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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1 07:01:54 조회 : 6223         
요한복음 강의녹취(이근호목사/06.06.09)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요한복음강의 (이근호목사, 06. 06. 09. 안산나라장로교회)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예수님이 답변을 하지 않았잖아요. 진리가 무엇이냐고 누가 물었느냐가 답변을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의 입장을 정리하는 겁니다. 누가 묻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 따라서 답변 되어야 할 사항인지, 답변 되지 말아야 할 사항인지가 결정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라는 사람이 진리의 형성과정에 개입을 합니다. 긍정적 개입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 개입을 하는데,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죽여버리지요. ‘진리가 무엇이냐’ 할때 그 해답은 이미 나왔지요?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나는 진리”라고 합니다. 보통 ‘나는 의사다’ ‘나는 판사다’ ‘나는 무엇이다’라고 뒤에 이렇게 붙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서술어라고 합니다. 앞에 것을 주어라고 하고요.




주어와 서술어의 일치, 혹은 철학에서는 동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할때, 인간쪽에서는 이것이 동치가 될 수가 없어요. “나는 ---이다”할 때 동치가 안되는 이유는 예수님 뒤에 나오는 “---이다”의 개념이 인간세계에서 나오는 개념들을 동원하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주님 앞에서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들어 갈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멋도 모르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답변을 해주지 않습니다. 진리란 “내가 진리다”라고 진리가 나올 자격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안돼요. 저는 예수님의 제자인데 ‘진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자격이 없습니다. 안돼요.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진리의 개념이 이미 이 세상에서 형성된 진리의 개념이기 때문에, 이 진리의 개념과 예수님의 진리의 개념은 안맞는 정도가 아니고, 서로 발로 차고 배척해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답변을 못합니다. 그저 입을 다물라고 하겠지요. 예수님 자신이 묻기전에 이야기를 해야 겠지요.




그런 경우가 요한복음에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 하나가 “나는 너희들이 있지 않은 곳으로 가겠다”고 했을때, 베드로는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고 “제가 목숨바쳐서 주님과 함께 죽겠나이다”고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오지 마라”가 아니라 “올수 없다”고 합니다. 베드로도 죽고 예수님도 죽는데, 베드로는 생각하기를 베드로 자신의 죽는 자리와 예수님의 죽는 자리가 같은 장소가 되어서, 같은 처소에 놓이게 될거라고 착각을 한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면, 베드로가 죽는자리와 예수님이 죽으시는 그 자리하고 안맞거든요. 왜냐하면 그 처소가 안맞습니다. 처소는 주님쪽에서 예비해야 일치가 되는 겁니다. 처소가 마련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베드로가 죽어봐야 예수님 계신곳에 합류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도 공관복음에 수시로 나옵니다. 구원해 달라고 할때 그 구원의 개념이 다르고, “믿습니다” 하는데 그 믿음의 개념이 다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할 때 예수님이 “그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십니다. 




기왕에 기적을 베풀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낼 것 같으면, 어머니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이 자식의 효도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담박에 하는 말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합니다. 마리아가 나름대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내는 기적의 개념과, 예수님께서 출발하는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기적의 개념이 서로 안맞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수님 자신과 포도주의 결합의 의미는, 이 포도주가 예수님 자신의 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과 포도주가 결합되는 것은 피를 증거하는 용도로써의 포도주가 된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가지고 첫 번째 “표적”이라고 했어요.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한뒤에 붙는 이야기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데 이것은 예수님 본인만 이해하고 듣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포도주를 좀 구해보라는 것이 마리아의 순수한 인간적인 생각이에요. 그것이 전부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마리아에게서는 전혀 결부될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바울 서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옵니다. ‘잠언’서에 보면 말씀대로 살게 될 때 부귀와 영화를 다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목사들이 심방 가서 자주 사용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약속된 부귀와 장수를 허락하시는데 그토록 믿음이 없어가지고 약속대로 말씀을 지키면서 살지 않기에 지질이 궁상으로 못산다는 거죠. 제발 교회 나와서 축복 좀 받으라는 식으로 권면하잖아요. 이것은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서신에 보면 골로새서 3장에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어요. 이것은 기존의 유대인들의 잠언 해석 즉 “오른손에는 장수요 왼손에는 부귀”식의 땅의 축복을 다 잃어버려도 상관없이 여전히 축복이 될 때 비로소 축복이라고 보는 겁니다. 몽땅 잃어버려도 여전히 축복이 차고 넘치는 변화가 있을 경우에만 축복이라는 말을 쓴다 이말이죠.




성경해석에서 제일 난처한 점이, 흔히 교회에서나 땅에서 인간들에게 통용되는, 즉 욕망의 결핍에서 나오는 개념들을 그대로 가지고 교회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복음을 아는 목사 입장에서는 전부다 수정을 해야 합니다. 수정을 할라 들면,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온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목사가 자신을 가지고 약간의 조롱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속에서 애끓는, 천불난 - 경상도 말로 천불이라 하는 것은 원한 - 즉 한풀이같은 것을 상당히 얕잡아 보는 것 같이 보고, 나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혀 배려할줄 모르는 식이 되어서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무엇이냐? 이것이 상당히 재미있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이 나를 힘들게 했으니까 이것은 분명히 하늘나라에서 무슨 행정적인 착오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죄를 생각할 때 내가 이정도로 고생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교회 올때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내가 이정도 고생을 할 정도로 심한 죄는 짓지 않았다는 거죠. 내가 얼마나 착하고, 전도 잘하고, 헌금 잘하고, 하나님 잘 섬기는 이 실력을 하나님이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내가 교회에 와서 그동안 미진했던 교회 충성을 다 하게 되면, 하나님이 알아차려서, 나의 삶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보충되고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서 교회에 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오는 첫 번째 이유가 뭐라고요? 현재 내가 고생하는 것은 내가 죄지은 것에 비례해서 너무 가혹하고 심하다는 거죠. 얼마 전에 KTX 여승무원들 데모했지요? 데모한 이유는 자신들의 하루 일과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월급을 얼마 받는지, 한달동안 되게 일하면 한 100만원을 받는가 모르겠어요.




한달에 한 다섯 번쯤 논다고 치고 한달 25일쯤 근무하면, 100만원 남짓을 주는 모양이죠. 그러면 제가 알고 있는 그러니까 제가 잠시 했던 염색공장이랄지 그런데서 근무할 때요. 염색공장은 실내온도가 섭씨 50도 밑으로 내려가면 제품 생산이 되지 않습니다. 옷감이 물이 제대로 들지 않기에 한여름에도 50도 이상을 유지를 해줘야 합니다.




