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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7 11:59:20 조회 : 3976         
20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_cross070730b(2강)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199)
 

20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_cross070730b(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는 출애굽기 6장부터 해봅시다. 출애굽기 6장 3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래 돼있지요. 여기에 보면,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 이래 돼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에 합당한 환경이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있어서 여호와 이름으로 구태여 나타낼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뭐로 충분했느냐 하면, 전능한 하나님으로도 충분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계속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가야 될 텐데 이 모세한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라고 했던 이 시절과 ‘여호와’라고 이름을 가지고 나타날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날 시대가 변했다는 겁니다. 변한 거예요. 변했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로 구체화 되려면 이 여호와라 하는 신은 어떠냐 하면, 하나의 국가로 등장할 때 국가 자체가 진짜 하나님의 백성, 출애굽기 4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데.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진짜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임으로서의 국가, 이 국가를 만드는데 여호와 이름에 합당한 액션, 합당한 하나님의 일이 있어야 이 국가, 신의 나라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에서는 뭐가 안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한테는 국가, 집단적 단체로 하나님 백성 되는 일은 없어요. 전능하신 하나님 시대에는. 그거는 여호와 하나님 나타날 때 여호와 하나님 이름으로 할 때 나타나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할 때는 국가 단위로 집단적으로 백성 되는 그런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뭐, 전능이고 여호와고 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을 만들려면 전능, 여호와 따지지 말고 나라 만들면 되는데 왜 모세 때 와서 여호와 이름 주셔서 여호와 이름으로 나라를 만들려고 하느냐? 그러면 우리는 백성 되고 천당 가면 좋잖아. 이렇게 우리 편의로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국가가 집단적인 국가 이름으로 통째로 하나님 백성 되는 그런 국가의 등장은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전쟁을 벌여서 전쟁 벌였다는 그 과정을 통해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나라가 등장하는 그런 식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무에서 유가 되는 겁니다.




무에서 유가 되려면 무가 규정돼야 돼요. 무가 뭔지 알아야 돼요. 왜 전능하신 하나님, 이방인들도 알고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시대에서 왜 단체로 백성 되는 그런 나라는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뭐냐? 그걸 알아야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계시 주시기 전에는 왜 인간들끼리 머리 맞대고 욥처럼 서로 사랑하고 베풀고 이웃사랑해서 그렇게 하면 그게 아주 온전한 완벽한 신의 나라, 신의 자비와 은총으로 그냥 전달, 전달하는 그런 훌륭한 나라가 그걸로 하나님께서 받질 못하고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기 이름 알려 줘서 그 이름대로 일을 해야 왜 국가가 나오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뭐냐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국가라 하는 것은 다 가짜에요. 어떤 의미에서 가짜냐 하면, 이들은 아무리 완벽하게 신의 자비와 은총을 증여하듯이 자비와 자비를 베풀고 이만하면 의인되겠지. 라고 해도 그 나라는 마귀의 나라, 악마를 사탄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로마서 3장에 의하면,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나라에요.




그게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져요. 요한계시록에 일곱 나팔 불면, 일곱 대접 하면 국가 등장하면 그 국가는 집단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없느냐? 그들이 궁극적으로 장차 오실 진짜 왕, 메시아의 십자가 고난의 계시의 핵, 알맹이가 박히지 아니하면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냥 나라 만들겠다고 나오기 전에 유월절을 거쳐야 돼요. 유월절이 뭡니까? 피 아닙니까, 피. 유월절의 피를 흘려서 무서운 심판과 저주 속에도 거뜬히 남아있을 수 있는 전부다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구당 전부다 피 발린, 가슴에 피 있어서, 그것도 피가 아니죠. 무슨 피? 어린양의 피. 어린양의 피 발라서 가장이 있어서 가장은 할례 받고 앞장서서 졸지에 여자와 아이들 따라다니면서 가자! 홍해야 왜 우릴 막느냐? 가자 이 말이에요. 왜? 어린양의 피가 있으니까.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그거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집단적인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린양과 나중에 신약에 가면 어린양과 예수 그리스도가 만나죠.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어린양의 피, 유월절,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다시 말해서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연세계, 가야산 국립공원, 이 자체로서 완결형으로 하나님이 아름다운 혼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질서의 체제라고 그것을 확정짓고 있는 안일한 사람들에게 피, 메시아의 고난, 아픔 그딴 거 왜 알아야 되는데? 그거 왜 알아야 돼요?




그거 알려면 우리가 스스로 자비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이만하면 적어도 이 정도하면 신이 아니라 우신이 와도 천당 보낼 수 있는 그런 완벽한 선을 쌓고, 쌓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왜 어린양의 피가 왜 필요하며 십자가가 왜 필요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으로 충분한데 왜 여호와라는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알고 있는 그 신을 왜 이방인인 우리가 구태여 꼭 알아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현재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되는데 이웃에 사랑하면 되잖아요. 남에게 대접하듯 남 대접하면 되잖아요. 왜 여호와가 필요합니까?




