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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1 09:48:17 조회 : 5772         
녹취록 복의 전달구조 1(이근호목사/창세기21장 030512)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http://222.231.1.74/~woorich/신학강의/2003전남무안수련회(창21장중심)(화평교회)/03무안수련회1-내어쫓김(창21장)(03,5,12).mp3
http://222.231.1.74/~woorich/신학강의/2003전남무안수련회(창21장중심)(화평교회)/03무안수련회2-여호와이레(창22-28장)(03,5,12).mp3
http://222.231.1.74/~woorich/신학강의/2003전남무안수련회(창21장중심)(화평교회)/03무안수련회3-야곱의자율성(창28,29장)(03,5,13).mp3
http://222.231.1.74/~woorich/신학강의/2003전남무안수련회(창21장중심)(화평교회)/03무안수련회4-자기의(롬5,10)(03,5,13).mp3

무안수련회(이근호목사, 2003. 5. 12-13. 전남무안화평교회)




제가 오늘 강의하고 싶은 것은 창세기 21장부터입니다. 창세기 21장부터 나오는 것은 ‘복의 전달구조’예요. ‘복의 전달구조’. ‘복이 어떻게 인간에게 전달되느냐?’ 그 구조를 살피는 것입니다. ‘복이 어떤식으로 인간에게 전달되느냐?’ 하는 겁니다. 복이 전달될때 그 방식은, 창세기 12:1-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한사람을 선택해서 복을 전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복이 한사람을 통해서 전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복의 근원자도 포함해서 모든 자가 아예 복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항상 ‘없는데서 있는 것 같이’ 즉 ‘무에서 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이란 것을 계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이 하늘에 있잖아요. 이 복(하나님의 있음)이 내려올때는 항상 이 무(이 지상의 없음)와 충돌하면서 내려오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게’ 하시니까 같은 말로, 하나님께 있는 것,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왔다는 말은 곧 그 자체가 현재의 이 세상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 하면, ‘없다’는 것으로 규정하는 조치로서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구원자가 오신다는 것은 이세상에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규정하면서 다가오시는 거예요.




하늘에서 중보자가 오신다는 말은 이세상의 어떤 인간도 인간 속에서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규정하시면서, 그 점을 확실히 하시면서 오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항상 ‘없는데서 있게’ 하시거든요. 이 법칙이 완전히 고착되는 것은 창세기 1장부터입니다.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께서는 없는데서 있게 창조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창조하는 것을 종합적으로 ‘말씀으로 창조’라 합니다. '말씀으로 창조.’ 히브리어로 “브레쉬트 바라 엘로힘”( )이렇게 시작하지요? 여기서 ‘바라’, ‘말씀으로 창조’한다는 것은 무슨뜻이냐? 말씀없이는 말씀 없이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만한 것은 없다는 뜻이지요. ‘말씀 없이는 안된다.’ 이런뜻이란 말이죠.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이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에 가지요. 그래서 그 무가 그 내용이 자꾸 무엇으로 발전되어 가느냐 하면 이 무(없음)가 죽음이 되고 유(있음)가 무엇으로 발전되어 가느냐 하면 나중에는 이것이 생명으로 구체화 돼요. 이것이 생명으로. 그러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는’ 그 말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그 속에는 ‘죽는데서 살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덩달아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만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말씀이 창조하는데 그 창조하는 것이 뭐냐? 말씀으로 죽은데서 생명이 되어 진다는 말이죠. 말씀으로. 이것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잖아요. “그 어떤 것도 말씀이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서도 “내가 온것은 너희에게 생명으로 왔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 생명을 거부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이 됩니까? 이제 머리 좋은 사람은 알죠. 생명이 여기에 왔다는 말은 곧 무엇을 규정하는 말이다? 곧 이세상은 뭐다? 이 세상은 단지 무가 아니고 무엇이다? 곧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그러므로 처음에 ‘있는 것이 오므로 이 세상이 없는 것이 된다’ 할 때, “없기는 왜 없어? 나무가 있고 풀이 있고 다 있는데 뭐가 없다는 말이냐? 태양이 있고 공기가 있고 바다가 있는데 뭐가 없다는 말이냐? 다 있는데 그냥 이미 있는 것이나 크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그냥 있는 것을 확대하고 활성화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인간들이 생각이죠.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그 것을 팽창시키는 것으로, 그것을 복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 너희들 눈에는 그게 있는 것으로 보이나?


세상 : 예! 물론 있지요.


하나님 :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죽음이 있는거지. 죽음이!




죽음이 있는 거지요.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창세기 21장에 보면 계속해서 이런 충돌이 일어납니다. “내어 쫒으라”고 나와요. 이쪽은 뭡니까? 이스마엘이고, 이쪽은 누구예요? 이삭. 이삭인데 같이 살면 좀 좋아요. 아니 같이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 그래도 식구가 허전한데 이왕 생긴 자식하고 그저 사이좋게, 소꿉놀이도 함께 하면서, 같은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사이 좋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거기 “내어 쫒으라”라는 말이 왜 등장해야 합니까? ‘내어 쫒으라’는 말이 어디에 등장하느냐 하면 창세기 21장 10절에 나오죠? 지금 창세기 21장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21장 10절에 보면 “내어쫒으라”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이삭이 출생한다. 이스마엘 이삭 같이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 ‘종교화해시대’ 인데.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손잡고 같이 살면 얼마나 좋아요. 그 팔레스타인 땅에서 얼마나 좋습니까?




