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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7 18:31:32 조회 : 53         
131강-욥기 40장 6~14절(혼돈 정리)220417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25.139.131.147)
131강-욥기 40장 6~14절(혼돈 정리)22041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40장 6~14절입니다. 구약성경 800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찌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찌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예수님과 욥을 비교시킵니다. 예수님은 모든 교만한 것을 들춰내서 밟아버리는 일을 하는데, 욥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것은 욥이 아는 지식이 너무나 단편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체를 볼 줄 모르고 일부만 보면서 그것을 자꾸 자기 의와 관련을 시켜요. ‘이것을 아니까 저 의롭죠? 저거 할 줄 아니까, 하나님, 저 잘난 거 맞죠?’라고 이런 식으로 보는 거예요.

전체를 보게 되면 거기에 악인이 있거든요. 그런데 욥은 악인은 악인이고 욥은 나만 의롭고 나만 반듯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이것은 자기 즐거움이죠. 하나님 이용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해준다는 것만큼 인간에게 최고의 기쁨이 어디 있겠느냐는 그걸 노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는 의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악인도 있는데, 의인도 있고 악인도 있다는 것에서 멈출 것이 아니고 진정 네가 의인이라면 악인을 자근자근 밟을 수 있는 비로소 너는 의인이고 구원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악인을 밟은 자만 구원될 수 있는 자로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에 대해서 잘났다고 칭찬하시는 것에 의미 두시는 것이 아니고 악인을 악인으로 들춰내는 어떤 인물이 등장하기를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바로 예수님밖에 없죠. 그래서 뒷부분에 나오는 “교만한 자를 발견하고 낱낱이 낮추되”라는 말은 예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러면 욥은 예수님처럼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욥은 교만한 자라는 뜻이에요. 욥은 덜 겸손하고 욥보다 더 교만한 자가 있어서 그걸 밟는다는 뜻이 아니고 교만한 자를 밟을 수 없다면 그건 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건 전부 다 교만합니다.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원하는 일, 악인을 밟을 생각을 안 하고 그걸 ‘내가 어떻게 합니까? 나는 내 관리도 잘 못 하는데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하느냐?’라고 할 때 그게 바로 교만이라는 겁니다.

네가 너 할 것만 하고 나머지는 못 한다고 하는 그 의도가 뭐냐 하면 ‘내 것만 해도 좀 의롭다고 해주세요. 제발~’ 이런 식이에요. 내 역량대로만 해도 잘했다고 훌륭하다고 해달라는 식이죠. 그렇게 자기 것만 챙겨놓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것이 욥이 교만한 자에 속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동안 욥은 자신이 의롭게 되려는 그 ‘자기 의’도 탐심인 줄을 몰랐어요. 이게 욕심이고 자기 주제 파악도 안 되는 일인지를 몰랐습니다.

예수 믿고 의롭게 되겠다는 말이 신앙에 합한 말이 아니고 그게 교만한 말이에요. 그게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된 거예요. 성경에 뭐 있으니까 대충 책에서 챙겨서, 마트에서 물건 담듯이 담아서 그걸 지식으로 꿰뚫어버리면 자기가 뭐 신자 이냥 의인 이냥 그렇게 자부를 합니다. 자꾸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을 연구하는 거, 저는 그걸 사자성어로 복음 폐인이라고 하고 싶어요.

복음만 들여다보는 이유가 뭐냐. 그 의중이 뭡니까?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라고 이런 거 하고 싶은 거예요. 둘 다 똑같은데. 복음 아는 인간이나 모르는 인간이나 둘 다 똑같은 거예요. 검사나 경찰이나 똑같은 겁니다. 뭘 자기가 독특하게 하려고 합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서 주께서 하는 말이 “너에게 우렁참이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우렁참이라는 것은 한 지역만 들리는 것이 아니고 온 지구를 왕왕거리게 만드는 우렁참이 있느냐는 거죠.

욥은 그런 것이 없죠. 욥이 교만하다고 할 때 ‘저는 아니고요’라고 빼지 말고 욥이 왜 교만할 수밖에 없는지, 욥은 왜 자기 의만 챙길 수밖에 없는가 하는 그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그 점으로 인하여 8절에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모든 인간은 불의하고 교만하고 하나님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 딴에 자기만은 의롭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 그 시도가 곧 불의이고 의롭지 않음에 해당되는 겁니다. 교만한 것이고.

이게 욥의 한계인데, 이 한계가 오늘날 우리의 한계와 동일한 한계입니다. 왜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잘난 사람이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그건 세상의 빅데이터,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다 갖고 있고 알아야 그것이 되는데 우리는 일부만 챙기면서 허겁지겁, 남보다 조금 더 아니까 더 나은 존재라고 하고 싶은 그런 속성들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깨어져 버린 자아상이라는 겁니다. 깨어져 버린 자아상.

