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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1 23:58:41 조회 : 3602         
05 교회사 7강 - B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교회사 7강 - B
                                                                        05,11,26  강의 이근호



◈ 성경과 교리의 동침, 그 결과는?


천주교의 공의회 결정은 이미 니케아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대부분이 다 나왔는데, 개신교의 신조가 거의 1536년 칼빈의 스위스 신조(Confessio Hevetica Prior)에서 나왔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루터는 왜 신조를 만들지 않았는가? 루터는 체계적인 교리주의자가 아닌데, 루터는 교회 자체가 달라져야한다고 생각했지, 교리는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를 만들어버리면 스콜라화되기 때문인데, 사실 이것이 루터의 뛰어난 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성경에 있는 대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쪽과 또 스콜라 쪽, 17세기에는 이것을 '개신교 스콜라' 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서 교리화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문자' 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이 나누어지는데, 이것을 본인이 결정할 것 같으면 별 문제가 없는데, 이것을 외부에서 강제로 결정시킨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이든 그 어떤 신조이든 문제점이 있는데, 즉 신조가 있어버리면 자체 모순이 생기는데, 개신교 자체가 교회전통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성경이 제일 우선이라고 해서, 그래서 오직 성경만을 믿자고 나온 것인데, 그런데 그 성경을 믿기 위해서 신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신조를 믿을 것인가?" 라고 갈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성경이란 계속해서 성령이 역사함으로 계속해서 깊은 뜻이 나오지만, 그러나 신조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조를 믿어버리면 자연적으로 성경적 내용을 추가했기 때문에 성경을 핍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성경과 신조가 서로 충돌될 때 성경을 버릴 수가 있다는 말이다.


◈ 이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는가?


제가 실제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저에게 노회재판국 담당자가 와서 하는 말이, "이 목사님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조 안에, "모든 진리는 성경에서만 나온다" 라는 것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절대적인 진리이고 그 외는 진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성경이 유일한 진리의 기준입니다" 라고 답변하니, 이 인간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고서, '성경' 말고 '웨스트민스터'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저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습니다" 라고 하면,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조 자체가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신조를 그렇게 여기는 것을 신조자체를 거부한다고 이 신조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인데, (아이쿠, 복잡해) 그러니 웨스트민스터 신조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어느 신조 할 것 없이 말이다.) 물론 이런 모순점이 있음을 알고서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참고하면 되고 말이다. 그냥 '참고로 하면' 말이다.


그래서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참조하면 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웨스트민스터를 믿느냐?" 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가? 신조를 자기가 갖게 되면, 그만 자기를 위한 신조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말이다. (도대체 머리가 나쁜 것인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인지...)


보통 성경을 이야기할 때, 그 어떤 인간이라도, 제 아무리 이단, 아니 삼단이라고 해도, "성경이 나를 위해서 있다" 라고 하지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고 말이다. 아무리 이단이라도 뻔뻔스럽게, "너희들은 성경과 관계가 없어. 나와 관계 있어" 라고 말하지 않고, "성경은 예수님과 관계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조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가면, 그만 신조를 인정하는 '나 자신을 위한 신조'가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내가 만든 신조에 불복하면 당신은 이단이다" 라고, 그렇게 협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협박을 말이다.


◈ 개신교는 천주교의 모방품 !!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가? 그동안 천주교가 수 백년 동안 해왔는데, 그런데 이제는 개신교에서 신조가 남발되면서, 개신교가 그만 천주교 짝이 났다는 것이다. 개신교가 천주교를 그대로 답습하는 꼴인데, 그래서 신조를 들이대고서는 '내편, 니편' 이라고 편을 가르면서 재판하고, 소위 마녀사냥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에 여자들을 잡아서 마녀라고 해서 화형을 시켰듯이 말이다.