뭔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만을 고수하는 그 넘어오는 그 턱이 현재 한국 신학계에 없어요. 아브라함 언약에서 모세언약으로 넘어오는 그 턱이 없어요. 문자적으로 언약 뽑아낸다고 언약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설명을 해줘야 돼요. 그게 욥이 담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럼 목사님 이론대로 한다면, 그럼 아브라함도 여호와 몰랐으니까 아브라함도 땡이네요. 그럼 아브라함도 실패네요. 그럼 목사님 이론대로 하면 야곱과 이삭과 에서한테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호와를 몰랐기 때문에 그것들 백성 아니네. 당신 이론 따라 하면 여호와를 알아야 백성이라면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백성이라면, 그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전능하신 엘 샤다이 시대기 때문에 그 사람들 무식하다, 하나님도 모르고 대충 알았다고 그런 이야기되겠네. 이렇게 나올 수 있지요.  




아브라함과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일을 대자연의 완결성, 이걸로 충분하다. 은혜가 매일같이 쏟아지고 그냥 비가 쏟아지고 이걸로 완결하면 좋겠는데, 이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목했습니다. 마치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 중에서 욥을 지목하듯이. 나중에 욥이 친구들 위해서 대신 제사를 드려야 되고, 기도를 해줘야 비로소 욥의 친구들에 붙어있는 저주가 풀리듯이.




네 번째 친구가 엘리후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욥보다 더 똑똑한 것 같지만 절대로 하나님은 그 욥을 대신해서 엘리후가 네 번째 친구가 대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친구를 위해서 제사한 법이 없습니다. 그건 뭐냐? 아브라함 언약의 시발점을 시초는 지목이에요, 지목. 선택이에요. 딱 선택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본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변신, 깨어지고 그게 바뀌어져야 되는 그런 모진 시련의 길을 가게 되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지요.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은 이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이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를 내다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새 예루살렘 성이라.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래 돼있지요.




지금 욥기에 있어서 모든 것이 은혜로 충만하면 그걸로 족한 걸로 돼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이 사람은 뭔가 탁 벗어나야 되는 것처럼 뿌리치고 털어버리는 빠져나와야 되는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이 말이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로 넘어오는 그 넘어오는 그 방식이 뭐냐? 특정 인간을 지목해서 지목된 인간과 그 곁에 있는 사람들과 현격한 차이화를 만들어버려요. 완벽하게 뭔가 차이 나는데 그 차이 나는 이유를 지목당한 본인도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그게 오늘날 21세기에 사는 성도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십자가마을의 운명. 몰라요.




욥은 지금 신학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욥이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이 잘난 체 하지요. 기존의 알고 있던 신학들을 총동원해서 네가 말이야 이렇게 힘든 것은 어려움 당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몰랐던 죄가 있을 거야. 하지만 몰랐던 죄를 끄집어내서 회개하면 주께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엔 창대하게 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해야죠.




그런데 욥이 뭐캅니까? 그 정도 이바구는 나도 할 줄 안다. 너희들이 내 힘든 거 봤나. 너희들이 내 아픔 겪어 봤어. 너희들이 내 아픔 겪어 보면 그런 소리 나오겠나. 그것은 내가 너희들 가르쳤던 거잖아. 내가 너희들에게 평소에 가르쳤던 신학이었단 말이죠. 이것들이 뭘 안다고 내가 다 가르쳤는데 뭘 아는 체 하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친구들이 욥은 니는 고난 왜 받노? 몰라. 나도 답답해서. 나도 몰라. 왜 이런지 나도 몰라. 이게 아브라함 언약의 시작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에서 나중에 모세 언약 넘어갈 때 내가 모르는 어떤 질병, 질환 내 힘으로 해결 안 되는 어떤 고질적인 질병이 나한테 찾아와요. 찾아와서 이것이 번집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신앙생활 잘해도 신이여, 회개해도 회개한다고 멈출 병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욥기를 보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욥이 회개해서 복 받은 게 아닙니다. 욥이 나쁜 짓해서 벌 받은 게 아니듯이. 아시겠습니까? 처음에 욥이 나쁜 짓해서 아들이 열 명이 다 죽고, 재산이 날린 것이 아니듯이. 욥에게 주어진 의가 나중에 축복이 처음에 욥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징벌과 징벌이 아니지만 욥의 행동과 관계없이 주어졌듯이, 나중에 욥이 받은 축복도 욥의 행동 관계없이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지 마음대로 자기 마음대로 그냥 사용하는 거예요. 도화지로서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에서 이런 욥기를 하기 전에 아브라함 언약의 실체부터 먼저 점검하고 그 다음 욥기를 설명해야 이게 설명이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지난 시간에는 뭐냐 하면, 이방인들이, 지난 시간에 했던 거라도 설명해보면 새로운 게 나와요. 나온다고.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던 신은 어떤 신인가? 그 이야기했습니다. 지난 20분밖에 안 지났는데 다 잊어버렸죠. 이방인들은 나 위주가 아니고, 대자연 위주에요. 크게 써야 돼. 대자연위주에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그냥 살다가 죽으면 또 생명이 피듯이 죽는 게 뭐 대수냐. 저 씨앗이 다시 꽃이 피듯이 내게 죽으면 이 대지에 묻으면 이 땅에 묻으면 땅은 다시 나 말고 다른 인물로 내가 또 태어난다. 이것이 대자연의 완결성이에요. 




