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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3 19:22:43 조회 : 46         
6강-예레미야 2장 1~3절(시내산의 보석)220703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25.139.131.147)
6강-예레미야 2장 1~3절(시내산의 보석)22070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51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찌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 그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매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여기에 뭐라고 이야기하시느냐 하면 “내가 너와 결혼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기존의 살아온 자기 가족이 아닌 외부인과 혼인했기 때문에 여기에 거룩하 언약식이 마땅히 마련되어야 하겠지요. 혼인했다. ‘그러면 혼인신고했어요?’ 물을 때, ‘안 했어요’라고 하면 그건 위자료 못 받죠. 결혼했으면 뭔가 법적인 계약체제가 성립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인간세계는 뭘 배우느냐 하면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보다 어쩌면 법이 내 존재를 억압하고 있고 족쇄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해야 합니다. 결혼을 체결하는 것은 구청에다 신고하는 법적인 것보다 더 센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자식입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소산물이라고 합니다. 결혼함으로써 우리 맘 안 맞으면 그냥 갈라서자고 하면 간편할 것 같은데 아이는 어떻게 합니까. 아이를 누가 키우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는 어느 쪽에서 맡느냐는 것은 법률 형식적인 그런 용어로 될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문제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혼인했고 혼인과 동시에 내가 너 자체를 하나의 소산물로, 자식으로 여기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셨거든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너는 내 자식이라고 언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언약은 성경 몇 구절 정도가 아니고 이건 빼도박도 못하고 현실 그 자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과 혼인한 자가 진격하고 돌파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이질적이고 새로운 성격의 민족을 만났을 때 이방 민족이 그들을 건드리면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내 혼인한 아내, 내 자식을 건드리면 너희들이 감히 건드리느냐고 하시면서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라고 이야기하셨어요.

하나님의 계약 안에는 하나님의 결혼도 있고, 하나님의 자식 놓는 것도 있지만 어떤 조항도 포함되어 있느냐면 ‘내 사람 건드리면 너희들은 저주받는다’라는 것도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성도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신분입니까. 우리 성도가 귀하게 되는 것은 우리 배우자, 우리 남편이 온 천하를 만드신 창조주이기 때문에 거기에 병행해서 우리 성도라는 것이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 성도보고 ‘너 머리 쓰지 마라’라고 합니다. 네가 열심 내고 하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이미 계약이 계약대로 성실히 맞춰나가는 것이지 네가 현실에 맞춰서 애쓴다고 성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살아봐라. 하나님의 계약이 어떤 식으로 이게 실제적이 되는지 ‘이게 현실이구나. 실제로 이게 이루어지는구나’라는 식으로 나의 신부로 살아가라고 당부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매 순간 달라져요. 바뀌는 겁니다. 바뀔 때는 어떻게 하는가. 2절에 보면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라고 광야가 나옵니다. 광야에서 내가 너와 함께 했다는 그 사실을 들이대는 거죠. 쉽게 가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제 신앙생활 잘 해보려고 결심을 했는데 오늘 와서 바쁘다 보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매 순간 흔들리고 바뀌는 이 마음을 제가 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 무슨 사태가 벌어지면 관심사가 거기에 푹 빠져서 ‘차를 바꾸었는데 이번에는 사고 안 날까’라는 식으로 신경을 온통 거기에 두고 이런 식으로 자꾸 변화가 일어나는데 어쩌면 좋을지 솔직히 주님 앞에 이야기하면 주님은 이렇게 나오십니다.

“네 소시때 내가 체결한 그 산, 시내산이 있잖아” 네 마음은 흔들려도 산은 흔들릴 일이 없고 지금도 시내산이 가면 있어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체결했기 때문에 지금 네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아무 영향력이 없어요. 주님의 확고한 언약에 개인적인 사적인 정서나 감정은 거기에 전혀 유동 사항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높이 2000m가 넘는 시내산이 버티고 있는데, 거기서 맺은 계약이 있는데, 우리 마음이 연약해서 막 흔들리고 한다고 시내산이 흔들리고 그럽니까? 없지요.

