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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8 09:01:07 조회 : 6688         
이어지는 글 이름 : 오용익(IP:59.3.201.208)

< 이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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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정말 이거 믿음이 있는 것인지, 완전히 자포자기 하는 것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됩니다만,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국가를 보위해야 할 책임자가 말을 너무 함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적들이 연합군을 형성해서 막강한 대군이 밀려 왔는데 기껏 한다는 소리가 - 물론 여호사밧이 한 것도 있고 제사장이 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다 동의 한 거죠 - “이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 속했기에 우리가 할 게 없다”는 겁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서 모세에게 반항을 했습니다. 적들이 뒤에서 따라 오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할때 출애굽기 14장 14절에 그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라”입니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쉿! 한글자로 쉿! “가만히 있거라” “가만히 있거라”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애들 까부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애들이 가만히 있을 때는 병이 들었든지, 잠이 오고 있든지 할 경우입니다. 뭔가는 컨디션이 안 좋을때 가만히 있어요. 보통은 까불어야 건강한 아이거든요.




그 애가 장성해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니까 오죽 까붑니까? 어떤 부인은 남편보고 하는 말이 “당신 교사 생활을 오래 했으니 이제 그만 퇴직금 챙기고 연금을 받아서 모세처럼 가만히(조용히) 있거라”고 합니다. 참 쉽게 보이지요.




그런데 가만히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에요. 돈 좀 있으면 주식투자 해서 말아먹고, 로또사고, 땅 사서 사기 당하기도 하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을 수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가만히 있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 것도 오랫동안 연습하면 그것조차 능숙해집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백수들이죠. 대단한 노하우가 있어요. 백수십계명. 백수노하우. 백수 일기쓰기. 그런데 이것을 하루아침에 습득할 수가 없어요. 오랫동안 놀아봐야 노는 데서 오는 고매한 철학을 느낄수가 있지요.




그런데 막 직장을 그만 두고는 가만히 노는 것이 힘듭니다. 일을 벌이고 결국 망해버리는 식으로 갑니다. 항상 망하고 난 뒤에 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깨닫곤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말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가만히 좀 있어도” 그 말 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이방의 일반종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설쳐대는 것이 얼마나 육적인 해석, 성경을 육적으로 해석했기에 설쳐대느냐 이말 이죠.




가만히 있어도 해주는데 왜 설쳐대느냐 이 말이죠. 만일 가만히 있지 않고 구원받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식당에서 흰옷 입은 아주머니들이 밥을 알아서 배식하고 있는데,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배식하는 곳으로 들어가서 단무지 마구 퍼 넣고, 이것저것 끄집어내서 더 얹고, 자기가 막 설쳐댈 때 그 아주머니가 주걱 가지고 패면서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퍼줄게 주는 밥도 못 먹나 주는 밥도”




우리는 자기가 구원받아야 되요. 자기가. 헌금해야 되고, 십일조도 해야 되고, 전도해야 되고, 예배참석 해야 되고, Q.T해야 되고. 자기가 구원받아야 되요.




그것이 얼마나 성경 전체를 육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까? 육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걱으로 한대 맞으면 잠시 잠잠 하다가, 다시 또 ‘불안하다. 오늘밤 죽으면 지옥에 갈까 싶은데’ 라고 자기가 지레 겁을 집어 먹습니다.




<사도가 늘 당부한것 - 십자가가 있는데 왠 걱정?>




그래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늘 부탁한 것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있는데 뭐 그렇게 요동하고 안절부절 하고 그러나, 십자가가 있는데!”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이미 십자가가 있기에 자기는 전혀 요동할 필요가 없고 전쟁은 이미 끝난 상태라는 겁니다.




종말이 아니라 누가와도 그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러한 사도바울과 동일한 해석을 하는 사람만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 외에는 아니에요. 갑자기 조용해져 버렸네. 아멘 소리도 안 들리고. 성령 받은 사람이 아무도 없나 본데.




