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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5 21:51:48 조회 : 4199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8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2.36.190.11)
 

0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8강)


이근호 목사 강의




자, 앉읍시다.


이유 없이 찾아온 고난. 다른 말로 하면 악입니다. 나쁜 것이죠.


이유 없이 찾아온 나쁜 것은 이유 없이 찾아온 좋은 것에 의해서만 해결 됩니다. 




이유 없이 나쁜 일이 왔다고 본다면 그 해결은 이유 없이 찾아온 하나님의 의로움과 은총으로 깨끗하게 해결 납니다. 단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내가 나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것을 포기하고 그 이유 없는 세계한테 주도권을 양도해야 될 필요가 있어요. 




가만히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날 건드리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당신이 날 건드리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병 주고 그 사람이 약을 주더란 말이지요. 약을 주니까 그 약을 받고난 뒤에는 깨끗이 되었잖아요.




그럴 때 병 주고 약 준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이제 더 이상 네 인생 네가 쥐고 다니는 것 포기 하시지. 포기 안하면 또 병 줄거야!’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줘서 하는 것은 우리가 육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 자아를 육적으로 꽉 잡아서, 다른 말로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절제해도 내가 절제하고, 천당 가도 내가 내 힘으로 나를 천당에 밀어 넣는다.’ 라는 인식 자체를 바꾸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며, 창세전부터 예정되었기에 내가 태어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도 알고 싶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숙제가 나한테 덮쳐서 주의 뜻대로 내가 알게 되었고, 마지막 나의 구원 문제도 주님의 일이나 내 문제는 아니다.’ 라는 것을, 주도권을 몽땅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되는 겁니다.


이걸 욥에게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 시대의 모형이니까 욥에게 미리 앞당겨 온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을 제가 읽어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지금 여기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해서 죽었다는 그런 객관적 사실이 우리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믿으라!’고 하면 그 지식을 수용합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신앙은 뭔가 바뀌어져야 돼요. 뭐가 바뀌는가 하면,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다.’ ‘알겠습니다. 알았어요.’ ‘죽었다니까.’ ‘글쎄 안다니까요. 내가 믿어 줄 테니까 가세요.’ 이렇게 떠미는 것이 아니고, ‘어허. 내가 네 대신 죽었다니까.’ ‘어허. 이양반이 말귀를 못 알아듣나. 알았다니까. 그래.’ 이렇게 되거든요.




이게 아니고 그 뒤에 뭐냐? 그렇게 된 사람은 이제는 “저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 뒤의 말이 재미있어요. 주를 위해 살라는 말이 아니고, ‘주’에 담긴 것을 해설을 붙여 놓았습니다. 뭐라고 해설을 붙여 놓았는가 하면,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라는 아주 귀찮은, 필요 없게 보이는, 그런 말을 구태여 안 해도 될 문구가 들어가 있지요.




쉽게 말해서 ‘너 자신을 내가 뺏어가겠다.’ 이 말입니다. 너 자신이 못한다면 내가 강제로라도 너 안에서 너 자신을 탈출시키겠다. 뽑아내서 기어이 내 사람 만들겠다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죽었거든. 그래서 나는 너의 주가 되거든.’ 이 말씀에, 우리는 ‘알았다고요.’ 이럴 것이 아니라 ‘다 가져가세요. 일을 벌이시겠다는데 제가 어쩌겠습니까? 가라면 가고 오라고 하시면 오겠나이다.’




요 기분 하루에 0.5초 갑니다. 전에는 2초 갔는데 이제는 많이 줄었어요. 왜? 시대가 자꾸 변하니까. 요런 기분 하루에 0.5초 가면 신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에 0.5초. 한 달이라도 봐 줄게요.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은, 그 정보 하나를 머릿속에 담아놓으라는 말이 아니고, 그게 담긴 채 이미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사는 모든 권리는 그 순간부터 박탈당했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내 자신을 위해 사는 거 일체 없기.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런 소리 하면 “목사님! 그게 성경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고 분명히 맞는데, 이게 현실상 나는 여전히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날 위해 사는 것 외에는 달리 주를 위해 산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를 않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대답하기를 “그게 정상입니다.” 왜? 내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고 그것마저 전담 처리반이 있어서 ‘너, 되나, 안 되나?’ ‘안됩니다.’ ‘너 자신을 포기하고 주를 위해 사는 것이 되나, 안 되나?’ ‘턱도 없습니다.’ ‘안되지?’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되게 할게.’ ‘어떻게요?’ ‘기다려 봐. 내가 되게 할 테니까.’ 이것마저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가 알아서 내 인생 처리하고 관리하려고 하지 마시고, 이 성경말씀 내가 지키려고 하지 마시고, 이 성경말씀 전담반 따로 있습니다. 그분이 쳐들어와서 다 처리하는데,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면 우리에게 강력한 반발심,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나 자신의 권리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강력한 저항심이 있는 대로 다 쏟아 나올 때 모든 게 다 나온 거예요.