대자연이 변하고 변하지만 대자연이 아무리 변해봤자 대자연 안에서 굴러가는 것이지, 대자연은 바깥에서 외부 시간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철저하게 외부 시간은 없어요. 신께서는 대자연과 더불어 함께 있는데 그 대자연 속에서 놀랍게도 그게 대자연에 뭐가 있느냐? 질서가 있다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게 다 나오는데,   




대자연 속에 질서가 있어요. 그 질서에 내가 부응하면 나는 신의 질서로부터 혜택을 입을 것이고, 건방지게 하나님의 거대한 자연이치에 거스르면 화를 자초하는 거다. 힘든 것은 나만 힘들다 이 말이죠. 그러면 대자연에 나오는 모든 자연 피조물들과 욥기도 나옵니다만 피조물들과 나와 비교해 볼 때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그들은 대자연의 신이 주신 그 은혜를 그냥 무상으로 누리더라. ‘무상으로 누림’ 그냥 즐기고 푸짐하게 고맙습니다. 하고 그냥 받는 식으로 하더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대자연 속에서 신을 섬긴다는 것은 내가 누렸던 내가 받은 은총을 그냥 A에서 B란 이웃에 준다 하지 말고 신은 은혜를 주고도 그 대가를 안 받아요. 아하, 이것이 대자연이 순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저 주시니까 나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다른 B란 사람에게 거저 주자. 거저 주고 B란 사람은 또 어떤 의무가 있느냐 하면, C란 사람에게 거저 주고. C는 D에게 거저 주고.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 중에 ‘나’라는 개념은 없어지고 나의 주체란 개념이 없어지고, 신만 존재하는 신이 하나의 신이 왕으로서 그러한 신의 나라가 되겠지요.




이걸 신의 ‘초코드화’라고 하는데 들뢰즈 철학에 나오는데, 초코드화. 오직 모든 인간은 코드, 법이죠. 법에 저촉 받지만 법에 저촉 받지 아니하고 단독으로 따로 떨어진 사람은 신밖에 없다. 그리고 신이 내린 법에 우리가 순응하면 그게 신의 세계다. 이래 보는 겁니다.




만약에 여기서 어떤 애가 자기 욕심을 채우고 나 안 줘. 은혜 아니야. 이거 가지고 분에 안 차잖아.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이 써클, 하나님의 신의 은총만 전달, 전달. 옛날에는 우리나라 시골에도 그런 게 있지요. 이사 왔으면 떡 주잖아요. 떡을 할 때 그 떡 시장가면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이사 와서 주는 떡은 이사 올 때 그때뿐입니다. 똑같은 떡이 아니에요. 거기에 뭐가 담겨 있습니까? 정성이 담겨있고, 어떤 서로 친구하자는 우정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거예요.     




옛날에는 촌에 무슨 물건을 하나 줘도 그냥 주는 법이 없고 정성을 다하여 줬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남들에게 이런 식으로 또 신으로부터 조물주로부터 이런 식으로 살아오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표현해서 남들에게도 사랑과 우정과 정성 이런 것이 담겨서 갔어요. 그럼 물건은 뭐냐? 물건은 돈으로 환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정성으로 그 값어치를 다 하는 겁니다. 옛날 다 그렇게 살았어요. 다 옛날이야기 돼버렸습니다만.




만약에 여기서 어떤 나한테 이익이나 손실을 이야기한다면, 내가 한 것보다 더 이익이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렇게 포석정의 술잔처럼 빙빙 돌아다녀야 될 거기에 자신의 이익이 들어가 버리면 그거는 사회에서 죄인으로 규정해서 축출시켜버립니다. 이 나쁜 놈. 벌 받을 거야. 벌 받을 거야. 저주를 해버려요. 그래서 뭔가 떨어지면, 봐라! 신은 살아계시잖아.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하나님만이 존중하고 하나님의 뜻만이 높이는 그러한 사회, 그걸 하나의 질서 있는 사회로 봤는데, 여기에 난데없이 뭔가 참 하나님, 전능하신 엘 샤다이라고 하는 하나님이 특별한 사람을 지목해버리면 그 지목한 그 순간부터 하나의 징으로 얼음을 깨듯이 한 쪽만 파괴되면 양 쪽이 갈라지는 것처럼 그 하나님에 지목된 사람을 중심으로 균열이 일어나면서 다 깨져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아브라함 언약에 보면 나오는데 언약에 보면 이삭에, 창세기 한번 봅시다. 창세기 25장인가? 창세기 25장이 아니고, 25장 맞습니다. 25장 2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민족이 저 민족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래 돼있죠.




