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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5 15:59:09 조회 : 4478         
20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_cross070730a(1강)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199)


20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_cross070730a(1강)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됐는데 시작할까요?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근각지에서 흩어져 있던 복음을 아는 성도들이 욥기를 중심으로 다시 깊이 사모하고 상고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시를 주시는지 그 내막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귀한 2박 3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이번 강의할 것이 [욥기]란 것입니다. 욥기가 몇 쪽에 있느냐 하면, 구약성경 761페이지. 거기에 욥기가 있습니다. 일반 초신자들은 [에스더] 다음에 욥기가 있어서 마치 욥이란 사람이 에스더보다 더 나중에 사람이다. 이렇게 초신자들은 오해할 수 있는데, 이 에스더란 사람은 훨씬 뒤에 있는 사람이고 욥이란 사람은 훨씬 앞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시대는 아브라함과 야곱, 그 정도 언저리에 아브라함 시대나 야곱, 이삭이나 그 정도의 언저리에 같은 시대에 살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욥기를 하면서 제일 먼저 21세기 초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욥기를 보면서 어떤 갭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이니까 그리고 그들은 아직까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성립이 되기 전이라서 율법도 없었어요. 법이 없었습니다. 법이 없는데 지들이 무슨 하나님을 아냐 이 말이죠. 십계명도 없는 주제에. 지들은 무슨 하나님을 알겠느냐? 거 무슨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고 그렇게 생각이 들 겁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율법이 오기 전에 이미 사람들이 죄 아래 있어서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습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것에 의하면 그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 그렇게 돼있는데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계시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지금 무엇을 밑천으로 삼아서 신앙생활 했겠는가? 라는 의문점이 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 이후에 그 다음에 이스라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구체적인 문자로 된 십계명 주기 이전까지 공백기간에 뭔가 참고서 같은 게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들은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 했을까? 상당히 궁금해 합니다. 궁금해 하는데 욥기를 보면 그게 나와요.




그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신앙생활 했는가? 그들은 자연의 순응하면서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의’와 ‘죄’를 끄집어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그래서 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연에 잘 순응할 때 이걸 의라 하고, 자연법칙에 순응을 제대로 안 하고 이탈할 때 그것을 죄라고 한 겁니다.




지금 우리는 프린트로 되어 있는 성경이 있어서 옳은지 그른지 한번 따져볼까 하고 성경책 펴들고 시도하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어릴 때부터 교회 가본적도 없고 성경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들 나름대로의 그러면 의가 없고 죄관이 없겠느냐? 있거든요.




그들한테 이야기하지요. 당신은 교회 간 적도 없고 성경도 누가 성경 이야기한 적도 없고 그냥 깊은 강원도 산골에 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이거는 죄야, 이거는 의야. 라고 할 때 당신은 무슨 기준으로 해서 그렇게 함부로 단정 짓고 의다, 죄다 할 수 있느냐? 라고 윽박지르면 그들로서는 사실상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웃사람들이 또는 대대로 조상들이 이건 나쁘다고 해서 그것이 내 속에 각인돼서 나쁘다. 또는 이웃사람들이 그건 나쁜 거야. 라고 하니까 그게 나쁘다. 이렇게 판정을 내립니다.




제가 오늘날 시대에도 교회 모르고 성경 모른 사람이라면서 왜 하느냐 하면, 이 욥기에 초반부터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십계명이 있고, 모세율법이 있고 이렇게 하면, 자 그 사람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됐는가? 딱 들이대면서 아, 이 사람은 의인 맞구나. 하고 판정을 내릴 수 있는데, 오늘날 객관적으로.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계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욥이란 사람이 의인이라고 팍 떴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욥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의인이라 할 수 있느냐? 지금 현대 성경이 완료된 상태에서는 우리가 도저히 여기가 혼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날 시대에서 기준을 적용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욥기를 안 보게 돼요. 욥기를 그냥 건너뛰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 노아, 창세기 6장에. 노아, 지가 하나님의 십계명도 없는데 의인이라.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의인이냐? 이거 우리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당신은 이렇게 해서 의인이다. 이렇게 할 수 없고, 반대적으로 대조하는 방식으로 의를 추려내는 방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의와 죄는 서로 대립되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차이나지요. 그래서 의가 뭐냐는 우리는 몰라도, 죄가 뭐냐를 알면 그 빼놓고 나머지가 의가 되는 겁니다. 그 방식을 사용하는 거죠. 죄 빼놓고 죄인 빼내버리면 나머지가 의인 되니까.