그래서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이 유럽에서 배운 대로, 정치와 교회가 하나가 되는 신정정치를 시도했는데, 칼빈의 이상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적인 신정정치를 실현하려고 시도하다가 끝내는 실패하고 말았는데, 왜 실패로 끝났는가? 그들이 미국에 건너온 불과 수십 년을 넘지 못해서 교회 출석률이 그만 10% 대로 떨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사실 교회사에서는 이런 것을 제대로 가르치고 공부해야 하는데, 16세기에 치열하게 종교전쟁을 할 때는, 즉 사람이 누구와 싸울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적과의 전투에서 이기려고 서로 힘을 모으고 열심을 낸다는 것이다.)


◈ 우리교회는 이단이다 !!


예를 들어서, 우리교회 옆에 있는 지묘교회가 우리를 보고 이단이라고 할 때는 우리교회가 힘을 합쳐서 오히려 지묘교회가 이단이라고 하면서 싸우는데, 그런데 지묘교회가 "알았다, 알았다" 라고 하면서 더 이상 싸움을 걸지 않을 때에는, 누구에게 문제가 더 큰 생기는가? 우리 교회가 그만 태만해지고, 나태해지고, 안일함에 빠진다는 것이다. 더 이상 싸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교회에서 또 "너희들, 이단이지" 라고 하면 우리교회도 또 다시 힘을 합쳐서 싸우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면, 그냥 겉으로는, 입술로는 살아계신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눈에 보이는 교회와 자기 자존심이 서로 일체화되어있다는 것이다. 서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교회는 이단이고 말이다.)


◈ 십자가 - 영구 없다 !!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부르짖는 자가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높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자도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그야말로 오로지 예수님만이 의롭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만 항상 드러나야 하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가끔 나타나도 되는 분인가? 그분은 세상 끝 날까지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늘 주님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들이, "나는 자존심 없다. 다 깨어졌다" 라고 말은 그렇게 해놓고는, 막상 자기를 공격하니, 그때는 열을 받아서 바짝 힘을 합쳐서 대항하자고 해놓고는, 그리고는 그런 적들이 사라지니 그만 나태함에 빠져서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개신교 - 적이 사라지니 본색이 !!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고 하면, 그 당시 아메리카에 온 사람들이 프랑스와 독일과 (물론 그 당시에는 독일이 없었지만) 폴란드와 온 유럽에서 온갖 핍박과 박해를 다 받았는데, 누구에게 말인가? 카톨릭으로부터 말이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왕들이 카톨릭 신자였고,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가' 라고 해서 프랑스와 영국 일부를 빼고는 유럽의 대부분을 통치했는데, 또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해서 그런 통치를 다지고 말이다.


그때는 개신교가 힘을 합쳐서 잘 대항을 했는데, 그런데 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핍박이 없는 곳에 왔을 때, 자기들을 더 이상 공격하는 적의 주체자가 없어지니, 자기들의 원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명목상 교인이었기에, 본래 자신의 욕심대로 살다보니 그 다음부터는 교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신조의 강화 - 이래도 교회에 안 나와 !!


이렇게 인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 목회자들 입장에서는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더욱더 강력하게 신조를 강화시키는데, 이렇게 신조를 강화시키니, 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떻게 되는가? 과거에는 카톨릭이 자기 종교를 공격하다가, 이제는 스콜라된, 관념화된, 논리적으로 따지는, 소위 경직화된 교리가 자기의 자유로운 신앙양심을 공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 理神論 - 이성으로도 신을 아는데, 교리가 왜 필요한가?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 자연적으로 반발을 일으키는데, 그 반발이 바로 이신론(理神論)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존 로크나 흄 등이 주장한 것인데, "사람이 이성으로 따져 봐도 신을 아는데, 그러니 이따위 교리가 왜 필요한가?" 라는 것이다. 


(이신론자들이 말하기를) 그래도 굳이 교리가 필요하다면,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서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 죄를 용서했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고, 인격자이고 말이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서 거듭나면 된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런 몇 가지만 알고 나머지 교리는 다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개신교가 간편함을 위해서 카톨릭에서 나왔는데, 그런데 이 개신교에서 더욱더 간편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의 복잡한 교리는 다 버리고, 내가 편한 대로 믿을 것만 대충 챙기자" 라고 나오다가, 결국에는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꼭 성경을 보지 않아도 된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 "성경대로 교회" 란 무슨 의미인가?