이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쌍둥이라는 말을 똑같다 이 말입니다. 둘 다 육이에요. 둘 다 똑같은 인간성을 갖고 있습니다. 다를 게 없어요. 그런데 나눈다 하는 것은 야곱의 뜻도 아니고 에서의 뜻도 아니에요. 누구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나누어지지, 본인이 나누겠다고 해서 나눠지는 법이 아니에요. 그런데 본인이 나누겠다고 나서면 에서나 야곱이나 둘 다 인간적인 방식의 더러운 육만 자꾸 나올 뿐이지, 원래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 하고 전혀 상관없어요.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를 찍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야곱을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했다. 야곱을 하나님이 찍었다 이 말이죠. 찍은 그것이 지목해서 너는 내 선택한 사람이다. 지목한 그때부터 드디어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전환하는 그러한 과도기적 과정에 속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 나라를 뭐라고 표현합니까? 이 많은 민족 가운데 나의,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죠? ‘나의 택하신 족속’이라 하죠. 그런데 택함 받은 그들이 오해를 해서 육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끄집어내서 ‘봐라!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잖아.’ 이래 나온다면 그 뜻은 하나님의 본래 뜻하고는 아무 상관없고 그거는 바로 개인의 주체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욥기는 똑같은 그런 욥이 오류가 발생돼요. 하나님께서 욥에서 고난을 주니까 그때부터 욥은 저 인간과 나는 다르다는 남하고 나와 차이난다는 것을 강조할 때부터 그때부터 서서히 뭐가 발생하느냐 하면, 주체가 굳어지기 시작해요. 주체가 더욱더 부각이 됩니다. 주체가 부각이 되면서 하나님은 그놈, 잘 나왔다. 그 솟아나온 주체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와해시켜버립니다.




그게 욥의 시나리오에요. 다같이 우리는 친구 아닙니까. 욥의 친구거든요. 친구 왜 왔다 했습니까? 아까 제가 뭐라 했어요? 그들이 욥을 찾아온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적으로 온 게 아니고 친구로 와서 뭐 하기 위해서? 위로하기 위해서. 친구로 위로하기 위해 왔다가 나중에 뭐가 된다? 원수가 되죠. 균열이죠. 균열될 때 균열되면 될 수록 욥의 말이 과격해집니다.




과격해지면서 철저하게 마지막에 엘리후 만날 때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하나의 대상이 되고, 나는 하나의 주체로 부각이 되면서 마지막에 엘리후 가고 난 뒤에 폭풍 속에서 누가 등장합니까? 하나님이 등장해서 일대일 우리 맞짱 까자 이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주체를 끄집어내야 돼요. 아, 이거 참. 미리 설명해 드릴게요. 욥의 진행과정이 쉽게 합시다. 쉽게 합니다. 모든 게 정상적이다. 욥은 부자였고, 왜 부자냐? 나쁜 짓 한 게 없으니까 복 받아서 부자였고, 어느 정도로 나쁜 짓 한 게 없느냐? 자식들이 행여나 죄 질까 싶어서 꼬박꼬박 불러다 제사지낼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고, 그 점에 대해서는 사탄도 인정하고, 하나님도 인정하고, 친구도 인정하고, 다 인정한 거예요. 정상적이었어요.




정상적인데 하늘나라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내기가 있었어요. 하늘나라 내기가 있었는데 이 내기에 대해서는 지상에 있는 욥과 욥의 친구는 내기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 내기는 모르지요. 모르고 내기를 해서 여기서 사탄이 고난을 주지요. 사탄을 통해서 고난이 옵니다. 고난이 오면서부터 여기서 뭐냐 하면, 정상이 아니고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균열이 일어납니다.




처음에 욥의 친구들이 욥을 잘해보려고 아주 순한 말로 이야기해요. 말도 길게 하면서 납득시키려고, 욥아 니 훌륭한 거 우리도 안다. 니가 나쁜 짓 할 리가 있느냐? 하지만 너도 생각 못하는 게 있잖아. 네가 하나님보다 지혜가 크지 않잖아. 하나님은 모든지 다 아시는데, 너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만큼 하나님이 아신다면 너는 요거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나머지 부분에서 니가 뭔가 죄 진 게 있을 게 아니냐? 그 점을 일깨워주려고 하나님께서 너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니까 땔 기다리고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면 때가 와서 복이 올 것이다. 이게 세 명의 친구가 한결같이 이야기한 거예요.




오늘날 목사님들이 교인들한테 똑같은 소리합니다. 그거 엉터리입니다. 되게 바른 소리 같지만 엉터리에요, 그게.




낯선 고난의 의미를 몰라요. 욥의 친구가 제대로 하나님 뜻을 안다면 나중에 욥에게 빌라   하지 말고 미리 앞당겨서 고난 받는 욥에게 찾아가서 욥아, 니가 받는 고난은 니 죄 때문이 아니고 내 죄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쯤 이루어집니까? 지금 아니에요. 십자가 지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할 때 우리들에게 임할 때 비로소 십자가는 내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게 요즘 아는 거예요. 그것도 십자가마을에서만 알지만. 하지만 요즘 아는 거예요.