그러면 목사님, 그럼 죄인을 어떻게 죄인이라 합니까? 성경말씀도 없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도 없는데 어떻게 죄인이라 합니까? 그것은 심판을 받으면 죄가 되는 거예요. 심판 받지 않고 면제되면 그거는 자동적으로 의인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골치 아픈 문제 또 나옵니다. 뭐냐 하면, ‘심판 당했다, 안 당했다’를 누가 결정하느냐? 이러한 심판을, 노아홍수처럼 아예 홍수처럼 확실한 심판이 있으면 되는데, 매일매일 그냥 밭 갈다가 뱀에 물렸다든지, 도봉산 올라갔는데 갑자기 북한산 올라갔는데 벼락을 맞았다든지 그럴 경우에 만약에 하나님의 욥기나 이런 계시가 없을 때 어떤 이웃 사람이 산에 올라가 벼락 맞으면 그거는 그 사람 분명히 죄가 지었다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사람이 소경이 되어서 걸어가니까 사람들은 제자들까지 집중 포화를 했지요. 저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 자꾸 이렇게 선입감부터 그렇게 돼있어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넘어졌을 때, 저 사람은 그만한 신에게 상응한 죄가 지은 게 있기 때문에 조기에 죽었다. 벌 받아 죽었다. 졸지에 죽었다. 그렇게 규정을 해왔던 겁니다.




그래서 그 규정에 의하면 벼락도 안 맞고 온전하게 될 때는 무슨 부류에 속하느냐 하면, 바로 의인 부류에 속하는 겁니다. 특히 욥에 있어서 의인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다음 구절에 보면 뭐냐 하면, 남자가 아들이 일곱이요, 플러스 딸이 세 명이요, 그 다음에 소유물이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삼삼칠 박자로 나가지요. 주로. 소가 오백 겨리요, 천 마리 되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농업기술이 뛰어난 게 아니고, 주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욥의 저러한 부자 된 것은 부를 가진 것은, 이것은 신께서 하나님의 의인이라 단정했기 때문에 그 정도 재산을 가질 자격이 되기 때문에 가졌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점을 누가 아느냐 하면, 놀랍게도 욥도 그 점을 수용합니다. 왜 그러냐? 몇 번 이야기합니다만 그 사회가 성경이 없어요. 구체적인 성경이란 게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시대에요. 십계명도 없습니다. 십계명이 오게 되면 사람이 어떤 하나님의 계시가 확정, 문자로 반영이 되면 그 문자를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제사장 계열이 등장하고, 모든 판정은 제사장 계열이 독점해서 결정하게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해독을 하기 때문에. 그 문자라 하는 것은 신에 받은 계시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 문자가 없다는 것은 무슨 특수 계급이 없느냐 하면, 성직자 계급이 없습니다. 성직자 계급이 없다면 옳고 그름을 누가 판정하느냐 하면, 자기들끼리 판정하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판정할 때 자연에 순응하면 복을 받고, 자연법칙에 어긋나면 저주받는데, 저주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은 지은 죄가 많다는 그러한 ‘게슈탈트’라 하죠. 그러한 인식체제, 사고체제 그것이 바로 욥의 배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래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거는 지나간 이야기니까 우리가 이거 뭐, 강의 들을 필요 없네요. 옛날에 성경 없을 때 희미할 때 모호할 때 구체적인 하나님 뜻도 없는데 인간들끼리 자기들끼리 의다, 죄다 이렇게 결정할 것 같으면 우리가 구태여 거기다가 한 다리 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무식한 놈’하고 그냥 외면해도 될 문제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확실한 성경 있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분명하게 있으니까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예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분명히 확실하게 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특정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는 지침서가 하늘에서 주어진 적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욥을 이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는데, 바로 이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꼭 해야 돼요.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에 꼭 해야 됩니다. 자, 지금부터 약간 어렵게 갑니다. 어렵게 가야 돼요.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예언대로 일하신다.] 누가요? 저 진짜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예언대로 일하십니다. 욥기라는 것이 욥, 너 나와. 욥하고 나하고 붙어보자. 성경에 보니까 세례요한이 아무리 위대해도 천국에 있는 작은 자라 할지라도 여자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요한보다도 천국에 있는 자가 더 세다는데. 어이, 구약 인물들 나와. 너희들이 예수님을 알아? 이게 어디 하수가. 이렇게 나올 수가 있거든요.




구약에 사람들, 계시가 분명치 않은 사람들이 딴에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지금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이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욥뿐만 아니고 성경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욥하고 우리하고 일대일로 맞짱 뜨자는 이야기 때문에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욥을 하나의 도화지로 생각하고, 우리를 도화지로 생각한다면, 욥이란 도화지에 그린 그림과 우리 인생에 그린 주님의 그림과 이 두 개가 동질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언대로 성취되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정답, 이 정답만 딱 챙기면서 어떻게, 어떻게 공식을 풀었더니만 정답이 나오느냐? 중간 과정을 생략한 채 정답만 챙기면 마치 그 문제를 다 푼 사람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8’이라면 8 나올 경우의 수가 많아요. 3+5도 8이고, 10-2도 8이고, 2의 3승도 8이고, 2*4도 8이고. 그냥 8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과정에서 8이 나왔느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수학에서 이거 객관식 문제 있어요. 풀어야 돼요. 풀어서 그 과정을 수학 선생님이 과정을 봐서 이건 됐구나. 이렇게 판정을 내리는데. 지금 정답을 안다고 해서 이 문제의 취지를 안다고 같이 이렇게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욥이 느끼고 있는 그것을 평소에 우리의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만약에 욥기를 우리가 도외시하고 무시해 버리면 우린 정답만, 예수님 십자가 구원받는다는 정답만 챙기고, 십자가가 어떤 의도에서 나왔나 몰라요.