(창세기 21:8-10)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쫒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팔레스타인 땅의 이야기를 다룬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소개되고 있어요. 영국에서 중재를 했어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에 있는 독일군대를 추방하는 일에 협조를 하면 아랍인들에게 땅을 분배 해주겠다고 약조를 했습니다. 그 똑같은 약조를 누구에게 했느냐 하면 유대인에게도 했어요.




그래서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겼어요. 나중에 승리하고 난 뒤에. 영국에서 양다리를 걸쳐서 양쪽 다에게 협조를 요구해서 어떻게 협조가 잘 되어서 독일과 이태리 연합군이 물러가고 난 뒤에 “이제는 약속대로 해 달라”고 그렇게 요청할 때, 그때 미국의 입김이 세서 미국 쪽으로 돌아서 버렸지요. 그래서 누가 천대를 받느냐하면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 천대를 받죠. 그 때부터 땅뺏기 싸움이 일어나죠.




‘제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면서 죽 진행되고 그것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을 쫒아내다 보니까 레바논까지 쳐들어가게 되었어요. 가만히 있는 레바논까지 뒤통수를 맞아서 레바논까지 이스라엘하고 붙어가지고 계속해서 중동전쟁이 벌어지고요. 또 팔레스타인이 도망가니까 도망가는 놈 아예 씨를 뿌리채 뽑겠다고 하니까 거기서 또 화를 일으켜서 문제가 계속 일어나는 거죠.




지금까지도 해결책이 전혀 안 나오고 있다 이말 이죠. 지금 아랍진영에서 자기들끼리 단결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핵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래요. 미국은 멀리서 날아와야 하니까 당장의 큰 위협이 아닌데, 이스라엘이 핵폭탄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이스라엘에 대해서 제발 미국이 좀 손을 대 달라는 그런 조건 하에서 이라크가 전쟁에서 적대를 했는데 이제 이라크가 패배하고 난 뒤에는 그 힘도 없어지게 된거죠.




그런 정치적인 문제를 왜 제기하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제발 중동전쟁하고 연관시키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정치적인 입김이지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어쫒으라”에서 왜 ‘내어 쫒으라’고 하냐면 아브라함 언약에 두가지의 조건을 달았어요.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여기서부터 구약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허점이 드러나는 건데. 아브라함언약이 두가지에 관한 것인데 하나는 ‘씨’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땅’에 관한 것입니다. 이 ‘씨’는 아브라함의 혈통입니다.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가나안땅이죠. 그런데 사실은 이것을 약속한게 아니에요. 사실은 ‘씨’와 ‘땅’은 어디에 조건을 달게 되어 있느냐 하면 주장이 아브라함언약에 두가지 조건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씨’에 관한 것이고, - 이것은 후손이죠 - 하나는 ‘땅’에 관한 것입니다. 이 씨는 아브라함혈통이죠.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땅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을 약속한 것이 아니에요. 이 씨는 어디에 조건을 달게 되어 있느냐 하면, 하늘에 있는 것이 쳐들어오는 이런 조건하에 있는 ‘씨’ ‘땅’이에요.




그래서 이 ‘씨’는 무엇에만 해당되느냐 하면, ‘거룩한 씨’만 해당되는 겁니다. 이‘땅’은 무슨 땅이냐? ‘거룩한 땅’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거룩한 땅.’ 그러니까 지금 ‘씨’와 ‘땅’같으면, 누구의 말이 맞느냐 하면, 현재 유대인들의 말이 맞지요. “우리는 아브라함 혈통이니까 당연히 이 팔레스타인은 우리의 것이다”고 주장합니다.




혈통에 있어서는 애굽이나 앗수르에 의해서 혼혈도 되었고, 특히 앗수르의 경우에는 일부로 잡혼을 만들기 위해서 이민정책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쪽의 이스라엘은 아주 혼잡한 혼혈아들이지만 남쪽의 유다, 그러니까 열두지파중에 유다지파가 차지했던 남쪽의 그부분은 아직도 약간은 순수하지 않느냐 이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라지고 무슨 나라가 됩니까? 유대민족이 되죠.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갈 당시에 종류가 세 종류가 있어다는 말이죠. 하나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면 그만이다’ 하는 무리가 있었고 두 번째는 ‘다시 돌아온다.’ ‘다시 돌아옴.’ 세 번째는 돌아올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남의 땅이지만 각자 각자 흩어져서 남의 땅이지만 - 그러니까 지금 바벨론에 끌려간 지파가 유대민족에 해당됩니다.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에 두 지파에 해당되는 이야기죠 - 따로 따로 독립하면 된다는 거죠. 이런 세가지 파가 있었습니다.




(97년 이근호 목사 다니엘서 강의녹취록에서 인용)




① 국가 이스라엘은 이제 영원히 망해 버렸다. - 이 견해는 다윗 언약의 상대자로서 이스라엘이 거부되었음을 통감하는 자들입니다. - 그러기에 그들은 쉽게 이방화 되고 맙니다.




② ‘국가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언약의 상대자를 역사 속에서 실제로 다윗왕조를 따라 난 왕은 70년 포로기 이후 다시 약속의 땅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건축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머물러 기도에 응답하게 되리라고 믿는 자들입니다. - 오직 이들만이 70년이 끝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신봉하며 철저히 다윗 언약을 유다지파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③ 국가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해야만 하고 또 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언약에 대한 위반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존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가장 선지자의 신학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을 했으니까 매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같은 고난을 당해도, 그 돌아오는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이란 공간을 포기하지 못하는 반면에, 그것을 예레미야가 70년을 내다보면서 땅 문서를 없애지 말라고 한 이유라고 보는 것이다. 로마고 나발이고 다 없애버리고 다시 다윗왕조와 같은 번창한 나라는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의 경우는, 국가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와 무관하게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라본 나라라는 것이다(녹취 구득영목사).




