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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3 18:11:52 조회 : 3617         
20061013-(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8강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갈라디아서 제 8강 (이근호목사, 2006년 10월 13일(2), 서울의존교회)




첫째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개인이 스스로 자기 구원의 바탕을 닦지 않더라도, 하나님하고 예수님이 다 닦아 놓았는데 왜 우리는 새삼스럽게 그걸 믿으면 될일을 가지고, 왜 따로 내 구원의 바탕을 내가 또 닦고 설치해서 나만의 구역과 영역을 만들고 ‘이것은 내 세계다’라는 것을 고집하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너무 어린애 같고 철이 없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이 육체로부터 시작해서 생긴 결과인데 육체가 뭐냐? 자꾸만 나의 육체의 가치를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고 난 뒤에는 ‘나는 아주 괜찮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이제는 나에 대해 협조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근사한 육체가 되었다’고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묻지요. “당신이 어디를 통과해 왔습니까?” “십자가 통과 했지요.” “십자가 사건이 뭔데요?”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피를 흘렸다면서요.” “그러면 당신은 안 죽었습니까? 당신은 안 죽었어요?” 죽는 폼만 잡았겠지요. 죽는 시늉만 했지 본인이 죽지 않은 거예요. 어린이 들이 있으니까 이것을 쉽게 하겠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관점하고, 위에서 하나님이 보는 관점이 달라요.




우리는 ‘내가 살아 있으면 살았다’고 보는데, 주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아무리 100미터 달리기를 10초 기록 세우고, 장대높이뛰기로 5미터를 넘어도, 무슨 몸부림을 쳐도 이것은 이미 죽은 거예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비교해 보니까 죽은 거란 말이죠. 예수님처럼 안 되면 죽은 겁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고, 우리는 흠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을 다 심판아래 두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냉혹한 관점입니다. 거기에 어떤 융통성을 기대하지 마세요. 예를 들어서 재판장에서 피고가 까불고 춤추면서 하는 말이 “판사님, 저 살았지요? 살았지요?” 하면 판사가 “수고했다. 사형!” 춤추기 전에도 사형감 이었고, 춤춘 뒤에도 사형감이고 이래도 저래도 사형감입니다. “판사님! 그게 왜 그렇습니까?” “내 관점이다. 왜?” 하나님의 자기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이미 내 관점은 저주받을 관점인지를 알아야 되요. 우리 속에는 우리가 저주 받아야만 되는 그런 썩어빠진 내 관점이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죽을 놈이다’하는 그런 것이 있어요. 육체로 시작하는, 즉 나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병들어 죽는다든지, 별스럽게 꼴사납게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마땅하고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요소가 있어요.




그런 요소가 있어야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십자가는 때리는 망치를 증거 하는 겁니다. 망치를 가지고 때릴 때 못이 얼마나 박혔나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뭐가 와서 이 못을 때렸느냐? 딱! 딱! 딱! 때려 넣는 그 망치가 내 머리와 내 육체를 때려서 나는 박살나고 산산조각 납니다. 석고상이나 유리창을 망치로 때리면 쨍그랑, 하고 다 깨지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나라는 인간은 천개 만개로 조각조각 다 깨져 버리고, 그 안에 살아 있는 것은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 덕분에 살아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해서 이렇게 찾아 오셨군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살았다’고 합니다. 비록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만 그게 ‘살았다’는 겁니다. ‘죽었다’도 내 기준으로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았다’도 내 기준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갈 때에 24시간 남편이 아내 생각 못합니다. 진짜 아내를 끔찍하게 위하는 남편이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제가 보기에 남편이 아내 생각하는 것은 하루 24시간 중에서 약 20분정도? 한 30분?




30분 생각하면 대단한 애처가입니다. 업어 줘야 합니다. 여자야 집에 있으니까 남편만 생각 하겠지만 남편은 아내 얼굴만 안보이면 전혀 생각 안나요. ‘아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얼굴도 잘 생각 안날 정도로 다 잊어 버려요. 그 정도입니다. 생각날 때 있고, 안날때도 있어요. 그것을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인식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사이가 아닙니까? 그래도 부부 맞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24시간 예수님 생각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도 아닙니까? 성도 맞습니다. 십자가가 생각나면서 ‘내가 참, 죄인이지’ 합니다. 사람이 육체로부터 시작하면 자기에게 희망을 걸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잘난 것, 자기의를 끄집어내요. 자기의를 끄집어 내는 방법은 자기 잘못을 자기가 칩니다.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고 징계하고, 손들게 하고 꿇어앉게 만듭니다. ‘너는 나쁜 일 했으니까 착한 일 해서 다 보상해.’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게 육체입니다.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로 할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제발 자신을 징계하지 마세요. 자신을 심판하지 마세요. 본디 인간은 원래 그런 인간입니다. 죄짓는 것이 당연하지 죄 안 짓는 것이 당연하면 아직도 자기가 유리창 깨지듯이 안 깨진 사람입니다. 이런 강의를 위해서 제일 좋은 것은 망치 들고 직접 유리창을 깨버리면 제일 좋은데. 나중에 제가 물어 줘야 하기 때문에 그럴수가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 것이 믿어집니까?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어요. 시간을 초월해서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을 본적도 없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합니다. 자기가 언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양옆에 강도 둘 밖에 없었는데 자기가 언제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까?