욥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과 예수님 사이에 연결 지어야 돼요. 우리는 성급하게 예수 그리스도만 챙기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런 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렇게 몸통을 안아서 주님 사랑합니다. 천당 보내주세요. 이렇게 해도 예수님의 저 긴 다리의 발가락은 욥에 가 있다고. 발가락까지 회수해야 돼요. 그냥 몸통만 가져오면 안 돼요.




예수님의 발가락이 욥에 걸쳐 있으면 예수님을 만약에 껴안는다면 욥까지 껴안을 줄 알아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욥을 이해할 줄 알아야 되고, 욥이 그 당시에 어떤 의식에서 신앙생활을 그렇게 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현재 성경 없다, 십계명도 없다. 지금 그 당시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겁니까? 신앙생활 어떻게 할 건데요?  




만약에 우리의 수백 년 사람이 우리보고  비웃는다면 우린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저거들은 말이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욥 시대에 산 사람이 누구누구야? 십자가마을 사람들 아니야. 그 사람들 십자가 모르고. 얼마나 이렇게 하겠습니까?




욥이 본인이 원치 않는 상태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하나의 예언자로서 추첨, 당첨 된 겁니다. 그래서 욥기를 모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취지를 우리가 중요한 것을 뭉텅이로 놓치게 돼요. 욥기를 빼버리면.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풀어야 될 숙제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욥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가 안다고 치고, 욥 당시에 사고방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하는 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다 알잖아요. 욥도 고난 받았지만.




그렇다면 욥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일치성 가운데서 욥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그 중간에 시편이라든지, 이 시편은 다윗 언약이죠. 앞에 보면 모세언약. 모세, 시편에 나오는 다윗, 선지자의 고난. 이런 것들이 이어서 나온다 이 말이죠. 이어서 나올 때 문자적으로 몇 개 뽑아서 연결됐다. 이렇게 하면 상당히 곤란하고요.




욥이 알고 있던 그 정신이 저 후대로, 후대로 밀어붙이는 식으로, 들이대는 식으로 가까이 접근을 해야 됩니다. 욥 전체가 다 이동을 해야 돼요. 욥 전체가 이동하면 욥만 이동해선 안 되고, 욥에게 고난을 안겨 줬던 욥의 친구도 같이 병행해서 후대로 모세 쪽으로, 다윗 쪽으로, 선지자 쪽으로, 그리스도 쪽으로, 오늘날 교회 쪽으로 쭉쭉 이동을 시켜야 돼요. 욥과 욥의 친구들의 그 사고방식 전체를 다 이동시켜야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욥의 친구와 욥 간에 논쟁이라든지, 그 다툼이라든지 이러한 하면, 우리는 거기에 끼어들어가야 돼요. 참여해야 돼요. 우리가 만약에 그 시대에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과연 욥의 친구 편을 들 것인가, 욥의 편을 들 것인가를 우리는 스스로 결정해야 됩니다. 결정해야 된다 하니까 여러분, 그거야 우리가 욥의 편이지, 욥의 친구 편 되겠습니까? 이래 하는데 성경의 주장을 알아듣고 해야지, 미리 자기가 정답 안다고 누구 편들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하고 예수님 싸울 때 우리야 예수님 편이지. 하지만 바리새인의 의견을 들어보세요. 평소에 우리 신앙생활하고 똑같아요. 많이 우리가 바리새인 편 들 수밖에 없는 논조가 거기 나옵니다. 욥의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욥기를 사전에 한번 읽어 보신 분이 계시지만 욥기를 쭉 보면서 욥의 친구들, 특히 하나님께 책망 받고 꾸중 들었던 욥의 친구들의 사고방식을 따로 뽑아서 쭉 보세요. 하나님께 책망 받았다는 그러한 선입관을 잘라버리고, 내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고 생각하고 욥의 친구 이야기를 들어보란 말이죠. 어디 하자가 있는가? 완벽해요. 완벽 그 자체에요. 문제 될 게 없어요. 오히려 욥이 더 짜증을 내는 것 같아.      




그러면 도대체 욥기를 보면서 욥의 친구들이 문제가 없는데 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잘못됐고 욥의 손을 번쩍 들어주느냐? 그럼 욥의 손을 들어주려면 욥은 이래서 완전하다. 이래 나와야 되는데, 욥도 하는 이야기를 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거든요. 그럼 우리 보면 둘 다 어설픈데 하나님은 무슨 뜻을 가지고 둘 다 어설픈 중에서 한 쪽은 손들고 한 쪽은 손 내리고.




