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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8 12:02:44 조회 : 3719         
광주강의(07. 9. 21) 1번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7. 9. 21) 29-1




유다서에 보게 되면 불신자들에 대해서 욕을 심하게 하는데, 다른 어떤 성경보다 유다서가 불신자들에 대해 강렬하고 원색적으로 욕을 해 놓은 책입니다. 그래서 유다서는 신자를 겨냥하는 것 같지만 ‘절대로 불신자 되면 안 돼!’ 라는 쪽에 강조가 있는 것이 유다서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불신자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보통 ‘불신자 되면 안 된다’고 할 때는, 지옥 가서 고생하는 고생담으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데, 이 유다서의 특징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서 이렇게 고생한다.’ 가 아니라(이것도 약간 나와 있지만), ‘이 세상에서 불신자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보면 짐승 같다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불신자를 공격한다는 것은,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불신자가 있고, 여기 신자가 있는데, 신자가 불신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유다서 1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공격을 해요.




그러니까 이 유다서를 보면서 ‘아,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도 아주 강하게 간섭하시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불신자도 관리합니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쉽게 하나 어렵게 하나 마찬가지지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유다서의 이야기는 불신자에 대한 욕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퍼붓는데, 보통 사회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불신자보고 욕을 안 해요. ‘몰라서 그렇겠지. 취미가 안 맞으니까 어찌하겠나. 우리는 택한 백성이니까 감사하고 저들은 제 갈 길로 가는 거지 우리가 왜 신경 쓰느냐.’ 이렇게 되는데, 유다서는 그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자격으로 야고보는 이야기하면서 ‘불신자 너희들 이제 죽었어!’ 라고 불신자에게 강렬한 비난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신자에서 불신자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됩니다. 신자가 불신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신자에게 공격하는 거예요.




바울 서신이나 4복음서나 지금까지의 성경은 뭐냐 하면, 신자가 되는 구성 요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이 부합되지 않으니까 불신자다.’ 이런 식으로 ‘신자는 이런 자인데, 거기에 반대하니까 불신자다.’ 라는 식으로 바울 서신이나 다른 성경책은 되어 있는데, 유다서는 그것이 아니라 신자 반대가 불신자가 아니라 ‘불신자는 이렇게 살아간다.’ 해서 불신자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어요. 이 원칙은 유다서에서만 나옵니다. 다른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자 되는 구성 요건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창세전에 예정 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어떻게 발생되는가? 창세전에 예정 된 자만 신자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신자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할 기회도 갖기 전에 일방적으로 택한 자만 구원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이고.




두 번째는, 십자가 복음으로만 가능해요.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게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은 복음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다. 복음의 능력이 중심이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십자가 복음으로.




세 번째는 방법이죠. 그 방법은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오면, 인간의 지혜로서는 십자가 복음을 못 알아보지요. 어리석게 들리고. 그래서 오직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킬 때만 신자가 되는 겁니다.




신자 되는 조건에 뭐가 하나도 없습니까? ‘내가 이렇게 해야 된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지요. ‘내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은 ‘행함 자’지요. ‘믿는 자(신자)’가 아니고 ‘행함 자’가 되지요.




신자는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십자가 피의 능력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므로 말미암아 결론적으로 나오는 것이 신자가 나오지요. 신자를 다른 말로 하면 믿는 자입니다. 믿는 자로부터 거꾸로 올라가면 절대로 안 돼요. ‘어떻게 하면 믿는 자가 됩니까?’




