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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1 11:08:24 조회 : 4115         
광주강의(07. 4. 27) 녹취록 2번 이름 : 서경수(IP:122.36.190.11)
 

광주 강의(07. 4. 27) 25-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요한1서를 하면서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들지요. 뭐가 빠졌냐 하면 율법에 대해서 요한1서를 하면서 본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제가 왜 이것을 거론하는가 하면, 사람은 법을 만들어요. 그 만들어진 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사람은 자꾸 법을 만들고 그 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법을 지켜서. 내가 만들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법이 있고, 자기 규칙이죠. 내가 스스로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죠. 자기 맹세죠. 그렇게 해 놓고 그 규칙을 지켜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가 법을 만들고, 법을 지키고 할 때는 무엇을 참고로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참고로 합니다. 율법, 규례 이런 것을 참고로 하는데 자기가 도저히 못 지키는 것은 빼버리고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들을 모아서 법을 만듭니다.




“술 취하지 말라.”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성령에 취하라.’고 하지요. 취하는 상태가 어떤 상태입니까? 비틀거리는 상태가 취하는 상태입니다. 자아 상실이죠. 자기를 상실한 상태가 취한 상태지요. 술을 먹으면 자기가 상실됩니다. 술을 마셔봐야 알 텐데 안 마셔봐서 모르겠지요? 성령에 취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자기를 상실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1서에서 왜 법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가 하면, 이 법이라는 것을 넘어선 사람에게는, 넘어섰다는 증거가 세 가지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5장 6절에 보면 “--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겼다’ 이 말은, 이제는 법이라는 심판에 해당사항이 없음, 법과는 다른 영역에 속합니다. 옛날에 놀던 마당은 법이 출렁이는 마당이라면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서 법이 없는 마당입니다. 법이 없는 마당에는 뭐가 있습니까? 흔히 사랑이 있다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피와 물과 성령에게서 헤엄치는 마당입니다.




이전에는 인간이 법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지요. 그런데 피와 물과 성령의 마당은 누가 제공하는 거예요? 우리가 제공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것을 주신 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하나님이 깔아놓은 마당에 우리가 지금 노는 거예요. 이것을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으로 보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볼 때 본인도 마찬가지고, 본인도 지금 생명을 느끼고 산다는 말이 뭐냐 하면, 법이 있는 곳에서 질퍽질퍽 놓는 것이 아니고 물과 피와 성령이 있는 곳에 질퍽질퍽 노는 거예요.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곧 발행될 [질문과 답변] 책에 이런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불신자를 그렇게 미워하십니까?” 라는 질문이 있어요. 그 질문들이 보면 평소에 우리가 질문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나와 있어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는데 전부 용서하시고 해야지 왜 불신자에 대해서는 그렇게, 질문자가 짜증내면서 이야기하기를 “왜 크리스챤이 비 크리스챤하고 안 놀고 왜 그러냐!” 말이지요. 




이 사람이 뭘 오해하고 있는가 하면, ‘사랑의 하나님’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같이 보는 겁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곧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는 ‘좋으신 하나님’은 없어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사랑’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사랑이니까 ‘좋으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란 것을 하기 위해서 일단 인간을 공평하게 만들어요. 그 공평하게 만드는 것이 뭐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을 율법을 줘서 전부 다 죄인 되게 하므로 말미암아 아무도 상 받을 인간이 없어요. 아주 공평해요.




운전면허 시험 쳐서 남들은 합격했는데 자기가 떨어지면 화가 나지요. 몽땅 다 떨어지면 아주 시원합니다. 공평하게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떨어지면. 




주님께서는 의사든 박사든 예외 없이 몽땅 다 떨어지게 해 놓고, 그 다음에 창세전에 택한 자에게만 사랑을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아니에요.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죠. 아무 한 것도 없이, 왜냐하면 우리는 해도 불합격이기 때문에. 전도하고 십일조 하고 뭘 해도 불합격이기 때문에 안 돼요. 안 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 받은 겁니다.




우리가 뭘 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사랑 때문에 구원 받은 거예요. 그 사랑이 질퍽질퍽 피와 물과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되었으니까 증거 하신 이가 셋이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증거 되었으니까 이제 법이 없는 곳으로 간단 말이지요.




