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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01:02:13 조회 : 3960         
200년 대구강의 (스토아 학파) - 정 목사님이 정리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았는데, 누군가가 대구강의도 좀 정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 : 구득영(IP:203.223.97.223)

대구 05년 11월 21일 강의(스토아 철학)
                                                                                                             강의 이근호   정리 정석훈, 구득영


◈ 고대철학 - 솔직한 나를 찾아서 !!


우리가 고대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고대철학이든 현대철학이든 같은 인간인데, 이렇게 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 인간을 탁탁 다 털어서 나오는 것, 그 사고방식을 통 털어 보면 어떤 것이 나올까? 오히려 그것이 고대사람들에게서 더 잘 나오는데, 왜냐하면 현대는 과학적 사고 방식의 시대이기 때문에, 자기의 진심을 자꾸 감추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는 자연을 정복하는데 너무나 분주하기에, 실제로 자기 마음이 어떤 마음의 상태인지, 자기 자신을 탐색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기술을 연구해야 하고 그래서 돈을 모으고 자본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아마 고대 철학자들이 보았다면 너무나도 물질 중심적이라고, 세상적인 재물을 탐하는 현대인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보다 고대인을 살펴보면 인간의 마음상태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시대는 과학으로 인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을 그야말로 상실했기 때문에, 고대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대철학을 해야하는 첫 번째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그 당시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고대철학이 신학으로 이어지는데, 즉 고대철학들은 전부가 다 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재 3페이지에 나와 있는데, 오늘 공부는 '스토아 학파'로, 여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두 가지의 흐름이 있고 그것이 중첩되어 있는데, 그 하나가 바깥에서 찾는 방식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신이 바로 바깥인 것이다.


◈ 나는 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재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인간이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고 이것이 상호 중첩되어 왔다. 첫째는 자기 정체성을 인간 바깥에서 찾는 방식이다. 서양 중세 철학에서, 모든 사물은 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플라톤 철학에서 모든 사물은 그것이 존재의 형상으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 평가된다. 형상들 중의 형상, 즉 선의 형상을 원점으로 본다면, 모든 사물은 그 원점으로 떨어진 거리에 따라 존재론적으로 배열되고 가치론적으로 평가된다. 】


여기 플라톤의 존재의 형상이 바로 중세에는 신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에 대한 평가는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라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말이다. 형상(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가 중요한데, 즉 인간은 자기 독자적으로는 자기를 알 수 없고. 바깥의 위대한 존재자를 설정해서, 자기가 자기 밖 존재로부터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가에 의해서 짐승 같은 인간인지 아닌지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으로부터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인간답고, 많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짐승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고대인들은 상당히 겸손하고 마음을 낮추어서 살아가니, 요즘 현대인들과는 얼마나 다르냐는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 할머니들의 삶을 보면, 참으로 인정이 있고, 자연과 신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고 순하고 공손하다는 것이다. 그 추운 날 갓바위 올라가서 비는 것을 한번 보세요. 현대인들은 돈주고 올라가라고 해도 안 올라 갈 것이다. 이렇게 신에게 엎드리는, 굴복하는 자세가 현대인에겐 없다는 말이다. 이들은 주로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인 아프리카나 이슬람 쪽에는 있는데, 잘 사는 나라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갓바위가 옛날 이야기고, 이슬람이 못 사는 나라인가??)


저는 예배시간에 휴대전화가 울리는 것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나는지, (단순히 공중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손님하나 더 끌려고 그냥 전화가 오면 나가서 전화를 받는다는 것이다. 휴대폰 끄고 예배에 좀 몰두했으면 좋겠는데, 왜 그것이 안 되는고 하니,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인데), 이제는 좀 산다는 것이다.


◈ 과학시대 - 나를 상실하고 !!


그 동안 사람들은 무식해서 신에게 빌고 바쳐야 복을 받고 살 줄 알았지만, 이제는 과학시대를 맞이하며 이제는 알만큼 알았는데, 즉 신이 없어도 먹고사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진심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과학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고대철학을 공부해보면, 그 당시는 오히려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즉 하루종일 하나님만을 생각하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이렇게 과연 24시간 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유대인들이 그렇고 이방인들도 그러한데, 그것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대철학을 공부하는 세 번째 이유가 되는데, 신에게 무조건 마음을 낮추는 것이 복음적이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고대인들을 모델로 삼아서, 신에게 무조건 벌벌 떨고 엎드리는 것이 전혀 복음적이 아니라는 것을 공부해보자는 것이다.


◈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 사람의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 교재의 제목부터가 상당히 어렵고 도발적인데, "인간은 왜 행동하게 되는가?" 라는 것이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잘 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사람의 행동 자체에 시비를 거니 말이다. 차라리 "사람의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면 몰라도, 사람들은 그냥 단순히 살아있기 때문에 행동하는 것으로 쉽게 여기고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과연 살아있으면 행동하게 되는가? 여기에 대해서 앞으로 스토아 학파, 라이프니치, 화이트헤드 순서로 공부해보겠는데, 그것이 제대로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이번 시간은 스토아 학파를 공부하겠는데, 교재를 한번 보자.


교재 서론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성도가 아닌 자가 성도이고 싶어 할 때, 그들은 어떤 행위론과 윤리관과 인생관이 펼쳐보는가?】


무슨 말인고 하니, 성도 아닌 자가 인간 본성에 남아 있는 신에게 굴복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행위와 윤리와 인생관을 나타낼 때, 과연 그것이 복음적인가를 한번 검토해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너무나도 많은 한국교회가 복음도 모르면서 신에게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을 마치 복음으로 간주하고, 그렇게 쳐주고 있는데,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서 확실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재 3페이지를 보자.