다시 정리하면 첫째부류는, ‘포로로 잡혀 간 마당에 그냥 바벨론 시민이 되면 그만’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 부류는,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고, 세 번째 부류는 ‘흩어져도 상관없이 따로 따로 독립하면 된다’는 이 세가지파가 있었다는 말이죠. 세가지 파가 있었는데 이 세가지 파를 하나로 묶어 준것이 두가지 율법때문입니다.




하나는, ‘안식일’율법입니다. 또 하나는 ‘할례’율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를 낳았습니다. 왜 ‘안식일’ 율법이냐 하면, 에스겔에 보면 “세상천지의 모든 율법은 다 깨어져도 안식일은 영원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은 영원하다.’ 그래서 안식교인들이 왜 그 안식일에 미친줄 압니까? 그 사람들에게 골로새서 가져다대도 소용없어요. 그 사람들은 “에스겔을 봐라. 이사야를 봐라”고 합니다.




모든 율법은 다 깨어져도 무슨 율법은 영원하다? 안식일은 영원하다. 그 다음에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할례를 행하지 않는자는 거룩에서 끊어지고 약속 바깥에서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유다 민족에 들어올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뿌리를 볼때에 그 중간에 있는 것은 그 뿌리의 중간 과정에 있는 것으로 해당된다고 본다면, 결국 유대교는 ‘안식일’과 ‘할례’란 말이죠.




(창세기 17:9-14)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그러니까 안식일과 할례를 가지고 “만약에 이 ‘안식일’과 ‘할례’를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 ‘아브라함의 씨’가 되고 ‘아브라함의 씨’가 된 사람에 한해서 하나님의 약속한 바 그리고 ‘아모스’에 약속한 바, ‘호세아’의 약속한 바, 감람산에 누가 와요? 예? 메시아가 쫙 안착하는 거예요. 그 메시아가 도래하면, 그 약속의 땅은 누구 차지다? 아브라함의 혈통의 차지가 되고, 그 감람산에서 메시아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다윗의 자리에 앉아서 다윗의 혈통의 기능으로서 최후의 거룩한 나라가 성취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아직도 믿고 있습니다!




이사야 9장에 보면 나오지요? 한 아이가 났지요. “그 아이는 기묘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그리고 그가 다윗의 자리에 앉아서 만국을 통치하지요. 그 아이의 이름은 뭐지요? 넉자! 지금 이 단계 밖에 안 되는데. ‘마’자밖에 안되는데. 뭐지요? “임마누엘!”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어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 그런데 이것을 누가 이룬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룬다.




그러니까 문자를 알고, 그것을 읽을줄 아는 사람은 그 말씀을 똑똑히 보라는 말이죠. 어떤 다른 여지가 없지요. 꼭 그렇게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추가한다든지 그 말씀을 왜곡시킬 여지가 전혀 없는, 그래서 완벽하게 임마누엘로 오시는 그분 아닙니까? 그런데 건방지게 예수라는 자가 자기는 임마누엘이 아니면서, 예수이면서 자기가 마치 무슨 역할을 한다? 자기가 마치 다윗의 자손으로 온 메시아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당시 율법을 아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 집단을 보고 “너희들은 율법도 모르는 것들이 잘난체 하기는---. 율법도 모르는 것들이. 이 정도는 돼야지.”




율법을 모른다는 것은 뭐예요?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죠. 율법을 아는 우리가 율법을 모르는 인간을 십자가에 처단하는데 십자가에 처단하는 것은 ‘신명기’의 완성이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아 마땅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 예수를 나무에 달리게 했으니까 따라서 예수님을 죽게 한 우리야 말로 ‘신명기’의 율법을 실현시키는 참된 하나님의 씨가 아니고 뭐냐?” 이 말이죠.




(신명기 21:22,23)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로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거꾸로 이야기 하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성취가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이야기하는 죄로부터 벗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뭐가 된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거룩이 비로소, 죄에서 벗어나고, 율법에서 벗어남으로 거룩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뭡니까?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실현시키고 율법대로 살므로써 ‘의’와 ‘거룩’이 된다고 보고, 사도바울은 희한 스럽게도 오히려 사람들을 율법의 정죄로부터 면제하고, 그것이 같이 안오도록 격리시킴으로 말미암아 거룩이 되는 의롭게 되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말이죠.




사도바울이 옛날에 한율법 했던 사람이잖아요. ‘율법에 대해서는 나에게 물어보라’고 할 정도로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서 그렇게 대단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난뒤에는 사람이 완전히 - 그걸 ‘또라이’라고 합니까? - 반대로 돌아 버렸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율법과 격리시키는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연관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죠. 아브라함과 연관시키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전혀 율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언약은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의 430년 뒤에 주어진 것이 율법이었다는 거죠. 따라서 왜 율법이 주어졌나? 율법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뭐되게? ‘무’(없음)되게.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 되게 하므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죽은 자로, 있으나 마나 한자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로 우리를 묶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 이것을 죄안에 가두어 둔다고 하죠 - 상대적으로 뭐가 부각되었어요. 오실 유, 오실 생명이 부각되는 그것이 원래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자손이라는 겁니다.