법이 없다는 말은 결국 무슨 말이냐, 죄 없는 곳에서 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에서는 법은 이야기 안 해요. 그러면 무슨 이야기합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뭐가 없다? 죄가 없다고 하지요. 이번 5월에 발행될 책 제목을 저는 [정죄함이 없나니] 이렇게 정해 놓았는데 대장간 사장님이 제목을 바꿨어요. 앞에 두 자를 더 넣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 아주 흡족해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 죄가 없어요. 결코 죄가 없다는 말은, 이게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겁니다. 제가 지금 상당히 중요한 말을 했어요. ‘나 이런 저런 죄 지었다.’ 무시해 버려요. 욥기에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죄를 지은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욥기 35장 6절입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아멘! 정말 아멘 아닙니까.




구원파 박옥수가 이런데서 사기를 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다시는 회개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잖아요. 사도 요한은 ‘내가 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없다’는 거예요. 나를 있는 존재로 간주하지 않는다니까. ‘내가 죄 없다’고 되어 버리면 여전히 자기가 자기의 무거운 짐이 됩니다. 죄 없이 행동하려고하니까 얼마나 짐이 되겠어요? 죄 없는 줄 아니까 죄 없는 행동을 해야 되니까 힘들지요.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완벽하게 행동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죄 지어놓고 죄 안 지었다고 우기는 것.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보기로 작심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어떤 행동도 그것을 무시하기로 했다니까요. 우리가 행동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왜 행동을 안 해요. 오늘도 밥 먹고 과일 먹고 다 하지요.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왜 없어져요. 내가 연기입니까?




내가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묻지를 않지요. 왜? 물으려면 법이 있어야 되는데 노는 동네가 법 동네가 아니고 법이 없는 피와 물과 성령의 동네이기 때문에, 법이 없으면 죄를 물을 수가 없고,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말은 무슨 행동을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욥기에, 기분 좋다. 다시 한 번 봅시다. 35장 6절 여러분 잊지 마세요.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가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관계가 없다는 말이지요. 엘리후의 이 이야기가 하나님께 인정받아요. ‘그 말이 내 말이야’ 이런 뜻이에요. 왜 인간들아 평생 동안 교회 다니면서 이것을 몰랐느냐는 것이지요.




가르쳐 줘야 알지. ‘죄 지었으면 헌금 좀 더 해라. 그리고 봉사 더 열심히 해야 죄가 상쇄된다.’ 이 따위 소리나 하지 언제 이런 말씀을 가르쳤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지만 누가 무시하지 않는가? 내가 나를 무시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겁니다. 내가 나를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품행이 있어야 하고, 체면 유지하고 자존심 챙겨야 되고, 집안에 가훈이 있고---




이번에 나올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책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남자로 태어나서 얼마나 힘든지, 좋은 아빠 되어야 하고, 좋은 남편 되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좋은 집사 되어야 하고 이런 세 가지를 다 하려고 하니까 미칠 지경이에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하는 척’이라도 하려는데 그 ~척 도 힘들어요. 신자도 아니면서 신자인 척 해야 되고, 자녀들이 뭘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고함만 치고 아빠 권위만 세우려하고, 결혼해서 아내 고생만 시키면서 남자라고 대우는 받고 싶고--




그래서 오늘 아침 어떤 분을 만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예수 믿고 난 뒤에 다른 것 생각하지 마시고 꼭 세 가지를 하세요. 나쁜 남편, 나쁜 아빠, 그리고 나쁜 신자 되시기 바랍니다.




썩은 창자를 내 놓았을 때 내 몸무게는 줄어들고 속이 시원하지요. 사람이 배설할 때의 기쁨이 채울 때보다 더 기뻐요. 뭔가 빠져나갈 때 주께서 빠져나가게 했단 말이지요. 썩은 창자를 꺼내놓고 저것은 내 것이었다고 감상하란 말이지요.




그리니까 나쁜 남자요, 나쁜 아빠고 나쁜 신자고 그런 거예요. 제 속에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는데 꺼내보니까 알게 되었어요. 평생을 통해 자꾸 꺼내야 돼요.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내 놓게 하시지요. 그러면 나는 그것을 보면서 가볍지요. 왜? ‘저런 암 덩어리가 내 속에 들어 있었구나.’ 하고 그것이 빠져나갔다는 기쁨.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서는 누릴 수 없는 기쁨입니다.