거울이 한 면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떨어져서 와장창 깨졌어요. 그래서 거울이 아까워서 조각조각을 스카치테이프로 다 붙여놓으니까 이게 균등하게 수평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얼굴이 괴물처럼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 본인의 얼굴이 그런 거예요. 괴물이 된 얼굴이 본인 얼굴인데 자기가 자기 본래의 얼굴을 잃어버렸어요. 그 전체성이라는 거, 어려운 말로 그걸 세계성이라고 하는데, 그 전체성이 뭐냐.

사람은 눈에 의미를 주는 것을 뽑아요. ‘1’ 그리고 하나 더 뽑으면 ‘2’. 그다음에 하나님을 예로 들게 되면 ‘사자’, ‘매’, ‘낙타’, ‘하마’, ‘산 염소’, 그다음에 ‘번개 우레 치는 거’, 그다음에 38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새벽 별’, ‘빗물 오는 거’, ‘물결치는 거’, ‘바다에 관한 거’, ‘땅의 넓이 측량했는지 묻는 거’,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는지 묻는 거’, ‘우박 떨어지는 거’, ‘하늘의 묘성(별)’, 이런 것들 소위 인간들이 관심은 있지만 자기 의와 무관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요.

빅데이터처럼 주께서 다 끄집어내서 “네가 별을 만든 이유를 모른다면 너는 의롭다고 우겨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뭔가 미흡하고 빠져있다고 여기시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해물전이라고 봅니다. 배추 전이나 미나리 전을 부칠 때 원재료가 되는 배추나 미나리를 밀가루나 계란을 가지고 전을 구워야 하잖아요. 전은 채소를 부치는 중간요소가 끼어들어서 붙는데 부친 전을 찢어먹죠.

멀리서 보면 원판인데 자세히 보면 대충 부친 거예요. 인간의 인상이나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대충 부친 것이 돼서,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으로 욥이 조각조각 깨지는 거예요. 거기서 어떤 능동적인 힘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내가 한다는 그거. 도대체 네가 뭘 하는데? 아이들에게 ‘너 나중에 커서 뭐 될래?’라고 물어보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면 ‘네가 대통령의 업무에 대해서 헌법적으로 이야기 한번 해볼래?’라고 하면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면서 자기 나름대로 조그마한 김치전 구워서 보니까 동그라니 하나인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그건 요소들이 대충 얽히고설켜 뭉쳐진 거예요. 인생이라는 것이 그래요. ‘1, 2, 3, 4, 5, 6, 7...’ 이렇게 자기가 아는 것 끌어모아서 하나의 전을 만들지만, 그것은 하나의 인접성이죠. 인접성이라고 하는 것은 가까이 있는 것과 합쳐서 대충 조립했다는 거죠. 또는 유사성, 근사(近似)성 이라고 하는데 친한 것과 같이 있었고 그래서 끌어모았는데 모을 때 모으는 동기가 뭐냐. 끌어들이는 의지가 어디서 나오는가? 누구를 위해서냐? ‘나를 위해서’ 그러니까 네가 우상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라는 거, 어떤 사태와 사건, 어떤 정보가 왔을 때 빨리 헤쳐 모이고 있을 때 그 의도가 뭐냐 하면 나의 의로움을 챙기는 방향으로 그 사건을 재조립하게 되어있어요. 역사라는 것은 권력 쥔 자가 마음대로 행사한다는 그 말이에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나 일에서 하나님 뜻인 이거예요. 욥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되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어디와 연결시켜야 하느냐 하면 말씀과 매치시켜야 해요. 말씀.

그런데 인간이 말씀을 모르잖아요. 모르니까 매치시킬 말씀이 없으니 주인공은 예수님인데 말씀과 매치시킬 예수님을 연결할 줄 모르니까 그럼 누구를 대신 연결시키냐 하면 ‘내가 이만큼 안다. 아는 만큼 나는 착실하다’라고 전부 다 자기 자신과 연결시켜서 ‘하나님, 저 나름대로 제가 경쟁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낫죠?’라고 자꾸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너의 몸이 망가졌다고 하시는 겁니다.

망가졌는데 왜 폭풍 속에서 우렁차게 오셨는가. 주께서 욥에게 안 찾아와도 되는데 찾아온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네가 망가질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은 이미 망가졌어요. 인간이 한 살, 두 살일 때 까불까불해도 귀엽죠. 그런데 36개월 되면 난리도 아닙니다. 밥상 위에 올라가요. 망가졌어요. 밥상 위에는 밥과 반찬과 숟가락만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아직 어린아이는 빅데이터가 갖춰지지 않았어요. 혼돈입니다.