【형상들 중의 형상, 즉 선의 형상을 원점으로 본다면, 모든 사물은 그 원점으로 떨어진 거리에 따라 존재론적으로 배열되고 가치론적으로 평가된다.】


형상들 중의 형상, 이것이 바로 신이고 최고의 선인데, 바로 이 원점으로부터, 즉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어둡다는 것이다. 그 밝음에서 점점 멀리 떨어지니 말이다. 이렇게 점점 떨어져서 어두워지면 그것이 악함이라는 것이다.


◈ 스토아 학파, 어거스틴, 루터, 칼빈 - 악은 선의 결핍이다. !!


그러니 이 이론에서는 절대적 악함은 없는 것이다. 선의 결핍을 악함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 주장인데, 이것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루터와 칼빈이고 말이다. 이렇게 악을 단지 결핍으로 보는 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복음인가?


우리가 성경에 나온 십자가 복음을 대할 때 그냥 맹탕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으로 우리에게 오실 때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정죄하고 그 복음으로 갈아치우길 원하시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현재 알고 있는 자기의 지식으로 수습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갈아엎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게 선으로부터 멀어질 때 악함이고, 그래서 절대 악함이란 없고, 선이 땡기는 대로 가까이 가기만 하면 선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선이 땡긴다" 라는 말은, 선이 우주 전체를 어떤 식으로 관리하고 있는가를 알아서, 그것만 안다면, 즉 그래서 선에 가까이 가게 되면, 이 세상은 선함이 가득 차 있는 상태가 되고, 그것이 바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교재를 보자.


【질료는 일정한 층위에서 형상이 결여된 가능태이고, 형상은 이 결여를 채울 규정성이다.】


여기서 질료는 물질로 보면 되는데, 이 물질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려고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형상이 곧 신의 형상이고 말이다.


【이 형상들은 존재함의 정도에 따라 시간 속에서 목적론적 계열을 이루며, 가능태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듯 최고의 형상을 향해가면서 현실태들로 변환된다.】


가능성이 있는 물질들이 자꾸만 변하게 되는데, 그렇게 변하고 변해서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그 마지막에는 신이 놓이고 말이다.


【질료는 형상을 그리워한다. 그 마지막에는 근원적 능동인(因)이자 동시에 목적인(因)인 신이 놓인다.】


무슨 말인고 하니, 스토아 학파에서의 주장은 모든 사물 존재에서는 다 신의 형상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즉 원숭이나 개, 돼지 등에도 다 신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다.


◈ 스토아 학파 - 모든 사물 존재에서는 다 신의 형상이 있다 !!


계속해서 교재 3페이지를 살펴보자.


【신을 생각할 때는, 이성적으로 신이 정해준 운명과 질서를 곱게 수용하면 그만이다.】


그렇지요?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내가 어떻게 행복해 줄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만사가 신의 뜻이야" 라고 수용하면 그만이다는 말이다. 플라톤과 같은 스토아 학파의 선배들의 이렇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성적으로' 라고 하는 것은 따지는 것인데, 이렇게 따지고 또 따져 보아서, "만사가 다 신의 뜻이야" 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행복은 저절로 온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을 교회에서 말하면 복음적이라고 생각할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철학임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에서 투쟁해야 할 때는 이성보다 의지가 우선이다.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실제 과제로 주어진다.】


그들은 말하기를, "무엇을 아는 것 보다, 무엇을 해야 되는가가 인간을 번민케 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질문하기를, "알기는 아는데, 아는 것 말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해답을 제시해 달라" 라는 것이다.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해답을 제시해 달라는 말이다. 바로 그 일을 철학자들이 한다는 것이다.


◈ 존로크, 룻소 - 사람은 아는 것만큼 행동한다 !!


근대철학인 존로크나 룻소 등에 오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사람은 아는 것만큼 행동한다" 라고 하는데,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 라고 하면, "너는 알면 알수록 행하게 되어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에 오면 말도 안 된다는 것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즉 사람은 안다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죤듀이 - 안다고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연습해야 한다 !!


20세기 미국 철학자인 죤듀이는 말하기를, "사람이 안다고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연습을 해야 한다" 라고 했는데, 예를 들어서, 박지성이 축구를 할 때 보면, TV 해설자는 박지성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너무나 잘 알지만, 그러니 자기보고 그렇게 뛰라고 하면 못한다는 것이다. 이승엽이 하는 야구도 그렇고 말이다. 말이야 얼마나 잘 하는가?


이 점이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인간은 연습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연습만 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을 지금의 미국으로 만든 기초가 된 철학인 것이다. 흑인, 백인, 황인종, 그런 것에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미국 교육 - 진화론적 교육!! 끝이 없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미국의 교육철학인데, 즉 교육의 목표는 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교육, 즉 죤듀이의 교육은 진화론적 교육으로서, 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끝이 있지만, 즉 신의 경지 말이다. 그러나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교회교육이라고 해도, 일단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끝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끝이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연약하다. 그러니 어떻게 신이 경지에 도달하겠나?" 라고 하면 안되고, "하면 된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농땡이들이라도 방치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옛날에는 공부를 못해도, "넌 태어날 때부터 그런 은사가 없어서" 라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되었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아하, 연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습만 하면 된다. 연습하는 방법론이 나빴던 것이지, 방법을 제대로 해서 계속 연습하면 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죤듀이 교육철학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0교시 수업을 하고, 자율학습을 하고, 또 학원도 가야 한다는 말이다.


◈ ① 하면 된다 !! ② 연습을 하지 않으면 떨어진다 !!


이것이 교육철학의 첫 번째인 "하면 된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떨어진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되어도 할말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이가 많으면 자연히 연습을 게을리 하니 말이다. 영감님들은 오후 두 시에 낮잠을 자야하는데, 젊은이는 낮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낮잠시간에 연습을 하고 말이다.