성령께서는 지금 십자가가 우리에게 바람을 훅 불어 넣듯이, 움직이는 십자가의 증인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하는데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 육체를 의지하지 않죠. 육체에서 나온 것을 행함이라고 하는데, 자기 행함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시작했구나. 나는 십자가를 위해서 태어났구나.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님께서 내 대신 돌아 가셨구나. 그래서 내 안에 죽은 나와 다시 사는 나의 이 두 가지 양식의 나를 다 느끼게 하는구나.’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이 그 두 가지를 다 느끼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나’가 있습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라고 느껴지는 ‘나’가 따로 있잖아요. ‘나’가 두 종류가 되는 거예요. 믿음으로 사는 ‘나’와 늘 죽어야 되는 ‘나’가 또 있다는 말입니다. 상당히 이것이 복잡합니다.




제가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망치를 원하지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망치를 바라보는 나, 그 망치를 바라보게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죠. 그런 특수한 인간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서 두 자식의 계열이 나온 겁니다. 한 계열은 ‘이러니까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계열도 육체로 나오고, 또 한 계열은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태어났기에, 즉 위에 있는 성령이 계셔서, 성령에 속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가지 계열입니다. 이 두 계열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증거 하게 되지요.




아브라함은 그것을 증거 한다는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깊이 들어갈 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못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때리는 망치를 위해서 이 땅에 못으로 태어나야 했다. 우리는 십자가의 망치로 얻어맞기 위해서 이땅에 태어나야 했다. 이미 그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지만 십자가에 의해서는 산자가 되는 관계에 놓인다’는 겁니다.




자, 십자가가 여기 있고, 우리가 여기 있다면 십자가에서 무엇이 나와서 우리를 살립니까? 이걸 알아야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께서 무엇을 가지고 십자가의 의미를 담게 하고, 담아 두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3장 9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제가 ‘우리교회’(대구우리교회) 사이트 질문 답변란에 보면 이런 답을 했습니다. “헌금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제가 이렇게 답했어요. “복의 개념이 바뀌어야 합니다. 육체로 있을 때의 복의 개념은 ‘뭔가 바치면 바친 것의 세 배, 네 배가 되어서 다시 돌아온다는 기대와 보람으로 바치는 것이 믿음 없는 사람이 바치는 겁니다. 반면에 진짜 믿는 사람이 바치는 것은 ‘주는 것 그 자체가 복이다’는 겁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나도 남에게 그냥 주는 사람으로 그렇게 인간성이 달라졌다는 그 자체가 복이 된다는 겁니다.




복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주는 것이 복인지를 모르게 되어 있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비로소 밝혀진 복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주는 것이 복 인줄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보니까 ‘세상에 그런 복도 다 숨어 있었구나.’ 이것은 눈에 띄지 않는 복이죠.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받아 챙기는 것이 복 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바가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예수 믿기 전에는 상상도 못한 복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그냥 주는 것을 좋아하겠어요?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은 ‘나라는 주체가 깨어졌다, 허물어졌다. 나라는 주체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겁니다. 여기 학생들이 있는데, 옆에서 친구가 “그것 좀 나 (빌려)줘 할 때 그냥 주기 뭣하지요? 주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거 내거거든? 잘 써라!” 이렇게 하잖아요. 주면서도 무엇을 포기 못해요. ‘내 것’이라는 것을 포기 못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가 와서 망치로 때려 버리면 무엇이 깨집니까? 더 이상 ‘내 것’이라고는 없지요. 나라고 여기는 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깨져 버렸어요.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이제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소유가 된 겁니다. 나의 소유는 없는 거예요. 나의 소유가 없으면서도 마음껏 누리는데, 주님께서 어딘가에 쓰실 데가 있다고 할 그 때에 선뜻 내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새삼 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내가 나를 초월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놀라운 일이잖아요. 내가 무엇인가를 선뜻 내어놓을 때는 ‘이것이 분명히 내 것이 아니라는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내가 여기 있으면서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이 생겼느냐? ‘그것은 복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장차오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복을 받은 겁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여기 좋은 땅이 있는데 어느 것을 하시렵니까?” “네가 좌(左)하면 내가 우(右)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 할게.”(창 13:9) 제가 오늘 강의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것이 있지요. 사람이 내 것을 준비하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다 준비해 놓았는데 왜 구태여 내 것이라는 것을 따로 고집하면서 챙겨야 됩니까? 이게 얼마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지 몰라요.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어키’ 사람이 있어요. 우리나라 시인가운데 ‘고은’이란 분이 있는데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분은 사실주의적으로 시를 쓰는 분인데. 이 시인도 외국기자들이 뽑은 노벨문학상 후보감입니다. 그런데 벌써 3년째 떨어지고 있어요. 계속 후보에서 멈추는 겁니다. 그때 한국인 기자가 아주 짖굳은 질문을 했어요. 그럴 때 고은이란 분의 말을 들어 보세요.




