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2-07-10 17:59:57 조회 : 50         
7강-예레미야 2장 4~8절(천국은 주의 일)220710 이근호 목사 이름 : 송민선(IP:125.139.131.147)
7강-예레미야 2장 4~8절(천국은 주의 일)22071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장 4~8절입니다. 구약성경 1051페이지입니다.

“야곱 집과 이스라엘 집 모든 가족아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관대 나를 멀리하고 허탄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기름진 땅에 들여 그 과실과 그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가증히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누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언어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선지자는 자꾸 뭐라고 주장을 하느냐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면 백성들은 다 죽어요. 말이 말답게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을 건넨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금 당장 죽일 뜻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났으면 상대는 죽고 지금 당장 죽일 뜻은 없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지자를 보내서 선지자의 말이 너와 같은 이웃 아저씨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이 여기 계셔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고 그렇게 들어달라는 겁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죠.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사도바울이 이르기를 너희가 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데 진실로 그게 맞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그냥 듣는 것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 그 속에서, 그 사람 속에 말씀이 들어가서 말씀이 주도적으로 너를 신앙인이 되게 그렇게 했다는 이것이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바입니다.

구약에서는 “나의 말이 너희 속에 들어가게 하라”이고 신약에서는 “이미 들어왔다”이니 이게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구약에서는 “내 말의 너의 속에 집어넣어라”라고 하면 말은 쉽죠. 쉬운데 그거는 이상하게 그게 안 돼요. 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성신이 임했으니까 되는 거고, 성신이 임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이 말씀이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규명해야 할 것은 들어올 수 없는 말씀이 어떻게 신약시대에 우리 속까지 들어왔는지 이것을 밝혀내야 합니다. 만약에 이걸 안 밝혀내고 “그냥 듣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실천에 옮기겠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이건 구약과 똑같아요. 구약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처럼 교회도 똑같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으면 망하려고 해도 안 망해요.

망할 수가 없어요. 안에 들어온 말씀 때문에. 그런데 그 말씀을 지키려는 자는 100% 다 망해버립니다. 얼마나 말씀이 안 들어왔으면 지키려고 노력하겠습니까. 지금은 신약 때고 시대가 다른데 구약 보면서 구약 흉내 내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모르는 것이 뭐냐.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신약에는 들어와 버리는가. 도대체 구약 사람들은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는가. 그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먼저 이걸 아셔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려고 하는 순간 이미 과제가 늘어났다는 사실이에요. 학교에서 수학 시험을 쳤는데 열 문제를 냈어요. 열 문제 다 풀고 자리 일어서려고 하는데 ‘잠깐, 두 문제 추가요’라고 되는 거죠. 두 문제 더 풀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잠깐, 다섯 문제 추가요’라고 하니까 일어설 수가 없어요. ‘선생님, 수학 시험은 도대체 언제 끝납니까?’

신약 때 끝나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문제가 끝나요. 이 수학 시험은 우리에게 풀라는 것이 아니고 풀 사람은 따로 지정해두었다는 겁니다. 그 지정해둔 한 분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스라엘은 보통 집단개념이죠. 여럿이 이스라엘이 되죠.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습니다. 단 한 분을 이스라엘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이 되신 그 한 분의 본질, 그 본질이 쭉쭉 늘려서 확대시켜 버리면 그게 다수의 이스라엘이 됩니다. 최종적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방식을 하나님이 채택한 이유는 구약 때 이스라엘이 집단이거든요. 이 집단이 개인이 아니고 집단일 때 아주 위험하게 됩니다. 학생들이 시험 칠 때 오늘은 맘 잡고 커피 마시면서 밤샘 시험공부 한다고 작정하는데 ‘영식아~놀자~’라고 다른 친구들이 찾아와서 놀자고 해요.

시험준비 해야 한다고 하면 ‘시험준비는 그 전에 다 했어야지. 지금 너 나랑 안 놀면 친구 관계 끝이다. 끝’ 이러면 ‘에라. 모르겠다. 내일 시험 칠 때 치더라도 오늘은 놀자’라고 신나게 놀죠. 여러 명이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의지나 용기가 먹히지 않는 그러한 단체가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8절에 보면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라고 나와요.

