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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3 23:30:12 조회 : 4712         
수련회 강의 녹취록 (7번) 이름 : 서경수(IP:122.36.190.11)

07년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7강) 녹취록 입니다.


 



07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7강)


이근호 목사 강의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욥의 문제점은 끝까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겠다. 내게 주어진 이러한 사항은 내가 책임지고 내 관리 하에 있는 것이 의인으로서의 마땅한 도리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욥은 끝까지 자기 의를 포기 못하겠다. 나는 내 의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렇게 친구들에게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런 주장을 함으로 말미암아 무슨 해결책이 나야 될 텐데, 고난은 있다 할지라도 고난의 이유, 왜 고난이 찾아왔는가? 그 고난의 원천에 대해서 뭘 알아야 될 텐데 전혀 아는 게 없어요.




이게 육이 지닌 한계인데, 그 원인은 고난 속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 고난 자체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지 않고, 이것은 안 나와야 될 고난이 그냥 왔기 때문에 고난은 제쳐놓고 다만 고난에 용감하게 맞서고 신념을 잃지 않는 자기 자신, 자기 자아를 지키는데 욥이 겁겁했습니다. 




고난은 내게 합당치 않고 이질적인 것이다. 원래 없던 것이란 말이지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는 바르게 살아 왔으니까. 그동안 기도해서 응답 받았고,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내 인생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건 일단 제쳐놓고, 고난의 원인을 내가 추적해 나가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고난도 주도권을 쥐려 하지요.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욥은 고난에 대해서 자기가 관리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수 없는 이 일을 내가 관리해서 회복시키겠다. 그런데 고난이 그 엄포에 쉽게 물러가면 좋겠는데 더욱 더 박차를 가하는 식으로 고난이 찾아옵니다.




거기서 욥의 주체는 분열이 일어납니다. 욥이 깨어져요. 깨어지면서 결국 욥은 고난에 쫓겨 어디까지 도망치느냐 하면, ‘차라리 나를 죽여 버려라. 죽는 것이 낳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또 스스로 생각합니다. ‘죽으면 못 살잖아!’ 라는 자기 고민에 빠져요. 처음에는 죽여 달라고 해 놓고, 그런데 하나님의 음부에 들어가면 내가 무슨 수로 다시 살아나오지?




고난에 쫓겨 죽음으로 도피하려 했는데, 죽음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요. 시편 115편에 그런 것이 있어요. ‘죽음 속에서 무슨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오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죽음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리요!’




하나님 없는 곳에 혼자 있다는 것은, 이것은 원래 순수 증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는 자도 하나님’이라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차단되기 때문에 이것도 곤란하고, 그러면 죽음에서 다시 또 살아나야 될 텐데, 죽음이란 곳에 만약에 갔다고 칩시다. 죽음에 가면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다시 삶의 세계에 계시는, 자연세계 속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 신을 만나려면 다시 나와야 될 텐데, 다시 나와 봐야 여기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질적인 고난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욥은 빼도 박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가? 욥기 10장을 봅시다.


여러분이 생각하기는 ‘왜 목사님은 욥기 전체를 하나 하나 이렇게 본문 주석하듯이 훑지 않고 계속 언저리 이야기만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 다 하는데 1시간만 하면 됩니다. 전체 바탕을 알면.




앞으로도 여러 시간 남았잖아요. 1시간만 하면 욥기 1장부터 42장까지 다 합니다. 쭉쭉 나가면. 그런데 쭉쭉 나가려면 그 토대를, 그 밑에 벨트가 있어요. 이걸 모르면 여기서는 이 소리하고, 저기서는 저 소리하면 곤란합니다. 1시간 만에 쭉 하기 위해서는 밑에 일정한 벨트를 깔아줘야 쫙 나가지요.




전체가 어떻게 되어있는가 그것이 중요하지, 한 구절 구절 하는 것은 밑에 바닥만 깔면 매끄럽게 잘 진행이 됩니다.  




욥기 10장 9-11절에 보면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면 정액에서 만들어 졌고, 정액이 치즈처럼 굳어지고 치즈에서 뼈와 살이 생겨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몸이 현재 이미 출생된 상태이기 때문에 치즈고 이런 게 없어요. 옛날 과거 이야기입니다. 과거 이야기인데 지금 주체를 죽음 가까이 가게 되면 이것은 분열되어 버려요. 마치 태양 가까이 로켓을 쏘면 로켓이 녹아버리듯이, 죽음 가까이 가면 그동안 다져졌던 형체가 완전히 묽어지지요. 녹아지고 없어지는 겁니다.