“이번에 떨어져서 참 섭하시지요?” “남이 얻어 서 기쁜 잔치에 내가 참여하는 그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지금 그 잔치에서 ‘내가 주인공이냐, 네가 주인공이냐’가 중요하지 않고, 잔치가 벌어졌다는 그 자체가 나는 즐겁습니다.” 물론 그 분이 천주교 신자라고는 하는데 천주교는 신앙도 아니니까 신앙과 관계없는 사항입니다만. 상금이 자그만치 16억입니다. 속이야 상하겠지요. 방송멘트상 “아! 분하다. 슬프다.” 이렇게는 못하잖아요. “너는 이제 죽었다. 치토스. 너는 내가 먹고 말거야.” 이런 언사는 곤란하죠.




어쨌든 뭐가 빠졌습니까? ‘나의 것’이 빠졌지요. 아브라함이 왜 기쁠까? 그 복의 주인공이 아브라함, ‘나’가 아니고, 다만 ‘나’ 아브라함이 거기에 참여 했다는 그 자체가 기쁘다는 그것을 복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깨어졌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 아내의 태를 죽이고 난 뒤에 자식을 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하고 상대하는 분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그는 세상적으로 말해서 ‘인간승리’ 한 겁니다.




그야말로 구원받은 겁니다. 하나님이 나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비로서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몰라요. 그러면 아브라함 당신은 뭐요? 자신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혜택을 입은 사람일뿐이죠. 그것을 로마서 4장에서 “일을 아니할찌라도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롬 4:6)이라고 했습니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아브라함의 복이 바로 이것이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리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어머니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이게 내 자식이다. 내 자식이다’하면 힘들어서 못 키웁니다. ‘하나님이 키우는 자식의 덕을 좀 보자.’ 이러면 맘이 좀 편해요. ‘아이고! 이 복덩어리야. 나는 네 덕이나 보련다.’ 나중에 가서 덕을 입혀 줄지 내쫒김을 당할지 그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마음이라도 내 소유라는 사고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자식을 줬을까?’


‘내가 자식 덕 보라고 자식을 주셨다.’




이렇게 맘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물론 자식 없는 사람에게는 약이 오르겠지만. 얼마전에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제가 이런 글 올려놓았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결혼한 사람은 육신의 고난을 자초하려고 결혼 했다”(고전 7:28, 33)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의 고난’ 같은 것은 생각도 않고 “주님께서 뭔가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라는 식으로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결혼하죠.




그렇게 결혼하고 난 뒤에는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 또 아내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까?’ 맨 날 그 궁리로 살아요. 아침밥 지으면서, 저녁밥 지으면서 끼니때마다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이 뭘까? 이 콩자반을 한 달째 내어 놓으니 지겹다고 안 먹는데 다음에는 무슨 반찬을 내어 놓을까? 미역국을 두 달째 먹고 있으니 이제는 쳐다도 안 보는데 어쩌면 좋을까?’ ‘아내가 좋아하는 목걸이가 어떤 거지?’




맨 날 아내는 남편 생각하고 남편은 아내 생각을 하면서 주님은 언제 생각합니까? 도대체 주님은 언제 생각하느냐 이 말이죠. 그 대목을 보면서 ‘참 사도바울도 모르는 소리 한다. 어떤 아내가 남편생각을 하는 아내가 있을까? 연애시절이나 신혼 초에 잠깐 그러고 마는것 그 뿐이고 아내는 자식생각 밖에 없는데.’ 자식만 생각하잖아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의존교회는 믿음대로 살기 때문에 안 그런가 봐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죄를 안 짓겠다고 발버둥을 쳐도 이미 타고난 성품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미 주님께서 참작을 하시고 다 아시는 사항입니다. “육체의 고난이 있다”는 것은 “결혼했다고 해서 그것을 잘한 짓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목사님! 저는 혼자 살고 있는데 잘하고 있지요?”




