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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9 20:58:47 조회 : 68         
12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15-17절(함께 가자)220529 - 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12강-데살로니가후서 2장 15-17절(함께 가자)22052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17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5-17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도는, 하나님이 직접 성도를 위로하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위로보다도 자신이 위로를 개발하고 제작하고, 자기가 인생을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 위한 그런 방안을 한시도 쉬지를 않고 있었어요. 하늘의 위로를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내 즐거움과 나의 유익을 내 쪽에서 개발하는 편이 훨씬 쉽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 마음을 위로한다, 이런 말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고 성도로서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언제 저를 위로한 적이 있습니까? 금시초문인데요? 평생 나는 내가 나를 즐겁게 하는 방식만 꾸준히 밀어붙이는 식으로 살아가는데 무슨 위로를 줬습니까?’라고 의아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씀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기존에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식에 철퇴를 가해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를 않는다는 뜻이지요. 사람이 자기 인생을 계획할 때에 ‘이 정도하면 내가 내 후년 정도는 다음 달 정도는 내가 실컷 위로받을 거야.’ 그걸 ‘셀프위로’라 하는데 ‘내가 스스로 나를 위로할만한 것은 아마 내가 노력했으니 생기겠지.’라고 여기는데 이것이 좌절되고 철폐되지 아니하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시도한 모든 계획, 거기에 미래의 내 기쁨이 관련성이 있거든요. 만약에 그것이 그대로 유지가 되고 살아 있다면 하늘의 위로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아무 필요 없지요. 셀프위로라 해서 내가 스스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마약하고, 이렇게 쾌락 즐기는데 거기에 무슨 하늘의 위로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그냥 돈이나 주세요. 딴 소리 하지 말고.” 퇴짜놓을 겁니다. 노골적으로 퇴짜를 놓지는 않지만, 성도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매일같이 주의 복음과 말씀을 퇴짜놓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한번 돌아봐야 돼요.

그러면 왜 위로 문제를 주께서는 언급을 하시는가? 여기 나오는 위로는 영원한 위로에요. 한시적인 위로 받다가 다시 절망으로 꺼지는 그런 위로 말고 영원한 위로는 영원히 견고한 토대가 장만 됨으로써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위로의 반대말이 상처거든요. 결핍, 상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상처를 품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프레스, 억누르면서 겉으로는 멀쩡하게 아무 마음의 아픔도 없는 듯이 살아가지만 그러나 내부에 보면 곪을 대로 곪았지요. 그래서 건드리면 폭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처를 왜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느냐? 그냥 사람과 사람이 어떤 상거래라든지, 무슨 토지거래라든지, 혹은 동창회를 한다든지, 친구든지 만났다 하면 상처와 상처와 만남입니다. 왜 그리, 왜 그렇게 세월이 가면 갈수록 상처가 많은지요. 아픔이 그렇게 많은지요. 그것은 토대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토대가 잘못되어서 그래요. 토대가 바뀌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원인이 바뀌지 않으니까 그것이 계속해서 상처로 남아버리는 거예요. 원인만 고치면 되거든요.

우리나라 어떤 초등학생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어른들이 왜 이혼하는가? 그에 대한 답을 쓰세요.” 초등학생 답변이 아주 명쾌했어요. “결혼했기 때문에 이혼한다.” 얼마나 철학적입니까? 결혼 안 했으면 이혼도 없잖아요. 그 말은, 결혼할 때부터 이미 원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상처가 시작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바꾸려고 하는 그 마음의 토대, 마음의 중심부에 시간의 흐름과 무관한 본질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게 되면, 고린도후서 1장 5절의 말씀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예수님의 위로가, 너희들 위로 말고, 네가 너 스스로 위로하려는 셀프위로 말고 주님의 위로가 우리 속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원인 자체가, 내 마음부터 시작한 원인은 상처뿐이니까 내 마음 말고 주의 마음으로 교체가 일어나 줘야됩니다. 예수님 마음으로 교체가 일어나야 돼요.

예수님 마음으로 교체가 일어나면 나로 인한 상처는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뭐가 오느냐? 주님이 이 땅에서 당했던 상처가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주님도 자기 상처에 대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의도적으로 유발했고요, 그것이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로 모든 위로가 되는 거예요. 자기 상처를 자기에게 행한 일의 성과로 인하여 위로받는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작과 결말이거든요. 거기에 예수님의 시작과 결말을 우리가 갖고 있던 우리 마음과 바꿔치기가 되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 식대로 내가 위로하는 그런 쓰잘때기 없는 짓은 안 해도 되지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려 합니다. 이것은 시간 따라 환경 따라 이 위로가 거품이 되어 언제 꺼져버릴지 알 수가 없어요.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한국 축구팀이 브라질 축구팀 이겼다. 뭐 위로 되지요. 그런데 월드컵 가서 초반에 5 대 0으로 졌다. 전에 브라질 이겼던 것이 하나도 위로가 안 돼요.

