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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6 22:27:45 조회 : 3831         
20070907a 울산강의-창세기 18장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195)
 

20070907a 울산강의-창세기 18장


(강의:이근호 목사)






시간되었음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18장 지난번에 남았던 것 그것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그림을 하나 그려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이 있어요. 구성이라든지 체제, 체제 같은 게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구성, 체제가 이 지상, 산 있고 들 있고 이 지상에 그대로 새롭게 재구성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하늘나라의 그 배치라든지 체계라든지 체제라든지 그것이 그대로 지상에 여기에 맞추어서 재조립이 돼요.




왜 그래 되느냐 하면, 그래야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그 창조세계에 하나님께서 여기에 용납이 돼요.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만들어져야 이 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이 되고, 존재가 가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성요소와 동일하지 아니하면 이거는 딴 나라가 되지요. 쉽게 말해서 죄악 된 나라, 뭐 범죄 한 나라. 이것은 철거대상입니다. 철거해 버립니다. 하늘나라 설계도와 안 맞으니까.




그 설계도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설계도를 두 자로 하면 뭐라고 돼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되겠지요. 하늘나라는 하나님 언약대로 되듯이 그 밑에 있는 아랫동네 있는 지상의 나라도 재 철거되면서 재배치되고 구성이 되는 겁니다. 그 흘러나오는 통로를 지금 창세기 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통로를 가지고 언약이니까 앞에 뭘 붙입니까? 아브라함 언약이라 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뭐가 온다고 했습니까? 복이 오지요. 복을 다른 말로 하면 팽창입니다. 복이라고 생각할 때 복이라 하는 것은 쭉쭉쭉쭉 팍팍팍 팽창하는 거예요. 팽창하는 알갱이가 커지는 거예요. 그 알갱이는 하늘나라의 진수에요, 엑기스에요. 하늘나라에 안고 있던 진짜 엑기스가 진짜배기 알갱이가 지상에서 팍팍팍팍 이렇게 늘어나고 팽창할 때 그걸 복 받았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하늘나라에는 이 지상나라가 어떻게 설계되어야 되는가? 설계도가 있는데 그 설계도대로 안 될 때는 이거는 철거되어야 되고, 새롭게 재창조되는데 거기에 통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통로는 언약인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게 무슨 언약? 아브라함 언약이고,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하늘나라, 이게 쏟아지게 돼 있지요. 하늘나라 쏟아지면 이걸 한 자로 뭐라 했습니까. ‘복’이다 이 말이죠.




복이 된다는 말은 질적으로 따라 해보세요. 교체. 교체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합니까? 보통 이래 교인들이 묻잖아요.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하면 돼요? 교체하면 돼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새의 자랑거리라는 이 세상의 떡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는 그 떡과 교체해달라고 기도하면 되는 거예요. 참, 기도하기 쉽다. 이대로 못 살겠다. 교체를 해달라는 거예요. 나중에 아브라함 기도 나옵니다. 전체적인 윤곽을 알아야 돼요. 전체적인 모양새를 알아야 돼요. 




그러니 이걸 더 쉽게 말하면 뭐냐 하면, 공사 중이에요. 공사중. 하나님은 지금 공사하고 있어요. 지금 여기 오다 계단 보니까 뭐가 떨어졌다, 목사님 떨어졌다 하는데 여기 습기 차있고 아무래도 철거대상 같아요. 여러분들 기도하셔야 돼요. 교체하게 해달라고. 왜냐하면 우리가 봐도 이거는 철거대상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철거대상으로 안 보는 게 문제에요.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과 자가 자신과 자기 가족과 이것이 철거대상이라는 걸 자꾸 느끼지 않아요. 그냥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되고 관습상, 관행상 쭉 살아왔기 때문에 현재 내가 쥐고 있는 것, 이걸 포기하기가 참 힘들어요.




하늘나라의 질적인 하늘나라의 본질이 지상에 내려와서 그게 팽창될 때 그게 복인데, 사람들은 뭐가 팽창이냐 하면, 교체되는 이것이 늘어나야 복인데, 사람은 교체를 생각 안 하고 내 것을 팽창하는 그런 복을 달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는 아브라함의 기도가 여덟 번이나 기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아직까지 미련이 남아서 그래요. 의인 오십 명 있으면 멸 안하실렵니까? 없다. 사십 오명은요? 없다. 사십 명은요? 없다. 서른 명은요? 없다. 스무 명은요? 없다. 열 명은요? 없다. 없는 거예요. 이건 뭐냐? 전적인 철거가 되고 교체가 돼야 될 텐데 거기에 아브라함이 쉽게 잘 합니다. 라고 동의를 해주면 좋겠는데, 계속 여기에 뭔가 미련을 두고 아쉬워하고 아까워하고 집착을 하게 되고. 그런 모습이 아브라함에 쭉 나오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의 기도를 안 들어줬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하는 취지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을 통로로만 사용하지 의견 수렴하는 그러한 대상자로 사용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 점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성경 한번 잠시 찾아봅시다. 이사야 40장 14절, 1013페이지요. 이사야 40장 14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를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냐” 그러니까 하나님하고 의논할 사람 없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17절에 보니까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텅텅 비어 있는 거지. 있는 둥 없는 둥 그래 되는 겁니다.