혼돈한 욥에게 의도적으로 주께서 찾아오신 것은 질서를 위해서 너는 혼돈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너는 흔쾌히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네가 안 망가지면 메시아가 소용없고 네가 안 망가지면 심판 주의 위상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안 망가지려는 것이 교만입니다. 오직 안 망가지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폭풍 속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엄위하게 무서워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망가지지 않은 분은 어떤 분이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오늘 본문 10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화려한 아름다움)를 스스로 입을찌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진토에 묻는 다는 것은 그들을 음부, 지옥에 빠짐없이 기필코 보내고 그 얼굴을 지옥에 보낼 수 있다면,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그러니까 욥에게 이러한 역할을 맡기는 것은 욥에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욥에게 하는 이 말씀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이 말씀과 매치가 되고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주님이, 예수님이 심판주 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 일어나야만 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하는 것부터, 뻥튀기 과자 먹는 것까지 전부 다 말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문제 하나 낼까요? 뻥튀기 과자와 십자가와의 관계성을 증명하라.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죄인이죠, 뭐. 네가 빅데이터가 모자란 거죠.

그러나 설교시간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면 안 되고 알고 끝나야지요. 호세아 1장에 보게 되면 그 호세아 선지자가 여인과 결혼을 하는데 그 부인이 어떤 부인이냐 하면 음란한 아내이어야 해요. 그래야 음란한 자식이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이 자식은 누구의 자식이냐 하면 호세아의 자식이 됩니다. 호세아는 누구냐. 하나님의 선지자죠. 하나님의 선지자는 거룩하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거룩에서 음란이 나오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심판하고 통합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 로마서 8장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씀처럼 죄의 몸으로 오셔야 해요. 죄 있는 몸으로 오셔야 해요. 예수님은 그 죄 있는 몸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죄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의도적으로 그 죄의 몸을 입어버려요. 그러면 죄는 없는데 그 예수님의 가신 결과는 죄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참혹한 마지막 결과를 예수님께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거. 그 버림받은 자리, 거기부터 시작해야 거기서부터 비로소 교만이 아니라 의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의가 생산되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이름이 고멜인데, 그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어요. 그런데 아들들과 딸 이름들이 전부 다 수상해요.

첫째 아들 이스르엘은 ‘흩어진다’라는 이름이고 그다음 딸 이름은 ‘로루하마’인데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예요. 버림받는 딸을 낳아요. 이게 누구 딸이냐 하면 호세아 선지자 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딸이란 말이죠. 그리고 다음에 세 번째 아들 이름이 ‘로암미’인데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입을 벌려서 하나님, 하나님, 주여, 주여,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의 자리는 하나님 부를 쨉도 못되고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네가 나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너는 네 자리에 그냥 있어. 그리고 데려가는 식으로 너에게 올게. 데리러 올 때 나를 데려가는 메시아는 뭐냐면 메시아가 당한 고초나 네가 당한 고초가 죄 때문에 생긴 고초에, 그 죄라는 것과 공통성을 지니고 있는 분이 나를 구원한다는 그런 생각을 간직해야 더는 네가 교만할 수 없고 자신을 의인이라고 잘났다고 입에 담을 수 없게 만들어버려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보다 더 영광스러운 말이 없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죄인이지만 예수 믿고 나서는 얼마나 성실한지 술 담배도 안 하고 착실합니다’라는 이건 영광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주께서 구원하실 때 관심사가 주에게 있으라는 말이지 구원받은 나에게 있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성경의 모든 말씀은 관심사가 구원받고 난 뒤에 더 이상 나에게는 기대조차 할 이유가 없어요.

오늘 살다가 오후에 죽더라도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그러면 안 됩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더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주의 것이에요. 로마서 14장 7절의 말씀처럼. 자꾸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어떤 분이 ‘목사님, 그 말씀은 맞는데요. 우리나라 교인들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왜 둘러봐요? 왜? 둘러본다고 그거 빅데이터 아니에요. 모든 일어난 일은 말씀과 연관해야지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그런 사람 왜 찾습니까? 뭘 찾아요? 똑같은 인간인데요.