앞의 세 가지를 빼버리고, 믿는 자에게 ‘어떻게 하면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믿어야 돼!’ 이렇게 된다고요. 여기에서 흔히 실수하기 쉬운 게, ‘믿어야 돼!’ 라고 한다면 이것은 첫째, 둘째, 셋째 조건에 해당이 안 되지요. 그렇잖아요? 이것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에서 그렇게 싸우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고, 십자가 복음이 중심이고,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적용시켜야 우리가 믿는 자가 된다면 1번, 2번, 3번은 어디에 나오는 내용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죠. 그러면 성경에 나와 있는 1번, 2번, 3번은 누가 다 이룬 거예요?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이 다 이루셨지요. 다 이루셔서 성령 보내 우리에게 적용 시켰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성경책은 누가 이룰 겁니까?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루어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믿는 자가 신자가 되겠지요. 그러면 그 중에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유다서가 포함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당연히 포함 되지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유다서를 공부하면서 일단 신자 된 자체에서 유다서를 봐야 됩니다. 신자 되려고 하지 말고. 신자 되려고 하는 것은 신자가 할 짓이 아니지요. 신자는 이미 되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되려고 한다는 것은 아직 안 되었다는 자기 정체를 드러낼 뿐이지요.




그래서 불신자는 뭐냐? 지금까지 바울 서신이나 다른 성경에서 보면, 창세전에 예정된 것을 안 믿는 것이 불신자고,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 불신자고, 인간의 열심으로 구원 얻으려는 것도 불신자고 이렇게 되잖아요.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이야기했지만, 신자부터 시작해서 불신자를 공격하는 방법이 지금까지의 공격 방법이라면, 유다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자가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배척한다고 불신자로 드러나는 것은 기존의 다른 성경책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유다서는 그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에 신자라는 영역을 없애버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신자에게 관여한단 말이지요.




그럴 때 불신자가 되기 위한 어떤 조건이 있느냐? 불신자가 되기 위한 조건. 신자의 입장에서 불신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이상한 거예요. 왜냐하면 신자라는 것은 뽑혀져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당첨 안 된 사람은 자동적으로 불신자가 되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새삼스럽게 불신자 되기 위한 조건이란 것이 이상합니다. 신자 뽑아내면 나머지는 전부 불신자니까.




이야기를 이렇게 하면 되는데, 이상스럽게 여기서는 왜 불신자 원칙을 따로 말하느냐? 그 이유가 1장 5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이 대목이 참 어려워요. 출애굽 할 때 다 신자인줄 알았는데, 출애굽 해놓고 광야에서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단 말이지요. 그러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 피 바르고 나온 사람들인데 이들이 신자입니까, 불신자입니까? 다 신자라고 하면 멸망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불신자라고 한다면 신자가 미완료 되지요. 홍해 건너와도 아직 불신자니까. 그러면 뭐까지 해야 되요? 광야를 통과해야 신자가 돼요. 이렇게 되면 조건이 까다로운 조건이 됩니다.




그러니까 홍해 건넜다고 구원이 아니고, 이것은 구원 폼만 잡는 것이고, 나중에 광야를 다 통과하고 나서 보잔 말이지요. 그러면 누가 구원 못 받아요? 모세도 구원 못 받았네. 왜?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곤란하고 저렇게 이야기하기도 곤란하단 말이지요.




신학을 정립할 때 이런 것을 다 고려해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방금 질문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그들이 신자입니까, 아닙니까?’ 라는 질문은 신약에 와서 할 질문이지 구약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은 뽑혀 나온 사람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나 우상을 이길 때 그것을 구원이라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신의 이름을 이겼을 때 그것을 구원이라고 봐요. 우선으로 몇 명 따라 왔는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란 말이지요.




가계 오픈할 때, “너, 추석 전에 가계 문 열었나?” “응, 오픈했어.” 아가씨들 와서 춤추고, 스피커에서 광고하고 가계를 시작했다. 가계 문 열었으면 오픈 한 거지요. 그런데 “그날 손님 몇 명 왔나?” “한 명도 안 왔어.” “그러면 가계 문 안 열었네!” 이러거든요.




‘손님이 왔을 때 가계 오픈 한 것으로 치겠다.’ 이런 말은 출애굽한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계 주인이 가계 오픈하면 그게 가계 문 연 거예요. 손님이 오든 안 오든 관계없이. 구약에서(신약도 마찬가지지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을 계시할 때 그것이 다 구원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 하신대로 그것을 실시했을 때, 몇 명이 구원 받던 몇 명이 광야에서 떨어졌던 그것과 상관없이 그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겁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백성들이 건너고 하는 그 모든 일을 누가 했습니까? 그리고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여호와께서 하셨지요. 그러면 그 자체가 구원이 되는 거예요.