하나님 일을 하실 때 사람을 볼 때 어떤 가치를 두지 않고 그냥 의논할 상대가 안 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있으면 있는 대로 그냥 불도저가 밀어붙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밀어붙이고 그냥 밀어붙이는 그런 주특기를 갖고 계셔요. 누가요?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우리하고 의논 안 합니다. 적어도 신랑이 되었으면 이 정도 파워는 있어야 돼요.




따라온 나. 내 팍팍 앞 길 다 열어줄게. 니, 나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걱정하지 말라. 나만 믿어라.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라. 앞 길 훤하게 터줄게. 나만 믿어. 내가 다 해줄게. 오빠 못 믿나? 내 다해 줄게. 이게 우리 신랑입니다. 평생을 짧은 인생을 살면서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 그거 다 부질없는 겁니다. 우리 오빠 되시는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하고 의논도 안 하고 밀어붙여요.




우리는 일을 너무 깔끔하고 너무 시원스럽게 걱정이 되서 우린 애타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주여, 일 너무 이렇게 오바하는 게 아닙니까? 그 일 안 터지면 난 죽는데. 그것마저 어떻게 좀 안 해 주나. 이렇게 우리는 아주 예산이 있어서 세상에 대해서 아직까지 뭔가 애착이 있어서 돈 한 푼 가지고 벌벌벌 떨고 있는데, 하나님은 시원하게 그만 일을 시원하게 처리해요.




이게 뭐냐? 무슨 원리냐? 교체원리에요. 이 합기도 도장 철거하고 콘크리트 치면, 아이고, 기사님. 이건 놓으면 안 돼. 이건 내 손 때가 묻는 건데. 이런 거 용납 안 되지. 그냥 확 다 시원하게 다 쳐버리세요. 확 다 쳐버리세요.




저는 미장원에 안 가서 모릅니다만 여자 분들이 미장원에 갔을 때 노인들은 몰라도 젊은 사람 같으면 미장원 가서 머리 칠 때 아마 상당히 아까워 한 대목도 안 있겠나,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생각 합니다. 시원스럽게 해달라니까 미용사가 밑에 확 쳐버리면 아이고, 아까워라. 그거 키우는데 기르는데 얼마나 애 먹었는데. 이런 거 안 있겠어요. 파마하는데 돈 많이 들었다 이런 거. 시원하게 밀어버리죠. 시원스럽게 쳐버린다고.




이런 공사를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공사가 통과하는 쏟아지는 통로 역할 하는데 그걸 아브라함은 뭐냐 하면, 니가 복 받았다 말이죠. 이질적인 하늘나라에 속해서 하늘나라가 너를 통해서 지금 밑으로 통과하는 중이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너로 인하여 복 받는 거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18장 1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건 17절이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어디 있나 이거?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뭘 받고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통로를 사용해서 천하 만민이 하늘나라의 그 본질, 하늘나라의 그 속성을 맛을 보는 그러한 것을 시원스럽게 누가 한다? 지금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하시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저거 죄가 많으니까 하늘나라 처리해 달라. 이렇게 한 적 없어요. 지금 소돔과 고모라 가는 것도 뭐든 찾아오는 것도 시원스럽게 여호와께서 다 처리해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 성경을 보면서 18장 보면서 지난번에도 언급했는데 제가 보디가드라 했지요. 한 분 여호와 빼놓고 양쪽에 보디가드라 했잖아요. 제가 말을 그렇게 쉽게 했는데 한번 보세요. 18장에 보면 눈을 들어보니까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오는데 여호와께서 오면 몇 분이 돼요? 여호와께 오면 여호와 분만 와야 되는데 여기 몇 분이 등장합니까? 세 분이 등장하죠.




