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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2 10:21:07 조회 : 67         
21강-미가 6장 6-8절(하나님의 거부감)22060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180.11)
21강-미가 6장 6-8절(하나님의 거부감)2206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6장 6-8절까지입니다.

미가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제사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들은 제사하는 본인들에 대해서는관심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어떻게 받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제사한다고 열중하고, 시간 내서 바치고, 돈 바치고, 바쁜 시간 쪼개서 예배하고, 그런 일을 하는 본인에 대해서 굉장히 의젓함과 자부심같은 것을 그들은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시한 대로 그들이 따라서 율법대로 제사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들의 제사를 예배를 받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6, 7절에 보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이렇게 언급을 먼저 했어요.

이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그것을 거부합니다. 여기서 1년 된 수송아지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한 10년 된 수송아지를 가지고 나아가면 되겠어요?

여기서 거부한다는 것은 ‘네가 나한테 예배드리고자 하는 너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시는 거예요. 이런 말씀은 이사야 1장 13절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그리고 15절에도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기도로 모이고 예배로 모여봤자 궁극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예배와 제물을 받느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봐야 돼요. 하나님께 왜 안 받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이 드리는 그 어떤 것도 안 받습니다. 죄인이 바치니까. 내 허물을 위해서 내 자식을 바쳐도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받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추적하느냐? 거부함을 통해서, 안 받는다, “안 받는다, 를 통해서 네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려고 해봐라.” 하나님께 바치는데 안 받는다. 이것 바치는데 “안 받는다.” “왜 안 받습니까?” “너는 네가 누군지를 아느냐?” 하나님께 제사해도 하나님이 안 받을 정도로 본인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느냐를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행했으니까 의젓하게 생각하고 아주 장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남들은 하나님을 모르는데 자기는 알고, 남들은 교회도 안 다니는데 자기는 교회 다니니까 이거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남들과 비교해서 우월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인간들은 관심이 없어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집에 부모님 계십니까?” “예” “지금 부모님 집에서 뭐하십니까?” “몰라요.” 이렇게 돼버리면 집에 부모님 계신 것 알더라도 그 부모님이 뭐하시는지 모른다면 그 부모님 있으나 마나 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말은, 근원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존재인 것을 주께서는 추적해서 증명해내시는 거예요. 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느냐 하면, 내가 지금 여기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나 다음에 누가 있든지 그것은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거울 보면 거기 비취는 내 모습 있잖아요. 거기에 하나님 모습 비췹니까? 안비취지요. 그러니까 거울 앞에 누가 있는가?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있는 이상은, 내 자리 밀치고 하나님이 내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내게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존재니까 이스라엘 이 사람들이 제사를 드려도 누구한테 드리느냐? 하나님께 드리는 게 아니고 하나님 믿는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이상형에다가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내가 모든 것을 내가 나한테 갖다 바치는 거예요. 어떤 무엇도, 십일조가 되었든 무슨 헌금이 되었든 간에 전부 다 내가 나한테 갖다 바치는 겁니다.

왜? 나만 있으니까. 그 나만이 여기 있음, 그것만큼 확실하게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그것은 모호하기 짝이 없어요.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평생 교회 50년, 60년 다니고 목사 장로 되어도 하나님 안 믿어요. 60년 교회 다닌 본인 자신이 여기 있으니까 본인 자신을 믿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뭘 받는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누가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전달할 때 일단 그 사람이 실제로 있어야 되고요. 그게 첫째입니다. 첫째, 둘째, 하니까 또 잊어버릴까 걱정이 되는데 우선 그 사람이 있어야 되고요. 그 사람이 내 것을 받는다는 보장이 되어야 되고요.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줄 수 없거든요.

세 번째, 어디에 줍니까? 보성 1차 몇 동에 사십니까, 뭔가 집에 찾아가서 줍니까, 아니면 택배로 보내는 겁니까?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혹시 주소 아셔요? 하나님은 팔공로 980번지, 이런 식으로 주소 압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주소도 모르고, 하나님의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뭘 줘요, 주기는 뭘 줍니까?

교회 갖다 바치지요. 교회가 있지 하나님이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람들에게! 교인들에게! ‘하나님 대신 교회 믿는 것으로 하나님 믿는 걸로 퉁치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집을 알면 딩동, 눌러서 하나님 손에 쥐어줍니까? 아니면 문 앞에 두고 갑니까?