곪은 상처 위에 연고 바르면 고름 안 낫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아내가 사정없이 쥐어짭니다. 그러면 누른 고름이 탁 터져 나오지요. 밥 맛 없는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럴 때 아프지만 속이 다 시원해요. 이제 성공했다. 짜는 사람들은 그렇게 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얇은 껍질로 고름을 자꾸 덮는 일에 겁겁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다음은 주를 위해서 할게요. 계속 덮는 거예요. 수련회 가려고 했는데 가기 싫다. 다음에 갈게요. 이런 식으로 계속 덮는 거예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대구 00교회에서 설교자로 있을 때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상담을 했어요. 남편을 전도해서 교회 와서 설교를 같이 듣고 싶은데, 주일만 되면 남편이 약을 올리듯이 자꾸 등산을 가자는 거예요. 주일날 부부가 찢어지면 이게 무슨 부부냔 말이지요. 뭘 해도 부부가 같이 가야 되는데, 한 사람은 교회가고 한 사람은 등산가고 그게 뭐가 재미있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서로 계약을 했데요. 두 번 교회 나와주면 두 번 등산 같이 가주고.




여 성도분이 이런 문제로 제게 상담을 했어요. ‘남편 교회 데려오기 위해 제가 남편 따라 등산을 가서 산에서 기도해도 안식을 지키는 것 맞지요?’


우리 장로님께서 매주 공중기도 하실 때 이렇게 해요. ‘사정이 여의치 못해 참석 못한 성도들이 어디 있더라도 성령께서 지켜 주시고 주님을 생각하게 해 달라’고.




물론 주님은 우리 인간의 기도는 절대 안 듣지요. 그런데 이걸 이용하지요. 내가 안 나와도 그런 기도 하니까 내 생각이나 장로님 생각이나 똑 같네. 이렇게 자기변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답변하기를, 제가 아주 젊을 때, 30대 목회 초반 때 일이었어요. ‘지금 집사님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상담조차 할 생각 못하고 몰래 그냥 가버립니다. 뭔가 고민이 되어서 물어보고 하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일을 개시했어요. 그러나 단지 앞으로 줄일 것은 어떻게 내가 해주면 반대급부로 교회 나와 준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내 선에서 관리하려고 하는 것은 좀 줄여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남편이 교회 나오거든 고마운 줄 알고, 안 나오면 당연한 줄로 알고 그 일 조차 하나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이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 사는 태도가 되는 겁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그냥 맡기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자기 주체가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변하더라도 고정된 주체를 가지기 때문에 자꾸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주의 일인 냥 그 증거를 자꾸 수집하려는 버릇이 있어요. 그게 ‘간증 집회’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 얼마나 잘 지키는가? 간증거리 얼마나 되는가? 옛날에는 기도하면 방언이 터지던데 요즘은 왜 안 터지는가? 이런 것 자꾸 수집하려고 하는데, 이런 것 백날 수집해도 소용 없습니다.




욥기로 들어가서 3장에 보면 욥이 자기 존재기반도 부정하지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할 때, 4절에 보면 1번 타자가 등장합니다. 삼성에 1번 타자는 박한이가 나옵니다. 4번 타자는 누구입니까? 심정수죠. 홈런 19개. 이게 엘리후입니다. 3번 타자가 누구냐 하면 양준혁이에요. 욥기에 3번 타자는 소발인데 나이도 어리고 영 안 돼요.




욥기에 보면 1번(엘리바스), 2번(빌닷), 3번(소발) 타자가 돌아가면서 세 번씩 나와서 공격을 합니다. 수비는 누가 합니까? 욥입니다. 그런데 심판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심판이 필요해서 하나님께 심판을 봐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소식이 없어요. 이렇게 해서 게임이 되겠습니까?