객관식 들어갑니다. 1번, 세 분 다 여호와다. 2번, 한 사람은 여호와고 두 분은 천사다. 3번, 세 분 다 천사다. 몇 번 입니까? 문제 좀 어렵지요. 그게 해답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보면 18장 22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고” 여기 보면 세 사람 다 떠난 것 같은데 누구는 남습니까?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9장 1절에 보면, 날이 저물매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지요. 그럼 세 분이 오는데 세 분 중에서 여호와는 몇 분이고? 한 분이고. 두 사람은 여호와를 보좌하는 천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신학자들을 힘들게 만드는 게 뭐냐 하면, 18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나타나신다 했는데, 나타나신다는 게 음성으로 나타난다든지 뭐 하늘의 꿈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직접 나타나신다 해놓고 두 분의 천사와 함께 어떤 사람의, 쉽게 말하면 아저씨죠. 사람의 모습으로 세 분이 등장했다 말이죠. 그 중에 한 분은 여호와고 두 분은 천사가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의 아는 상식에 의하면 여호와의 얼굴만 봐도 우린 죽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모세 같은 경우에는 뒤를 봤지요. 수그리! 해서 수그리니까 주께서 얼굴 못 보게 수그리니까 지나가서 등만 보고 못 봤다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지금 세 사람이니까 설마 여호와께서 뒤돌아서 오진 않았을 거고, 분명히 얼굴을 앞에 대고 나타났을 아니냐? 그럼 여호와 얼굴 봤네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안 죽었네.




이런 경우를 신학자들은 굉장히 어떤 일관성을 정립을 해야 되는데 여호와는 어떤 분이다. 하고 어떤 분이다 정해놓으면, 성경 어느 구절에도 먹혀들어갈 정도로 딱딱 정답이 나와야 될 텐데 여기서 일관성을 수립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여호와께서 분명히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기 이전부터 여호와는 이미 사람으로 육신이 돼버린 셈이 돼버린다 말이죠.




그러면 요한복음에 예수님만 육신이 아니고, 그전부터 육신이 된 걸로 돼버리면, 그러면 예수님의 육신이라는 게 최초의 일이 아니고, 그 사람은 늘 했던 일이 돼버리니까 또 그 전체하고 성경 전체하고 안 맞는 경우가 있어요.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세 사람이 왔는 걸 가지고 이거는 삼위일체다. 이렇게 또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문제를 이렇게 봐야 됩니다. 뭐냐 하면, 사람처럼 왔지만 사람은 아니에요. 천사니까. 그러면 천사가 사람 모습으로 사람 모양처럼 나타났다는 말은 이게 반드시 천사가 해야 될 또는 여호와께서 해야 될 기능이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거예요.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 기능은 히브리서나 이런데 보면 이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택한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다. 다시 말해서 이게 히브리서 같은 경우에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누굴 대접합니까? 나그네를 대접하지요. 천사다. 라고 하면 대접 안 할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롯 사람들, 천사 떴다 하면 다 군장부터 면장까지 다 대접할 거예요.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천사를 학대한 것은 아무리 봐도 천사 같은 모습은 아닌데 사람은 좀 이뻐 보이고. 그런데 그걸 천사로 알아먹는 것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롯 밖에는 다른 사람은 천사로 안 알아봤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뭐냐? 기능상 하늘에 있는 하나님과 이 지상에 있는 우리 사이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 알겠나. 이런 사이가 아니고,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서로 얼굴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서로 다 알고 지내는 친밀한 관계라는 그 기능을 사람 모습으로 하는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이 말이죠.




문장이 길었습니다만 줄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하는 소리까지 마치 옆에서 그 소리를 다 들은 것처럼 다 듣고 계시다 이 말이죠. 우리를 심판하고 정죄하려고 듣고 계신 게 아니고, 우리의 아쉬운 거, 우리가 부족한 거 익히 다 아신다는 차원에서 훤~하게 니 속알이 하는 거, 니 속마음 하는 거, 니가 이 땅에서 힘들어하는 거 인간 대 인간으로 아는 것 이상으로 훤하게 안다는 그런 친밀함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계속 가지고 다니십니다. 가지고 상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한 마디로 말해 친밀성이에요. 어느 정도로 하나님은 저 위에 계신데 알겠느냐? 이 정도가 아니고, 마치 친구 만난 것처럼 아이고, 친구야. 친구 세 사람 오네. 아이고, 배고프겠다. 나그네 저 사람 배고프겠다. 굉장히 이상하게 도와주고 싶어. 배고프지요. 제가 발 씻겨 드릴게요. 마치 촌에 아낙네들, 이상하게 이웃동네 아는 사람 만나듯이 그러한 친밀한 관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바로 하나님과 자기 택한 백성 사이입니다. 그런 기능들이 있어요. 그러한 기능을 알려 준다 이 말이죠.




그리고 그 근거가 뭐냐 하면, 그 뒤에 18장 나오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여호와 대화가 꼭 사람들 대화하는 거와 농담 따먹기 하는 거와 똑같이 해요. 니, 웃었지.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이거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뭐냐 하면, 우리는 뭐든지 다 알거야. 너무나 근엄하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하면 얻어맞아. 귀때기 맞아. 이게 아니라 편한 친구가 우리 속사정 다 알아서 우리를 다독거려주는 양으로 편하게 아주 친밀하게 우리를 다독거려주고 인도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힘들다. 설마 하나님이 내 사정 아실까. 이렇게 괴로워하는 거 하나님 모르실거야. 이러한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하셔도 좋습니다. 가까운 내 식구보다 더 친하게 우리 속알이 하는 거 마음 아파하는 거 다 아시고 우리가 뭘 원하고 뭘 그리워하는 거 다 아십니다. 그래서 마치 아브라함은 뭐 같이 동행했다? 친구처럼 친구같이 동행했다는 이 말 나오지요.