여호와 전쟁에 대해서 조금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와전쟁은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그전쟁의 주체자인 용사가 여호와 주의 이름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특징이란 그 공로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는 주의 이름으로 벌리는 전쟁은 없어요. 인간이 나름대로 어떤 공로를 자기도 가질 수 있는 주의 전쟁은 성경에는 한군데도 없습니다. 모든 공로가 오직 주의 이름으로 돌아가는 경우에만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벌인 전쟁이에요.




시편 8편에 보면 전쟁 승리로 인하여 찬송을 부른 가사가 나와 있습니다. 온 땅에 주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는데 젖먹이와 어린아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을 높아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8:1,2)


“여호와 우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저쪽에는 강한 장정들이 나올때, 주님쪽에서는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아말렉과 전쟁할때에, 그 밑에서 여호수아가 칼질하는 것은 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헛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상 전쟁이 결정 나기는 산위에 있는 모세의 지팡이로서, 모세가 지팡이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그것에 전쟁 승리가 달려 있었던 거예요. 지팡이를 들었다 하는 것은 지금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고 너희들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걸 육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주의 종이다 하면서 지팡이를 들고 산위에 올라간다.’는 이런 짓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흉내 내는 것인데 부흥사들이 그걸 흉내 낸다고 무엇을 합니까?




아론과 훌의 이야기를 하면서 장로가 옆에서 목사를 받쳐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부흥회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장로가 두 명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되죠. 왜냐하면 양쪽으로 받쳐 줘야 하니까요.




장로가 한명 뿐인 교회는 이것이 잘 안되잖아요. 오른쪽과 왼쪽에서 같이 받쳐 줄때 목사의 지팡이가 안내려오듯이 장로가 되었으면 목사를 받쳐줘야 교회가 부흥되는데 올라가는 지팡이까지 장로가 끌어 내리면 교회가 부흥될 리가 있냐고 합니다. 교회가 헌금을 내지 않는 것은 장로들 책임이라고 할 때 무식한 교인들은 그 말도 주의 종의 말 인양 귀담아 듣습니다.




<붙이시는 전쟁의 주체자 - 주의 이름, 철썩 파스를 붙이듯>




지금의 전쟁의 주체자는 모세가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요.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일을 처리하시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벌인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어떤 공로도 돌아가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이 진척됩니다.




그것을 “붙이시매”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근육통)파스를 붙이는 식이죠. 그러니까 파스에 해당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파스를 붙임을 당하는 그 거대한 몸체는 이방나라예요. 주님께서 파스를 그 덩치가 크고 군사력이 강대한 이방나라에 붙이려면 그 파스를 붙이기 전까지의 파스는 얼마나 겁을 집어먹겠습니까?




이스라엘 : 주여! 저것이 덩치가 나보다 큽니다. 


여호와 : 너는 파스야 그냥 붙이기만 하면 된다.


이스라엘 : 아닙니다. 저 덩치에 우리가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붙였더니만 그 덩치큰놈이 파스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고, 파스가 덩치큰놈을 끌고 가니 그 파스 된 입장에서는 모든 영광을 주께서 하셨다는 식으로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한두 번 승리하고 난 뒤에는 그 파스가 자기 파스를 자랑한다고 “내 파스 아니면 큰일 날 뻔했다”고 나오면 주께서 그 파스를 떼어버리고 다른 것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파스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붙이는 그 순간에 “나는 죽어도 마땅하고 모든 일은 주께서 하십니다.”하는 고백을 하도록 붙여 주는 겁니다.




<기생 라합이 칼빈보다 더 위대한 신학자일수 있는 까닭은?>




대표적인 예가 여리고성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리고성 무너질 때 무너지는 이유? 일단 소리를 질렀으니까 음파가 모여져서 갑자기 공명 상태를 일으키면서 무너졌다는 것은 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지어낸 이야기인데, 노래는 그냥 부르라고 부른 것이고 노래를 불렀든지 뺑뺑이를 돌았든지 어떤 일을 했든지 간에 그 여리고성 무너짐에 대해서 어떤 효과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노래는 왜 부르고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돌고 도는 이유는 이미 무너졌다고 가상했을 때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찬송이죠. 그것을 미리 당겨서 한 것입니다. “이미 승리했습니다.”라고 당겨서 한 것입니다.