◈ 죤듀이 - 하면 된다 !!


그런데 이런 것들이 죤듀이의 철학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스토아 철학이나 에피쿠로스 철학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힘이 좀 들어도 고대철학을 공부해보자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교재를 보자.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실제 과제로 주어진다.】


고대 철학들의 선배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했겠지만, 즉 알면 행하게 되어있다고 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와서는, 인간의 의지로서 결정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성은 보편적인 것을 겨냥하지만, 의지는 개별적인 것을 겨냥한다.】


참으로 이 말 한마디가 무서운 것인데, 여기서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고상한 양심이나 윤리, 도덕,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등등으로, 이런 것은 보편적 가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해서 개별적이란 말은, "너야 죽든 말든 나는 장사해야만 하겠다" 라는 것이다. 즉 "손님이 너희 집 통닭이 아니라, 우리 집 통닭을 먹게 해야 하겠다" 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래도 학교를 다닐 때는 보편적 가치를 배우게 되지만, 그러나 일단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개별적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은 주로 대학생 때나 하고, 나오면 자기 밥벌이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꾸만 신학을 하려는 이유가, 보편적으로 머물러 있고, 개별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적인 것으로 나가서 다시 보편적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이 바로 교회 장로들이라는 것이다.


◈ 장로들 - 개별의지의 역군들 !!


장로들은 개별의지가 강한 사람들인데, 즉 젊었을 때 한껏 벌어서 늙어서 헌금을 많이 해서 남들은 집사로 머물러 있지만 자신은 그들을 제끼고 장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개별의지가 얼마나 강한가? 이런 개별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교회만 부흥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자기 교회만 챙기는 것이 개별적이니 말이다. (이웃교회도 생각하는 보편적 가치는 발붙일 자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스토아 학파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가? 플라톤의 보편적 가치, 즉 인간의 보람있는 삶, 그런 것 다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지 자기 개별적인 것이 아니기에,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운명은 개별적으로 개척해야 것이지,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자기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결혼정보회사 남자직원들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 그들은 주된 고객인 여성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해서 여성학 박사들이 즐비한데, 그런데 정작 자기들은 여자를 그렇게 잘 알아도 쉽게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공부를 해서 보편적으로는 잘 아는데, 그러나 문제는 정작 개별적으론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사람들을 평가하는 특성 중에 하나가, 한국민족을 개별적인 민족으로 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평가하고 말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도 잘먹고 잘산다는 것이다. 개별적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슬람교 쪽은 너무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금요일마다 예배를 드린다고 엎드리고 난리를 피운다는 것이다.


◈ 교회 - 동업자 의식의 총화 !!


한국사람들이 전 세계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동업자 의식 때문인데,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를 세우고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식한(?) 이슬람은 무조건 엎어지고, 천주교는 신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즉 이들은 각개 전투에 약한데 반해, 의지의 한국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각개 전투에 매우 강해서, 그래서 어디가도 잘 산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사실 현대인들이 다 그러한데) 보편적인 것은 돈을 좀 번 이후에나 따지는 것이지, 지금은 앞가림하는데 바쁜데, 그러니 지금은 보편적이고 하는 것을 따질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토아 학파가 얼마나 인간성에 대해 도사인가 하는 것이다.


◈ 플라톤 - 보편적이고 이성적 !!  스토아 학파 - 의지적이고 감정적 !!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이고 이성적이라면, 여기에 반해서 스토아 학파는 의지가 중요하고, 그렇다보니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노동이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이성은 합리적인데 반해서 의지는 감정적이다. 이로서 인간의 노동이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을 한다. 노동이란, 인간이 몸을 써서 세계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를 통해서 스스로도 변화해나가는 과정이다.】


여기 뒷부분에 보면 "그 변화를 통해서 스스로도 변화해나가는 과정이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말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19살 때에는 자기가 군대에 갔다오고 해도 26살 때도 동일한 세상을 볼 것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그대로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6살이 되니 이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19살에서 26살이 되는 동안에 그냥 세월을 허송한 것이 아니라, 7년 동안 자기가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 '나' - 고정된 '나'가 아니라, 변화되어 가는 '나' !!


이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의 주장인데, '나' 라고 하는 것은 고정된 '나'가 아니라, 변화되어 가는 '나' 라는 것이다. 좀 나쁘게 말하면,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나' 라는 말이다.


사실 이런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예를 들자면, 30살에 검사가 되기 이전에는 땅 투기하는 놈을 잡으려고 설치다가, 정작 자기가 40세가 되고 보니 자기가 땅 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마누라를 시켜서 하겠지만 말이다.


◈ 스토아 학파 - 너도 장담하지 못한다 !!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이 어떠니 우주가 어떠니 말하는 너도 장담하지 못한다" 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자기의 그런 태도가 현실을 똑바로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은 자기가 변하지 않고 이 세상도 불변할 것 같지만, 그러나 자기의 그런 세계관이 자기에게 영향을 주어서 자기를 변하게 하는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변하게 된 자기가 또 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 무엇이 인간을 변화시키는가? - 노동 !!


무엇을 통해서 변하게 되는가? 그것이 바로 노동을 통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것을 조금 전에 예를 들기를, 19세에 노동하기 전의 이 세상이 26세의 노동한 후에는 달라졌다고 말했던 것이다. (땅 투기하는 검사도 그렇고 말이다.)


경북 칠곡에 있는 농사꾼 이야기인데, 이 양반은 무려 14만평의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데, 우리 나라 최초로 벤츠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버스 운전사였는데, 아버지 뜻을 따라서 500평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그냥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농사를 지으면서 예상치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수확의 기쁨을 더 누리기 위해서 그 다음에는 옆의 땅을 사서 넓힌다는 것이다. 이것은 돈을 버는 차원이 아니라, 돈이 되고 안 되고는 그 다음 문제이고, 자기가 버스를 몰 때 미쳐 몰랐던 수확의 기쁨, 즉 열매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을 자꾸 사다보니까, 현재 자신의 땅이 10만평이고, 임대는 4만평으로, 그런 방식으로 자꾸만 늘어간다는 것이다.