그걸 12절 봅시다. 12절에 보면,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러분 어른이 어른다우면 이런 시시껄렁하고 이야기를 안 겁니다. 음, 으음. 하고 말지, 이걸 꼭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경대로 친구처럼 가까이 해주셨다 이 말이죠. 그 친구처럼 가까이 해주신 이유가 같이 놀려고 해주신 게 아니고, 기어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이 교체작업을 아브라함 너를 떠나지 않고 기어이 달성하고야 만다는 강한 그러한 관계성을 여기서 언급해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나태한다고 해서 우리가 삐졌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룰 일을 못 이루시는 게 아니고, 친구 이상으로 충분하게 우리에게 그걸 다 적용을 시킨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제가 언급한 걸 그렇게 봐야 아, 하나님은 귀에다 속닥속닥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저 천리만길에서 메가폰 들고 시키는 대로 해라. 안 하면 죽인다. 이게 아니라 그 몇 센티 딱 들어붙어서 땀 냄새 풍겨가면서 딱 붙어서 웃었지. 이런 식으로 마치 친구처럼 속삭이면서 하실 일을 다 이룬다 이 말이죠. 너무 외롭다고 느끼지 마세요.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혼자 아닙니다.




예레미야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 아브라함 이상으로 하나님의 친밀성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가 이래 고백해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선지자 안한다 할 때에 나를 꼬셔서 심지어 원어상 강간인데 날 유혹한다는 말인데 원어상 강간이란 뜻이에요. 강제로 추행해서 나를 선지자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군요. 라는 고백이 나와요.




보세요. 하나님께서 평소에 완전히 자기 한 집안 식구 아닙니까. 집안 식구 이상으로 밀착된 관계로써 딱 들어붙어서 예레미야하고 살아가요. 그러니 예레미야가 사람을 겁낼 이유가 없지요. 완전히 귀신처럼 붙어있는데, 여호와께서 귀신처럼 그림자처럼 딱 들어붙어있는데 그 몇 미터 떨어져있는 그 사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딱 들어붙어있는 여호와를 더 느끼겠습니까? 여호와를 더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는 거예요. 못할 소리 하는 건 아니지만. 할 소리 다 하시는 거예요.




학생들 위에 가방 들지요. 저도 어릴 때 소풍갈 때 가방 들어봤습니다만 먼 길 걸으면 이 가방이 땀나고 귀찮잖아요. 왜냐? 딱 들어붙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등어리에 딱 들어붙었어요. 여호와께서 등어리에 딱 들어붙어서 더워도 떼지도 못해. 도망칠 수도 없어요. 그분께서 밀착해서 다루시니까. 그러니까 이 18장 이 대목을 그냥 우리가 쉽게 생각해서 여호와 저기 계시고 아브라함 저기 있어서 이래 본다 하지 말고, 둘이 딱 들어붙었다고 생각하시면 18장이 이해가 됩니다. 야, 한 통속으로 굴러가는구먼. 한 통속으로.




그렇게 해야 그 다음에 뭐가 이해되느냐 하면, 18장 22절부터 33절이 이해돼요. 한번 봅시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라고 이야기했다고요. 지금 이야기하는 아브라함 태도가 오, 전능하신 주여. 주는 거룩하시고. 지금 이런 태도가 아니라니까.




방금 식사 같이 하고 동네 어른, 훈장 어른 두 사람 빠지고 혼자 남아가지고, 그런데 아저씨요. 어디 악인과 의인을 같이 심판하려고 합니까? 이런 식으로 따진다 이 말입니다. 오십 명 되거든 해주소, 그만. 해주소 이카니까 오십 명 안 되거든. 그럼 사십 명이라도 해주소. 안 되거든. 이런 식으로 딱 들러붙어서 이야기한다고. 그래야 18장이 이해가 된다니까. 이게 이해가 돼요.




오, 주여. 오십 명이요. 다시 한번 주여, 사십 명이요. 이런 식이 아니고, 식사 도중에 지금 이야기하는 식으로 그런 친밀감으로 한다 이 말이죠. 우리는 언제 그런 식으로 기도합니까? 그저 기도할 때는 구름아, 좀 비켜봐라. 구름 뒤에 안 보인다. 오, 구름 뒤에 계신 하나님이여, 저의 기도를 들으소서. 이거는 지금 연극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아내보다도 내 남편보다도 더 가까이 밀착해서 마치 소풍 가는 가방을 매는 것처럼 딱 들러붙어서 주여, 내가 이래 돼 있는데 지금 뭐가 문젭니까? 속닥거리면서 이야기할 때 그 기도가 힘들지 않는 기도가 됩니다.