좋은 땅이 나왔는데 하나 사시지요, 해서 샀다. 부자 된 느낌으로 위로받지요. 그런데 그 땅 주인 따로 있다 하면 그 위로가 절망으로 바뀌는 겁니다. 환경 따라 시간 따라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 아슬아슬해요. 무슨 일이 터질지를 모릅니다.

식구 많은 집 처녀와 총각으로 둘 다 있다가 이제 결혼해서 단출하게 둘만 사니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내빼듯이 우리 서울 가서 우리끼리 살자, 하고 위로했는데 촌에서 “야야, 시동생 취직한다 하는데 한 6개월만 봐줘.” 이렇게 와버리면 둘이 단란하게 살던 것 다 깨집니다. 거기다가 또 시골 시아버지가 갑자기 아프다 해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러 와서 걸치면 도대체 내가 사수하려는 나의 마음은 망가져 버리지요.

도대체 인간의 마음에 왜 상처가 있는가? 예수님을 통해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 상처가 있는 이유는 자기 의로움을 자기가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 시간과 무관하게 우리의 영원한 본질입니다. 나의 의로 모든 만사를 뚫으려는, 뚫고 해결하려 하는 거예요. 선악체계지요.

“하나님 저 착해요.” “뭐 어쩌라고?” “그러니까 내 뜻대로, 내가 기도한 대로 만사형통해야지요. 내 인생 풀려야지요. ‘잘 풀리는 집’처럼 잘 풀리게 해야지요. 저 착해요.” “뭐 어쩌라고!” “나 나쁜 사람 아닙니다. 저 의롭잖아요.” “어쩌라고!” “남이 나보고 욕하면 안 되지요. 내 인생이 잘 풀려야지요. 내가 건강해야지요. 아프면 안 되지요. 내 자식 잘 돼야지요. 왜? 의로우니까. 내가 봐도 하자가 없으니까.”

그 사람들이 누굴 죽였느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아, 이 대목만 해도 주의 일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은 그냥 진공상태에서 오신 것이 아니고 뭔가 노리고 들어왔는데 뭘 노리느냐? 모든 인간이 각자 맘속에 각자가 살아오면서 구축한 자기 의로움과 정당함과 자기 잘남, 그걸 쉽게 하면 나의 나 됨, 나의 나 됨, 나의 자존감, 나에 대한 나의 무한한 팬심, 자기 격려, 이걸 노리고, 노리고 들어옵니다.

주님이 노리기 전에 이미 누가 나의 의로움과 나의 잘남을 시비거느냐 하면, 타인들이 시비를 걸어왔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만남은 상처와 상처의 만남입니다. 교회 와서 교인과 교인, 집사와 집사, 목사님과 집사님의 모든 만남이 상처와 상처의 만남이에요. ‘네가 교회까지 와서 나를 긁는가? 뭐 이런 거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러시아 초음속미사일같이 날아와서 내 마음에 박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아야, 하지요. 찢어집니다.

그런데 주의 뜻은 뭐냐 하면, 찢어지라고 타인을 우리에게 붙여주신 거예요. 찢어지라고, 아프라고. 모든 상처는 자기 잘낫 맛 때문에, 자기에 대한 무한한 자기 위로가 깨어질까 조마조마하는 가운데서 이게 상처가 되고 그 상처를 꿰매기 위해서 다른 쾌락적인 요소라든지 다른 세상 즐거움을 기웃거리지요.

기웃거리고, 기웃거리면서 취미 활동한다고 꽃꽂이하고, 도시낚시라 해서 낚시하고, 등산도 하고 이렇게 몸부림쳐 보는 거예요. 자기 인생 상처를 완화하기 위해서 그걸 가지고 힐링, 뭐 발음도 잘 안 돼요, 힐링한다고 하는데 그 힐링 장소에 이미 타인이 건재해 있어요.