무엇이 어려운가 하면 ‘왜 내어 쫒으라고 하는가?’입니다. 안 내어 쫒으면 자식이 몇 명이예요? 복수가 되잖아요. 두명이 되는 거죠.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이에요? 여럿이 아니고 하나라는 말이죠. 왜 하나냐 하면, 창세기 12장 1-3절에 보면 복의 근원을 하나로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곧 우리에게 뭘 의식하게 하느냐 하면, 우리중에 어떤 인간도 복받을 사람이 없고, 우리중에 어떤 인간도 복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은 거예요.




갈라디아서 3:15,16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창 12:1-3을 보면 거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해요. 거기 한사람을 세웁니다. 아브라함을 세워놓고서 하는 말이, “네가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합니다.




(창세기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을 자칫 오해하면 이렇게 이해됩니다. 지금도 여러 가지 복들이 죽 있는데, - 하나 둘, 셋, 넷, 복이 죽 있어요 -  ‘복의 근원’이 있음으로 여기에 더 많은 복들이 -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이런식으로 -  추가가 될거라는 그런 기대를 주잖아요. 교인들이 교회 올때에 무엇을 기대합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것도 복인데 그것을 설마 빼앗아 갈 리가 있겠느냐.




현재 있는 복은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것이고, 거기에다가 예수 믿는 노동까지 포함시키면 예수 믿는 노동에 대한 반대급부로 하나님께서 추가밥으로 - 추가밥 알죠? 국밥 - 반찬도 더 주시고, 덤으로 일이 잘 해결된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저주’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저주’ 이야기가. ‘저주’이야기가 나온다는 이 말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한다”고 하므로 말미암아 기존의 인간들이 복을 알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 자체가 ‘저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은 없었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복’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보시기에 모든 것은 ‘무’(無)이고, 모든 것은 ‘죽음’이고 모든 것은 복이 아닙니다. 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이 없기 때문에? ‘거룩’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항상 여러분들이 어떤 때는 복음에 혼동이 오고, 잘 성경이 정리가 안 될때는 이것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의’지 내가 목회를 크게 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남에게 우세스럽게 되고, 남에게 귀찮은 존재가 된다는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지도 않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보시는 사항은 ‘네가 의인이냐, 네가 거룩한 사람이냐’ 그것만 보신다는 겁니다. 그것만 기억하세요. 그것만.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좋습니다. 그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하나님의 관심은 ‘가난하냐, 부하냐, 건강하냐 병들었냐, 눈이 얼마나 좋은지, 살이 얼마나 쪘나, 배가 좀 들어갔는가’ 그런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네가 의로우냐’는 말입니다. ‘의’가 없다면 무엇입니까? ‘의’가 없다면 없는 거지 왜 간섭하느냐‘고 나오지만 “‘의’가 없다면 그것은 ‘저주’입니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일깨워주고 알려주고 싶은 거예요.






새삼스럽게 ‘저주’를 논하고 새삼스럽게 ‘축복’을 논함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 이야기하는 ‘저주’나 ‘축복’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기초하지 않는 ‘축복’과 ‘저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지금 창세기 21장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21장의 핵심은 ‘왜 이스마엘을 내쫒아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면 될 문제를. 한집안에 형제가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혼자 크면 애 버릇 안좋아지고, 형제간에 오순도순 크면 협조하는 것도 배우고 좋잖아요. 가족화목도 좋아지고요. 



그것은 ‘갈라디아서’에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럿이 아니고 오직 한명이어야 하기 때문에 내어 쫒아야 했습니다. 왜 한명만 이어야 하는가? 그 한명이 - 단수죠. 복수가 아닙니다 -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전혀 ‘거룩’도 없고, ‘의’도 없고, ‘의’로운 사람도 없고 ‘거룩’한 사람도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런겁니다. ‘거룩’, 그런 것 없어도 잘살았잖아요. 




잘사는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부다 죽음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으면 그만이지 뭐. 하나님은 간섭하지 마세요. 내가 죽을께요.”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원래 이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 본래의 목적이 있었고 가치가 있었는데 인간이 흙으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래 가치가 훼손되기 때문에, 죽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죽고 싶다’든지 ‘자살하고 싶다’든지 그런 권리 조차 없다 이말이죠. 이 세상은 하나님의 타작 마당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건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맘대로 죽고 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예수 안믿으면 지옥갑니다.”


“까짓거 지옥가지 뭐. 지옥도 한번 구경해 보지 뭐. 못갈거 뭐있나, 가주지 뭐, 나는 지옥 갈 맘 자세가 다 되어 있다. 내가 지옥가기 위해서 예수 절대 안믿는다. 내가 예수 믿나 봐라. 때려 죽여도 예수 안 믿을거야”




그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의 오기만 생각하지 무슨 목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 났는가에 대한 자기목적도 가치도 전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요한복음’에 보면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때는 “으악!”하고 기겁을 하겠죠. ‘죽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것을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죽고 난 뒤에서 무덤을 다 헤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할때가 오니까, 그것은 꼼짝도 못하죠.  




결국 우리는 이 창세기 21장을 공부를 하지만, 하면서도 그 창세기 21장이라는 그 방을 커텐으로 장식하고 있는 방은 어디까지나 창세기 1장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아늑한 분홍색 커튼으로 쳐진. 그 창세기 1장 안에서의 창세기 21장입니다. 창세기 1장을 할때는 우리가 “하나님! 이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정도만 우리가 만족합니다. 이제는 주신 것으로 여기 있는 과일 따먹으면서 이렇게 살랍니다. 낙원에 오니 먹을것도 많고 좋네.”




