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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4 17:24:53 조회 : 4473         
200700515b 부산강의-조지 래드 [신약신학]-메시아적 사명(2) 녹취 이름 : 한윤범(IP:59.6.189.212)
 

200700515b 부산강의-조지 래드 [신약신학]-메시아적 사명(2)


(강의: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있어요. 우선 래드 이야기를 먼저 해드릴게요. 래드가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진노의 잔이라는 거예요. 이 사람은 이것을 끝까지 포기를 안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 근데 진노하는 이유에 대해선 안 나와요. 하여튼 모르지만 모르겠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마셨다는 거예요.




여기서 한번 봅시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누가 마셨다? 예수님이 마셨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셨는데 그 다음이 문제에요. 이 진노의 잔을 마심으로써 그 효력과 효과가 우리 인간에게 자기 제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이 사람이 이야기 안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진노의 잔을 마셨다. 그 다음에 진노의 잔을 마셨다 하고 이 사람이 이야기 안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진노의 잔을 마신 것이 근거가 있어야 되거든요. 구약적 근거가. 구약적인 근거에 진노의 잔을 마시는 게 없어요.




구약적 근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속죄가 있고 대속이 있고 희생이 있다고. 여기는 진노라는 게 없어요. 예, 이래 있지요. 여기는 진노라는 게 대체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 못 가져가 안달이 났어. 사랑 덜 갈까봐 싶어서. 그저 건드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여기 무슨 진노가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진노가 뭐예요? 쇠파이프 들고 한화 회장처럼요. 이씨, 내 아들 왜 때리느냐? 쇠파이프로 줘 패야 진노잖아요. 용서하시는 것은 진노가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듬어 주고 사랑에 주려고 안달 나 있는 게 이게 무슨 진노입니까? 제 말 취지를 이해하시겠어요?




더 나가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하나님이 화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최곤데. 최고가 왜 분노를 일으켜요. 좀스럽게. 사람이 어른답지 못하고 점잖지 못하게 왜 화를 내요. 아니 화를 내지 말고 화낼 일을 사전에 없애면 되지 왜 화를 내냐 말이죠.




가만 있어봐 이게 떨어졌네. 아하, 빠졌나, 떨어졌나. 빠졌나? 빠졌네. 나중에 하고.




지금 래드는 성경대로 예수님은 진노의 잔을 마셨다. 해놓고 그 다음에는 감당을 못해요. 그리고 진노의 잔 앞에 먼저 했느냐 하면, 여기에 수난을 받았다. 수난 받고 진노의 잔 마셨거든요.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뭔가 잘못한 게 있어서 선생님한테 수난, 선생님한테 매를 맞는다 합시다. 그러면 그 매 맞는다는 의미가 무슨 의미냐면, 결국 이 매 맞는다는 걸로 하나님의 진노가 풀렸다는 것을 대체한 것이 되겠지요. 매 때리고 또 진노할 필요는 없을 거 아닙니까? 때린 놈 더 때릴 필요는 없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수난을 줄 때는 뭔가 이 수난을 통해서 수난을 주시는 분의 만족감을 획득하고자 수난을 줬고, 예수님은 수난 받음으로써 수난 받는 걸로 충분히 아버지의 뜻을 흡족하게 했다면, 십자가에서 진노란 말을 할 필요 없다고. 진노. 분노라는 말 할 필요 없다고요. 그저 수고했다. 고생했다. 십자가 지고 이걸로 그만 끝내자. 그래 수고했다. 어이, 그래. 이렇게 해야지 진노 받을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우리가 십자가 생각할 때 왜 이런 생각들을 못하느냐 하면, 그저 받아 챙기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용서에 감사합니다. 여기에 급급하다 보니까 아까도 제가 이야기했지만 지금 관심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무엇을 했느냐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주님한테 뭘 받아 챙기느냐 그런데 관심이 있어 버리면 무슨 의식이 생기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께 받아 챙겨도 괜찮은 자격이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니까. 사람이라는 게. 부풀어 있고 하나님 뭐 하라는 거예요. 주면 고맙다고 이야기할 테니까. 




지금 방금 제가 거론한, 이상하게 되네. 제가 거론한 이런, 이거 뭐 자격증 있습니까?




제가 거론한 이야기를 지금 저만 거론하지, 루터도 무슨 신학입니까? 십자가 신학. 십자가 신학을 거론한 루터의 신학에도 이런 게 없어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틀, 이 틀을 포기 못해서 그래요. 하나님은 주시는데 우리는 받는다. 끝. 이거지, 이 틀 자체가 깨어져야 된다는 생각은 상상은 못하는 기라. 하나님 있고, 나 있고 둘 다 문제 있다 하는 이걸 깰 생각 안 하고 그냥 십자가 줘서 감사합니다. 그 전에 십자가는 줬으니까 이건 사라져도 무방하고 남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틀, 이것만 계속 남는 거예요.




이것은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 십자가만 드러내는 사도 바울하고 이건 생각이 다른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 있고 내가 있다면 나라는 주체가 계속 살아있으니까 나라는 주체가 의미를 가지고 가치 있게 살아있으니까 이거는 중간에 십자가 그냥 왔다 앉았다 가버리는 수밖에 안 됩니다. 마치 율법이 왔다가 가버리는 수와 똑같은 거예요.




여러분, 유월절 날 죽음의 사자가 왔잖아요. 와서 갔잖아요. 어쨌든 어, 피 발랐네. 가버렸잖아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턴 죽음의 사자 생각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왜? 와서 갔잖아요. 우편배달부 와서 갔다고 해서 우편배달부 그리워하고 사모하고 이런 인간 없잖아요. 그죠? 줬으면 받고 빨리 가라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와 십자가 같으면 고맙다 할 테니까 십자가 피고 빨리 꺼져라, 가라 이 말이에요. 나는 하나님 섬기게.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그게 깨져야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진노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분노, 진노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책엔 안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 책엔 안 나와 있는데 여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의견도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해요. 여기 참, 페이지 수 같은지 몰라도 요한이, 그냥 이야기할게요. 