주여, 손바닥을 이래 모을까요, 끊어 앉아서 할까요? 이거는 필요 없는 거예요. 턱 괴고 이렇게 기도해야 기도에요. 주여, 그런데요. 턱 안 빼나. 빼겠습니다. 속에 있는 것을 전부다 속닥속닥. 남편하고 이불 속에서 하는 이야기, 그것보다 더 친밀하게 속닥속닥. 무슨 그래 할 이야기가 많은지. 이야기하듯이 그게 기도에요.




그래서 기도는 여러분, 아줌마들 수다 떨면 피곤합니까? 하나도 안 피곤하죠. 전화걸 때 한 시간 해도 안 피곤해요. 듣는 사람이 피곤하지. 안 피곤하지요. 주님과 기도하면 안 피곤합니다. 속닥속닥, 속닥속닥, 속닥속닥. 우리 아가요 뭐 어떻고, 속닥속닥. 피곤하지 않습니다. 너무 멀찍이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십 명이요? 어, 오십 명 있으면 내 안 할게. 안 되거든요. 사십 다섯 명? 안 되거든. 결국 열 명. 열 명도 없어, 애야.




그렇다면 여기서 아브라함이 뭐라고 기도하게 된 동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의인과 악인을 같이 멸하시나이까? 이래 돼있다고. 의인과 악인을 같이 멸하시렵니까? 이래 나왔다 이 말이죠. 여기서 아브라함은 두 가지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실수는 우리 알다시피, 거기 빠졌는데 다시 18장 10절에 봅시다. “그가 가라사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이래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생기는 것은 어떤 경우입니까?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아올 경우에만 아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거기 사라가 웃었지요. 웃었단 말이죠. 흥, 어디서 이상한 나그네가 엉뚱한 도사가 이상한 소리 하느냐? 첫째는 아들 있음에 대해서 반신반의했지요. 일종에 반발한 겁니다. 웃었단 이 말이죠. 웃음이 좋아서 웃는 게 아니잖아요. 약간 비웃음기가 있지요. 아들 있음에 비웃었고.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의인과 악인을 같이 멸하십니까? 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이 두 가지에 의문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현재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러한 체제,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환경이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이 자체가 이제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을 나타내죠.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아브라함이 솔선수범해서 자발적으로 바뀌어진다, 안 진다? 이게 그렇게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던 17절, 18절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렇게 이루어나가시는 거예요. 그것도 친밀하게. 친밀하게 바뀌어나는 겁니다. 환경이 바뀌는 겁니다. 바뀔 때 아들 있음이 발생될 것이고, 두 번째 의인과 악인은 결단코 같이 멸망하지 않는다 이 말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의인은 여기서 9회말 투아웃에 극적으로 빠져나와 버리죠.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 의인이 빠져나온다는 아이디어를 아브라함의 기존의 환경 가운데서는 감히 상상도 못했지요. 왜 상상도 못했느냐 하면, 아브라함 나는 의인이다. 그리고 롯도 의인이다. 믿음 생활하니까 의인이다. 의인을 멸하면 안 되지. 라는 자기주장만 딱 쥐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자기주장에 하나님의 멸망이라 하는 것은 이게 틀이 안 맞는 거예요. 나, 의인인데 내 조카 잘 있는데 왜 죽이십니까? 이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틀이 안 맞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틀 자체를 붕괴시키고 악인은 악인대로 멸망시키고, 의인은 의인대로 건지는 방법은 이거는 하나님 나름대로의 새로운 방식이 도입됩니다. 극적 탈출이죠. 극적 탈출이라고.




제가 질문 하나 던질게요. 롯의 아내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분명히 악인이죠. 결과를 아니까. 그런데 그전에 아브라함이 이걸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왜냐하면 자기 조카는 의인인데 사모님이 의인 아니겠느냐? 자기 남편이 의인인데 사모님은 의인 아니겠어요? 목사 복음 아는데 목사 사모님 복음 모르겠느냐 이 말입니다.




