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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0 18:08:02 조회 : 71         
46강-욥기 13장 14~19절(교만의 한도)20200830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19.206.92.141)
46강-욥기 13장 14~19절(교만의 한도)2020083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3장 14~19절입니다. 구약성경 773페이지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찌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이 얼마나 아팠으면 자해소동까지 벌일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13절에 보면 “내가 내 살을 내 이로 뜯고 물고 내가 나를 죽이고”라고. 내가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러나 나는 기어이 구원받아야겠다는 겁니다. 내가 이 고통을 내 쪽에서 제거하는 방법은 스스로 자살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아프다는 겁니다.

나보다 고통이 더 심한 거죠.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도 욥처럼 똑같아요. 내 인생을 내가 감당 못 합니다. 감당할 수가 없어요. 세상이라는 것은 내 뜻대로 딱딱 정돈되면 왜 우리가 감당을 못하겠습니까. 하겠죠. 하지만 세상이라는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더 많아요.

전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누구보고 그런 말씀 드렸어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 우리 어머니는 마스크 끼고 돌아다니는 꼴을 못 봤잖아요. 얼마나 천만다행입니까. 마스크 끼고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그런 세상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했죠. 무슨 이런 터널 같은 것이. 차라리 터널 같으면 좋겠는데 마지막 남은 우리의 세상 상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세상은 우리 뜻대로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그것을 지금 욥이 우리 대신 화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신의 구원을 언급합니다. 그 대목이 좀 난해한데요. 16절에 보면 “사곡한(악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나의 구원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이 이야기하기를 약간 복잡한데요, 악한 자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서지를 못 한다고 이야기하는 내 생각과 일치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중간에 욥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이래도 저래도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나를 비난하고 있잖아. 내 사정도 모르고. 너희들은 왜 하나님께 구원받는 방법을 하나님의 눈앞에서 나를 보면서도 구원을 모르느냐는 이 말이에요.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너희를 사랑해서 구원의 방법을 줬는데 그 방법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방법과 전혀 다르게 아무 죄도 없는 의로운 내가 너희들이 당해도 억울해하는 그 억울한 고통을 내가 왕창 짊어지고 있다는 이 모습이 너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신약시대에서 보기에는 이게 지금 신약적인 이야기를 하고있는 건지 구약적인 이야기인지 지금 계속해서 그 경계선에서 우리에게 비춰주는 겁니다. 따라서 그래도 우리는 욥이 구약의 인물이고 나중에 마지막 친구가 와서 나무란다는 사실을 우리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구약의 욥이 주장하는 것과 신약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들의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그 둘 다를 알면 되죠.

미리 말씀드리면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신약에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는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로마서 14장 8절에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지금 구약에 있는 욥은 지금 죽겠다고 난리예요.

그러나 신약의 사도바울이 만약에 욥을 보았다면 “죽어라. 죽는 것도 주의 일이다. 너는 앙탈 부릴 권한이 없어. 주께서 죽으라고 죽이는 건데. 그러면 네가 주의 구원받은 자라면 주의 뜻으로 그냥 감수하면 될 문제지 무슨 발악을 하느냐”라고 말하면 그만이겠죠. 물론 사도바울이 욥을 보고 선배보고 그런 소리 할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서 욥이 신약에서 바로 정답 때리고 ‘나는 사도바울 편이야’라고 성급하게 들어가시면 안 되고요. 욥부터 들어가서 사도바울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욥에 들어가게 되면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겁니다. 인간이 고통이 찾아오면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더 강렬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에게 여유가 있고 몸이 건강하면 남을 잘 배려할 줄 알아요.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서양의 합리주의가 아니고 동양의 유교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조선은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 사고방식이 끝나지 않았어요. 북한 같은 경우에 대표적이고요. 유교적 가부장적 제도가 북한은 유지되고 있어요. 유교적 가부장적 제도. 민족의 태양이신 어버이, 아버지 찾고 있다고요. 그런데 남쪽에 있는 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천지가 바로 그거예요. 기둥 같은 아버지를 찾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라고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아버지 없어서 천만다행입니다만.