노아가 방주 안에서 타고 가면서 형제간에 싸울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주 안이라 물은 안 샙니다. 방주가 버티고 있는 거예요. 방주 안이거든요. 방주 안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감정변화 그거는 전혀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그냥 위로 삼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증거조차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들어놔 버렸어요. 이 산, 흔들림이 없는 산, 뿌리 깊은 산, 시내산, 그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히브리인들을 도착하게 해놓고 시내산에서 그것을 자기 안으로 끌어 당겨버려요. 시내산 올 때까지는 제각기 제 맘대로 살다가 시내산 도착하고 나서는 뭔가 그들 위에 부어버립니다. 뭘 부어버리느냐면 언약을 부어요.

그 언약의 형체가 뭐냐 하면 ‘피’예요. 그 언약의 피를 양푼에 담아서 그들의 머리 위에 일방적으로 부어버리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준 돌판과 모세가 받아 적어온 책이 있는데 그 책 위에도 피를 뿌립니다. 돌판과 책에 있는 피와 백성 위에 뿌린 피가 동질의 피가 뿌려집니다. 그 피 안에서 사랑채, 안채, 다 동일하게 공동의 지붕 아래 주어져 있습니다.

피가 말씀 위에 있기 때문에 피흘림을 겨냥해서 그 말씀은 질주하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피를 받았던 백성들이 계속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고, 그렇게 인간들도 피흘림을 향해 달려가요. 달려가서 이쪽에 말씀이 지향하는 피와 백성에서 나오는 백성의 자손으로서의 피가 같은 십자가 자리에서 ‘찌지직’거리며 합치되어서 다 이루게 되는 그러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주님한테는 다 계획이 있어요.

말씀이라는 언어와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인격이 십자가에서 둘이 통합이 되게 되면 그것으로 숙제 끝, 언약은 끝이 납니다. 이걸 어렵게 설명하면 시작과 끝은 만나게 되어있는데 그 이유가 시작 안에 끝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적인 행운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회가 되죠. 기회가 복이고 행운입니다. 어떤 것이 기회냐.

내가 모르고 이질적인 것이 계속해서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등장하고. 그러면 그런 이질적인 것이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식으로 호응이 되어야 하는가. 그 호응하는 방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모세를 대표해서 불러서 방법을 지시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1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 히브리인들은 아직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전혀 광야로 끄집어낸 것이 아니에요. 그냥 애굽에 살고 있어요. 현재 시내산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것은 모세가 양을 친다고 시내산에 와있어요. 호렙산에 와 있는 거죠. 백성들은 한 명도 없어요. 모세는 지금 혼자입니다. 혼자인데 애굽에 가서 내 백성을 끄집어내어서 어디까지 인도하라고 하냐면 시내산까지 데려오도록 내가 너에게 지시할 테니 양 그만 치고 빨리 애굽으로 가라고 하신 거예요.

가서 내가 너와 함께 하는데 왜 함께하느냐면 내가 너와 함께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해서 이 시내산 앞에 모조리 집합시키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서 감정같은 거, 정서같은 거, 이런 것들을 외부환경을 통해서 많이 느끼죠. 느끼는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간 정서나 사랑 감정, 울음, 웃음, 이런 것들 필요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썩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온 감정은 전혀 안 받습니다.

안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받는가. 일단 유월절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기계를 보내시죠. 그 기계가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은 군가 바짝 들었습니다. 자아성이 없어요. 천사들의 공통점은 시킨 대로 한다는 겁니다. 기계죠. 정말 냉혹한 기계입니다. 어느 정도로 기계냐 하면 애굽에서 난 아들, 갓난아기라도 사정 보지 않고 집집마다 다 들어가서 성실하게 맏아들을 다 죽여버립니다.