요한이 우리가 이와 같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해서 여기서 이제 래드가 중요한 거,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요. 뭐냐 하면,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은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켰다고 나와요. 래드가. 그 글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고백은 없었지만 요한의 세례를 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켰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말이 모든 전체, 사도 바울과 야고보와 요한부터 모든 신약성경 전체를 완전히 다 묘사하는 거예요. 일치시키는 거예요.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한번 찾아봅시다. 참, 이게 이 사람이 이 글 쓰면서도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래드가 중요한지 몰라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같이 한번 봅시다. 제가 읽을 게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되어 있죠.




이게 지금 누가 짊어지게 합니까? 성령이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죽은 것을 짊어진다 이 말 아닙니까. 그전에는 성령께서 누굴 찾아왔습니까? 요단강에서 성령이 누구한테 찾아왔습니까? 예수님 찾아 왔지요. 예수님은 누굴 짊어져요? 세례 요한한테 세례 받는 그 사람의 죄를 짊어져서 자신은 죽고 자신 안의 생명이 그 사람한테 나타나게 함이죠.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11절에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누가 이렇게 한다고요? 성령이.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 가운데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죽을 육체 가운데.




그럼 우린 계속해서 무슨 육체가 되어 있어야 돼요? 죽을 육체가 되어 있는 조건 하에서 우리는 여기서 산 생명이 나오지요.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뭔 뜻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생명을 드러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 한 것이지, 우리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준 건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생명이 이렇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아까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봅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질그릇이 문제가 아니에요. 질그릇이든 다이아몬드가 문제가 아니고 질그릇이 자체가 가치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뭐가 담겨 있어요? 보배가 담겨 잇지요. 그러면 우리는 질그릇일 뿐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보배입니다를 알리기 위해서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합니까?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하는지 보세요.




능력이 심히 임하는데, 8절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을 당해야 됩니까? 우리 본 때 내기 위해서?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있는 보배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지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뭐가 쳐들어옵니까?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거꾸로 트림을 당하고 계속 이런 것을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 성령이 줌으로 말미암아 진짜 니 안에 달랑달랑 보배가 들어있는가 확인 차 차원에서 하는 겁니다.




이거는 우리 구원 차원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능력이 다른 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우리가 당하는 거꾸로 트림보다 환란보다 더 완벽하게 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써 우리는 평생에 끌려 다녀야 돼요.




이 래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십자가 믿고 구원받자 지금 이런 차원이 아니라니까. 그건 600원짜리 차원이고. 여기는 지금 900원짜리 바나나우유 900원 이라 하니까. 그들이 300원을 몰라요. 왜? 자기 입장만 생각하니까. 천당 가는데 뭐 하면 되노? 예수 믿으면 되겠다. 이거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4장은 그 입장 없습니다. 아니 자기 입장만 생각하면 이미 살아났는데 뭐 하는데 예수 믿습니까? 하나님 잘 섬기면 되지. 내가 왜 죽은 육체냐? 살아있다는데.




생각의 층이 뭐가 깨지느냐? [하나님-나] 이게 깨져야 돼요. [하나님-나]는 깨어지고 이거 깨뜨리면서 누가 등장해요? 십자가 능력이 깨뜨리면서 담길 때 그 사람이 유일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요한복음에 이거는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어요. 사람들이 뭔가 상상한다는 것은 항상 누굴 주인공으로 삼습니까?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상상을 하잖아요.




여러분, 꿈에 주인공이 누구든가요? 꿈에서 주인공이 자기가 빠진 꿈 봤습니까? 없어요. 희한해요. 이게 인간의 욕망입니다. 자기가 빠진 주인공은 없습니다. 꿈에서. 꼭 자기가 거기에 그림의 한 모퉁이에 있어요. 두두둑 총 쏘고 해도 지는 거기 있어요. 관람자로 있던지 간에 있어요. 자기는 살고 도망가고 있어요.




이 인간의 꿈이 이게 밤에 꾸는지 압니까? 낮에는 꿈 아닌 줄 알아요? 낮에 하는 모든 상상은 우리의 모든 망상은 다 꿈입니다. 사람이 어떤 소망을 가지는 게 다 꿈이에요. 그런데 그 꿈은 무엇을 이기지 못하는가? 우겨쌈을 당하면 이기지 못하고 답답함을 당하면 화딱지 나는 게 우리의 상상이고 그 모든 허상은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그런 상상이죠.     




그게 보배는 없고 질그릇만 있는. 질그릇을 진흙에서 다이아몬드로 진흙에서 빛나는 금 그릇으로 바꾸려는 이 야망, 이 야심이 우리의 낮 열여덟 시간을 지배합니다. 지금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이 일하는 이유가 뭡니까? 현재 나 같은 그릇을 금덩어리 그릇으로 바꾸기 위해서 뛰잖아요.




그런 그릇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관심사도  아니었습니다. 니가 부자가 되니, 가난뱅이가 되니 관계없이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니 안에 뭐 담겼다? 주님의 생명 담겼다. 그 생명은 죽음보다 이기는 생명이다. 그래서 한번 두고 볼래? 이래 이래 나오는 거예요. 이래 하나님이 나오시는 거예요.




그것이 여기 고린도후서에만 나오는 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 예수님 사업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데 왜 포함된 잠재된 그걸 끄집어낼 수 없느냐 이 말이죠. 사람들이 십자가, 십자가 이야기하면서 왜 그걸 못 끄집어내고 마태복음 5장에서도 왜 못 끄집어내느냐 이 말이에요 그걸.




그 틀이 무슨 틀입니까? 그 못 끄집어내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과 나. 이거 잘되기 위해서 이 관계 돈독하기 위해서 이걸 해서 성경 본문이 이용되기 때문에 끄집어내질 못하는 거예요. 그 안에 십자가 복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능력이 아니라 이거 이거 [하나님-나] 이거 잘되기 위해서.