1번 타자 엘리바스가 치니까 땅볼입니다. 땅볼을 쳤는데 심판이 없으니까 안타라고 우겨요. 그래서 수비하는 욥이 아웃이라고 합니다. 심판이 없으니까 서로 우겨요. 둘 다 주체가 강해서 양보 안합니다.




아까 말했지요. 엘 솨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실체거든요. 안정된 주체 아닙니까. 땅볼 쳐놓고 혼자 그라운드를 다 돌아버려요. 그래서 홈런이라고 하고 있다고. 심판이 없으니까. 욥이 반칙이라고 소리쳐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답답해서 욥이 하나님께 심판 좀 봐달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이 욥기의 흐름입니다. 간단하지요. 이야기 끝냅시다. 야구 게임이에요. 뭐 없다? 심판이 없는 게임.




심판 없는 게임이 되면 개판이 됩니다. 그런데 수비하는 욥이 불리해요. 왜 불리한가 하면, 타자가 땅볼을 쳤는데 욥이 관절염이 걸려서 다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서 공을 따라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땅볼 쳐놓고 온 그라운드를 돌고, 또 돌고 1점 나고 해서 1회전에 15점이나 나버렸어요. 그래도 욥은 공도 못 찾아서 헤매고 있어요.




그래서 이 엉터리 같은 게임을 정리 좀 해 달라고 중재자를 원하는 겁니다. 욥기 별 것 아니지요. 이걸 보고 하나님과 사단이 하늘에서 야구 참 재밌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사단이 더 재미있어 해요. 욥이 지고 있으니까. 1회전에 벌써 15대 0이니까. 9회전까지 가면 50대 0이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단이 분명히 자기가 이길 거라고 여겨요.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지요. 아직 9회 말 안 끝났다. 군산상고는 9회 말 안 끝났으면 역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격적이고 존엄한 인간을 가지고 윗동네 하늘나라에서 게임을 즐긴다는 게 우리 존재 가치를 상당히 모독하는 발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병정놀이의 장난감 졸도 아니고, 체스 판의 졸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단은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처음 욥기 1장을 보면, 욥의 재산 날린 게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굽니까? 하나님이 사단에게 맡기고 사단이 욥의 재산을 날렸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단은 어떤 권리가 있다? 재산 몰수할 권리가 있다. 두 번째 사단은 뭘 하느냐? 자식을 죽입니다. 한꺼번에 다 죽이고 재산 다 날립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면. 세 번째 우리의 건강도 사단이 친다.




그런데 욥이 이런 영적인 일에 대해서 육적으로 대처할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있다고 기껏 끄집어 낸 것이 욥의 친구들 아이디어였습니다. 뭐냐 하면, 회개하면 복 준다는 거예요. 그것 안 통합니다. 회개하면 복 주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인간 경험상 그렇게 되고자 하는 여망에 불과하지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번 타자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등장합니다. 엘리바스가 하는 이야기가, 7절을 보세요. “생각하여보라.” 아참, 이것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을 먼저 해야겠어요. 2장 11절을 보면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1번, 2번, 3번 타자까지 왔습니다. 4번 타자는 아직 안 왔고.




이 세 친구가 왔을 때 처음부터 이들이 잔소리 한 것이 안입니다. 친구를 못 알아봤어요. 왜? 얼굴 모양이 달라져서. 이 때 세 친구와 욥은 일주일 동안, 한 두 시간이 아닙니다. 장례식장에서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억지로 슬픈 척하면서 2시간 버텨야 한다는 것. 이거 힘듭니다. 조의금 주고 빨리 나와야 돼요. 거기서 슬픈 척하고 있다는 것이 엄청나게 힘들지요. 특히 상주들은 더 힘듭니다. 친구가 나타나면 잠잠하다가 “아이고, 아이고 ---” 하면서 곡을 해야 되고. 차라리 녹음기를 틀면 좋은데.




인간은 개별자이기에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슬퍼도 그 슬픔에 참여가 안 됩니다. 이미 개별자기 때문에. 이게 인간의 육적인 한계에요. 예수님이 고난 받았다. 우리는 그 고난 모릅니다. 왜? 예수님 몸 딴 몸이고 우리 몸 딴 몸이기 때문에.