없어지면 여기에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이제부터 잘 들어보세요. 복잡한 이야긴데 쉽게 하겠습니다. 고정된 형체가 흐물흐물하게 우뭇가사리 있지요? 아니면 묵 같은 것. 흐물흐물하게 형체가 해체되어 버립니다. 해체되는 이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하지요.




죽음에서 본래의 형체로 오게 되면 이것은 생명으로 보는 겁니다. 죽음 되면 해체되고, 해체된 것이 본래 모습을 찾으면 이게 생명이고.




생명을 얻는 과정이 현재 고정된 성인의 입장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고난이 찾아와서 윽박지르는 이유는 나를 해체시키려는 죽음의 전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욥이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뭐냐? 고정된 형체에 대해서 고난이 시비를 걸고 있으니까 이것을 고정된 자아, 고정된 주체라 하지 말고, 변화에 적응하는, 변화에 수긍하는, 변화를 따라잡는 그러한 같은 움직임 자체가 곧 자아로 만들면 어떻겠느냐? 움직임 자체를 자아로 만든다면.




욥이 여기서 취할 태도는 뭐냐 하면, 다시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생명으로 나아가면 거기에 내가 지금의 나가 있기 전에 나를 되게 한 어떤 움직임이 있지요. 그 움직임을 나라는 존재의 원질, 원재료, 원래의 밑바탕으로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본질이 치즈처럼 엉기게 되어 뼈와 힘줄이 생긴 것이 나라면, 그 현재 고정된 나의 입장에서는 고난이 해석이 안 되니까, 고난이 찾아오는 거기에 발맞춰서, 그 변화의 움직임에 같이 발맞춰서 나도 움직임을 스스로 해체시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정된 시선을 가지고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고, 움직임 속에서 움직임을 파악하는 거예요. 야! 이거 멋있다. 혼자 멋있는데, 운동 속에서 운동을 파악하는 거예요. 자기는 관찰자로서 서 있고 앞의 운동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지나가는 바람 따라 나도 같이 뛰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움직임의 속도가 같게 되면 그 속에서 고난이 주는 그 진실 됨, 고난의 이유를 가까이서 추적해 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이것을 쉽게 예를 들면, 회사에서 사장이 간부들 모아놓고 회의를 합니다. “변화에 대처 못하면 사표 내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다. 복지부동. 엎드려서 월급만 받아 챙기려면 회가 그만두란 말이지요. 지금 경쟁업체에서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는데, 왜 김 과장, 박 과장은 아침에 출근해서 도시락 까먹고 집에 가고. 왜 이러느냔 말이지요. 그러려면 사표 내란 말입니다. 변화에 대처 못하거든 회사에 있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회사들의 추세라면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연중에 교인들이 당회장 목사에게 원하는 것은 5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똑 같은데 ‘목사님, 변화에 대처 못하거든 사표 내세요!’ 라는 무언의 압력이 가해집니다.




물론 우리 노회 교회들은 원래 교인이 별로 없으니까 그런 요구 할 교인조차 없으니까 안심이 됩니다만, 교인들이 좀 있는 교회는 ‘당회장이 뭐하나?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서 교인들이 늘어날 수 있고, 헌금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야지. 월급 꼬박꼬박 받고 한 게 뭐 있나? 등산가고 낚시 다니는 것 밖에 더 있나?’ 이렇게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중간 간부들이 ‘그럼 사장님. 변화에 대처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스스로 고정되었다는 사고방식을, 고정된 인식을 갖지 말고 그 변화에 같이 동조해서 같이 변화의 흐름을 따라 몸을 실어버리면 그 움직임의 목적과 그 움직임의 출처를 파악하게 되고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있단 말이지요.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가면 결국은 고기를 잡을 수 있듯이, 그냥 강가에 앉아서 10년 전 낚시 미끼 걸어놓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앉아 있으면 고기가 잡힙니까.




낚시를 할 때 10년 전 낚시 밥을 놓으면 고기가 물립니까? 젊은 애들이 얼마나 변화에 민감한데. 그러면 젊은 애들이 뭘 원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젊은 애들이 노는 곳에 가야 합니다.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노는데 있잖아요. 그런 곳을 가서 애들 세계에서 유행하는 옷이나 신발을 파악하고 그 원천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인지 미국에서 온 것인지 알아서 유행에 따라가지 말고 유행의 창출자가 되어서 옷 가게를 하든지 하는, 의식 구조가 변화를 따라잡는 의식 구조로 가야 됩니다.