좀 어렵지만 이것을 신약적으로 해 봅시다. 신약에서의 구원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 구원이 되지요? 이미 구원의 영역, 구원의 장이 열렸단 말입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면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아직 구원 안 받았는데’ 이러고 있어요. ‘예수님이 부활하든 승천하든 나는 아직 예수 안 믿잖아. 내가 예수 안 믿는데 무슨 구원이 있나?’ 이래요.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지금 우리 성경공부 시작했어요. “성경공부 시작했습니까?” “했습니다.” “내가 참석도 안 했는데 왜 시작했는데요?” 기준이 각자 기준이거든요. 강사가 시작하면 공부 시작되거든요. 그런데 전화하신 분은 강사 아니지요. 아니면 그것은 관계없는 겁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자기 인생은 자기 손에 달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다서에도 나오지만 불신자의 특징이 뭐냐? 신자는 ‘내 인생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다.’ 그러면 누구한테 있단 말인가? 내가 믿는 분이 이미 결정해 버렸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것과 무관하게 이미 결정해 버렸어요. 불신자는 뭐냐? ‘내 인생은 내게 달렸다. 내가 하기 다름이다.’ 이것이 불신자입니다. 왜? 믿을 사람이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를 믿는 거예요.




[개그콘서트]에 보니까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 라는 코너가 있어요. 본 적 있습니까?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완전히 대구 말씨 씁니다. 부산도 아니고 마산도 아니고 완전히 대구 말입니다. 제목이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입니다. 내가 어느 길로 가느냐? 프로스트(Frost)의 시에 보면, ‘어떤 산길이 있는데 두 갈래 길이 있다. 남들은 다 저쪽 길로 가는데 나는 남들이 안 가는 길로 결정했다.’ ‘모든 사람이 Yes라 할 때 나는 No 했다.’ 이렇게 해서는 망합니다.




그러나 뭔가 개성이 있는 인생 살아보겠다고, 내 인생 결정권을 내가 가졌으니까 내가 뭘 할 것인가는 내가 알아서 결정한다. 이런 생각을 해요. 젊은 사람들이 대학 졸업하고 막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하루에서 열두 번 더 생각하는 게 뭐냐 하면, 직장 들어가기 전과 들어가고 난 후에 차이가 나잖아요. 힘들지요. 그러니까 ‘나라는 인생이 꼭 평생을 이 짓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해야 할 것인지’ 헷갈려요.




이렇게 되니까 하는 일도 재미없고 틈만 나면 핑계 만들어서 사표 던질 생각 한단 말이지요. 대기업 가도 마찬가지고, 공사에 취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야, 직장 참 잘 선택했다.’ 이런 사람의 거의 없어요. 처음에는 일이 서툴러서 억지로 하니까 힘들지요. 그러나 목사는 이런 것이 적어요. 왜냐하면, 하루 일하고 6일 놀고 이런 직장이 없거든요.




불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아래 있으면서도 자기인생 자기가 꾸려 나간다는 것을 철저하게 고수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다서에서 하는 말이 ‘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네가 모독하느냐?’는 것입니다.




아까 성경공부 시작하기 전에 집사님이 제게 송편 먹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만약 제가 송편을 안 좋아하고 송편 속에 뭣이 들어갔는지 따져서 먹는 사람 같으면, “저는 배가 불러서 안 먹겠습니다.” 뭐 이런 핑계를 대서 거절을 할 때, 송편 준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왜 내가 준 송편의 은혜를 모독하나” 이렇게 나오지요.




‘내 인생 내가 결정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먹고 싶어 달라고 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요구한 적도 없는데 왜 일방적으로 송편 만들어서 먹으라고 주느냐?’는 것이지요. 이것을 유다서에서는 불신자의 조건으로 보는 겁니다.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10절)




엄청난 욕이지요. 쉽게 말해서 ‘나가 죽어라.’는 식입니다. 유다서가 이런 욕설로 가득합니다. 불신자에게. 12절에도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완전히 매도하듯이 욕설을 합니다.




