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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8 20:40:34 조회 : 106         
2020 춘천 여름 특강 2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름 : 정인순(IP:112.167.88.133)
2020 춘천 여름 특강 2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200827

이근호 목사

좀 더 어려울 수가 있어요. 두 번째 시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지요. 말씀이 천지를 만든, 천지를 만드신 분이 조그만 육신, 요셉의 아들이지요. 목수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로 꾸역꾸역 거기다 다 집어넣은 거예요. 이 안에 다 집어넣었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풍랑이 일었다 칩시다.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날 때 제자들의 세계관은 뭐냐 하면, 첫째 시간 복습해보면 모든 인간의 세계관은 그 밑에 뭐가 전제되어 있습니까? 나 살자. 남이야 죽든 말든 나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돼.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풍랑을 일으켜버립니다. 풍랑을 일으키니까 본색이 드러나는 거예요. 제자들이. 무서워 떨면서 물 퍼내고 하다하다 안 되어서 그 다음에는 누구를 깨우느냐 하면 예수님을 깨울 때에 이 제자들의 세계관 속에는 본인이 있고 다른 제자들이 있겠지요. 예수님도 여기 있겠지요. 예수님도 여기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게 숫자를 세면 여기 총 몇 명이냐 하면 13명이 있는 거예요. 제자 12명에다가 예수님 한 분, 그 배에 탑승한 인원이 13명이 탑승한 거예요. 13명이.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그런데 1, 1, 1 해서 13개 모였는데 주님의 일은 뭐냐 하면 여기 12의 1과는 다른 1이에요. 왜냐 하면 풍랑이 이는데 그들이 죽음의 위협을 느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데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잖아요. 예수님은 주무시고 있었지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계관이거든요. 세계관.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다와 풍랑을 어떻게 하기 전에 먼저 누구를 꾸짖느냐 하면 제자들보고 꾸짖었어요. 제자들의 1 + 1 해서 12는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12는 숫자로 제로가 되어야 됩니다. 0이 0을 보고 1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0은 영이 되어야 해요. 김 0 박 0 최 0 그냥 0은 0일 뿐이지요. 0은 0일 뿐이지 헤아림의 대상이 안 돼요. 왜냐하면 공간 입장에서는 이미 뭐냐 하면 심판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거든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 드리면 물 심판 받고 불 심판 받을 때 이건 결국 이겁니다. 전멸입니다. 전멸,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물 심판도 그렇고. 물 심판 때 8명 남았다 하는데 다 죽은 거예요. 8명 남은 것 같으면 노아 식구에만 물이 안 들어오고 나머지는 물이 차야 되는데 노아 살던 나의 고향 있잖아요. 복사꽃 피는 고향, 거기도 물이 들어왔다니까요. 그러니까 노아는 이 땅에 어떤 곳도 있을 곳이 없어요. 노아는 노아 있는 곳은 물에 잠겼다 이 말이죠.

방주의 의미는 뭐냐 하면 물에 잠겼다는 의미입니다. 방주가. 방주가 따로 높은 산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물에 잠긴 거예요. 심판 속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의 특징은 뭐냐? 심판은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줄 증인으로서 그들은 살아나야했습니다. 나 잘나서 구원,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너희들 다 죽었어. 우리만 죽은 게 아니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인간도 지금 무지개로 봐주고 있는 거야. 공간인데 공간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공간의 원리가 취소되거나 변경된 적이 없다는 것을 시간 속에서 알려주는 거예요. 시간 속에서. 지금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좋게 해석하지 마. 시간은 언제 끝날지 몰라. 하는 그것이거든요.

그러면 옛날로 봐서는 공간이 먼저고 그 다음 시간은 나중인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갑질 하고 있는 거예요. 똑 같네. 해 뜨고 해 지고 그게 시간이거든요. 자연 자체가 시계예요. 해 뜨고 해 지고를 측정해가지고 시간을 나눕니다. 반복되는 질서가 시계예요. 질서가 반복 안 되면 시간으로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왔다갔다 똑 같이 행동으로 보여야 시계로서 구실을 해요. 이래 갔다가 15분 뒤에 오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시간의 균질성을 가지고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에서 공간으로 갈 수가 없지요. 시간에서 공간을 갈 수가 없어요. 자기가 망한다는 것을 시간으로 거기서 찾아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기를 무서워해서 물 퍼내고 하지요. 그것은 뭐냐? 우리를 0으로 보지 말고 여기 있음으로 보자는 거예요. 있음은 숫자로 헤아림의 대상이 돼요. 이렇게 있다면 물통 두 개 하나 둘 헤아림의 대상이 돼요. 여기 아무것도 없다면 없는 걸 헤아려서 있고, 없고, 있고 셋이네, 이건 바보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있는 것만 계산에 숫자의 헤아림이 되는 겁니다. 있는 것만.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1을 제로로 하고 없는 것을 1로 쳐버려요. 없는 것을.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헤아리지 않고 넘어갔다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면서 이 세상은 모두 다 죽어 마땅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그 전의 인간들의 계산에 방주라는 것은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심판도 없는 거고 방주도 없는 거거든요. 없어서 인간의 헤아림에 인간의 숫자 헤아림에 포함이 안 돼요.