거기서 또 상처받아요. 분명히 3개월에 10만 원 한다 해놓고 나중에 1개월 하고 난 뒤에 힐링센터 문 닫아 버려요. 벌써 상처잖아요. 벌써 상처받았잖아요. 왜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됩니까, 라고 우리는 탄식하지요. ‘교회 다녀서 새 인간 되면 내 상처 회복해 줄 거지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 있잖아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

‘하나님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내 상처 아물게 해주실거지요?’ 어릴 때의 트라우마 다 해소해 주실 거지요?‘라고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바로 오히려 주님의 하시는 일을 더욱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결국은 이 위로라는 것은 마음 문제거든요. 영양제 주께서 더 주시고 에너지를 더 주시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겨냥하는 것은 마음이에요. 마음속에 상처를 유발하는 자기 의를 고수하고 있으면서 그런 식으로 셀프위로,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니까 주께서는 가만두지 않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이 마음 문제를 하나님께서 거론하는 거예요. 얼마나 신체가 튼튼하냐가 아니라 네 마음에 대해서 “네 마음은 두 가지를 못하고 한 가지를 하는데 너는 지금 누구를 섬기는가? 너는 지금 너를 섬긴다.”는 거예요.

재물이라 하는 것은 내게 필요하지 남에게 필요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 말은 부자 청년 예를 들어서 보면, 부자 청년은 하나님 앞에 영생 얻고자 하지만 시간과 무관하게 마음의 본질적인 것은 뭐냐? 나는 꾸준하게 나를 섬기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지금까지를 결론 내리면 간단해요. 인간이 자기 포기 못 하면 그 어떤 남편 만나고, 어떤 아내 만나고, 어떤 국가, 어떤 가정, 어떤 직장, 어떤 교회를 택해도 그 사람은 남한테 상처를 주고, 상처 준 사람한테 또 되돌려 받아서 지가 또 상처를 받았다고 난리고. 마음이 안 바뀌니까 그런 겁니다. 마음이 바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 껍데기는 다 보지 않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자기 의가 있는 그곳으로 주께서는 달려갑니다. 이 땅에 오셔서 달려가는데 달려갈 때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말리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마음은 그동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서 벌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괴롭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이 율법으로 네 선에서 네가 고쳐가면 고쳐간 그 함량만큼, 분량만큼 너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받는다, 복을 받는다.” 이게 바로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주장, 거기다 더 보탭시다, 오늘날 성당과 오늘날 교회, 그걸 추가해야돼요.

왜냐하면 지금 사도바울은 인간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나 성당은 인간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요. 알아듣는다는 말은 평소에 ‘내 상처 안 건드리고 치료해 줄거지요?’ 이런 식으로 벌써 교회에서 요구하는 바가 있어요. 본인이 스스로 죄인이라 하는 것은 믿지 마세요. 거짓말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그거 믿지 마세요.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 하는 그것은 이미 죄라고 고백한 그것을 의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은 순수한 죄인이라는 인정이 아닙니다. 자기 의는 따로 챙겨놓고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으로 자기 의를 키우려고 하는 그런 심리적 수법에 지나지 않지요.

바리새인들이 그것 잘했어요. 늘 금식하고 고난받고, 부족하다, 부족하다, 그런 것 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다 했던 겁니다. 정작 주님께 칭찬받은 그 죄인 세리는 그렇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내 식대로 살아왔습니다. 이 자체가, 이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말도 안 되는 죄 맞지요!” 이렇게 나온 거예요.

뭘 자기가 뜯어고치고 바꾸고 새사람 되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아도 그게 넉넉하게 죄가 되는 거예요. 굳이 죄짓지 마세요. 가만있어도, 가만있어도 자동적으로 우리 마음이 나의 의를 더 나타내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그게 주님 보시기에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주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고치는가?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고치는 방법은 인간은 손을 대지도 않아요. 예수님이 “가만있어 봐. 내가 알아서 할 게.” 그러니까 예수님은 계속 세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핍박을 받지요.

하지만 꾸준히 영원히 시간과 무관한, 한번 박혔다 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원한 위로의 토대가 되는 것을 주님께서 하셨는데 그게 뭐냐?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부터 먼저 알면 되지요. 십자가 알고 부활 아시면 됩니다.

십자가가 뭐냐? 요한계시록 7장 13, 14절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이렇게 물으니까 그것은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어린양의 피, 자, 십자가가 뭐냐 하면, “네가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했든 간에 나 안 받는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네가 어떤 일을 해도, 헌금, 기도, 예배참석, 어떤 일을 해도, 나쁜 짓을 하든 좋은 일을 하든 어떤 일을 해도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체 받지 않는다. 나는 내가 흘린 피만 내가 받는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많이 위로가 되시지요? 우리의 잘난 나의 의를 가지고 거기다가 나의 노력을 보태서 멋있는 나의 모습을 갖추는 것, 이것 안 받습니다.