제가 예상 했습니다. 오후 시간에는 주무시는 분이 많을 거라고. 이게 뭐냐? 변화를 따라잡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은 관찰자에요. 이들이 관찰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엘 솨따이(전능하신 하나님)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 했습니까? 그 자체로 온전함이에요. 어느 정도로 온전한가 하면, 사단이 있더라도 별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온전함입니다. 사단이 있고 악이 있고 뭐가 있더라도, 너는 너고 나는 내 할일 하면 되니까 각자 자기 위치를 찾아가면 되니까 별 문제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 온전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이미 주체가 안정된 주체, 변화가 아니라 안정된 주체를 갖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안정된 주체를 갖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정성에서는 뭐가 안 나오는가 하면 운동성이 안 나와요. 변화성이 나올 수가 없어요.




노무현 정권이 변화성, 운동성 주장하다가 조져놨잖아요. 다시 보수 쪽으로 돌아가는 그런 분위기 아닙니까. 그러면 이 운동성이 나오려면, 여러분들이 차타고 길을 가는데 고속도로가 10Km 직선으로 되어 있다면 상당히 위험합니다. 왜? 졸음 운전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가끔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가끔은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가면 이게 운전하는 재미가 있어서 졸음이 올 틈이 없지요. 아! 재밌다. 놀이 동산이네.




세상에 놀이동산에 직선으로 가는 놀이기구가 없잖아요. 롤러코스트가 똑바로 가는 롤러코스트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누가 탑니까? 올라가고 내려가고 그런 변화가 있잖아요.




운동이란 것은, 운동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가? 준위의 차이, 위치 기준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욥으로 하여금 친구들처럼 고정된 주체, 고정된 자아를 털어버리는 겁니다. 거기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변화를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운동성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아가를 설교하면서, 사랑은 ‘그냥 사랑 있다. 너는 객체 나는 주체. 사랑을 받아드려라. 예. 받아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고 사랑 받은 우리가 있다면 그 사이에 운동에 의해서 주어진단 말이지요. 그 운동이 요한복음 3장 8절에 보면 그것이 ‘바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 이런 노래 있지요?




운동성이 서로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데, 양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양적인 차이는 운동이 안 나타나요. 너는 다섯 덩어리. 나는 두 덩어리. 이것은 차이가 없어요. 위상이 같으니까. 그러나 바람은 어떻게 붑니까? 기압의 차이에 의해서 바람이 불잖아요. 물의 차이에서 폭포가 생기잖아요. 운동에너지나 위치에너지는 차이에 따라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안정된 에너지가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수력발전을 일으키고 오늘날 불을 켜고 에어컨을 가동하고 하지요.




그러니까 변화를 줌으로, 그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변화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그 변화가 주는 대로 따라가야 될 것이 인간의 본래 자아인데, 인간은 그냥 자아에, 선악과 따먹고 절대 신이니까 인간은 자꾸 신처럼 절대화시키는 버릇이 있어서 ‘이만하면 됐다.’ 거기에 안주하고 주저앉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이것을 철학에서는 ‘형이상학적인 오류’라고 하는데, 자꾸 뭔가 합리화시켜서 정돈시키려 하는 거예요. 변화에 따라 붙이는 것이 아니고 정돈되기를 원해요.




아까 사랑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 했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성령의 바람으로 오는데, 성령은 어디서 어디까지 이동시키는가 하면, 영의 세계에서 육의 세계, 그 준위, 위상의 차이를 바람으로 연결시켜서 찾아오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것은 ‘야, 사랑 있다. 가져가라.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은 사랑 쪽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육은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날 자기를 절대화 시킵니다. ‘하나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오늘 믿음으로 충분하지 내일 새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목사님들의 고민거리가 뭐냐 하면, 새로운 사람이 “야, 이런 복음이 다 있구나.” 하고 한 6개월 다니고 난 후에 ‘이제 다 뗐다. 목사님, 이제 다 알았습니다. 죽을 때 되면 그 때 교회 나오겠습니다.’ 6개월 수강하고 다 뗐어요. 그리고는 안 나와요.




이것이 자기 절대화입니다. 자꾸 자기를 절대화 시킨단 말이지요. 육은 계속해서 바람이 불어야 해요. 육은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자기를 절대화시키니까 성령에 의해서, 바람 같은 성령이 와서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를 이어줍니다.




‘성령이 저쪽에서 먼저 다가와야 된다는 그 근거가 어디 있어서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합니까?’ 라고 하는데, 우리 인간이 영적인 인간이 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찾아보면 알 수가 있어요. 어제 밤에도 누구와 이야기하면서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여러분들이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꼭 바보 같아요. 인생 왜 사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느낌을 받는가 하면, 예수님은 뚜렷한 목적이 없어요. 세상 욕심은 물론 없고. 다만 가끔씩 때가 되매 제자 부르고, 때가 되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때가 되매 ~ 하고. 이런 것이 있지 자기 욕심이 없어요.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부터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세례 받을 때 성령을 받게 되는데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이 주는 그 변화에 항상 종속적으로 순응해야 될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그냥 순응해야 될 입장이지 독자적으로 자기 입장을 주장할 그런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같으면 소경을 낫게 해도 가는 곳마다 소경을 낫게 할 텐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같으면 귀신을 쫓아내도 모든 귀신을 따 쫓아낼 텐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부를 도와줘도 특정인을 도와주고, 소경을 보게 해도 특정 소경을 낫게 해주고 다른 소경은 낫게 해 주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병자를 고친다면 찾아간 마을 전체 병자를 다 낫게 해 줄 텐데, 어떤 병자를 고칠까 하는 것도 성령께서 능력 주시는 자에 한해서만 고칩니다.