십자가를 모르게 되면, 오늘날 한국목사들이 교인들 심방 가서 잔소리 늘어놓듯이 욥의 친구가 똑같은 소리를 똑같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까   욥은 뭐의 모형이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 했습니다. 그전에 뭐 시편도 나오고 다윗 나오지만 그건 차츰 이야기해 드릴 거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면, 예수님께서 욥처럼 억울한 고난을 받았을 때 아무도 눈치 챈 사람 없었습니다. 왜? 다 육이기 때문에. 영이 아니기 때문에. 영은 선물을 받아야 영이 됩니다. 그냥 타고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아무리 신학을 이야기해도 육이에요.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나님의 깊으신 것을 통과한다 하지요. 깊으신 게 뭡니까? 깊은 거니까 얕은 것은 아니죠. 깊다 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로 알지 못하고 뭐가 와야? 성령이 알 때만 비로소 아는 게 뭐였습니까?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기존 엘 샤다이적 방식에서 기존적인 하나님의 은총 방식에서는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까 십자가 알겠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건 모르는 거예요. 거기 자기 죄가 병행이 돼야 돼요. 십자가 밑에서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 은혜를 이야기해도 십자가하고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욥 때문에 뭐가 생겼느냐 하면, 안과 밖이 생겨버렸어요. 이것은 지난 대전에서 유성호텔에서 했지요. 그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책에 나옵니다. 뭡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안과 밖이 이게 아브라함 언약, 엘 샤다이 쪽으로 다 정상적이다, 정상적이다, 누구나 정상적이다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다 하는 것이 어떤 사람을 지목해서 본인도 모르는 고난을 줌으로 말미암아 균열이 발생되고, 균열이 발생되면 욥 본인 육 아닙니까? 욥, 지는 아담의 후손 아니에요? 불따구 나지요. 우리가 욥한테 감사해야 될 것은 욥이 그 불따구를 감추지 않고 있는 대로 다 폭로했다는 거.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욥이 어느 정도로 수난을 당했느냐 하면, 욥기를 보면 나오는데, 욥기 19장 17절에 보면, 고약한 입 냄새가 나요. 2장 8절에 보면, 가렵습니다. 2장 12절에 보면, 얼굴 모양이 변해요. 그 다음에 7장 5절에 보면, 육체가 썩어 들어갑니다. 7장 19절에 보면 밤에 잠을 못자요. 악몽 꿔서. 16장 16절에 보면, 욥이 시력을 잃어버립니다. 19장 20절은 체중 감량이 돼요. 체중이 줄어듭니다. 3장 19절에 보면, 관절염에 걸립니다. 30장 보면, 색깔이 변해요. 피부 색깔이 변해요.




어느 인간이 이걸 동일한 체험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사람이 인격의 존엄성이 있지. 아무리 나쁜 죄를 지어도 이런 벌은 안 받습니다. 낯선 고난이에요. 낯선 고난. 아주 특이한 고난이에요. 너무너무 이상해요, 이게. 그러니까 도저히 이럴 수 없을 수가 정도로. 자비한 하나님이 이렇게 지독하게 비자비적으로 아주 무자비적으로 나올 리가 없다는 겁니다.




복음 전하면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기를 당신 말은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자비하신 하나님인데 그렇게 심하게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울 리는 없을 것이다. 이래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십자가의 고난을 안 겪었기 때문에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걸 몰라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줄 몰라요.




목사님, 우리는 압니까? 알게 되어 있습니다. 왜? 왜 압니까? 도화지들이에요. 우린 죽어났어. 이제. 제가 첫 시간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지 말라 했죠. 신앙생활 누가 합니까? 우리를 상대로 하나님이 자기 신앙을 꼽아주는 식으로 합니까. 우리는 그냥 꽃꽂이인데 책꽂이인데 그 안에 무슨 책을 채울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고, 누구 숙제냐 하면, 예수님 숙젭니다.  




자신의 십자가 고난을 꼽는 거예요. 요번에 욥 한번 받아볼래. 예레미야 한번 볼래. 꽂는 거예요. 이게 우리 성도의 한평생입니다. 꼽자마자 우리는 어떻게 아느냐 하면, 성경 표현으로 알아요. 아, 이 고난이 이 고난이구나. 이 말씀이 이 말씀이구나. 알아요. 불신자들은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꽃꽂이 자기가 만들고 책을 자기가 만들어 꼽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해요. 우리도 평소 그렇게 하는데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우리가 만든 책 있잖아요. 꽂아놓으면 갖다 집어던져버립니다. 해놓고 꽂아버립니다.




지난 오후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놓고 속으로 웃었습니다만, 세상에 이런 남편이 있다 합시다. 아침마다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는 말고 제 아내한테는 마음의 상처나 아픔이나 건강이나 돈에 있어서 걱정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라고 그렇게, 나는 괜찮은데 내 아내한테는 조금도 마음의 상처, 우울증이라든지 그래 나오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평생 동안 행복하게 살도록 기도하는 그런 남편 있으면 그 얼마나 좋겠느냐 말이죠.