대구 염색공장에서 스물 대여섯 된 아가씨들, 여승무원들 또래의 아가씨들이 야간 잔업포함해서 하루 15시간씩 일합니다. 최저임금이 정상적으로 일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잔업을 다 포함해서 일하는 것으로 해서 넘기는 식입니다. 잔업은 선택이 아니고 특별한 경우외에는 다 잔업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일하게 되면 150만원 받고 좀 쉬었다 하면, 100만원 약간 넘게 받습니다. KTX 여승무원들, 기차에서 여름에 에어컨 나오죠. 겨울에 히터 나오죠. 멋진 제복 입지요. 승무원들에게 상소리 하는 사람 거의 없지요. 뭐가 힘들다는 겁니까?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가 가게 되면 뭐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계약직으로 말고, 정직직원이 되게 해달라고 그 기도할거란 말이죠. 지금 하늘나라에서 행정적인 착오가 있다는 거죠. 제대로라면 내가 정식 직원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하늘나라에서 나의 착함을 제대로 못알아 주고 있기에 계약직으로 있게 되었고 힘들게 파업하고 데모하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기도하는 이 착함을 보고 나의 처지를 빨리 원상회복 시켜 달라는 거죠.




여승무원들뿐만이 아니라 전교인이 다 그런 목적으로 교회 오는 겁니다. 전교인이. 장로고, 성가대원이고 뭐고 전교인이 그것 때문에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요. 교회 나오는 것이 노동이잖아요. 교회 나오는 노동의 대가만큼은 얻고 가야 손해를 안보게 된다는 거죠. 사람이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들면 왜 기분 나쁘냐면 쪼다 되잖아요. 쪼다.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자기가 바보 병신 되는 것이 제일 기분 나쁘잖아요. 기도했는데 응답을 못받으면, 옆에 있는 기도응답 받은 김집사에 비해서 자기는 완전히 쪼다 되고 바보가 되거든요. 저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교회 목사가 되었으면 강단이라고 설치해 놓고 거기에 목사라고 세워놓았으면 거기에서는 정답을 이야기해 줘야 합니다. 정답을. 완벽한 정답을 이야기 해줘야지 교회에 온 손님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공급에 대한 수요를 맞추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해야 되요.




정답은 저 여승무원들이나 교인들, 모여서 의논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치밀하게 쫙 짜여져 있다고요. 성경에요. 그러면 목사는 오는 손님이 어떤 연유와 곡절과 원한을 품고 왔든지, 어떤 분통을 내면서 하나님에게 달려들 듯이 해도 관계없이 성경에 꽉 짜여진 이 정답만 이야기 하라고 설교자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할일은 뭐냐 하면 이 성경 속에 있는 정답만 파악해서 그 정답만 전하면 목사의 할일은 끝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진리는 여기에(성경)에 있으니까요. 진리는 여기(성경)에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 보면 목사님들이 교인들 눈치를 왜 그렇게 보는지. 한마디 해놓고서 교인들 중의 유력한 사람들이 혹시 삐져서 휴대폰 받는척 하면서 예배당 밖으로 나가지나 않는가 신경을 쓰지요.




열명 교인들이라고 얕보면 안돼요. 열 명 교인이라면 열 명 교인들의 개성이 다 있고요. 백 명 교인이면 백 명 교인대로 개성이 다 있어요. 차라리 교인들이 천 명이나 만 명 되면 목사가 속이 편해요. 한 열명 삐져서 나가더라도 신경 안써도 되거든요. 그 구역담당 목사만 혼내면 그만이란 말이죠.




알아서 빠져나간 숫자 다 채워놓으라고 으름장 놓으면서 - 장로들이 “가만 안놔두고 너 쫒아 낸다“ 하더라고 - 봉급 받는 값을 하라고 책임추궁하면 그만입니다. 교인 한 열명 되면 이것은 자식새끼가 열명이라. 아홉명 괜찮더라도 한명 삐지면 참 곤란하죠. 더 난처한 것은 둘이 싸우는 것. 열명 가운데 이쪽 이쪽 둘이 싸우는 거에요. 그것도 헌금 잘내는 유력한 둘이 싸우는 것. 서로 목사님이 누구를 더 편애하는지를 주시하거든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짜여져 있고, 요한복음을 주도하고 있는 정답이 뭐냐 하는 것인데 그 정답이 19장에서 나옵니다. 그게 18장부터 나옵니다.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두자로 뭐라고 했지요? “진리!”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진리를 답변해 주지 않았지요? 왜 안해줬나요? 19장을 미리 한번 봅시다. 19장 30절입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여기에 “다 이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뜻은 “그동안 너희들 잘 이용해 먹었다”는 뜻이예요. 예수님한테 이용당하는 것을 고마워할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예수님에게 이용당했다는 말은, 나에게 자존심이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그값을 쳐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너는 너의 자존심을 세울 입장이 못된다’는 것이 "다 이루었다”안에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룰때 이 지상의 누구하고 의논하고 협의해서 이룬 겁니까? 아니지요. 혼자 다 하셨고 단독 드리블 해서 골 넣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다 이루었다”다 정립이 되어야만 로마서 1장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나옵니다.




로마서 3장, 4장에서는 행함이 아니라는거죠.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안에 우리의 행함이 첨가가 안됩니다. 가공식품에 불순물이 섞이면 큰일 나잖아요. 예수님께서 혼자 이루신 “다 이루었다”에 우리의 행함을 첨가하면 안돼요. 첨가하지 않더라도 그 예수님이 혼자 이루심이 마치 2층이 내려 안 듯이, 나를 뭉개면서 내려앉은 그 안이 보여주는 그 상황을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한다 이말이죠. 그래서 믿는 사람한테는 탱 하고 푹 쑤셔 보면 뭐가 나오냐 하면




“다 이루었습니다”


“누가?”


“주님이요.” 


“누가?”


“주님이요”


“네가 나를 믿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이만한 믿음 가진 사람을 못봤다고 하시는데 놀라운 사실은, 기존의 아브라함 자손들 천국에서 다 쫒아내 버리고, 그 빈자리에 너와 같은 사람을 집어 넣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자손들은 지옥에 가서 이를 갊이 있을 것이고, 천국은 이와 같은 믿는 사람들이 차지한다고 하죠.




이러한 백부장의 믿음은 뭐냐 하면 전적의지죠. 전적으로 의지하는 거예요. 전적의지 하려면 의지할 만한 값을 해야죠. 그 값이 뭐냐면 “다 이루었습니다”입니다. 기존의 인간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믿음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기존의 인간세상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확률’입니다. 가능성이죠.




이런것들 때문에 제가 우리 교단의 목사님들이나, 크로스 빌리지를 방문하는 주로 일반교인들이 아닌 특히 목사님들을 보라는 식으로,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해서 제가 글을 계속 올리지요? 자꾸 뭔가 보라는 식으로 자꾸만 싣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글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분들은 목사님들이 아니고 도리어 평신도들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제 글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중세의 스콜라 철학이 원래 어렵습니다. 중세의 철학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모르겠지요? 오늘 크로스 빌리지를 들어가 보셨습니까? 간판만 십자가마을이지 들어가 보지도 않았나 보죠? 거기 들어가 보면 「존재란 무엇인가」(E. 질송)의 책을 요약해 놓은 것이 있어요. 이것이 중세의 철학입니다. 거기 보면 중세 토마서 아퀴나스와 그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철학이 죽 나와요.