지금 이미 뺏습니다. 하는 것이 요한 1서 강의입니다. 이미 너는 빠졌어. 상한 이빨 빠졌단 말이야. 그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는 법에 있지 않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는 겁니다.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미 이 영역에, 죄 없는 곳에 들어온 것을 우리 힘으로 지키라고 하면 못 지킵니다. 우리는 매일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결코 나는 나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만날 마귀한테 공격당해요. “너 어제 실수했지? 손님 만나서 네가 한 그 태도가 왜 그래.” 내가 나에 대해 지적하는 거예요. “지난 주 설교 그 따위로 해 놓고 그래도 네가 목사야!” 이렇게 자기가 자기한테 계속 지적을 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나를 무시 안 하기 때문에 나에게 벌어지는 모든 것이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완벽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모든 것이 나에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나를 끄집어내 놓고 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 누굽니까?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내가 죄인인 것을 보고 있다는 그 자체가 나는 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내 죄 끄집어내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겁니다.




루터는 이것을 명쾌하게 설명을 못했습니다.


다시 설명해 드릴까요? 내 속에 이런 죄가 있었던 것을 주님께서 창자 끄집어내듯이 꺼내서 내 앞에 평생 동안 전시해서, 나는 현재 죄가 없는 상태에서 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꺼낸 것을 보고 스스로 나를 무시 못하니까 완벽하지 못한 나에 대해서 스스로 자책하는 죄인이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뭘 해도 죄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는 그 사람이 바로 이미 죄가 없는 사람이고, 주께서 지켜주는 사람이에요. 만약 주께서 안 지키면 꺼낸 것을 도로 가지고 들어갑니다. ‘나는 죄인 되기 싫어. 보다 완벽하고 싶어. 예수 믿고 난 후 더 착한 남편, 완벽한 신자, 완전한 아빠가 되고 싶어.’ 이런 짓 하고 있어요.




요한1서에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네 안에 생명이 있는데 왜 네가 엉뚱한데 관심을 쏟고 있는가?’ 그 이야기에요. 처음에 요한1서 1장에 뭡니까? ‘우리가 손으로 만진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이 생명이 네 안에 있는데 너는 왜 자꾸 너 자신을 법으로 몰아가느냔 말이지요. 너는 법 밖에 있는데 왜 법과 너 자신을 연관시키냐 말이지요. 너는 법이 아니고 사랑 안에 있으니까,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온전한 사랑이 이미 심판에서 벗어나게 했는데 왜 너는 자꾸 법을 생각하느냐? 법을 생각한다는 것은 네가 스스로 너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너 자신의 완벽함을 원하고 법에 비춰봐야 자신의 완벽함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자꾸 법에 가까이 가려고 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법대로 잘 되면 ‘하나님! 나 착하지요?’ 하고 법대로 못 되면 ‘주여, 죽여주옵소서. 나는 나쁜 놈입니다.’ 하면서 혼자 좋았다가 혼자 좌절하고 그런단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을 보고 “놀고 있네.”하고 무시해 버려요. 왜? 고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미 빼내 버렸는데 새삼스럽게 뭘 고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미 피를 흘렸으면 그것으로 마감된 것이지 새삼스럽게 할 일이 없어요. 너는 이미 나와 함께 죽고 네 안에 내가 산다는 것으로 끝난 거예요. 네가 밥을 먹어도 뭘 해도 너 스스로 생각하면 완벽하지 못해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밥 먹으면서도 줄줄 흘립니다. 그리고 자꾸 잊어버려요. 나중에는 자기 집도 못 찾아오고 이러는데.




이런 때가 오면 자기가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아이고 이 인간아, 예수 믿는 목사가 제 집도 못 찾아와서 파출소에 가 있고 이게 무슨 목사라고’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어요? ‘네가 온전하려고 하는 것 그것이 법을 좋아하는 것이야!’ 법을 자꾸 신경 쓰는 그것이 문제란 말이죠. 주님께서 이미 피로 일괄적으로 용서하셨습니다. 하나하나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여러분, 어린 자식들 목욕시킬 때 어떻게 합니까? 큰 다라이에 물 채우고 아이를 들어가게 하지요. 아이가 못 씻는다고 때립니까? 아니지요. 아이들 물에서 장난만 칩니다. 그래도 엄마가 다 씻어줍니다. 얘는 장난치고 엄마는 씻기고 나중에는 수건으로 닦아주면 목욕 끝나는 거예요. 지금 이것이 90년 갑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해요. 이 사업 벌였다가 저 사업 벌였다가 농사짓다가 빵집 했다가 제 마음대로 해요. 물장구치면서 노는 거예요.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또 실수했다. 그 때 그런 일만 없었으면 성공했을 텐데’ 하면서 온갖 상상을 다 해요. 잘 논다. 물장구치고 잘 논다. 뭘 해도 실수고, 안 해도 실수고 이런 것 일괄적으로 몽땅 용서받습니다. 결국은 피로 구원 받은 것을 알게 하십니다. 아,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알게 됩니다.