그런데 이 숫자 헤아림에, 점점 어렵지요. 할 수 없어요. 헤아림의 특징은 헤아림의 본인을 1로 이미 시작하고 있다는 게 이게 반칙이 되는 겁니다. 내가 헤아릴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이 나한테 있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세계관입니다. 인간의 믿음관이고 세계관이고 우주관이고 하나님관이에요.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필히 나를 구원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왜? 내가 믿어줬잖아. 내가. 내가 믿어줬는데 나를 배제하면 안 되지. 그건 반칙이지라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뒤에 무슨 이름 붙입니까? 내 이름 붙입니까, 예수 이름 붙입니까? 예수 이름 붙이지요. 그게 여러분 그렇게 해놓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어제 수요일 날 언급했는데 수요일에 설교 들으셨겠지만 다시 하겠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개념이지요. 컨셉. 기도라는 게 있다 이 말이지요. 성경에 보면 기도하라고 기도가 나오더라 말이죠. 기도가 나오니까 인간은 본인을 이 개념과 일치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기도 안 하는 내가 뭐다? 기도하는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기도 안 하는 내가. 전도 안 하는 내가, 성경에 보면 전도라는 말 나오니까 전도하는 나로 일치시키고 싶은 거예요. 내가. 전도하는 개념으로.

그러면 여기서 기도 안 하는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여기서 뭘 보태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을 자기 자신과 행함을 추가를 시킵니다. 기도하는 행위로 되면=기도 성사 됨이라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개념에 부합된다, 일치된다고 그렇게 하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평소에 내가 나의 세계관이 그렇기 때문에. 나의 해석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지요. 뭘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룬 중에서 주님이 던져준 모든 개념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지요. 그러면 기도는 누가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이루었지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나와요. 예수님 홀로 기도를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으면 여기서 격차가 생기지요. 내가 하는 기도와 주님 하는 기도와 격차가 생깁니다.

그러면 내가 기도를 하겠다는 말은 이건 나의 완전함과 나의 온전함을 추구한 게 되지요. 나의 완전함과 온전함.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기도하라가 율법에 포함되니까 내가 율법을 지킨 자가 되어버려요. 내가 율법을 지킨 자가 된다고. 그런데 성경에 보면 율법은 우리를 구원에서 탈락 시키기 위해서 준 것이지 율법 지켜서 구원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어디 아래 있습니까?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이미 공간적으로 이미 피조세계에서 저주 아래 있다 이 말이지요. 저주 아래 있으니까 주님께서 시간별로 모세 그 다음에 다윗, 모세 불러서 말씀 율법을 준 거예요. 이 저주가 저주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이 말이죠. 율법을 준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개념에 부합되기 위해서 우린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답다, 이렇게 해가지고 열심히 율법을 지켰는데 그 결과는 뭐였습니까? 전멸이었지요. 다 죽었어요.

전멸이라는 말은 남은 자를 남길 때 전멸되는 거예요. 남은 자라는 것은 전멸되었음을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거기서 남은 자가 생기는 겁니다. 죽었는데 죽은 중에서 (저기 떡 하나 주시기 바랍니다) 죽었는데 주께서 “잠자는 자야 일어나라.” 해가지고 “야 너 죽었다고 아뢰라.” 이 일을 시키는 거예요. 이것을 그래서 제가 여수 강의에서 제목을 뭐라 했느냐 하면 진멸과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진멸과 예속, 진멸과 구원이 아니고 진멸과 누구한테 소속되었다는 진멸과 예속입니다.

성도는 예속 된 자이지 구원된 자가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개념은 주님이 구원 된 거예요. 우리는 구원에 예속 된 사람으로서 구원된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직장 나오지 마라 하면 오면 되지요. 잘리면 되지요. 예속 된 사람이지 내가 내 구원을 내가 소지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나이 구십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90 되어봐야 90살 산 거 다 날아갔어요. 나한테 안 남아있어요. 오래 살면 뭐가 남아있어야 되는데 남아있는 것은 늙은 육신밖에 없어요. 아이고 아파라. 허리 아픈 것 외에는 많이 살았으면 뭐가 남아 있는 게 있어야 될 텐데 망가지는 내 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망가지는 몸도 죽기 전까지 있지 드디어 심장 박동이 찌익 해보세요. 그것도 없어요. 그 기억도 없다고요.