여러분이 토요일이라서 피곤하니, 중요한 것만 골라서 간편하게(?) 이야기하겠는데, 카톨릭에서 개신교가 뛰쳐나온 이유가 간편한 교회가 되기 위함인데, 이 간편함을 것을 '성경대로 교회' 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성경대로 교회가 무슨 뜻인가?


성경대로 교회는 사실상 정치화된 교회인데, 신앙을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간편한 교회, 즉 그것이 개신교였는데, 그런데 더 이상 주적(主敵)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간편한 것이 이제는 천주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그만두고 돈벌이에 바쁘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돈벌이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고 사명이라고 했는데, 즉 거룩한 소명이란 것이다. 성직자만이 소명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고, 농사짓는 것도 다 소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시간은 누가 관리하는가? 이제 목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 교인들의 특징 - 바쁘다 바빠 !!


그래서 목사가 고난주일이니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바빠서 안 된다고 하고, 이번 주일이 부활절이니, 또 성만찬식이 있으니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사업상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교회에 가려고 집을 나서다가도 삐리리 전화가 와서 바이어를 만나야하고, 그런데도 억지로(?) 교회에 갔다가 단골을 놓치면 다시는 교회에 안 나오고 말이다. 교회에 오다가도 차를 돌려서 단골손님을 만나야 하고, 그리고 난 뒤에 오후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혹시 이 자리에 어느 한 구석이 뜨끔한 사람이 있나요? 특별히 누구를 지목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시간관리와 스케줄 관리를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의 목사가 다 알아서 해주었데 말이다.


이렇게 자기가 다 알아서 하다가 보면, 교리만 연구하는 스콜라적인 목사와는 다른데, 목사가 교리를 말해도 제대로 듣지 않는데, 복잡하다고 말이다. 교리는 그냥 간편 간단하게, 이단이 안 될 정도로만 몇 가지만 알면 된다고 말하다가, 그것조차도 과학이 발달하면서 모조리 다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 계시 - 교회가 아닌 이성을 통해서 !!


이제는 계시가 교회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교회를 통해서 온다면 만날 교회에 가야되고, 교회에서 매일 같이 살아야 하지만 말이다. 우리 인간 속에는 이성이 있어서, 이제는 신의 계시가 이성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에 칸트가 등장하면, 신의 이성이 무엇인고 하니, 결국에는 '도덕' 인데, 이렇게 도덕적이 되어버리면, 여기서 나온 것이 '유니테리안(단일신론)' 인데, 삼위일체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교리에서 나왔고, 헬라철학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면 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교리 같은 헛소리는 이제 그만이란 것이다.


유니테리안의 '체닌' 이라는 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대신해서 죽이신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어긋난다" 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지은 죄를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 성경은 교리는 밀리고, 교리는 도덕에 밀리고, 도덕은 돈에 밀리고 !!