왜 주님은 인간의 것을 안 받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해도 자기 것이 있는 한 자기 상처는 외부에서 생기기 마련이에요. 창세기 37장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야곱도 우리하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37장 35절에 보면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야곱이 모든 인간의 위로를 다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슬퍼서 자살하고 싶은 충동에 이르렀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자기 사랑하는 아들, 아들이 열두 명 되잖아요. 그중에서 사랑하는 아들은 하나밖에 없어요. 요셉밖에 없어요. 그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야곱한테는 요셉은 죽었어요. 살 의욕도 없고 살 이유도 없었습니다. 평소에 야곱이 요셉과 다른 형제들이 살아 있을 때에 물론 좀 티 나게 사랑하기는 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식에 대해서 퍼주는 것만 생각했지 내가 과연 진정 누구냐에 대해서는 알 기회가 없었어요.

‘나는 하나님의 복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만큼 인도했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은혜주셔서 지금 우리 가족이 잘살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인이 본인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본인 보기에 믿음이 좋으니까요. 은혜 알지요, 하나님이 함께하신 체험 다 있지요, 내가 신앙인이라는 점에 대해서 하자 되는 요소를 일체 본인은 못 느낍니다. 그게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만하면 신앙인이지. 나보다 신앙인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할 정도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사람의 본색을 드러낸다고요. 막상 자기가 아들, 그것도 별로 여기는 아들 말고 진짜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서 죽여버렸을 대에 야곱은 그냥 기절할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내가 살 이유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위로? 나한테 위로하려 하지 마라. 건방지게 네가 내 마음을 알아?’ 내 아픔을 아느냐. 이 말이지요.

우리가 아직까지 견딜만하니까 교회 나오고요, 밥숟가락 들고 밥이나 먹는 것은 아직까지 숨 쉴만하니까, 희망이라는 게 있으니까, 산다는 게 아주 재미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얼추 견딜만하다 싶으니까 밥숟가락 들지 만약에 아들이 죽었다 하면 숟가락 들고 밥 먹는다는 것이 죄짓는 일 같은 느낌이 들어요. ‘자식이 죽었다는데 네가 숟가락의 그 밥이 목으로 넘어가나 인간아!’ 이런 욕이 막 들려오는 것 같아요.

상처라 하는 것은 이처럼 난데없이 우리의 본질에 훅 들어오는 거예요. 훅! 아픔이라는 게 훅, 들어온다고요. 그와 동시에 그동안 내가 나를 위로하려고 만든 나의 세계가 한꺼번에 하나님에 의해서 다 무너집니다. “이제는 너의 방식으로 너를 위로할 생각은 하지 마라. 더 나아가서 네가 과연 위로받을 자인지를 네가 의심해봐라. 네가 뭘 했다고 하나님이 너를 위로해야 돼? 네가 뭐 했다고 하나님이 너를 안 아파야 되는 대상으로 봐야 돼? 네가 뭔데!”

말로는 아무것도 아니라 해놓고는 실제로 어떤 일이 터져버리면 우리가 하나님을 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타락했다는 것은 인간이 신을 타락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나의 나 됨이, 모든 것이 무너지면 그다음부터 나의 가족, 국가, 나의 교회, 천국, 이것 다 무너져야 돼요.

