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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6 02:17:34 조회 : 55         
강남-누가복음 11장 29절 (무지에서 오는 자유) 220524a-이근호 목사 이름 : 홍민희(IP:59.12.122.247)
강남-누가복음 11장 29절 (무지에서 오는 자유) 220524a-이근호 목사



자, 누가복음 11장 29절부터 보겠습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이게 누가 봐도 표적이라는 다른 말로 하면 이적 또는 쉽게 말하면 기적. 요나에게 일어난 그 일들이 요나의 입장이나 그 당시 다른 사람 입장이나 이게 표적으로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길에서 걸어가면 다른 사람이 저기 표적 간다 이렇게 합니까? 그냥 평범한 거죠.


그래서 이 표적이라는 말은 무엇과 싸워야 될 개념이냐 하면은요 보편성, 보편성과 싸워야 될 개념이에요.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표적을 특수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들은 잘 용납을 안할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수한 사건이 되어버리면 자기는 거기에서 소외가 되고 배제가 돼야 되기 때문에. 자신이 배제 당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이 보편성이라는 말도 되고요, 같은 말 비슷한 말이지만 ‘일반성’.


그냥 평범함. 일반성의 지속. 그렇고 그런 삶, 생활. 그러한 변화들이 줄곧 이어져간다. 때로는 지루하게 때로는 깜짝 놀라는 일이 있지만 지나가면 다 잊혀진 일. 세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편하게 보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은 범주화라고 하는데 범주라고 하는데 범주라는 것은 이게 테두리 치는 거에요. 테두리 쳐서 여기서 안에 들어있는 것을 동일하게 평평하게 만드는 거에요. 평평하게. 이걸 평평하게 만드는 것을 동질화. 같은 질의 그렇고 그렇다. 특별한 인간은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누가 봐도 요나가 살았다. 그래서? 요나가 뭐 이렇게 복음 전하다가 와가지고 죽을 뻔해가지고 바다에서 고래 배에 살았다. 그래서? 니느웨 가서 회개하라고 복음 전했다. 그래서? 그럼 뭐?


그거는 요나 개인적인 일이죠. 요나에게 일어난 일이잖아요. 주님께서는 이걸 이 요나의 일을 표적 삼아버립니다. ‘표적’. 표적 삼아버리면 여기 사발이 있다고 봅시다. 사발. 그릇이 있는데 어떤 액체가 담겼는데 지금 막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봅시다. 사발에 끓고 있는 이 뜨거운 물을 사발을 기울여서 그냥 부어버려요.


이게 이제 예레미야에 보면 비슷한 예가 나옵니다. 뜨거운 것을 부어버리면 졸지에 여기에 있는 사람들 뜨거운 기운에 화들짝 놀래겠지요. 이게 표적이에요. 표적은 일반화, 보편화되어있는 자기끼리 동질화되어있는 이 세상을 표적으로 뒤덮어버립니다. 심술쟁이. 심술쟁이죠.


요나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가지고 니느웨 성을 이렇게 뒤엎어 버려요. 뒤엎어버리니까 이상하게 니느웨 사람들이 지금껏 하나님 없이 이렇게 자기가 평안하다, 일반화되어있는 거죠. 그냥 일상생활 하다가 갑자기 그들이 이상한 현상을 보여줍니다.


가축, 자기 자식은 물론이고 온 나라가 동일한 믿음 체제, 믿음 망이 형성되면서 동일한 믿음 망으로 전부 다 금식을 하고 회개를 하는 거에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이 특수성을 그들이 이해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럴 때 이 특수성을 가져다주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표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안일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간다고 여기는 이 세상에 하나의 폭탄처럼 활용되도록 작용하는 것 그게 바로 표적이 되는 겁니다.


구약 때의 요나가 표적이 됐다면 오늘날 표적은 누구냐? 오늘날 성도가 하나의 주님의 표적이 되는 겁니다. 표적은 일반성, 평범성, 안일함을 겨냥해서 표적이 등장한다는 것은 표적이 이렇게 상대하면서 들이닥칠 때 이게 바로 심판입니다. ‘심판’.