강제로 성령이 와서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도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고난을 모릅니다. 언제 주님의 고난을 아느냐? 우리가 한창 교만할 때, 극도로 교만할 때 비로소 그 교만으로 인하여 주님이 상처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 그 때 비로소 미안한 감으로 참여되는 것이 우립니다. ‘주님 당신만 졌나. 나도 십자가 졌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미안합니다. 제 때문에 당하셨군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왔을 때 스데반 집사처럼 과감하게 순교도 되지요. 순교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저는 진작 죽어야 될 못난 몸인데’ 하는 마음으로 죽어야지, ‘나 순교한다. 사진 찍어라.’ 이런 것은 없어요. 그동안 산 것도 모두 은혜였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죽는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개별자가 되어서 남의 아픔에 참여를 못합니다. 단 참여될 경우에는 뭐냐 하면, 평소에 동질성을 갖고 있는데, 이 동질성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차이가 나요. 우리가 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왜 우리와 욥 네가 차이가 나느냔 말이지요.




평소에 하하 웃고, 장난치고, 전화하고 하던 그 친구가 아프칸에 가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사람이 슬픈 이유가 뭐냐 하면, 과거와 비교해 보니까 그 차이진 만큼 슬픈 거예요. 아, 그 때 참 좋았는데. 사람이 이미지가 있거든요. 과거 그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은 이렇게 생겼고, 지금은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예상 밖으로 바짝 말랐다든지, 너무 부었다든지 이렇게 나오면요 ‘아이고, 아이고 ---’ 이렇게 됩니다. 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망가졌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슬픔이란 말이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품고 있던 자기 기대가 차이나는 것이 억울해서 자기한테 분통을 터뜨리는 겁니다. 왜 세상은 내 기대대로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욥이 아프다는 소식 들었지만 이정도로 아프고 처참하게 망가질 줄은 미처 몰랐다는 거예요. 내가 미리 예상한 예상치도 안 된다는 실망감에서 속이 터져서 우는 겁니다.




여러분, 따져보세요. 죽은 사람이 슬프겠습니까, 산 사람이 슬프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살아남은 사람이 그동안 밑천 들인 것이 아까워서 우는 겁니다. ‘이렇게 죽을 것 같으면 그 때 죽지 왜 이렇게 고생시키고 혼자 갔노.’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새 남자들 60넘어 70이 되어도 부인과 사별하면 1년 내에 새 여자 얻습니다. 왜? 수명이 길어졌으니까. 이걸 과거 서울대 생물학과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명이 긴 만큼 두 번째 인생을 50대부터 새로 마련해야 된다.’는 내용의 책을 냈습니다. ‘새 장가 가라’ 이 말입니다.




동물은 생식으로써 수컷의 임무는 끝납니다. 그러나 남성은 생식 위주가 아니라 청춘 그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수명이 길어졌다는 그런 이론을 제시했어요. 그 사람이. 쿨드라는 하버드 대학의 세계적인 생물학자의 제자인 그 사람이. 지금은 이화여대로 옮겼지만.




그만큼 생명이 길어졌으니까 아름답게 채워야 되는데, 생물학적으로 채운다는 것은 바로 옛날 기대했던 그 청춘을 인위적으로 메꿔나가는 거죠. 지금 딴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어쨌든 죽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지요. 살아남은 사람은 상대에 대한 그 기대감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 허물어졌을 때 그 때 실망감이 오죠. 또 반대로 죽도록 미워한 인간이 죽었을 때 만세를 부르도록 기쁨이 넘쳐요. 자기 뜻대로 됐으니까. ‘잘 죽었다. 영감아!’




욥의 친구들이 아직도 슬퍼한다는 것은 욥을 자기 친구 부류에 합류시켜 주고 있다는 겁니다. 남으로 여기지 않고 어디까지나 보듬어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관성의 법칙이 있는데, 물리학에서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움직이면 계속 움직이려는 법칙이 있어요. 이것을 막는 것은 반작용 아니면 막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을 뉴턴이 이야기했을 때 기존의 모든 아이디어를 뒤집는 거예요.




사람은 자력으로 내가 움직이면 움직이고 멈추면 멈춘다는 주체를 자아로 보는 인식의 세계에서 자아를 없애버리고 거기다가 힘의 관계를 전 우주에다 확대시켜 버렸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멈추고 싶은 것은 반대 힘이 왔기 때문에 그렇지 내가 멈추고 싶어서 멈춘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식의 획기적 전환입니다. 주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주체를 없애고 주체 자리에 우리 전체를 덮어버리는 힘의 관계, 힘의 방정식이 내 주체를 대신해 버리는 겁니다.