자꾸 아버지를 찾는 거예요. 그분에게 모든 권리를 인양하고 당신 뜻대로 따르겠다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특히 신천지만 그렇다고 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 국가가 신천지화 되어가고 있어요. 신천지를 그렇게 공격해 놓고 국가 전체가 드디어 신천지화 되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이 없으면 각자 자기 팔 흔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고통이 오게 되면 어떻게든 나만 살겠다고 나만 지키겠다고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본능입니다. 그러면 그 고통이 올 때 느슨해졌던 자아감이 갑자기 강렬해져요. 그러면 이 자아를 살리기 위해서 붙잡을 만한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붙잡을 만한 사람을 붙들 때 어떤 마음으로 붙드느냐 하면 ‘당신이 나에게 와서 하나의 진리가 되어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붙들어요. 당신이 나에게 진리가 되어 주세요.

인간은 진리를 찾아요. 그런데 진리 안에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자각하고 있는 나를 영원토록 보존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 진리입니다. 나를 지켜줄 때 진리예요. 나를 지금보다 더 힘들게 한다든지 나의 마음을 흔들게 만드는 그거는 나는 아예 제껴 버립니다. ‘그건 진리가 아니야. 그건 진실이 아니야’라고 쳐버려요.

욥에게 고통이 주어졌을 때 욥은 전에 고통이 없을 때와 행동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우선 두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우선했어요. 자식부터 먼저 챙겼습니다. 어쨌거나 자기를 비웁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우리가 욥을 한지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을 텐데 1장 끝에 보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합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아닙니다. 저는 저를 챙길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해요. 초창기에는 그렇게 했어요.

아직 까지는 자기 몸에 아픔이 온 것이 아니고 가진 재산이나 날리고 가진 자식이나 죽었을 때는 여전히 이거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여기 보면 “찬송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해요. “하나님 잘하셨습니다”라고 상당히 느긋하고 초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직접 몸에 고통이 오니까 그 고백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다 날아가 버렸어요.

다니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다. 여러분은 다니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다니엘 3장인가 나오죠. 여러분은 2가지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떠오르는지 보세요. 다니엘 세친구는 불속에 들어갔다. 첫 번째, 불은 빨갛다. 두 번째는 불에 열기가 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느 쪽이 마음에 확 당깁니까? ‘빨간 불속에 한번 들어가 보지, 뭐’라고 되거든요. 빨간 불속에.

그러나 실제로 불속에는 보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거예요. 느껴지는 거예요. 열기가. 보는 것이야 보죠. 그건 관찰자로서 주변에서 욥의 세친구가 어떻게 되는가 관찰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나 그 열기에 대해서는 보는 것도 귀찮아요. 후다닥 뛰어 나가버립니다.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만 조금 실수로 나와도 후다닥 피하듯이 우리 인간은 본능적입니다.

이것은 인간 욥에게 고통이 주어진 것은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한계 안에 갇혀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자기 한계. 그 한계가 무슨 한계냐 하면 나라는 것을 나 자신이라는 의식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한계입니다. 그러면 그 한계에 대해서 우리가 욥기 13장을 보면서 남의 이야기라고 듣지 말고 내 이야기라고 들으면서 욥의 이야기를 한번 따라 가봅시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 말은 앞에 ‘나’라는 말이 두 개 다 있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고통이 주어지게 되면 갑자기 없던 ‘나’라는 ‘나는 내가 지키지 누가 지켜주랴’라는 ‘나’라는 자각이 강렬합니다.

강렬하면서 그다음부터 뭐가 생기냐 하면 나를 지키는 그 자체가 이제는 소박한 나의 소망이 되는 거예요. 소망이. 나를 지키는 것이 소망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풋풋하게 “너 나중에 커서 뭐 할래?” “대통령”이라고 뭐든지 말로 할 수 있는데 자기 몸이 아파 버리면 그다음에는 소망이 축소돼요.