도대체 그게 뭐냐? 아이고, 모르겠다. 내가 알겠나. 나는 십자가만 알지 하지만 이걸 모르면 십자가를 안다면, 십자가의 중요한 부문이 뭉텅이로 날아가 버려요.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욥기는 소위 신앙생활을 왜 안 하면 안 되느냐 하는 거예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끄집어낼 때 그것이 그 사회에 얼마나 이질성을 주고, 파격적이고, 남들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는지 니는 아냐 이 말이죠. 그냥 정상적으로 살면 되지, 왜 신앙생활을 꼭 해야 되느냐 말이죠.




그래서 욥기를 통해서는 우리가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는 모든 사례, 모든 경우를 다 동원해서 소위 신앙생활이라 하고 있는 우리를 이 욥의 친구나 욥을 통해서 우리를 쳐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 쳐버려야 돼요.




교회 안 가도 되잖아. 예수 안 믿어도 되잖아. 왜 믿어야 돼. 죽을 때 나중에 죽을 때 믿어. 이런 식으로 우리 신앙생활 자체가 이거는 안 해도 될 일을 번잡스럽게 하고 있는 짓거리다. 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를 다 끄집어내야 돼요. 다 끄집어내서 그래, 신앙생활 안 해도 되는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돼야 비로소 욥의 고난을 이해합니다. 하지 말자는 거예요. 신앙생활이고 뭐고 교회도 다니지 말고, 하나님 그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거 없이 살아도, 그것도 그렇게 살아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신앙이라는 것은 뭐냐? 잘 믿겠습니다가 아니라 매일같이 우리한테 물어봐야 돼요. 이거 안 하면 안 됩니까? 예수 꼭 믿어야 됩니까? 이거 안 믿어도 잘 된 사람 많은데 왜 이거 해야 됩니까? 나 삐졌습니다. 안 하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날마다 되풀이 해줘야 돼요. 안 그러면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위선자로 만들어 갈수록 위선자의 두께가 두꺼워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욥기는 사실은 욥기 말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도 우리는 바리새인하고 예수님하고 싸우면 으레 예수님 편에 쫓아가 있다고. 사실은 행동하는 것 보면 바리새인인데. 그런 것을 우리가 바리새인 맞습니다. 하는 쪽으로 돌려야 된다 말이에요. 이걸 돌리지 않으면, 돌릴 때 비로소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미가 그때 제대로 다가와요.




그냥 묻혀가지 마세요. 예수 붙잡고 묻혀 가게 되면 자기가 바리새인 채로 예수 믿는 사람 돼버려요. 그러면 그리스도 십자가가 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가 잘나서 예수 믿는 게 돼요.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의 적으로써 아군이 아니라 적군의 편에 서서 계속 그쪽에 서있음을 계속 확인하는 쪽으로 성경해석을 해줘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 쓰시는 도화지가 돼요. 하나님이 쓰시는 도화지라는 말은 내가 내 신앙생활을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재미도 없고, 그런 취미도 없고, 할 생각도 없고, 하고 싶은 능력도 나한테 없다. 하는 것을 분명히 해 줘야 비로소 주님이 원하는 신앙은 그때 꽃봉오리 피어나는 겁니다.




해야지. 잘 해야 돼. 열심히 해야 돼. 이러면 가짭니다. 그거는 자기가 신앙 생활하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께 책망 받는 이유는, 본인이 지금 신에 대해서 너무너무 잘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그거는 욥도 마찬가지고.




욥도 평소에 이 사람하고 생각이 같았어요. 욥에게 고난 오는 것이 자기가 어데 고난 오라고 누가 요청한 적 있습니까? 욥이 이쯤 되서 고난 좀 와야 될 텐데 지가 기도한 적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즉흥적이고 우발성이었습니다. 그럼 우발성, 즉흥성이라 하는 것은 늘 터지면 우발성이 아니잖아요. 가끔 터져야 우발성 아닙니까. 북한산에 번개 계속 치면 못 올라갑니다. 가끔 터지니까 그래도 올라가잖아요.




평소에 우리가 하는 것이 욥의 친구처럼 한번 신앙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계속 신앙이 유지된다고 그런 생각하는 그 버릇, 그것이 바로 욥의 친구들의 사고방식과 꼭 닮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철저하게 신앙생활 안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야 돼요. 신앙생활 만약에 하고 싶다면, 이건 백이면 백 가짜인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나는 늘 가짜다.] 적어놓으세요. 쓸 때는 그냥 적어놓으세요.




우리는 어제 나와 오늘 내가 달라요. 내일 되면 또 달라요. 이것은 다르다는 말은 변화한다는 말은 어느 것 하나라도 진짜배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매일 가짜에요. 매일 가짜란 말이죠. 그것을 욥이 받은 낯선 고난, 욥도 해석 못하고 욥의 친구도 해석 못한 아무도 이 세상 인류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해석 못한 욥의 고난을 가지고 모조리 다 가짜임을 폭로하는 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모두가 가짜에요.




왜 모두가 가짜이냐 하면, 모두가 신을 알기 때문에 안다는 자체가 가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일의 신앙을 따로 준비했는데 우리는 어제 받았던 신앙가지고 오늘도 우려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유통기간이 지난 겁니다.