그래서 몇 가지 교리, 십자가, 속죄와 재림 등을 꼽다가, 여기서 하나 둘 빠지면서 반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통 기독교에 대한 반발이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은 '도덕' 만이 남는데, "그래, 착하게 살자" 라는 것만 말이다. 그런데 도덕은 누구에게 안 되는고 하면, 돈에게 밀리는데, 이렇게 도덕과 양심은 돈에게 반드시 밀리는데, 돈 있을 때에 도덕이지 없으면 윤리고 도덕이고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바로 1725년부터 1760년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서 시작된 '대각성 운동' 인데, 비슷한 시기에 1700년 초반에는 영국에서 존 웨슬레의 의해서 일어났는데, 이것이 감리교의 시작인데, 사람들이 너무나도 방탕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의 교리를 믿지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도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아는데, 그래서 그냥 자기가 알아서 믿으면 되는데 왜 바쁜데 굳이 교회에 나오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고, 그 근거가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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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Westminster Confession] 
성공회(聖公會)의 개혁을 위하여 1643~1647년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장로주의(長老主義)에 입각하여 제정, 채택한 신앙고백. (1643~1647)
1만 4천여 단어, 33장으로 된 이 장문의 신조(信條)가 성립되기까지에는 상당히 많은 논란이 거듭되었는데, 의회 승인은 1648년에야 이루어졌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영향을 받아 정통적 칼뱅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일랜드 성공회의 신앙고백의 영향도 커서 그 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들의 장로파 교회에서 기본적인 교의(敎義)로 채택되었다. 이 고백서는 고전적 신앙고백서로서는 최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성서의 권위’를 교리해석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 형태는 참신하여 기존 신앙고백서의 전형에 구애됨이 없는 점이 특색이다.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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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순서 (35개 조항) ]


제 1 장     성경에 관하여                                                         
제 2 장     하나님 성삼위일체에 관하여                                        
제 3 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관하여                                   
제 4 장     창조에 관하여                                                     
제 5 장     섭리에 관하여                                                     
제 6 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형벌에 관하여                                 
제 7 장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제 8 장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 9 장     자유의지에 관하여                                                     
제 10 장    실제적 부르심에 관하여                                            
제 11 장    의인에 관하여                                                          
제 12 장    양자에 관하여                                                     
제 13 장    성화에 관하여                                                            
제 14 장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관하여                                 
제 15 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관하여                                             
제 16 장    선행에 관하여                                                    
제 17 장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에 관하여                                            
제 18 장    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하여                                    
제 19 장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제 20 장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제 21 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제 22 장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관하여                                      
제 23 장    관공직에 관하여                                                          
제 24 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제 25 장    교회에 관하여                                                            
제 26 장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                                             
제 27 장    성례전에 관하여                                                         
제 28 장    세례에 관하여                                                 
제 29 장    주의 만찬에 관하여                                                        
제 30 장    교회의 권징에 관하여                                              
제 31 장    대회와 회의에 관하여                                                      
제 32 장    사람의 사후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제 33 장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제 34 장    성령에 관하여                                                    
제 35 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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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 순서가 보여주는 것 - 더 이상 믿지 않는다 !!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해서, 영원한 경륜에 대해서, 창조의 섭리에 대해서. 인간의 타락과 죄의 회복에 대해서, 등등 이런 것이 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미국이 18세기가 되면, 이미 이런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교인이 되는가? 태어날 때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이렇게 목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하고, 그리고 목사를 지역유지로 존경하지만, 그러나 목사는 우리 마을이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착한 일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홍글씨' 라는 소설을 보면, 어떤 목사가 남편이 죽고 없는 여자인줄 알고 관계를 맺었다가, 나중에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니, 이 목사는 남편이 있는 여인과 관계를 맺었다고 못 견디고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자는 간음죄로 처벌되고 말이다.


◈ 이미 윤리와 도덕이 모든 교리를 대표 !!


이것을 무엇을 뜻하는고 하면, 이미 윤리와 도덕이 모든 교리를 대표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도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영향 속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18세기 신앙운동에 집어넣으니, 진짜 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러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회개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착각인데, 이 대각성 운동은 실패라는 것이다. 1907년에 우리나라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한 평양 대부흥 운동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1759년 다윈의 진화론 사건 !!


이런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1759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것인데,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된 후, 그것이 미국까지 파급되어서 온통 진화론적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라이센푸스' 라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천국이다" 라고 주장했고, 그 다음이 최초의 자유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리츨' 이란 사람이 등장하고, 그 다음이 리츨의 제자인 '하르낙' 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독일신학이 미국에까지 파급되는데, "십자가이고, 구원이고, 속죄고 뭐고 다 집어치워라"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도덕적 정신이고, 이 지상에서 천국을 이루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재세례파는 천년왕국을 주장했는데, 뮐러라는 사람은 1700년 말에, 어떤 사람은 1800년 말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1909년에 스코필드 성경이 만들어지면서 세대주의가 등장했는데, 이보다 더 극단으로 가는 자들도 있었고 말이다.