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그만큼 똑똑하면 세미나 열어서 바리새인과 우리 한바탕 논쟁하자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 자리를 피합니다. 왜 피합니까? 기적 일으켰으면 사진 찍고 해야 할 텐데 “내가 한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알리지 말라고 해 놓고 소문 다 내 버리고. 소문은 소문대로 퍼지고.




자기주장이 없어요. 성령 세례 받고 난 뒤에는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죽은 것도 자기 본인의 힘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죽게 되어 있고, 완전히 돌아가시고 난 뒤에 자기 힘으로 살아난 적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절차를 미리 앞당겨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고 박력이 없냐고 들이대지 마세요.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이루려 함이 아니다.”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욥에 있어서 고난 받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었어요. 이질적인 낯선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고정된 시선을 운동하는 시선, 변화하는 시선으로 바꾸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어떤 관찰자로, 아니면 관람자로 버티지 말고 그 바람의 폭풍의 중심에 뛰어 들어가면 그 속에서 고정된 주체는 와해되고 해체 되서 남는 것은 물렁물렁한 치즈 같은 언제든지 변화될 여지가 있는 정형화 되지 못한 미완성의 상태로서 바람에 자아를 맡길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늘 가짜입니다. 아까 적어라고 했는데 적었습니까? “나는 매일 가짜다.” 그럼 진짜는? 성령이 진짜고 나는 매일 가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고집스럽게 ‘나는 이것이다.’ 라고 남에게 주장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연애 할 때 흔히 좋은 말로 ‘사랑한다. 좋아한다.’ 그렇게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천 번을 했어도, 어느 날 ‘우리 헤어지자.’ 한 마디만 하면 끝납니다. 조정기간 2주간도 필요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은 그 때 그 때마다 그 순간에 떼어서 새로운 자아를 정립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너, 옛날 사랑한다고 해놓고 지금은 뭐냐?’ ‘그 때는 그 때지 뭐. 사람 안 변하나?’ 이러거든요. 그러면 ‘네 그 말에 내가 얼마나 상처 받은 줄 아나?’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이렇게 나오지요.




상처받고 안 받고 이것도 여러 번 헤어지면 상처를 덜 받아요. 처음 헤어질 때 괴롭지 여러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면 상처도 덜 받는단 말이지요.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아주 변화에 적응을 잘 해요. 앞으로 어떤 연애를 하더라도 ‘상처 안 받기’ 사전 예고제로 나갑니다. 뭔가 헤어질 기미가 보이면 신호를 보내란 말이지요. 삐삐삐 주의하라.




그만큼 옛날 사람의 인식은 고정된 인식이라면 젊은 사람들은 변화에 민감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만큼 이 시대가 물건 팔아먹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차이나는 차이를 많이 양산해 냅니다. 냉장고도 차이, 휴대폰도 차이, ‘휴대폰 바꾸세요. 차이 납니다. 그것은 유행에 뒤떨어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이 나왔는데 옛날 구닥다리 계속 차고 다닐 겁니까?’




계속해서 차이를 만들어 내니까 그 차이가 생길 때마다 신속하게 따라잡기 위해서 젊은이의 심성도 차이에 적응을 잘 하는 그런 식으로 됐고, 어른들은 한번 사용한 시계, 냉장고 거기에 순수 증여가 담겨 있어서 물건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고 자기 추억이 들어있고 낭만이 들어 있어서 ‘아빠, 이 자전거 버리자.’고 하면 ‘그걸 버리다니. 이 자전거 타고 네 엄마 만날 때 -- 추억이 담긴 자전거인데 그것을 버려!’ 이렇게 변화에 적응할 줄 모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찾아오면 우리의 고정된 시선을 해체시킵니다. 와해시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나라고 내세울 게 없도록 멀건 죽처럼, 뭔가 형제가 있고 잡히는 것이 있어야 ‘이것이 납니다.’ 라고 내세울 수 있는데 --- 