그래 이야기했죠, 제가. 그런 남편들이 없는 이유가 남편들이 똑똑하기 때문에 그렇다. 왜? 그런 기도는 안 받습니다. 내 아내는 평생 동안 상처 주지 않고 꽃꽂이 꽂는데 내 자식은 좋은 대학가고 꼽아요. 주께서 다 빼버립니다.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해서 욥을 집어넣고, 엘리야를 집어넣고, 이삭을 집어넣어버려요. 이 꽃꽂이가 아니고 이 꽂이가 누구 꽂이냐? 예수님 자기 인생이라고.




욥이 친구들 대신해서 기도한다는 말은, 욥의 친구 인생에서 욥의 자신의 인생을 대체물로 박아놓아 버리는 거예요. 니, 이제 내 인생 아니면 죽어. 지옥 가는 거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욥이 기도하는 사람은 그 사람 인생은 날아가 버리고 욥의 인생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집어넣습니다.




거기 나오는 게 뭐냐? ‘대신’ 대구신학교 말하는 거 아닙니다. 대신. 십자가의 의미가 뭡니까? 우리 인생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생은 이미 죽었다. 아브라함 언약대로 하면, 무에서 뭘 한다? 유. 무에서 유가 될 때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야곱은 죽어야 돼요. 야곱은 죽고 그 자리에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게 아브라함 언약의 위력이에요.




이게 하나의 한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요.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브라함 가족단위로 이루어집니다. 이게 집단적으로 국가단위로 아브라함의 운명과 이삭의 운명과 야곱의 운명이 집단적으로 동일하게 균질성을 가지고 하나, 둘 깨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시점이 뭐냐? 모세언약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유월절 어린양으로 공동우물에 빠지게 돼요. 하나님의 저주가 유일하게 임하지 않는 그 어린양 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적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그 사람은 직업과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다른 자기의 행함과 상관없는 어린양의 행함에 의해서 여호와 이름의 행함에 의해서 동일하게 혜택을 입고 균일적으로 동일한 운명을 지닌 그러한 국가로써 진행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절차를 하기 위해서는 욥기를 봐야 돼요. 욥기 안에 그 이음새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에서와 야곱 이야기해 봅시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습니다. 왜? 쌍둥이니까. 그 어미, 애비한테 태어났는데 다를 게 뭐가 있어요. 똑같은 육적이요. 쌍둥이인데 야곱을 지목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이삭이나 리브가나 에서의 운명은 하나님에 지목된 야곱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거는 야곱뿐만 아니고 그 뒤에 나오는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이 아무리 달아나고 싶어도, 요셉의 다른 형제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싶어도 야곱에게 떨어진 하나님에 지목된 운명의 사슬에서 그들은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심지어 애굽 나라에 칠년 풍년이 들고 칠년 대흉년이 오는 그 스케줄까지라도 누구 중심으로? 야곱에게 내려진 약속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고, 나중에 요셉이 해골 되더라도 그 해골은 해골바가지를 들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약속의 땅으로 진격, 또 진격해야 돼요.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지목한, 지목한 것은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언약 때 지목했지요. 모세언약 때는 이게 국가적 단위죠. 하나의 국가적 집합체로 만들어질 때 여기에 개인이 단체가 될 때 여기에 넘어오는 것, 이 넘어오는 것은 바로 뭐냐 하면, 무슨 싸움? 영적 싸움. 영적 싸움은 근거는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은 욥이 고난 받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데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하고 누구하고? 사탄하고 내기를 한 것이에요.




참, 그러니까 이게 [사막에서의 대화]라고 제목 달아도 되지만 다른 말로 내기, 다른 말로 하면 타짜. 욥기는 내기입니다. 사탄은 말하기를 인간의 주체는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것 가지고 뭉쳐서 주체가 된 겁니다. 라고 주장한 사탄이 뭐냐 하면, 재산 받았지요, 아들 일곱 받았지요, 딸 셋 받았지요, 게다가 좋은 친구들 만났지요. 이것이 바로 욥을 있게 한거다. 욥을 욥 되게 있게 한 것이다. 받은 게 있기 때문에 증여니까. 뭔가 받은 게 있기 때문에. 그 받은 걸 근거로 해서  




따라서 받은 것이 하나 둘씩 날아가 버리면 욥 자체가 아무것도 남는 게 없기 때문에 다시 혼돈의 시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게 사탄의 주장이에요. 이 사탄의 이야기는 오늘날 한국교회나 오늘날 모든 과학이라든지 철학의 근본원리에요.




자아라 하는 것은 이게 A, S, O. 제라드라는 신화학자가 공식이 있어요. 뭐냐 하면, S가 주체고, O는 목적, A는 타인. 뭐냐 하면, 타인의 욕망이,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보내서 내가 갖고자 한다. 이게 모든 인류의 모든 인간의 주체공식입니다.




주체라는 건 뜯어보면 뭐냐 하면, 내가 뭘 원하는지 나는 몰라요. 근데 남들이 뭘 원한다 하면, 그래 그것 갖고 싶어. 이래 되는 거예요. 그걸 갖고 싶으라고 아, 나 저게 갖고 싶어. 라고 갖고 싶은 게 생기면, 갖고 싶은 소망이 나로 하여금 다른 성질의 주체로 이미 전환시켰습니다. 