초창기에 칼빈의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도덕적으로 사용한 것이 영국의 웨슬러나 미국의 대각성운동이었는데, 그렇다면 원래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계약사상이고, 언약사상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에 여러 신조가 많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조합되었고 말이다.


◈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약속을 했다 !! 그러나 ???


칼빈에 있어서 최초의 신조는 칼빈의 '기독교강요'(1535년)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1536년의 스위스 신조가 (형식을 갖춘) 최초의 신조이지만 말이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 '계약사상(언약사상)' 인데, 그리고 '코케이우스' 라는 사람이 최초로 언약사상이라는 것을 밝혔는데, 즉 구약의 전부를 '언약' 하나에다 집대성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의 언약사상은 오늘날 제가 이야기하는 언약과는 다른데, 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약속이다" 라는 것인데, 초창기에 코케이우스나, 웨스트민스터나, 재세례파도 언약사상을 많이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약속을 했다" 라는 것인데, 이게 그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밝히는 언약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언약이란 무엇인가? 구약 예레미야가 말하는 "안식일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라는 것과 같은 것인데, 그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세례나 성만찬도 그렇고 말이다. "이러한 영원한 언약을 우리가 믿었고, 늘 그 약속 안에 있음으로서 우리가 구원받는다" 라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중심사상이라는 것이다.


코케이우스의 사상에서 그래도 잘 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성부와 성자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체결되어있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그가 이야기했던 다음과 같은 것은 전혀 성경적이 아닌데, "하나님의 약속으로 구원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차이점을 이야기하겠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다" 라고 한다면, 저는 그것을 복음적이고 성경적으로 보겠는데, 그런데 초창기에 사람들이 말하는 언약사상은 무엇인고 하니,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그 약속 속에 있어야, 즉 "약속이 유지되어야 구원받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언약에 '우리'가 왜 들어가는가?


여기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우리' 라는 것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약속에서, 약속을 지켜야 하고, 약속을 위반하지 않도록" 그렇게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을 받고 말이다. 


그러한 약속이 바로 재세례파에서는 세례로 보았고, 칼빈주의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내용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또 다시 잔뜩 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약속은 오히려 이와 반대가 아닌가?)


앞에서 다시 보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우리가 구원받게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노' 인데, 전혀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왜 구원을 받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 초창기 언약신학 - 그들은 천주교와 싸우기에 바빴다 !!


초창기의 언약이 무엇인고 하니, 초창기에는 개신교는 천주교와 싸웠는데, 그런데 이 천주교에는 내려오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제대로 그 전통이 스며들도록 일년 스케줄을, 아니 평생 스케줄을 교회에서 다 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에서 주장하기를, 이러한 천주교의 교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 말씀대로, 즉 하나님의 계약대로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가 말하는 언약과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하는데,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들은 천주교와 싸우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 웨스트민스터 신조 - 항상 앞에 '적'이 있다 !!


따라서 이 웨스트민스터 신조가 기억하는 것은 항상 '적'이 있다는 것인데, 즉 "다시는 천주교나 영국국교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자면, 이제는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교회의 목사를 교인들의 손에 의해서 뽑는다" 라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이 일한 사람 중에 '휫필드' 라고 있는데, 이 에드워드는 공부를 많이 한 침착한 사람이고 휫필드는 설교를 잘한 사람인데, (아주 웅변적으로 말이다.) 그 뒤에 나오는 부흥회에서는, 19세기말에 진화론이 발달했을 때인데, 이때 A.A.핫지가 먼저 나오고, 워필드와 메이첸이 그리고 메이첸의 제자 밴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실 제가 보기에 밴틸은 별 볼일 없는데, (조직신학을 가르친) 박형룡의 아들인 총신 박아론 교수는 얼마나 칭찬을 하던지 말이다.