유다서가 좀 난해해요. 지금까지 한 것과 틀이 다르기 때문에 어렵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를 하나님께서 일부러 키우신다는 생각을 우리는 잘 안 하게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신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불신자는 ‘신자 아닌 사람이 불신자다.’ 라는 소극적으로 이렇게 따지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것인데, 적극적으로 불신자를 키워낸다는 생각은 우리가 별로 안 갖지요.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유다서에서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불신자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송편을 만들어 줬는데, 봐라. 안 먹잖아. 얼마나 못됐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저런 나쁜 놈. 저 죽일 놈.”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9절에 보면 마귀가 나오는데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천사장 미가엘이 마귀와 다툴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저 마귀의 갉는 것은 누구 소관이 아니다?’ 나는 천사장이라는 높은 직위에 있지만 마귀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너무 과도하게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것 아닙니까. 맞지요?




그러면 마귀를 누가 키운다는 말입니까? 결국은 예수님께서 키우시는 거예요. 왜? 저주를 퍼붓기 위해서. “저 죽일 놈 봐라. 은혜를 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아까 이야기 다시 합시다. ‘누가 구원 받는가?’의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구원이죠. 왜?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누구 힘으로 움직인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움직이죠.




아까 구원을 설명할 때 ‘몇 명 건졌는가?’ 이런 식으로 보지 말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일을 개시할 때 이미 구원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그 구원에 어떤 것도 도출되어야 해요? 불신자, 마귀도 나와야 되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 존재 자체가 뭡니까?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이런 자도 주께서 일으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마귀까지 키우시고 따로 특별 관리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불신자마저도 주님께서 따로 키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신단 말이지요. 




그러면 흔히 말하는 구약에서 불신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이고 나머지는 언약 바깥이니까 개 같은 이방인이란 말이지요. 필리핀이나 한국은 개 같은 이방인이란 말이지요. 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니까. 이것이 보통 우리 상식인데, 유다서는 그것이 아니고, 이 마귀 같은 자식들, 불신자가 어디 안에 있다? 구원 받았다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 증거들을 발췌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뭐예요? 이 세상의 관리자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불신자를 키워내는, 밝혀내는 그 일도 적극적으로 하시는 주님입니다. 그래놓고 욕은 욕대로 퍼붓는 거예요. 불신자들의 행색을 다 끄집어내 놓고 욕은 욕대로 다 퍼부으니까 결국 유다서는 중점이 누구 이야기에요? 누구보고 하는 이야기인가 하면, 신자에게 하는 이야기도 되지만 그 양만큼 불신자 너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로부터 피할 생각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다른 성경에는 별로 없지요? ‘내버려 둬. 불신자는 믿지도 않는데. 그냥 불쌍히 여겨서 건저 내야지.’ 이런 쪽이지, 일부러 갉으려고 달려들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그런데 유다서의 경우, 대구 같으면 동화사, 서울 같으면 조계사에 가서 그것도 다른 날이 아니고 사월 초파일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저주 받을 놈들아!” 이런 식이에요. “이성 없는 짐승 같은 놈들. 너희들 때문에 지옥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은 뭐예요? 신약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대체하는 것이 뭡니까? 같이 견줄 만 한 것이 뭐예요? 교회지요. 그래서 유다서에 보면 교회 이야기 나와요. 너희 교회 안에 그런 인간들이 있다는 거예요. 4절을 보세요.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이렇게 되지요.




교회 안에 있는데 이것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란 말입니다. “경건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그러니까 유다서에서는, 교회라는 것은 흔히 알기로 교회 머리는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계시는 교회에 왜 이렇게 지옥 갈 인간들이 나오느냐?’ 하는 점이 상당히 의아하고, ‘그런 사람들은 뽑아내야 되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것조차도 우리 그리스도께서 의도적으로 ‘불신자가 이런 자들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단 말입니다.