시간은 우리를 속였던 거예요. 우리는 공간에 종속되고 예속 되었는데 시간은 마치 우리에게 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처럼 속여 온 겁니다. 시간이. 그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물을 통해서 시간을 다시 끄집어냅니다. 인물에서. 인물에서 다시 시간을 주는 겁니다. 이 시간을 줄 때 이미 완성된, 시간을 완성된 분에게서 주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뭐냐 하면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길어요. 이렇게 긴 겁니다.

시간과 공간이 한 인물화 되어야 이 논리가 성립 돼요. 시간이나 공간이나 우주나 한 인물로서 결정된 거예요. 예수님이 모든 피조의 세계의 완성을 한 거예요. 따라서 인간의 행함은 기도함은 나의 완전을 추구하지요. 그러면 주님이 주신 것은 율법이 나오지요. 율법에서 기도하라하고 내가 성취했다고 여기는 기도하고 이 격차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이것이 바로 너는 내가 원하는 개념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너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율법 지키고 지옥 가는 겁니다. 율법 지키고 지옥 가는 거예요.

아니. 이미 지옥 갔는데 지옥 간 것을 율법으로 확인 하는 겁니다. 이미 죽어 마땅한 것을. 그래서 살려고 한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노력이에요. 떡을 하나 먹더라도 이건 죽으라고 먹는 거예요. 뭐든지 죽으라 먹는 거예요. 왜냐하면 먹어도 죽고 안 먹어도 죽으니까 이왕 죽는 것 먹고 죽자. 이왕 죽는 것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자 이 말이지요. 결혼 안 하고 뭐건 결혼 하고 살고 하다가 헤어지고 살고 살다가 또 헤어지면 되고 구애 받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 세계관은 나의 세계관은 주께서는 밀어내니까. 나의 세계관. 내가 살고자 하는 세계관은 주께서 인정을 안 해줘요. 주님의 세계관이기 때문에 모든 걸 인정을 안 해준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다시 봅시다. 오늘 세 번째 부르는데.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게 줘. 안 돼. 지금은 이대로 떠나는 걸 그냥 볼 수는 없어. 차라리 나 기다리라 말을 해, 이렇게 높은 음으로 올라갑니다. 들어보시면.

시간이라는 것이 그전에는 나 혼자의 시간이었는데 나를 떠나는 그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간이 내게 없었던 새로운 시간관이 발생 되는 겁니다. 이건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고 너를 위한 시간이 내게 없었다는 겁니다. 내 인생을 살면서 주님에게 드릴 주님의 세계관에 합류된 시간은 내게 있었다, 없었다? 없기 때문에 우린 저주 받고 심판 받는 거예요. 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요소가 없느냐 이 말이에요. 왜 하늘의 요소가 없었느냐 이 말이에요.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없는데. 나는 나밖에 없는데 주님 안 계신데 어떻게 하겠어요. 지난 낮 설교에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최종 모든 일을 본인이 다 관리하면서 무슨 십자가가 왔다고? 무슨 멍멍 무슨 그런 개소리가 있느냐 이 말이죠. 이게 욕입니까? 욕이라면 좀 곤란한데, 욕 아니라고 칩시다.

십자가가 들어왔으면 최종 관리자가 내가 아니에요. 나는 다만 최종관리자의 자격으로 십자가 앞에 서있어야 돼요. 그 최종관리자가 안 된다 하면 안 돼요. 최종 관리자 하세요. 하시고 그 앞에 떠나버린 그대가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말씀 지키면 마지막 뜨거운 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할 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거라니까요. 사랑이라는 거예요. 사랑. 사랑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대치 개념이에요. 내가 뭘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사랑은 생산됩니다. 그 분이 사랑을 줄 때 나는 사랑의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이건 부모가 애 낳을 때 규격 맞췄어요? 쟤는 낮에 놀러와가지고 과자 껴안고 그런 애 낳게 해달라 그런 계획 세운 적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부부가 사랑했을 뿐이지요. 사랑했는데 결과가 생산됐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사랑의 열매라 하지 않습니까? 낳았다는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사랑은 마찬가지로 나의 세계관에 종속된 거예요. 이건 나 살고자 사랑하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사랑했는데 너는 나한테 뭐 해줬냐? 이런 식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내가 없을 때 나보다 먼저 생겨지는 것이 사랑이고 그 다음에 출현하는 것이 바로 나가 되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보겠습니다. 내가 없어지고 등장되는 나, 나와 내가 헤어지고 등장, 이 자리에 있는 나, 그럴 때 뭐냐 하면 두 부부가 있을 때 남편 있고 아내가 있는데 전에는 결혼할 때는 내가 있고 내게 필요한 여자라서 나는 너와 산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없어지지 않고 내가 있잖아요.