심판할려면 기준이 있어야 되겠지요. 기준 없이 “너 나빠” 이러면 안되지요. 어디 어디에 준해서 너는 저주 받아야 돼 이래야 심판 되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표적이 되고 그 예수님의 자신의 표적의 표적됨을 이해 못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특별남에 대해서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심판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그 의미와 예수님의 그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그게 뭔데? 마치 요나 시대 때 요나한테 아무도 관심 없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니느웨 사람들이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런 무반응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행사되게 하는 것, 이게 표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성도의 존재가 심판이 될려면 성도가 이야기하는 것과 성도의 모든 행실과 그 생활 모습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긴장을 할까요? 긴장을 하지 않아야 될까요? 어느 쪽입니까? 성도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긴장할까요? 심각함을 느낄까요? 느끼지 않을까요? 전혀 느끼지 않아야 되지요. 그래야 심판이 되니까. 그래야 심판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성도가 전도한답시고 기대하면 안돼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그들은 표적을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제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표적을 표적으로 받지 아니하고 일상의 일로 받는 이유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무심코 받는 이유는 각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에. 각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어요.


기대한 바가 따로 있다는 말은 아직 세상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세상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표적은 이들이 표적을 안 받은 이유가 각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에. 기대라는 것 알지요? 꿈, 소망, 희망 이런 거에요. 장래에 대한 계획 이런 거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이야기 복음에 대해서 시답지 않게 여기는 거에요. 자기 할 일이 지금 창창하게 남아 있는데 그게 뭔데 신경 쓰겠어요. 그러니까 이걸 보게 되면 안 받아 준다면 예수님의 표적은 결국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표적은 시간은 이미 끝났다. 기대해도 소용없다. 세상은 이미 끝났다는 거에요.


그게 지금 그 끝난 증거가 어디 있느냐? 여기 29절에 나옵니다. 이 세대는 어떤 세대? ‘악한’ 걸로 이미 규정이 정해져있어요. 어느 정도 악하느냐가 문제지 악하다가 뭐 질적으로 개선됐다 이런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거에요. 이미 악한 걸로 확정이 된 상태에요.


그래서 이 마지막 때의 표적인데 어떤 표적이냐? 이 시대가 마지막이라는 표적. 마지막 때. 시간은 끝났다. 시간은 끝난 거에요. 그러면 시간이 끝나면 뭐냐? 그럼 시간이 끝나면 예수님은 이걸 뭘로 보느냐? window. 우리말로 번역하면 창 또는 창문.


표적 자체가 지금 이 순간 직접 하늘나라와 통하는 그것은 오직 표적밖에 없어요. 왜? 창이니까. 저 바깥풍경 창 말고 차 루프처럼 하늘로 지붕에 뚫린 창을 생각해 보세요. 그 창은 어제는 창이었는데 오늘은 창이 아니다 뭐 그런 거 있습니까? 그냥 지붕이 뚫려가지고 유리창으로 막아 놨으면 어제나 오늘이나 한 달 뒤나 공사 이후에 계속 그냥 그 자리에 있잖아요.


우리가 표적이 된다는 말은 더는 우리가 남을 위한 나의 인생에 있어서의 어떤 계획하는 바가 기대하는 바가 이제는 쫑났다는 겁니다. 그런 거 갖고 있지 말라는 거에요. 기대하는 바. 지금까지 강의 다시해보겠습니다. 표적은 곧 심판입니다. 표적은 심판이에요. 심판인데 이게 왜 표적이 심판이어야 하느냐 하면은 그들이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심판되는 거에요.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그래서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표적이 표적이기 위해서 이 세상은 꾸준히 악해왔는데 드디어 그 악행이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확정이 나버렸어요. 죄가 무르익었는데 거품이 나요. 너무 무르익어서 포도주가 거품이 나는 거에요. 너무 무르익어서.