어제 신앙을 오늘까지 이어서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어제 하는 대로 믿으면 그게 신앙이라 알고 있어요. 주체가 내가 되는 겁니다.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서 내 신앙,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내 천당 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겁니다. 옆 사람이 안 도와 준다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의 주특기죠. 욥도 마찬가지라고요. 욥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방금한 이야기를 길게 해봐야 멀리서 왔다고 피곤도 하고 잠도 오니까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그림을 두 가지로 그리겠습니다. 하나의 측면도, 앞에서 본 그림과 위에서 본 평면도를 두 가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서 사는데 어떤 법도 없고, 십계명도 없고, 율법도 없고, 성경책도 없고, 아무 없던 시절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자, 경외했을 때에 신의 세계는 신은 여기 있습니다. 구름 위에 신이 계시고 사람들은 이렇게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서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게 측면도거든요. 평면도는 뭐냐 하면, 앞에 텅 비어있어요. 텅 비어있고 사람들은 여기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어요. 오늘 십자가마을 참석 안 한 사람들은 그림 못 봐서 못 알아듣는데. 




위에서 보면 안에 빈 공간이에요. 옆에서 보면 신이 있지만 위는 텅 비어있습니다. 텅 비어있는 여기에 공간, 그 공간을 통해서 이렇게 오고, 공간을 통해서 이렇게 오고. 그래서 신의 내려진 뜻을 잘 전달, 전달하면 이것이 의인이고, 만약에 신의 뜻을 옆에 사람 전달 안 하고 자기 것으로 소속시키면 이게 죄인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어렵지요. 뭐냐 하면, 지금은 물건을 하나 살 때에 안경을 살 때 돈을 주고 사잖아요. 돈의 가치와 안경 가치가 일치될 때 돈 주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옛날에는 신이 내려주신 그 복을, 그 축복을, 신의 선물을 옆 사람에게 무상으로 줌으로써 옆 사람에게 신의 선물이라는 이름이라 하면서 전달함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가진 자가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그 받은 사람은 어떤 의무가 있느냐 하면, 옆 사람에게 또 전달해야 돼요. 이것을 가지고 ‘증여’라고 합니다. 영어로 ‘GIFT’라 하죠. 선물이죠. 은사죠, 선물. 신으로부터 내 몸과 내 건강과 내 모든 물질적인 복이 신으로부터 받았던 선물을 받았기에 신으로부터 이층이죠. 일층이고. 이층으로부터 받았던 그 무상증여는, 신은 보답을 원치 않습니다. 신은 순수증여기 때문에 증여한다, ‘그냥 준다’ 이 말 아닙니까.




신은 순수증여기 때문에 신에게 받은 것을 도로 신에게 드리면 이건 반칙이에요. 반칙입니다. 신에게 받은 그 기프트, 선물은 옆 사람에게 나눠줘야 돼요. 나눠지면 그 옆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될 의무가 있고, 그렇게 해서 한 바퀴 돌면 그 사회는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는 겁니다. 어떤 특정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고,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돼요.




이럴 때 더욱더 이 모든 구성원들은 신의 은총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고대사회가 이뤄진 겁니다. 이게 여러분,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뭐라 돼 있어요?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뭐라 했습니까? 남에게 대접받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미 욥기에 나오는 신학이 산상설교에 나오지요.




누가복음 14장 13절을 봅시다. 맞는가 모르겠어요. 14장 12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보세요. 자기를 청할 때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그 다음에 뭡니까? 네게 갚으면 안 돼요. 이것이 안 돼요. 베풀어 준 사람이 도로 갚으면 안 돼요.




그 사람은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풂으로 말미암아 이로써 신의 순수증여, 신께서 아무 대가 없이 주시는 그 자비가 그대로 이 사회 구석구석에 어두운 곳까지 가난한 자에게 녹아 남아 있을 때, 그때 그 고대인들은 그것을 의인된 사회, 하나님의 축복된 사회라고 본 겁니다. 하나님 계시가 없을 때. 그걸 본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욥기를 공부를 안 하고 이래 해버리면, 에이 하고 누가복음 14장부터 읽어보는데 이거 뭐, 십자가 끝났는데 이따위야.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십자가 졌다면서 이거는 내 안 본 걸로 넘어가겠습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이런 것을 바탕을 안 해도 십자가의 의미가 밝혀진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방금 14장 12절, 13절 말씀.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하는 이 말씀대로 그대로 지금 우리가 삽니까? 못 살잖아요. 그러니까 로마서 3장에 뭐라 하냐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걸 가지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나 성경 모르는 사람에게 들이대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다 죄인이라 하니까 내가 언제 교도소 갔는데, 난 파출소 간 적도 없다. 이래 되거든요.




이것은 인류 대대로부터 내려오는 근본적인 이웃사랑의 이런 상태, 이런 상황을 놓치고 모르기 때문에 자본주의사회에서 죄진 거 없다 이래 되는 거예요. 나 술 먹어도 술주정 안 한다. 하고 똑같은 겁니다.