왜? 나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조작해서 만든 상상의 세계, 그것 다 무너져야 돼요. 마치 뭐와 같으냐? 울산 산불 난 현장 같아요. 아름다운 20년, 30년, 40년 추억이 있었는데 산불 나고 난 뒤에 까만 재만 손에 쥐어져요. 이게 인생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한 줌의 죄였던 거예요. 울어야 될 가치도 없고 울어야 될 자격도 없어요. 권리도 없어요. 그런데 야곱은 울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 8장 21,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나를 따르라, 하니까 따르겠나이다, 하면서도 캥기는 게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아버지가 마침 돌아가서 장례를 치러야 하니 장례 치르고 따르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섭섭하고 아프게 다가오겠습니까? 아버지의 세계를 뭐라고 보느냐 하면, 죽은 인간들, 죽은 인간들로 봐요, 죽은 인간들.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로 장례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건 “네가 죽은 자들하고 너하고 무슨 상관있느냐?” 아예 노골적으로 욕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욕이지요, 욕. 주님이 섭섭하게 하는 게 그 정도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9장 62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지금 이런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백날 해봐야 제자들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소용없습니다. 제자들은 자기 자신이 지금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 자신의 본질이 괜찮은 본질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본질을 파괴되어야 할 본질로 여기지 않고 멀쩡해야 되는,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는 이 행위가 나의 의에 추가될 수 있는, 그래서 나의 의가 돋보일 수 있는 그러한 인생을 주와 함께 지금 건전하게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건전하게 보고 괜찮은 존재로 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인간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고 할 때 제자들에게서도 아무것도 받지 않았어요. 제자들의 어떤 것도 받지를 않았어요. “제가 목숨 바치겠습니다.” 네 목숨도 네 목숨도 안 받아요. 아무것도 안 받아요. 그냥 예수님께서, 다시 말해서 제자들의 피 안 받습니다. 제자들의 희생 안 받습니다. 제자들의 목숨도 안 받아요.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왜? 유월절의 양, 유월절이 양의 피만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 원리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부활 되었습니다. 자, 십자가는 뭐냐 하면, “네 것 안 받는다.” 이것은 우리 의에 대한 모독이에요. 우리 의로움, 우리 잘남에 대한 모독입니다. 부활은 뭐냐 말을 건네는 게 부활입니다. 말을 건네는데 어떻게 건네느냐?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 보면 말을 건네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두 사람의 제자 중 하나는 이름이 글로바라 나와 있어요. 두 사람의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파장이지요. 예수님 죽었으니까 끝났다, 그 이야기지요. 그러나 여기 14-16절에 보면,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이게 대단히, 부활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부활이 뭐냐?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부활입니다. 말을 건네버리면 말을 건넴을 받은 그 사람은 지금껏 자기가 살아오면서 아는 사람들한테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너무 신기한 일이에요.

부활은 신기한 일인데 어떤 점에서 신기하냐 하면, 평소에 서로 알던 사이인데 그쪽에서, 예수님의 말을 건넴을 받은 나를 그쪽에서 갑자기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거예요. 생판 딴 사람처럼 그 느낌을 예수님의 말의 건넴을 받은 사람이 받게 하는 겁니다. 성도가 그런 느낌을 받는 거예요. 전혀 딴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것은 왜냐하면 소속이,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1차원 선으로 보게 되면 어제 일을 열심히 한 것처럼 오늘도 열심히 살고, 그 다음에 내일도 열심히 살고, 이것은 마치 개미가 하나의 선 위를 지나가는 것처럼 1차원적이거든요, 1차원적. 하나의 선으로 간다 이 말이지요.

선으로 갈 때는 그 선에서 비틀거리고 넘어지면 큰일 나는 거지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 안 되니까 조심스럽게 자기가 설계한 1차원적 선으로 가는데 이게 소속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새로운 차원이 되어서 이게 하나의 공간이 돼요.

하나의 넓은 공간에 소속이 되기 때문에 그가 미국에 있든 캐나다에 있든 일본에 있든 그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소속 안에 속한 멤버가 되어서 무슨 짓을 해도, 어떤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해도, 전혀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는 그런 세계에 쑥 들어와 버립니다.

전에는 내 인생을 내 행함으로 책임져야 될 인생인데 이쪽은 소속이 책임져요. 부활의 세계가, 죄용서지요, 죄 용서함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과 능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죄 용서하심이, 십자가 피가 얼마나 효과가 대단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을 건넴으로써, 그 부활 영역 바깥에 있는 자를 예수님 자신이 부활 세계로 말 건넴을 통해서 끌어당겨 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 안에서, 지난 시간에 본 성령 안에서의 자유가 되는 거지요, 자유.

“이건 뭐래?” 이런 거지요. “이게 뭐래?”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단절시키고요, 일체 네 것은 안 받는다, 단절시키고 부활을 통해서는 이것은 소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홀로 있는 게 아니에요. 같이 있는 겁니다.

구약 아가서가 있는데 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함께 가자. 너는 혼자가 아니고 나와 함께 하는 거에요. 말을 건네는 순간 그 사람은 주와 함께 하는 겁니다.

함께 하고, 아가 7장에 가면 들로 나아가고, 아가 8장 14절에 보면 “빨리 달리라.” 이건 뭐냐 하면, 아슬아슬하게 서커스 단선에서 ‘인생 실패하면 안 돼. 성공해야 돼.’아슬아슬하던 이 마음이 “이제는 넓은 들판으로 마음껏 네가 내딛고 싶은 대로 내딛어버려. 달려가자! 다만 혼자 가는 게 아니고 나와 함께 손잡고 달리자.” 오늘 설교 제목을 “함께 달리자.” 하고 싶어요.