네 번째, 과연 무사히 하나님이 받았다는 그 확증이 어떻게 확인됩니까? “야, 네가 바친 재물, 네가 낸 십일조 잘 받았어. 내가 확인했어. 영수증 끊어줄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까? 그다음에 하나님이 받아먹었으면 뭔가 보상이라든지 반응이 있어야 되는데 받아먹고도 조용해요. 그러면 무슨 재미로 헌금합니까? 헌금 싹 다시고 아무것도 안 주는 데 무슨 재미가 있어야 헌금도 하지요. 재미가 없는데, 돈만 날렸는데. 한 1년 동안 십일조 했다면 십일조만 날린 거예요. 차라리 다단계나 했으면 고발이나 하지.

첫째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다고요. 왜 하나님이 없는가?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어도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이지요. 뭐 하나님이 있어야 바치지요. 그러면 뭐가 있느냐? 하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재미있게 놀고, 교회라는 이름으로 같이 선교하고, 전도하고. 재미있거든요. 내 말이 먹혀들어 가니까, 사람 꾀어서 한 명 건지니까 좋지요. 그냥 노닥거리고 노는 데지요. 무슨 하나님이 있어요?

성경을 보실 때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식으로 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딱 나오잖아요. “하나님 봤어?” “안 봤어.” “봤어?” “안 봤어.” “없잖아!” 안 봤는데 어떻게 있어요? 봐야 있지요. 우리 인간들의 삶은 보이는 게 있어야 그걸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이지 않으면 없는 거예요. 맘속으로 상상해서 있다, 있다, 있다, 백날 해봐도 갑자기 하나님보다 우선되는 게 확 들어오면요, ‘없다’가 되어버려요.

만약에 북한 인민군한테 잡혔다 합시다. 잡히기 전에 장로, 집사, 목사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 계십니다.” 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했던 사람, 그 사람이 인민군한테 잡혀가지고 김정은한테 끌려갔다 합시다. “하나님이 있어, 없어?” “없습니다!” 3초도 안 걸립니다. 왜? 앞에 김정은 있으니까, 그 뚱뚱한 사람이 있으니까.

뻔한 거지요 뭐 그걸 이상하게 여깁니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목사가 교회를 담임하고, 교회를 담당하고 교인들이 목사를 보고 ‘우리는 믿음 없어도 저 목사님만큼은 믿음이 있겠지.’라고 교인들이 그걸 요청하기 때문에 그들의 요청에 부응해서 ‘예, 믿겠습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고 그동안 구라를 떨어 왔던 거예요.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하나님 본 사람은 없어요. 못 봤으면 그것은 없는 거지요, 그냥.

그러면 문제 복잡한 것도 아니고 간단해요. 안 봤지요? 그러면 없는 거예요. 장로, 목사, 집사 된 자기 직분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이 준 거고요. 요한복음 5장 1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데 육신으로 오신 분이 어떤 일을 하셔요. 일을 하시면 그 일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 돼요. 그 일만이. 그러면 아버지를 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저도 아니고 여러분도 아니에요. 그러면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없습니다. 왜? 아버지를 본 자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본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교회에서 예수님을 초청해봤자 초청에 응하지도 않고요, 예수님이 교회 생활하려고 애쓰지도 않아요. 그것은 인간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거기에 갈 일이 없어요.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일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 예수님이 하는 일이, 그 하는 모든 노선이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들이 자기가 있다, 삶의 자리, 내가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를 주님은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죽음의 자리로 바꾸는 일을 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나는 이제 죽었고” 그러니까 주님의 일은, 내가, 우리가,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을 한시적으로, 임시적으로 살아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느냐?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다 이끌어버려요. 그 죽음으로 이끄는 과정 속에 우리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할 수 없어요. 어제보다는 늙었잖아요. 늙어가고 있어요. 늙어가고 결국 50, 60, 70, 죽잖아요.

누가 죽이는가? 주님이 살아계셔서 우리를 직접 죽이시는 거예요. 그게 주의 일입니다. 내가 죽어가는 이 모습 이것보다 더 정확한 내가 느낄 수 있는 주의 일이 없어요. 화장발도 안 받습니다, 나중에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 한시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이 땅에서 50, 60, 출세하고 성공하고 권력을 얻어도 죽을 때는 모든 것을 놔버리고 죽어버려요.