내가 있는 한 내 세계관도 같이 있지요. 내 세계관은 누구만 살자? 누구만 왕이다? 누구만 신이다? 나만 신이고 나만 사는 거예요. 그 여자는 그냥 이용하고. 여자도 마찬가지예요. 나만 살기 위해서 남자랑 한 거예요. 괜찮은 보디가드 돈 벌어주는 남자까지 자기는 이제부터 행복 시작 불행 끝. 둘 다 착각하고 있는데 내가 없어지고 난 뒤에 내가 없어진다는 말은 내가 나를 떠나버리는 겁니다.

내가 나를 떠나버리면 내가 없어지는 거지요. 내 자리에 내가 없어지게 되면 내가 없어지고 주님에 의해서 질질 끌려가 다시 예속된 자로 내가 왔을 때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속된 나, 아무도 예속 되지 않은 나였는데 예속 된 나가 되어버리면 나는 나라는 남편은 저 아내를 볼 때에 그냥 아내가 아니고 나처럼 주님께서 불러준 아내가 되겠지요. 그러면 둘 사이에 뭐로 만납니까? 둘 사이에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두고 만나는 거예요. 주께서 만나게 해줬다 이 말이에요. 이해 안 되시는 얼굴인데요. 주께서 만나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아내 볼 때 자기 부인을 하고 남편을 볼 때 자기 부인을 하는 거예요. 자기 부정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는 자로서 내 눈에 보이니까요. 그러면 뭐냐? 상대는 뭐로 보입니까? 나에게 과분한 사랑으로 보입니다. 나한테 과분한 사랑. 과분한 사랑, 물론 과분한 사랑한테 얻어맞아 본 적도 있고 쫓겨난 적도 있겠지만.

가사에 보게 되면 이 가사에서, 제가 이 가사를 못 놓치는 이유가 끝부분에 보면 마찬가지로 하루만 오늘 더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해놓고 차라리 나를 기다리라고 말을 해, 그 다음 말이 뭐냐? 마지막 가사가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도록,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도록

그러니까 주님이 있는 아내와 남편 되어야 주님만이 영원하거든요. 주님만이 영원할 때 우리의 사이도 영원한 사이가 되는 거예요. 영원한 부부가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 부부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으니까. 영원한 부부는 아니지만 천국 간다면 우리 사이는 영원하게 헤어질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요구해서가 아니라 욕망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아는 나는 나밖에 모르는 나인데 내가 아닌 나를 주님이 일방적으로 등장시킨 나로 바뀌어질 때 그런 나는 영원한 나가 되는 거예요. 하루를 살더라도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영원함이 나와요. 아까 코끼리 실험 봤지요. 하루는 짧지만 짧은 하루에서 뭐가 나온다? 영원을 증명할 수 있고 영원한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신다 이 말이에요. 하루가.

나 당신하고 오늘 살아도 나는 괜찮아. 나는 후회없어. 우리 같이 죽어도 나는 개의치 않아. 당신과 함께 있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상관없어. 설마 당신이 나를 버린다 할지라도 나는 보내줄게. 여기 가사에 나옵니다. 아무것도 미안해 하지 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나는 괜찮아. 그래서 사는 동안 함께 나눈 추억이 있잖아. 다행이야. 감사할게. 감사 막 나와요. 준비없는 이별에 보면, 나레이션 나오는 부분에 나오거든요. 그대를 보낼 오늘이 수월 할 수 있도록 미운 기억을 주지 그랬어. 차라리 날 미워해. 날 미워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왜? 당신 있음 그 자체가 나는 행복이었으니까, 이런 내용. 미친 것 같아. 배알도 없이 이상한 세계관이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도 사랑이 오게 되면 자기가 함몰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크고 전부가 되고 나는 작고 그대의 부분으로도 감사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부분이라도 감사하기 때문에. 그러면 부분은 부분을 안 바라보지요. 부분은 뭘 바라보지요? 전체를 바라보게 되어있어요.