유다서 내용대로 하게 되면, 교회에 누가 오더라도 나가라는 소리를 좀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왜? 마귀도 와야 마귀라는 소리를 설교시간에 할 수 있습니다. 마귀도 없는데 마귀라고 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런 경우가 있었지요. 옛날에 ‘화0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100% 복음 아는 사람이기를 얼마나 원했어요. 그런데 유다서 보세요. 주님께서 만만하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가만히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 아는 사람이 가만히 들어갔지요. 그쪽은 토박이들인데.




교회가 세상에 모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키웠다는 말은 구원 받는 사람만 키운다는 뜻이 아니고 멸망당할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도 함께 교회에서 주님께 실컷 욕은 욕대로 얻어먹어야 될 그런 일까지 해야 될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 완전에 대한 부담감은 떨쳐버려야 됩니다. 유다서를 보면서. 욕하라고 사람을 보내 주셨으면 욕을 해야지, 사람 없는데 욕만 하면 소용이 없잖아요. ‘아 욕하라고 사람 보내 주셨구나.’ 생각하고 실컷 욕하면 돼요. “저런 인간은 짐승 같은 놈이다.” 라고. 할 것은 해야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불신자를 키우신다. 그런데 불신자를 키우는 조건은 뭐냐? 은혜를 주셔놓고 그 은혜에 대해서 전혀 감이 없는 사람. 은혜를 주셨는데 신자처럼 ‘주께서 내 인생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니라,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하는 것은 전부 다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관여해야 할 것 아닌가. 관여할 수가 없어요. 왜? 미가엘이 마귀에 대해서 비방의 판결을 못 쓴 것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강제로 추방한다든지 그런 것은 우리가 하기 힘들어요. 제가 제풀에 재미없어 나가는 것은 할 수 없지만 강제로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다면 불신자의 조건이 뭐냐? 방금 이야기했습니다만 은혜 주신 것을, 4절에 나오지요? ‘은혜 주신 것을 색욕거리로 바꿨다.’ 은혜라는 것은 은혜 주신 분을 생각하는 것이 은혜답지요. 색욕거리라는 것은, 주신 분은 생각 안 하고 ‘내가 뭘 챙겼다. 나는 뭘 가졌다.’ 여기에 초점이 있을 때 이것은 항상 자신의 욕망을 충당하는 수단이 되겠지요.




목사가 되었다. ‘야, 주님께서 섬기라고 목사로 세웠구나.’ 이렇게 되면, 목사가 된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데, 목사 되었다. 이제 당회장이 되었다. ‘부목사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장로 너희들 내게 한 번 당해봐라.’ 이런 식으로 되면 그것은 색욕거리가 되지요. “당신 왜 그렇게 합니까?” “내 인생 내가 챙기는데 왜?”




주신 것에 대해서 내 것이라고 챙겨버리면 그 때부터 그것은 내 본능대로 움직입니다. 그 본능이란 말이 또 나오지요? 10절을 봅시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왜 그런 짓 하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 간단해요. 답변이. “하나님의 말씀에 ~” “아, 말씀이고 뭐고 치우고 내가 그것을 하고 싶다니까.” 끝이에요.




그러니까 본능, 이성 없는 짐승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단 챙겼으면 자기 것이에요. 이건 손도 못 대지요. 어린 아이들이 그렇잖아요. 분명히 엄마가 돈을 줘서 샀는데 일단 사주니까 돈을 준 엄마는 손도 못 대게 하잖아요. 만지기만 해도 “이건 내꺼야!” 하잖아요. 밥을 해 준 것은 분명히 엄마인데, 반찬을 만든 것도 엄마인데, 엄마가 반찬하나 더 먹으면 밥 안 먹고 숟가락 던지고 난리를 치지요.




계란을 프라이팬에 구워서 형에게 반을 주고 동생에게 나머지 반을 줬습니다. 동생이 밥 먹다가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에 형이 동생 것을 조금 먹었어요. 동생이 밥도 안 먹고 숟가락 던지고 난리가 납니다. ‘이성 없는 본능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래서 한 대 맞잖아요.




그래서 불신자(마귀)는 필요해요. 때리는 대상이 되기 위해서, 주님의 손이 얼마나 매운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불신자가 꼭 필요합니다. 하는 행세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행해서 주님께 얻어맞지요. 주님이 살아 계시니까.