“네 소망이 뭐냐?” “빨리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 나도 남들처럼 걷고 싶어요”라고 해요. 얼마나 소박합니까. “나도 좀 더 살고 싶어요” 어디 병원에서 의사가 “당신은 6개월 후 끝입니다”라고 하면 ‘1년 만이라도 더 살아봤으면’이라고 해요. 고통이 오게 되면 자아가 생기고 자아는 자아에게 소망이 생기면서 그 자아는 갑자기 현재 내 고통과 연결시켜서 가장 낮을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겸손할 수 있는 그 고통으로 머물게 되죠.

제가 군대라는 것을 가봤습니다. 군대에서 인간 된다는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한데요. 군에 갔는데 그 군에 어디서 근무했느냐 하면 저는 근무란 말하기 싫어요. 군에서 놀았으니까. 어디서 놀았느냐 하면 38선 있는 양양 밑에 하조대, 우리나라 38선 지나가는 그곳에 주둔지가 있는데 텐트 쳐놓고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통신부였기 때문에 전선 까는 일을 하다가 저녁 늦게 들어옵니다.

들어올 때 그 근처 농가에서 저녁에 뭘 하느냐 하면 수제비를 끓이는데 그걸 보면서 제 소망이 뭐냐 하면 제대하면 농촌에 가서 농사짓고 수제비 끓여 먹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그 수제비 냄새가요, 그것도 장작 때서 하는 수제비, 장작 때는 냄새와 수제비 끓이는 냄새가 같이 결합이 되어서 올라오는 거예요.

‘와, 이 수제비, 내가 군대 생활 한다고 이 수제비를 못 먹는구나. 내가 나중에 제대하면 취직이고 뭐고 농사 지어서 저녁에는 수제비 끓여 먹고 그거 외에 다른 소망이 없다’라는 그런 생각이 정말로 들었어요. 그 수제비가. 그것도 수제비 끓이는 밀가루가 우리 밀이거든요. 시커먼 우리 밀. 그게 얼마나 맛있겠어요.

그런데 이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소박하게 수제비 끓여 먹는 것도 십자가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신약에 오면 아무리 네가 낮아졌다 낮아졌다 겸손하다 겸손하다 해도 그것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박살 나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나’라는 자아를 우리가 몰라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로써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희망이고 살고 싶고 하는 그게 다 사치고 욕심이다. 너는 지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십자가를 가지고 일거에 한꺼번에 쳐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만이 깨지는 거예요. 남들과 비교해서 나는 저 사람보다 겸손하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제대로 우리가 겸손하려면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수제비 아니라도 라면이라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계란 없는 라면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집에 먹어야 할 삼양라면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다 먹고 말 거야. 이 라면을.

이게 바로 신약입니다. 자기 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욥이 굉장히 겸손해요. “죽으면 죽겠습니다”라고. “아니야. 너는 죽으면 안 돼. 네가 죽겠다는 것도 교만이야.” “내가 선교사로 파키스탄에 가서 이슬람에게 잡혀 죽겠습니다” “그것도 교만이야. 겸손 아니야.” “내가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라는 그것도 교만이에요. 그게 네 재산이야? 그걸 네가 왜 팔아. “제가 차가 세대가 있는데 벤츠있고 BMW에다가 또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예수 믿고 이제 티코 타고 다니겠습니다” 팔지 마. 그것도 교만이야. 그냥 그 차 타고 다녀.

십자가 알게 되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자체가 다 겸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 목숨이 내 목숨이 아니거든요. 사나 죽으나 주의 목숨이지 내 목숨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캡슐머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커피가 담긴 캡슐이 있는데 그걸 기계에 넣게 되면 쭉쭉 커피가 뽑혀 나오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는 현재 우리 몸이 우리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거든요. 그래서 욥의 몸을 가지고 주님이 지신 고통을 줘서 거기에서 나오는 이 자아라는 커피가 얼마나 독한 자아인지 얼마나 독한 커피인지 뽑아내는 거.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실루엣이에요. 그림자입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거뜬히 주께서 우리를 캡슐커피로 사용해서 커피 쪽쪽 뽑아내서 주께서 “아이고 커피 맛있네”라고 하실 거예요. 그 일을 하셔도 우리는 감사해야 하죠.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겁니다.