이 양반이 올해 쌀 농사를 해서 총 매출이 6억으로, 그야말로 우리 나라 '농사꾼, 신지식인' 이라는 것이다. 물론 중고벤츠를 타지만 말이다. 자기는 수확의 기쁨을 스스로 농사를 짓기 전에는 몰랐는데, 그냥 농사를 지으면 밥이나 먹고 살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수확의 기쁨을 알게 되니 그것에 몸을 바쳐버렸다는 것이다. 즉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노동해서 얻은 결과에 그만 자기 스스로 반해버렸다는 것이다.


◈ 스토아 학파 - 나를 변화하게 하는 것은 무조건 좋다 !!


이것은 비단 이 농사꾼 이야기가 아니라 사업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인데, 물론 처음에는 돈을 벌려고 사업을 했지만, 그런데 점차 그 이후에는 사업 자체에서 자신이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말이야 "이 사업을 통해서 인류에 봉사하고 국가에 봉사한다" 라고 하지만 말이다. 물론 너무 돈만 밝히게 되면 사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노동 자체가 즐거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스토아 학파는 여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나를 변화하게 하는 것은 무조건 좋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의 인간분석 결정판이라는 것이다.


◈ 인간 - 늘 새로운 것을 찾아서 !!


인간은 신선한 것을 원하고, 새로운 감각을 원하고 있는데, 스토아 학파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플라톤 사상을 이어받은 자들을 굉장히 욕을 했다는 것이다. 짐승같이 감각적이라고 말이다. 그래도 인간이라고 하면 착함, 완전한 선, 궁극적 정의 등등, 그런 것이 있어야 인간다운 것이지, 늘 새로운 것이나 찾고, 새롭게 유행하는 노래나 옷,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나 에피큐로스 학파는 주장하기를,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천박하기 그지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천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정짓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 스토아 학파는 말하기를, 보편적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것이지, 개별적으로 본다면 이렇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천박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사무실 인테리어를 바꾸고 새롭게 하는 이유는, 물론 그렇게 여러 가지 변화를 통해서 자기 사업을 번창시키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자기 스스로가 변화 없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교회가 이렇게 버티고 있지만, 조금 오래 있으면 시들해져서, "목사님, 이사갑시다. 교회를 지읍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교인들이라는 말이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장로님보고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말이죠.


바람둥이가 여자를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바람둥이에게 한 아내로 평생동안 산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라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독교 계통에서는 이것이 죄악 된 것이라고 해서 자꾸만 억누르는데, 이렇게 감추고 억누른다고 해서 현실이 아닌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다 까밝혀야 하는데, 그래서 무엇이 현실인지를 그 전체를 다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게 되면, 스토아 철학은 기존의 정통 철학으로 여겨지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과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에는 들뢰즈 철학이 이 스토아 학파의 맥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현대인들이 과학이니 돈이나 기술 등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 스토아 철학이 참된 자아를 소개해주고 발견토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엄청 감명을 주고 있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4페이지를 봅시다.


【노동과 더불어 중요해진 개념으로 떠오르는 것이 '역사'이다. 역사라는 것은 더 이상 어떤 섭리의 구현이나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부딪치면서 노동을 통해 자연을 변형시키고, 자기 스스로도 변형되어 나가는 과정으로서 파악된다.】


◈ 묵시는 가고, 역사는 오라 !!


여기에 '역사'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 역사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곧 '묵시' 라는 것이다. 인간 행동여하에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움직임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런데 만약 인간이 이 노동의 변화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묵시는 어떻게 되겠는가? 묵시는 묵사발(?)을 내서 보내고 역사는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 역사에서 목적론만 집어넣으면 진화론이 되고 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신봉한다" 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속에 담긴 자기 노동력을 신봉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자기 노동을 신봉한다는 것은, 자기 내부에서 자신이 달라지고 싶다는 욕망을 긍정하는 것이 되고 말이다.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데, 여기서 오늘 강의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노동에서 역사가 나오는데, 그래서 역사가 중요하다는 말은 바로 자기 자신의 노동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고, 이 노동이 중요하다는 것은 자기 변화를 자기가 주도한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에서는 이것이 더 발달해서 이 '변화' 라고 하는 것이 인간욕망의 여러 가지 양태들이 '나' 라고 하는 갖가지 모습을 다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스토아 학파에서 다 언급한 것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속에 있는 욕망 (프로이드는 이것을 '리비도' 라고 했는데,) 이 여러 가지 양태, 즉 '나' 라고 하는 갖가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10살 때의 자기와, 20살 때의 자기, 그리고 군대에 갔다온 후의 자기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0살 때의 세상관과 자기 자신을 맞추고 싶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난 울산 수련회 때 불렀던 노래인데, 젊은 나이에 자살한 가수 김광석의 '서른살 즈음에' 라는 노랫말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네티즌 사이에서 최고의 가사로 여겨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 처-럼
작기만한 내기억속엔
무얼 채워 살고있는지
점점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내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 인줄 알았는 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이 양반은 가사내용대로 자기 자신을 30살에 자기 자신을 스톱시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또 달라지면 자기는 없어지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30살 때, 35살 때, 40살 때의 맞춤자아가 각자 다 따로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런 세상에 시달릴 바에야 영원히 잠자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해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그러나 지금 이 세상과 우주가 끝없이 시간 속에서 변해 온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변화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우주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는 신에 의해 한순간에 주어지는 섭리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진화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시간의 진정한 모습은 '우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마지막에 보면 '우연성'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성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연성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 우연적이 되면 거기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 교통사고를 내었냐고 다그쳐도, 우연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윤리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 죄책감이 없게 되는데, 인간은 이런 죄책감이 없어지면 자유를 느끼게 되는데, 당당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당당하게 되면 신이 되는 것이다.