여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관리자나 법 잡은 자들이 뭐라 하든 개인적으로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우리는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서 맘먹는다고 주위 환경이 그렇게 방치하지 않아요. 옆에서 흔들어버려요. 흔들어서 죽어도 같이 죽게 만드는 그런 일이 생기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몇 가지 중요하면서도 너무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어려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여기 6절에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통과케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나올 때 뭐가 어려우냐면 광야라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광야에 대해서 어떻게 어려우냐면 사람은 본인이 이렇게 존재하고 살아있으면 나를 살리려고 하나님이 나를 도와줬다는 그런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게 되어있어요.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겠느냐”라고 하시며 환경을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네가 현재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네가 드러낼 수 있느냐를 우선 물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주님 뜻대로 부응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래서 광야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최적화되어있는 땅이 광야입니다. 왜냐 하면 사망의 땅이거든요. 사망의 음침한 땅. 사망의 음침한 땅이 왜 좋으냐면 내가 생각하는 생명은 사망인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묻기를 ‘그동안 이 세상에서 몇 년 살았습니까?’라고 하면 저는 ‘70년 살았습니다’라고 하겠죠. ‘생일 축하~ 합니다~’라고 한바탕 해프닝도 했지요. 나는 머쓱했고. 그런데 70년 살았다는 것이 틀렸어요. 우리는 산 것이 아니에요. 죽음을 운반하는데 70년 걸린 겁니다. 태어나면서 70년 동안 죽음을 운반했고 지금도 죽음을 운반하는 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았거든요. 애굽에서 살 때 그들은 사는 게 사는 거고, 사는 것이 곧 생명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더 좋은 세상에서도 이렇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연속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땅과 저세상에 동일한 질로 연결되어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땅에 사는 것과 저 땅, 천국에 사는 것이 완전히 판이하다면 어떤 식으로 달라야 할지 이 땅에 살면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맙게도 그들을 광야에 집어넣었어요. 광야에 집어넣고 “자, 이게 바로 사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집어넣어요. 광야에서 보면 사람들이 ‘이게 왜 사는 거지’라고 의아하죠. 네 힘으로 전혀 살지 못하도록 전부 다 손을 다 놓게 만들어요. 이게 사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못살게 하는 거.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집에서 강아지 키울 때 주인이 사료 주면 개가 그것을 받아먹고 같이 살잖아요. 그런데 퇴근하고 집에 오니까 그 개가 발람의 나귀처럼 말을 하는데 “주인님, 지금까지 긴 세월 동안 너무 공짜로 얻어먹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설거지를 다 해놨으니 노동의 대가로 월급주는 식으로 주시면 제가 장 봐서 먹고 싶은 것을 알아서 먹겠습니다”라고 인간의 말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내가 지금 귀신이랑 사는 건지, 괴물이랑 사는 건지, 계속 같이 살아야 할지 말지, 죽여버려야 할지 걱정이 들겠죠.

그러니까 주인 입장에서 개가 그렇게 돌변하면 걱정되죠.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거 죽여버릴까? 얘가 왜 이러지?’ 분명히 유월절에 다 죽이고 그들로 하여금 피를 발라서 그들로 하여금 홍해까지 건너오면서 도대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을 살려서 왔잖아요. 그렇게 광야에 들어왔으면 애굽에서 사는 방식은 나를 죽이는 방식이지 나를 살리는 방식이 아니고 애굽에서 살았으면 다 같이 저주받았다는 것을 유월절 그 밤을 통해서 뭔가 깨우치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 애굽에 사는 방식과 우리 이스라엘 사는 방식이 이거는 근원부터 완전히 다르구나. 토대부터 다르구나’라고 눈치 채야 하는데 그들은 광야에 와서 물 없다고 양식 없다고 원망을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아는 식의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허락을 안 하느냐고 대들려고 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의 조치를 생각해 보세요. 아까 이야기한 거 잊어버렸으면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저히 말씀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신약시대에 들어왔느냐는 그 질문을 던져놓고 거기에 대해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겁니다. 말씀이 들어올 수 없는데 어떻게 이 말씀이 우리 허락도 없이 쑥하고 들어왔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질문을 하나님께서 바꿔서 하시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절차를 바꾸는 겁니다.

일단 그 인간들은 죽었다 치고 너희들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해. “하나님, 왜 제가 여기 광야에서도 살아있습니까?”라고 질문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살았고 사는데 힘드니까 살려달라는 식으로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질문하는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비록 구약이지만 신약 성도들이 하는 질문을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거예요.