주님께서 이제는 시간을 더 끌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그냥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고 window, 창이에요. 하나님과 통하는 창이 있다는 거에요. 창을 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창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window가 있다는 것은 다른 길은 없어요.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 때 표적이 되는 그런 형식 외에 다른 길은 없어요. 다른 길은 없으니까 사적인 희망이나 기대나 꿈같은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사람이 기대가 있으면 실망할 것도 남아있어요. 그리고 아슬아슬해요. 어떤 전기기사 시험 친다 하게 되면 그 시험 칠 때 전기기능사 치고 난 뒤에 그 시험 준비할 때 얼마나 기대감이 높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20대 여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이 한 두 달 남아있다면 두 달 동안에 얼마나 초조하고 희망에 부풀어있겠어요. 그 희망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희망이냐 하면은 두 달 동안 만큼은 제발 예수님 재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님 재림 늦춰줬으면. 전혀 주님이 나를 주님의 표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기의 기대감이 엉뚱한데 있기 때문에 그 딴 것은 신경도 안 쓰지요. 관심도 없고 그래요. 관심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방금 한 것을 문장으로 적어보겠어요. 아직 자신에 대한 기대가 먼 훗날에 남아있는 한 말씀은 들어올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아직 자신에 대한 기대가 먼 훗날에 남아있을 경우에는 복음이고 말씀이고 귀에 안 들어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을 31절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1절 “심판 때에”.


자, 보세요, “심판 때에”. 굉장히 특이하죠.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주님께서 표적 이야기할 때는 무엇을 염두에 둡니까? 이 세상은 어떤 세대다? 악한 세대다. 악한 세대에게 돌아갈 적절한 조치는 심판밖에 없지요. 이미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남방 여인이 누구냐? 남방 여인은 이 시대에 성도 같은 존재지요. 심판을 눈치 챈. 주님의 십자가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


더는 먼 훗날에 내 기대가 되냐? 안 되냐는 전혀 이제는 이미 물 건너간 나의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 땅 끝에서 왔습니다. 땅 끝에서 온 사람 있지요.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10장 7절에 그 여왕이 어느 나라 여왕입니까? 스바 여왕이죠. 스바 여왕이 그 땅 끝에서 왔는데 그 사람이 온 목적이 뭡니까? 어디 뭐 온천 즐기러 왔어요? 놀러 왔어요? 연애하러 왔어요? 이 여왕이 솔로몬에게 왜 온 겁니까? “소문 듣고 왔지롱” 해서 온 거에요? 무슨 소문 말입니까?


솔로몬의 모든 지혜, 그 모든 지혜가 여기 10장 7절에 보면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이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 보다 더 월등하다”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이 남방 여인, 스바 여인이 찾아온 이유는 절대 진리, 최종 진리, 마감은 내 인생을 여기서 종쳐도 상관없는 내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내 목숨 같은 것 그런 것은 내 목숨도 시답지 않게 신경 안 써도 될 만큼 놀라운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최종적 절대 진리 그걸 얻을려고 그걸 지혜라고 하는데 그 지혜 얻을려고 온 거에요.


그 지혜가 자기의 나라에서는 뭐냐? 여호와 신이 줬다는 지혜인데 하나님이 직접 줬다는 지혜가 과연 그럴까? 하고 그걸 확인 차 온 거에요. 확인하고 난 뒤에 이거는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에요. 그럼 이 스바 여왕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잘되리라 먼 훗날에 남아 있는 마음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지요.


절대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솔로몬한테 있으면 자기는 그걸로 족한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누가복음 11장을 보면서 왜 그동안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해도 시큰둥하고 멀뚱멀뚱 눈만 바라보는 이유를 여러분 아시겠지요. 세상은 그냥 평범한 거야. 뭐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많이 묵었다 고만해라. 많이 들었어. 전부 다 평범하고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고 보편적인 이야기에요.