이것은 뭐냐? 인생 헛산 거예요. 망해버린 겁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주님께서 하는 일은 “제발 네가 사람 앞에 망하고 하나님 앞에 망해버려라.” 이게 네 본질과 일치되는 거예요. 합당한 조치에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한테 물을 수 있어요. “주님, 왜 우리를 죽이십니까?” 죄인이거든요. 죄인이에요. 죄가 뭡니까? 시선, 아버지와 예수님이 아는 시선으로 나를 봐야 되는데 우리는 내가 출발하는 나의 시선을 포기할 줄을 몰라요. 나의 시선을.

포기할 줄 모르니까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고 헌금을 해도 전부 다 그게 순환구조가 뭐냐? ‘내가 했다.’ 다 나에게로 돌아와 버려요. ‘이거 내가 했다. 내가 와서 새벽기도 해서 교회 부흥되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순환구조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인간 죽여버려 죽여버리고 모든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 가운데서 우리는 절대로 내 시선은 주의 시선과 합치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님께서 내 시선에서 나오는 모든 해석과 평가, 이해, 계산, 그것은 전부 다 주께서 거부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드렸는데 제사를 그들이 드리게 함으로써 너희는 아니야, 가 성립되게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인고 하면, 미가 오늘 본문 6장 8절에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즉 행하는 것이다, 라고만 이야기하면 인간은 이걸 그냥 행하려고 해요. ‘아, 이게 주의 뜻이구나. 그러면 주님, 제가 주님 구하는 공의를 행하겠습니다.’ 인자, 인자는 사랑, 긍휼을 말해요, ‘내가 긍휼히 행하고 사랑하겠습니다. 겸손히 행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뭐냐 하면, 내가 이 말씀을 이루는 게 돼요. 그러면 이것은 나의 시선, 이 나의 결과를 예상하는 나의 일이 되어버려요. 주이 일이 아니고 나의 일이 된다고요.

그래서 성경 본문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 미가 6장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들이 1년 된 송아지를 그 앞에 바치고,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바치고, 내 허물을 인하여 귀한 자기 자식, 맏아들부터 자기 몸의 열매, 딸자식이든 뭐가 있겠지요, 자기 몸의 여식을 바쳐서 ‘이정도 하면 하나님께서 감격해서 뻥 넘어가겠지.’ 하고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것,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끄집어 내놓게 하고 “아니야!”라고 처리해 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헌금, 기도, 예배, 전부 다 끄집어 내놓게 하고 그런 것을 다 일괄해서 “그러니까 너 아니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모스 5장 2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21절에 보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이스라엘 절기 율법에서 다 시켜서 한 거거든요. 그걸 다 멸시한다는 거예요. 이제 와서. 22절에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그다음에 ‘찬양하면 받겠지.’ 하는데 23절에 보면,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그만!” 이런 뜻이에요. “찬양 그만! 네 비파소리, 현악기 그만!” 피아노 그만 하세요, “그만해!”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역량은 그게 다예요. 그게 다.

주께서 바치라 하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다예요. 그게 무슨 자기 죄를 속할 수 있습니까? 자기 달란트 솜씨 자랑하고 자기 뽐내는 거예요.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그것은. 교회에서! 그러면 뭐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24절에,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하는 이것이 민주화 투쟁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천주교 신부들 ‘정의구현사제단’ 거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좌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에요. 북한 김일성이 하는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이냐? 20절에,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이 말은 뭐냐? 심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를 이루는 거예요. 심판함으로써 있는 대로 우리 것을 전부 다 망하게 하는 겁니다. 세상 자체가 어릴 때는 부모가 용돈 주는 대로, 밥 먹여주는 대로 살면 좋은 세상 같지요. 동화책이나 읽고 동화의 세계 그것이 나의 미래라 착각하지요.

그러나 좀 커서 회사에 다니고, 학교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자체가 나의 모든 인격과 명예와 체면을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제정신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돈 한 푼 번다는 것은, 내가 나쁜 놈 안되면 돈 한 푼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절절히 느껴요. ‘나중에 돈 벌면 착한 일 많이 해야지.’ 하지만 돈 버는 그 과정에 가면 갈수록 너 나빠지지 않으면 돈은 더 생기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무슨 돈으로 헌금하는지 몰라. 도대체 얼마나 사기를 치고 그 사기 쳐가지고 ‘하나님, 받으소서’ 하나님 안 받는다니까요. 헌금도, 아무것도 안 받아요. 찬양도 안 받는데 뭘 갖다 바쳐요? 안 받는다는데. 그냥 받지 않아요. “내가 주는 심판이나 받아라, 인간들아!” 그게 끝이에요. 그게 주의 뜻이에요. 늙어가면서 ‘내가 심판받는 게 합당합니다.’ 그것만 알면 돼요. 다른 것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교회 헌금 너무 안 나와서 화나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아니고 성경에 나와 있어요, 성경에.