여리고성 안에 있는 적군들은 그것 보고 “또라이”라고 합니다. 전쟁을 하지도 않고 이미 승리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겁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미 전쟁의 승리가 내장되어 있는 그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다면 저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한 겁니다.




그것을 미리 눈치 챈 사람이 기생 라합 이었습니다. 대단한 신학자지요. 칼빈보다 더 셀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신다. 얼마나 간단한 신학인데 얼마나 놀라운 신학입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당할 자가 없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 - 인간이 주도하던 역사의 조명등을 모두 꺼버리다>




<요엘>선지서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것이 어느 대목에서 툭 튀어 나왔느냐 하면, 그 앞뒤 대목에 여호와의 전쟁이 마지막 결전을 치른 다는 그런 통보가 오고 난 뒤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소리가 나온 겁니다.




(요엘 1:15)에 보면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보세요. 여호와의 날이잖아요.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이니까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주도권을 쥘 수 없는 그러한 순간이 왔다는 거죠. 모든 시간이 인간을 위한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인간을 위한 시간일수 없는 그런 시기가 온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맘대로 보낼 수 없는 시간이에요. 오히려 인간을 치는 시간, 인간의 시간을 치는 시간. 인간의 역사를 치는 역사. 인간의 역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 치는 새롭고 돌발적인 역사. 어떤 시간대. 어떤 사건. 그것이 이름 하여 여호와의 날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린 죽었다” 이말 이거든요. 그 죽었다는 말이 “오호라”입니다. 좋을 것 같으면 “오호라”하겠습니까? “큰일 났구나” 이런 뜻이지 환호성을 지르면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엘 1:15)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전쟁을 하시는데 일단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될 때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른 민족을 치는 방식이 정상적인 코스인데, 지금 하나님께서 그 코스를 밟지 않고 직접 유다나라에 쳐들어 왔다는 이 말은 이제는 유다나라조차 전쟁의 주체자가 될 수 없고, 즉 유다도 하나님의 백성도 믿을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처리할 만큼 다급한 시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이기 때문에 구원받는데 있어서 이득이 있다는 그런 생각은 말아라.’는 뜻입니다. 어떤 직업이나 특히 목사라든지 하는 인간 쪽에서 유리하다는 어떤 조건은 일체 계산에 넣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자가 이제는 여호와 앞에 다 적으로서만 존재하죠. 그날은 여호와께서 분노하는 날이기 때문에 (요엘 2:2)에 나오지요.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그 다음에 (요엘 2:31)에 보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이것이 2장의 여호와의 날을 설명하는데 멋들어진 표현이예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한다는 말은, 조명기구가 꺼진다는 말이죠. 이제 분위기가 파장분위기라는 말입니다.




여기 불 한번 꺼보세요. 촬영하는데 불 끄면 안 되죠? 한 2초만 불 한번 꺼보세요. “오호라!” 다시 켜세요. 그러니까 조명을 껐다는 이 말은 이제는 전을 거두겠다는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아예 이 세상을 상대로 장사를 그만하겠다는 식으로 아예 철수하는 겁니다.




“어이 어이, 차라, 차라!(치워라) 이제 이 세상 끝장내고 이제 이사 갈란다.” 추수 할 때가 되었다는 식으로 그냥 파장 분위기입니다. 파장분위기. 모이던 사람 흥청거리는 것도 다 없어지고, 웃음소리가 넘치는 것도 이제 슬슬 다 빠져서 아무도 없고,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동안 해와 달과 별들이 배치되어서 조명기구처럼 그 역할을 했는데, 그 배치된 조명기구가 언제까지만 유효했느냐하면 그 유효기간이 마지막 여호와께서 개입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때까지만 한시적으로만 비쳤던 조명기구들입니다.