바로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인간은 어떻게 마지막을 대비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이미 성령 받은 베드로가 성령 받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들은 지금 이런 입장에 있다는 거예요. 이런 입장, 어떤 입장이냐 하면 세상과 차이나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세상은 본인들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 복음 이야기가 자기 것을 잃지 않고 통지표 있잖아요. 통지표 보면 수학 영어 국어 주욱 있고 기독교 학교 같으면 제일 끝에 채플 하나, 딴 거 95점 90점 채플 85점 이렇게 다 붙이는 것처럼 이것도 필요하고 요것도 그다지 필수적인 건 아니지만 기독교 학교니까 해놓으면 좋겠지 해서 선택과목 하나하나가 뭐냐 하면 교회 가기, 복음 듣기 같은 것을 붙여놓는 거예요. 이런 것은 그런 복음은 없어요.

열두 명의 제자가 열두 명의 제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풍랑과 바다를 꾸짖기 전에 먼저 누구부터 꾸짖느냐 하면 열두 제자부터 꾸짖어요. 너희들은 제로야 제로. 제로란 말은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영향력을 끼친다는 말은, 진짜 예수님만 1이 되면, 1이 된다는 말은 풍랑과 바다도 어디에 수렴하니까? 어디에 다 모여들어요? 파도를 치든 풍랑을 치든 다 누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겁니다.

골로새서 1장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사도바울의 핵심을 함축한 귀절 중에서도 그 중에서도 하나가 1장 16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계시니라

여기서 그가 둘이 되겠어요, 하나가 되겠어요? 1이에요. 1이 되면 나머지는 뭡니까? 1이라고 하면 안 돼요. 기도할 때 누구 이름으로 하라 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하지요. 그 말은 기도에 나오는 개념이 우리보고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이루어서 합치시킨 기도 개념이 기도하는 너를 죄인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기도하는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기 전부터 너는 죄인인 것을 기도를 통해서 밝혀내도록 내가 하겠다 이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최종적인 1로 간주하는데 1로 간주하는 것을 내가 뭐로 만들겠다? 0으로 만들어버리겠다, 제로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이에요. 너는 있으나마나 하다. 하지만 니가 여기 있다는 것을 좋아하지 마라. 니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니는 없었는데 있다는 말은 너를 있게 한 그 분이 있다는 거예요. 주님이 있음이고 나는 그 있음에 의해서 새롭게 등장한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나는 예속된 나예요. 나를 그냥 나라고 하면 안 되고 내 배후에 누군가가 나를 했다는 것과 겸해서 이야기해줘야 돼요. 주님과 함께 있다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다.

갈라디아서를 함께 볼까요. 3장 26절에 보면 지금 여러분 읽기도 피곤해하니까 제가 대신 희생하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이걸 가지고 세상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다양성이라고 얘기해요.

다양성은 뭐냐 하면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다음에 뭐라 하느냐 하면 숫자로 나와요. 안에서 하나, 하나 하나가 아니라 그 전체는 하나에 복속되는 거예요. 따라서 나를 보고 하나라고 헤아려버리게 되면 2가 되니까 경쟁관계가 되니 그렇게 하지 말고 나는 항상 하나됨에 의해서 오늘도 하나로 살아가는 거예요. 나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하나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도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가 아니라 주님이 살아있다를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로가 된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책임질 필요가 없지요. 내 인생이 아니니까. 제로가 무슨 제로에 대해서 책임을 집니까? 1이 제로에 대해서 책임지지요.

다시 베드로후서로 돌아가봅시다. 베드로후서 6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그 다음에 뭐가 나오지요? 멸망, 물이 넘침으로 멸망되었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우리 인간이 1이라고 본다면 멸망할 걸 왜 만들어놨습니까, 라는 말이 성립이 돼요. 우리가 멸망한다니까, 멸망할 걸 왜 만들어놨습니까, 이렇게 되지요.

이 정답은 이렇게 됩니다. 제목 후보감 나왔어요. 제목, 되찾은 시간.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시간을 만들었어요. 공간도 만들고 시간을 만들었어요. 공간을 만들 때부터 그 공간을 쪼개는 것을 무엇으로 쪼개느냐 하면 보통 피자 쪼갤 때는 칼로 쪼개잖아요. 하나님께서 창조를 구분할 때는 시간으로 구분했어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다, 한 날이다. 그 모든 날은 한 날이 되는 그 하루가 된다는 거예요. 하루는 진짜 하루를 겨냥해서 만든 하루예요. 그게 6이라 하는 것은 1+1+1+1+1+1 그러면 여기는 7이 되어야 될 텐데 7은 여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결론이기 때문에 여기 속하지 않고 1이 돼요. 1이 되어버리면 1에서 1의 다양성이 나온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다양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나왔던 것 같이.

유대인에서 헬라인에서 그리고 남자나 여자에서 뭉쳐서 1로 만들 생각하지 마세요. 이 방법은 인간적인 방법이에요. 이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여기서 무슨 요소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멸망이라는 요소가 날아가 버려요. 멸망이라는 것은 없음입니다. 없음. 없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것이 멸망이에요.