분명히 래드는 정말 좋은 말 했습니다. 자기가 배운 건지 모르겠지만. 세례 요한의 받는 인간들 속에 죄인들 속에 주님께서 자기를 일치시켰다. 조건이 하나 있지요. 자기에 대한 죄에 대한 고백은 없었지만. 번역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여기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의 죄의 고백은 없었지만] 이거 문제가 있어요. 죄의 고백.




래드가 글 하나 쓸 때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냥 썼기 때문에 문젠데. 죄의 고백이 없는 거예요, 죄가 없는 거예요? 죄가 없이 죄와 일치시켰잖아요. 그 메커니즘 제시해 보세요. 신학적 메커니즘. 어느 인간이 지금 신학자 중에 누가 그걸 밝혀냈어요? 죄가 없는 분이 죄 있는 것과 일치시킬 때 그 과정, 논리적 과정을 제시해 보라. 아무도 답변한 사람 없어요. 제가 공부해 보기에는 제가 책 보기에는. 바르트, 불트만이든, 폴 틸리히든 어느 책을 봐도. 어느 책을 봐도 죄 없는, 이 사람은 지금 (      ) 없기 때문에 고백 했잖아요. 죄의 고백은 안했다. 뭐 고백할 게 있어야 고백하지. 




죄가 없는 분이 죄와 일치될 때 왜 그것이 해명이 안 되느냐? 왜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됐습니까? 물어보면 답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두꺼운 책을 썼어요. 왜? 질문할 사람 없으니까. 이한수, 신성종은 말할 것도 없고. 완전히 빼는 거 보세요. 세상에 그런 반칙이 어느 있어요. 아까 중요한 대목을 빼놓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질문 들어오면 답변 못하기 때문에 빼놓았는가, 그 다른 외에는 없어요. 왜냐? 그게 시시한 것 같으면 그냥 사족 붙은 그게 아니고, 중요한 대목이라. 무엇이 아니고 뭐다. 




아까 다시 해볼까요. 뭐라 했던가요? [제자들이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은 생명의 참여가 상징이 아니라 죄의 이후에 얻었던 축복의 참여함이다.] 이래 되어 잇지요. 그럼 뭘 빼야 된다? 래드의 주장에 의하면 래드는 뭐라 합니까? 생명의 참여는 결단코 아니올시다를 이해해야 십자가 이해하는 것이라고 래드는 주장하고 싶지요. 그럼 래드가 당신이 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당신의 그 십자가의 사상은 어디서 나왔느냐를 따져야 되죠.




그건 안 따지고 그거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나중에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지금 중요한 건 뭐냐? 죄가 없는 분이  죄와 일치가 될 수 있는가? 그 해답은 어디 있는가 하면, 죄의 개념이 뭐냐로 따졌어요.




기존의 인간의 죄의 개념은 시간 속에서 과거를 의식한 현재, 현재를 기준점으로 한 미래입니다. 그래서 훗설이나 훗설이라고 현상학자 있거든요. 훗설이나 베르그송의 시간론에 보면 나와요. 과거든 미래든 누구 작품이냐 하면, 현재 나의 작품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모순이 벌어져요. 현재는 누구 작품이냐? 과거가 나를 만들어요. 이 말 자체가 모순이 되죠.




과거라 하는 것은 뭐냐? 현재가 만들어낸 과거에요. 옛날 과거 우리가 다 기억합니까? 모르지요. 그런데 옛날 과거 중에서 기억할 만한 건 기억하죠. 그런데 기억한다고 해서 그 과거가 그 과거입니까? 아니지요. 내가 여기서 소설 쓴 과거지요. 현재 내가 과거의 아름다운 것을 뽑아서 현재 내가 편집을 한 거예요. 그러면 편집자가 누굽니까? 과거의 내가 아니고 지금의 나라.




하, 그때 군대생활 정말 건빵 먹으면서 행복했다. 한번 해보지, 지금 행복한지. 건빵 주면 갖다버릴 거예요. 비 줄줄 오는데 라면 끊여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한번 해보지. 그때 그 장면을 못 만들어냅니다. 왜? 이미 나는 과거의 나는 없어져버리고 현재의 나만 있으니까. 과거의 아무리 고통과 기쁨을 설명해도 그때뿐이에요. 지난 주일날 참 은혜로웠다. 해보지. 그 소리 또 보지  은혜로운가? 잠 오지.




지금 목사들이 괴로운 게 뭡니까? 한번 은혜 받은 것으로 계속 오래 못 간다는 게 괴로움 아닙니까. 한번 은혜 받으면 계속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리고 한번 설교 잘했다고 그걸 계속 우려먹지 못한다는 게 딜레마 아닙니까. 교인들이 뭐 카냐면, 또또또 이러거든요. 에이~고 지난번 보다 못하네, 설교. 이런다고. 우레란 말이고. 인간이 기계고. 아이고, 한 달 전보다 영~ 못하네. 영발이 떨어져버렸어. 그게 목사의 스트레스 쌓이게 하잖아요.  




인간의 죄라는 것은 현재 내가 느끼는 죄입니다. 시간 속에 갇혀 있는 죄의 개념이에요. 근데 예수님이 볼 때 죄라는 것은 이거는 시간이 있기 전에 창세전에 확정된 죄 개념입니다. 확정된 죄의 개념은 뭐냐 하면, 언약적으로 죄 개념이에요. 그래서 언약에 위반되는 게 이게 죄에요. 그래 언약 모르면 죄 개념 모르게 돼있어요. 그러나 신학자들 언약 인정 안 하니까. 언약을 여러 구약의 한 모퉁이 주제로 보기 때문에 일체 인정 안 해요.




언약에 위배된 죄기 때문에 여기는 언약을 위배하면 뭐까지 감당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진노도 감당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수난 받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진노 받아야 될 이유는 이미 창세전에 둘 사이에 확정된 계약대로 된 겁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한테 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로써 우리 의를 이룬다 했지요. 그 의는 우리 행동, 인간의 행동 찾아야 하는 게 아니고, 언약 완성을 이야기한 겁니다. 언약 완성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언약 완성에 아까 이야기한 희생, 대속, 속죄 이 모든 것이 다 포함될 때 완성이 돼요.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의 희생, 진노가 있어야 희생 있으니까, 진노 받을 희생까지 다 포함될 때 이게 의가 되고 이루는 겁니다. 결국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 할 일 하러 왔어요. 자기 할 일 하러 왔고, 그 예수님에 붙잡힌 양도 성도는 뭐냐? 