맏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그 집안 대를 아주 끊어 버린다는 겁니다. 대를 이어봤자 저주로 꼴아박을 건데 먼저 하나님의 저주스러움이 제공되는 거예요. 둘째 아들이 장남 대신하겠죠. 해봤자 장남이 이미 하나님 앞에 저주받았으니까 둘째가 성공하든 셋째가 성공하든 하나님 앞에서는 저주입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대상이라는 것을 유월절 통해서 애굽 사람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어쨌든 이 천사의 기능은 자기 존재, 자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기능적으로 빈틈없이 그대로 말씀에 순종해서 실시하는 겁니다. 천사들에게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 기능을 그대로 실시해도 그 결과가 천사의 몫으로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요새 더워서 선풍기를 트시는데 기계잖아요. 선풍기가 파업합니까, 선풍기가 임금인상을 요구합니까?

선풍기는 그냥 에너지 전기만 꼽아놓으면 이게 오래되지 않은 선풍기 같으면요, 쌩쌩하게 생긴 대로 날개가 잘도 돌아가고 바람을 냅니다. 그냥 바람 내는 기능, 기능만 보여줄 뿐이에요. 그게 천사고, 그게 기계고, 그게 오늘날 성도이어야 하는 거예요. 왜 쓸데없이 ‘오늘은 울고 싶어라, 오늘은 웃고 싶어라’라고 이러지 마세요. 그냥 기계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자기 상념에 빠지는 것은 사치예요. 뭐 했다고 상념에 빠집니까. 노스텔지아(향수)에 빠져서 과거를 생각하고 추억을 생각하고 훌쩍훌쩍 거리는데 그럴 가치가 없어요. 아주 냉혹하고 차가운 존재가 기계입니다. 산이 산으로 시내산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그 산에 합당한 인간이라는 기계들. 그게 바로 하나님 언약의 대상들이에요. 그러면 ‘기계가 감정이 없다는 말입니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기계에 감정을 불어넣는 것도 동행하시는 주님의 감정이 들어가야지 기계 주제에 지가 뭔데 자기감정이 언약 안에 왜 섞입니까. 냉혹하게 해야 해요.

어제 태국인가 어디 동남아 쪽에 유튜브 나온 것 보니까 어떤 사람이 길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야자수에서 커다란 코코넛이 떨어져 맞아서 길거리에서 나뒹굴었어요. 그게 CCTV에 생생하게 다 나왔어요. 그거를 왜 맞았겠어요? 기계거든요. 오토바이도 기계고, 탄 인간도 기계고, 떨어진 코코넛도 기계고. 그렇게 기계와 기계의 만남에서 나뒹군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수리하며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시간은 주님만 필요하지 인간은 시간이 필요 없어요. 몇 년을 살았느니,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니, 그런 거 하면 안 돼요. 감정을 싫어도 우리 남편 되시는 예수님의 감정만 우리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따라서 이 언약이 천사처럼 차갑고 냉혹하게, 이렇게 자기만 챙기는 지저분한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작업을 시내산에서 하게 되는데 그래야만 제대로 된 예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일들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벌이는데 복잡하기 때문에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일을 벌이면 거기서 보석이 나와요. 그 보석은 세상에 없는 보석입니다.

그 보석을 건드리면 오늘 예레미야 2장에서처럼 작살나는 겁니다. 그러면 보석 아닌 자를 보석이 되게 하기위해서 어떤 일을 벌이는가. 기존의 인간들을 주께서 제거해버리시는 일을 합니다. 그게 시내산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 다는 아니지만 시내산에서 부여받은 그 율법을 실어 나르죠. 실어 나르는데 어디까지 실어 나르는가.