혼자 살고 있다고 잘하는 짓이라고 장담하지 마세요. 그것은 오늘밤 9시 40분까지의 이야기이고 내일 백마를 탄 왕자님 같은 청년, 현대그룹 후계자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00씨 결혼합시다.” 이러면 사귀던 남자 당장에 버리고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는 여지가 항상 있습니다. 누가 장담 할 수 있습니까? 특히 여전도사들은 자기 인생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하죠. 처녀시절에 기도원에 가서 울고불고 하면서 주님께 자기 인생 바치겠다고 하고 전도사 되어서 위에는 저고리 입고 까만 치마 입고서 다니죠.




그러다가 나이 40넘어서 큰 교회 목사 재취(再娶) 자리 구한다고 하면 경쟁률이 10:1이 넘어요. 주를 위해서 섬긴다고요?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이쯤 하면 저 참 잘 살았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얻은 복은 내가 잘해서 얻은 내 노동의 대가로서의 복이 아니라 “아무것도 일한 것이 없이 경건치 않은 나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경건할 때 주어진 복이 아니고 경건치 않을 때 주어진 복, 일했을 때 주어진 복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어진 그 복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 이것은 인간의 육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근거해서, 십자가 보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사람들은 누구나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보고 반대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아! 너무 극단적이다. 인간을 너무 모멸한다. 인간의 가치를 무시한다. 시편 8편도 봐라.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나와 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존귀와 영화로 높였다’고 한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높였는가? (천주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죠.) 얼마나 하나님이 인간을 높였으면 하나님을 사람의 육신으로 보냈겠는가? 그만큼 인간의 가치는 고귀하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가치는 높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 지게 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천사가 흠모할 정도로 위대하다.’ 이런 식으로 인간을 규정짓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을 너무 깔본다든지 인간을 묵사발 내는 것에 대해서는 역겨움과 모멸감과 반발심을 본능적으로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도바울 당시에도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습니까?




역시 마찬가지로 있었어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보세요. 말 자체가 달라요. “율법을 잘 지킵시다.” 이렇게 하지를 않아요. “지키기는 뭘 지켜!!” 이런 뜻입니다. “너희들이 육체로 율법을 지켜? 참 웃기네!” 이런 식이라는 말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는 할 때, 아브라함은 아닙니다. 왜? 아브라함은 율법 지키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잘해서 이삭 같은 아들 낳아서 잘 한번 키워보겠습니다.” 이러지를 않았어요. 아브라함은 자기를 알아요. 아내의 태가 죽은 것처럼 자기가 이미 죽은 몸인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들어갑니다. 다만 자기 아들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서 알았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율법아래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직도 자기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 의의를 두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사람은 “잘해볼게요.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라고 아무리 구실을 달아도 소용없이 그는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사도바울이 구약의 그 많은 구절, (오늘날 목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구절들이 있잖아요. ‘선지자를 무시하지 말라. 무시하면 벌받는다’ 그런것들 있잖아요. 말씀대로 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것)을 다 놔두고,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 “누구든지 이 말씀대로 모든 율법을 (그것도) 항상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되어 있는데, 그런 인간은 아예 안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율법아래 있는 자는 아예 저주아래 있다고 아예 동일한 것으로 똑같은 말로 봐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는 “자, 여기 율법 있습니다” 하고 율법을 들이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저주 아래 있음을 축하 합니다”라는 뜻과 같아요. 율법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너는 이제부터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이야!”라는 것을 단정한다는 뜻이지 “잘해보자! 열심히 하면 아마 될 걸? 희망이 있다. 포기하지 말자” 그런 뜻으로 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구원에 대한 독특한 해석입니다.




지금까지의 해석은 뭐냐 하면, ‘못하면 벌받고 잘하면 상받고’쪽으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노력과 경건과 선함의 결과로서 그 대가로서 주께서 뭔가 준비한 것이 있다고 본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가치성,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인간의 위대함을 율법을 통해서 발휘할 수 있는 당위와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사도바울은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구약을 해석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뭔데 하라, 하지 말라고 하는가?”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아직도 율법이냐?”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사도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십자가가 온 것을 통해서 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왔는데 어떻게 율법으로 구원받는 그것이 어떻게 통하는가? 십자가의 의미가 뭔가? 단순한 정치테러를 당한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저주를 자진해서 받았다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것은 저주를 세상에 구체화시킨 거예요. “자, 봐라. 인간이 받을 저주가 이런 저주다. 저주가 보고 싶나? 봐라. 이것이 저주다”라는 뜻으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이야기 한거예요. 그러니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해석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고는 달리 해석할 재간이 없습니다. 마태복음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해석이 안 나와요. 그래서 ‘몰트만’ 같은 신학자는 해석이 곤란해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이라는 발상을 내놓았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이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으로 살리신 것이라는 기대를 자꾸 거는 겁니다. 저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왜 저주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느냐 하면, 만일 십자가에 저주이야기를 해 버리면, 예수님이 저주 받았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인간과 더불어 저주 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저주받은 것이 되어 버려요.