그런 이야기 고만 해라 나도 지겹다. 왜? 나는 내가 계획한 내가 기대한 것이 따로 있단 말이죠. 너한테 그딴 소리들을 시간도 아까워. 시간도 아까워서 더는 들을 수가 없어. 내 나름대로의 인생설계가 되어 있는데 왜 네 말 굳이 들어야 돼. 네 말을 굳이 들어야 될 이유 다섯 가지만 대라. 여러분 어떻게 답변하겠어요?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지금 너한테 한 수 가르칠려고 하는 걸로 네가 그렇게 보이냐? 나는 지금 심판하러 왔다.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복음 뿐만 아니고 말씀 자체에도 대해서 관심이 없느냐? 오늘 제일 핵심 되는 부분 나오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


무지하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을 안 듣습니다. 인간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아는 만큼 자기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더 나은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나은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무겁게 만들어요. 아는 만큼. 무지가 주는 즐거움을 인간은 아 이거 정말 무지라는 즐거움을 알면 여러분 인생 모든 것을 다 아는 거에요.


아니까 내가 뭔가 알고자 하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긴장이 되는 거에요. 긴장이 되고 잘 해야 되고 잘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철저하고 실수 줄여야 되고 이렇게. 그러나 인간은 모르는 그것이 자유입니다. 갈수록 나는 아는 게 없음을 아는 게 그보다 더 큰 자유가 없어요. 몰라서 구원받는 거에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바로 이게 나의 모든 지혜를 박탈시키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나를 십자가에서 무지한 자로 만들고 그 무지한 자만이 누리는 희열과 감격과 기쁨의 눈물과 그리고 그 가벼움. 와 잘 잤다! 이거 있잖아요.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거에요.


그동안 평생 거의 80이상을 사시면서 ‘알아야 돼. 아는 것이 나를 구원해’ 라고 하는 그러한 기대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 이것이 한방에 다 날라가버려요. 한방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 33절에서 36절까지 나옵니다.


33절에서 36절 이 내용, “등불을 켜서 등경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 빛에 관한 이야기고요. 빛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그렇게 해서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되드냐? 빛이 없으면 우리는 35절에 어둠에 있다. “어둠에 있다.”


그러니까 이걸 여러분의 눈동자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여명의 눈동자. 여명 또는 미명. 새벽에 어두움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 순간. 그 순간. 그 순간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빛을 본 순간을 주께서는 캐치해서 찰깍 찍어서 우리를 표적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빛을 본 사람.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어두움에서 주워 모은 것들이에요.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모르면 안 된다고 여겨서 모르면 남한테 뒤처지고 남한테 무시당하고 인생 출세 못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 세상의 일반화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꾸준히 그런 영향력을 우리는 받아왔어요. 아는 것이 이기는 비결이라고.


우리는 무지가 오히려 그 지붕을 뚫어버리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무지함이 그게 window가 되는 것, 우리 자체가 창문이 되는 거에요.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여명의 눈동자, 하나의 빛이 들어오는 등불 같은 존재. 이것은 이 세상이 안다는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는 바로 무지 그 자체인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 거에요.


빛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제는 충분히 모르는 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대책하지 않는 자유. 뭘 알아야 대책하지. 내일도 모르는데 오늘 저녁일도 모르는데 무슨 대비를 해요. 모르기 때문에 대비하지 않아도 되는 그 가벼움. 존재의 가벼움.


그것이 바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왜? 아는 게 없으니까. 아는 게 없으니까 모든 것을 해보는 거에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알게 되면 이거 하게 되면 나중에 나한테 얼마나 내게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될까? 아아 안돼. 이거 말고 다른 것 해야 돼. 이걸 하게 되면 이러한 수익이 나오고. 안돼! 사고 나면 안돼. 그럼 다른 것 해보자. 아는 게 화근이에요. 아는 게 화를 자초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 앞에 있는 새롭게 생겨버린 자신의 겸손한 마음 자세죠. 그리고 기쁨이죠. 솔로몬 당신의 아는 것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군요. 아니면 더 갈수록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쁨을 솔로몬 당신이 나한테 허락했다.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 10장 7절에 나오는 그 고백이죠.