그런데 이 증여의 사회인데 신이 내려준 걸 신은 받지를 않아. 일본작가가 쓴 소설에 보면, [어린 사환의 신] 하는 소설이 있는데, 초밥 집에 사환, 심부름하는 애 있잖아요. 걔가 초밥이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초밥이 6엔 하는데 개는 4엔 밖에 없어서 돈이 없어서 그걸 못 먹고 안타까워 집에 가니까 그걸 보고 있던 어떤 점잖은 신사분이 걔를 알아서 초밥 먹고 싶다는 걸 알고 주인한테 이름을 안 밝히고 내가 무조건 돈 대줄 테니까 걔 먹이세요. 그러니까 걔를 불러다가 초밥 주인이 막 먹였거든요. 먹이니까 걔는 그때부터 뭘 생각하느냐 하면, 비로소 신을 생각하는 거예요. 아하.




보통 사람들은 내가 했다. 밝히고 그리고 나한테 갚아야 된다. 이거 초밥 먹는 대신 공부 잘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훌륭하게 살아야 돼. 그래야 초밥 먹인 보람이 있는 거야. 라고 뭔가 반대급부를 원하는 게 있는데, 아무것도 없이 먹고 싶은 초밥을 그냥 먹을 때 걔는 신의 순수증여를 처음으로 맛 본 겁니다. 값없이 준 은혜를 처음으로 맛 본 거예요.




그렇다면 순수증여가 남아 있다면, 걔가 만약에 A라면 B라는 이웃을 볼 때에 그냥 A에서 B를 보는 것이 아니고, 순수증여한 신을 거쳐서 B를 바라보기 때문에 B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해서 베풀어주는 거예요. 이게 고대사회에 하나님의 뜻이 없을 때 하나님 계시 없을 때 고대사회가 유지되는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욥기에 보면 국가관이 없어요. 국가관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베풀어주는 국가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신과 더불어 함께 사는 거예요. 이 신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성경에서 이 신을 가지고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하는 겁니다. 못하는 게 없고. 뭐든지 내 뜻대로 해준다는 게 아니에요. 내 뜻이라 하는 게 ‘나’라는 인식은 근대 16세기, 근대서양주체사상에 나오지, 그전까지는 내 뜻이라는 게 없어요.




신의 뜻이 나에게 쏟아지면 그걸로 족하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자연세계에 움직이는 그 자체로 완료된 것, 그걸로 완결상태를 만들어진 하나님. 그러니까 미흡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체로써 욕심낼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유지하는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엘 샤다이 하나님이라 합니다.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에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범위가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에요. 현재 주어진 욕심내지 말고 주신 것이나 범사에 감사하면 그걸로 족하다고 그걸로 머물러 있는 그런 신을 그들은 욥과 욥의 친구들은 알게 된 겁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맘껏 남을 베풀어야 되는데 그럼 이런 상태에서 의인과 죄인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고마운 줄 알고 잘하게 되면, 이 모든 자연 상태가, 여기 욥기 한번 봅시다. 욥기 1장 다시 돌아가 봅시다. 아이, 이야기가 어려워져버렸네.




여기 욥기에 5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자식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이래 돼있지요.




욥은 의인이고, 의인이란 말은 무엇이 죄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물어야 돼. 내 혼자 하면 재미없어. 여러분, 욥이 뭐가 죄라는 걸 압니까, 모릅니까? 알기 때문에 죄짓지 말라 번제한 거예요. 혹시 무의식중에 죄지으면 용서해 달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욥이 평소에 그런 기도를 했고, 제사를 했다는 말은 현재 욥이 누리고 있는 것은 그러한 제사를 드린 반대급부로써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런 욥에게 자식 죽었다 이 말은 자기가 있는 시스템, 신학체제에서 안 맞는 거예요. 맞질 않는 거예요. 강조하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슬슬 열 내기 시작한다. 제사를 안 드린 게 아니라니까요. 자식들 보고, 너희는 나처럼만 돼라 말이죠. 이 철딱서니 없는 애들아. 나처럼만 돼라. 자기는 뭡니까? 나는 어떻게 부자가 되고, 어떻게 풍족해도 절대로 그것 때문에 교만하고 자만하지 않고, 행여나, 행여나 우리 쪽에 죄 진 게 있다면 죄 용서해 달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상태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시스템이, 아까 제가 말했듯이 그게 옳기 때문에 당대에 의인이며 많은 재산을  분 거 아닙니까. 복을 받아서. 그 당시 엘 샤다이의 사고방식체제에서 말이죠. 욥이 지금 앞뒤가 맞아 들어가잖아요. 자기 신학대로 세상이 움직이잖아요. 자식들 죄짓지 말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의 그때그때마다 응답 받았기 때문에 자식들 안 죽었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식 죽고 재산 날아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분명히 자기 시스템, 신학체제 안에서는 자기가 죄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없는데 뭐. 없는데. 없는데 어떻게 해요.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에 가다가 교회 바꾸고 난 뒤에 집구석 말이 안 돼요. 완전히 조져 놔 버렸어.