인간은 60조의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는 단백질과 무기물로 되어 있지요. 단백질은 뭐냐 하면, 분자 그러한 수위에서는 원자가 모여서 분자가 되니까, 분자가 되어야 지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니까 이 분자가 모여서 아미노산, 단백질을 만드는 것이 되거든요. 그러면 현재 분자들이 죽었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진동하니까. 그래서 에너지가 나와요. 그 에너지에 연결, 연결 되어서 세포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소위 ‘자아’라는 것이 없어요. ‘자아’라는 것은 추상적인 거지요. 하나의 이름을 붙은 것뿐이지 실체는, ‘자아’라는 실체를 우리 몸 어디에서 찾습니까? 머리에서 찾습니까, 눈에서 찾습니까? ‘자아’라는 게 없어요. 전체를 결과적으로 표현할 때 뭐라고 하지? 예이, ‘자아’라고 하자. 그래서 ‘자아’가 나온 겁니다.




그럼 ‘자아’ 이전에는 뭐냐 하면, 에너지의 진동이라. 에너지의 진동을 가지고 욕망, 혹은 욕구라고 합니다. 이 욕구는 동물이 되었든 식물이 되었든 모든 것에 다 있어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돌멩이에도 욕구가 있다고 주장해요. 돌멩이 속에 기가 있다고 하잖아요. 동양 철학에서.




이렇게 있으니까 욕구 단계에서, 에너지가 진동하는 분자 단계에서 어떻게 간이 만들어지고 쓸개가 만들어지고 위가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형질의 차이성을 뚫고 거기서 운동이 나오고, 이쪽 운동과 저쪽 운동이 분자성 위치에서 결합이 될 때 하나의 기관이 생깁니다. 기관이 생길 때, 이 기관이 만약에 두뇌라면 두뇌라는 기관이 이런 식으로 형성이 되었기 때문에 두뇌라는 기관이 만약에 생각을 담당한다면 그러면 죽음이란 것은 뭐냐?




이 기관이 다시 해부되어서 원형질, 쉽게 하면 버터입니다. 버터 같은 원형질로 가버리지요. 물컹물컹한 혼돈의 체제로 바뀌어 버린단 말이지요. 바뀌어 버리면 생각하는 기관이 죽어서 바뀌어 버리면 자아가, 자아라는 것이 하나의 이미지거든요. 자아는 두뇌가 만든 이미지가 자아인데, 이미지 영상이, 두뇌 세포에 산소가 공급 안 되고, 피 속에 에너지가 있는데 그 에너지가 공급이 안 되면 세포가 죽어버리면 이 이미지가 까빡까빡 하다가 건전지 약 떨어지듯이 떨어져 버리지요. 에너지가 없으면 떨어진단 말이지요. 떨어지면 다시 원형질로 돌아가고 흙으로 돌아간단 말이지요. 그것이 아까 욥기 10장 아닙니까. 티끌로 돌아간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욥은 지금 자아를 스스로 붕괴해서 내가 있기 그 전부터 따지면서 그 속에 혹시나 내게 고난이 찾아오는 이유가 있을까 해서 쳐다보는 겁니다. 없어요. 그러니까 미치고 폴짝 뛸 일이지요. 죽음까지 담보로 해서 다 해부하고 해체해 봤는데 그 속에서도 왜 나에게 고난이 오는지를 도대체 모르겠단 말이지요.




자기 육이 갖고 있는 한계대로 다 했는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고난을 당하니까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책임질 문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잘못 됐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잘못 된 것이 없으니까. 만드신 대로 만들어졌는데 왜 나에게 고난이 오는가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지금 욥의 문제점이 뭡니까? 고난을 뭐로 봅니까? 고난을 좋은 것으로 보지 않고 나쁜 일로 보지요. 잠이 오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고난은 뭐라고요? 따라해 보세요. 잠이 오니까. 뭐라고요? ‘나쁜 일’이란 말입니다. 고난을 나쁜 일로 본 겁니다. 여기에서 엘리후한테 책망 받고 하나님한테 책망 받는 거예요. 고난이 행복이라고 느껴본 적이 있느냔 말이지요.




현재 육을 가지고 있는 욥에게는 아픔이 행복도 아니고 좋은 일도 아니에요. 결국 인간의 윤리, 도덕이라는 것은 내 몸이 편하면 좋은 일이고, 내 몸이 힘들면 나쁜 일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육의 한계입니다.




내 몸 위주로 생각하니까 내 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탈레반들이 한국 사람을 죽였다. 불편해요. 그런데 만약 탈레반이 23명 다 석방했다. 그러면 갑자기 기분 좋단 말이지요. 늦은 밤에 한국과 일본이 축구 시합하는 날, 자다가 갑자기 고함소리에 놀라 TV를 켜 보니까 한국이 이겼어요. 이운재 골키퍼가 막았다고 온 동네가 난리 났어요. 잠도 안자고. 그 때 밤 12시 넘었는데 함성을 지르고 난리를 쳤어요.