주님께 얻어맞는 것을 가지고 ‘미움 받는다’고 하지요. 학교에서 미움 받는 애들 보면, 미움 안 받는 애들이 보면 불쌍해서 미치겠어. 똑같은 행동을 해도 그 녀석은 미움을 더 받아. 선생님은 객관적으로 학생을 대한다고 하지만 학생들은 알아요. 절대로 객관적이 아니라는 것을.




남자 반에는 그런 것이 없는데, 여학생 담임선생님들 보면, 여자 애들은 너무 극단적이라서 잘 해주는 애들에게는 너무너무 예뻐하며 잘 해주는데, 밉상 보이는 아이들은 일부러 ‘날 때려 잡수세요.’ 하는 식으로 행동을 해요. 선생님께 약을 올리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공자가 아닌 이상 결국 그 애를 때리고야 말도록 되어 있답니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에요.




꼭 맞을 짓을 해요. 애가. 남학생들은 풀면 그만인데, 여학생은 한 달 가도 안 풀어요. 쓸데  없는데 승부를 걸어요. 꼭 이렇게 작은 일에 승부를 걸어요. 사소한 일에 삐치고. 그래서 여학생 담임하는 선생님을 보면 이런 것 때문에 속이 천불나서 여학생 담임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잘못해서 맞으면 맞고 잊어버리면 되는데 그것가지고 112 신고하고 ---




그러니까 에서는 꼭 미움 받을 짓을 하게 되어 있어요. 야곱은 뭘 해도 예쁘고. 이것이 아까 1번에 뭐라고 했습니까? 신자의 조건에서, 창세전부터 하나는 사랑 받기로 작정했고 한 쪽은 미움 받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나머지 뒤처리는 우리 소관 아니에요. 이것은 그대로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다 하시는 겁니다. 구원 받기 쉽지요.




진짜 쉬워요. 가만 생각하면 너무 쉬워요. 그래서 기분 좋아요. 우리가 할 것이 있으면 힘들겠지만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너무 좋은 거예요.




추석 때 음식을 반찬 만드는 집에서 주문해서 가져오면 편하지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음식 잘 했다는 소리 듣고. 제사 음식이든 뭐든 전문점에서 다 주문해서 돈만 주면 배달까지 해 주니까 참 좋은데, 실제로 집에서 만들려면 힘들고 짜증나잖아요. 그런데 가만  있어도 다 가지고 오면 좋겠지요.




마찬가지로 주님의 은혜는 이것보다 더 놀라운 겁니다. 그냥 다 주세요. 그런데 불신자들이 왜 주님의 은혜를 그렇게 모독합니까? 그것은 자기 본능하고 주님이 가고자 하는 길하고 안 맞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가시는 길과 자기의 본능과 안 맞습니다. 이걸 좀 설명하자면,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 다음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3)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준 겁니다. 물론 공짜로 줘요.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느끼라고. 그런데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의, 하나님의 의는 자기 취향이 아닙니다. 불신자들 생각은, 나를 누가 만들었던 이미 만들어진 것이니까 신경 끊고, 나의 영광과 나의 의로움 이것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거예요. 이것이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삶입니다. 본능에 충실하고 본능에 끌려가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다는 것. 이것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4절 끝부분을 봅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그냥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홀로 하나이신 주재’ 주인이라고 보면 되지요. 이분을 부인한단 말입니다. 뭔가 통치받기 싫고, 간섭 받기 싫고 그저 자기 본능에 따라 본능에 솔직하고, 본능에 충실하고, 본능을 개발하고 ‘이렇게 살면 그것이 행복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교회에 들어온 거예요.




이 점이 굉장히 신기하고 놀랍지요. 결국 유다서는 뭐냐 하면, 교회 바깥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많지요. 전 부 다 그렇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교회 바깥에서 놀면 되는데 그런 사람이 교회 안까지 들어왔다는 말은 결국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거예요. 왜? ‘이런 자가 불신자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자가 멸망 받을 사단의 자녀다.’ 라는 것을 신자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교회 안으로 출석케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교회가 완전하다는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란 말입니다.