김 집사 복음 안다면 최 집사도 복음 안다. 왜? 같은 교인이기 때문에. 저는 우리교회 교인들 전부 복음 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 사고방식이다? 목사인 이근호 사고방식이죠. 이거 하나님 인정하겠습니까? 택도 없지요. 인정 안 하지요. 그런데 만약에 내 식대로 내 방식대로 구원된다 하면 하나님 우리교회 빼놓고 딴 교회 불심판 막 던지소. 우리교회는 복음 아니까.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도한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 제발 우리 가정만은 살려주시고, 하는데 아이고, 내 조카가 거기 사는데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적어도 오십 명 있다면 봐주소. 나중에 열 명 있다면 봐주소.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다 누구 챙기기에요? 기존에 나만은 살고 싶다는 거. 나는 내 방식대로 하나님 따라달라는 그런 요구조건이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 가지 다 충족시키면서 방법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방법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조질 대로 조져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여러분한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세요.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걸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차후적으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정해진 사람 따로 있습니다. 라는 것을 우리는 믿게 되었어요. 그러면 믿음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나를 구원할거야. 왜? 난 믿으니까. 이거는 죄송합니다. 가짜 믿음입니다.




이거는 나를 주인공으로 해놓고 나를 빼돌리는 거예요. 무조건 나를 빼돌리는 거예요. 나는 구원에 집어넣어놓고 그 다음에 나 믿는 사람 몇 명씩 구원하자. 이쪽이잖아요. 그러니까 백날 믿습니다. 해놓고 그 주인공 누구에요? 지는 일단 챙겼어. 그런 믿음은 불신자도, 아브라함도 불신세계에 있었으니까. 불신세계에서 종교라고 있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 갖고 있어요. 그 종교를 주님께서 세 사람은 부수면서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건지고 롯은 롯대로 건지는 겁니다. 그걸 부수면서.




그래서 제가 그런 글에 이런 거 해놨어요. 주님께서 일하실 때 기존에 내가 알았다 하는 것이 항상 망가지고 부셔질 각오를 하시라 이 말이에요. 왜? 우린 자꾸 누적되거든요. 사람이 누적이 되면 누적된 것이 우리를 교만케 만들어요. 자꾸 누적된 것이. 자아가 자꾸 누적이 되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누적된 것을 자꾸 무효로 돌리시는 그런 일들을 하시죠. 항상 예상 밖에 일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힘든 이유가 항상 예상을 하고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힘들어요. 사람이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자꾸 사람은 아침 되면 뭔가 기대를 하게 되고 예상을 합니다. 근데 예상대로 됩니까, 안 됩니까? 되지도 않고 또 되더라도 그 동안 초조와 불안은 얼마나 힘들어요. 돼야 될 건데, 하나님이 도와줘서 돼야 될 건데. 얼마나 힘들어요. 예상과 기대에 이익을 비켜가면서 주께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상과 기대한다는 것은 이거 어디에 속한다? 옛날 우리 땅에 속하는 거예요. 밑에 있는 동네에 체계라면, 그걸 비켜나가서 하늘의 본성이 쏟아지는 것은 그건 하나님의 재구성, 그러니까 하나님의 교체 중에 있지요. 그걸 복으로써 내려와서 하늘나라의 소식이 하늘나라의 능력이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이렇게 부수는 방향으로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18장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이삭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고, 다시 와서 아들 주겠다. 니 웃던, 비웃던 어떻든 간에 내가 한다면 하는 거야. 내가 다시 와서 아들 있다면 생기는 거야. 하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생각했던 그 방식 말고, 전혀 예상 밖의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악인과 의인은 기어이 같이 멸망 안 당하도록 의인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약속대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가 예상하는 대로 되는 게 아니고, 항상 예상을 빗나가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대로 차곡차곡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거. 그게 하나님 방식인데,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게 있지요. ‘원치 않는 길’ 원치 않는 길로 너를 인도한다.




지난주일 날인가 설교할 때 이래 했지요. 예수님께서 누구한테 했습니까?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지요. 네가 원치 않는 길.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내가 너를 인도할 게. 원치 않는 길이란 말은 이미 뭡니까? 누가 예상한 겁니까?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한 게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할 때 철저하게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안 하면서도 우리를 비켜가서 원치 않는 길로 우릴 인도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 원치 않는 길이었어요.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온 게 원치 않는 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분이 또 여기 A라는 지점에서 원치 않았지만 여기서 또 뭐가 생깁니까? 우리가 원하는 게 있고 예상한 게 있지요. 그것 또 비켜 가십니다. 2008년도에 여러분 원치 않는 길로 인도받고 거기서 또 기대한 게 있을 거예요. 우리 딸내미는 또 뭐 재벌 2세하고 결혼하고, 이런 게 있을 거예요. 그것도 원치 않고. 또는 놈팡이하고 붙든지. 알 수가 없어요. 2009년도에 또 원치 않는 게 있어요.