이 중세의 철학이 왜 어려우냐 하면, 이거 하나입니다. 이거 하나. ‘가능성’입니다. 가능성! 다시말해서 중세의 철학 혹은 신학이 뭐냐 하면, ‘교회를 위한 철학’입니다. 교회를 위한 철학은 뭐냐 하면, - 지금 제 강의를 힘들어도 찬찬히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 했지요? 정답만 이야기 해야 합니다. 정답만. 하여튼 목사는 정답만 이야기하면 돼요 - 이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죠?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 맞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었다고 봐요. 같은 말로 인간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다고 본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라는 존재속에 하나의 본성으로, 본질로 들어 있다고 본거에요. 왜 중세철학과 교회에서 이렇게 복잡한 철학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불신자라 할지라도 성경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교육시키고 가르치게 되면, 얼마든지 그들을 거듭나게 할수 있는 묘책으로서의 접촉점을 하나님이 주었다는 겁니다.




‘코넬리우스 벤틸’ 같은 경우는 접촉점만 이야기 했는데, 단지 접촉점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는 접촉점을 가지고 ‘견인’, 즉 잡아 당겨야 한다고요. 잡아 당길때,  한걸음 두걸음, 당겨져 와서 어떤 지정된 선을 넘었다고 할 경우에 비로소 ‘당신은 성도이다’라고 판정을 내려줄 잡아당기는 과정, 절차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나오는 가능성 - ‘잠재태’라고 하는데 - 을 기초로 해서 신학을 전개한 겁니다.




 그리고 이런 신학에 대해서 그 당시 많은 학자들이 동조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 담겨 있는 그 핵심, 진리에 대해서 모르고, 무엇에만 관심을 가졌느냐 하면 이 성경을 가지고 저쪽에 있는 불신자, 혹은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켜서 - 목사가 사람 변화시키는 것을 자기 임무라고 생각(착각)하거든요. - 하늘나라 백성 만드는데 이 성경이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 겁니다.




그런 관계성에 주목하면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니까 성경 자체내의 정답에서는 완전히 멀어진거예요. 사람들이 우리가 복음을 아는데 그런 중세철학같은 공부를 해서 뭐하냐고 하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안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일단 복음은 아는데, 이 복음을 저 사람에게 적용해서 어떻게 구원받는 선에까지 끌어 오느냐에 관한 모든 인간들에게서 나올수 있는 가능성들의 집합체가 중세철학이라는 말이죠.




그 당시에 신부들이나 성직자들이 복음을 모른다는 사람들이 어디 있었습니까? 다 안다는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위에서, ‘토마스아퀴나스’의 철학위에서 내어 놓은 그것을 제가 글로서 써줄 테니까 보시면서 오늘날 자기들이 목회하는 것과 얼마나 동일하게 하고 있는지를 한번 보시라는 말이죠.




동일하지 않다고 한다면 반박을 해보라는 말이죠. 반박이 안되지요. 왜 안되냐 하면, 너무나 하나 하나가 다 맞는 이야기이니까요. 치밀한 그 논리가 다 맞는이야기니까. 반박도 안되면서 복음을 아는데 그 철학을 뭐하려고 하냐? 이런 식으로 그냥 보지도 않고. 그렇게 되어 버리면 복음을 안다고 설쳐대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옛날에 그릇된 그 전철을 그대로 반복해서 밟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그것들에서 초월한 것처럼 스스로 착각과 착오를 일으킬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중세철학을 공부해서, 그것을 밝히는 차원에서 그 어려운 글들을 쓴 거예요. 어떤 사람은 좀 쉽게 써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쉽게 쓰면 분량이 많아져서 안돼요. 뭐든지 공부를 어렵게 해야, 어려운 것을 하게 되면, 그 나머지 쉬운것은 그냥 알게 돼요. 언제 내가 이런것을 다 알았을까 하는 식으로 그냥 알게 돼요.




일반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저렇게 TV에 나오는 목사들도 다 틀린것은 아니고, 90% 정도는 맞고 10%정도가 틀린다’고 했는데, 복음을 듣다 보면 몇 개월, 혹은 몇 년 지나고 난 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벌써 자신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되거든요.




지금 사람들은 제가 억지로 공부를 시키려고 한다는 그런 의도처럼 비칠것인데 - 물론 그런 의도를 약간은 가지고 있지만요 - 많은 목사님들이 이렇게 생각할거예요. ‘공부도 좋지만 들을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는데 공부는 해서 뭐하나’ 이런 생각을 할거예요. 그런데 구원은 예수님이 하는 일이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일을 잘하고 계십니다. 절대 못하지 않고 참 잘하고 계셔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 사람을 건지는 것이 구원인데 -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자꾸 천국에 오지 말라고 쫒아 내는 것도 그것이 구원의 일입니다. 망하는 자로 하여금 ‘너는 망하는 자’라고 윤곽을 드러내 주는 것도, 주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이지 꼭 사람이 안믿다가 믿는것만이 기적이 아니에요.




 믿다가 “나 이제 안믿습니다”하는 그것도 주님께서 하신 놀라운 기적으로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뭐라고 되어 있다고요? “다 이루었다”고 되어 있어요. 다 이루었잖아요. ‘믿음’이 뭐라고요? 다 이루심이 그대로 함몰되어서 나를 완전히 덮쳐 버릴때 내 입에서는 뭐냐 하면, “주께서 하신 일이 다 이루어 졌습니다”하고 고백이 나오잖아요.




그것이 믿음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교인들이 떠나가서 교인수가 줄어드는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것 자체는, 뭔가 우리가 결핍을 느끼고, 뭔가 미흡함을 느끼고, 뭔가는 여기서 응어리를 가진다는 말은 그 순간순간마다 결국 무엇을 거부하는 거예요? ‘다 이루기는 뭘 다 이뤄? 우리 교회 꽉 꽉 채워서 부흥하게 해 줘야 다 이룬거지.’




그리되면 목사가 아까 그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평신도 하고 똑 같잖아요. 뭐라고요? 지금 주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에 뭔가 착오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고생을 해야 되는 사람도 아니고 입장도 아닌데 이렇게 고생하는것을 보니 주님께서 뭔가는 오해를 하고 있으니 그 오해를 풀러 왔다고 교회문열고 들어오는 사람하고 다를바가 무엇이 있느냐 말입니다.




그게 무슨 믿음이냐 말이죠. 백부장의 믿음을 보세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은 완전히 자존심도 없고, 배알도 없고, 체면도 없고, 위선도 없고요. 중대장이면서도. 이방 통치자의 중대장이면서도. 이런 믿음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도 놀랐다는 것 아닙니까?