이제 진도 좀 나가봅시다.


드디어 구약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멸망할 사람을 뽑습니다. 11절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 그 다음에 “발람의 어그러진 길” 그 다음에 “고라의 폐역”이지요. 가인, 발람, 고라 다 어디 나오는 사람들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여기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전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과 관계있지요. 가인은 자진해서 먼저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했잖아요. 발람을 쫓던 사람도 마찬가지고, 그 다음에 고라도 마찬가지고.




가인, 발람을 쫓은 무리, 고라 자손 이 세 부류가 오늘날 교회에 까지 침투하는 것을 누가 허용한 겁니까? 허용 정도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뭘 알아야 돼요? 가인이 어떤 사고방식에서 그 일을 했으며, 발람을 따르던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그 일을 했으며, 고라는 어떤 사고방식으로 그 일을 했는가를 알므로 말미암아 ‘아하, 교회가 전적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다녀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곧 구원이구나!’ 하는 것은 안단 말이지요. 말이 참 어렵지요.




이스라엘 다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되게 하신 분이 구원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이런 사람까지 불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된 사람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교회 안까지 불신자가 들어오게 하신 것을 누가 허락했다? 주님께서 의도하셨다. 그런 주님을 믿는 사람이 신자란 말입니다.




1번은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이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두 번째 조건은 뭐였습니까? 십자가 복음의 능력으로만 구원 받아요. 우리 능력이 아니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것을 성령으로 우리에게 적용 시키지요.




이런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조건이 왜 인간의 힘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조건이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의 힘으로 하는 이런 자들을 같이 옆에 세워 대조할 필요가 있지요. 같은 교회에 다니지만 ‘아, 저 사람은 저렇게 하기에 고라와 같은 자이구나.’ 그것을 깨닫는 거예요. 이것을 깨달을 때 그런 조건을 허락하신 그 주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적으로 순종하는 사람, ‘주께서 알아서 그런 사람 우리교회에 잘 보냈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믿을 때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구원을 아는 신자라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제 슬슬 피곤이 오지요?




가인부터 봅시다.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그 전에 7절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는 말은, 교회에 그런 인간이 있는데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말은 교회 속에 뭐가 있다? 지옥 갈 사람들이 반드시 온다 이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삭제해야 교회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우리 힘으로 완전한 교회 되려고 할 생각 말란 말입니다. 어중이떠중이 누가 오던 간에 그런 것을 우리가 다 인정해야 유다서 말씀처럼 ‘저 사람들은 소돔, 고모라처럼 멸망 받을 사람이구나.’ 파악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냔 말이지요. 그리고 그 반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지게 되고.




9절에, 천사장 미가엘에 마귀에 대해서도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했다는 말은, 그것마저 누구 소관이다? 주재하신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기에 우리 힘으로 알아서 추방하자고 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대구 어느 교회에서 십 몇 억 재산이 갑자기 생겼는데, 목사가 그 재산을 다 가져가서 교인들이 그 돈 달라고 재판을 걸었는데 그 돈 아직 안 내놓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장로님이 가셔서 “서로 싸우지 말고 복음대로 하면 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사람들은 안 들어요. 그저 돈밖에 생각 안 해요. 나쁜 놈이 들어와서 우리 교회 돈 가져갔다고 돈밖에 안 보여요.




화평교회 재정은 누가 담당합니까? 만약 김 집사님이 담당하시면, 그 돈 가지고 사라져버렸다고 할 때 ‘아이고, 화평교회 괜히 다녔다.’가 아니라, ‘아, 주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구나!’ 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교회에 마귀의 종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런 사람들이 들어와야 우리가 정신을 차려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무엇에 따라 움직인다? 본능 따라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도 뭐 따라 움직입니까? 본능 따라 움직이니까 우리가 그 사람들한테 합세되어서 휩쓸릴 수가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아까 1, 2, 3번에 의하면 누가 그것을 막아주지요? 성령께서 막아주니까 그게 은혜 아닙니까. 그게 은혜거든요. 저 사람이 하는 엉터리 같은 행세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생각나게 한다는 자체가, ‘참,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되고 정말 주님께서 힘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같은 교회 다니면서 붙어서 봄으로 그런 것을 안다 이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것은 좋은 예가 되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가 왔을 때 거기서 구원 받은 사람은 한 가정뿐이었어요. 이 가정도 나눠지지만. 결국 대부분 사람들이 천사의 말을 안 믿잖아요. 오히려 천사를 공격하지요. 본능대로 움직여서 천사와 성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천사가 하는 소리는 귀에 안 들어와요.