이렇게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창조할 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없으면 네가 도로 흙으로 돌아가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창조 곧 창조성이 사라지는 것 - 흙에서 창조를 했는데 도로 흙으로 돌아갔다는 이 말은 그 흙에서 창조할때의 창조성이 없어지는 거죠. -  그것이 죽음이죠.




‘죽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가 사라진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의의’, 그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거룩’이 없고, 하나님의 ‘의’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죽음이죠. 그러면 죽으면 그만인가요? 천만의 말씀. 나중에 보니까, ‘무’에서 ‘유’로 가고, 나중에 이것이 ‘죽음’과 ‘생명’으로 발전하잖아요.




‘죽음’이 뭐가 되냐 하면 ‘저주’가 되고, 이 ‘생명’이 ‘축복’이 되잖아요. 이 ‘저주’가 ‘지옥’이 되고, 이 ‘생명’은 천국이 되는 거죠. 이 지옥에 가보니까 여기에 악마가 있어요. 악마가. 여기 천국에는 ‘어린양’이 있다는 말이죠. 결국은 우리의 눈에 띄는 이 세상이 무엇의 연극무대냐 하면 ‘악마’와 ‘어린양’의 -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죠. 뱀의 후손과 어린양의 전투의 무대 - 연극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대 위에 있는 하나의 들러리입니다. 우리는 들러리죠.




여기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누구냐? 그 사람들이 바로 철학자들입니다. ‘칸트’를 비롯해서 수많은 철학자들입니다. 왜 반기를 들고 왜 반박하느냐? 반박의 이유는 이렇게 설명해 버리면 여기에 무엇이 끼어들 자리가 없냐 하면, 인간의 ‘자율성’, 인간의 ‘자유의지’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거죠.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일에 인간의 ‘자율성’이 끼어들 자리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창세기 21장에서 분명히 사라는 자기 ‘자율성’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6장에도 보면 아브라함도 자기의 자율성을 최대한 발휘해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생산합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자기 ‘자율성’, 자기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하갈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생산하게 하잖아요.




그리고 창세기 21장에서 사라도 자기 자율성을 발휘해서 이스마엘을 내어 쫒으려고 했고, 이삭도 ‘자율성’을 발휘해서 야곱에게 축복하지 아니하고, 누구에게 합니까? 에서를 지향해서, 에서라고 규정해서 - 눈이 어두웠으니까요. 분명히 에서가 맞다고 여기고 에서편을 들어서 - 무조건 에서에게 축복을 내리죠. 그게 ‘자율성’ 아닙니까?




충분히 관계가 있어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목사님처럼 말씀하시면 우리는 그럼 로봇입니까? 우리가 설거지 하든, 멸치를 볶든, 하나님께 일일이 물어 보고 할까요?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합니까? 경상도로 갈까요? 전라도로 갈까요? 도로 갈까요? 다 물어 보고 할까요? 기도는 어디서 어디까지 해야 합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아침식사 할까요 말까요? 반찬은 몇가지로 할까요? 어떤 사람은 그래요. 영적인 사람은, 물어보고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 교인에게 심방을 할까요 말까요? 주여 성령으로 역사해주옵소서.’ 제가 보기에는 그것도 결국 자기 ‘자율성’입니다. 성령의 힘에 의해서 하겠다는 것은 그것은 성령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고, 자기 ‘자율성’의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정당화!




“내가 하는 일을 너는 기도를 안하고 했지. 봐라. 그러니까 그것은 마귀의 역사지. 내가 하는 일은 항상 중요할 때 성령께 물어보고 하거든.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에 시비를 걸면 그것은 성령을 모독 하는 것이다.” 그러는 목사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것이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목사들이 인용하면서 “예수를 훼방하는 자는 용서받되 성령에 충만한 목사를 훼방하는 자는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가 성경에 어디에 있습니까?” “봐라 여기 있잖아.” 마태복음 12장에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영원토록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고.




(마태복음 12:29-32)


29 사람이 먼저 강한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무식은 교인들이 그것을 알수가 있습니까? 밭갈고, 채소가꾸고 마늘 뽑다가 오신 분들, 피곤해서 졸다가 번쩍 정신이 들어가지고는 ‘아 저주가 저런거구나. 눈에 보이는 목사한테 대들면 저주 받는구나. 아하! 무지 쉽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보이니까요. 보이는 쪽으로 이야기 합시다. 보이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목사에게 잘하면 축복이고요. “야 쉽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좀 배웠다 싶은 사람은 ‘그게 정말 그럴까?’ 하는데 옆에서 또 눈치로 때려 잡아가지고 ‘아니. 저 배웠다는 집사가 저렇게 해이해졌구나 다음주에는 다른 교회 목사를 불러다가 헌신예배를 인도하게 해야 겠구나.’ 그렇게 해서 헌신예배를 목사가 인도하는데 같은 소리를 하죠. “여러분! 목사님을 잘 섬겨야 됩니다. 목사님을 잘 섬겨야 복받습니다.” 이런 취지로 죽 이야기를 하면 “우리 목사님이 이야기를 할때는 진가 민가 했는데, - 저렇게 겹치기로 복수로 양쪽 스테레오로 때려 버리니까 꼼짝없이 - 이렇게 보니 맞구나” 하게 된다 말이죠.