‘다 이루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준다? 첫 번째로 우리에게 걱정근심이 없다는 겁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는 ‘절대성’입니다. 절대성이라는 뜻은 미흡성이 없다는 겁니다. 앞으로 뭔가를 깔짝 깔짝, 메워야 할 그럴 필요성이 전혀 없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기도가 부족하구나. 다음 주부터 기도에 좀더 매진해서 기도 쪽에서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야겠다’라는 것은 ‘다 이루심’ 앞에서 그 ‘다 이루심’을 모독하는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세요. ‘주께서 기도하시면 하겠습니다.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나와야 할것인데 목표점을 정해 놓고 자기와 주님사이에 어떤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거리를 내쪽에서 체면치레 하는 식으로 뭔가 접근해 가면 주께서도 복주시기 위해서 마중을 나올것이고 그러면 중간지점에서 만나지 않겠나’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다 이루심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이말이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강하게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심하게 집착을 하고 있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다 이루심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모든 모습이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로 고백하는 그 자유로운 모습으로 비로소 다 이루심이 증거 되거든요.




 ‘다 이루심’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나오는데 그 ‘다 이루심’안에서는 우리의 행위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첫 번째로, 근심 걱정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절대적입니다. 어느 정도로 절대적이냐 하면 내가 내 목숨에 연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죠.  이 절대성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인간의 절대성은 여기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절대성이 ‘나’라는 인간을 구박하고, 고생시키고, 설사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그 현장에 ‘다 이루심’만 남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오케이 하면서 반겨야 됩니다. 그런 사람 있었지요? 스데반집사님. 날라 오는 것이 돌이었잖아요.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돌이 던져지는 그 절대성을 믿음으로 감사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돌을 던지는 그 부정적인 절대성에 합류된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이 지금 주님 손에 있다는 것을 저들이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다 이루심’입니다. 따라서 이런 ‘다 이루심’이 되려면, 18장, 19장에 오면서 주님께서 몇몇 일들을 치러 내야 하는 겁니다. 이 19장의 ‘다 이루심’의 내용을 달성하기 위해서 18, 19장부터 뭔가 주께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면 혼자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입니다.




19장을 봅시다. 19장 7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합세가 되는데, 십자가에서 나오는 의미를 찾아 내기 위해서는, 어떤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몰아 넣었느냐 하는 것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말이죠. 7절에 보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왜 안됩니까?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안되는가? 이것은 유대인들의 깊은 신학을 여기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굉장히 난해하고도 깊이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의미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의미가 다릅니다.




우리는 자기 배알이 뒤틀리고 기분이 나쁘면 “에이! 나가 죽어라”하잖아요. 우리는 자기를 옹호하지 않으면 그런 상대방은 적이 됩니다. 자기를 옹호하면 동지가 돼요. 나를 옹호하지 않으면 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친구 아니면 적’입니다. 이것은 제가 전에 <칼슈미트>의 정치학을 언급하면서 약간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내면에 갖고 있는 정치성에 의하면 동지냐 원수냐 둘중의 하나”입니다. 중립지대가 없어요. 자기말을 들어 주고 자기를 도와준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친구가 되고, 10년지기 친구라도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반대하면 그날로 원수로 돌아서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위주로 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기에 예수님을 나가라고 한 자기위주의 인간성 발휘는, 사도바울의 서신과 뒤에 나오는 서신에 보면 이것이 보편적으로 확산이 됩니다.




사도바울의 특별한점이 뭐냐 하면 이방인의 사도죠. 이방인의 사도죠. 어떤 사람은 열세번째 사도라고 하는데. 그 개념은 좀 문제가 있어요. 어쨌든 이방인들의 사도라면 유대인들의 사도는 아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만남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고 발각되지 않은 인간적인 죄악된 요소는 누가 누구를 통해서 보여준다?




이방인을 통해서 보여주면서 그 이방인과 십자가의 대속과 만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가 이방인을 통해서 부각이 되는 식으로 바울서신에 기록이 돼요. 그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5장에 ‘아담안’이라는 겁니다. ‘아담안.’ ‘아담안’이라는 것은 유대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담안’이라는 것은 보편적인것을 의미하잖아요.




‘로마서’만 들어가고 이미 십자가는 유대인들만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십자가도 된다 이말이죠.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지잖아요. 허물어질때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무엇이 허물어진다고 보냐면, 언약이 허물어지죠. 언약이 허물어져요.




(에베소서 2:11-19)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여러분들이 감을 좀 잡아야 돼요.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없잖아요. 이방인들은 언약 밖의 존재잖아요. 언약이 허물어져서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말이 아니라, 언약이 허물어진 상태에서 죄는 언약을 넘어서서 어떻게 확대되어 있었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복음은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심으로 담당한 죄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언약해석을 잘못해서 나온 죄뿐만이 아니고, 언약이라고는 쥐뿔도 모르고 살았던 이방인들의 죄까지라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 십자가라 이말이죠. 이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 감리교 쪽에서 이야기하는것, 즉 세종대왕은 구원받았는지 못받았는지 그 문제에 답변을 할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당시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잖아요. 복음을 듣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옥을 보내는 것은 너무하잖아요. 초등학생들이 흔히들 가볍게 묻는 질문이잖아요. 어른들은 심각하게 묻지만. 세종대왕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구원받기는 무슨 구원을 받아요. 구원 못받지요. 왜냐하면 세종대왕은 자기죄로 말미암아 지옥가야 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감리교가 발끈하고 나서지요. “지독한 칼빈주의. 예정론자.” 제가 보기에는 감리교가 지독한 칼빈주의라고 욕을 할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십자가와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는 것과의 연결조차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고리가 형성이 안된 상태에서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에는 정확하고 절대적인 핵심이 있다고요. 그 핵심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제가 만약에 강도사 시험 출제위원이라면, 이런 문제를 하면 내보겠어요.




문제) 다음중 성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형상


2) 예수님과의 교제


3) 성화


4) 십자가




정답은 4)번 ‘십자가’죠. 왜냐하면 1번부터 3번까지의 공통점이 다 뭡니까? 이것들은 다 인간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누구만 올라갔습니까? 단독적으로 누구만 올라갔어요? 예수님만 올라갔어요.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합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신학을 하면서, 인간이 끼어들 요소를 다 넣어서 전부 끼어 들었어요. 인간이 끼어드니까, 세종대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종대왕은 복음 들을 기회조차 안줬기에 세종대왕을 지옥 보낼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복음을 안들은 사람에게는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는 장치를 만들어 놓은 그런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이 감리교입니다.




복음을 안들은 사람들도, 양심껏 살아서 구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십자가를 믿겠다는 식으로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잖아요. 그런데 이미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 할 때, 이방인들의 의식 속에는 어느 나라의 청년이 그 나라 법에 의해서 처벌 받는 것 하고, 이방인이 구원되는 것하고의 그 관계성을 안가져요.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이스라엘 사람이잖아요. 이방인은 각기 종족인데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는 청년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 하고 이방인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없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이게 유대인들이 봐서도 관계가 없어요.




유대인들 입장에서 봐도 관계가 없는 이유가 뭡니까? 왜 이방인들이 언약과 관계가 없느냐 하면 이방인들은 언약적으로 봐서 ‘개’입니다. 이방인은 언약적으로는 ‘개’(犬)거든요. 유대인 입장에서는 ‘개’이기 때문에 메시아와 관계가 없고, 이방인 입장에서는 ‘메시아’라는 것이 저희들끼리의 메시아이기에 관계가 없고.