“함께 달려가자!” 엎어져도 괜찮고 자빠져도 괜찮고. 들판이니까. 이게 바로 유명한 ‘너 잡히면 죽는다’는 경상도 방식의 게임, 그 유명한 “날 잡아 봐~라!” 게임이에요. “내 어여쁜 자여! 내 사랑하는 자여!” 비둘기, 그냥 비둘기 아니고 “삐둘기같은 어여쁜 자여! 우리 함께 가자. 손잡고 넓은 들판으로 가자. 아무도 찾지 않는, 그게 나의 동산이다.” 동산 나오지요, 에덴동산, “나의 동산이다.”

“상처? 상처? 상처가 무슨 말이에요? 상처? 들어봤어요? 상처가 무슨 말이에요? 상처란 말이 있어요?”라고 할 정도로 진정한 영원한 위로는요,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도 놀라지 않아야 될 상황이에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상황, 깜짝깜짝 경기(驚氣)날 일은 더는 없는 거예요.

이러한 세계를 하박국 3장 17, 18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인데 제가 이 말을 이렇게한번 바꾸겠습니다. 17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해도 상처가 안 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상처가 안 되며……” 장로님, 잘 들으셔야 돼요,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상처가 아니며, 밭에 식물이 없어도 상처가 아니며, 우리에 양이 없어도 상처가 아니며,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상처가 아닌 이유는, 주의 새로운 소속에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말을 건네준 거예요. 예루살렘을 떠났던 이 제자는 자기들끼리만 대화했어요. 자기들끼리 서로 상처 주고받고 대화한 거예요. 이게 바로 부활의 영이 없는 세상 사람들의 사는 방식입니다. 하도 위로가 안 되니까 저희끼리 위로하면서 주고받는데 거기에 제3 자인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말을 건네는 겁니다.

너에게 일어난 일이 너의 일뿐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아들 예수님에게도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너는 네 인생 1차원적 노선에서 일어난 네 일에만 온통 거기다가 몽땅 정신을 다 팔았느냐? 그게 바로 너의 의를 못 놓는 이유잖아.” 그 뜻이에요. “어떻게 네 눈에 보이는 그 일만 생각하고 ‘예수님이라는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왜 그분에게는 관심이 없느냐?” 그 말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요, 그것은 상처만 덧나게 만들 뿐이에요. 그래서 이 나의 상처, 나중에 따지고 보면 그것도 주의 의도한 작전이고 계략이었습니다. 나의 상처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더는,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식은 전혀 nothing,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버려요.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옷도 예쁘게 한번 바꿔 봤다가, 또 치장도 했다가, 그게 위로가 될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해놓고 그다음에 뭐냐 하면, ‘내가 나의 의는 더 이상 믿을만하고 지킬만한 대상이 아니구나. 아하, 내가 그동안 말로는 하나님 섬긴다 하는데 이게 전부 다 구라였구나. 내가 생각해도 구라였다.’

우리한테는 일절 믿음이 없습니다. 아예 우리한테 믿음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주께서 믿음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에게 믿음을 줘버리면 믿음으로 자기를 위로하려는 그런 수작을 벌이기 때문에 주께서 믿음 주지 않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믿음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그런 믿음이 아니고 순종하는 거예요. “네가 지나온 모든 네 인생이 이것은 네가 유발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의도적으로 유발한 사태다. 너는 결혼하면서 위로받으려고 결혼했고, 취직하는 것도 너를 위로하려고 했고, 네가 성공하겠다는 것도 스스로 셀프위로고, 네가 주식에 투자한 것도 스스로 위로받으려고 한 것”이지요. 친구 사귀는 것도 그렇고, 아들 낳으려고 애쓰고, 딸 낳으려고 애쓰고, 자식 낳는 그것도 마찬가지고.

이걸 가지고 뭐냐? 갇혀버린 세상이에요. 인간은 말을 외부에서 건네주기 전까지는 인간은 갇혀버린 거예요. 그 갇혀버린 사람 중에 제일 오야붕이 누구냐 하면, 느부갓네살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게 왜 오야붕이냐 하면,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마저 점령을 했기 때문에 오야붕이에요.