1차 적으로는 시내산까지 와서, 예배드려서 거기서 하나님과 약혼을 체결하고 그다음 사는 곳이 어디냐 하면 좀 더 가면 거기에 가나안 땅이 나옵니다. 약속의 땅이 나와요. 그러면 신랑 되시는 분이 어디서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시내산에서 소시때 언약을 맺고, 율법적으로 첫 언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살림살이하는 곳은 예루살렘언약, 다윗언약을 통해서 거기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그 예루살렘은 뭐 하는 곳이냐 물으시면 시편 11편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곧 하늘에 있음이라.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하늘의 보좌가 바로 조명발을 받아서 지상에다가 자기 백성을 받아들일 바탕으로써 예루살렘을 만든 거예요. 그러면 시내산에서 예루살렘까지 백성은 가느냐? 아닙니다. 백성은 중간에 잘립니다. 날아갑니다. 보석은 그것이 보석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뭐가 이동하는가. 언약궤가 이동합니다. 그러면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시내산에서는 왜 멈추느냐.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궤 제작에 나섭니다. 하나님의 신이 충만하게 임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통해서 언약궤를 만들어요. 언약궤를 만들고 그 만들어진 언약궤에서 가면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것은 모조리 다 잘라냅니다. 툴툴 털고 갑니다. 털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요. 다윗 때까지.

그러니까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감정 있는 사람과 언약을 체결하지 않습니다. ‘잘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 자기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에 믿을 게 못 돼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을 때 하나님 자신과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러면 하나님 자신이 육체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육체를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이스라엘 육적인 자손에게서 가져옵니다.

이스라엘 열두지파 해놓고 다 잘라내고 그중에서 한 지파만 남기는데 그 한 지파가 유다 지파고요, 그 유다 지파에 예루살렘과 언약 맺은 사람이 다윗이고, 그 다윗의 자손이 누구냐 하면 복음이고, 그 복음 내용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칼 가지고 무 잘라내는 것과 똑같아요. 막 잘라내시는데 더~더~더~ 계속 잘라내시면 제일 마지막에 남는 거, 그 마지막 남은 무 조각이 뭐냐 하면 언약이 빚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아들이에요. 이것이 보석이고 이 보석을 건들면 저주받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는 것처럼. 그러니까 지금까지 설교한 내용을 보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아이고, 더워라. 불쾌지수가 얼마다’라는 우리의 사적인 감정과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오늘 기분이 좀 좋고 나쁘고 우울하고 아니면 실없이 웃고 하는 이런 거 아무 상관 없어요. 웃어도 괜찮고 울어도 괜찮고 우울증 걸려도 괜찮아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자신이 생산한 그분과 언약하기로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작심을 한 거예요. 시초 안에 마지막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누구를 동원했느냐 하면 어중이떠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감정적으로 자식 걱정, 살림 걱정, 생활 걱정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통해서 그 안에 언약궤를 실어버려요. 언약궤는 아주 냉철하고 냉혹합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써 그 현장에 만약 우리가 있었다면 소가 언약궤 있는 수레를 끌고 가는데 언약궤가 뒤뚱거리며 넘어지려고 할 때 혹시 떨어져 깨질까 싶어 우리라도 그것을 붙들고 싶잖아요. 귀한 거니까. 그런데 붙들었다고 죽여버린 거예요. 붙들었다고. 성의를 표했다고 죽여버려요. 나는 너의 성의를 받지 않는다. 이게 복음입니다. 나는 너의 열심을 받지 않는다. 나는 예수님 빼놓고 다 잘라내 버린다.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왜 잘라내십니까?’라고 하면 ‘너는 기계가 아니거든. 너는 기계가 아니야. 인정사정이 너무 많아’라고 하시죠. 그걸 사울 왕이 보여주었고 다윗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나 여기 나오는 인간으로 생긴 채 부름을 받은 전부다가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나의 울음이 나를 속이고 나의 웃음이 나를 속이는구나. 냉철한 기계적인 요소가 없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잘 되고 안 망한 인간이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여러분 중에 잘 된 인간이 없어서.