그처럼 이것이 정신까지 이어져버리면 정신이 에너지에 의해서 되는데, 결국은 사람은 차이가 나면 이 차이나는 것에서부터 슬픔이 오고, 이 슬픔은 빨리 차이를 메움으로 말미암아 이 슬픔을 원상 복귀해야 될 어떤 본성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로 하여금 실망케 하는 당사자로 하여금 분통을 터뜨림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내가 받은 당신이 내 기대에 어긋난 것에 대해서 내가 여기서 내 에너지를 발산함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 안정된, 균형된 상태에 돌입하는 겁니다.




말을 어렵게 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공부 못하는 놈은 회초리로 때리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속이 다 시원하다.’ 공부 잘 해야 될 인간이 기대 밖으로 못했을 때는 화가 나고, 그 화는 매로 터뜨려야 그게 빠져나오면 ‘너는 5등할 놈이 아니고 10등할 놈이야!’ 하고 스스로 조정하는 기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1주일 동안 울면서, 11절 보세요. 얼마나 우정이 대단한지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왜? 얼굴 형체가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몽타주가 안 맞아. 이미지하고 영 달라요.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깜짝 놀랐어요. “7일 7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7일 7야니까 일주일 아닙니까.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충격을 받았습니다. ‘니가 니가?’ 경상도 말인데, 서울 사람들은 이해 못합니다. ‘당신이 그 때의 당신입니까?’ 이런 뜻이거든요. 경상도 말은 간단해요. ‘니가 니가?’ 다른 말로하면 ‘가가 가가?’ 그러면 답변이 ‘가가 갑니다’(그 아이가 그 아이입니다).




할 말이 없어요. 그 전에 유로하려고 잔뜩 준비한 그 모든 파일, 자료가 다 소용이 없어요. 영 격에 안 맞아요. 그래서 먼저 욥이 입을 뗍니다. 일주일 뒤에. 입을 떼면서 ‘아무 이유 없이 억울하게 이렇게 당했다.’ 하나님께 고문 받는 거예요.




나중에 고문을 누가 하는가 하면 위로하려고 왔던 친구들이 고문을 합니다. “꿇어! 네 죄를 알렸다!” 이러고 있어요. “저는 죄 없는데요.” “이게 아직도 멀었구나. 더욱 주리를 틀어라.”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적이 하나 더 생겼구나.”




그러고 있는데 2번 타자가 ‘1번 타자 형님 더 조으세요. 아직 멀었습니다.’ “이래도 네 죄를 모르겠는가?”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나도 당하는 입장인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3번 타자가 “형님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조아라.”




그 때 4번 타자가 나와서 “고문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고문하는 너희가 틀렸다.” 죄도 없는 놈을 조은다고 죄가 나오냔 말이지요. “욥 너도 그렇다. 고문 받는 것이 잘하는 일인 줄 아나?” 고문 받으면 받을수록 자아만 더 굳어지고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 따위 소리나 하고.




그러면 자동으로 고문 받는 욥은 피해자고 하나님은 가해자가 됩니다. 둘이 짝을 이뤄요. 둘 다 가해자가 될 수는 없단 말이지요. 여기서 여러분, 십자가의 원리에 대해서 하나 알아야 돼요. 십자가는 그림자가 길어요. 두 가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그림자가 있고, 사도바울의 그림자가 있는데,




누가복음의 그림자는 피해자 입장에서 십자가로 접근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10장에 나오지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요. 여기 여러 사람이 등장하지만 생략하고 강도만난 사람과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이 연극무대 장치는 결국 강도만난 사람의 핵심은 뭐냐? 자력으로 자기를 치료할 수 없고, 거의 죽게 되었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강도 만났는데, ‘에이 시. 재수 없어. 내 힘으로 일어서보자.’ 이렇게 되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도와 드릴까요?” 해도 “볼일 보소. 내 힘으로 일어서 보자.” 이렇게 되거든요. 이 이야기에서 강도만난 사람이 타인의 도움 없이는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피해자에요.




피해자인데 그 이웃은 누가 이웃인지 몰라요. 이웃은 세트가 되어야 해요. 버거 세트 알지요? 콜라와 감자튀김, 햄버거 이것이 세트 아닙니까. 3,500원.