전부 다 조각조각 망가진 몸들이에요. 망가진 몸에서 뭘 기대합니까? 복음 아는 교회 가봤는데 집사라는 사람이나 장로라는 사람이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에요. 뭘 희망합니까? 아직도 자기 가능성을 희망해요? 성도의 특징은 죽음이 없다는 거예요. 죽음이 없음을 알아요. 죽음이 없다는 말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면 더이상 죽는 것이 없는 이유는 사나 죽으나 내 안에 주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말이 되었어요. 원래 죽었는데 뭐 새삼스럽게 죽음을 거론해. 그래서 나의 죽음은 뭐 만지다가 손톱 부러진 것처럼 아주 사소한 일이에요. 아주 사소한 일.

서울강의에서 제가 이런 예를 들었어요. 이미 악마에게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을 두고 악마는 시시한 사람은 건들지도 않아요. 자기 부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성도가 되니까 우는 사자와 같이 공격합니다. 그 사람에게 ‘네가 목사 말 안 들으면 저주받는다. 아이가 아픈 것은 네가 뭔가 신앙적으로 게을러서 그렇다’라고 막 협박 공갈 들어올 때 이런 예를 들었죠.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이라고 되어있어요. 결국 우리의 육체의 옷이 장막 집이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빨랫감 정도가 아니고 아예 갖다가 버려야 될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 영체가 있기 때문에 이런 아픈 몸이 있다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에요. 사람이 몸이 아픈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왜 아프냐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이 벗을 옷을 어두운 골목에 쓰레기통에 버려놨는데 악마가 와서 내가 버려둔 육신과 자아를 가지고 악마가 밟고 때리면서 협박 공갈하는데, ‘너 이렇게 살다가는 망한다’라고 하죠. 그럴 때 제가 질문을 했어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와 아무 상관 없다고 하면 재미가 없죠. 악마가 밟으면 ‘아야, 아야, 어떻게 해~, 망하면 어떡해, 4대 망했는데 또 망하나, 아이 성적 떨어지는 것이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라고 연기하면서 ‘됐냐? 악마야, 이제 만족하냐?’라고 하는 거죠.

성도는 죽는다는 것이 없어요. 더이상 주인공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내가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님이 계속 자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끌려갔던 우리 몸을 일방적으로 차용한 거예요. 빌려주라는 것도 아니에요. 너는 원래 내 백성 아니었고 원래 너는 긍휼함을 받지 못하고 너는 산산조각 다 찢어져야 해. 하지만 너의 아버지가 누구냐? 호세아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예요. 그 사랑이 우리는 안 되는 거를 메시아가 의롭게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욥처럼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해요. 제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이 정도 해서 내가 신앙인이고 이 정도 안 해서 신앙인 아니고 그런 게 말도 되지 않습니다. 자꾸 내가 살아있는 식으로 살겠다는 이 자체가 죄이고 교만인 줄 이제는 알겠습니다. 욥이 뭘 알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그것 자체가 적들을 지옥에 보낼 수 있는 자격자가 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폭풍 가운데 나타나시는 하나님께서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는 이 우편, 오른쪽의 자리가 뭐냐 하면 악마를 전체적으로 우렁차게 다 지배할 수 있는 자리가 오른편입니다.

신약에 보면 사도행전 2장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처럼 주님이 앉아 있어요. 주님이 앉아 있으면 돼요. 왜?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오른편에 앉을 필요 없어요. 주님이 앉아 계시면 돼요.

주님이 앉아 계시면 우리가 주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합류해 주시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이고 그럼 나는? 나도 벌써 주님 앞에 심판받았지. 심판은 벌써 지나가 버린 거예요. 마땅히 뭐, 아무것도 아닌데요. 내가 새사람 되어서 내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가지고 하나의 손전등, 등불로 사용해서 세상에 어두운 곳까지 우리를 보내시는 거예요.

아골 골짜기 빈들, 뭐 사창가나 가난한 아프리카 갈까요? 갈 것 없어요. 여러분 동네나 교회 보면 됩니다. 전부 다 자기 살맛에 사는 사람들 거기서 다 맞닥뜨리게 해줍니다. 가만히 있으세요. 선교는 주님이 하지 여러분들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 날 파리들 들러붙어요. 옛날 내 모습들, 뭐 십자가 복음 안다고 잘난 체하는 그런 것들 옵니다.

그거 알아서 뭐 할라고? 또 네가 살라고? 주님이 살면 되지 왜 내가 삽니까. 성령께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고 예수님만이 죄와 완성, 그 양면을 매치시키는 거,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예수님 홀로 심판주이고 구원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 주위에 여러 가지 예상 못 한 일들을 일으키실 때 싱긋이 웃으시고 신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를 협박하고 우리 자신이 우리를 못살게 굴고 우리 자신이 우리를 괴롭히는 이 모든 의도가 여전히 잘난 체하고 싶은 마귀의 품성 때문인 것을 압니다. 이제 이것을 알았사오니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면서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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