19세기말에 가면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전체와 미국까지, 온 세상이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이신론에 빠져들어서 교회의 교인 숫자가 확 줄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 혁명 때에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가 모두가 다 날아가 버리는데, 종교와 정치의 싸움에서 정치꾼이 이겼다는 것이다. 이때 주역이 나폴레옹이고 말이다.


이렇게 19세기 중순에 유명한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그야말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 빠이빠이였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종교를 쥐잡듯이 잡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서로 이렇게 헤어지면서, 정치가 종교에 대해서 돕지도 않고, 서로 말하지도 않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때부터 개인의 신앙은 개인이 결정한다는 근대종교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근대종교사상 - 내가 원하는 종교는 내가 결정한다 !!


그러므로 오늘날의 사고방식인 "내가 원하는 종교는 내가 알아서 결정한다" 라는 것은 종교개혁 시대에는 없었고, 19세기가 되어야 비로소 나온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국가는 국가대로 가버리고, 종교도 개인이 알아서 믿든지 말든지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따로 따로 갔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성경은 더 이상 아무런 필요가 없어지는, 즉 종교는 국가의 힘 앞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돈 앞에서는 맥도 못 추었다는 것이다.


◈ 어느 시대 한 순간이라도 신앙적인 시대가 없었다 !!


이렇게 살펴보니, 가슴 아프게도 어느 한 시대 한 순간이라도 신앙적인 복음시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찰스핫지나 워필드 등이 등장하게 된 것도, 그 당시 사람들이 소위 기본적인 교리조차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고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언약을 이야기할 때, 그 언약을 믿어야한다고 했는데,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히 체결한 언약을 말이다. 그러한 언약사상에서 안식일 완성으로서의 주일성수가 신조에 나오는데, 그것이 왜 삽입되고 왜 지금도 장로교에서 이것을 주장하는가?


◈ 주일성수 - 당신 소속을 밝혀라 !!


그 이유는 바로, 이렇게 안식일(주일)을 지키도록 하게 되면,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고 하면, 일요일마다 자기 교회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눈으로서 믿음에 대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 십일조 - 상인들이 싫어하는데 !!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십일조' 부분이 없는데, 왜냐하면 이 십일조 문제 때문에 개신교가 카톨릭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십일조를 내지 않으려고 말이다. 십일조는 토지가 있을 때 십일조인데, 즉 구약에서 토지가 있을 때 말이다. 그런데 장사하는 상인이 땅도 없는데 무슨 십일조를 내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십일조란 무엇인가? 토지 주인이 여호와이기에, 그 토지의 값, 즉 임대료를 내는 것이다. 그러면 농사짓지 않는 사람은 어떠한가? 십일조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사나 부동산 업자, 그리고 장사하는 상인들에게는 십일조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웨스터민스트가 그 정도는 알기에, 그래서 십일조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안식일을 지켜라" 라는 말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종교, 즉 자기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 누구인지 가려낼 수가 있고, 즉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말인데 말이다. (왜 무서운 말이냐구? 조그만 기다리셔!)


이렇게 자기 교회 교인이 누구인가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즉 안식일이 영원한 계약인 하나님의 언약인데, 이것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고 말이다. (사실 십일조도 마찬가지인데, 주장하려면 요즘 한국 장로교처럼 용감하게 둘 다 하든지 말이다. )


그리고 웨스터민스트 신조에 의하면 그들은 천주교를 반대했는데, 이렇게 천주교를 반대했다는 것은, 계속 반복해서 말하는데, 천주교의 사제는 교황이 임명하는데, 그런데 장로교는 교인들이 임명하고, 영국의 개혁주의 같으면 영국 국왕이 임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거행하는 세례식과 성만찬, 그리고 안식일 등은 언약으로 간주해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 개신교의 특징 - 목사의 설교가 우선 !!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교리인데, 이 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목사의 설교가 중요한데, 목사의 설교가 우선되는 교회가 개신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가 특징이라는 말은, 교회의 책임을 목사에게 맡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의 책임자로서 교회를 책임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목사가 자기 교회 교인과 아닌 사람들을 판단할 권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가 분명히 주님인데,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는 비록 자기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가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가 성령을 주지 않는데, 이렇게 목사가 성령을 주지 않는다면, 목사는 무엇만 확인하면 되는가? 목사는 그 사람 속에 과연 성령이 있는지, 즉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그런 고백 속에서 그들을 섬기면 OK라는 말이다.