이제 철학적으로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 봅시다. 사람은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뭘 만드는가 하면, 체계를 만듭니다. 인생관을 따로 만들어요. 그런데 인생관은 만들어 놓으면, 만들어 놓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햄버그 포장하지요? 포장해서 주잖아요. 그런데 왜 귤은 안 가져갑니까? 하면 다시 포장 뜯고 귤 넣지요. 이처럼 우리는 오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내일 되면 외부의 사건이 또 벌어집니다. 그러면 이것까지 또 포함시키지요. 그러면 포장지를 또 뜯어야 돼요. 이 전체가 결국 뭐냐 하면, 나 자신을 허상의 나로, 지금 내가 누군지 모르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게 만들고 혼란에 빠뜨리죠. 나중에는 자포자기해서 ‘예라 모르겠다. 인생은 한 판의 브루스지 뭐.’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아요? ‘인생이 뭐 별 것이냐? 춤 추구 싶으면 추는 거지.’ 이런 뜻이거든요. 다음 일은 몰라. 지금 춤추고 싶으니 춤추자. 그런 뜻이에요.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희미한 안개처럼. 황사처럼. 황사가 오면 앞이 안 보이죠. 현재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내일을 몰라요. 그냥 오늘 부닥치는 문제 해결하고 내일 되면 또 해결하면 되겠지. 내가 어디로 이끌려 가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요. 그냥 한 판의 브루스야.




나이트클럽이나 그런 곳에 가보면(저는 직접 가보지는 못했고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보면) 그야말로 내일을 모르고 뛰고 춤추고 난리에요.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성경에도 나오지요. ‘먹고, 마시자’ 인생이 한 판 브루스야.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누구냐? 몰라요.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구 목사님을 만나서(병 문안) 이야기를 하는데, 구 목사님이 돈가스 식당을 하면서 끊임없이 허무를 느낀다는 거예요. 내가 도대체, 인생이 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기 때문에 이런 생각하지 신자 아니면 장사 잘해서 돈 벌면 됐지 내가 뭐냐를 묻지를 않지요. 그래서 깊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답니다. 도대체 돈가스가 무슨 의미냐는 거지요. 인생 꼭 이런 식으로 살아야 되는가 하는 허무가 생겼답니다.




제가 두 시간 이야기를 했는데, 목사님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복음이 더 중요하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복음이지,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은 목사님을 사용하려고 하는데 복음보다 내가 더 중요해버리면 복음을 버릴 수가 있지요. 자기가 제일 중요하니까. 세상을 자기 위주로 살림을 차리면 곤란해요.




최근에 남진이 부른 노래 제목이 뭡니까? [둥지]. 모든 인생은 자기 둥지 틀기입니다. 끝입니다.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이것은 전부 핑계고 결국은 내 둥지, 내 새끼 살릴 내 둥지. 둥지를 트는 거예요. 오로지 자기 둥지 있으면 끝나요. 열심히 일하는 것도 지 새끼 먹일 둥지를 틀기 위해서, 얘들 공부하는 것도 자기 둥지를 만들기 위해서. 그 뿐이에요. 




둥지를 만들면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 복수심이 생겨요. 내 둥지를 어느 놈이 쳐들어오나 싶어서. 복수심이 생기면 자기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항상 자기를 피해자로 보지요. 사실은 가해자인데 피해자로 봐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이 나에게 피해를 줬고, 부모 잘못 만나서 그렇고, 마누라 잘못 만나서 그렇고, 자식 잘못 만나서 그렇고, 목사 잘못 만나서 그렇고 전부 나는 피해자에요. 피해자니까 뭐가 생겨요? 복수심만 증가하지요.




인생이라는 것은 둥지 틀긴데 그 둥지가 그냥 못 틀어요. 왜냐하면 남이 밀어요. 다른 둥지가 와서 밀리면 남의 둥지를 내가 헐어버려요. 왜 그랬냐고 하면 저 사람이 밀었다는 거예요.