그들은 인간이 저주 받은 것이 되어 버리면 무엇이 모순된다고 여기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뭔가 기대하고 만들어 놓았는데 저주로 끝나 버리면 하나님의 자체적인 창조의 충돌과 모순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부수자는 쪽으로 나가는 겁니다. 수년전에 제가 대구의 모교회에서 부교역자를 할때인데, 제가 청년들을 가르칠 때, “예수님이 저주를 받았습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따지듯이 달려들었어요. 아마 그때 여선생님이었을 겁니다. 




“전도사님!(그 당시 제가 전도사였으니까.) 이야기를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되죠. 성경 어디에 예수님이 저주받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저주 안 받았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한 분이지 저주받은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저주라는 것이 우리한테만 해당되지 예수님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고 했을 때에 여러분은 거기에 동의하십니까? 이 판국에 동의 안한다고 할 수가 없으니 묻는 게 잘못이죠.




예수님의 저주를 자꾸 빼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그걸 빼겠다는 심보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가치 있기에 살렸다’는 그 가치성, 나는 가치 있기에 살렸고, 저놈은 가치 없어서 죽였다는 식의 자기 가치성을, 예수님을 빙자해서 안 놓치려고 하는 심보입니다. 이것이 육체입니다. 이것이 육체이고 자아의 규정성입니다. 나는 나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그 규정성이죠. 이것들이 신학을 하면서 구석구석 다 파급이 되어 있어요. 다 몰래 몰래 안 들키는 쪽으로 스며든다고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창세기 1장 28절의 복, “다스리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그 문화사명의 복과 모순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청지기로 만들어서 맡겼는데 청지기가 일을 못했을 경우에는 저주하면 좋지만 처음부터 저주할 작정으로 일을 시키지도 않고, 능력을 헤아려보기도 전에 죽여 버리면 그런 하나님은 너무 횡포가 심하고 깡패같은 하나님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비의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고 나라는 육체로부터 출발하면 그런 생각이 들수밖에 없습니다. ‘피히테’가 그래요. 우리 한 목사님이 그 강의를 잘 녹취하셨는데. ‘피히테’는 “세상 모든 의미가 나로부터 나와서 나로 간다”고 합니다. 만일 여기에 ‘박카스’가 있는데도 내 눈에 이게 안 띄면, 아무리 누가 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없는 게 돼요. 지금 불신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해서 살아 계신다고 해도,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이 그 눈을 뜨게 해주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과거의 인물이고 없는 존재입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지금 없는 존재인것과 같아요.




결국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는 ‘나’로부터 출발하면 너무나 제한되고 한계성이 있기에 아무리 진리를 외치더라도 내가 파악한 범위 내에서의 진리일 뿐, 그 외부에 진리는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받기 전의 옛날에는 죄를 이기지 못했는데, 성령 받은 후에는 성령의 도움으로서(이 말을 꼭 집어넣죠.) 죄를 청산하고 죄를 안 짓게 되는 겁니다.”




술 먹던 사람 술을 끊고, 담배를 피우던 사람은 담배를 끊고 헌금을 쩨쩨하게 하던 사람이 풍성하게 하고, 봉사를 안 하던 사람도 봉사를 열심히 하고 나쁜 짓도 점점 정리하는데 전에는 열 개의 나쁜짓을 했다면 이제는 다섯 개로 줄이고, 큰 나쁜짓은 안하고 사소한 나쁜짓, 횡단보도도 아닌데 성질 급하게 가버린다든지 하는 그런 정도의 죄만 남는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어떤 청소부가 있는데 해변의 해수욕장을 청소합니다. 해변에 널려 있는 여러 쓰레기, 스티로폼이나 잡동사니들을 주워 담으면서 ‘이쯤하면 청소가 되었다’고, ‘청소는 대충 끝났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파도 너머에서 지금까지 상상도 못한 큰 쓰레기더미(죄)가 밀려 왔을 때 그 사람이 청소가 끝났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는 고아원 봉사하고 이런 저런 착한 일을 했다고 여기는데, 파도보다 더 큰 의로움, 예수님의 생명의 의로움이 덮쳐 왔을 때 과연 이것을 아직도 내 의로움이라고 유지할수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대충 죄 안 짓는다고 자신만만하던 그 순간에,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죄, ‘어찌 내가 이런 죄를 다 지을까?’ 하면서 파도너머 큰 죄가 왔을 때, 그 사람은 지금까지 정리하고 청산한 것이 어떻게 됩니까? 말짱 도루묵 되어 버리죠. 그것 수습한다고 바빠요. ‘하나님, 이 큰 것이 왔지만 이것만 정리하면 설마 이제 더 큰 것은 다음에는 안 오겠지요.’ 자기 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저주 아래 있다”는 이 말씀앞에서 그 다음부터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꼭 저주라는 것이 나에게 해당되는 말인가?’ 그것은 앞으로 나이가 30, 40, 50 되면서 살면 살수록 점점 더 밀려오고 또 밀려옵니다. 나중에 70쯤 되면(제가 70까지 아직 살아보지 않았습니다만) 무엇이 죄가 되는가? 70되기전까지 살면서, 69세까지 산 것이 하나의 망상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그것이 죄입니다.