세트가 되어야 합니다. 뭐냐 하면, 피해자와 피해자를 도와준 사람, 무상으로 도와주는 순수 증여.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때 세트가 되어서 이웃이 등장하면서 이웃 사랑의 율법이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세트로 나서야 돼요. 어떤 세트로? 피해자가 발생돼야 해요. 그리고 그 피해자는 자력으로 설 수 없어야 돼요.




영화 찍을 때 엑스트라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에서 총 맞았으면 “으악!” 하고 죽으면 되는데 화면에 조금이라도 더 비치려고 “으악!”하고 또 살아나면 감독에게 잘립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역할은 자력으로 일어서면 안 돼요. 누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둘 사이에 이웃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이웃사랑이라는 율법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가 뭐냐? 이웃사랑을 성립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도와주시는 분으로 왔고, 예수님에 의해 도움 받는 사람은 자력으로 설 수 없는 그런 입장인 것을 자인해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봐야 됩니다. 이게 뭐냐? 피해자 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누가복음에 많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웃는 자여 슬퍼하라. 우는 자여 기뻐하라.” 자꾸 자기 백성을 이 세상의 사회 구조와 이 세상 인간들의 육적인 것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누가복음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경우는 반대에요. 가해자가 구원 받아요.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아무리 선한 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한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우리가 가해자 입장에서---




누가복음을 다시 이야기하면, 누가복음에서 피해자 중 여러 가지가 있는데, 거지 나사로도 나오고, 가출한 탕자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 퇴직을 염두에 두고 장부 조작해서 미리 아는 사람에게 재정상 혜택을 주면서 갈라먹기 하는 거예요. ‘내가 회계 책임자로 있을 동안에 장부조작 해 줄 테니까 조작해서 1억 먹었잖아. 5천만 원은 내 도.’ 이거거든요.




내가 쫓겨나기 전에, 이것을 레임덕 현상이라고 합니다. 임기 말 증상이라고 하는데, 정권 바뀌기 전에 한 몫 챙기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참으로 지혜롭다.’고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장래의 안 좋은 일을 미리 예상하니까 그처럼 지혜로운 놈이 어디 있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장래가 활짝 핀 줄 알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그 사람에 의해서 이 사람은 ‘나쁜 놈, 불의한 횡령자’라고 욕을 얻어먹으니까 피해자 맞잖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 말에 논리가 참 이상하죠. 꼬이기 시작했고, 그런데 안 꼬였어요.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할 게요. 횡령을 해서 자기 장래에 살 궁리를 미리 챙기고, 주인이 피해를 보든 그건 모르고, 내 장래가 안 좋다. 나를 살리자. 이렇게 장래를 어둡게 보고 미리 대비하는 쪽을, ‘이 나쁜 놈아!’ 하고 욕하는 너희들은, 네 장래는 밝다고 여기는 그것이, 그로 인하여 횡령한 사람이 억울하게 나쁜 놈으로 몰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이 이야기는 그렇게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예수님이 똑같은 피해를 바리새인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인간적인 그 본성을 배제하고 일하는 법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 십자가 졌다. 믿으라.’ 이런 게 없고, 반드시 우리 삶 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서 우리를 뒤집어 놓을 대로 다 뒤집어 놓아요. 완전 도둑이에요. 다 뒤집어 놓아요. 장롱 속에 뭐가 있는지, 서랍 속에 뭐가 있는지 다 뒤집어 놓아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력으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방식으로 몰고 세트를 이루어서 십자가로 다가갑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 시키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의로 인하여 예수님의 의가 무시당하고 짓밟혀서, 우리는 가해자가 되고 예수님만 유일하게 피해자가 되는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만났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이 둘이 다 나와요. 이 둘을 논리를 가지고 결합시켜 봅시다. 결합시키면 이렇게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이렇게 됩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는데, 내 안에 교만과 겸손 둘 다 들어 있습니다. 내 안에 둘 다 들어 있으니까 이렇게 까불 때는 이렇게 쳐버리고 저렇게 까불 때는 저렇게 쳐버려요.




우리가 주님 앞에 절망할 때는 격려해 주고, 교만할 때는 결박시켜 버리고. 그래서 계속 십자가만 보이게 하는 겁니다. ‘나는 안 돼. 나 같은 놈은 천당 못가.’ 할 때는 격려해 주고, ‘역시 나는 대단해.’ 이러면 우리를 꺾어 버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의 자아를 스스로 관리하려고 하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도록 인도하는 겁니다.




욥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1번 타자 엘리후가 하는 말이, 4장 7절에 보면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둔다.”