이것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허물어 졌는데, 그동안에는 뭔가 벽이 있었다는 거예요. 이 벽을 가지고 에베소서에서는 두글자로 ‘언약’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언약의 벽이 허물어졌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야! 이제 십자가로 우리는 구원받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 이말이죠. 다시 이야기할게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볼때 뭐라고 봤다고요? ‘개’라고 봤지요. 이제 십자가로 인해서 언약이 깨지면, 진짜 ‘개’에요. 진짜 ‘개’라니까!! 그래서 어떤 수로보니게 여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같은 개를 어떻게 구원하나?” 하니까 “제가 개 맞습니다. 제가 바로 개같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잖아요.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고 세종대왕의 구원문제를 들고 나오는데 세종대왕은 ‘개’에요. 개!




“누가 개라고 합니까?”


“언약이 그렇게 하죠.”


“어느 언약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은 언약이. 개라니까!”




 지금 이방인이 여기 앉아서 빵먹고, 밀키스 먹고 앉아 있는 이것이 다 ‘개’입니다. 우리는 ‘개’에요 개! 개같은 인간이 구원받는 거예요. 개같은 인간이. 그런데 제가 지금 19장을 이야기 하면서 뭘 이야기 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 유대인들은 자기가 지금 언약안에 있기 때문에 ‘개’가 아니래.




왜? 예수님은 장난꾸러기라. 먼저 저쪽 이방인 집의 밭을 밟기 전에 - 지금 곡식이 익었는데 그 밭을 개구쟁이 처럼 막 밟는 거죠. - 자신들이 정통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그 밭을 밟아버려요.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들을 밟았으니 밉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진거에요. 바로 그 소리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되느냐” 하는 그 소리입니다.




여기 19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심판주’입니다. ‘심판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는 말이 나오죠. 시편 2편에 보면 메시아가 누구입니까? 메시아를 뭐라고 합니까? “나는 내 아들을 세웠는데 아들이 하는 일이란 질그릇을 철장으로 깨는 분이기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는데 입맞추는 지점이 어디 입니까? 지점이? 발이죠. 더러운 발이죠.




유대인들은 신학의 도사들이 아닙니까? 성경말씀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룬다고 믿는 사람들이거든요. 마태복음에 나오죠.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지 아니하면 안된다고.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니까,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메시아가 올때, 메시아가 어떤 정황과 징조와 흔적을 끌어 당기면서 오는가를 면밀하게 조사를 해요. 메시아를 놓치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헤롯을 만날 때, 예루살렘에 있던 신학박사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했어요. 요한복음 7장에 나오지요?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군수군대는 것이 나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요 7:42) 이 베들레헴이 에브라다라는 것도 알겠지요? 왜냐하면 미가서를 알고 있으니까.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 5:2)




메시아가 오는 정황 곧 흔적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구름타고 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저게 구름타고 오지도 않은 것이. 구름 타고 왔나? 구름타고 왔나?”라고 자꾸 묻는 거예요. 다니엘에 보면 인자가 곧 메시아가 오는데 메시아가 올 때는 뭘 타고 와요? 구름타고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지금 도보로 움직이고 있어요. 구름 안탑니다. 이것도 안맞아요.




그리고 시편 91편에 보면 메시아는 높은데서 뛰어 내려도, 갑자기 그동안 보이지 않던 천사가 동원되어서 그 발이 다치지 않아야 메시아입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요한복음 6장에서 유대인들의 주장대로 모세처럼 기도하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 현상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신약성경이 있으니까 이러쿵 저러쿵 해석을 하지,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은 문자대로만 해석해야 합니다. 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문자대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365개의 보조 율법이 거기에 가미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진짜 율법이고, 보조율법까지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통과 기타 모든 것을 다 폐지하고 내가 이루러 왔다고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예요. 결국 인간이 성경을 읽고 신학의 체제가 잡힌다고 해서 그것이 거듭난 사람이냐 이말입니다. 그래도 인간은 거듭나지 못한다는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요청한 유대인들이 대변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리를 한마디 하기 위해서 지금 긴 설명을 한시간 가까이 한겁니다.




언약을 알고, 십자가를 알고, 신학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아무리 알더라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찾아오지 아니하면 성도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뒷부분에 가면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이루심에서 그냥 끝내지 않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해 놓고 다 이루었으면 바이 바이를 해야 하는데, 다 이루었다고 해놓고 “평안하뇨?” 하면서 친히 방문하신다고요.   




신학자들은 그것을 보면서 맨날 ‘반복성’이라고 합니다. 맨날 ‘반복성’이래! 이게 <차영배> 교수 주특기 아닙니까? 예? “오순절 성령은 ‘단회성’이지만, 성령세례는 ‘반복성’이라고.”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들고 나와서 이것이 논쟁거리가 되는데, 이사람들은 다 이루심의 의미를 몰라요. 이런것까지 다 이야기하면 속이 터져요. 속이 터져!




이런것을 보면 얼마나 신학자들이 무식한지요. 자기들이 무식한지도 몰라요. 무식한게 아니고 제가 보기에는 성령을 못받아서 그래요. ‘다 이루심’은 역사상의 반복성과 관계가 없는 거예요. 보통 반복이라 함은 어느때에 반복이라고 하느냐 하면, 단절이 성립될때 반복입니다.




자 한번 봅시다. “똑 - 딱!” 할때 똑과 딱이 시간적으로 0.몇초쯤은 차이가 나죠? ‘똑’을 외친 시간과 ‘딱’을 외친 시간이 다르지요? “똑!”이 2시 45분 75.5초라면, “딱!”은 2시 45분 75.6초 아닙니까? 0.1초 차이 나잖아요. 그 다음에 계속해서 “똑-딱!”이 계속해서 나오는데, 이‘똑’과 그 뒤의 ‘똑’이 반복되지요. 반복이 된다는 말은 이 ‘똑’과 다음 ‘똑’과 무엇이 있다? 단절이 있을 경우에만 둘의 똑 사이에 구분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둘 사이가, 반복이라는게 구분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다 이루심은 단절이 없어요. 단절이 없는 이유가 뭐냐? 이런것 할때는 속터져요. 신학자들이 이런것을 모르기 때문에. 요한복음 17장을 봅시다.




(요한복음 17:23)


곧 내가 저희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시간이라는 선을 보면 ‘똑-딱’ ‘똑-딱’ 이라는 단절, 단절로 이어지지만, 영역으로 봐서 “누구와 누구 안에” 있을때는 이것은 단절이 없습니다. 방구뀌는 사람 또 그 안에서 방구뀌고.예를 들어서 우리 사모님과 송목사님이 부부인데, 아침 몇시부터 몇시까지 부부입니까? 이게 말이 돼요? 지금 제가 말을 참 잘 꺼냈는데 그러면 늘 부부됨을 반복하십니까? 이게 말이 안되잖아요. 말이.