왜 이게 대장이냐 하면, 두 번 다시 바벨론 같은 바벨론이 등장하지 않아요. 바벨론의 확장으로서 세상 끝까지 가버립니다. 금신상의 마지막 부분은 금, 은, 놋, 철, 진흙과 철의 혼합체, 그 하나의 금신상이 단일체라는 겁니다, 단일체. 인간은 단일세계에서 어떤 인간이 구상을 해도 똑같은 세계를 똑같이 복사하는 것뿐이지 새로운 세계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 갇혀서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걸 아십니다. 누가복음 13장 25절에서 그 점을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야, 내가 이러면 지옥 가겠다.’ 싶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니까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26, 27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즉 “내가 부르지 않았는데, 내가 말을 건네지 않았는데 네가 하는 말로 이 문을 열겠다고 네 쪽에서?” 이것은 네가 하는 셀프위로지요. 천국이나 구원이나 받아서 스스로 자기 인생을 멋지게, 마지막 마이웨이, 마지막 끝을 멋지게 빰빠라빰~, 장식하려고? 어림도 없어요. 문은 완전히 닫힌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내쫓아 버립니다. 주님에게 매정하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이미 갇혀야 마땅하거든요. 구원이라는 아이디어는 그것은 성당이나 교회에서 만든 아이디어에요. 천국 아이디어도 마찬가지고요.

그것은 그냥 인간들이 이미지와 상상력에 호소하는 종교적 심리를 건드려 가지고 스스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데 그게 직접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 건네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 닫힌 문을 가지고 ‘영원한 절망’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절망, 이것은 일반인뿐만 아니고 예수님 제자들도 그것을 경험했어야 돼요. 물론 우리도 경험해야 돼요. 영원한 절망. 40년, 50년 믿었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었던 겁니다. 아니었어요.

광주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거든요. 지갑을 열고 믿음이 있는가 어느 날 보니까 본인이 알아요, 믿음이 바람처럼 휙 빠져나가고 전혀 지금 믿음은 잔액이 앵꼬가 나서 믿음이 제로가 되었다는 사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믿음이 없어야 비로소 주의 일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지옥 가야 마땅함이고, 이것은 나의 의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이제야 정신 차리는 거예요. 나의 의가, 나의 거룩함이, 나의 신앙생활이 전혀 먹히지 않는 거예요. 어떤 할머니가 초등학생한테 심부름을 시켰을 때에 그 심부름을 잘했어요.

그 뒤에 할머니가 초등학생한테 뭐라고 이야기했는가, 물어봤는데, 어른들은 잘 답변을 못했어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개보다는 낫네.” 애 보고 개보다는 낫다? 이게 세상 사람, 자기 의가 있는 사람한테는 퍽이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성도한테는 퍽 위로가 돼요. 왜? 전혀 믿음도 없으면서 믿는 척 하니까 이것은 개보다 더 못한 인간이에요. 세상에 나가서 자기 자랑하고 자기 의를 지키기에 급급하면서도 주의 의를 거론하고 복음을 거론하는 이 위선자로 사는 것 이것은 개보다 더 못한 거예요.

그런데 마가복음 7장에서 노골적으로 주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너한테 은혜 줄 생각도 없어. 나는 내 아들한테, 잃어버린 자녀한테 주지 개 같은 너한테는 안 줘.” 이렇게 하니까 그 여인이 “맞습니다. 제가 개잖아요. 개인데 그래도 아들 먹다가 흘린 그 자투리라도 있으면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개가 얼마나 반기겠습니까? 저 그렇게 반기는 개 될래요. 자투리라도. 나 인간 안 될래. 나 인간 취급 안 해줘도 괜찮아요. 개라도 주님 자투리라도 얻어먹는 개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부활의 절차를 둔 이유에요. 십자가와 부활.

왜 처음부터 말을 건네지 않는가? 십자가를 먼저 언급하고 부활의 말을 건네는 이유가 뭐냐? 그것이 에스겔 5장 13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온 저주라는 저주는 다 부어놓고 하시는 말씀이 이제야 내가 속이 후련하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있어요. 창세기 1장 31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놓고 마음에 만족스러워야 되거든요. 거기에 흠이 있으면 주님의 속이 시원하지를 않아요. 마땅히 저주와 심판을 가해서 그들로 하여금 일체 그들 쪽에서 그들의 자기 의와 잘남과 거룩으로 천국 들어가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히려 그것을 저주해야 주님의 속이 시원한 겁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러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뭐냐? 내가 너의 의 말고 나의 의,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룬 나의 의, 나의 의로 너를, 영양제 주고 돈 몇 푼 벌어주는 것이 아니고, 나의 무덤에서 나를 끄집어내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마르다 마리아 오빠한테 한 거예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니까 나온 사람들은 뒤돌아서 뭘 봐야 돼요? 자기의 무덤이 발견돼야 돼요. 내 의를 가지고 잘난 체하는 게 이게 나의 무덤 속에 갇힌 채 노닥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거대한 무덤이에요. 그 무덤에 윤석열 있고 한동훈 있습니다, 그 무덤에. 그 무덤 운영한다고. 무덤 한구석에서 러시아하고 우크라이나하고 지금 전쟁하고 있고요. 전체가 무덤이에요. 지금 6월 1일에 브라질하고 우리나라 축구 한다고, 무덤 한구석에서 축구한다고 하고 있어요. 10월에 월드컵 한다고.