제가 왜 여러분이 다 아는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하느냐 하면, 문제는 ‘자율성’ 곧 ‘자유의지’ 문제라는 겁니다. 이 ‘자율성’ 문제를 터치 하지 않고 이것을 그냥 모르는 체 넘겨줄 수는 없다 이말입니다. 성경에서의 ‘자율성’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너희들 보기에는 내가 내 맘대로 하는 것 같지만 성령께서 어젯밤 나에게 지시해서 하기 때문에, 만일에 내가 하는 일에 시비를 걸고, 내가 하는 교회일에 반대하는 놈들은 장로든 집사든 전부다 저주 받을 것이다. 두고 봐라! 저주를 받는가? 안받는가?”




두고 보니 그 다음날 아침에 장로님 아들의 다리가 부러집니다. “그거봐. 그거봐! 내가 벌받는다고 했잖아.” 원래 마귀가 있는 교회가 꼭 그런 기적들이 척척 일어나요. 성경에서 ‘자율성’, ‘자유의지’ 문제를 그냥 나몰라라 하고 방치했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 집니다.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물론 저 혼자 정답이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자율성에 대해서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처방은 고난입니다. 고난! 고난 하나밖에 없어요. 탄식입니다. 탄식! 강제로 억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울어버려요. 웁니다. 우리가 하는 그 일에 대해서 옆에서 홀로 슬프게 탄식하고 계시는 거예요. 십자가 고난으로 대비시키지, 강제성으로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많아요. 예를 들어서 교회를 지어야 하는데 앞에 있는 땅이 이상스럽게 교회부지하고 이상스럽게 꼬이고 겹치는 식으로 찡겨 있어서 아무 일도 안될 판국이 되어 있어요. 독실한 불자가 되어서 땅을 팔지 않는 경우에 답답하잖아요. 답답! 그러니까 이 답답함에 대한 갖가지 자기 나름대로의 몸부림 처방이 있다는 말이죠. 그게 뭐냐하면 기도하죠.




기도내용이 뭡니까?




1) “주님의 조치에 그냥 순종하겠습니다.” 그냥 이러고 말면 너무 뻔뻔 스럽잖아요. 그래서 2)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두 개를 합치면 뭐가 되지 않겠나 생각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렇게 열심을 다해 기도할 때 주님의 조치가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1) “포기해라” 2) “이사가라” 이런것들이 나올때는 계속 거부하다가 3) “계약해라” 이런것이 나오면, 기도의 응답이라면서 이것을 택하는 거예요.




수많은 상황이 등장하는데 계속 제끼는 거예요. 마치 포커를 치듯 하죠. 맘에 안드는 것이 나오면 계속 버리면서 한 장더 까보는 식으로요. 계속 까서 보다가 자기 카드패에 꼭 맞는 것이 들어오면 “이거다!” 하면서 “거 봐라 주께서 응답했잖아” 하면, 이것이 정리가 되어가지고 “야!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갑자기 소극적으로 나오던 교인들이 이 장로님의 기도덕분에 적극적으로 되면서 목돈이 나와서 그 땅을 사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영웅적인 전설이 되겠지요. “이땅을 살 때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장로님이 기도응답을 받아서 이땅을 사게 되었다”고 되겠지요. 그 때 그일이 되어 간증으로서 과장도 되겠지요. 이것이 ‘거룩’입니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이게 ‘거룩’이예요? 이것이 ‘의’입니까? 이것 못사서 지옥갔어요?




하나님의 모든 기도는 이러한 모든 ‘자율성’, - 이런것들이 다 ‘자율성’ 아닙니까? - 속에서 다시 한번 십자가의 고통을 알 때 이것을 저는 ‘거룩’이라고 봐요. 이것을 ‘의’로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숨어 있는 이 욕심이 외부에 답답함으로 나타나고 그 답답함에 적당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결부시키는 이 자기 탐욕적인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탄식하면서 울고 있는 겁니다.




그 ‘십자가’ 거기에 우리의 모든 없는데서 생기는 ‘거룩’, ‘의’가 다 담겨있다는 말이예요. 이 에피소드Ⅰ은 그때이고, 또 두 번때 에피소드Ⅱ, 에피소드 Ⅲ가 는 평생을 다가도록 있는 거예요. ‘영국간다. 미국간다’ 등등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우리 마음속에 도발되고 일어나는 거예요. 굉장히 많은 거예요. 이런 것이 왜 일어나는가? “목사님! 그거 안일어나면 안됩니까?” 왜 안일어나면 안되는가? 우리속에는 끊임없이 자율성을 발휘하고 싶은 욕구를 평생가도록 놓치지 않거든요.




바라기는 여기 우리가 강의하고 있는 여기 이곳의 수양관 교회 목사님이 오셔가지고 “목사님들 복음 전한다고 고생이 많으십니다. 한 200만원 드릴테니 쓰시지요. 차비라도 하세요.” 이렇게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 그걸 가지고 오늘 저녁에 기도한다는 말이지요. 00교회 수양관 목사님이 오셔가지고 200만원 주고 가기를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응답이 오기를 1) “포기해라.” 2) “이단이다.” 그런 응답은 안 듣는 거예요. 그리고는 3) “여기 일하는 집사님이 주실거다” “이거구나 이거.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의롭잖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은 자기정당성 이예요. 자기‘자율성’발휘에 대한 자기정당성.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화’입니다. ‘자기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자도, 어떤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도 죽을때까지 ‘자기의’와 ‘주님의 의’와의 싸움은 영원히 같이 동반되는 겁니다. 계속 죽~ 가는 거예요. 왜? 우리는 자율성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지옥갑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지옥갔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천국에 앉는다”고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8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8:11,12)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 앉는 다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분명히 천국에 갔어요. 엘리야 모세가 천국에 갔고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다윗은 무슨 짓 했어요? 이삭은 무슨 짓 했어요? 엉뚱하게 축복을 했잖아요. 야곱은 무슨짓을 했습니까?