김대식씨의 글 가운데 좋은 것이 있어서 소개해보면, "요즘 교회성도들은 믿음이라고 하면 자기 믿음, 소망이라고 하면 자기소망, 구원이라고 하면 자기구원, 이렇게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라고 했는데, 즉 성경에서 어떤 개념이 나오면 얼른 주워서 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원래 성경대로 하면 모든 것이 다 주님께로 돌아가야 할 믿음과 소망과 사랑 등이,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자기가 특허를 낸 것인 냥, 자기 믿음, 자기 소망, 자기 사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자기 것이 새로 생길 수 있는 개념으로 전환되었다는 말이다.


◈ 믿음, 소망, 사랑은 종교노동을 통해서 !!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믿음, 자기 소망, 자기 사랑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스토아 학파에서 잘 가르쳐준 것처럼 노동을 하면, 즉 종교노동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경건, 성실, 열심 등등 말이다. 그렇게 되면 다 자기 고유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교재를 보자.


【이제 인간의 경우, 좋은 삶이란 인간 이전에 주어진 뭔가에 있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자기 삶을 창조할 수밖에 없는 개방성에 있다. 미래는 본인이 열어 가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인간의 경우에 좋은 삶이란 인간 이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이전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보편을 추구한다고 했는데, 즉 보편적인 선과 악이 있고, 보편적 정의로움이 있다는 말이다.


◈ 스토아 학파 - 미래는 본인 스스로 하기 나름 !!


그런데 지금 스토아 학파에서는, 좋은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창조해 가면, 그것이 바로 자기에게 좋다는 것이다. 즉 미래는 본인이 열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거실 문을 열고 안방 문을 열 듯이 말이다. 닫힌 문은 자기가 노동해서 자기가 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좋고 나쁨은 남이 말할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 현대에 와서 스토아 학파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가난해도 착하면 그 착함을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칭찬을 받았는데, 그런데 요즘은 착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하면 욕을 들어먹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착해서 가난해도 그것이 일가친척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말이다. 즉 착해서 가난하면 그것이 죄라는 것이다. 자기 노동을 빼 먹기 때문에 말이다.


◈ 무엇이 착함이고 악함인가?


보편적 윤리개념으로 보아서, 여기 한 사람은 착한데 가난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악한데 부자라고 하면, 그렇게 되면 주위에서 그 착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악한 부자에게 압박을 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악한데 부자인 사람은 자기가 열심히 노동해서 번 돈을 착하고 가난한 자에게 주게 되는데, 이렇게 착하고 가난한 자가 악한 부자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그 착한 사람이 바로 나쁜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사회에서 보게 되면, 보편적으로는 제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나쁜 놈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착한 가난한 사람이 악한 부자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말이다. 즉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님이 법원에 서류를 하러갈 때 글씨를 모른다고 한다면, 그러면 할 수 없이 자식이 같이 가서 서류처리를 다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도 빼먹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부모가 제 아무리 착해도 문자해독이 안되기에, 즉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자식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부모는 무식하지만 나름대로 노력해서 열심히 자녀를 교육시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나간 과거라는 것이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에 나오는데, 그들은 과거는 인정하지 않고 현실만 인정한다는 것이다. 현실만 인정해야 행복해지니 말이다. 아무튼 그 착한 부모는 현실적으로는 피해를 자식에게 주기 때문에 나쁜 부모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피해를 안 주려면, 나쁜 부모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글씨를 배워서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노동과 자기 노동의 결집인 자기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스토아 학파의 철학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바로 신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이게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죠? 놀랍게도 이것이 바로 칼빈의 소명론과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모든 사람은 신의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은 십자가 신학이 아닌데,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는 한때 사건에 불과하고, 하나님과 인간은 바로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칼빈과 루터를 한번 비교해보자.


칼빈 -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다.
       그래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루터 -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그래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칼빈 - 자연계시는 희미하지만, 그러나 성경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루터 - 자연계시는 일부러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의도적으로 감추기 위한 수단이다.
       (루터의 이런 자연계시에 대한 주장은 현대신학에도 없음)
칼빈 -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면 점점 선하게 된다(성화론).
루터 - 인간은 십자가가 드러나면 드러날 수록, 즉 점점 갈수록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칼빈 -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부족한 것임.
       (이것은 어거스틴의 철학인데, 그는 플라톤과 스토아 철학의 두 가지 요소를 다 갖고 있음)
루터 - 십자가 안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


◈ 열심히 일한 대가를 신께서 챙겨주신다 !!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를 신께서 챙겨준다고 하는 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의 철학인데, 이것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자를 위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편적이라는 말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모든 것은 신에게 접근하기 위한 배치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이 규정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고, 개별적이라는 것은 자기 역사를 자기가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라고 하는 것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항상 잠재성과 그 가능성이 남아있기에, "아이쿠, 내 팔자야. 나는 죽어야만 돼!" 라고 하는 따위의 소리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앞으로 그 어떤 가능성이 주어져있을지 모르는데 말이다.


이렇게 "보편적 가치가 우선인가? 개별적 가치가 우선인가?" 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면서 중세시대나 개혁주의 할 것 없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서 마치 복음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복음은 이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이러한 노동이나 역사의 개념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 따로 있다. 그것은 '자유'이다.】


스토아 학파의 자유는 신에게 복종해서 얻는 자유가 아니라, "우리가 곧 신이다" 라고 하는데서 오는 자유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 어려운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신이 따로 존재해있고, 신처럼 되지 못한 미흡점과 모자란 점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래서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개발하고 향상시키면 신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 인간은 신의 부속품이다 !!