70년을 살면서 나의 망상에 의해서 꾸며낸 세계를 현실로 간주했던 그 죄를 나이 많이 들면 비로소 그것을 느낍니다. ‘다 내 욕망이 지어낸 꿈인 것을. 내가 뭘 그리 잘났다고 우겨가면서 남들과 싸웠는가? 저나 나나 다 못난 인간인데.’ 오래 살면 살수록 죄가 누적이 되지 우리 손에서 처리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죽을 때가 되어서 보면 내가 목사가 되어서 설교하고 봉사한 그런것은 아무런 경건도 아니고 의로운 것도 아닙니다.




진짜 의는 ‘십자가 피’, 그것만이 의입니다. 마지막 때 십자가만 붙드는 겁니다. “주여!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 주세요. 저는 십자가만 붙듭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스럽습니다. 그 화목제물만이 진정한 나의 의로움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착한 일 몇 가지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약에서 간단하게 말씀을 하고 있어도 이것을 구약전체를 해석하는 명령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군대에서 선착순 시키는 것 같이 “구약을 다시 돌아와. 다시 돌아오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이것을 다시 해석해!”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만만치 않아요. 장난이 아닙니다. 14절을 봅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해석에 있어서 착각이 되는 대목을 살피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뭐냐?”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거의 다 창세기 12장부터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말할 때 세 가지를 끄집어냅니다. 19세기 ‘막스 베버’가 ‘국가론’을 이야기하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국가의 구성요소”라는 것이 있어요. “주권, 국민, 영토”입니다. “주권과 국민과 영토가 없으면 국가를 이룰 수 없다”고 한 겁니다.




‘막스베버’와 그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 논리는 ≪제국≫이라는 책에 보면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있어요. 이 논리가 이렇게 간단치가 않아요. 그것은 아주 어려운 글이기 때문에 그 소개는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인가? 국민에 대응되는 ‘씨’가 있고, 영토가 있어야 되니까 ‘땅’이 있을 것이고, 주권은 ‘언약’이라든지 이렇게 되겠지요. 어떤 사람은 ‘율법’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께서 내시는 왕으로 보기도 합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이 세 가지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한가지 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을 해석할 때 어떤 부담을 받게 됩니까? 씨와 예수, 땅과 예수, 왕과 예수님을 무리 없이 부드럽게 연결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씨가 창대하게 되리라. 땅을 주리라. 후손에서 왕이 나올 것이다.”




이 세 가지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드럽게 연결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채 연결시키다 보니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예수 믿는 백성이 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했으니까 예수 믿는 우리가 바로 씨의 완성이고, 예수 믿는 우리가 지금 누리면서 살아가는 이것이 천국이고 곧 예수님의 땅이고,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왕같은 제사장이 바로 우리다’고 합니다. 이렇게 안 가르치는 사람을 본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미국 계통에서 나오는 신학의 중심이 언약이 아닙니다. 미국계통에서 나오는 신학의 중심이 ‘하늘(하나님)나라’입니다. 왜 그들은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나라’로 잡느냐 하면,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지 않고,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창세기 1장부터 있다고 봐야 하는 겁니다. 화란의 개혁주의 사상이 미국으로 넘어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로 중심을 잡으니까, 새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보조수단이 되고 정작 그들이 노리는 것은 뭡니까?




“임마누엘.” 임마누엘의 뜻이 뭐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임마누엘이 아니고 “여호와삼마”죠. 그것은 에스겔 제일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것입니다(겔 48:36). 임마누엘의 뜻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마 1:23,24). 신약에서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심판의 의미이지, 함께 공존한다는 뜻으로는 “여호와 삼마”로서 에스겔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말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이 에스겔과 연결되어 있어요.




미국에서 들어온 언약신학은 ‘언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하늘나라를 말하기 위해서 언약을 보조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보조수단이라는 것은 건물을 지을 때 그 옆에 지지대가 있다가 건물 다 짓고 난 뒤에는 차버리는 것과 같은 거예요. 건물을 매끈하게 다 짓고 난 뒤에는 공사인부들이 공사를 위해서 건물 안팎으로, 위아래로 드나들도록 만든 임시계단이나 건물 주변의 시설물들은 다 철거하는 데 꼭 그런 식입니다.