사업이든 경제든 혼자 가만히 자존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항상 저쪽에서 파도가 밀려와요. 못 버팁니다. 저쪽에서 밀면 자기도 옆 사람을 밀어야 해요. 인생이란 것은 둥지 틀긴데 둥지를 틀기 위해서 밀려오면 방어하다가 밀리면 자기 둥지를 지키기 위해서 남을 밀어야 될 가해자로, 평생 가해자로 살 수밖에 없어요. 




부모가 나중에 늙으면 누구한테 피해를 줍니까? 자식한테 압력을 가합니다. “내가 너를 키웠는데 전화도 자주 안 하고” 이럽니다. 자기 몸이 건강할 때는 “얘야 김치 담가줄까? 뭐 해 줄까?” 하다가, 몸이 아프고 힘들면 자주 안 찾아온다고 화를 냅니다. 자기 둥지 틀기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이게 전부 다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 몰라. 그냥 둥지 만들기에 몰두할 뿐 ‘내가 누군가?’는 몰라요. 그냥 만들 뿐입니다. 새한테 물어보세요. “너 누구냐?” 하면 몰라요. 새의 특징은 그냥 둥지만 만들지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하고 웃었는데, “새한테 수갑 채우는 법이 있습니까?” 새가 남의 곡식 훔쳐 먹었다고 발목에 수갑 채워보세요. 말 듣는지. 안 듣습니다. 수갑은 누구한테 채워요? 인간에게 채우잖아요. 왜? 인간은 법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런데 참새는 수갑이 필요 없어요. 새 생명 얻은 성도한테는 주께서 수갑을 채우지 않습니다. 왜? 뭘 해도 죄기 때문에. 뭘 해도 둥지 틀기고, 뭘 해도 평생 남에게 복수하며 살기 때문에 수갑을 안 채웁니다. 우리 행동을 아예 무시합니다. 욥기 말씀처럼 ‘내가 죄 지은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으며’ 관계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갉으려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용서 안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용서하기로 작정했으면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갉지를 않습니다. 믿습니까? 이미 우리가 하나님 아들 됐으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던 갉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하나님께서 책임지기 때문에 범죄치 않지요. 범죄를 지적할 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책임 추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란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까 목욕 이야기 했는데, 얘들이 목욕할 때 물이 막 튀지요. 심지어는 목욕하면서도 매직으로 얼굴에 막 그리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까지나 목욕통 안이잖아요. 목욕통, 주님의 사랑 통 안이잖아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목욕통 안에서 땟물이 나오고 해도 땟물 나온다고 더러워서 목욕 못 시킨다고 하면 목욕 왜 합니까? 목욕이란 것은 더럽다고 하는 겁니다. 깨끗하면 목욕할 것이 없잖아요.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더럽기 때문에 목욕 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정적 누가 자기를 더럽게 안 봅니까? 자기가 더럽게 안 봐요. 무엇 때문에? 법에 비춰볼 때 전적으로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교도소 가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내가 바람은 안 피웠다는 거예요.




착한 부모님 나이 들어보세요. 마음 씀이 그렇게 나쁠 수가 없어요. 사람이 건강할 때 남을 위해 마음을 쓰지 몸 약하고 정신이 왔다 갔다 하면 그렇게 빗자루 탄 악녀가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몸 조절이 안 되니까 불편하고 그 불편한 것만큼 성질을 부립니다.




마귀가 이 말을 믿지를 않아요. ‘사람이 왜 죄를 안 지어’하고 믿지를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책임져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피와 물과 성령이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이 증거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자, 여기서 봅시다. 범죄치 아니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죄가 뭐냐, 이것을 한 번 규명해 봅시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적으면서 해 봅시다.


제가 지금 묻는 것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할 때 거기에서 무슨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인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 하지요. 자,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볼 때 사람이 범죄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범죄 안 하고 싶어도 악한 자가 그 사람을 다루면 범죄하게 되어 있는 것이 피조물의 입장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의 놀라운 관점입니다.