그렇다면 목사님, 아예 예상도 안 하고 기대도 안할 랍니다. 천만에 말씀. 예상도 안 하고 기대 안 하는 그 대가로 뭔가 기대하는 게 있어요. 주여, 나 다 손뗐습니다. 나 뭐든지 안 합니다. 안 하니까 이것 좀 해줘야지요. 라고 하는 게 있을 거예요. 그거, 박살납니다. 그거 또 깨져요. 안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랑한테 맡기세요. 오빠 알아서 해요. 이러면 끝나는 문젭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오빠 약속대로 그냥 옆에서 다 해줘요. 좁은 길로 우리가 좁은 길 안 가도 됩니다. 좁은 길로 다 가게 하세요. 이웃 사랑하려고 나대고 이러지 마세요.




테레사 수녀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다고 하는데 그게 뻔한 거 아닙니까?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구제라도 나서야 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구제라도 해야 되겠어요. 진짜 테레사 수녀가 믿음 있으면 예수 믿으라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열중 안 해요.




사람이 믿음 없으면 딴 짓 하게 돼있어요. 아프가니스탄 갔던 그 선교하는 사람들 믿음 있으면 자기 샘물교회 전도합니다. 이건 교회가 아니라고. 이 딴 게 무슨 교회고? 그런데 믿음이 없기 때문에 뭔가 허한 게 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간 거예요. 두 명은 개죽음 당하고 있고.




사람들이 선교라는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요. 선교라는 이름의 원하는 길을 가는데, 진짜 선교는 원치 않는 길을 인도할 때 선교에요, 그게. 이 자리에 있는 게 선교에요. 이게 전도에요. 그럼 이 자리 계속 있고 싶다. 그건 전도 아니지. 또 딴 길 새게 만들어요. 전도는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해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과정이 다 선교요, 전도입니다. 왜 새삼스럽게 전도, 선교를 하려고 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게 그건데. 전도고, 선굔데. 왜냐하면 내 원하는 대로 안 되니까. 모든 일이.




자, 지금까지 강의한 거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질서가 아브라함이라는 극히 인간적인 모습, 비웃고, 뭐 의인을 멸하면 됩니까? 그런 식으로 합니까? 비웃던 거. 그러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나온 것은, 결코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 못하는 분이 아니라는 거. 분명히 구분해서 악인만 골라서 멸망시키고, 의인은 반드시 거기서 끄집어내 준다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이 알게 돼요. 




인간의 기대는 아니지만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기어이 인간 방식이 아닌 인간이 모르는 방식, 다른 방식으로 심판을 감행해서 악인은 악인대로 의인은 의인대로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서 하신다 이 말이죠. 이게 얼마나 인간의 방식이 아닌 걸 보여주기 위해서 뒤돌아보지 말라 하는 이 대목을 집어넣었어요.




‘뒤돌아보지 말라’는 이 계명을 롯도 몰랐고, 아브라함도 몰랐어요. 이게 누구한테만 적용 되는지 아무도 몰랐던 거예요. 누군 알아요? 하나님만 아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도 도대체 이 계명을 그냥 나가라 하면 끝나는 건데, 뒤돌아보지 말라 하는 저거는 누구 용도로, 누구를 기어이 못 가게 갈고리로 채기 위해선지 아무도 몰랐던 거예요. 롯의 딸인가? 아무도 몰랐는데 나중에 하나님이 하는 일을 딱 보니까 하나님이 하는 어떤 계명이나 어떤 말씀도 기어이 악인을 지옥에 집어넣는 그게 다 필요한 계명들이었습니다.




제가 하나 예를 들게요. 목사님, 저는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 줄 믿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 말씀대로 오직 예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는 거 인정합니다. 인정하는데 간음은 해서는 되겠습니까? 간음만큼은 간통만큼은 그거는 예수 믿는 것 더하기 간통은 딱 그것까지 추가시켜서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면, 그 사람은 기어이 갈고리로 뭘 끄집어냅니까? 그걸 거론을 잡아서 그 사람 지옥, 천국 넣는다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이라면, 딴 건 다 좋은데 할례를 행해야 구원받을 건데. 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뭐라 했습니까? 율법의 할례에 얽매이는 놈은 그리스도에게 무슨 자다? 떨어진 자다. 딴 거는 다 좋은데 이거 하나 더 남겨놔야 되지 않습니까? 뭐 있는 거요? 그거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그런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건성으로 예수 믿는다고 백날 헤쳐도 결국 하나님은 기어이 그가 거론한 추가된 계명에 걸려서 그건 천국에 카트 당하도록 그렇게 조치하니까 구원문제에 대해서 남들의 구원문제 너무 신경 안 써도 좋습니다. 여러분. 그건 우리 오빠께서 아주 일을 잘 하셔요.




죽은 우리 엄마 왜 지옥 보내십니까? 안 믿게 하십니까? 라고 불평하겠지만 죽은 자기 엄마 다시 불러와도 성경 안 믿긴 마찬가지입니다. 부자가 말하기를 내 동생 두 명 있는데, 두 명인가 네 명인가 있잖아요. 다섯 명인가. 내 동생 다섯 명 있는데 어떻게 좀 나사로 보내서 해 주이소.