그런데 목사가 이렇게 자기 교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는 것은, 이미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으니 말이다. "내가 목사인데, 그래서 내 교인은 따로 있다" 라는 말은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면, 과거 네덜란드나 스코틀란드의 존낙스 시대에 나라전체가 교회였는데, 그것은 교회의 통치권자가 왕이 되어서, 백성들은 그 왕의 종교에 따라주어야 하는데, 바로 그런 것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다만 교회라는 이름의 소규모 국가로 그 모습만 바뀌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왕 노릇은 목사가 하고 교회는 정치적 통치를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장로와 감독은 정치가가 되고 말이다. 이것이 칼빈이 원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칼빈이 왜 이것을 원했는가? 칼빈은 교회가 이렇게 해서 원한 것이 아니라, 천주교와는 달라야 한다는 의미로 원했다는 것이다.


◈ 칼빈 - 천주교와는 달라야 !! 간편하게, 성경대로 교회 !!


개신교는 천주교와 분명히 달라야 하는데, 그래서 간편하게 하는데, '성경대로 교회'를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복잡한 것이 많이 들어가니, 간편하게 하자는 것이다. 즉 "간편하게 한다" 라는, 그러한 쪽으로 나라 자체가 나라인 동시에 교회였는데, (스위스 제네바에서 실제로 칼빈이 그런 교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제네바의 총수는 바로 칼빈이었다는 것이다.


◈ 오늘날 개신교에는 교회마다 교황이 있다 !!


그러니 칼빈의 그러한 모습을 닮고 싶어하는 자들이 오늘날 목사들인데, 그것은 자기 교회 교인들이 신앙에 대해 본인들이 관여할 권한이 있다고, (그렇게 우기고 싶은 것이다.) 사실 이것이 참으로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닌데, 그렇게 되면 목사들이 예수님의 대행자라는 말인데, 대리사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목사들이 봉사정신은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전혀 찾을 수가 없고, "당신이 싫으면 나가라" 라는 것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싫으면 나가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봉사한다' 라는 것과 '싫으면 가라' 라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 호적등본 하나 떼어 주세요 - 예, 알겠습니다 !!


쉬운 예를 들면, 여기 지묘동 동사무소에 제가 호적등본을 떼러 갔는데, 그래서 "등본 하나 주세요" 라고 하니, 그쪽에서 당장 하는 말이, "당신은 우리 동장님께 복종하겠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등본 하나 떼어주면 되는데 말이다. 아니 기차표를 사는데, 매표원이 나와서 "나에게 복종하겠는가?" 라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손님, 감사합니다.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왜 목사가 그렇게 하지 않는가? 왜 자꾸만 교인들의 신앙을 좌지우지하는 교회의 머리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사실 노회제도가 근본적인 문제인데, 노회는 원래 없다는 것이다. 노회란 교인들이 뽑아준 교회의 장로들의 모임인데, 그래서 교인들이 아니라고 하면 그 목사는 교회를 그만 둬야하는데, 그런데 교인들이 나가라고 하면, 목사가 자들끼리 한편이 되어서 "왜 노회 지시에 반발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로봇이 로봇을 만든 인간에게 반발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영화, 아이로봇???)


◈ 지도자를 원하는 교인들 !!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목사와 장로의 책임이 아니라,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교회에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어떤 모임에 나오게 되면 뭔가 지도자를 원하는데, 성경에 지도자는 예수님뿐인데 말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데, 땅에 무슨 아비가 있고 지도자가 있느냐는 것이다. 지도자는 오직 그리스도뿐인데 말이다.