함성이 나온다는 것은 에너지가 있어야 나오고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기본적인 욕동, 우리 욕망에서 나온 거죠. 욕망은 우리 몸이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운재 몸하고 우리 몸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있어요? 같이 붙어 다닙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운재가 꼴을 막았는데 왜 함성을 일으키느냔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 두뇌에 한국이라는 동질성이 이미지화 되어 박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미지가 박혀 있는 그 고정된 자아상을 우리 몸이 거기에 대해서 봉사해 줄 때 그 때는 좋은 일이라고 보고, 이미지를 학대하고 이미지를 훼손할 때 우리는 나쁜 일로 보는 겁니다. 이것을 흔히 이야기해서 ‘기도 응답’이라고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하실 약속을 이루어 주옵소서.’ 그런 기도가 아니고, 내 몸을 편하게 해 주시면 좋으신 하나님이고 내 몸을 불편하게 만들면 나쁜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자기 몸 위주에요. 이미 몸 자체가 기준이, 옳고 그름, 선과 악이 자기 몸 중심으로 받는 이상은 주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육의 한계란 말이지요.




이런 육의 한계를 영의 차원에서 운동이 일어나서 바람 타고 오듯이 고난이 찾아와서 주도권이 이제부터는 내 몸 편함 이것이 주도권이 아니라 고난 주신 분이 주도권을 쥐는 방향으로 욥을 뒤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욥기입니다. 위치 이동입니다.




욥의 친구는 ‘세상은 완전하고 안정 돼 있다. 따라서 안정 돼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도 안정 돼 있다.’ 둘 다. 세상도 고정되어 있고, 세상 속에 있는 나도 고정된 시선, 고정된 자아일 뿐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께서 착한일 하니까 복 주는구나. 고맙습니다.’ 그것으로 됐어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난데없는 낯선 고난이 찾아와서 욥으로 하여금 고난 받는 자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고난의 힘이 아니면 딴 힘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욥이 고난이 온 이유를 안다면, ‘고난 네가 어딜 와!’ 고난의 이유를 안다는 자체가 이미 고난보다 주도권을 내가 쥐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알지. 고난 받는 이유를 내가 알아.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 이거 누구 발언입니까? 이게 엘리바스의 발언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주시는 것은 다 뭐 하기 위해서? 징계를 받아서 결국 네가 잘 되기 위함이다. 고정된 주체가 깨졌습니까, 안 깨졌습니까? 안 깨졌어요. ‘고난’ 그래 고난 있지만 다 너 잘 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통해서 너를 더 훌륭하게 연단시키기 위해서 하신 일이다. 이게 엘리바스도 이야기했고 욥도 이야기했어요. ‘내가 연단을 받은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 죄송합니다. 주도권 바꿨습니다. 욥 안에 반도체 칩처럼 장차오실 고난 받는 그리스도가 있는데, 지금 욥은 주도권을 철저하게 자아의 고정성이 주도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록 그것을 해체 하더라도, 그 해체하는 이유는 뭐냐? 고난조차 납득이 되는 그런 고정된 주체, 문법으로 하면 주어, 이 주어를 내가 갖고 있기 때문에 이게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욥으로 하여금, ‘네가 주어를 갖고 있는 이상은 그 고난을 주신 그리스도를 만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입니다. 육의 힘으로 육을 탈피해서 영으로 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아무리 구박을 받아도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는 힘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이 애굽 나라에서 기껏 원했던 것은 정권 교체였습니다. 애굽 나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애굽 나라에 살더라도 좋은 관계, 지금 바로 왕과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고정된 이 땅에 살아왔던 그대로 계속 사는 것이지, 애굽을 탈출한다는 아이디어는 모세와 아론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아이디어고 프로젝트지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는 아니에요.




흔히 기독교 이름을 빙자해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이 사회가 좋은 사회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 나라가 좋은 나라 되고, 애굽에 훌륭한 왕이 등장해서 히브리인들을 잘 대해주고 행복하게 사는 그런 것을 구상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을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애굽에 죽치고 앉아 있으면 예수가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주도권이 내가, 내가 주어에요. 믿어도 내가 믿고, 천당 가도 내가 천당 가고, 잘 나도 내가 잘 나고. 예수 믿어준 내가 대견스러워요. 내가 주어가 계속 돼요.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가 주어가 아니고, 주도권을 쥐는 게 아니고 내가 주인 노릇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육에 그냥 파묻혀 있기를 방치하는 그런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네가 영의 세계를 모르는구나!’ 하고 빼내 가는 거예요. 빼내 갈 때 만만치 않지요. 안 가려고 버티지요.