보통은 내가 죄를 지으면 죄를 짓는 거잖아요. 사도 요한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있으면 그것은 죄 안 짓고 싶어도 죄 짓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자기 하수인으로 만들면 마귀의 하수인이 된 자는 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사도 요한이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율법이라는 것을 다 완벽하게, 사랑이란 계명을 다 알고부터는 죄의 개념이 확산이 됩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십계명 등 이런 죄 개념이 아니고, 모든 것에 하나님이 관여하시는데 이렇게 넓게 보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평소에 집안에 가만있어도 결국은 죄 짓는데, 지금까지는 본인이 죄 짓고 싶어서 지을 때만 죄 짓는다고 생각했는데,  사도 요한은 그것이 아니고 마귀가 인간을 다룰 때 인간은 거기에 대항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죄 개념을 설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말이 뭡니까? “저를 지키시매”지요? 마귀가 인간을 다루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마귀가 인간을 다루는 것을 누가 다루지 못하게 더 강한 힘으로 역사합니까? 하나님이 지키시매 마귀가 더 이상 죄를 유발시키는 쪽으로 몰고 가지 않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결국 내뱉는 것이 뭡니까? ‘저는 주님 없이는 못합니다.’ 이것뿐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다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지 주님이 없으면 ‘역시 나는 완벽해. 이제는 주님이 저를 지킬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런 소리 나오지 ‘역시 주님이 지켜야 돼.’ 라는 고백이 안 나옵니다.




결국은 어떤 죄를 지어도 마지막에는 ‘주님 덕분에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된다면 그것은 전에 것이 죄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고, 악한 자가 관여했느냐 안 했느냐로 따져서 죄냐 죄 아니냐로 보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치 않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배후에 있는 양대 세력을 들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인간은 빼놓고 인간을 다루었던 두 세력으로 죄를 이야기해야 본문이 해석된다 이 말입니다.




‘범죄치 아니한다.’ 그 사람이 다시 지옥으로 가는 그런 죄는 없다 이 말입니다. 왜냐? 또 회개하고 그 죄를 용서하시니까. 17절에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이 말을 왜 했겠어요? 결국 성도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짓되 사망에 이르는 죄는 절대로 주께서 지키시매 짓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악마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주께서 방치하지 않으신다.’ 그런 뜻이에요. 이제 풀렸잖아요.




개인을 뺀다는 것이 초점이죠. 창세기에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 둘 사이의 싸움에 의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우리한테 우리 운명을 떠맡기지 않습니다. 야곱은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갈 때 너 운명은 네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저와 여러분의 운명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는 사람한테는 누가 책임져야 돼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되는 거예요.




자기가 책임지면 상상력이 동원되지요. 하지만 그 상상력은 나이 많으면 자식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줍니다. 젊은 때 그렇게 사랑이 많던 분이 왜 저렇게 변했나? 이제는 부모님이라고도 안 합니다. ‘저 노인네 와 저카노? 왕년에는 그렇게 생각이 바르고 행동도 그렇게 절도 있던 분이 왜 저러나?’ 하는데, 사람은 자기 몸의 피곤을 이길 수가 없어요. 인간이 자기 신체를 정신력으로 못 이깁니다. 중고가 새 차 되려고 하는 자체가 건방진 것이지, 중고면 중고로 놀아야지 중고가 새 차처럼 해서 ‘주여, 완벽합니다. 죄 안 짓습니다.’ 우리 신체 자체가 죄 지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아무리 죄 안 짓고 싶어도 신체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결혼 후 남편들이 아내에게 제일 먼저 실망하는 때가 함부로 방귀를 낄 때입니다. 연애 시절에는 함부로 방귀 안 끼더니 결혼하고는 마음 놓고 붕붕 껴요. 




이미 자기 약점, 허점 다 드러난 입장에서 서로 약점을 용인한다는 약속 하에 부부가 되었는데 만약에 그 남자나 여자가 다른 이성을 좋아하면 졸지에 자기 허점은 노출된 채 차인 것이 되고 자기는 못난 자가 되지요. 이것을 참을 수 없는 거예요. 남편을 사랑해서 붙드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게 알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을 다른 여자한테 알렸다는 사실이 총 있으면 총으로 쏘고, 프라이팬 있으면 던지고 싶지요.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것마저도 하나님이 죄인 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사소한 일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야, 말 정말 과격하다. 이렇게 해서 목회 되겠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 하면 목회 못하지 싶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그 다음에 ‘악한 자들은 악한 자에게 속했다.’ 이렇게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거”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많다는 말입니까, 소수라는 말입니까? 극히 소수라는 말입니다.