내가 알았다고 내 나름대로 나도 이 정도 아는데 해보니까 완전히 우사 당했죠. 내가 안다는 기준으로 감히 범접이 불가한 범접할 수 없는 지경에 솔로몬의 지혜가 주어졌을 때 깨갱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솔로몬 앞에서. 그 솔로몬의 그 지혜는 하나도 버릴게 없어요. 왜냐? 그게 함축해서 인격화되시는 분이 등장했는데 그분이 신약성경에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


욥기를 끝냈습니다만 욥기 끝부분에 나오는 “악어에 대해서 아느냐? 네가 염소에 대해서 아느냐? 염소의 인생 아느냐?”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대구강의에서도 했지만 악어나 염소 모든 그 속에 누가 들어있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요소가 ‘지혜’라는 이름으로 들어 있는 거에요. 모든 것 속에.


시편 104편 한번 봅시다. 24절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보세요. 모든 피조물 안에 여기 주가 신약에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요소가 다 들어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뒤에 쭉 보면 바다의 생물 악어부터 해서 쭉 나오면서 28절에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취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돌아가면 되잖아요. 자기 아는 것 가지고 방어기지가 가동되면 안 되지요. 내 딸 결혼식이 두 달 남았는데 지금 주께서 재림하시면 안 되지요 이런 식으로 말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30절에 보면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새롭게 하시겠지요. 세팅 다시 하시겠지요. 하시라고 하세요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니까. 우리가 뭔가 주의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이의 걸 권리가 있습니까? 자격이 있습니까? 없지요.


개코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뭐 아는척 해가지고 우리 인생 꼬라지하고는 알아서 기껏 한 게 뭔데? 예? 남는 것은 자살충동 외에 뭐 있어요? “주여 왜 내 뜻대로 안됩니까?” “너 뭐 알아? 너 알고 하는 이야기야? 왜 세상이 네 뜻대로 되야 할 이유가 뭔데?” 자살해가지고 119에 전화하게 만들고. 호들갑을 떨고. 그런 이야기 있어요. 경찰 찾아오게 만들고. 자기가 로스쿨 원서 냈는데 다 떨어졌다는 거에요. 떨어진 이유는 몰라서 떨어졌지요. 무식해서 떨어졌겠지요.


그런데 아직도 그 떨어진 걸로 대해서 자기의 무식의 정도를 몰라요. 딴 데 더 떨어져봐야 돼요. 주식해가지고 주식 몽땅 날라가야 돼요. 주식도 내가 아는 게 없구나. 이 정도 경험해야 돼요. 이 정도 경험은. 그래가지고 또 부동산 이렇게 개입해가지고 또 인수인계하다가 또 잘못 사가지고 날려먹고. 그래도 아직도 모르는 거 아직 멀었어요.


도대체 나의 모름의 끝은? 나의 무지의 끝은 뭐냐? 그 끝까지 가봐야지요. 저는 얼추 아는 거 있고 모르는 것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아는 게 생판 모르는 것밖에 없네요. 왜? 모든 변화는 주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모든 변화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그럼 너는 상대방 안 속였어요? 상대방에게 속았다는 거에요. 그러면 너는 사랑했나? 사랑한적 없어요.


인간이 안다는 것이 모든 것을 인간이 안다는 것이 스스로 자기를 더욱 더 망하게, 더욱 더.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자기를 망하게 매우 밀어붙이게 돼요. 아는 것이. 깜깜해 모든 것은 다 어두워. 어두운 데서 다 끄집어 당겼어요. 그 무지의 절정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무지의 절정이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본인이 표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실제인줄 알고 있어요.