성경 말씀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 나오지요. ‘팥 심은데 팥 나고 콩 심은데 콩 난다.’는 속담도 있지만,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을 1번 타자 엘리후가 나와서 말했단 말이지요. 했을 때 이게 맞는 말입니까? 욥기를 주석하는 사람들의 거의 100%가 이게 맞는 말이라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참 답답해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귀가 뭘 사용했습니까? 성경 구절을 가지고 사용했지요. 그러면 마귀에게서 나오는 성결 구절이 맞습니까? 그게 진리입니까? ‘네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돌이 발에 부닥치지 않게 할 것이다. 네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당신 입으로 이야기 했지? 그래 말씀대로 해보자.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이 말씀대로 되어야 하니까 시험해 볼게’ 하고 높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자,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한다. 한 번 뛰어내려 봐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시험을 여러분 스스로 한 적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철없는 학생들이 기도하기를 ‘주여, 월요일 시험 치는데 주일 지키면 좋은 성적 나오게 해 주세요.’ 하고 공부도 안 하고 시험 치면 역시 20점 나옵니다.




스스로 시험해 보는 거예요. 왜냐? 성경 말씀대로 되나 안 되나 시험해 보는 겁니다. ‘성경 말씀대로 되나 안 되나’ 자체가 성경 말씀을 위배한 거예요. 왜? 성경 말씀은 내가 되나 안 되나 하는 사항이 아니라 되도록 되어 있어요. 누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 그분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여기서 논리가 좀 복잡한데 잘 들어 보세요. 제가 고함을 칠 텐데 고함에 신경 쓰지 말고 논리만 생각해 보세요. 주의 뜻대로 성경 말씀을 줬더니만 지상에서 주의 뜻이 되는가 안 되는가. 나라는 주체가 재 검열에 나갔을 때 검열 나서는 그 놈이 지옥 갈 놈이라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엇샤! 성공했다.’ 하는 이것이 주의 말씀대로 되는 거예요.




주의 말씀을 종은 듣겠나이다. 이런 노선으로 빠지는 사람이 있고, 되나 안 되나 내 선에서 검열 나서겠다는 사람은 바로 말씀의 주체자를 자기로 간주하는 지옥 갈 놈입니다. 지옥 갈 놈이 지옥 갈 놈으로 나타날 때 대 성공한 겁니다.




엄마, 아빠 다 놀러가고 혼자 집에 남아서 [나홀로 집에] 남아서 아빠 수염깎을 때 크림으로 장난을 치고 바닥에 뿌렸는데 도둑이 들어와서 미끄러져 넘어질 때 ‘앗싸!’ 하면서 좋아 하지요. 성공했다 이 말 아닙니까. 부모는 애 잊어버렸다고 멀리 마이애미에서 걱정하고 있는데 아이는 집에서 지금 잘 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을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는데도 성공해야 되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내는데 성공해야 돼요. 지옥은 불타는 자가 있어야 맛이 나는 겁니다. 지옥 만들어놓고 손님 없으면 이것은 장사 안 되잖아요. 지옥 갈 자는 반드시 지옥 가야 해요. 거기에 대 성공하는 방법이 뭐냐? 말씀이 되나 안 되나를 내 선에서, 육적인 선에서 나를 주체로 삼아서 시험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이 성경 말씀을 유교 경전이라든지 불교 경전 수준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게 해서 ‘힘써 지켜라.’ ‘쉐마(너는 들어라), 쉐마’ 해가면서 지키라고 하는데, 율법은 더욱 죄를 증가하게 하기 위해 지키라고 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지켜야 되는 줄 착각하고 있어요. 죄를 더 증가시키기 위해서 ‘쉐마, 쉐마’라고 했는데 ‘들어라’고 하니까 지키려고 시도를 해요.