그 설치되었던 것을 하나씩 빼는 거예요. 달빛이 어두워지고, 햇빛이 어둡다 이말 이에요. 그런데 이방나라들은 조명기구만 쳐다보면서 그걸 신이라고 여긴 겁니다. 해가 되풀이해서 뜨니까 자연이 마땅히 나에게 베풀어줘야만 될 혜택이라고 여기고 있지 종말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겁니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동일하니까요. 여기서 육적인 해석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계속 해 봅시다. 지금 <요엘>서를 하고 있습니다.




(요엘 3: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 <요엘>서에서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뭐냐면 (요엘 20:21)입니다.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이게 중요합니다. 여호와가 어디에 거한다고요? 시온에 거합니다. 시온에. 여호와가 시온에 거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이 시온에 대해서 무시했던 세력들에 대한 단호한 조치로서 종말이라는 이름으로 처리해야 하는 겁니다. 




<마지막때 -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회수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것을 결론을 내려 보면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벌였는데 전쟁을 벌인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시온에 하나님께서 자기자리를 잡으시고 그 시온에서 자기가 구원한 백성과 영원히 둘러싸여서 거룩한 성산을 이루는 것, 이것을 목표로 그동안 여호와께서 전쟁을 해 왔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해 오셨다는데 그것조차 사도바울은 어떤 입장이라고요? 육적인 해석이라고 하지요. 영적인 해석은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름으로 무릎을 꿇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모든 영광을 받고자 하는 빌립보서 2장 11절의 말씀이, 이제는 나사렛 예수로 말미암아 이제는 마지막 때를 치닫게 합니다.




출애굽기 15장을 한번 볼까요? 17절, 18절입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실래요?




(출애굽기 15:17,18)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시죠. 왜냐하면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기 위함이죠. 주의 처소 안에서 백성들이 둘러싼 그 안에서 영원한 성소를 이루시기 위해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용사이신데 그 용사의 정체가 뭐냐면 그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은 주님의 목적, 주님의 이름으로 벌이는 그 목적에 대해서 초청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회단체에서나 혹은 기업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요구하는 적이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요구하는 분은 주의 이름 그분밖에 없죠.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하나의 파스처럼 척척 들러붙어서 주의 이름을 증거 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지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그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방앗간 주인이었어요. 아무것도 할수 있는게 없습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너는 용사다”(삿 6:12)고 해버립니다.




기드온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적을 베풀어주면서 데리고 일을 벌이는데 그들은 전쟁할 때 “여호와의 칼이여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쌍칼을 내미는데 나중에 내미는 것을 보면 쌍칼이 아니고 횃불하고 항아리뿐입니다.




(삿 7: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은 어떤 공적도 인간에게 돌려지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공적도.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장수로 등장한 기드온을 임금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삿 7:22)


"당신의 아들들이 대대로 우리를 다스릴것입니다”




기드온이 말렸어요. "저, 아저씨들 제가 한 것이 아니거든요. 저 그거 싫거든요. 저 그냥 조용히 살고 싶거든요” 기어이 왕으로 삼아서 음란하게 섬겼다는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것들이 육적인 해석이고 바로 그것이 여호와전쟁의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요엘>서에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은, 진짜 가만히 있으면 구원해준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은 특징이 “가만히, 가만히, 가만히”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가만히” 라는 말은 설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어떤 것을 해도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서 일을 하셨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열두제자가 다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가룟 유다를 빼놓고는 다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성도라 할지라도 불쑥 불쑥 나오잖아요. 그때는 주께서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늘 못 박아서 “너는 이미 죽은 자며 파스이며 내가 너를 사용 한다”는 것을 순간순간 깨닫게 해서 “아하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주께서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한 일이지. 이것이 전쟁에 관한 것인데 주께서 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시킨 일이구나”하게 됩니다. 주께서 시킨 일이기 때문에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끝으로 베드로전서를 보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인데, 여러분이 이걸 잘 아십니다마는 참 읽을 때마다 새롭죠.




(벧전 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가 이런 것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 받는 이유가 우리는 일을 해도 주께서 시켜서 한일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주님으로 인하여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종이 일했다고 해서 대접받습니까? 마땅히 종은 해야 될 일을 했을뿐입니다” 라는 것이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이고 주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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