼리 치약 실험 한 번 보시고 십분 쉬고 다음 시간에 가겠습니다.

 첨부파일 : 2020 춘천 여름 특강 1강.hwp (63.5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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