스스로 위로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뭐 낙이 있습니까? 월드컵이라도 해야지요. 돌아보면 무덤인데. 그 무덤에서 박사학위 따고, 무덤에서 판사 되고, 의사 되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 목사 되고, 거기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자식 잘 키웠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무덤인데!

이제 우리한테 남은 과제는 뭐냐? “네 무덤 봤지?” “봤습니다.” “손잡고 함께 가자. 이제 저 들판으로.” 제가 시간관계상 아가의 그 대목을 다 안 읽어드렸는데 정말 아가 그 들판 달리는 그 모습, 7장 10-13절, 이것은 안 읽을 수 없어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사람의 상태라는 것은요……, 내가 지킬 게 있으니까 타인으로 인하여 상처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지킬 게 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내가 지키는 그 세계가 나를 망치는, 나를 멸망시키고 나를 지옥 보내는 어두운 무덤 속의 세계였던 겁니다. 거기서 셀프위로 하고 거기서 무슨 상실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고, 맨날 찾아다니는게 힐링, 힐링, ‘어디 힐링 모임 없나, 필라테스 힐링 모임 없나?’

상처받아서 먹다 보니까 이번에는 육신이 폭발할 지경이에요. 아랫배가 튀어나오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아서 더 먹고. 갑자기 가만있다가 살찐 사람 욕 얻어먹게 생겼네요. 성경에 노아를 한번 봅시다. 노아가 물에 잠긴 온 세상을 방주 타고 누비고 있잖아요.

누비고 있을 때 노아가 무슨 상실감을 느끼고 무슨 결핍감을 느끼겠습니까? “아빠, 아빠! 우리가 부동산 사놓은 것 저기 물에 잠겼어.” “괜찮아, 괜찮아.” “아빠, 대구은행에 저금해놓은 것 다 날렸어.” “괜찮아, 괜찮아. 대구은행 물에 잠겼어, 지금.” “아빠, 전에 시험 쳐서 두 번이나 다 떨어진 대학……” “그 대학 지금 물에 잠겨 있어.”

가족, 국가, 교회, 천국, 이 모든 것, 이것은 우리의 의가 자아낸 조작된, 위작된 허구의 세계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더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죽음의 세계에 살지 않는데 여기에 우리가 지금 출장 나온 거예요. 잠시 파견 나온 겁니다.

왜? 주님이 어떤 길로, 어떤 고생고생 하면서 이걸 통과했는지,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말을 건넴으로 말미암아 도저히 다른 세계에 있다는 사실, 부활의 세계가 엄연히 있고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이 더 확실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노래는 이 세상 노래가 아닙니다. ‘새 노래’라고 해요, 새노래.

그래서 위로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노래입니다. 기쁨의 노래지요. 요한계시록 14장 3, 4절에 보면,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새 노래입니다. 세상에서 부를 수 없는 노래.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는 대로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자기의 면류관도 반납해 버려요. 노아가 방주 타고 노래 부르듯이 물에 잠긴 사람들보고 새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부를 수 없는 노래, 그러니까 이것은 가스펠송으로 부릅니까? 아니에요. 찬송가? 아닙니다. 그러면 트로트는 아니겠지요? 트로트가 왜 안 돼? 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형식과 어떤 가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내 이 삶이 홀로, 혼자, 내가 단선으로 서커스 가듯이 가는 인생이 아니라 넓은, 어떤 것도, 어떤 짓거리도, 어떤 것도 더는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더는 어떤 놀랠만한 일이 없지요.

갑자기 설교하는데 쾅, 쾅, 하고 커다랗게 음악 소리 나와도.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랬다는 거예요. 유-튜브로 설교 듣는 사람들이. 오늘도 그러더라도 놀라지 맙시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냥 주께서 일으키는 일로 그냥 순응하면 돼요. 그 순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

우리에게 되어진 모든 일은 주의 십자가와 부활의 세계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징후로서, 우리는 거기에 같이 느끼고 그걸 감사하면서 모든 일에 자유를 만끽하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같은 노래 불러도 나 잘남으로 부르면 짜증이 되고 상처가 되지만, 같은 노래 불러도 주께서 부르게 하심을 안다면 그게 새 노래가 됨을 저희들이 깨달으면서,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남편 되시는 주님의 손 잡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마련해주신 곳으로 데리고 다니시는 그 광경을, 이미 소속되어 있고 들어와 있음을 찬양케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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