그러면 어떻게 빼내 가는가?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 언약을 잠시 언급하고 잠시 쉽시다. 여러분들이 너무 피곤해 하시니까. 저도 변화에 적응해야 됩니다.




사실 강의는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도 피곤해서 잠이 오는 상태에서 강의를 해야 여러분을 이해 할 수 있는데, 혼자 멀쩡해서 ‘여러분들이 왜 이렇게 졸고 있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데.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을 잡은 당사자 속에서 주도권이 아브라함이 아니고 언약을 주신 분이 주도권을 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원래 아브람이었지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지요. 이름이 바뀝니다. 바뀔 때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성도의 특징은 본인이 원하는 노선을 본인이 미리 체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무슨 길로 인도할지 본인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왜 그런가 하면, 본인이 주도권을 쥔다면 자꾸 넓은 길로 가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해요. 그것이 무슨 길입니까? 좁은 길이에요. 사람들이 없는 길이란 뭐냐? 다른 사람과 동질성을 이룰 수 없는 특이성을 유지할 때 그 길을 갈 수 있어요.




어느 유명한 시인의 상투적인 시 있잖아요. ‘내가 숲속에 갔는데 두 갈래 길이 있더라. 하지만 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해서 가겠다.’ 그렇게 선택해서 길 잃고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지금은 단결하고 통일할 때입니다. 많은 길 중에서 안정된 길로 가야지 아무도 안 간 길로 가고 아무도 투자하지 않은 곳에 주식 투자하면 망합니다. 전문가에게 물어서 많은 사람들이 투자하는 블루칩에 투자해야지 엉뚱한데 투자하면 다른 주가 오르는데 자기 것만 내려갑니다. 왜냐하면 많은 주가는 적은 주가를 먹으면서 커거든요. 큰 주가의 덩치가, 이것을 증식이라고 하는데 증식은 작은 것을 잠식하는 덕분에 덩치가 커지는 겁니다.




저기압이 태풍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기압이 다 태풍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기압들이 모여서 태풍이 되는 겁니다. 에너지가 더하기 더하기에서 곱하기 곱하기로 나갈 수 있어요. 그 때 갑자기 태풍이 되고 허리케인이 된다고요.




이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는데 큰 것이 나중에 더 큰 것이 되고, 투자하는 돈이 적으면 나중에 푼돈으로 끝나지만 크게 걸면 크게 걸수록 나중에 큰 돈 된다는 거예요. 작은 것은 점점 더 가치가 떨어지고 큰 것은 점점 더 커지는 겁니다.




부지런히 일해서 꼬박꼬박 돈 모아서 은행에 저축해 봐야 년 3% 이자 받습니다. 그런데 주식 값이 연초에 1,300원 하다가 지금은 1,900원 합니다. 3%보다 훨씬 높지요. 안전하다고 은행에 넣었다가 가만 앉아서 손해 본 겁니다. 자기는 착실했는데 착실한 것이 손해를 봅니다. 더 착실하면 손해 더 봅니다. 계속 손해 봐요. 왜? 상대적인 박탈감이니까. 남들 갈 때 왜 안 따라 갔느냔 말이지요. 독불장군 되면 혼자 손해 보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는 원리가 그래요. 큰 덩치가 돈이 돼요. 작은 덩치는 돈이 안 됩니다. 큰데 묻혀서 가야 돼요.




수련회도 큰데 가야 호텔에서 하지 작은데 가면 밥한다고 2~3시간 보내고, 설거지한다고 1시간 보내고 그렇게 해서 수련회 되겠습니까? 이 세상 원리가 내 힘으로 진리에 도달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나의 육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한계냐? 그런 것을 알려달라는 식으로, 더 쉽게 말해서 ‘왜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까?’ 알려달라는 식으로 기도하고 매달려야 된다 이 말이죠. 그게 마음을 낮추는 거예요. ‘나에게 하필 왜 이런 일이’가 아니라, ‘주여,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더 큰 태풍이 기다리죠? 아 만나고 싶어라. 태풍!’ 이렇게 나와야 된단 말이지요. 이렇게 나오는 사람은 미친놈이지만 하여튼 --




‘지금 나에게 닥친 불행은 불행도 아니지요. 더 큰 불행으로 가볼까?’ 이렇게 나와야 된다고. 그래서 예수님 가신 길이 남의 길이 아니고 우리 길이에요. 예수님은 점점 십자가로 꼴아 박는, 내려 주저앉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것처럼 성령께서 몰아갑니다. 베드로가 죽을 때 어떻게 죽습니까? 원치 않는 죽음으로 죽어요. 세상에 죽는 권리까지 박탈당하는 겁니다.