시편 51편 16, 17절에 보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님께서 예배 한 두 번 더 드린다고 기뻐하는 분 아니에요. 새벽기도 한다고 기뻐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고. 제사 드릴 것 같으면 내가 드렸지. 그걸 주가 안 기뻐하시고, 주께서는 번제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제물 바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내가 상한 심령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상한 심령임을.

내가 못돼먹은 인간성을 가지고 이 땅에 출생할 때부터 나는 근원적으로 나에게 선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아예 안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본성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주 앞에 늦게라도 그걸 고해하는 거예요. 그걸 토해놓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거예요. “네 시선으로 너를 정당화하고 너를 네가 의롭게 포장하지 마라. 주님의 시선으로 너를 볼 수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내 백성이다. 주의 백성이다.”

그러면 주님의 시선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이게 상당히 중요하지요. 주님의 시선 이전에 요한복음 7장 33, 34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데 우리가 찾지 못한다고 하느냐?’ 죽으면 시체라도 있을 것인데 영원히 어디로 간다는 거예요. 날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순환구조가 뭐냐? 하늘에서 와서 땅에 있다가 도로 하늘로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주님 가신 길, 주님 가신 길에 같이 동참하지 아니하면, 같이 행하지 아니하면 아버지 만날 길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주님이 와서 이 땅의 일을 이루시고 마련하신 그 노선에 합류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만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주님 만나려면 서울에 가야 돼요, 부산에 가야 돼요? 몇 번지에 가야 됩니까? 도대체 어디 가면 주님 만날 수 있습니까? 교회 온다고 주님 만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느냐? 바로 이러한 점을 위하여 이사야 53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처참하고 비참하고 도살할 양같이 된 것은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느냐 하면, 세상이 갖고 있는 죄와 주님이 당하는 고통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격을 맞추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얼마나 세상이 독하고 지독하게 죄를 지었으면 주님께서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세상 죄 이상으로 더 지독하게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하는 지를 네가 한번 견줘봐라. 그게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런데 그 십자가 사건을 알아먹은 사람이 놀랍게도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도 다 토껴버렸어요. 도망쳤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이 시도, 예수 믿어서 천국 가겠다는 이러한 노림수, 요거 지금 주님 하신 일을 가지고 장난치는 거예요. 그건 주님 하신 괜찮은 일 중에서 내가 이용해 먹을 것 없는가, 요런 얍삽한 노림수 가지고 십자가 믿습니다, 하고 나오는 거예요. 손들고 나오라, 하니까 손들고 나오고 막 “이제부터 죄인입니다”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신자 되려면 어떤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가, 그걸 간파해가지고 그걸 흉내내면서 나와서 “저 예수 믿습니다. 이제부터 죄인입니다.” 누가 말은 못해요? 입이 있으니 말은 못하겠어요? 온갖 들었던 것은 다 하고 있는데. 어떤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지를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열두 제자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같이 3년을 같이 했어도 예수님 말씀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게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 63절에 나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육 아닌 사람 누가 있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거기 살리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네가 교회 다니고 충성 봉사하는 것은 아무 짝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이 요한복음 6장 63절의 말씀이 있으면 물어야 돼요. 왜? 왜 나의 진심어린 신앙과 나의 충성심과 나의 헌신과 나의 경배가 왜 주님 앞에서는 이게 아니오, 가 되는지를 그걸 물을 줄 알아야 돼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들은 홀로 있다고 착각하는데 홀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율법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했지 율법안에 있다고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율법을 지키게 되면 자기는 멀쩡해요. 그런데 율법 안에 있으면 그 율법이 그 사람을 통해서 모든 하는 것이 저주만 주어진다는 사실, 로마서 3장 19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롬 3:10)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추가해 준 거예요.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은 그냥 율법이 원하는 대로 망해버리면 돼요. 그 망해버려야 본인의 시선과 본인의 순환구조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죄인인데 뭐. 주님 앞에 영광 돌리는 방법은 있다, 없다? 전혀 없어요. 인간에게는 없어요. 살리는 것은 영인데 육이 무슨 효과가 있어요? 육은 아무 효과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들이 사기쳐가지고 이거 하면 복 받습니다, 하고 사기를 쳤고 그 사기에 대해서 우리가 그걸 껌벅 물은 거지요. 그게 사기인 줄도 모르고.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최후로 남는 것은 ‘나는 하나님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 사실, 그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왜? ‘나는 아무리, 아무리 벌 받아도 나는 나를 지키고 싶고, 나는 내 편에 서고 싶다.’ 나의 열심과 내 순수함, 그걸 포기하기 싫은 거예요. 망하라고 하는데 끝까지 우리는 망하는 것이 너무 무서워요. 내가 망하는 것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드디어 헤어졌습니다. 제자들하고 헤어졌고요, 다 헤어졌어요. 오직 아버지 아시는 분은 예수님인 것으로 증명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에서 주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했어요. 부활하셔서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너희 힘으로 너희 능력으로 나를 몰랐잖아.’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찾아가면서 일러줍니다. 그게 바로 성령 받은 겁니다.