(마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마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교인들 자체가 성경을 전혀 모르니 "나를 지배해 달라, 통치해 달라" 라고 부탁(?)을 하는데, 그런데 목사가 성경말씀 안다고 해서 지배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참고로 알려주면, 각 사람 속의 성령이 알아서 판단해서 하실 일인데, 교인들은 목사로부터는 섬김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인들이 자꾸만 지도자 지도자를 찾고 있으니, 마치 칼빈시대 제네바처럼 말이다. 그 당시 제네바는 그 자체가 나라이고 교회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 하나 하나가 그만 각각의 나라가 되어버렸다는, 즉 하나의 정치적 집단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교인들이 무엇을 내심 바라는고 하니, "우리 집단의 교회가, 즉 내가 소속된 교회가 내 생존에 얼마나 유리한가?" 라는 것을 따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다니는 교회장로가 동구청장이라고 할 때, 자기가 동구지역에 건축인가를 받으려 할 때, 시청에 가서 하지 않고, 교회에서 그 장로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장로님, 건축허가가 좀 힘드네요. 잘 좀 봐주세요" 라고 하면, 그 장로는 "알았어, 알았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집사는 장로의 꼬봉이 되고 말이다.) 이렇게 교회가 자기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권력단체가 된다는 것이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는 사교장 !!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면, 옛날 봉건시절에 영주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백성들이 좋든 싫든 간에 영주에게 복종해주면, 사람들이 살기에 편한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 종교개혁사를 보면, 백성들의 종교와 영주의 종교가 서로 달라서 백성들이 집단적 이주를 하는데, 자기와 같은 종교를 가진 통치자를 찾아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가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성도는 거울 안에 있다 !!


그것은 다음 시간에 쟈크엘룰을 말할 때 좀 더 하기로 하고, 제가 어제 광주에서 이런 내용을 강의했는데, "성도라면 당연히 '예수님 안'에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게 어떤 표현인고 하면, "거울 안에 있다"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혹시 거울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그냥 거울 앞에서 비추어보는 것 말고 말이다. 거울 속에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림 속에는 들어갈 수 있는가?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도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들어간 곳 - 예수 그리스도 안 !!


그런데 구약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는 들어갔다는 것이다. 다니엘 세 친구들을 집어던진 간수들은 들어가려다가 다 죽었고 말이다. 이것은 원래는 못 들어간다는 말인데,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서 들어가 보니 네 번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재현된 것이 바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 이라는 것이다.
 
◈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 노 타치 !!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것은, 세상에 있는 어떤 권력이라도, 심지어 죽음이라도 성도의 신분을 절대로 손댈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세상 모든 권력을 이기는 능력으로 덧입혀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정말 복음이라면, 과연 웨스터민스트 신조가 필요한가? 사실 신조란 옛날 방식으로, 즉 카톨릭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술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조라는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선수 말고 말이다.) 물론 읽어보면 은혜가 되는데,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 "신조냐, 생존이냐" - 그것이 문제로다 !!


그렇다면 신조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신앙인이 되는가? 가짜들이 엄청 많은데, 왜냐하면 신조를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생존에 유리한가를 재보고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신조를 외우는데, 외우면서도 "이것을 제대로 알아서 밥 먹고살자" 라는 것이다. (아니, 떡집 사장이라면 어떤 교회에 등록하겠는가? 장사를 위해서 교인수가 제일 많은 교회에 간다는 것이다. 신조는 떡 해먹고...)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밖에 있으면서도 신조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뒤집어쓴 것이 아니고 말이다.) 바로 이런 것을 알고자 이렇게 고생을 해가면서 교회사를 공부하는 것이고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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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회사가 몇 강의 남지 않았는데, 다음 시간에는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결을 살펴보고, 시간이 좀 남으면 몰몬교, 안식교 등의 이단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강의가 어려웠으면 녹음된 것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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