지금 연세 많은 분들은 가끔 생각할 거예요. 내가 죽을 때 어떻게 죽을까? 시나리오를 짜요. 내가 죽을 때 ‘애들아, 잠이 오네.’ 그러다 평안히 5분 만이 죽으면 후대 사람들이 ‘그분의 죽음은 마치 천사의 죽음 같더라.’ 하는 말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애도하고, ‘아까운 사람이 갔구먼.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시나리오를 짜는데, 여러분, 개죽음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에 죽을 때가지 자아를 포기 못하고 안정된 자아로 고정되기를 바라는, 끝까지 ‘그 사람은 죽을 때도 아름다웠다.’ 라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위로하고 싶은 그 충동을 주님께서는 도사기 때문에 그것을 피해갑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 중에 하나 골라 볼까요. 돌아 맞아 죽는다. 물에 빠져 죽는다. 등등.




어떻게 죽더라도 성도의 죽음은 하늘나라에서 귀하게 보십니다. 믿습니까? 아멘! 오랜만에 아멘 나왔다. 어떻게 죽더라도. 목사가 몰래 화투 치다가 열 받아서 고혈압으로 죽어도 그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답다는 그 표현이 우리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죽음에 근거해서 일방적으로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영으로 바람처럼 사랑이 오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건 안 일어나도, 우리 자체적으로는 항상 흉해요. 아름답지 못합니다. 아름다움이 덮쳐오면 뭐든지 아름답거든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분명히 내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를 찾아내야 돼요. 지금 내가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한 것이 왜 훌륭한 것이 아닌가? 설교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 아닌 이유를 찾아야 해요. 그것도 모르고 저한테 대들어요. ‘왜 설교가 주의 일이 아닙니까? 영광이 안 됩니까?’ ‘그건 영광 아닌데요.’ ‘왜 설교가 의로운 일아 아닙니까?’ ‘그게 의로운 일이 아니라 죄 짓는 것인데요.’ ‘그러면 하나님이 죄 지으라고 전도 했습니까?’ ‘원래 죄인이라고 전도한 거예요. 죄인인 것을 드러내라고.’




가만히 있으면 죄인 안 돼요. 설교하면 죄인 돼요. 설교한 본인이 압니다. 이래서 내 설교가 개떡이구나. 내 설교 듣고 한 명이라도 구원 받으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있었다면 이것은 주의 은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들은 설교 준비에 더욱 매진해야 돼요. 왜? 설교 준비 안 하면 자기가 훌륭한 사람 됩니다. 요즘 설교 준비 안 했더니만 역시 교인들 감동 안 받는구먼. 이렇게 되지만, 열심히 설교 준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안 듣고 다 잡니다. 여름철에는 장로님 기도하면 다 잡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해도 안 될 때 그 때 우리 속에서 부화가 일어나면서 ‘주여, 저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주님께서 ‘딱 걸렸네! 네가 설교 했다고 해서 나에게 대들어.’




세상에 설교 잘해서 천당 가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법은 없어요. 십자가의 새언약 피고 구원 받습니다. 설교 잘해서 구원 받는 법은 없어요. 우리의 어떤 죽음도 우리는 죄인으로 죽는 것이고, 그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그것이 이미 컨베어벨트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우리 안까지 파고 들어왔어요. 십자가의 그 능력이. 이미 우리는 삽에 달랑 들여서 삽 채로 지금 좁은 길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가다보면 좀 쉬었다가 가야 됩니다.


10분간 쉽시다.


 


 

 고관규(IP:121.♡.88.59) 07-08-04 14:26 
서경수목사님..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근데 비디오동영상은 없나요? ㅎㅎ  가지도 못한 주제에 별걸 다 요구하는군요
현장의 뜨거운 열기를 좀 보고, 그림으로 보는 것이 말씀을 더,,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기에 그러거든요
여하튼 수고하셨으니 좀 들어보기를 원합니다.
감사해요. 목사님..
 관리자(IP:211.♡.131.168) 07-08-04 15:01 
동영상은 화요일 부터 편집에 들어갑니다. 하루 트래픽이 3기가 라서 한분이 3개 파일 받으면 다른분이 못 받기에 올리나 마나 소용없을듯 보입니다. 일단 다른 방도를 찾아볼 생각 입니다. 한 강의에 1기가 정도에 총 11강과 우리교회까지 4강 총 15강에 10-15기가 정도이니까 이렇게 되면 음성 파일도 못 받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올릴 생각이 없습니다. 나중에 모든 것이 발달이 되면 보급할 생각 입니다. 뭐 다른 방법이 있으면 의견을 제시해 주세요. 지금은 올렸다간 음성도 못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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