성령 받게 되면 이제는 기쁨으로 제대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까불락댄 것은 폼이었어요. 이거 하면 혹시 복 줄까 싶어서 복권 그런 것 비슷하게 한번 긁어본 거예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율법안에 집어넣으면 어떤 인간도 율법 안에서 저주 안 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떤 기쁨이 오느냐 하면, 나는 죽고, 나는 저주받아 죽지만 율법은 율법대로 우리의 망가진 이 현장에서 생생하게 완성의 모습으로 드러나잖아요.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서 그것을 기뻐하는 겁니다. 네가 천국 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말씀으로 말씀을 완성 시키는 일에 너를 죄인으로 참여시켰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너는 나와 더불어 함께 기뻐하자.” 이게 바로 나의 시선에서 주의 시선으로 바뀐 거예요.

어릴 때, 국민학교 때 연극을 본 적 있는데 심청전, 장화홍련전 연극 하잖아요. 옛날에는 TV가 없어서 연극을 많이 했는데 관객들이 막 조마조마해요. 끝 대목에 가서 나쁜 사람은 더 기가 살아서 왕성하고 좋은 사람은 얻어맞기만 하고 죽기만 하거든요. 그래서 심청전도 마찬가지고 춘향전도 마찬가지죠. 주인공이 죽어요.

그러면 관객들은 막 가슴을 치고 “돈 물어내라. 무슨 이런 연극이 다 있느냐. 어떻게 악인이 이기고 선인이 죽느냐? 우리는 이 연극 본 보람이 없잖아.” 이렇게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트장 뒤에다 구멍을 뚫어 놨어요. 구멍을 뚫어놓고 악인은 나를, 이 세상은 나를 망하는 쪽으로 밀어 넣는데 관객들은 눈에 보이는 그 세트장 그것으로 끝인 줄만 알고 가슴 조아렸어요.

나중에 보니 악인들이 주인공을 세상 사람이 모르는 비밀의 문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던 거예요. 그러니까 연극의 하이라이트 마지막은 뭐냐? 그 뒤에 그 비밀의 문에서 새 세계를 맛본 주인공이 도로 비밀의 문에서 등장해서 악인을 고발하고 전부 다 처단함으로써 드디어 대단원의 막이 위에서부터 죽 내려오지요.

중국 사기단한테 사기당해서 공양미 3백 석을 바쳤던 그 어리석은 심청이가 나중에는 왕후가 되잖아요. 왕후가 된다고요. 김 건희쯤 돼요. 대통령 부인, 왕후가 되어서 진짜 상상도 못 한, 아버지 눈이 뜨이잖아요. 사람은 극단적인 망함과 그 극단적인 아픔을 너끈히 전부 다 보상하고도 남는 극단적인 어떤 희망 사항이 있을 때 거기서 어떤 카타리시스를 느끼는 겁니다. ‘야, 작품 좋다. 속이 시원하다.’ 느끼지요.

우리가 교회 나올 때는 여전히 우리는 내가 죽어서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려고 시도합니다. 이게 화근이에요. 이게 문제였던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킵니다. ‘너는 우리 예수님이 잘되면 더불어 같이 잘되면 되는 거야. 네가 너부터 우선 챙기고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 있어야 된다는 그 의식 자체가, 그 시선, 이제는 그게 네가 망할 수밖에 없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세상 모든 일이요, 나 천당 가려고 있는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구원자요, 예수님만이 심판주요, 그 심판 가운데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알고 아무도 아버지를 몰랐다는 그 사실에 뒤늦게 성령을 통해서 동감한 자만 예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이것은 오히려 주님의 계심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이에요. 내가 있다는 그것 때문에 주님의 있음은 뒷전이었습니다. 하나님 계심은 뒷전이었습니다. ‘하나님 뭐하시노? 날 안 도와주고. 내가 열심히 철야기도 하는데 날 도와줘야지.’ 항상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내가 우선이지 하나님은 뒷전이에요. 우리 가정 잘 되어야되고, 복 받아야 되고.