그런데 스토아 학파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모이면 신이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신의 파편이고 부분인데, 신이란 전체 모자이크의 한 퍼즐을 장식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이 모이면 그 자체가 신이라는 말이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모일 때 신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신의 부속품이다" 라는 것이다.


기계란 무엇인가? 좀 쉬운 예로, 대학교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대학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땅이 있고 건물이 있고, 학생이 있고, 교수가 있고, 총장이 있고 수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이면 대학교라는 것이다. 총장과 교수가 없으면 대학교가 아니라, 그냥 학생들 모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신도 모일 때 신이고, 흩어지면 신이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 학파라는 말이다.


◈ 하나님이 자유로운데, 인간도 과연 자유로운가?


그러니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라면 어떤 모순이 해결이 되는고 하니까, "하나님이 자유로운데, 인간도 과연 자유로운가?" 라는 문제가, 그것이 문제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대학교가 되려고 하면 학생들이 자유로우면 되는 것이지, "대학교가 자유로운데 학생들도 자유로운가?" 라는 것이 문제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이 자유로우면 대학이 자유롭고, 또한 인간이 자유로우면 신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이 자유로운데 인간이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그 말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일부분이기에 말이다.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이 자유에 관한 문제가 중세 종교개혁 때 그렇게 고민했던 것인데, 그러나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문제가 전혀 고민거리가 안 된다는 것이다. 루터와 에라스무스가 그렇게 논쟁했던 것이 논쟁거리가 안 된다는 말이다. 마치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일시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 나의 자유가 곧 신의 자유이다 !!


다시 말해서, '나'의 자유가 곧 신의 자유인데, 즉 신의 자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유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자유가 있으면 무엇이 생기는가? 노동이 생기고, 노동이 생기면 역사가 생기고, 역사가 생기면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 움직임이 곧 신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 스피노자 -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자유를 !!


그런데 현재 철학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자유란 자유로운 욕망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인데, 신의 양태론, 즉 신의 양상들이 인간의 욕망을 낳고 이 욕망이 인간의 자유를 만든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봅시다. 5페이지입니다.


【 플라톤의 경우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과학의 대상이라는 생각하지 않는 그런 가치론적 존재들에 어떤 본질이 있다고 보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착함이나 양심, 믿음, 신 등 이런 것들이 가치가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착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연습하고 실험해야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착하다고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과학에서는 기도와 같은 것은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도 자체가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기도하는 자기 자신의 행위가 바로 신이 내려주신 신의 형상, 즉 착함과 연결되기 때문에 신의 눈으로 보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강의에는 전혀 기독교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데, 기독교가 제대로 퍼지기 그 이전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런 강의를 듣게 되면, 성경을 보지 않아도, 즉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아도 흔히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모든 본질이 다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신에게 헌신해야 하니 말이다. 플라톤이나 스토아 철학만 제대로 공부해도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것들이 다 나옴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 아하, 우리가 예전부터 복음을 알았네 !!


지금 이 정도로 한국교회가 복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의 품성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주면 그것이 성경지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 무서운 것은, 이런 철학에다가 성경구절을 갖다 대면, 사람들이 납득되고, 이렇게 납득과 설득이 되면, "아하, 우리가 예전부터 복음을 알았네. 다만 믿지를 않았구나!" 라고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칼빈을 두고 스토아주의 철학자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소수지만 말이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스토아 학파의 예정론과 칼빈주의 예정론을 다룰텐데, 그것들이 얼마나 똑같은지 놀랄 것이라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여기에 비해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가치론적인 것의 고유한 차원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이것을 '자연주의'라 한다.】


스토아 학파에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이전에 기존의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진선미' 인데, 즉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 이라는 것은 '2+2=4' 이지 5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양이 하나인데 그림자가 둘이라고 하면 거짓이 되고, 그림자가 하나라고 하면 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선악은 아니라는 말이다.


해바라기 꽃이 오각형이 아니고 둥글다고 한다면 이것이 참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둥근 오각형은 없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라도 이런 것을 좀 알아둘 필요가 있는데, 오각형 짜리 별들이 아무리 많아도 오각형은 없다는 것이다. 오각형 짜리 건빵이나 별은 있어도, 즉 오각형 짜리 사물은 있어도 오각형은 없다는 말이다.


◈ 오각형은 인간의 머릿속에 !!


그렇다면 도대체 이 오각형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머릿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머릿속에 오각형 짜리 사물들을 통합할 수 있는 오각형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이렇게 사물을 아우르고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즉 인간이 이렇게 사물을 볼 때 정리정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신이 인간에게 진짜 형상을 만들어내는 지혜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주의' 라는 것이다. 그러니 참은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선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이런 선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현대 과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돈이 땅에 떨어져있다는 것이다. 그 돈은 분명히 자기 돈이 아닌데, 그런데 앞에 걸어가는 사람의 지갑이 열려 있어서 그 사람에게 달려가서, "당신 돈이죠" 라고 하면서 주면, "예, 고맙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착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그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만일 소경이었다면 돈을 주울 수 있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장님이 아니라 눈을 떴다는 것은 피의 흐름이 정상적이라는 말이고, 돈이 떨어졌다는 것은 중력법칙이 정상적으로 작용해서 떨어진 것이고, 그리고 그 사람의 근육이 정상적으로 움직여서 돈을 주울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선과 악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물질들의 우연한 변형태에 근육이 잠시 개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조금 앞에 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고 엄청 멀리 가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선하다는 이야기를 전혀 못 듣는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서 양심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양심이라는 것도 집안이 평안할 때 양심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집안이 우울하고 나쁜 일들이 생기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양심에 대해서 화풀이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양심을 믿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모든 일들은 부대효과이고, 우연적인 해프닝 !!