그걸 요구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응하지를 못한 겁니다. 질문을 한번 봅시다. 질문이 6절에 나옵니다. 그 질문을 제게 예레미야를 대신해서 대독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지금 질문을 질문답게 하는 자가 너희 가운데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질문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질문이냐.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통과하지 않는 땅을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을 왜 통과하게 하셨습니까?’라고 그렇게 질문을 해야 그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통과를 못 해야 하는데 왜 통과를 하였는지 어떻게 통과를 할 수 있었는지 하나님에게 그 질문을 안 하느냐는 겁니다. 지금 나만 답답한가.

‘저는 구원이 안 되어야 합니다. 구원되지 말아야 해요. 천국 가지 말아야 해요. 그런데 왜 천국을 보내십니까?’라는 질문을 하시라는 겁니다. 순서를 바꿔서.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아, 이렇게 하면 천국 가는구나’라는 이런 순서 말고. 시편 23편을 보면 제가 마음이 편해요.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라서. 거기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양인데 양이 목자의 목자다움을 위해서는 내 편한 위주가 아니라 목자로 목자답게 드러내는 환경을 목자께서 일방적으로 나에게 펼쳐주었다는 말이죠.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나 살라고 주는 인생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길로 가셨다는 것을 펼치기 위해서 우리를 지금 그 환경 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 아니고 주께서 일찍 다녀가신 길이에요. 이 환경이.

‘아, 주께서 이런 고생을 하셨고, 주께서 이런 시련 받으셨고, 이런 욕을 얻어먹으셨구나’라는 길을 지나가야 하는 거예요. 자기에게는 철저하게 소경이 되고 주님에게는 철저하게 눈이 뜬 사람이 되어야 해요. 만약에 어떤 소경 앞에서 어떤 불량한 아이가 연필심이나 송곳으로 장난친다고 눈을 찌르는 것처럼 위협하면 소경 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뭐가 왔다 갔나? 바람이 부네’라고 이런 식으로 나오죠.

이거는 육신의 소경뿐만 아니고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죠. 누군가 우리 마음에 ‘그러면 죽는다. 그러면 저주받는다. 인생 망친다’라고 협박 조로 이야기하게 되면 ‘개가 짖나? 무슨 왕왕 짖는 소리 나는데’라는 식으로 나에 대해서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잘산다는 그런 생각이 아예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협박과 공갈이 먹히질 않죠. 왜? 절차와 순서상 목자가 함께 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환경은 목자 중심의 환경이지 내가 살기 위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착하다고 자연이 바뀝니까? 안 바뀝니다. 이 대 자연은 나의 착함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착해도 자연은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천국이나 지옥을 결정하는데 내가 아무런 보탬이 되지를 못한다는 뜻이에요. 내가 하는 행함이 천국이나 지옥 가는데 아무런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거예요. 보태지도 못하고요.

지옥 가는 사람도 아무 노력 못 해보고 지옥 가는 거예요. 혼자 웃었는데 이게 웃을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천국이 주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몰라요.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지옥 가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어요? 지옥 가면 안 된다는 그것을 왜 나의 일로 여깁니까? 천국 가는 것을 왜 나의 일로 여깁니까?

그러니까 이 구약 성도들이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구약 성도들이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했어요. 율법을 막 지키려고 했어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율법은 늘어난다고요. 왜 늘어나느냐. 음악의 음표에서 의미는 음표 사이에서 나와요. 음표 자체가 아니라 그 빈공간에서 나온다고요. 왜냐 하면 그 음을 칠 때 음과 그다음 음 사이에 빈공간에 그냥 비어있는 것이 아니고 쳤던 음의 파동이 퍼지게 되어있어요.

마찬가지로 인간이 ‘내가 뭘 했다. 어려운 사람 있어서 전화해서 돈을 좀 보탰다’가 되어버리면 내가 한 행동에 내가 꽂혀버리면 나는 한 음표가 되어서 그 빈공간에게 허락하신 주님의 모든 햇빛과 공기와 목숨 유지 시키는 주님의 사랑과 같은 이런 것은 그거는 다 놓치고 모든 것은 고집스럽게 내 행한 것에 그것을 꽉 쥐게 되어요. 율법을 지킬 테니 복이나 주세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율법을 증가시켜버리죠. 네가 율법과 율법 사이에 주신 은혜를 다 놓쳐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상대가 그러면 지킬 테니 복 달라고 하면 “아니야, 율법과 율법 사이에 있는 율법의 숨겨진 의미까지 다 포함해야 네가 복을 받는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현실은 내 사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성하고 이해하는 현실은 나 살기 위한 일방적 현실을 구성해버려요. 일방적으로.