언약은 없는 겁니다. 언약은 없어요. 지금 언약을 거론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늘나라 백성이 되면 끝나는 것인데 웬 언약이냐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십자가를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잘 이해들을 하셨는지 제가 확인에 들어갑니다. 십자가 안에는 무엇과 무엇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까?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함께 들어 있어야 그것이 십자가가 된다고 했지요?


지금 못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때리는 망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망치!




십자가가 눈앞에 계속 보인다는 말은, 십자가는 지나간 과거로 처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전면에 나타나야 된다는 거죠.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인간적인 생각,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함께 들어 있어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육체로는 죽어야 될 죄인이고,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영 때문에 산다”는 이것이 짝을 이뤄줘야 그 가운데 십자가가 나온다고 하지요.




만약에 십자가를 처리해 버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도 빠져버리고, 그때부터 우리가 또다시 율법적으로, 내 힘으로 내가 뭔가 또 실시하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저주받은 상태가 아니고, 뭔가 또 내가 나를 증거 하는 그런 속에 빠지니까 그것은 안된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다 들어 있지요.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씨와 땅과 왕 되심을 십자가를 거쳐서 나와 봅시다. 십자가를 거쳐서 나오면 두 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여기 있는 씨와 땅과 주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수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성령밖에 모르는데 성령은 외부에서 오기 때문에 씨와 땅과 왕에서는 예수님과 연결이 됩니까, 안됩니까? 이것은 되지를 않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내다보면서 미리 받은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아브라함은 나중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의 나기 전부터 내가 (이미) 있느니라”(요 8:58) 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알아요.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허풍떨고 큰소리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아브라함의 몇 백대 후손이 자기 선조보다 먼저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장난같은 이야기가 아닙니까? 불교에 이런 것이 어디 있고, 철학에 이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씨와 땅을 연결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바로 나와 버린 거예요. 그렇게 나오고,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씨와 땅과 왕을 공격하는 쪽으로서 십자가가 증거 되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 안에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이 있고 성령의 일이 육체의 일을 공격하는 그것이 계속 기능을 발휘하잖아요.




아브라함의 씨가 흔히 말하는 예수님(십자가 빠진 예수님이죠), 십자가를 빼놓은 채 이야기 해 버리면 아브라함보다 예수님이 나중 인물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난 인물이 돼요. (오늘 강의는 초등학생들이 참 힘들텐데 나중에 어른들에게 다시 배우세요. 무슨 말인지 몰라도 열심히 듣고 열심히 적어 놓으세요.) 시간상 아브라함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이쪽에 예수님이고 시간은 여기서 이쪽으로 흘러갑니다.




이렇게 흘러간다는 말은 ‘예수님 다음에 우리가 있다.’ 그런 소리가 됩니다. 이 시간관이 아브라함부터 일직선으로 이렇게 흘러가죠. 과거로부터 예수님, 예수님으로부터 이렇게 이쪽으로 흘러가죠. 이게 역사관입니다. 육체로부터 나온 역사관은 과거 있고, 그 다음에 현재가 있고, 그 다음에 미래로 흘러간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씨가 있는데, 그 씨가 예수님이고, 아브라함에게 있던 그 씨가 예수님이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고 예수님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과거 - 현재 - 미래’가 아니라 무시간에서, 시간이 없는, 시간을 초월한데서 아브라함과 우리를 동시에 보는 겁니다. 동시에 보면 아브라함은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겨냥했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예수님을 겨냥하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복이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복도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차이점이 뭡니까?” 차이점은 내가 어떤 복을 소유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복에 참여하는 사람이 될지언정 내 복을 따로 챙길 이유가 없다니까요. 사람의 제일 큰 문제, 육체의 문제란 내 것을 따로 소유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것을 따로 소유하게 되면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의식하게 되고 타인과 나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는 겁니다. 부모자식 간에, 이웃 간에, 교인들 간에 원수지간이 돼요.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기도를 게을리 하는 타인보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나의 기도가 응답을 받게 되면 그 기도응답은 내 것이 되지 타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기도하는 보람을 주는 겁니까? ‘존 로크’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열매를 따는 노동은 열매를 따는 사람의 몫이 된다”는 것이 ‘존로크’의 ‘소유권이론’입니다. 이때 이 소유권이론이 전세계에서 최초로 등장하게 된 겁니다.