오늘날 교회가 뭐가 문제인가 하면, 복음과 설교의 소리가 교인들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야말로 이것은 몇 사람 가만히 들어온 것이 아니고 온통 교회 전체가 아예 예수 이야기하지 말고 복음을 말하지 말라는 식이에요. 교회가. 전부 다 본능에 충실해요.




정수기 팔려고 온 사람이 있고, 약국 개업해서 선전하려고 온 사람도 있고, 공인중개사 하는데 장사하려고 오는 사람도 있고, 장로 따서 학교 이사장하려는 사람도 있고, 기독교 병원에서 과장으로 진급해서 교수되려고 온 사람도 있고 온갖 본능대로 짐승 같은 인간 다 동원했어요. 그런 인간들이 목사 되고, 장로 되고 해요. 복음 전하는 사람은 다 쫓겨 가고.




이런 일이 있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강제로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천사장도 마귀에 대해서는 함부로 못했습니다. 다 주님께서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꾸짖기를 원하지요.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이 정도로만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가인을 생각해 봅시다.


가인이 제사 드릴 때 자기 눈에 뭐가 안 보이는가 하면 동생이 자기한테 의미가 없어요.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하나님과 자신의 문제에요. 동생 아벨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언제 동생의 의미를 새롭게 느꼈냐 하면, 자기 하는 일이 안 될 때 즉, 제사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그 때에 동생의 의미가 부각 되지요. 왜? 동생 제사는 하나님이 받았잖아요.




가인이 제사 드릴 때 가인의 본능은 나타나지 않아요. 언제 가인의 본능이 나타나는가? 동생이 제사 드릴 때, 분노가 일어날 때 가장 가인답지요. 이 말이 뭔가 하면,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고 할 때는 결국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던 수용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아니죠. ‘내가 하는 요구조건 대로 내놔!’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안 될 경우에 그냥 주저앉으면 그것은 가인답지 못한 거예요.


분명히 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저쪽만 응답이 왔을 때 여기서 완전히 독이 오른 겁니다.




그러면 가인은 왜 생겨난 겁니까? 가인이 있어야 아벨이 피를 흘려요. 아벨이 피를 흘렸다는 말이 어디 나옵니까? ‘아벨과 사가랴의 흘린 피를 내가 너희에게서 찾겠다.’(눅11:51)고 하잖아요.




그러면 아벨을 하나님께서 피 흘려 죽게 한 것은 뭘 갉으려고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창세전에 선택한 것에 대해서 시비 거는 자에게 주님께서 가차 없는 저주를 퍼붓기 위해서 가인에서 얻어맞는 것이 아벨의 피잖아요. 그 피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 올라간 그 피 소리에 의해서 가인이 추방당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대 주재 그리스도께서 지금 교회에서 그 일을 하신단 말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교회에서 엉뚱한 놈 왔다고 그것으로 짜증을 내느냔 말이지요. ‘우리교회를 무시하십니까? 저런 인간을 왜 보내십니까?’ 라고 주님께 항변하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교회는 완전해야 된다는 자체가, 주님이 다루신다는 말은 하면서도 사실은 누가 다룬다? 우리 손으로 완전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내 교회 하나를 챙기고 싶은 그런 욕망입니다.




유다서는 그렇게 안 봐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더라도 주께서 호되게 심판하실 증거물로 등장하니까 우리는 그렇게 알고, ‘저런 인간들은 멸망하게 되어 있으니까 어떻게 멸망할지 보는 것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곤하신데 조금 쉽시다.




(2007. 9. 28. 11:0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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