그들은 자율성이 없었습니까? 그들은 실수 안했습니까? 야곱은 이랬어요. 자기 아들이 양식사러 애굽에 가자고 할때 자기는 안간대요. 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축복해준 땅인데 내가 왜 가냐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자율성’이죠. 자기해석이죠. “나는 못들어간다. 나를 때려죽여라. 나는 떠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셔서 “야곱아! 떠나라. 내가 떠나라고 하는데 네가 왜 말이 많으냐. 떠나라”




왜 떠나야 합니까? 그때는 야곱이 몰랐는데 시편 105편에 보니까 떠나야 되는 이유가 이유가 있어요. 약속의 땅을 떠나서 애굽에 갔다가 다시 약속의 땅에 오는 코스의 여정을 야곱은 처음에는 몰랐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이땅을 나라도 지켜야지. 철딱서니 없는 저 자식들이 뭘 알겠나. 양식없다고 양식 사러 우르르 가자고 하는데 그건 안된다.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야.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야곱이 시편 105편에 보니까,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어떤 경로를 겪느냐 하면. 이것이 참 중요해요. 시편 105편을 봅시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분도 있지만 한번 봅시다.




(시편 105:23,24)


23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24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25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이 대목이 무지 무지 중요한 대목인데 왜 그러냐 하면, 야곱이 애굽땅으로 가야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힘으로 언약을 지키겠다는 그런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만, 야곱이 함 땅에 감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로는 축복의 ‘샘’과 저주의 ‘함’의 그 맹세가 유효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두 번째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분명히 죽음속에 들어 왔는데 과연 이 허약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죽음보다 더 강하냐 말이죠.




과연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우리가 그렇게 겁을 내는 죽음보다 더 강할까요? ‘강할까요’그것을 실제로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정말 죽음의 땅, 함땅에 기어 들어가서 거기서 대군을 이끌고 나오잖아요. 이러한 강함이 있어야 또다른 함땅 - 가나안땅이죠. 애굽도 함땅이고 가나안땅도 함땅이예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그리 되어 있어요. - 그러니까 양쪽의 함땅인데 그 양쪽 함땅을 누가 다 정복합니까? 셈이, 셈! 셈! 셈! 셈! 셈이 다 정복해 버려요. 셈이! 그렇게 할수 있는 것은 뭐냐? 바로 ‘거룩’의 힘이고 ‘의’의 힘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조폭이 와서 때려 죽여도 ‘로또’ 한번 맞아 보자는 거죠. 그것이 우리의 자율성입니다. 그것을 은유적으로 빙빙 돌아서 멀찍이 돌아서 이야기를 하죠. 예수 믿어서 돈벌었다든지. 기도했더니 부자가 되었다든지. 인간의 ‘자율성’ ‘자유의지’는, 항상 예수님의 탄식과 병행해서 나타나는데 그걸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오지요? 성령의 객관적 사역이 뭐였지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껏 발휘하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제대로 된 ‘의’ 제대로 된 ‘심판’ 제대로 된 하나님의 ‘죄’를 가지고 우리를 책망하시죠. “너를 이기는 것은 너가 아니라, 네 앞에 있는 교회나 재산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가 바보 같은 너를 천국으로 보낸다”라는 것을 또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내어 쫒아라”는 것은 갈라디아서에도 인용되어 있지요. 그래서 구약해석에 있어서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구약을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하고 물으신다면, 신학자들의 상투적인 말은 이겁니다. “신약에 빗대어서 구약을 봐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면 신약에 빗대어서 구약을 봐야 한다는데 신약의 무엇을 기준해서 봐야 합니까?”라고 한다면, 좀 유학도 가고 해서 복음이라도 들은 풍얼이 있는 교수들은 말하기를 “십자가로 가지고 구약을 보시면 됩니다”라고 합니다.




이정도까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십자가를 가지고 구약을 본다면 그러면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그것은 본인이 공부해서 알아가세요.” 이렇게 하고 맙니다. 그래서 본인이 공부해서 생긴 현상이 뭐냐 하면, 부흥사들이 성막을 강의하면서 여기 저기 십자가를 막 갖다 붙여 가지고 성막이 조각목이 되고 말았어요. ‘조각목’ 아시죠? ‘크로스빌리지’에 나오잖아요. 조각목. 성막이 다 쪼개져 버렸어요. 이것은 뭐든지 십자가고 뭐. 심지어 솔로몬이 갖고 있던 금덩어리 숫자가 얼마인가? 666달란트(왕상 10:14)인데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재수없는 숫자(계 13:18)하고 연관되어서 성전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지를 않나.




교수들이 잘 모르고 무조건 십자가와 연관지으면 되는지 알고 마구잡이로 연관시키는 겁니다. 분명히 차는 조립을 다 해놓았는데, 차를 조립하라고 하니까 바퀴 옆에다 엔진달고, 여기달것 여기달고 해서 완전히 고물차를 만들어 놓은 식이죠. 그 차가 갈 리가 있습니까? 그 차가 천당에 갈 리가 없지요. 