그런데 성경은 뭐냐? 안 받는다, 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네가 얼마나 열심 내고 네가 얼마나 순수하냐가 아니라, 너 같은 인간 때문에 주님께서 도살할 양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와서 뒤늦게 알려주지요. “너 때문에 나 죽었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잘나고 잘난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됐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해요?

히브리서 9장 9-12절에 보면 그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10절에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소용없다 그 말이거든요. 율법의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는 것 아무 소용없고, 11, 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여기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는 그동안 누가 했습니까?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게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해서 부지런히 정기적으로 그걸 행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날 부지런히 예배하는 그것이 주의 뜻인 줄 알고 행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그거 하고 나서는 ‘주여, 해드렸습니다. 우리 임무는 끝났습니다. 성심성의껏 율법을 잘 지켰으니까 율법의 복을 주세요.’ 이런 식이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복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부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남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은 뭐냐? 염소와 송아지 피를 바치게 해요. 제사 드리게 합니다. 해놓고 뭐하냐? 그것은 아니고, 너희 행함을 내가 완전히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그것 전부 다 무효로 돌리고 이제는 내 피로 말미암아, 그것도 “단번에”, 여러 번 필요 없어요, “단번에”,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죄사함을)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14절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왜 피입니까?” 라고 물으면 “너는 항상 너 자신을 바라보는 식으로 하나님과 예수를 끌어당겼잖아. 너 잘 먹고 잘살려고, 복 받으려고, 너 구원받으려고. 그것 때문에 바로 내가 죽은 거야. 내가 피 흘려 죽은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거부성이 우선되어야 돼요. 거부성이 우선되어야 되고, 이 거부성을 통해서 현재 내가 이 땅에서 힘들게, 돈 번다고 힘들게 살고 여러 가지 율법 지켜 봤자 나 잘났다, 밖에 돌아오지 않는 이러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 쌓이고 계속 축적이 되는 것을 이제는 도리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껏 하는 짓거리가 나 잘났다, 나는 우수하다, 나는 믿음 좋다, 이런 짓거리 밖에 안 됨을 이제야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우리 죄씻음은 오직 예수님 피밖에 없습니다.” 그걸 매일 삶을 통해서 겪게 하는 거예요.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미지의 영역, 인간들의 미지의 영역은 율법, 이스라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서 만들어내고, 율법 바깥이 아니라 율법 안에서, 그 자체에서 미지의 영역을 솟아나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성심성의껏 한다는 그것 자체가 율법의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기때문에 이 성경 말씀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성경말씀을 주시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지켜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보게 되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맞지요. 이 세상에 돈이 있다고 소문나면 거기에 도둑이 오게 되어 있고 좀과 동록(銅綠)에 상하게 되어 있고요. 이건 뭐 내가 여기에 있는 것 만큼이나 확실하지요.

그런데 20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이건 뭐……,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다면 이 말이 맞지요. 하늘에 있는데 무슨 도둑이 오겠습니까? 문제는 그 하늘이 몇 번지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하늘에 돈을 쌓아 두는 방법은 냅다 하늘에다가 신사임당 5만 원짜리 막 붙여봐야 삐라처럼 반짝반짝하면서 도로 나한테 다 떨어지거든요.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방법을 아셔요? 이거 없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네가 아무리 쌓아 둔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하늘에 쌓아 둔 것으로 간주하지 않겠다.”

그러면 하늘에 쌓아 두는 방법은, 주님과 동행하는 거지요. 십자가 지신 주님과 동행함으로써 네가 말씀대로 살려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라고 백날 네가 열중해도 육은 너무나 무익함을 네가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이미 용서받은 입장에서 도리어 내가 허접하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도리어 감격하면서 기뻐하는 것, 이게 바로 주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이게 사랑과 함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망해야 마땅함을 깨닫는 것도 우리 능력이 아니라 주의 영이 찾아와야 가능하고, 내가 하는 족족 죄가 된다는 이 사실도 주의 영이 말을 건넴으로 깨닫는 이 자체가 주와 동행이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날이며 날마다 주 앞에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1강-미가 6장 6-8절(하나님의 거부감)220601-이 근호 목사.hwp (96.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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