우리 신랑이 누구예요? 예수님 아닙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신부지요. 반복입니까? 이게 지금 속 터질 문제 맞지요? 분명히. 왜 이렇게 반복성을 따지는 아십니까? 제가 아까 중세철학을 이야기할 때 한 겁니다. 성직자가 불신자들을 교회로 꼬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당신이 신자가 맞다는 어떤 폼을 내줘야 하는데, 교회를 드문 드문 오니까 영 신자가 아닌것 같더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반복적으로 좀 자주 오라는 뜻입니다. <차영배>교수의 ‘성령론’같은데 보면, - ‘개핀’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성령논쟁을 나올 때마다 다 읽어 봤는데 - “성령세례를 받을때 단회성이냐 반복성이냐, 한번 받고서 끝이냐 아니면 받고 또 받고 하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받느냐”는 그것 때문에 논쟁이 된거예요.




그것을 한다고 사도행전이나 다른 성경 귀절들을 마구 끄집어 내가지고 논쟁하고, 여기에 순복음교단까지 끼어들어서 자기들이 맞다고 하고 있는데, 근본적으로 기독론이든, 교회론이든, 성령론이든 모든 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나와야 돼요. 십자가 사건에서. 십자가 사건을 기초로 해서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번지는가를 봐야 돼요.




아까 이야기 했죠? 베드로가 목숨을 바치면 주님과 함께 있습니까? 아니에요. 베드로가 죽는 그 장소와 예수님이 죽는 그 장소가 달라요. 언제 베드로가 예수님이 죽는 것과 일치됩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해서, - 그 처소가 뭐냐? 성령님이거든요. - 성령안에 있을때는 베드로 죽는 자리나 예수님이 죽는 자리나 함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소망이 있는데 지금 육체를 벗어 버리고 주와 함께 것”이라고. 지금도 그는 주와 함께 있어요. 하지만 그때에는 육체가 없는 상태에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이고, 앞으로는 하늘의 육체를 입는 상태에서 주와 함께 있을 거예요. ‘주와 함께’라는 것은 우리가 평생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간에, ‘주와 함께’ 있고 ‘주안에’ 있다는 것은 변동사항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왜 ‘주안에 있음’이 가능하냐 하면, 성령께서 오실 때 우리가 항상 우리 힘으로 하면 우리쪽에서 주님을 믿었다가 안믿었다, 믿었다 안믿었다가를 몇천번을 골백번 한다는 것을 성령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셔서 그것을 이탈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능력까지 포함된 것이 성령의 역사이거든요. 그것이 ‘성령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23)


곧 내가 저희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 보면 “하나가 되게”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보고 하나 되게 하라는 겁니까? 우리는 때려 죽여도 하나가 될수 없어요. 하나 되게 하시는데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했다? 다 이룬거예요. 다 이루어서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요한복음 20장 봅시다. 17절.




(요한복음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보세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박았거든요.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니까 “내 아버지”라고 했지요.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 십자가를 중심에 놓고,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만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십자가 사건의 혜택을 안입은 사람은 아무리 그들이 언약을 연구하고 구약성경을 달달 외워도, 그들은 여전히 참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하면, 첫 번째로,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즉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밖에’ 있을 수밖에 없고, 두 번째로, 예수님이 찾아 들면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는 십자가다 이말이죠. 이게 십자가입니다. 지금 한시간동안 강의했어요. 이것 하나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




오늘날 21세기에 진짜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예수 왜 믿습니까?”


“주님께서 믿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믿게 했다’는 이 방정식이, 이 지식이 그냥 누구에게서 배워서가 아니고, 솔직한 자기의 체험입니다. 고백이죠. 사도바울이 어떤 성도를 만나러 갈 때, 지식을 나누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처럼 또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거잖아요. 바로 그런 사람이 형제 아닙니까? 예? 왜냐하면 그리스도몸은 하나지만 지체는 여러지체가 있으니까요.




다른 지체를 찾아 가는데 지체를 어떻게 찾아 가느냐 하면,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되게 했습니까?’를 물어 보는 식으로 찾아가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의 혜택을 누가 입었느냐고 물어볼 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능력이 임해서 내가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자기 행함은 다 털어버리고 - 자기 헌금한 것, 전도한 것, 십일조 한 것, 기도 많이 한것 - 이런것 다 털어 내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구원받았노라”고 할때 사도바울은 비로서 “당신은 나와 같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형제”라고 했습니다.




그 형제에 대해서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고’ 이게 돼요. 왜냐하면 바로 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가기 때문에 다 돼요. 십자가를 통과해서 가게 되면 다 되거든요. ‘주님이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사는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하는 거예요.




십자가가 싫다고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 밖에 있고, 그것은 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 형제가 아니군요’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돌아서야 돼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유대인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방인도 죄가 있는데 이방인에 의해서 죽지 않고 유대인에 의해서 죽는 이유가 유대인들만이 가진게 있는데 언약을 가졌습니다. 소위 율법을 가졌어요.




그들은 다른 인간들을 대표해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법만 주시면 이 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겠습니다’라는 인간적인 기본적인 죄성을 폭로당하는 대표자로서 그들은 일찍부터 부름을 받은 거예요. 그게 로마서 2장에 나옵니다. “율법을 받은 그들이 도리어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서 3장에 가면 율법을 준 이유는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리고, 모든 사람을 율법아래 심판아래 두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것을 해석할 때 절대로 개인적으로 접근하면 안돼요. 개인적으로 접근해 버리면 이것은 해석이 안됩니다. 유대인이라는 집단으로 출발해야 돼요. 집단으로.




왜 그러냐 하면, 유대인이라는 집단으로 출발해줘야,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아도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일 수밖에 없다면 오늘날 우리가 성경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하는대로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유대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동류로서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돼요.




그래서 누가 묻거들랑, 성경공부 많이 해서 구원받았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에 의해서, 주님께서 거저 주신 주의 공로로만 구원받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공부하게 된것은, 이렇게 공부하는 것조차 주님의 은혜로 공부합니다.” 그런 고백이 나와야 된다 이말입니다. 그런 고백이!




참 이것을 볼때 “오늘날 믿음을 보겠느냐”i하는 말씀이 실감이 나죠. 예수님께서 잔치를 벌렸는데 그 잔치가 예수님이 벌렸다는 것 때문에 싫어하는 거예요. 내가 벌려 놓은 잔치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벌린 잔치, 장가가는 것 때문에 혼인잔치 참석 못하고, 밭을 사기 때문에 못가고, 소를 새로 샀기 때문에 못가고, 또 이런 저런 핑계로 못가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심판주 되시는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임금님이 화를 내서 그들을 진멸하라고 하고, 그 다음에 길거리에 아무나 노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잖아요. 채우는데 ‘뭐 초청받았으니 그만한 자격이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오는 사람을 쫒아 내어 버립니다.  그 자리에 예복, 유니폼을 입고 오지 않은 사람은 초청을 받고도 쫒겨나는 거예요.




왜냐? ‘네 공로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셔서 철저하게 예수님 위주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존의 모든 인간 세종대왕부터 우리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전부 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용하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철저하게 이용해 먹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손해 보는 것이 전혀 없어요. 철저하게 이용한 거예요. 철저하게. 망할자는 망하는대로 이용하고, 구원될자는 구원될자로 이용해서, 오직 주께만 영광이 되도록 철저하게 이용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19장 이후에서 주의깊게 볼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다 할때에, 십자가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장차 구원해줄 사람과, 멸망시킬 사람이 따로 구분되어 있어요. 십자가안에.