양이라는 거 이 땅에 없습니다. 성도도 없어요. 주님이 하는 족족 주님이 새로 만들어내요. 그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기존의 인간은 하나님과 나, 이 사이에서 이걸 누구한테 적용시키느냐? 나한테 적용시켜요. 하나님 앞에서 나, 나 앞에 하나님.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새로운 피조물 될 때 인간인데, 그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아까 고린도후서 4장 봤죠. 뭡니까? 우리는 날마다 죽을 육체로 넘기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 생명이 담길 때 그걸 유일한 인간으로 봐요. 그래 인간인 사람만 천국가고, 인간 아닌 사람은 지옥 가셔야 됩니다.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 택정 받지 못해서 지옥 가는 겁니다. 지옥 갔다고 나쁜 놈들이 아니에요. 채택이 안 됐어, 채택이. 호명 못 받아서 간 거예요.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요 이게.




호명 못 받아서 간 걸 가지고 채택이 안 돼서 간 걸 가지고 윤리적으로 죄라고 따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따지면 우리도 따져야 돼요. 간음한 여인 그냥 용서한 거예요. 그럼 간음 진 놈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소경된 자 다 천당 가는 게 아니에요. 아버지 뜻을 위해서 소경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릇이 문제가 아니에요. 간음한 그릇이냐 소경의 그릇이냐 문제가 아니고, 보배가 보배답게 되는 것이 아버지 뜻이고 예수님 뜻이에요. 그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성령 받은 사람은 이거는 따로 전도할 것도 없어. 살아 다니면서 자기 주제 파악하는 게 그게 전도입니다. 그리고 전도를 누가 시키느냐? 놀랍게도 주님이 시킵니다.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게 주님이 시켜서 해요. 우리교회 왔다가 안 나온 사람이 오십 명 넘습니다. 지금 백 명이 넘어요. 왔다갔다하는 것 주님이 알아서 해요. 내가 붙잡는다고 붙잡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지난주에 설교했잖아요. 태양 뜨는데 우리 의논한 적 없다고. 태양이 뜨는데 우리한테 의논한 적 없잖아요. 마찬가지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게 내가 나한테 지시할 이유가 나한텐 없어요. 왜? 난 태양과 같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일이 된다, 안 된다 성공자다 실패자다, 인생 말종이다. 지가 얼마나 이게 오만합니까? 지금 그릇이 문제될 게 없어요. 그릇이 똥 단지든 관계없어요. 하여튼 그 안에 보배가 들어있으면 그 그릇이 금 그릇이라도 그건 죽음에 넘겨야 될 그릇이야. 죽을 육체에 해당된 그릇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이 내용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수난에 대해서 희생에 대해서 공관복음 마태, 마가 그 뭐고? 주기도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산상설교 이야기할 때 이게 담겨있어야 돼요. 예수님 한 마디 담겨 있어야 돼요. 왜? 래드의 이야기처럼 모든 예수님의 사명은 어디에 모인다? 십자가로 모이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무슨 성이라고 했습니까? 말씀은 방향성이 있죠.




모이려고 하는데 도망가는 기라. 자꾸 말씀은. 야, 이 말씀 은혜롭다하는데 도망가는 게 어디로 도망가느냐 하면 십자가로 도망가는 기라. 야, 기적이다 하니까 내 기적은 나의 기적 밖에 없다고 도망가는 거예요. 어디로? 십자가로 도망치는 거예요. 아이고, 잡았다하고 잡을 수가 없어요. 무화과나무가 시들었다. 왜 시들까? 그건 나중에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돼요.




그런 해석이 여기 나오는데 뭐냐 하면, 포도나무에서 나온 잔을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마시지 않는다 하는.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포도주를 내가 다시 올 때까지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 대목인데, 그게 무슨 뜻인지 래드는 그게 뭔 뜻인지 몰라요.




죄가 무엇이냐를 언약은 죄가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이건 지옥과 통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드러내고, 이건 천국과 통합니다. 이 언약을 누가 해야 됩니까? 누가 해야 죄가 죄대로 나오고 의가 의대로 나옵니까? 누가 해야 됩니까? 예수님이 해야 돼요. 왜 예수님이 합니까? 원래 사전에 두 분 협의해서. 창세전에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이야기 다 끝났어요.




예수님은 죄를 보여줘야 돼. 죄를 보여줄 때 뭐로 보여줍니까? 진노로 보여줘요. 진노로 보여주고 이 진노는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었지요. 그럼 언약을 이루었으니까 보통 이루면 사람들 뭘 숙제 다 했다하면 그걸로 끝나지만, 언약을 이루면 이건 영원히 계속 갑니다. 지속돼요. 예수님이 이걸 이루었다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천국은 영원토록 해야 되고 지옥은 영원토록 계속돼야 됩니다.




그래서 한번 들어간 두 번 다시 못 빠져나와요. 그건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그래요. 그 사람이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지옥 갈 인간이 어디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해서 지옥은 영원히 계속돼야 되고, 천국은 영원히 계속 돼야 돼요.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틀로서는 이게 설명이 안 돼요. 이런 신학 가지고는 설명이 안 된다고. 지옥이 해야 돼요.




박영선 목사는 말하기를 이 사람도 이야기해요. 래드 이 사람도 이야기하는데 여기 그 다음 장에 15장에 지옥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악인에 대해선 이야기 안 했다. 이래 나옵니다. 이거는 박영선 목사 설교집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기로 선택된 건 이야기했지만 지옥 가기로 작정됐다는 말은 안 했다는 거예요. 강조를 안 했다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 중심입니까? 자기중심이에요. 뭐 사람 한번 꼬셔 보려고.