극히 적은 수인데, 적은 수 되었음을 도리어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요. 왜 서울대학교 나왔다는 것이 그렇게 영광스럽습니까? 지나 개나 다 들어가면 서울대학이 아니지요. 오늘 제가 만난 분이 회계사입니다. 20년 전에 회계사를 50명 뽑았어요. 지금은 1,000명 뽑습니다. 옛날 50명 뽑을 때 회계사 날렸습니다. 큰 기업들은 법적으로 회계사에게 장부를 맡겨야 해요. 그래서 회계사는 정말 귀하신 몸입니다. 요즘은 너무 수가 많아서 일거리를 따내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옛날 회계사, 변호사, 검사 이런 사람들에게 젊어도 ‘영감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귀한지. 우리(하나님께 속한)가 여기에 해당 돼요. 복음이 우리보다 더 중요해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속까지 파고 들어와서 ‘너는 내꺼야.’라고 잡았으면 우리는 정말 온 세상을 줘도 주님과 안 바꿉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줘도 안 바꾼다는 그러한 여유만만함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의 상상력에서 나옵니다. 상상력은 자아에서 나옵니다. 자아가 의식되니까 상상이 되고, 상상한 것이 그대로 안 될까봐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묻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과 상관하지 우리와는 관계 안 합니다. 예수님이 지키시매 우리가 구원 받지 내 힘으로 예수님을 붙잡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20절에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세상 안에는 뭐가 없다? 세상 안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돈 주고 영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영생 없는 인간을 우리가 왜 무서워하고 그 앞에 기가 죽습니까?




노무현씨가 보면 영생이 없어요. 그러면 그 앞에 기 죽을 필요 없지요. 영생이 없으니까. 악한 자가 다루지 주님이 다루지는 않잖아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다루잖아요. 주님이 지키시잖아요. 세상을 부러워 할 필요 없어요. 부러워 안 한다는 것이 그들을 미워하고 만나지도 않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더욱더 친밀하게 지낼 수 있게 되지요. 상대를 아니까.




바둑을 두는데 고수가 되면, 하급자하고 바둑을 안 두는 것이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두지요. 왜? 상대가 하수이기 때문에 갖고 놀 수 있지요. 따라서 하급자 하고 안 논다고 할 필요 없어요.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반대로 하급자는 상급자를 만나면 두렵지만 상급자는 두렵지 않습니다. ‘몇 급입니까? 석점 놓으세요. 뭐 막 둬도 괜찮고’ 이렇게 아주 편하게 합니다. 우리도 인생을 이처럼 편하게 살아갑시다. 사도 요한이 뭐 겁나는 것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스데반 집사는 자기 목숨도 사소한 것으로 봤거든요. 얼마나 세상에 대해서 당당했으면 자기 목숨이 돌에 맞아 죽는 것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21절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 멀리하라”


생명이 없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믿어달라는 말이 아니고 ‘믿는 자 누구세요?’ 하면서 찾는 과정. 이것을 편지로 찾는데 이것이 요한1서입니다. 편지로써 ‘하나님 백성 혹시 여기 계신가요?’ 하며 검문하듯이 바른 복음을 전해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작품이지요.




끝으로 한 가지 이것 구분하시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차이점은, 사람의 일은 제조합니다. 재료를 가지고 제조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일은 누가 제조한 것이 아니고 ‘짠짜짠 ~’ 하고 등장합니다. 홀연히 우리 앞에 등장하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을 볼 때 그렇게 봅니다. 등장. 주께서 만들어서 제 앞에 등장시킨 거예요. 저는 황송함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등장시켜야지, 사람들이 스스로 제조하는 것 이것으로는 안 됩니다. 주께서 다 만들어서 ‘자, 커튼 열고 짠 ~’하고 등장하는 거지요. 하나님 백성을 주님이 만들어서 ‘짠’ 하고 등장하는 것이지, 인간들이 교회에서 사람 제조하는 것 아닙니다. 백날 제조해도 결국은 다 떠납니다. 복음 거부하고 떠나버립니다. 떠난다고 섭섭한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은 처음부터 아니었구나.’ 생각하지면 되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주께서 직접 영생 주시고, 창세전에 예정 되어서 구원 받기로 작정  되었음을 통보해주는 분들이 있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사람으로는 안 되지만 주께서는 되게 하시는 일이 우리 앞에 등장할 때 우리는 모든 찬미와 영광을 주님의 공적에만 돌리고 우리는 그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형제로서 평생을 살면서 이 복음을 널리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7. 5. 11. 10:2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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