그러므로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서 모든 일어나는 일들이 물질(질료)의 변화에 의해서 일어나는 표면효과, 즉 부대효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연히 타이밍이 맞으니까 선하게 보이고, 또한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신이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고, 최고 형상이 신인데 그 신이 아름답기에 인간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에게는 그것이 아니라, 아름답다는 것은 사람이 각자 보는 눈에 따라서 다들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아름답다는 영화배우를 지금 보면, "저런 사람이 뭐가 아름다워" 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때 아름답지 않은 아내가 지금은 아름다울 수가 있고(???), 그러니 너무나도 주관적이고 그때그때 체온과 바람과 온도 등등, 물질들의 부대효과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진선미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사건들의 어울려져서 된, 즉 우연적인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불교 - 인간의 모든 가치는 다만 우연적이다 !!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극단적인 형태가 무엇인고 하니 바로 불교인데, 그래서 불교에는 주장하기를, "인간의 모든 가치는 다만 우연적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의 산물이고, 그냥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이 교재에 설명되어있는데, 5페이지를 보도록 하자.


【여기에 비해서,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가치론적인 것의 고유한 차원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이것을 '자연주의'라 한다. 그들에 의하면, 가치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자연적인 사실들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화론 이후, 이 자연주의적인 생각은 큰 설득력을 얻게 된다. 스토아 학파에서 윤리학은 자연철학에 종속되기에 "자연에 따라 살라"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기본 입장이다.  ………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인들이란 다름 아닌 물체들이다. 결과는 물체들의 운동으로부터 생겨나는 사건들이다. 물체는 원인이고 사건이 결과라는 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정리한 바이다. 세계란 일차적으로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는 물체들의 집합체이다. 여기에 바로 '비물체적인 것들'이 덧붙여진다.
 
스토아적 견지에서 보면, 인간이 삶의 표면에서 느끼는 가치는 물질적 운동의 결과일 뿐이다. 궁극적인 원인의 차원, 물질의 차원에서 보면 슬플 것도 없고, 기쁠 것도 없는 것, 그저 물체의 운동이 빚어낸 부대 효과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교통 사고를 당했을 때, 사건의 수준에서는 무척 고통스럽다. 하지만 원인의 차원에서는 그냥 자동차들의 입자들과 몸의 입자들이 부딪쳐 공간적 위치가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스토아주의를 '금욕주의'로 이끄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왜 알렉산더 대왕이 무엇이 필요한지 소원을 말하라고 하니, "지금 당신이 막고 있는 햇빛이나 좀 가리지 마세요" 라고 한 그리스 철학자가 있지요? 예, '디오니게스' 맞지요. 통나무 속에서 살았고, 대낮에 진리를 찾아서 횃불을 들고 돌아다녔던 철학자라는 것이다.


◈ 디오니게스 - 모두 다 비켜 !!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남들이 좋다고 혹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들을, 이렇게 서로 마찰이 되는 이율배반적인 사고방식들을 다 치우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아름답고 추하냐는 것이다. 즉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상대자가 하나라도 없으면 서로 순간적으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악이 있어야 선이 있는 것이지, 즉 악이 있어야 선이 튀어나오는데, 그런데 어거스틴은 "악은 없는데 선만 있다" 라고 하니, 이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선을 말하려면 반드시 대비되는 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호등의 경우에도 "빨간 불에는 서고 파란 불에는 가라" 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빨간 불과 파란 불이라는 서로 대비가 되는 개념이 있을 때, 이렇게 서로 대비가 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쉬르가 주장한 '의미론' 이라는 말이다. 


요즘 제가 우리교회에서 교회사를 강의하고 있는데, 교회사를 살펴보면 최초의 수도원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사막 수도원이라는 것이다. 모래뿐인 광야 수도원 말이다. 여기서 도를 닦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데, 이것이 스토아 학파 사상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금욕을 하려고 해서 금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냥 살다보니, 남들이 보기에는 욕심이 없어 보이고 되고, 그렇게 되니까 금욕이 된다는 것이다.


흔히 환경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수염을 기르고 개량 한복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를 닦는다는 것인데, 즉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들에서 탈피했다는 말이다.


중들이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특히 여자가 머리를 깎는다고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추하게 보이는가? 이것은 바로 스스로 추하게 보여서, 즉 추한 것을 선하게 간주해서, 이제는 추함과 아름다움의 차원을 해탈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카톨릭 신부들의 옷이 '로만 칼라' 라고 해서 목 부분이 꽉 쪼이는데,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악한 마귀는 전혀 들어갈 구멍이 없도록 만들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번 시간 마지막으로 스토아 학파의 예정론, 즉 섭리론을 살펴보겠는데, 아마 교회사를 강의하면서 다음다음 시간에 선택전 예정론과 선택후 예정론을 하지 싶은데, 칼빈은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도 살펴보고 말이다.


【예를 들면, 이 우주는 신의 선한 뜻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흔히 이것을 '섭리'라고 한다. 스토아학파는 우주를 지배하는 신성한 섭리를 믿는다. 우주 자체가 신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를 지배하는 순수 물리적 인과관계를 '운명'이라고 부른다.  ……… 지구가 태양을 돌 때 인과란 지구와 태양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은 하나의 인과적 운동인 동시에, '우주=신'의 장엄한 섭리인 것이다.】


분명히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이렇게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운동이고 우주이고 섭리라는 것이다. 즉 하나의 운명이란 말이다. 이렇게 운명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 안 되는데, "선생님 왜 태양이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이러한 질문이 성립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섭리요, 곧 운명이기 때문에 말이다. 동일하게 "왜 지구가 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달이 지구 주위를 돕니까?" 라는 질문도 역시나 안 되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가 신의 모습이기에 말이다.