간음하다 잡힌 여자가 언제 남을 꼬시려고 했습니까? 구원받은 자가 남을 언제 꼬시려요 했어요? 삭개오가 전도 몇 명했어요? 그냥, 그냥 나는 왜 이렇게 구원받은 양 그 기쁨을 표출, 활화산처럼 표출했죠. 미친년처럼 바깥으로 표출하면 그런 폭발 그런 지진의 폭발 같이, 같이 맞는 사람 만나면 그것이 교회되는 겁니다.    




우리 사이트에 그런 질문 있지요. 왜 어떤 분이 전도하니까 어떤 사람이 시비걸기를 왜 자꾸 그렇게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 교회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당신 이야기는 구원파 같이 비슷하게 교회에 대해선 관심 없고, 교회 말고 인간이 왜 예수님에게 관심 두느냐? 교회 좀 신경 쓰라고 그런 핀잔을 받았다는 거예요. 전도를 하니까.




그래서 제가 이런 답변을 했지요. 교회 만드는데 빨간 벽돌이 필요해서 빨간 벽돌 고르는데 빨간 벽돌이 아닌 휴지 조각, 시멘트 덩어리 이런 것들이 데모를 하는 기라. 붉은 교회에게 신경 좀 쓰라고. 주인이 뭐 캅니까? 지금 신경 쓰니까 벽돌 신경 쓰잖아 지금. 그들은 완성된 교회를 바라보지만 주님께선 지금 교회 하나하나 벽돌 되기 위해서 피가 묻은 벽돌만 골라내는 작업 자체가 지금 그리스도 몸을 교회를 생각하니까 하는 거예요. 생각 안 하면 진작에 다 끌어 모으지.




주님의 그리스도 몸을 생각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그리스도 위주로 가야 되는 거예요. 내 위주가 아니고, 내 구원 위주가 아니라.




이걸 모르니까 이걸 모르지만 이 사람이 들은 건 공부한 게 많아서 군데군데 좋은 이야기를 해요. 여기 263페이지 보면, [너희가 구하는 것은 너희가 알지 못해도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이래 되어 있지요.




여기서 해석을 해 봅시다. 서로 누가 높습니까? 누가 높으냐고 길에서 다툼이 일어났을 때 어린아리 하나 데려와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 간다고 말씀하시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은 뭐냐? 세상 권세자들은 누구 더 높으냐고 까불락대지만 너희들은 그렇게 살지 마라. 너희는 앞으로 내가 마시는 잔을 오히려 마셔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여기 한번 봅시다. 두 가지 종류인데. 이 잔에 대해서 해석이. 제자들이 고난의 잔을, 이 사람 해석입니다. 제자들이 고난 받아야 된다. 라고 해석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난 받아야 된다. 그리고 여기 뭐냐 하면, 여기 틀림없이 이 잔은 고난과 죽음의 잔이다. 이 사람은 고난과 죽음의 잔이기 때문에 제자들도 고난과 죽음에 동참해야 된다. 하는 식으로 해석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지 말고 이 잔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보면 어떠냐? 이 잔을. 그러니까 방향성이 있으니까 제자들이 아이고, 우리는 높은 체 하지 말고 우린 고생깨나 해야겠구나. 라고 하는 이해보다도 제자들이란 너희들이란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받고 안 받고가 문제가 아니고, 내 잔을 계속 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길을 갔다는 것을 증거해야 될 사람으로 너희는 내 곁을 떠날 수 없다는 쪽으로 해석을 하자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두개 해석의 차이점이 뭘까요? 이쪽은 뭐냐 하면, 이씨, 고난 안 받으면 지옥 가겠구나. 라는 자기 구원에 계속 챙기겠지만 이렇게 되면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쓸 필요조차 없구나. 우리는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할 뿐이지, 그 이유로 뽑혔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가 그거하고 상관없구나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길에서 누가 높으냐, 누가 낮으냐 그런 문제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너, 그러면 지옥 간다가 아니라 그것이 너희를 뽑아낸 원래 목적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쪽으로 해석해야 옳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두 가지 해석 가운데서.




누가 높으냐, 누구 낮으냐 하는 것들은 세상 권세자 하는 짓이고 너희는 그런 일 때문에 부름 받은 건 아니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름 받아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의 잔을 참 마셔야 되고 잘해야 된다 말이죠. 이걸 마셔야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이 잔을 마셨구나. 라는 쪽으로 보자 말이죠.




그렇게 해야 고린도전서 11장과 부합돼요. 거기 뭐가 나옵니까? 네가 죽을 때까지 잔을 마심으로써 누굴 기념한다? 그 죽으신 바를 생각나게 기념하게 한다. 그게 맞잖아요. 사도 바울의 생각과 일치됐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공관복음의 해석도 항상 사도 바울의 해석에 그걸 해답으로 여기고 거꾸로 소급해서 적용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공관복음은 인간의 역사적 관점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 활용어 그대로 사용한다 이 말이죠.




아까도 어느 정도 이야기했지만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의 상이 큼이라" 할 때 이걸 사도 바울적으로 보지 않고 상이 크다고 하면 어떻게 돼 버려요? 야, 억수로 큰 걸 받는구나. 상을 큰 걸 받는 게 아니고, 그 상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인식에서 볼 때는 확장된 개념이지만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상 받을 필요 없이 우리가 아예 죽을 인간이죠.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는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감춰져. 이미 이래 돼버리면 뭘 이 땅에서 챙기고 받을 필요 없잖아요.




백배나 받고, 마찬가지에요. 이 땅에서 백배 받는다. 백배 받을 필요 없잖아요. 죽은 놈한테 백배 주면 무슨 소용 있어요. 이미 죽은 놈인데. 죽은 놈이 백배 받은들 무슨 좋아하겠습니까?




그 다음에 [십자가의 의미] 봅시다. 십자가의 의미는 십자가에 의미에 있어서 여기에 십자가의 의미 찾았지요. 거기서 래드가 하는 말이,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니라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죄 사함이라는 표현을 했다. 다시 마태는 마가같이 하나님에서 새것으로 마실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라 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종말론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너희가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할 것이라] 이래 되었거든요.