요한복음 19장 18절을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요한복음 19: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의 양쪽편에 있는 사람들이 죄수들이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그림으로 그려보면 예수님은 땅밑으로 꺼졌다 이말입니다. 없는거예요. 꺼지고 흔적도 없이 없어진 거예요. 반짝 튀다가 죄수라는 이름을 달고 역사속에서 그만 사라져버렸죠. 잠적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결국 이 세상과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십자가를 찾는 사람도 없고, 찾을 사람도 없고, 그런 겁니다. 이 세상과 주님은 두 죄수와 함께 이세상에서 죄수라는 이름으로 ‘바이 바이’(고별)을 선언한 겁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앞으로 만약에 십자가의 영이 임하면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게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나오죠.




(요한복음 17:14-1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강단에서 목사님들이 십자가를 설명하면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설교를 하면, 어느 누가 이해를 하겠습니까? 이해가 되든 안되든 이것이 정답이에요. 이 정답 외에 다른 분명한 정답은 없습니다. “목사님! 뭘 어떻게 하면 제가 복을 받습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가 이 세상 사람으로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십자가를 이야기해 봐야 튕겨나가 버립니다.




“십자가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하면 복을 받습니까?” 그것을 이야기해 달라는 거죠. 결국 이세상 사람으로 남는데 이왕 남는거,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상태에서 십자가에 남으려면 어떤 복을 따내기 위해서 어떤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한 비법을 이야기 해 달라고 교회오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는 뭘 하느냐 하면, “당신은 죄수가 되어서 이 세상에서 날라가 버릴래?”라고 묻는 거예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죄수가 되어 가지고 이름도 빛도 없이 잊혀진 이름이 되어 볼래?”라고 묻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주님이 당하는 죄목에 나도 같은 죄목으로 함께 지고 당한다면 저도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십자가의 영이 임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참! 이거 갈수록 태산이다! 갈수록 강대상에서 설교로 남을 설득한다는게 정말 불가능하게 돼요. 갈수록 불가능해요. 갈수록! 가만히 보면 재미있는게요. 이걸 저는 재미있게 보는데. 설교를 하게 되면 따라 오려고, 따라 붙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가 기어이 삐져서 돌아가는 사람이 우리교회에 한두명이 아니고 수십명이 됩니다.




따라 붙으려고 애를 쓰죠. 제가 보는 책도 읽어 보려고 하고, 설교도 들어보고 한다고요. 따라 오려고 따라 오려고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목사님들도 많고, 일반인들도 많고. 결국 돌아서면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이거에요. “그런식으로 사람들이 꼬임을 받겠느냐?” 이말입니다. 딱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죄수이고 잊혀진 인물이 되었는데,우리도 이땅에서 아예 없는 사람으로 치고 한번 살아봅시다”하고 이야기 한겁니다. 아예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사람으로. 있나? 봤나? 죽었대. 죽은 모양이다. 잊혀진 사람으로 한번 살아 보자는 말이죠. 남에게 “짠! 복받았다!” 이렇게 하지 말고! 나 예수 믿고 잘되었다고 나서지 말고.




아예 잊혀진 인물. 그 사람 누구더라? 그런 사람이 있었나? 아예 남들이 기억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한번 되어 보자는 말이죠. 그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지난 수요설교시간에 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젊을때 스무살 때 죽으나, 지금 죽으나 무슨 차이가 나느냐는거죠. 차이 납니까? 사모님! 20년전에 내가 죽으나, 내일 죽으나 나한테 무슨 손해될일이 있습니까? 차이 납니까?




‘욥’은 “아예 이 세상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자궁속에서 그냥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차이가 없어요. 없다고요. 차이가 없는데도 우리는 더 살려고 하잖아요. 순발력 때문에. 관성이 법칙이라고 하지요. 인생을 달려온 그 순발력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 오는 목적은 ‘좀더 살려달라’고 빌러 오는 겁니다.




그런데 소급해서 뒤로 돌아보면, 우리는 진즉에 아홉 살때 물에 빠져 죽어야 했고, 열 살때 길을 건너다가 차에 치어 죽었어야 했고, 열몇살 때 수학여행 가서 까불다가 떨어져서 죽어야 했고. 죽어야 했을 고비가 한두고비가 아닙니다. 이 말은 뭐냐? “너는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너는 진즉 죽었어도 괜찮은 사람이었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라. 만약에 우리가 점점 더 살아야 한다고 여긴다면, 시간관념이 있게 되고, 시간관념을 가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간의식은 항상 미래지향적이거든요.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고 인식하잖아요. 항상 눈만뜨면 ‘오늘 뭐하지?’ 점심때 되면 ‘오늘 저녁에 뭐 먹지?’ 맨날 미래를 내다 보잖아요.




미래를 대비해서 준비하잖아요. 이것은 뭐냐? 우리가 아직도 죽기 싫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시간관념이 있기 때문이죠. 제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이 시간관은 뭘 유발시킨다고 했습니까? 단절을 유발한다고 했지요. 단절을 유발하게 되면 항상 개관식으로 계획을 짭니다. 개관식으로.




9시-10시까지 일하고, 10-11까지 쉬고. 이런식으로 항상 중간을 끊어 버려요. 끊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후회를 하게 되고, 미래에 대해서는 비젼과 꿈을 꾸게 됩니다. 기대를 하게 돼요. 아까 제가 ‘예수 안’에서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단절이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예수 안’과 위배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뭡니까? ‘지금 당장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는 그 소망이 미래를 꿈꾸고 있는 나에게는 지금 나타납니까 안나타납니까? 안나타나지요! ‘주여! 제가 조금 더 살아가지고 우리 딸 시집가는 것 좀 보게 하옵소서.’ 이런 생각이 들지 지금 사도바울처럼 죽는것이 소원이라는 그런 생각이 안들잖아요. 안들지요.




저는 이 성경의 복음을 화산이라고 봅니다. 화산! 화산의 특징은 안에 마그마가 부글 부글 끓는다는 거예요. 저는 성경을 보면 안에 복음이 부글 부글 끓고 있어요. 이게 폭발하는 순간은 심판의 순간입니다. 지금 성경이 없는것이 아니에요. 복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부글 부글 끓고 있어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비전을 생각하고 더 오래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터져 버리면 자기가 쌓아놓은 모든 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돼죠. 여러분! 시내산 밑에 있는 이스라엘을 알죠? 그때 산이 전체가 움직이고 지진이 일어났잖아요. 화산처럼 불이 올랐잖아요. 그때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이 겁난다.” 이 생각외에 다른 아무 생각이 안났어요.