어떤 아이가 놀이터에서 ‘자, 커피 파는 카페입니다. 커피 드세요’라고 할 때 지금 아이한테 커피를 주면 되느냐고 놀라서 유튜브, 서라운딩(surrounding)을 보니까 외손녀 외손자가 모래를 가지고 놀고 있어요. 커피가 아니고 모래예요. 아이들은 그때부터 이미 현실을 조작해요. 자기 놀기 편한 대로 자기가 임의로 언표를 정해버려요. 거기에 의미를 고정시킨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자기가 원하는 의미를 고정시켜서 그걸 구성하고 그 구성만으로 자기가 원하는 현실상이라고 일방적으로 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게 다 수정되고 바뀌어요. 바뀌는데 어디까지 바뀌는지 몰라요. 죽을 때까지 현실을 자기중심의 왜곡된 엉터리 현실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그 의미가 우리가 찾지 못한 빈공간에 예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십니다. 예수님 중심이 현실인 거예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실로 이미 우리가 신약에는 구원이 된 겁니다. 그러면 끝으로 우리 내부는 주님께서 자기 현실로 일방적으로 간주해서 쑥 들어왔어요. 그냥 쑥 들어왔어요.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점령했어요. 점령군처럼. 접수를 해버렸다니까요. 그래서 신약 성도는요,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안 움직이는지 의아하죠. 주님이 “그래서 싫으냐?”라고 물으시면 “도리어 감사합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거죠.

이게 바로 천국은 주님의 일이지 천국은 내가 달성할 나의 일이 아닌 것을 비로소 눈이 열리죠. 나를 쳐다보는 눈이 서서히 감기게 되고 주님의 눈은 서서히 열리면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군요’라고 고백하죠. 이게 바로 이스라엘에 예수님에게 이루어진 것을 확산시켜서 똑같은 본질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거, 이게 예레미야가 외쳤던 하나님의 질문 바꾸기입니다. ‘왜 저를 구원하셨습니까?’ 늘 이런 질문으로 매일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소위 안다는 자, 성경에 대해 박사라는 자들, 그들은 자기 밥벌이와 명예와 체면을 위해서 이용했음을 구약 이스라엘 통해서 보았습니다. 선지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 중심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로서 주님 중심으로 바뀔 수 있는 저희들 마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7강-예레미야 2장 4~8절(천국은 주의 일)220710 이근호 목사.hwp (67.5K), Down:6
게시물9,794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0295   울산 성경공부 안내 서경수 22-08-31 49
10294   7강-디모데전서 1장 18-20절(광기)220821 - 이 근호 … 오용익 22-08-28 74
10293   14강-예레미야 3장 1~5절(주님의 상처)220828 이근호 … 송민선 22-08-28 61
10292   주일학교 설교 / 유월절 / 220828 정인순 22-08-28 42
10291   5강-나훔 1장 14-15절(추락중)220824-이 근호 목사 오용익 22-08-25 83
10290   6강-디모데전서 1장 17절(하나님의 기만)220821 - 이 … 오용익 22-08-21 86
10289   13강-예레미야 2장 35~37절(지정받은 위치)220821 이… 송민선 22-08-21 50
10288   주일학교 설교 / 뱀을 잡으라 220821 정인순 22-08-21 58
10287   4강-나훔 1장 9-13절(주님의 자기입증)220810-이 근호… 오용익 22-08-18 68
10286   사진첩 난에 여름수련회 사진들이 올라져 있습니다. 이근호 22-08-15 178
10285   5강-디모데전서 1장 15-16절(이방인 구원)220814 - 이… 오용익 22-08-14 82
10284   12강-예레미야 2장 29~34절(영적 체험)220814 이근호 … 송민선 22-08-14 68
10283   주일학교 설교 / 모세 건짐 / 220814 정인순 22-08-14 45
10282   여호와삼마 문(門) 그림입니다 이하림 22-08-14 94
10281   수련회 보충 (여호와 삼마에 대해서) 에스겔 48:36 이근호 22-08-14 113
10280   수련회 소감(얼굴이 명승지) 송민선 22-08-11 233
10279   3강-나훔 1장 6-8절(두 범주)220810-이 근호 목사 오용익 22-08-11 53
10278   202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 그림파일 두번째입… 이하림 22-08-08 144
10277   4강-디모데전서 1장 12-14절(피하시는 주님)220807 - … 오용익 22-08-07 90
10276   11강-예레미야 2장 26~28절(사용과 언급)220807 이근… 송민선 22-08-07 49
맨처음 이전 [1] [2] [34 [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