아, 나는 어떤 고급아파트가 갖고 싶다. 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그때부터 고급아파트 되는 꿈을 꾸기 시작해요. 그 꿈을 가진 새로운 주체로 변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고급아파트라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 그런 게 없어요. 한국 땅에 살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촌에 살면 그냥 고만고만 살면 개, 돼지 키우고 옥수수 하고 이러면 뭐, 고급 그런데 욕심 안 납니다. 그런데 서울 강남이나 가다보면 모이는 아줌마들이 이야기가 전부다 그거니까. 우리 아는 친척 가운데 하나도 서울의 강남은 아니지만 강남 근처 쯤 사는데 성남시 쯤 사는데 조기유학 가서 초등학교 보낼까, 안 보낼까 부부간에 갈등이 생겼어요. 연봉 1억도 안 되는 주제에 남들 다 보내니까 보내자는 거예요. 비둘기 가족되던지, 갈매기 가족되던지 기러기 가족되던지 하여튼 그 애를 지금 안 보내면 후회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시골에 가니까. 시골 어디인지 갔는데. 아, 가산산성. 대구 변두리, 시골도 아닌데. 애들이 덥다고 농협, 우체국 에어컨 나오는데 놀고 있어요. 비둘기고 갈매기고 없어요. 그냥 막 놀아요.




내가 뭘 원해야 되는지를 본인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남한테 물어가면서 다니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물어가면서. 그걸 맹모삼천지교라고 하잖아요. 내가 지금 뭘 원해야 돼. 라고 이사 가면서 묻는 거예요. 지금 내가 뭘 원해야 인간답게 사는 거예요? 묻는 거예요.   




타인의 욕망은 내가 원함이고, 그것이 내가 현재 지금 나의 주체를 형성해요. 내일 되면 내일의 욕망이 또 나옵니다. 이런 주체관을 깊이 들어가 보면, 깊이 들어간 것이 불굡니다. 결국 불교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욕망이라 하는 것은 개인의 주체가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니까 주체를 무화사상, 주체를 지워버려라. 지워버리면 남는 게 있다. 그게 뭐냐? 산은 산으로 남고, 물은 물로 남으니까 그걸로 됐지 않느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게 진리 아니냐.




예수쟁이들 교회 간다 하는 것도 그것도 자아가 있기 때문에 죽어서 좋은데 좋은 나라 가보려고. 마치 좋은 학군 가듯이 자기 자식 밀어 넣으려고 그 짓 하는 거예요. 진짜 깨달음 오게 되면 천국도 내가 만든 것이고, 지옥도 내 자아가 만든 것이니까 그런 걸 지워버리면 남는 것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사는 것이지 고민거리가 되나. 그게 엘 샤다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뭐가 터졌다고요? 욥한테 뭐가 터졌다고요? 낯선 고난, 특이한 고난. 다시 한번 들려 드릴까요? 우에 됐는지. 입에서 입 냄새 나고. 고약해서 안 좋아요. 피부가 터지고 가렵고. 야, 이거는 기왓장 갖고 긁었어요. 얼굴 모양이 변하고. 못 알아 봤어요. 친구들이 너 누군데? 못 알아 봤습니다. 그 다음에 악몽을 꾸고. 야, 잠이나 좀 자야 되는데 잠을 자지 못하고 악몽을 꿉니다. 그 다음에 밤에 귀신 나오고. 그 다음에 뭐냐? 시력 감퇴. 눈도 감겼어요. 그 다음에 쇠약하고. 체중 감소되고. 관절염. 얼마나 감소 됐는지 뼈하고 가죽만 남았다 했습니다. 시편에 나옵니다. 뒤에 보면 나옵니다. 19장 20절에 보면, 뼈하고 가죽만 남아요. 관절염 있고. 피부색이 완전히 시커멓게 돼버리고. 간이 안 좋은지.




내가 보니 하나 빠진 게 있어요. 머리카락이 빠졌다. 요샌 옥시크린이 있으니까. 옥시크린이 아니라 뭐고? 마이옥실 있으니까. 나긴 납니다만 제가 좀 났거든요. 아마 이거는 낯선 고난은 아닌 것 같아. 산은 산이고 자연현상 같아.




낯선 고난은 의도적으로 낯설게 하는 이유가 인간의 해석을 거부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지혜로서는 어리석게만 보이게 만들어요. 일부러 그래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지요. 어리석게만 만들어요. 네가 모든 걸 알아도 이걸 모르면 전혀 모르는 것이다. 육적인 사람에게 어리석게 만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아브라함 언약이 찾아오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 언약이 욥에게 찾아드는 겁니다. 이방인 욥에게.