이것을 설명하면서 지금 래드는 뭘 이렇게 이야기해요.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할 때 십자가의 의미가 죄 사함을 하기 위해서 흘리는 내 피라고 이렇게 해석했어요. 그래 되면 뭐가 빠지냐 하면, 죄 사하기 위해서 왜 피를 흘리느냐는 의미가 빠져버리지요. 낚싯대로 건지면 안 돼요? 왜 피이어야 하느냐가 여기에는 그 감춘 비밀이 드러나지 않지요. 왜 피냐 말이죠.




래드는 이걸 왜 피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뒤에 뭐 하냐 하면, 구약의 출애굽기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언약의 피를 뿌릴 때 언약의 피를 뿌리는 그걸 한다고요. 근데 언약의 피를 뿌릴 때 래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약학자의 신학을 말 들어서 그때 양푼에 담아서 피를 뿌리는 것은 죄 사함의 피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뭐냐? 언약의 피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약혼자가 반지를 교환할 때 반지를 교환하잖아요. 그 반지교환의 반지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약혼했다는 언약을 보여주는 반지지 죄 사함을 보여주는 건 아니란 말이죠. 구원하기로 약속하면 됐지, 죄 사함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제 말 뜻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되십니까? 야, 나는 이제부터 너의 신부다. 고마워요. 이러면 되지, 싸대기 다섯 번 맞아라. 이건 이상한 게 첨부할 필요 없는 것이 가미 됐잖아요.




언약으로 구원하면 그냥 언약으로 구원해서 죄 사함으로 빠져야 되고, 죄 사함 같으면 약속대로 너가 죄 사함을. 이러면 말로 하면 될 일이지, 빛이 있으라 한 분이 빛이 있지, 빛만 있으라 할 때 빛이 있지, 빛이 있으라 할 때 피 뿌리고 아니란 말이죠.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있는 거지요. 니는 앞으로 용서했다. 이러면 되지, 피를 왜 흘려야 되느냐 말이죠.




지금 피가 왜 들어가느냐가 중요하느냐 하면, 나는 너를 용서한다. 이 물에 근거해서 용서한다 할 때 물과 용서는 관계있습니까, 없습니까? 관계없지요. 왜냐하면 나는 분명히 이야기했다. 왜요? 물 보니까 분명히 이야기한다.




지금 이 사람들 래드가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피는 중요하지 않고, 죄 사함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게 물이 됐든 피가 됐든 별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다만 피로 했으니까 피뿐이지. 내가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이게 세 번 꽝꽝꽝 한들 에이, 죽자 피를 흘린들 중요한 것은 꽝꽝꽝이 아니고 피가 아니고, 죄 용서하노라. 이 선언이 더 중요하고 그 선언은 언약으로 되어 있고 그 언약할 때 그 언약이 확실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양푼하고 피 뿌렸으니까 신학자도 피를 이용한 것뿐이다. 이래 보는 거예요, 래드가, 그리고 다른 신학자들이.




심지어 오늘날 교회들이 그래서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더라. 이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 구원 받는다. 하면 우리 자신을 구원받은 우리를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데,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이상하게 우리가 배운 데로 같지 않고 부정적으로 인간을 보더라. 왜 그렇게 보느냐? 구원받았잖아. 용서받았잖아. 기쁘다 말이죠. 감사헌금하고 그러면 되지. 왜 우리를 용서받은 놈을 왜 부정적으로 왜 보느냐 이래 나와요.




그 의식이 바로 어디서 나오느냐, 바로 하나님과 인간 틀 사고방식이죠. 하나님과 인간 틀에서 하나님이 용서했다. 뭐? 언약으로. 언약이 뭐냐? 오늘날 십자가. 아이고, 감사해라. 그러면 이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릴 용서했다 이렇게 되지, 중간에 있는 언약, 십자가는 별로 안 중요한다 이 말이죠. 없애버려도 된다 이 말이죠. 남는 것은 긍정적인 나만 남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은혜가 뭐냐? 십자가다. 그걸로 됐지 않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왜 피냐 말이죠.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 모든 기적과 그 모든 말씀이 왜 십자가 피로 모아지는지를 중간, 중간에 갈수록 주님께서 당한다는 느낌이 들지요. 누가 당합니까? 인간들이 당하죠. 그 인간들하고 인간들은 누굽니까? 아담의 족속이죠. 그러면 우리는 누굽니까? 우린 아담의 족속이잖아요.




결국은 뭐냐?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누가 떠밀어요? 누가 핍박해요? 내가 핍박하죠. 그래서 로마서 5장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구원하죠. 그런데 그 말씀을 제가 아무리 해도 목사님, 네가 교회 나가는데 내가 왜 하나님 원수입니까? 하나님을 몰랐다 이거는 이해되는데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은 너무 좀 심하지 않습니까? 이래 된다고.




사도 바울이 뭐 캅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 하거든요. 지가 무슨 죄인 중에 괴수입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죠. 바리새인이 뭐 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버린 사람이에요? 얼마나 열심 냈으면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정도로. 철저하게 예수 이단을 잡아 죽여서 누구한테 충성하기 위해서? 자기 잘되기 위해서? 아닙니다. 여호와께 뭐하기 위해서? 충성되기 위해서 자기는 그 허가서 받고 예수 믿는 사람 핍박했던 사람이에요.




그때 그 심정 마이크 대고 그 심정을 마이크 따와 보세요. 얼마나 신앙이 열심인지. 오직 하나님께 충성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게 뭐라고요? 하나님 모른 정도가 아니고 그게 하나님께 원수가 돼요.




결국은 뭐냐 하면, 왜 피를 흘리는가? 하나님이 누구의 적이다? 하나님의 원수였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원수 됐어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알잖아요. 그 하나님이 하나님 원수라니까요. 하나님 믿는 게 하나님 원수 짓하는 거예요. 라는 차원에서 주여,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그 예수는 예수님 중심이지 두 번 다시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사도 바울처럼 주 예수를 높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주 예수를 높임으로 주의 이름을 높임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이 되는.