그동안 왜 있었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있게 한 것뿐이에요. 잠시 있게 한 것을 회수한 겁니다. 멸망이라는 것이. 우리 보기에는 이건 원망스럽고 기분 나쁘고 하지만 주님께서 그냥 가져간 거예요. 주님께서는 노름할 때 노름판의 오야입니다 화투 해가지고 확 뿌려놓고 그 다음에 거둬가잖아요. 도로 가져가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멸망이 있어줘야 예수님이 주가 돼요. 심판주가 되니까. 내가 심판할 권한이 있음을 뭘 퍼뜨려놔야 증명 할 것 아닙니까? 퍼뜨려놔서 조질 것은 조지고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멸망이라 하는 것은 모든 창조의 원리대로 내가 실시했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게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온 날이 1 1 1이 무슨 날이겠어요? 이걸 창세기 2장에 보면 무슨 날입니까? 마지막 날이 무슨 날이에요? 마지막 날이 이게 창조의 날인데 이 창조의 날이 안식일의 주인이지요. 시간이 뭐가 되지요? 시간=하나의 뭐가 되느냐? 인물이 돼요. 이 공식이 성립 된다고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안식일이야. 내가. 안식일은 언제부터 언제입니까, 라고 따지는 것은 너희들이 인간들 땅의 시간이 아직까지 흐르고 할 때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되지만 안식일이 누구십니까, 묻는 것은 공간+시간+ 이게 인물화 될 때 가능하다 말이죠.

왜 인물화 되어야 됩니까? 인물화 되어야 이게 성립 되거든요. 이게 사랑이. 노래 또 부를까요? 당신이 없는 시간은 내게 시간이 있어도 이건 시간이 아니라는 거지요. 당신과 함께 있는 하루가 내가 이제사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만큼 소중한 하루인지. 하루만, 제발 하루만. 자기도 시간 많으면서? 아니에요. 당신과 당신에게 내가 본마음을 전할 수 있는 단 하루만 허락해주세요. 제발. 내일 가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만 허락해 달라. 당신의 하루에 내가 종속된 하루가 되면 당신의 하루는 1이 되고 나의 하루는 제로가 되고, 나는 시간 없음이 되고. 또 이 말은 당신의 있음 앞에 나는 죽은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에요. 당신이 살아있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주님은 살아있고 나는 죽었고, 그게 믿음이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같이 십자가에 죽었나니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십자가 졌다는 식으로 없어진 내가 그리스도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없는 내가 나의 이름으로 여기 등장해있는 거예요. 그 관계가 무슨 관계? 믿음.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등장했다는 의미에서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믿음에서 행함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 믿음이 주인공을 찾아가는 믿음. 주인공이 퍼뜨려놓은 믿음, 주인공이 뿌려놓은 사랑, 따라서 그 사랑 앞에 그 개념 앞에 우리의 사랑은 그것은 죄가 되는 거예요.

요한 1서에 보면 4장에 보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면 우리가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 사랑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사랑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아내 사랑한 것이 진실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누구도 통해야 하는 사랑이에요? 주님한테도 사랑이어야 되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안 받는다는 말은 그 성질 그 본성가지고 주님 말고 다른 걸 강아지를 사랑해도 그건 사랑한 게 아니에요. 강아지 아프면 안락사 시켜버릴 거예요. 집어던져 버릴 거예요. 사람은 내가 귀찮으면 다 만사가 귀찮아요. 내 몸 편한 게 최고입니다. 바른 소리 할 땐 좀 적어놓으세요. 사람은 지 몸 편한 게 최고예요. 이게 진리예요. 남편이고 아내고 자식이고 부모고 다 귀찮아요. 내 몸부터 편해야 됩니다. 국민을 위해서? 거지같은 소리 하지 말고.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은 시간은, 되찾은 시간은 인물이에요. 인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되찾은 시간이, 그 분에서 시간이 나오고 공간이 나온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왔다는 것은 그 마지막에 물로 불로 진멸할 때 진짜 불로 됩니까? 언제 물로 심판 받았습니까? 묻지 말고 누가 그 일을 하십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지. 나 이거 구십까지 살았다 하지 말고 누가 죽이십니까? 나는 나를 죽일 마음이 없는데 누가 감히 나를 죽이십니까?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누가 건드립니까? 내가 건드린다. 왜? 이렇게 되거든요.

주께서 미리 건드려준 것을 여러분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건 눈 뜨신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건드려줄 때 나를 진멸의 멸망의 대상으로 볼 때 비로소 나는 그동안 몰랐던 아무리 공부해도 몰랐던 내 자신이 누군가를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내 혼자 거울 보고는 몰랐는데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버림받아야 할 대상이었구나, 진멸의 대상이었구나.