소유권이론은 배타적 이론이고 어떤 사람도 그것을 침범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소유권이론에서부터 생긴 것이 ‘자본론’입니다. 내 것은 어떤 것도 남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죠. 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생존경쟁이죠.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것은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손들 떼라. 이것은 내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주체를 죽여 버리는데 무엇이 내 것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복에 의해서 파생된 열매가 우리입니다. 따라서 내 복은 없어요. 주님의 복밖에 없고, 우리는 주님의 복에 흡수 통합되는 겁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 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하나의 큰 우산이죠. 큰 우산안에 우리가 놓여 있으면 뭐가 없어집니까?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차이가 없는 겁니다. 차별이 없어요. 뭐? 상급에 차이가 있다고요? 없습니다. “목사님! 상급에 차이가 없다면 교인들이 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안 되잖아요.” 주께서 은사로 일하게 하신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집사님! 지금 청소하고 계시는데 그 청소해서 복 받으려고 합니까?” “아닙니다. 청소 자체가 복입니다. 웬 복인지, 천사도 흠모할 청소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런 기쁨을 못 누립니다. 그런데 웬 떡인지 웬 복인지 나에게 청소하는 복을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집사님! 헌금을 이렇게 많이 하셔도 됩니까?” “헌금하도록 된 이것이 복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헌금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내가 헌금 할 수 있도록 그 헌금에 참여하는 복을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헌금하는 복이 있다면, 저 사람에게는 청소하는 복이 있는데 그 차이는 없습니다. 왜? 둘 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 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맘을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그러잖아요. 목사가 되었으면 제발 교인들 헌금하는데 간섭하지 말라고요. 자기가 돈 보태준 것도 없으면서. 주님과 그 사람하고 결정해서 할 문제입니다. 십자가 지지도 않은 제 삼자가 왜 거기 관여를 해서 ‘냈니, 안 냈니, 김집사가 오 만원 냈니’ 체크 하는데, 지금 일수놀이 하는 겁니까? 이건 아니잖아요. 이건 아니란 말이죠.




세상에 천사도 흠모할 만한 복이 뭐냐? 주님의 복이 가만히 있는 복이 아니라, 나에게 일을 시키는 복이라고 믿어진다는 것이 보통 축복이 아니란 말이죠. 예수 믿기 전까지는 ‘내가 하는 노동이 내 열매로 돌아올 경우에만 일 하겠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복을 알고 있었어요. 숨어 있는 복이 있어요.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고.” 이것은 예수 믿기 전에는 몰랐던 복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것은 예수 믿고 나서야 비로소 눈치 챈 복입니다.




이런 복이 숨어 있을 줄을! 주여 이런 복이 왜 이제야 나타납니까? 내가 바치고 헌신하는 그 자체가 이미 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는 주의 이름으로 설교하고 죽는 그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의 행동을 차원이 달라서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충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육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육체로 생각하면 내 것이 따로 있어야 되지만, 성령께서는 ‘이미 주님의 것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차원이죠.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천국을 가고자 하지 않더라도, 천국 가는 것은 창세전에 여러분이 천국에 가도록 이미 조치를 다 해놓았기 때문에, 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 안 갈사람 같으면 십자가가 생각이 안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천국을 갈 사람은 본인이 거부하고 싶더라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나의 허락을 맡지 않고 불쑥 불쑥 튀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성경말씀도 생각나게 되어 있어요. “목사님! 저는 그런 대목을 본적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보게 하실 겁니다. 보게 하셔서 때를 따라 적당하게 기억나게 하실 겁니다.




왜?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발 “대신 죽으셨다”는 그 말씀 앞에서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을 때리고 징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한테 벌주지 마세요. 교회 지각했다고 해서 헌금 천원 더 하지 마세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기분만 더러워집니다. 버릇되면 다음에는 2천원 내야 합니다. 10분 늦는데 천원씩 올리는 그런 규칙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신 죽음을 모독하는 처사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당할 때, 비로소 내 자신을 알았다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헌금으로 2천원 더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늦게 오는 것이 정상이고 그동안 일찍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그래서 뭐든지 염려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가 우리 눈앞에 보이는데 쓸데없는 염려와 걱정으로 평생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고집이 완고하고 나 자신의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기에 생기는 현상이오니 다시금 십자가의 망치로서 저희를 두들겨 부수어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요, 주님 때문에 산자로 여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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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6   박윤진, 김대식 성도의 글의 특징 이근호 07-11-08 3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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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   서울, 경기 모임 안내 김명현 07-11-07 4012
603   20070309-(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16강녹취 오용익 07-11-07 3654
602   안산 성경 공부 모임 안내 정경애 07-11-07 3786
601   칠곡 강의 녹취록을 공개수배합니다. 정낙원 07-11-07 4222
      칠곡 강의 녹취록을 공개수배합니다. (1) 구득영 07-11-07 4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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