옆에서 교회에서나 옆에서 교회 권사가 와서 당신, 죄 진 거 있으면 끄집어내봐라. 당신이 모르는 죄 있을 것이다. 라고 윽박지르잖아요. 그 윽박지르는 역할을 누가 하느냐? 욥기에서 누가 하느냐? 욥의 친구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욥의 세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신학시스템 때문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우발적으로 생긴 그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해석불갑니다. 해석불가 같으면 겸손하게 못하면 되지, 그게 아니고 네가 잘못했다는 거예요. 네가 죄 지은 게 있기 때문에 벌 받는다는 겁니다.




욥기가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 복음과 연관을 시키려면 우리는 욥기에 더욱더 철저하고 깊숙한 거기에 집착을 해서 그 내막을 들춰내야 됩니다. 이 욥기에 신이 무상으로 주신 그리고 무상으로 줘 놓고 반대급구를 받지 않을 정도로 그냥 주시기만 하는 그냥 베푸시기만 하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완벽성. 그 완벽성 속에 인간들은 하나의 자연물처럼 그냥 곱게 누리면서 하나의 꽃봉오리처럼 코스모스처럼 청초롭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 주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옆에 A에서 B, B에서 C, C에서 D. 전달, 전달되는 과정에서 여기서 만약에 욕심이 생겨서 안 주고 자기 것으로 꼬불쳐 놓으면 이러면 뭐 됩니까? 이건 증여의 사이클이 끊어지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합니까? 이걸 가지고 죄라고 합니다. 죄. 돈을 탐낸다든지, 남의 토지를 탐낸다든지, 남의 부인을 탐낸다든지, 남의 가업을 탐낸다든지, 도적질한다든지, 거짓말한다든지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흐름이 자기의 흐름을 사이클을 도중에 갑자기 끊을 때, 주로 어떤 경우에 끊습니까? 나의 욕심이 갑자기 딱 분열되면, 내가 미쳤나. 저 인간들 주게. 아, 나는 니는 팔자 좋아 하지. 내가 못 도와줘. 나는 안 도와줘. 니가 (      ) 팔자 밖에 안 되는데 내가 왜 도와주는데. 나는 내가 키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한테 뇌물을 바치면 바쳤지 저 인간한테 아무 나한테 보탬도 안 되고 내 출세에 도움도 안 되는 인간에게 내가 내 귀한 돈을 줘. 안 줘. 귀찮게만 해. 라고 그 사이클, 자기의 사이클을 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면 그것을 뭐라고? 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과 욥은 바로 그 죄가 있는가? 서로가 머리 맞대고 탐색에 들어가요. 하나님의 자비의 사이클을 욥이나 욥의 친구가 끊은 적이 있는가? 없어요. 욥은 그런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욥이 그런 적이 없다면, 그러면 욥의 고난은 이건 낯선 침투하는데 외부에서 정말 우리 가운데서 엘 샤다이가 아니고, 다른 하나님의 다른 노선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는 몰라요.




몰라서 답답한 욥은 뭐냐 하면, 다시 창조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그걸 ‘혼돈’이라 하는데. 이해 안 되도 할 수 없다. 한 시간 해서 이해되겠나. 많이 남았는데.




혼돈에서 창조가 생기거든요. 근데 창조가 되면, 혼돈에서 창조가 되기 때문에 창조에는 혼돈이 남아 있습니까, 안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 창조는 혼돈에서 처음에 창세기에 나오잖아요. 모든 것이 혼돈에서 창조가 됐기 때문에 창조가 된 이상 혼돈이 있으면 안 되지요.




그럼 창조는 뭡니까? 질서 아닙니까. 질서에 혼돈이 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욥은 이렇게 알고 있는데 욥에서 갑자기 뭐가 왔습니까? 고난이 왔어요. 왔으면 창조, 자기들끼리 머리 맞대고 해결 안 나지요. 그러니까 욥은 어디로 돌아가느냐? 다시 혼돈 돌아가는 거예요. 나를 태어나기 전에. 다시 원위치. 리와인드. 되감기 합시다. 주여, 되감기합시다.




만약에 지금까지 욥이 몇 살인지 모르지만 칠십이라 하면, 한 살부터 칠십 때까지 가지고 있던 이 질서는 칠십 년 경험에 의하면 이게 정답이에요, 정답 아니에요? 정답이죠. 확인해 봤거든요. 자식을 위해서 나쁜 짓 안 하고. 늘 정답인 줄 알았어요. 그거는 자기만 한 게 아니고, 이웃 사람들 다 동의했습니다. 아, 완벽하다. 심지어 하나님도 인정했어요. 욥 같은 순전한 사람 못 봤다. 완벽했다 이 말이죠.