그런데 왜 지금까지 진멸 안 했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나한테 여유를 시간적 여유를 주신 거예요. 시간적 여유를. 그런데 그 시간이 아무리 천년이 되든 만년이 되든 관계없어요. 그게 단 하루라도 충분해요. 내가 주님께 구원 받는 시간은 단 하루라도 괜찮아요. 왜? 그 하루에서 코끼리 치약처럼 계속해서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에. 부분 속에서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것이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서 전체가 나오니까.

여러분들이 어릴 때 아는 동화 알라딘 램프 있지요? 램프 종 이름이 뭐지요? 지니지요. 그래서 인공지능 이름이 지니인가? 조그만 호리병 거기 안에 들어있는 머슴도 요만한 줄 알았지요. 막상 끄집어내어보니까 목소리가 보통 톤이 아니에요. 뭘 드리겠습니까? 농구 선수 서장훈이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서장훈이가 이 호리병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원초적 목소리 보이스. 태초의 보이스, 창세기의 보이스가 거기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이용하신 거예요. 다시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주님께서 변화를 주십니다. 우리가 그냥 죽은 자가 아니고 율법의 종이 된 거예요. 종의 특징은 율법이 누군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종으로 부여받은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죽어 마땅한 죄인이 된 거예요.

율법의 종인데 율법 자체가 겨냥하는 것이 아들을 겨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에서 율법에서는 죄의 종이었는데 율법이 추구하는 완성이 뭐냐 하면 의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4장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전체가 부분 안에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끄집어내는 거예요. 율법에서 저주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율법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여러분 아시는 것과 같이 저주에서 끄집어낸다, 또는 진노에서 멸망에서 심판에서 끄집어낸다, 그런 뜻이거든요.

이걸 저는 달리 이야기하겠어요. 인간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인물이 되겠지요. 주님과의 합치된 인물이 되겠지요. 인물에서 다시 시간과 공간으로 파견 근무 나갔어요. 파견 근무 나갑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된 채 시간과 공간을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은 곧 불로 망한다. 그리고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시간 계산은 너무나 자기의 이기주의에서의 시간 계산입니다. 주님이 계산한 것과 다르다. 주님은 시간 흘러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 오실 때 시간은 종식 되는 겁니다. 주님이 타이ald 맞춰서 딱 오게 되면 그 동안 시간은 호리병 안에 모든 시간은 거기 다 들어가 버리죠. 이게 천년이 흘렀든 하루가 흘렀든 천년이 하루같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 안에서 같이 여기서 여기서 나왔다, 출두했다, 여기서 시작했다는 그 원초적인 모습을 시간은 우리를 이끌어내는 이정표 역할 하나의 안내판 가이드 역할을 시간이 하는 거예요. 시간이 가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 공간은? 지금 이 세상에는 시간이 주도해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공간은 시간 따라서 전부 다 쇠퇴하게 되어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시간이 흐르면 모든 피조물들이 썩습니다. 시간이 우위에 있지요. 시간을 이길 수 있는 피조 세계는 없어요. 다 쇠퇴하게 되어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는 한 뭐냐? 아까 그 가사에, 차라리 날 기다리라고 말을 해. 영원토록 영원한 곳으로 우리가 생산되어있다. 우리 성도는 바로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생산되었기 때문에 이 쇠퇴하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다시 한번 돌아봅시다. 베드로후서 3장 보고 다시 갈라디아서 4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3장 11절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라 그럴 때 이렇게 강의를 들었으니까 우리의 태도는 간단해요. 잘하셨습니다. 원래 하던 대로 되는 게 마땅하지요. 원래 세상이 그런 게 아니겠어요? 주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든 게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걸 사랑하는 자들아 여기 사랑이라고 나오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누가? 주님이 사랑했던 자들아 너희들은 이미 사랑 안에서 너희들은 저렇게 너 자신의 자체가 주님의 작품으로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구상하는 요건과 요소는 다 수입품이에요. 주님한테 주어진 거예요.