그 일이 욥에서 같은 구약이지만 그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실시했는가. 에스겔 37장 2~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뼈들이 많은 골짜기를 데려갑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라고 되어 있고 3절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Can these bones live?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인자야” 인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미리 에스겔보고 이야기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다른 말로 하면 “너 뼈 될래? 안 될래?”라는 말이에요. “너 뼈처럼 살래. 안 살래”라는 말입니다. 기왕 죽은 뼈, 그것도 바짝 마른 뼈, 전혀 가능성 없는 뼈로 살래? 안 살래? 라고 그걸 물으시는 겁니다. 인자되신 에스겔이 정답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면 삽니다”라고.

도대체 에스겔은 무슨 이런 배짱이 다 있어요. 내가 몸부림친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태극기 흔든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주의 말씀이 바짝 마른 뼈처럼 살게 되면 살아놓고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저 바짝 마른 뼈입니다. 바짝 마른 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결혼할 때 바짝 마른 뼈라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53킬로 나갔으니까. 바짝 마른 뼈도 결혼하잖아요. 바짝 마른 뼙니다. 여러분들도 젊을 때는 다 뼈였어요. 지금은 통통하시잖아요. 이게 욕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만큼 누가 살게 했어요. 말씀이 살게 했단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살게 했단 말이죠.

이게 지금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중간 절차입니다. 우리는 너무 성급해. 우리는 구약 모르고 신약으로 가서 십자가하고 피 바르고 구원받았다고 이러고 싶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의 자아는 괜찮은 자아가 되고 가능성 있는 자아가 되어버려요. 반드시 구약을 거쳐서 신약을 건너오게 되면 욥을 통해서는 ‘하나님이여, 나 구원받는 게 맞는데 왜 이리 사는 게 힘듭니까’라고 짜증 부리고 하나님께 달려들고 싶고 그리고 여기 18절에 보면 “나는 누가 뭐래도 나는 의인이다. 내가 의인인 것을 누구와도 변론할 자신 있다”라고 하나님이 인정 해줬다고 이런 식으로 막 나오죠.

그러니까 이 모습이 우리의 출발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출발점으로 보셔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에스겔 넘어오면 뼈라고 당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약으로 넘어갑시다. 신약에 넘어가게 되면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이방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은 구라라고 합니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맞아요.

예수님이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말이 이게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들은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인간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꼭 아셔야 해요.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내뱉는 모든 말이 거짓말 되도록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왜냐? 터무니없어도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그래요.

죽은 자가 산다는 것도 터무니없고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것도 터무니없고요,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진 것도 터무니없고 죽은 자가 부활한 것도 터무니없고 하늘에 올라간 것도 터무니없고 성경에 나온 모든 일은 터무니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성경을 보면서 여전히 “나는 옳고 예수님은 고려할 가치 없다. 그저 이웃사랑이나 하자. 그것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는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못 받아들이겠다”라고 인간 입으로 예수님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본인에게 거짓말 영이 악령이 들어있다는 것을 노출 시키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어찌할꼬. 그동안 거짓말 치면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 거짓말쟁이를 나 어떡해 해야 해요?’라는 고백을 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죠.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 주님의 작전에 정통으로 말려들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모든 내 행동과 말이 구라이고 거짓말인 것을 본인이, 내 자아가 그거 보라고 내 자아가 만들어진 거예요.

욥은 고통이 올 때 나 잘났다고 하지만 신약에서 고통이 오게 되면 내가 고통이 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이 고통마저도 감수해야 할 이것보다 더 센 악한 짓을 하고 있는 거짓말쟁이라는 걸 주님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 성령 앞에서 그걸 다 토해 놓도록 하는 겁니다. ‘주님이여, 제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라는 말을 할 정도로 나는 나밖에 모르는 거짓말쟁이인 것을 ‘주여, 타고난 거짓말쟁이인 것을 발각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이게 바로 신약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을 통해서 욥을 통해서 다시 성경을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주님 오셔서 주님 앞에 깨어지라고 주신 십자가, 우리가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이 우리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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