사람이, 아까 했잖아요. 사람은 하나님 좋아하는데 예수 믿으라 하면 예수나 부처나 전부다 성자 아니가 말이죠. 그리고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나 부처나 소크라테스 다 성자다 이 말은 뭔 뜻인가? 하나님 나도 같은 동류로 끼워줘. 이 말이에요 그게. 날 무시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가 돼버리면 누가 누구를 무시해야 돼요? 내가 나를 매일같이 무시해야 돼요. 그래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살 것이요. 세상에 예수 믿는 게 왜 그렇게 복잡해요. 자기를 미워해야 되고. 자기를 싫어해야 되고. 자기를 부인해야 되고. 자기 부인하다는 건 뭐도 부인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거.




제가 주일날 했지요. 나라는 것은 최종적인 창고라 했어요. 창고. 창고에 온갖 것, 평생 살아온 것 다 집어넣어놨어요. 나를 부인하다는 건 뭡니까? 창고에 불 내버리는 거예요. 라이터 불내서 창고 태워버리는 거. 그리고 나는 계속 죽을 육체로 넘겨 가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불 안 내도 누구 불내게 하십니까? 우겨쌈을 당하게 하는 일, 핍박을 당하는 일, 거꾸로 트림을 당하는 일, 내 몸이 아픈 일, 계속해서 나로 하여금 나에게 어떤 일말의 기대나 일말의 희망을 갖는 것을 우리 속에 있는 보배 되신 성령께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하고 그걸 완전히 박살내고 괴멸시켜 버립니다.




이 래드 책을 보면서 십자가 보면서 그 피는 무슨 흔적입니까? 너희들이 나를 찔러 죽인 그 피가 이 피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아무나가 아니라 오직 택한 자에 한해서만 그것을 용서하시고 자기의 피를 무슨 피로 바꿨습니까? 너희들이 죽인 그 피를 오히려 용서하는 피로 바꾸어서 용서의 피로 다가설 때 진짜 성도는 주님 앞에 할 말을 잃습니다. 주여, 제가 죄인 맞습니다. 뭐 보고? 피 보니까 맞습니다. 우에 살래? 주의 피만 증거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 인간이 어떻게 주여, 개척교회하고 봉사했는데 왜 나를 이렇게 만듭니까? 나로 하여금 이렇게 생활비가 적게 만듭니까? 교인수가 열 명인데 다섯 명 밖에 안 나왔습니다. 왜 이런 소리가 나올 이유가 없지요. 천 명 있어도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천 명, 만 명 있어도 그거 내 교회 하나도 없어요. 나는 그냥 죽을 육체로 넘어 가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가 설교할 때 제일 큰 유혹이 교인수 없는 게 아니에요. 설교하니까 백 명, 이백 명 모일 때 힘들어요. 왜? 이백 명이면 이백 명 다 갖다 버려야 되고, 천 명이면 천 명 갖다 버려야 되고, 자기는 계속 죽을 육체로 남아있는 그런 설교를 설교 시간에 집어넣어야 돼요, 거기에. 설교시간에 나를 설교자를 부정하는 그 요소가 들어가 있어야 돼요. 깡패요 내가 깡패입니다. 설교하는 내가 깡패입니다. 나쁜 놈 내가 나쁜 놈입니다. 이런 게 들어있어야 돼요.




참, 그게 성령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합니다. 어느 설교자는 설교하기 전에 이 설교해서 은혜 끼쳐서 나는 설교자 맞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누구나 다 있어요. 그러니까 날마다 죽을 육체로 날마다 원수로 살지요. 분명히 교회의 머리는 주님인데 나라고 우기고, 교회 목회는 주님이 하는데 내가 한다고 악착같이 우기고, 나는 질그릇인데 질그릇에서 벗어나서 이제 금 그릇됐다고 우기고. 매일같이 그런 환상, 꿈을 밤낮으로 꾸죠. 그 밤낮으로 깨지는 걸 모아다가 설교에다 내뱉어서 난 이렇게 해서 깨졌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예수님의 죽음은 메시아적이다. 이게 뭔 뜻입니까? 메시아적이다 이 말은 사탄의 방해를 받지 않고 주님께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하신 것이다. 여기 중요한 말이 있지요. [인자는 자기 생명을 주러 왔노라] 요걸 강조해요.




래드가 이해는 못하면서도 중요한 건 다 이야기해요.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아하, 십자가는 우리가 요청해서 한 십자가가 아니고 일방적으로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생명을 주시려고 온 십자가다. 라고 고 이야기. 보세요. 이 신학자의 특징이에요. 뭔가 낌새에 중요하다 싶은 건 다 집어넣고, 지는 이해가 안 돼요. 앞뒤가 연결도 안 되고 그래요.




그 다음에 예수님의 죽음은 구속적이다. 이것은 값을 이야기해요. 지불된 값을 이야기해요. 여긴 구약에서 값을 지불하고 건진다는 게 있어요. 구원이 값을 지불하고. 이게 구속이죠. 그 다음에 나온 게 대속이죠. 대속과 구속의 차이가 뭐냐? 값을 치루고 한다.




그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병원에 친척이 입원했다. 그때 다른 친척이 와서 어이, 원장님. 이 사람 데려갑니다. 원장이, 돈 내고 데려가라. 약값 많이 들었다. 할 때 돈 여기 있소! 하고 데려가는 거예요. 요걸 돈 지불한 걸 구속이에요. 그럴 때 환자가, 아이고, 형님. 사촌 형님 감사합니다. 제가 돈 드릴게요. 대신 지불했어요. 이게 대속이에요. 아시겠지요. 지불했다는 것은 구속이고, 대신 지불했다는 이것은 대속이죠.




결국 구속과 대속을 지나가고 남는 결과가 뭡니까? 값 치룬 것도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그 다음이 중요해요.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이걸 이야기 안 해 놨어. 뭐냐 하면, 그 다음에 내가 뭣을 더 해야 보태야 구원되는 게 없이 이미 대행했다는 말은 따로 궁시렁궁시렁 포게트에 지갑 빼서 돈 내서 하나님께 갖다 바치고 전도하고 봉사해서 구원받을 필요는 있다, 없다? 없다. 이게 더 중요해요. 그게 중요해요.