경건과 행실이라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죄인 됨을 알 때 이건 말려도 경건해요. 부족합니다. 내가 부족한 걸 알고 모든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나한테 과분한 걸 알게 되면 이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에요. 더 이상 뭘 보탤 것이 없어요. 당신 양말 똑 바로 벗어놓으라고 했지. 양말 함부로 벗어놓으니까 내가 죄인이 되어가지고 또 이런 죄를 짓다니. 이런 남편에게 뭘 더 나무래요. 내가 양말 같은 것에 신경 쓰나? 이렇게 나오면 많이 컸다 요새 개긴다. 올라오네. 풀어줬더니만. 이렇게 되겠지만 그게 아니고 당신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그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나는 너무 과분하다. 당신 죽어봐라. 나한테 그런 소리할 사람이 있는가? 그러면 아내가 기분 나빠가지고 당신은 살고 나보고 죽으라고 하는 거냐? 나 죽고 난 뒤에 장가가려고. 이렇게 나오면 이상한 소리를 할 거지만, 본심이 어쨌든 간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잔소리도 할 수 있잖아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결론이 이상하게 되는데.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은 하늘의 요소 때문에 지금 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땅의 요소, 나 살고자 하는 요소는 나하고 상관없다고 여길 때 그것이 바로 구분된 그걸 거룩이라고 해요. 거룩을 구분, 땅의 사람과 구분되는 거예요.

물론 우리가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걸 잠시 잊어버리지만 성령께서 도와줍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죄라고 지적을 해줘요. 다시 말해서 니가 개념 니가 스스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경건의 개념에 합치하려고 노력했지. 그런 짓 하지 마라. 니는 죄인이야. 죄를 드러내면 그게 경건이야, 라고 주께서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13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한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소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시간적 바라봄이 아니고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기 때문에 시간은 날아가 버렸어요. 공간적, 이쪽 공간에서 하늘을 새 하늘을 바라보는 거예요. 시간이 몇 년이 흘렀든, 살아생전에 못 먹고 죽든 거기에 관계없이 시간은 관계없어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 시간을 따지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갈라디아서 4장 봅시다. 이거 하고 마치겠습니다. 강의를 이렇게 성경 말씀을 하고 모든 것이 말씀으로 물이든 불이든 말씀으로 다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하고 4장 8절부터 이것을 놓쳐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복음 전하고 난 뒤에 반드시 이것을 집어넣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에게 종노릇 하였다 이 말이죠. 종이 되었는데 종노릇, 누르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이 세상의 해석이고 의미예요.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어찌 종노릇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에게 전하고 수고한 것이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내가 헛될까봐 걱정된다, 진짜 걱정된다 걱정 돼.

이 말은 주님이 전한 이 복음이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일이에요. 주의 일은 특징이 뭐냐? 나의 일이 아니다는 뜻이에요. 주의 일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덮친 거예요. 성령이 와서 덮쳐버린 거예요. 그러면 내가 했던 일은 뭐냐? 본질상 진노의 자녀, 종의 자녀였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꼼짝 못 했느냐 하면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너무 참고 도서 너무 나를 남들 보여주며 살기 위해서 너무 많은 정보와 학습과 학문과 그런 것들로 둘러싸였고 추가적으로 종교에 관한 날과 절기를 지키는 그것을 가지고 나다, 라고 이렇게 규정해 왔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복음을 알고는 무엇을 뚜렷하게 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인데요. 복음을 아니까 복음에서 생산된 사랑이 생산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동안에는 전혀 몰랐던 나를 알게 된 거예요. 나를 알게 되니까 나에게서 나오는 내 죄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들어있었네. 요 귀여운 것, 이것 갖다가 배설물로 버리고, 하이데거도 나오고 이것도 버리고 들레쥬도 나오고 소크라테스도 나오네. 수고했다. 신학도 나오고 조직신학도 나오네. 이것도 버리고. 헬라어 히브리어도 나오네. 이것도 버리고 목회는 이렇게 해야 한다.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 그것도 버리고. 버리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어차피 늙어 봐요. 늙으면 알게 되겠지만 늙기 전에 다 버리는 거예요. 내가 나로 경건한 사람 만들고 내가 훌륭한 사람으로 천당 가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지금은 배설물로 아낌없이 버릴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내한테 잘 보이고 내가 남편한테 잘 보이려고 마음에도 없는 것도 하고. 그거 해놓고 뒤에 이것을 붙이면 돼요. 당신 내가 사랑해. 뒤에 붙이면 돼요. 이거 마음에 없는 소리야. 갖다 붙이는 거예요. 갖다 붙이는 용기, 그 자신감, 그러면 니가 죽으려고? 바로 그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행동할 때 주위에서 그런 소리 들을 때 니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그런 소리를 주위에서 들으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는 내가 아니고 다른 나를 집어넣고 육신을 옛날 우리의 모습들이 습관화된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두 종류의 나, 하나는 없어질 나, 하나는 새로운 나,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이 성경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함, 죽지 않음,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주어지는 이 개념이 남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들어왔던 개념으로 우리 안에 작동하고 활동하고 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는 죽었지만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있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20 춘천 여름 특강 2강.hwp (68.0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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