그걸 그래서는 안되고, 십자가로 봐야 되는데 그 중심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뭐냐? 새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은 새언약으로 봐야 됩니다”라고 감잡은 사람들이 나타나요. 사실은 약간의 힌트는 있었는데 그걸 구체화 시킨 사람은 별로 없어요. 언약을 가지고 보시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을 가지고 보시는데 또 문제가 되는게 뭐냐 하면 그 다음에는 없어요.




언약에는 인간의 자율성과 하나님의 자율성인 예수님의 은혜가 겹쳐서 되는데, 인간의 자율성을 모르는체 하고 하나님의 은혜, 은혜를 준다고 하니까 말하니까 이것은 결국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 밖에 안돼요. 예수님을 이용해서 구원받으려고 하니 약간 양심에 거리끼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처음에 있는 창세기 1장 28절의 그 구절을 가지고 언약을 출발합시다.” 그런식으로 뜯어 맞추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요. 그것은 제가 보기에는 많이 미흡한 거고요.




진짜 언약이란 인간의 모든 ‘자율성’ 인간의 모든 ‘죄성’을 겸해서 언약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내어쫒으라’고 하신, 더 쉽게 말씀 드리면, ‘내어 쫒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분명히 내어 쫒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의 내어쫒음은 결국 ‘의’다? ‘의’ 아니다? ‘의’가 아니고 인간의 ‘자율성’이죠. 인간이 율법대로 시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의’와 ‘거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 자율성에 대해서 어떤 미련을 가지죠. 그런것이 굉장히 많이 작용합니다. 인간의 자율성문제가 왜 해석에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범자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자다. 모범이 뭐냐, 그분이 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그분이 가신 그대로 가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철없음이고 사라의 철없음이예요. 인간의 ‘자율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겠다는 거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면 자기도 아들을 바칠겁니까? 오기로 바치는 사람도 있지요. 자기 아들만 하나 죽이는 거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성경해석을 할 때, 목사님들이 성경을 가르칠때에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하니까 “우리가 범사에 감사합시다” 이렇게 가르쳐버리면, 그것은 결국 아브라함의 실수, 인간의 ‘자율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섞어서 그래서 ‘의’와 ‘거룩’과 ‘영광’을 성취한다는 그 옛날언약 그 방식밖에 더 됩니까? 새언약방식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면 뭐가 없어져 버려요? 은혜가 없어져요. 은혜가 날라가 버려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뭐냐? 이 사람들이 말하기를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말씀을 “항상 감사하라”가 있으면 ‘항상 감사할 수 있도록 뒤에서 후원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자신이 감사하는 것은 무조건 괜찮은 감사가 되는 것이 때문에, 내가 감사하는데 누가 시비걸면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고,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감사하면 문제가 돼요.  




그러니까 목사가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데 초신자가 감사하면 그것은 수준 낮은 것이고 그것은 감사도 아니고 그것은 뭐 엉터리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가 뭡니까? 다 그 ‘자기의’의 부각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잖아요. ‘내가 더 의로우냐? 네가 더 의로우냐?’ 그것 때문에 다 삐지고 서로 싸우고 그래요. 그리스도만 바라본다고 했는데 그리스도만 바라보는게 아니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의를 빼가지고 그걸 모방해서 지킨다고 해보니까,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는 많이, 너에게는 적게 왔기 때문에 그 의를 가지고 남하고 비교하기 때문에 문제 생기는 거예요.




‘그리스도의’는 힐끈 보고 말았죠. 힐끈. 




결론적으로 ‘내어쫒으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중에 보면 이삭이 태어나죠 이삭. 이삭은 남겨두고 ‘내어쫒으라’는 말은 내어쫒는 아브라함도 이삭 아니면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아브라함은 자신이 이삭에게 복을 줬어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자율성’이에요.




나중에 보니까 자기가 이삭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누가? 이삭이 도리어 자기에게 복을 주는 새로운 복의 근원자로서 교체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아요 나중에. 나중이라고 해봐야 그것이 22장이지만. 나중에야 아는데 그러면 그동안 자기가 지금껏 해온 것은 뭡니까? ‘자율성’이죠 뭐! 그러면 그것이 ‘자율성’ 같으면 이것은 허무한 것이고 아브라함은 지옥가느냐? 천만의 말씀!




자기 후손인 이삭으로 말미암아 - 언약에 뭐가 있다? 자율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있죠 은혜! 그 ‘의’ 그 은혜 덕분에 자율성이 아니고 즉 아들덕분에 - 구원받는 거예요. 아들 덕분에!




그러면 이스마엘은 왜 쫒아냅니까? 하나거든요. 아브라함 자손은 하나잖아요. 이삭도 아브라함을 축복 주고 이스마엘도 축복 줄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 둘을 하나만 만듦으로 말미암아 어느 쪽이 아브라함 자신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는 원천자인가를 분명히 하자는 거죠. 그래서 ‘내어 쫒으라’는 거죠. 그래서 내어쫒기는 사람이 결국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너도 나가라”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누구냐? 이삭밖에 없다. 왜? 이삭은 없는데서 생긴 자고, 죽은데서 산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잡았는데 안 죽었잖아요. 수풀 뒤에 있는 수양 때문에. 결국 우리의 이기는 것은 ‘없는 데서 있는 것이 이기고 죽은데서 이긴 그분이 우리를 이긴다.’ 이것을 믿었더니 아브라함은 의인이 되었다고 로마서 4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4:17-25)


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맏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의인되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지금은 누구냐? 이삭 자리에 아브라함의 자손인, 바로 한분되시는 자손인데 지금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죽어도 사는 이삭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그런것이 동일하게 언약속에 주어진다는 말이죠. 예수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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