“나, 쌍커플 수술 했는데 잘 나왔어?” 이런 생각이 안 나온다니까요? “둘이 멱살을 잡고 누가 더 높으냐?” 이런 생각도 안났을 거예요. 왜냐하면 산이 흔들리니까. 하나님이 강림하는 순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강림하게 되면, ‘키가 몇센티미터 인가? 쌍커플 수술이 제대로 잘 되었느냐? 한달 수입이 얼마이며 이번달 전기세와 물세는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느냐?’




지금 그런 시답지 않은 것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주여 죽여 주옵소서!” 그 앞에서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다투는 것도 없을 것이고, 온천지가 부글 부글 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여지가 없다는 말이죠. 바로 이러한 점이 그 당시에는 시내산의 불꽃가운데서 나타났지만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죽었다는 것, 죽어서 죄인되어서 사라졌다는 것, 이 사라짐, 곧 복음의 사실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떨게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을 떨게 하는데 떠는 사람만 신자입니다. “그거 뭔데? 지금 바쁘니까 교회에나 가서 들읍시다. 지금 내가 바쁘거든!” 하면서 그 복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때,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지금 해야 할 중요한 것을 아직 안했어요.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다 이루었으니까 이것은 무엇으로 임한다고 했습니까? 이것은 단회성도 아니고 반복성도 아니고, 이제 십자가 안에다가 자기 백성을 끄집어 당겨 넣지요. 잡아당기는데, 십자가사건이후에 누가 오도록 되어 있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됩니다. 성령이 뭐냐 하는 것을 알려면 십자가와 성령의 관계를 알아야 비로소 성령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를 빼버리면 성령은 자기 개인 소유용이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알고 성령을 알게 되면, 성령은 나의 소유용이 아니고, 성령이 나를 매일같이 짖밟지요. 벌벌떨게 해서. “지금 시내산 밑이야. 지금 하나님밖에 안보이는 거야. 지금 하나님 외에 뵈는 게 없는거야”라고 그렇게 만들지요! 그게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죽을때 자기 죽는것도 개의치 않고 주님이 서 계신것이 보이지요.




십자가의 다이루심이 성령한테는 다 이루심으로 전가돼죠? 이 다 이루심은 뭐냐 하면, 날마다 우리를 늘 죽는 상태로 우리를 몰아 넣습니다. 이 관계가 어떤 관계냐 하는 것을 잠시 설명 드리고 이 긴긴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주무시는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만.




요한복음 16장을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6:7-13)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기 보면 8절에 보면 “보혜사가 와서 세상을 책망 한다”고 하지요? 그 이유는 13절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오지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이 오지 않으면 진리를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곧 ‘성령은 진리로 오기 때문에 진리로부터 책망을 당해야 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심판당해도 싸다.’ 그런 뜻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거든요. 말씀은 영으로 쓰여졌기에 사사로이 푸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풀어야 하는데 성령은 무슨 사건 이후에 온다고요? 십자가사건. 십자가사건에 무엇이 담겨 있다고요? ‘다 이루심.’ 다 이루심의 사건으로 오기 때문에 그 다 이루심의 사건이 어디를 파고 들어와요? 성경 한귀절 한귀절을 다 파고 들지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먹는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줄을 알라.”(딤전 6:8) 성경에 나옵니까 ? 안나옵니까? 나오지요. 성경에 “먹는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줄로 알라”는 이 말씀은 우리 힘으로 될까요? 안될까요? 안됩니다. 안되는데 언제는 된다? 예수님 안에 있을때. 우리는 될 때가 있어요. 시간적으로 보면 됐다 안됐다. 됐다. 안됐다 하죠.




이것은 뭡니까? 단절이죠. 이것을 반복성이라 하죠. 이래가지고는 안돼죠. 왜냐하면 될 때 예수님이 재림하면 천만 다행인데, 안되었을때 예수님이 구름타고 재림하시면 망치는 거잖아요. 이래가지고는 안돼죠? 맞잖아요. 우리 하루 일과도 말씀을 들을때는 ‘은혜, 은혜’ 하다가, 집안에서 애가 싸우니까 마구 패버리고 그 때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꼭 지옥갈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자꾸만 이렇게 시간적으로 생각하니까, “목사님! 그러면 성령을 감소시킬수도 있습니까? 성령이 메말랐을때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지옥갑니까?” 이렇게 맨날 묻는 거예요. 성령께서는 어떻게 한다?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런 쪽으로 이탈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것도 누구 몫이다? 바로 성령께서 임하게 되면 그런 우리쪽에서의 인간적인 모든 변덕조항까지도 막아주는 식이라는 말이죠.




어떤 식으로 막아주느냐? 말씀을 가지고 막아줘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오늘 월급이 왜 이렇게 적지?’라고 할때 이것은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육적인 요소지요? 왜냐하면 십자가는우리의 무엇을 부정한다? 우리의 육체를 부정하죠. 갈라디아서에 나오죠. 십자가는 늘 우리의 육체를 부정하죠. 정과 욕심을 어디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나오죠.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아이고! 이번달 월급이 이렇게 적어서 애들 공부를 어떻게 시키겠나’ 하는데 퍼뜩 무엇이 생각나느냐 하면 ‘먹는것과 입는 것이 있은즉 족한줄로 알라’ 할때, 성령을 안받은 사람 같으면 ‘그래! 먹는것 입는 것으로 족한줄로 알아야지.’ 이렇게 나오는데 성령을 받은 사람같으면 그 말씀 배후에 무엇이 들어 있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들어 있고 성령은 어느 사건에서 나온다? 십자가사건에서 나오고 십자가사건은 뭐였다? ‘다 이루었다’죠.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있은즉 족한줄로 알라’고 할때 ‘먹는것과 입는 것으로는 족할줄 모르는 나 때문에 주께서 나 대신 다 이루었구나’하는 것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파악하는 창구로써 그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있은즉 족한줄로 알라’는 성경말씀이 탁, 가슴에 떠오르지요.




“여보! 우리 도시로 가서 이득 보는 장사나 하자.”(약 4:13) 이것은 흔히 있을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 죄라는데 그렇다면 죄 아닌것은 뭡니까?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고 했을때에, 성령을 안받고 종교적인 폼만 잡는 사람은 ‘하나님! 제 힘으로 주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복주세요. 제가 사실은 이만한 고생을 할 사람이 아니고 고생을 안해도 되는 사람인데 지금 주님이 제 실정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제고생을 철회해주세요.” 이렇게 나오겠지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주의 뜻대로 뭘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시험을 치든지---” 이런 생각이 안들지요. 우리는.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말씀으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주여! 다 이루었는데 내가 쓸데없이 또 객기를 부렸군요. 이 부족한 놈. 성경말씀이 늘 나를 치고 찌르는 구나.’ 이걸 수시로 깨닫는 것은 지금 누구와 함께 동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성령이 오셨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왔습니까? 정말 주님께서 십자가 지셨습니까? 그리고 그 능력이 주님 앞에서 쏟아져 왔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믿을찐대 우리가 사는 것이 주님께서 인도하는 삶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고, 쓸데없는 걱정 근심이라든지, 쓸데없는 자기 것으로 보완하려들지 말고,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수 있는 그런 자유를 너끈히 누릴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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