시편 74편에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9절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선지자 자체가 표적이었다는 거에요. 표적인데 사람들은 선지자라는 말에 관심 갖지 않았어요. 왜? 자기가 나름대로의 자기를 실제로 보고 자기가 잘 될 수 있는 기대에 그들이 눈이 멀은 거에요.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 여명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가 아니에요. 빛의 세계는 표적이 될 때만 보이는 것이고 알 수 있는 것이지 보편적인 일반적인 삶에서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어두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이에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인간은 뭐냐? 악한 세대요 심판의 대상이고 정죄 받을 일만 남아 있어요. 개코도 모르는 게 아는 척해서 다 정죄 받는 겁니다. 아니까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아는 걸 주워 모아서 장차 내가 이렇게 성공할거야 하고 기대를 갖게 되는 거에요. 기대를. 그래서 표적은요 무엇과 관계되는가? 표적과 현실의 관계는 빛과 어둠의 관계입니다. 빛과 어둠의 관계.


자, 이제부터는 상당히 어렵지만 우리 자신이 방향을 이제는 뭘 아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에 대해서 무지하냐 내가 무지함을 아는 기쁨을 여러분들이 한번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무지함을. 요나부터 시작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 그리고 배를 타고 하나님이 계신 곳 말고 먼 곳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지요. 이게 같은 배를 탔던 사람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가는 것을 이것을 절대로 그들은 이걸 표적, 이적이라고 기적이라고 보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사적으로 손해 보는 요나 개인적으로 이거는 손해 보는 일이기 때문에 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아까 표적은 뭐냐? 이 세상을 향하여 심판하는 거죠. 그러면 표적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 세상 문명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이 어떻게 있느냐? 이 세상은 악한 세대고 음란하고 악한 세대고 정죄를 당할 그런 것들만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이 표적이 등장하는 겁니다. 요나 개인적인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배타고 가는 사람들은 회개했습니까? 요나하고 배타고 가는 사람. 회개 안했지요. 회개 누가 했습니까? 엉뚱한 곳에 살고 있는 그것도 집단적으로 그들은 회개했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았습니까? 그게 궁금하지요.


주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가 했던 그 짓을 전부 다 회개하고 그만두고 금식하면서 우리가 금식했다는 이 자체를 주님께서는 뭘로 사용하느냐 하면은 그 전체를 뭘로 보느냐 이걸 표적으로 본거에요. 표적으로. 자, 표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필요치 않지요. 표적이란. 그 자체가 얼음 땡이니까. 스탑이니까. 그 자체가 표적은 그 자체가 스탑이 돼요.


양초 있지요? 파라핀. 파라핀이 몇 살입니까? 질문돼요? 안돼요? 이 컵이 몇 살입니까? 질문 안되지요. 언제 만들었습니까는 질문이 되지만 이 컵 자체가 몇 살입니까는 질문이 안되지요. 왜 질문이 안됩니까? 사물 자체에는 이미 확정되고 고정된 것은 시간이 거기에 합류되어 있기 때문에 흐르지 않아요.


오래 된 컵 이거는 말이 되는데 컵은 물을 담는 기능이지 컵아 네가 몇 살 되었냐 이거는 질문 리스트에 들어 갈수가 없지요. 권사님 몇 살입니까? 이런 질문은 성립이 안 된다고요. 권사님은 무엇을 누구를 인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에 의하여. 그게 권사님의 기능이에요.


우리 인생 사는 거 편하지요. 어머님 오년만 기다려주시고 밀어주시면 오년 뒤에 성공하겠습니다. 오년이든지 십년이든지 자꾸 자기 기대의 시간 요소를 집어넣지 마세요. 우리교회 지금 숫자가 얼마 안 되지만 3년 내에 부흥할거야. 인생에 시간을 집어넣으면 자기가 아는 걸 영끌,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그거 성공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지옥 같은 삶을 사는 거에요.