하여튼 잘 되고 신앙 유지하는 인간이 없어요. 원리가 그래요. 우리는 아예 포기했으니까, 뭐. 인간은 아무리 냉철하게 하고 싶어도 연필심으로 상대방 눈을 확 찔러보세요. 이거는 어떤 대담한 인간도 눈을 감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권투선수는 맨날 훈련할 때 그거 훈련해요. 주먹이 와도 눈 깜빡이지 않는 훈련. 우리 육신도 조건반사로 눈을 감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아무리 형제 사랑, 이웃사랑 하지만 막상 내 것 건들면 마음의 문이 순간적으로 닫히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자기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자격이나 능력이 없어요. 저는 세상에서 놀면서 백수로 힘들 때, 어떤 회사는 일하다가 졸아서 프레스에 손가락 들어가 잘려서 보상금 받고 퇴직했다고 할 때 ‘사장님, 나빠요. 더워서 졸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잔업을 시켜요’라고 욕하지만 지금 일거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정말 그런 것이 사치스러운 이야기예요. 손가락 잘려도 좋으니 일거리 주옵소서. 손가락 다 잘릴 용의 되어있습니다.

햄버거집에서 감자튀김 하다가 다 튀기고 다리 멍들고 해도 좋으니까 일자리 달라고 나오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맨날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죠.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감당 못 해요.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뭐냐 하면 튀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동서남북 어디로 튀어도 괜찮아. 난 너와 상대 안 했어. 네가 실어나르는 보석, 언약궤와 상관있고 언약궤에는 피가 쏟아져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거기에 어린양의 피를 쏟아붓습니다. 끝으로 출애굽기 34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 출애굽기 과정 중에 시내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시내산에서 사람을 작살내는 일을 했어요. 출애굽기 32장 27~28절을 먼저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모세가 레위 지파니까 레위 지파가 유다 지파 제치고 모세가 속한 레위 지파가 지도자급 지파니까 그들이 죽였습니다. 죽이고 계약 돌판은 깨졌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와 계약을 했는데 출애굽기 34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사람은 죽어도 기계 역할을 하는 이 돌판은 내가 건사시키겠다는 것이 언약 속에 하나님의 찐찐~ 진짜 뜻이에요. 너는 죽어도 십자가는 변함이 없다. 시내산 변화 없고 끄떡없듯이 네가 아파도 네가 가난해도 네가 이빨이 안 좋아도 십자가 구원은 끄떡도 없어요. 집안에 아이가 어떻게 남편이 아내를 뭐 어떻게 하든 관계없어요. 아내가 집 나가든 들어오든 그게 십자가와 무슨 관계가 있어요.

이게 복음이잖아요. ‘하나님, 왜 저를 안 믿습니까?’ 네가 기계가 아니거든. 기계가. 너는 선풍기가 아니거든. 물론 기계도 고장 납니다. 고장 나면 바꾸면 되죠. 바꾼다고 냉장고가 삐지고 그런 거 없어요. 그렇게 해놓고 그다음 언약궤에다가 돌판, 깨진 적이 있는 돌판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피와 만나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이 절대 안 믿는다는 거예요. 이 피를 믿으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일 년에 세 차례씩 제사 지내서 피를 거기에 붓는데요, 언약궤에는 대 속죄일에만 붓습니다. 그럴 때 출애굽기 40장 34~35절에 보면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그러니까 모세 너는 증인 노릇 하고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을게.

그렇게 하고 37~38절에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나의 울음과 나의 팔자를 본 것이 아니고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보고 온 거예요. 오늘날 십자가를 바라보는 성도의 모습을 미리 이렇게 보여준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고 굳건하게 우리 앞에서 앞서가고 있다는 이것이 믿음이고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뭔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뭔가 믿음을 지키고 갖춰야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적인 것이, 십자가에서 온 그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운반체로 주님의 보석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서 사용해주심을 다시 한번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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