그거 누구 방식이에요? 지금 아브라함 방식이라고. 내가 예상한 방식대로 심판하고, 내가 예상한 방식대로 구원하겠다. 하는 이거 완전히 빗나갑니다. 그것들한테는 다른 사람 백날 부활시켜 해봐야 그들은 안 믿게 돼있다. 이 성경 안 믿으면 안 믿는다 이 말입니다.




사람은 인간은 옛날 버릇이 있어서 자꾸 구원방식도 자기가 익히 아는 방식을 자꾸 거기다 들이대요. 이 방식 같으면 나도 행할 수 있는데, 이 방식은 잘했는데. 난 딴 거는 몰라도 온유한 건 잘하니까 온유하게 예수 믿습니다. 그거 했으면 좋겠는데. 자꾸 이렇게 하는 거, 그거 다 걸러냅니다.




결국은 뭡니까? 결국 내가 하는 건 뭡니까? 교체라고 할 때 누구도 포함된다? 아브라함이 익히 아는 이 모든 세계관도 같이 교체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주께서 주의 나라를 구원합니다. 왜? 그래야 아브라함은 자기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혭니다. 라는 것을 아브라함조차도 고백해야 돼요. 나, 아브라함입니다. 나도 한 건수했다. 이게 아니고. 주여, 나조차도 철저하게 내 방식 사용하지 않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내가 알고 있는 구원방식 사용하지 않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평소에 여러분 사시면서 뜻대로 안 되거든 지금 오빠가 신나게 좁은 길로 인도하신 줄 생각해야 됩니다. 뭐 하는 족족 안 될 때 복 받은 겁니다. 사실은 모든 성도가 하는 족족 안 되게 돼있는데, 가끔은 착각하기를 목사님, 열댓 개 했는데 두 개는 맞던데요. 그 맞은 거 오해하신 겁니다. 그것도 안 된 건데요, 괜히 맞다고 착각하신 겁니다. 감사할 것은 절대로 내 뜻대로 안 되게 구원시킨 거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지금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자, 19장 좀 더 해봅시다. 두 사람이 그러니까 18장에서 친밀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마치 대화하듯이 기도하고, 대화하듯이 기도함으로써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속에 있는 속성을 자기의 본성을 유감없이 다 드러냈다. 오십 명, 사십 다섯 명, 인간적인 성질 다 드러냈고. 사라는 사라가 웃었다.




이거는 감히 하나님이 영광 중에 구름 타고 오시면 웃겠습니까? 안 웃지요. 벌벌 떨었을 거예요. 너무나 초라한 행세로 나타났기 때문에 ‘헤헤’ 막 웃었던 거예요. 그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본성을 다 드러낼 정도로 아주 우리하고 같은 레벨에서 속삭이듯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하나님 자기 일들을 다 일구어나가시는 겁니다.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둘이 나타났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우연이죠. 하필이면 우연히 거기에 천사 둘을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공통점 찾습니다. 아브라함이 누굴 대접했다? 세 사람 나그네 대접했다. 롯이 마침 누굴 알아봤다? 천사 둘 알아봤다. 롯이 천사다 하고 알아봤는지 그건 모르겠는데, 하여튼 저 분은 롯만이 알아듣는 롯만이 알아 먹히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도 믿는 자만 예수가 메시아인 줄 알아먹고 다른 사람들은 똑같은 모습을 손으로 만져도 못 알아먹게 돼있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자로 믿는 것은 복 받은 겁니다.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알아줘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섭리에 의해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연구 백날해도 예수는 보통 인간이지 메시아 아닙니다. 어디 우리나라 메시아 없어서 남의 나라 메시아 수입합니까? 유대나라 유대인을 왜 믿어요. 차라리 우리보고 일본 순사를 믿으라 하지. 일본 순사 믿겠습니까? 원수 진 놈인데. 예수님께서 일본순사로 왔다. 우리가 믿겠습니까? 빠가야로 해서 안 믿잖아요.




그런데 저 예수는 우리가 믿잖아요. 예수는 알아 모신다고요. 국경을 초월해서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데 왜 그렇게 좋아해요. 그게 구원될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천당 가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결국 만나야 될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금 부활하셔서 예수님을 알아 모시도록 그렇게 하신 겁니다. 마치 롯처럼. 마치 아브라함처럼.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두 사람 보고 일어난 사람은 롯 밖에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는. 이미 여러분들이 예수 믿었으면 여러분 인생은 이미 따 논 당상이에요. 여러분들이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소원대로 안 된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안 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마음가짐을 이래 먹으세요. 내 뜻대로 하는 족족 주께서 알아서 안 되게 하시는 쪽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속에 이루십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0분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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