왜냐하면 아까 처음에 보세요.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영원히 계속 가니까. 오년 전에 대속 받아 놓고 이제 또 받아야지. 이런 게 없고 한번 예수님이 다 이루었거든요. 그 이룬 것은 고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가요. 계속 가기 때문에 그 다음에 따로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것도 십자가를 잘 몰라. 아직 미흡해. 왜냐? 이래 되면 뭐가 돼버리느냐 하면, 하나님과 나의 틀이 중간에 뭐로 바뀝니까?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되지요. 그럼 여기서 아까 대속, 구속에서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그럼 나는 뭘 할까요가 빠진다니까.




그러면 뭐가 됩니까? 흔히 복음을 건성으로 하는 사람이 뭐 캅니까? 야씨, 참 개혁교회, 예수사회에 있는 목사님들 참 좋더라. 왜? 헌금도 안 해도 된다. 봉사 안 해도 된단다. 만판 놀자. 성경공부 치워라. 예배참석 가끔 생각나면 갈게. 육 개월 만에 한 번씩. 지난주에는 일년 만에 한번 온 사람 있어요. 신난다. 라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가르친다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우리 보고.




결국은 거기에 대해서 구속과 대속 가지고서 십자가에 담긴 그런 오해를 낳을 수밖에 없지요. 값을 치렀다. 대리 치렀다. 니 할 것 없다. 만세지, 뭐. 그럼 되지. 그럼 뭐가 빠졌어요? 이게 뭐가 빠졌느냐 하면, 아까 래드가 이야기했어요.




십자가가 이게 언약은 처음에 예수님이 죄인과 결합되었지요. 그럼 언약 안에서는 뭐가 유지 되느냐 하면, 일치가 되고 결합될 요소가 있어야 돼요. 대신 값을 치루는 정도가 아니고, 그 대신이 이제는 내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지요. 그럼 나는 질그릇으로 전환되고 나의 삶의 주인공은 누굽니까? 예수님이 나한테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게 어디 나와 있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예수를 믿는 자는 이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한번 적어 볼게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이게 인간 힘으로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오셔 가지고 성령께서 목적이 있지요. 뭘 목적 합니까? 성도를 절대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지요. 그걸 누가 믿느냐? 우리가 믿잖아요.




믿는데 다른 사람이 욕하기를 뭐냐? 복음을 가르친 너희들은 인간을 개판으로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반대로 피폐케 만들었다. 이상하게 무슨 피폐케 만들어. 한쪽은 너무 자유케 했다하고 피폐케 했다고. 둘 중에 어느 말이 맞는지. 양무리는 자유케 했다하고 이쪽에선 피폐케.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개입이죠. 태양이 지 마음대로 삽니까? 참새가 지 마음대로 살아요? 참새의 겉모습 보면 지 마음대로 날개 짓하죠. 하지만 참새가 팔린 때가 있지요. 두 데나리온에. 참새가 죽을 때가 있죠. 누구 허락 맡고 죽어요? 참새가 참새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허락 없이는 참새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물며 하나님의 성도일까 보냐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도록 계속 하시지요. 뭐로? 우겨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함으로 말미암아 보배를 가리우고 질그릇이 내가 황금그릇 되려는 요 시도를 그때마다 쥐 박아서 니 생각대로 해서 되는 일이 있더냐 이노무 자식아. 니가 설교한다고 교인들 더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자꾸 쥐 박는 거예요.




그럴 때 주여, 죽을 육체가 분명하옵니다. 고백하는 거예요. 그 고백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빠져 있어요. 일치라는 거, 연합이라는 거, 그게 빠져 있는 거예요.




이게 연합, 일치가 왜 빠져 있는가?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그것이 잠재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게 사도 바울 로마서 6장에서는 구체화되어 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 공관복음에서는 그 단어 하나하나에 그게 확연히 드러나진 않아요. 왜냐하면 십자가로 모아지는데 사건의 중심적이기 때문에 그 의미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보다는 층이 얇아요.




그 다음에 예수의 죽음이 종말. 이거는 다음 시간에 종말이 나오거든요. 그때 종말할 때 이 사람이 빠져 있어요. 예수님의 종말 생각 안 하고 종말 생각하면 큰 일 납니다. 그때 그 다음 시간에 종말론할 때 하고. 이걸 좀 읽어 오시기 바랍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될 텐데 나 잘났다가 결국은 하나님께 구원 받았다를 증거하는 식으로 살지 말고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께 원수였는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내가 날마다 깨어지면서 산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그 의미를 보여줄 수 있는 표출할 수 있는 그런 남은 생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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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대장간 출판사 이근호 목사님 저서 (3) 서경수 07-07-20 4871
448   20070706c 울산강의-창세기 17장(2) 녹취 한윤범 07-07-19 4203
447   20070706a, b 울산강의-창세기 17장(1) 녹취 한윤범 07-07-19 4719
446   20060908-(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6강 오용익 07-07-18 4588
445   여름수련회 시간표 일부 수정 서경수 07-07-17 9760
444   십가가 마을 여름 수련회 (2) 조 규 현 07-07-17 4000
443   품절된 대장간 책 이근호 07-07-17 6540
442   울산지역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 참가자 명단 이능우 07-07-17 9732
441   안녕하세요. 구득영입니다 !! (3) 구득영 07-07-17 4181
440   비오는 날 아침에 (2) 이미아 07-07-16 4149
439   십가가 마을 여름 수련회 (1) 조 규 현 07-07-14 6902
      부산경남지역 참가자 명단 (1) 이성희 07-07-15 8878
438   서울, 경기 여름 수련회 참가자 명단 이미아 07-07-14 9181
437   20060908-(1)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5강 오용익 07-07-12 4795
436   수련회 길 찾아 오는 법 관리자 07-07-11 3949
435   여름수련회 서울/경기 지역 오시는길 안내 입니다 강구만 07-07-11 9371
434   20070703b 부산강의 : 조지 래드 [신약신학]-제4복음… 한윤범 07-07-11 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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