자기 아는 것, 실수 줄이고 보다 아는 지식의 접근하게 되면 진리가 나를 성공케 할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진리가 우리를 성공하게 하는 게 아니고 성도 자체가 이미 진리에요. 새삼스럽게 추가될 진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전성기는 지금 일할 수 있는 순간이 전성기다.” 일하고 있는 자체가 전성기지 일에서 어떤 실적과 업적을 남기는 게 전성기가 아니라는 거에요. 주의 일을 하게 되면 그 자체가 표적이 되면 그게 저와 여러분들의 전성기입니다. 표적이 안 되는 우리를 표적 만들 때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죠. 무지한 자로 만드는 거에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요. 1장 19절에서 20절까지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뭐합니까? “멸하고.” 이런 좋은 체험을 해보셔야 될게 아닙니까.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이게 얼마나 우리를 가볍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자유의 영이십니까. 이런 경우 없어요? 지혜가 애초부터 없었어요? 총기가 애초부터 없었습니까?


20절에 봅시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를 세상에서는 박사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그것은 어리석고, 어리석기만 한 게 아니고 그게 자기의 화가 되고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18절에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멸망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여전히 자기 지혜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기대를 갖고 있다면 그게 전형적인 멸망하는 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표적에 대해서 누가복음 11장으로 오겠습니다. 요나를 표적으로 만들고 니느웨 사람을 표적으로 만들고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한 것을 표적으로 만든다면 그 표적들이 최종 표적에서 나온 표적들이겠죠. ‘최종 표적’. 그럼 최종 표적은 아까 우리가 봤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최종 표적이 뭐죠? 십자가죠. ‘십자가’.


이 최종 표적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면 십자가 설명해드리면 제일 쉬운 게 뭐냐 하면 바로 구약의 언약궤하고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언약궤. 사무엘상 6장 19절, 사무엘하 6장 7절에 보면 여기서 어떤 사람이 죽는 사건, 사람이 죽는 사건이 나타나요. 여기는 웃사가 죽고 여기는 많은 사람이 죽지요. 70명이 죽지요.


사람이 죽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왜 죽었습니까? 뭐를 건드렸습니까? 언약궤 붙잡을 때 그들은 죽었어요. 여기서 다윗이 아주 탄식을 해요. 가슴 아파해요. 다윗이 웃사를 좋아했는지 아주 가슴 아파합니다.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린 거에요.


따라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 쪽에서 십자가를 관찰하고 연구하게 되면 죽는다. 인간 쪽에서 십자가를 분석하면 그거는 죽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성도인데 성도 아닌 사람이 성도 된 이유를 분석하고 탐구하고 연구하게 되면 그 불신자 지옥 가는 식으로 죽는다가 돼요.


어떤 사람이 묻는데 “넌 뭘 알아서 성도됐느냐?” 물으면 “나는 나의 무지함으로.” 내가 자랑하는 것은 나의 무지함 밖에 없다. 내가 지혜롭고 총기 있다는 것은 그 십자가 앞에서 다 박살나버렸다. 처음부터 모르는 게 왜 아는 척했느냐?


처음부터 우리의 바탕과 근원이 무지함을 그동안 몰랐던 거에요. 십자가를 모르니까 내가 무지함을 모르고 내 무지함을 모르니까 자꾸 애를 쓰는 거에요. 무지한 인간은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거지가 돼서 개코도 아는 것도 없는데 그냥 주시는 거에요. 주시는 대로 하면 되지요. 그냥 살면 되지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할 줄 아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법률서적 한 20권 읽어볼래? 뭐 읽어보겠습니다. 읽어보니 나중에 판사 됐어요. 당신 어떻게 판사 되었습니까? 무지해서 판사 되었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판사된 거죠.


너는 어떻게 의사 됐는가?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워요. 수능 보니까 다 아는 것만 나왔는데. 일부러 틀릴 수도 없고 했는데 결국은 의사됐습니다. 그럼 너는 뭘 알아? 어떻게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문제 풀 뿐이지. 모르는 무지가 우리를 살립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강남-누가복음 11장 29절 (무지에서 오는 자유) 220524a-이근호 목사.hwp (149.0K), Down: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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