완벽했는데 만약에 칠십이라면 예를 들어서 칠십 세 때 이런 고난이 왔다면, 그럼 한 살 때부터 칠십 때까지에 진리라고 여겼던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어이 됩니까? 도루묵이 되는 거예요. 그때는 새로 다시 저를 엄마의 모태로 태어나지 말고 다시 새로 시작합시다. 이래 되는 거예요. 해서 고난까지 포섭이 가능한 고난까지 해석이 가능한 그 시대로 다시 시작합시다. 라고 했는데 욥의 친구들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왜? 그들은 낯선 고난에 동참을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개별자, 떨어져있기 때문에 내 아픔을 손톱 빠지는 아픔을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설득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 욥의 친구가 왔을 때는 친구로 위로삼아 왔습니다. 그게 [사막에서 대화] 아닙니까. 사막이라 하는 것은 문둥병 걸려서 쫓아냈으니까 사막이라 하는데 위로하러 왔다가 나중에 끝날 때 가서 원수가 되었지요.




고난을 품은 자와 고난이 없는 자. 여기서 사도 바울 신학에 ‘안과 밖’이란 개념이 성립되고, 그것이 그 기준이 뭐가 됩니까? 난데없이 주어진 뭡니까? 고난. 고난에 의해서 아무리 옆에서 해석하려고 해도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욥도 해석이 안 돼요.




그래 욥은 혼돈, 창세 이전부터 다시 원위치,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규명합시다. 이 세상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 나도 좀 압시다. 고난이 아픈 정도가 아니고, 지금 욥의 아픔은 뭐냐 하면, 욥이 아프다는 것도 아픈 거지만 고난이 왜 주어지느냐? 고난의 토대를 몰라서 괴로운 거예요. 기준을 모르니까.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버리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을 공격하나 셈이 돼버려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공격해버렸어요.




아브라함 언약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만 알고 그 가족들만 알아요. 근데 같은 시대에 사는 이 우스 땅이라. 우스 땅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뭐냐 하면, 에돔, 아니 에돔이 아니고, 그 바깥에 있는 그러니까 변방에 있는. 그러니까 이거는 이방족이에요. 이방인이에요. 이방인 욥이 아브라함 언약에 대해서 내막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 언약과 어떻게 접촉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욥기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이방인 아닙니까. 우리가 유대인 아니잖아요. 이방인들이 텅텅 비어있는 게 아니고, 이방인 나름대로의 어떤 신 개념이 있어요. 하나님 개념이 있다고.




자본주의사회에서 이 신과 그리고 여기 있는 증여의 사이클이 주체사상이 깨진, 그걸 이야기하고 쉽시다. 벌써 조시는 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혼돈이에요.




신이 증여, 순수증여, 대가를 받지 않는 그냥 베푸심, 그냥 주는 대로 먹는 거예요. 그냥 주시는 이것을 역할 옆 사람 A, B, C에게 전달, 전달해야 될 걸 이것을 도중에 신이 내려준 증여를 중간에 가로 채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게 왕입니다. 왕이 나중에 국가가 되고, 왕이 등장하면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은 왕에게 종속이 되고, 왕은 여기서 증여하면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세금을 뽑아냅니다.




세금을 뽑아내면서 그때부터 이 사람들은 왕의 주체를 본받아서 각자각자가 자기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면서 그때는 안경 값이 만약에 만 원이라면 전에는 안경 값이 만 원이라면, 이만 원 주던 것이 딱 그 값어치에 맞도록 만 원이에요. 등가식에 의해서. 이게 자본주의사회입니다. 동일한 제품에 동일한 가격.




그러니까 옛날에는 물건을 줄 때 물건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정이 가고, 정성이 가고, 신에 대한 은혜가 가고, 사랑이 담겨서 사랑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써 어떤 떡 하나, 팥죽, 또는 두부, 이웃끼리 왔다고 주는데 지금은 뭐냐 하면, 이것이 물건값만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그게 주체가 확정한 오늘 시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심성에 맞아요.




그런 주체가 있는 자본주의사회의 주체화가 절대화된 사람이 욥기를 포함하고 있는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 알까요? 그러면 욥기를 모르는 상태의 십자가는 뭡니까? 주여, 십자가를 믿어 줄 테니까 천당 보내 줄 거요, 말거요? 하고 또 자본주의 관계에서 그냥 맞교환하는 식으로 십자가를 그렇게 생각하고 복음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교회 왔습니다. 복음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 나 죽을 때 봅시다. 교회 안 나와요. 왜? 자기가 얻을 거 얻었고 챙길 것 챙겼으니까. 자본주의사회에서. 종교가 하나의 기능이 돼버렸어요. 구원도 하나의 기능이 돼버렸어요. 기능 발휘가 돼버렸어요.




이게 욥기를 모르고 자기 자신의 원초적인 것을 모르고 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예수 믿는 것도 죄라 하면, 예수 믿는 게 왜 죈데. 이래 나오는 거예요. 욥기 식으로 한다면 예수 믿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누가 믿느냐, 누가 믿게 했느냐에 따라서 죄가 돼버립니다. 내가 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다고 십자가 믿는다면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다음 시간에는 엘 샤다이에서 어떻게 여호와로 넘어오는지 그거 한번 생각하고 잠시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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