"신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하면, 신이 따로 있고 만든 신이 대상이 따로 있게 되는데, 그런데 신이 그 대상 속에 들어가 버리면, "신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은 어떤 모습입니까?" 라고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신은 태양과 지구의 모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왜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라는 것이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에는, 신은 존재하고 그 신이 태양과 지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데미우르고스' 라는 하급신을 로고스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만든 이유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그 안에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시편 19편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시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시 19: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시 19:4)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것은 이미 기독교가 들어오기 500년 전에 플라톤이 말한, 자연세계가 신을 말한다는 것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자연세계가 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플라톤이 얼마나 믿음이 좋은가?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도저히 이러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무시하고 배제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납득시켜서 교회로 데리고 오는데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런 고대서양 철학의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이 이미 성경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람 카이퍼의 '자연은총론' 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7페이지이다.


【인간은 피조물이 아니라 신성과 거리가 먼 고독한 존재도 아니다. 우주는 신이고 우리는 우주의 조직들이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도 신성(神性)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곧 신의 한 파편인 것이다. 아니 우주의 모든 것이 신인 셈이다. 단지 신과 개체들의 차이는 전체와 부분의 차이일 뿐이다. 우주가 거대한 불이라면 우주의 모든 개체들은 불티들이다.】


◈ 인간의 자유 = 신의 자유 !!


지금 우리가 신의 예정론(섭리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러한 예정론이 어떤 경우에 성립되는고 하니, 인간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모든 것이 신일 경우에만 신의 예정이 되는 것이지, "인간 따로, 신 따로" 라면 예정론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와 신의 자유가 따로 있으면 안 되니 말이다. 즉 스토아 학파의 경우에 "인간의 자유 = 신의 자유" 라고 해야 예정론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살펴보자.


【그러니까 우주의 개체들 사이에 그다지 큰 불연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두 불에서 나와 불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주와 내가 다른 것이 아니다.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할 것은 없다. 이 세계 전체가 우리 모두의 고향인 것이다. 다만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들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고 스토아 학파에서는 보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내재성'의 사유라고 부른다. '초월성'의 사유와 대비되는 사유이다. 스토아 학파에서는 초월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슬퍼할 것은 없다" 라고 누구에 말하는고 하니, 스토아 학파가 플라톤에게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향을 잃어버려서 고향을 찾아서 나서지만, 스토아 학파의 경우에는 이 세계전체가 바로 고향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알지 못해서 다툼이 일어나고 인간의 불행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예정론을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 살펴보고 마치도록 하자. 교재 8페이지이다.


【사실 동양 윤리에서 '운명'이라는 말을 쓸 때는 주로 이런 의미이다. '체념'을 말한다. 섭리를 무리하게 해석하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긴다. 맹자의 말처럼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가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인간들이란 모두 수행자들이다. 그런데 그 후에 그리스 철학에서는 조금씩 이런 운명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보인다. 운명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자율성은 물론 근대적인 자율성이 아니라 다만 운명에 완전히 순종하는 태도로부터 운명과 화해하는 태도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용기'이다.】 


동양윤리에서 운명이라고 할 때는 체념 쪽에 더 무게를 두게 되는데, 그러나 스토아 학파에서는 용기라는 것이다. 용기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그래, 난 할 수 있어!" 라는 것이다. 왜 할 수 있는가? 자기가 곧 신이고, 우주이고, 자기가 변화를 주도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러니 자기 운명은 자기가 만들어 가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바로 당신을 통해서 !!


이것을 선교단체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뿅' 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를 가미하면,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나면 새로운 피조물이고, 당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통해서 새롭게 창조하시고, 당신을 통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기를 바라신다" 라고 말이다. 물론 창세기 1장 28절을 양념으로 뿌리고 말이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하면 다 성공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다. 가정이 어려우면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이 되고 말이라. 몸이 아파도 그 아픈 것이 복이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디오게네스의 스토아 학파가 된다는 것이다. 한껏 젊은이의 기를 살려주면서 말이다.


◈ 순복음 - 잠자는 신을 깨워라 !!


바로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니이체의 철학인데, 잠자는 신을 깨우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안 깨니 바로 당신이 흔들어서 깨우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여!" 라고 삼창하고 부르짖으면 신이 깨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순복음 교회에서는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의 설교를 듣기만 해도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데, 잠자는 신을 깨우기에 말이다. 그야말로 신이 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르고 말이다. (이근호 목사의 설교를 들어도 신이 나는데???)


끝으로 하나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9페이지이다.


【스토아 철학은 참으로 간명한 철학이다. 최소한의 개념들 외에 불필요한 개념들을 모두 제거하는 매끈한 철학이다. 신이니 형상이니 목적이니 도(道)니 …하는 개념들을 일체 배제된다.】


스토아 철학은 참으로 간단한 철학인데, 신이나 형상, 목적 등을 다 배제하고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는가?" 라는, 아니 더 나아가서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신의 일이다" 라고 할 때, 이럴 때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쪽에서는 이런 것은 '감각적' 이라고 해서 반대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감각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세상을 봐야 실재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의 입장은 감각에서 출발하되, 감각으로부터의 인식에서 인식 주관에 의해 왜곡되는 측면과 그렇지 않는 측면을 구분한다. ……… 자기 스스로를 사건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그 사건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사건들을 그들이 일어나는 대로 원하라"라는 원칙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스토아 학파는 어떤 사건이 하나 일어나면 그것이 일어난 대로 자기를 더욱더 변화시키는 신의 메시지로 보라는 것이다. 즉 신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바로 신이니 그렇게 대처하면 된다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십자가 복음 앞에서 죄인임을 알았는데, 막상 이 세상에 나가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신이 되는데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 2007년 9월 23일 01시 05분에 마침 --  아들자랑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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