욥의 고난이 욥의 세 친구가 얼마나 엉터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욥에게 낯선 고난이 온 겁니다. 동질성으로 같이 울었지요. 일주일 동안 말도 안 하고 울었지만, 그것은 욥을 동정해서 울은 것이 아니고 자기 기대치에 어긋났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원통해서 운거고, 나중에 현실적으로 한 소리 해 볼까 나서다가는 자기의 부실함, 자기의 비 신앙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1번 타자 엘리바스부터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좋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가난한 사람들 많이 도왔잖아. 옛날에 착했잖아. 하지만 네가 모르는 죄, 사람이 착한 일 하다가도 혹시 너도 모르는 부지중에 나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아마 그게 문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셨으니까 다시 한 번 찬찬히 생각해 봐라.’ -“생각해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여러분, 죄 없이 망한 자 있습니다. 그분이 나사렛 예수에요. 우리는 죄 없이 망한 자를 죄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믿습니다. 그분의 의로 우리는 구원 받아요. 우리는 죄 있어서 망한 사람입니다. 그게 한 세트에요. 그분은 죄 없이 망하고 우리는 죄 때문에 망하고. 우리는 물귀신 됩시다. 그래서 그분의 죄 없음이 우리에게 전수가 되어서 우리도 죄 없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이 바보 1번 타자 엘리바스이거 땅볼 쳐놓고 한 바퀴 놀고 홈런 쳤다고 자랑해요. 완전히 사기에요. 수비하는 욥은 기가차서 말도 못하고 ‘아이고 이 인간아, 인간아. 네가 뭐 아는데? 네가 뭘 알아!’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냐?” ‘에라 이놈아. 내가 죄 없이 망했다.’ 결국 이렇게 나오거든요. 결국은 서로 원수가 돼요.




쉽게 하면 이런 거예요. 욥은 엉망진창이 되어 앉아 있는데 점잖은 도사 한 분이 와서 ‘지나가는 과객인데 한 마디 하겠습니다. 죄 없이 망한 자가 아무도 없거든요.’ 이 소리 듣고 욥이 화가 나서 물 컵을 도사 얼굴에 끼얹어요. 바로 이거에요. ‘네가 뭘 안다고. 너는 너 볼 일보고 집으로 가라.’




이게 이런 뜻입니다. 욥이 장차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부처가 와서 하는 말이 ‘예수여, 죄 없이 망한 자가 없거든’ 예수님이 듣고 있다가 ‘에라 이놈아 너를 위해 심판하러 왔다. 내가 심판주다. 너 같은 놈 지옥 보내려고 지옥 만들어 놓았어!’ 이거예요.




마지막 심판 날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분, 사람을 통해서 그분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옛날에는 묵인했고 허물치 아니했으나 마지막 때는 한 날을 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부처가 되었건 소크라테스가 되었건 다 죽여 버립니다. 과격합니다. 완전 횡포에요. 유황불이 날아가요. 아주 급진적이에요. 탈레반보다 더 과격해요.




그리스도는 과격분자에요. 자기만 옳데. 자기만 아버지를 알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들이 나에게 대해서 뭐라고 평가하는 것 나는 듣기 싫다. 나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받을 필요가 없다.




요한복음 2장 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 속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육적인 것밖에 없지요. 그래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내가 잘 믿는지 왜 자꾸 증거를 수집합니까? 내 기도가 오늘 몇 시에 응답 되었지? 자꾸 수집하지 마세요. 이런 것을 수집한다는 자체가 자기의 믿음이 희미해졌다는 뜻이에요. 하도 믿음이 없으니까 뭔가 허전해서 성과들, 신앙 생활해서 기도 응답 받았던 그런 것들을 끌어 모아 마일리지를 쌓으려고 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다시 말합니다. 이것만 하고 오후 강의 마치겠습니다.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선한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냥 무상으로 도와주는 거예요. 그 때 사마리아인이 와서 강도만난 사람보고 “옷 꼬라지 하고는. 차렷. 열중 셔. 일어서. 똑바로 안서. 네가 똑바로 서야 도와주지.”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거의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똑바로 섭니까.




‘네가 믿으려고 하면 행동을 똑바로 해야 믿지. 이렇게 해서 내가 십자가 은혜를 너에게 주겠어! 똑바로 해.’ 이렇게 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강도만나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 거예요. “주여 어쩌면 좋습니다.” “내가 구원해 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님은 일방적으로 100% 다 줍니다. 2% 남기고 주는 법이 없어요. 다 이루었어요. 십자가 피로. 그게 새언약입니다. 내 선에서 내 신앙을 자꾸, 내용물을 채우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자꾸 주님을 가해자로 몰게 됩니다. 우리는 강도만난 사람이에요. 퍼져 있어야 됩니다. 견인차가 와서 끌고 가야지, 견인차에 끌려가는 주제에 크략션 울리면서 빵빵거리고, 핸들을 돌리고 기어를 넣고 이게 뭡니까?




저녁 먹고 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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