그러니까 그들은 뭐냐? 이방인 식으로 낯선 고난을 중심으로써 각각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차마 폭로되지 않았던 자기 신학의 본색을 다 까발리며 드러냅니다. 그때 까발린 것을 우리는 주워주워 모아야 돼요. 왜? 그게 현재 아직도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안 까발려진 나의 잘못된 신학들이 욥의 친구와 욥을 통해서 다 까발리니까 얼마나 좋은 책인지. 욥기가 얼마나 중요한 거예요.




사람들은 욥기를 보면서 욥이 1장으로 끝나기를 원합니다. 1장 끝이 뭐라 돼있습니까? 욥이 1장 끝이 어떻게 돼있지요? 욥이 1장 끝이 뭐라 돼있습니까?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이걸 무슨 사상? 순수증여. 신을 볼 때 어떻게 본다? 순수증여. 주시기만 하고 반대급부를 받지 아니하시는 순수한 증여로서의 신 개념이에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내가 그냥 주신 분도 하나님이니까 거둬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1장에서 욥 다했다고 그 다음 2장 안 보려고 합니다. 왜? 2장부터 십자가 나오거든요.




십자가는 이해 안 되도 이건 이해되거든요. 왜? 우리 이방인에게는 무슨 신이 있다? 엘 샤다이의 신이 있다. 언약이 빠져있는 특이한 언약이 빠져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어진 택한 백성에게만 주어진 그 언약, 그 여호와가 빠져있는 일반적인 보편적인 신 개념이 우리가 다 있기 때문에 그게 이방인들 아닙니까. 이방인들은 욥의 친구들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소위 기독교를 형성하고 교회를 만들고 있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겠지. 참 좋은 말이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겠지.




그래서 제가 어떤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죠. 제발 하나님 증거하지 마시고 복음 증거하라고. 사도 바울은 성령 받아 복음 증거했지, 하나님 살아계십니다. 하나님 은혜주십니다. 그거 증거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누가 잘하느냐? 바리새인들이 잘해요.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주특기입니다. 그들은 신앙국가적인 재난과 로마의 압제를 견디면서 시편을 달달 외웁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다다다~다 다~다다. 보니엠이 불렀잖아요.




바벨론 강가에서 언젠가는 지금은 눈물이지만 언젠가는 웃으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누가 오면?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가 오면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리라. 이러한 귀소본능. 엘 샤다이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들어있어요.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 그게 [귀천]이라는 시 지은 사람 있지요. 천상병. 그 사람의 시 보세요. 기독교란 이름으로 오는 시들 보세요. 뭐가 없습니까? 복음이 없어요. 십자가가 없어요.




그건 뭐냐?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 대중들에게 접촉점을 갖기 위해서 이쪽에서 대중적인 하나님을 증거하는 겁니다. 고 깊이가 알맹이가 뭐냐? 불교식이에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믿으라. 이 욥기 읽어보면 수십 번 나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아, 마음을 낮춰라. 욥아, 마음을 낮춰라. 니가 암만 해봐라. 내가 지금 낮추려고 일부러 하는 게 아니다. 당했는데 뭐. 니가 당한 게 아니고, 다 이유를 몰라서 그렇다. 이유가 뭔데? 그건 니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 환장하겠다, 환장하겠다.




하나님이 지목했으면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어요. 오직 했으면 차라리 혼돈시대로 되돌아가려고 합니까. 창조가 됐다는 말은 이유가 있는 채로 태어나거든요. 창조 자체가 합리적이니까 질서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이유도 없는 일이 벌어졌고,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은 뭐냐? 다시 원천으로 혼돈 속으로 가서 이유가 포함된 새 창조를 해주시옵소서. 이래 됩니다. 그게 뭐냐? 고린도후서 5장 17절, 너희들은 무슨 사람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뭐가 담겨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세상의 진리가 포함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저녁 먹고 다음 시간 할 것은 뭐냐 하면, 욥기와 예수님의 십자가 가신 길을 정통으로 직접 연결시켜봐야 돼요. 욥이 가는 길은 욥의 친구들, 바리새인들과 욥과 우리도 바리새인들이니까. 예수님과 그 바리새인들의 관계하고 욥과 욥의 친구들 관계를 추적하면서 차이점이 뭐냐? 결국 욥 본인도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것. 왜? 짜증나니까. 아픈데 짜증 안 나는 사람 어디 있다고. 왜 하필이면 나에게.




요즘 참 많이 나오잖아요. 아프가니스탄 스물세 명이 갔습니다. 한 여자 빠지고 스물두 명 있을 때 샘물인지 무슨 물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교회 엄마들 뭐라 하겠습니까, 아빠들은 뭐라 하겠어요? 하필이면 내 딸이, 하필이면 내 아들이. 그 사람은 욥기를 몰라서 그래요. 반대로 이야기해야 됩니다. 왜 하필이면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래 돼야 돼요.




그래서 욥에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 욥은 이럽니다. 하나님이여, 왜 저를 죽이시렵니까? 이래 나오다가 나중에 바뀌면, 왜 저를 살리십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님 십자가에서 하신 이야기와 동일한 이야기에요. 주여, 어찌하여 저를 죽이십니까, 왜 버리십니까? 그러나 할 수 있거든 제가 하겠나이다.






딱 50분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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