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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30 01:34:35 조회 : 5448         
광주강의 녹취록 올립니다. 이름 : 서경수(IP:221.164.110.134)
 

광주 강의(06. 12. 22) 21-1




요한 1서 3장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10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여기에 “마귀의 자녀들”이란 말이 나오지요? 성경에서 볼 때.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어요.


제가 한 번 적어 볼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이 되겠지요?




이러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인간을, 사랑 자체인 인간을 만약 다른 형제가 모독한다면(마귀 새끼라든지 인격 모독이라든지)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요한 1서 3장 10절에 보니까, 여기에 “마귀의 자녀들”이란 용어가 나오지요? 그러면 이 마귀의 자녀들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지요. 마귀의 자녀든 하나님의 자녀든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잖아요? 하나님이 안 만들었으면 생길 리가 없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만드셨다? 마귀의 자녀도 만드셨잖아요. 그런데 첫 번째 공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했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뭔가 주물럭주물럭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에서 마귀의 자녀가 나왔다는 말은, 우리의 기본 상식에서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든지, 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일부만 적용되고 일부는 적용이 안 되든지, 아니면 아예 마귀의 자녀가 없도록 하시든지’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해놓고 마귀의 자녀까지 언급하니까 사랑의 하나님에서 마귀자녀가 탄생하는 그 논리에, 우리들의 논리에 뭔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여기에서 암시가 되지요? 




우리의 논리가 뭔가 잘못이 있다. 뭔가 구멍이 낫다. 여하간 뭔가 문제성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귀한 자이기에 인간을 모독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여기에 “마귀의 자녀”가 툭 튀어나오나 말이지요.




이것은 바로 사랑에 대해서 뭔가 크게 오해했기 때문에 이런 마귀의 자녀가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는 말을 제대로 안다면, 마귀의 자녀가 필히 하나님께서 만드셔야만 한다는 논리가 나올 때 딩동댕 정답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어!’ 라고 말하면 그것이 정답이 된다는 말이지요.




일반적인 사람의 논리에서는 ‘사랑’이란 자체가 마귀하고는 안 어울리는 사고방식인데, 어떻게 사랑이라고 이야기해 놓고 마귀의 자녀를 만들 생각을 다 하셨는가? 이것이 우리 이해로는 앞뒤가 안 맞는데, 이것은 우리의 이해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사랑이냐? 우리는 죄를 지니고 있는 죄인인데, 죄인이 지니고 있는 사랑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같은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에 마귀의 자녀가 나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은 사랑이라면서 무슨 마귀의 자녀를 만들어 내는가? 그게 무슨 사랑인가?’ 라고 함부로 이런 말을 하지요. 




그래서 이번 강의는 시작부터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마귀 자녀가 나오느냐? 그리고 그걸 이해 못하는 우리는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장 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가 “주사”입니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다.’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현재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을 안다는 겁니다. 사랑을 알게 되면 마귀의 자녀가 왜 있어야 하는가도 같이 알게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한 번 따져봅시다. 왜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면 그 만들어진 인간도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히 따라와야 될 텐데 왜 우리는 사랑을 모르는 자로 이 땅에 출생하고 살아가는가?




이것을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의외로 간단해요. 저기 시계가 있는데 저게 뭐냐? 시계다. 이건 뭐냐? 비타 500이다. 그러면 시계와 비타 500을 합쳐서 뭐라고 하느냐? 시계 비타 500이다.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우리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하나의 개체를 개체 단독으로 보고 이름을 짓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저게 뭐냐? 시계다. 이건 뭐냐? 비타 500이다. 그러면 둘 합해서 뭐냐? 시계와 비타 500이다. 이렇게 밖에 설명을 못하는 거예요. 저건 에어컨이고 저건 냉장고고, 이것은 떡이고 이건 물이고. 한 번에 한 개씩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지요. 그런데 사실은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당연한 것이 아니고 타락한 증거로 보는 겁니다.




타락을 안 했으면 사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너는 누구냐?’ 예를 들어 ‘나는 현자’다. 나는 누고? ‘나는 인철이다.’ 인철이라고 하니까 장로님 이름인데 잘못했네! 그러면 ‘인석’으로 합시다. 너는 현자고 나는 인석이다. 우리는 범죄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딱 끊어서 ‘너는 누구고, 나는 누구다’ 이렇게 본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너는 사랑이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인석이는 누구냐?’ 그냥 사랑의 대상, 아담이고. 그러면 현자는? 그것도 아담이고.


무슨 말이냐 하면 ‘아담’이란 말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이 포함 되었는데 인간이 범죄 한 후에 뭘 떼버렸는가 하면 사랑을 떼버리고 ‘나는 누구냐? 나는 아담이다.’ 이것으로 그친 거예요.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는 아담은 아담이고, 현자는 현자고 인석이는 인석이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이것이 아무 하자나 문제점이 되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하나님이 묻지요. ‘인석아! 예. 너 사랑은 어디 있느냐? 사랑이란 것은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사랑하지 않습니까?’




자, 사랑은 어디 있느냐?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사랑할 대상이 나타나야만 사랑이 있지요. 범죄하고 난 후에 우리의 느낌은 그렇습니다. 그냥 우리 자체로는 사랑이 아니고 내가 사랑할 대상이 있어야 사랑이 됩니다. 미움이 뭡니까? ‘나는 미움이다.’ 말이 안 되지요? 나는 이근호지 미움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나에게 미움이 발생되려면 내가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 발생될 때 비로소 나에게 미움이 발생되잖아요? 우리는 상대가 있어야 미움이 되잖아요? 제 말 맞지요? 사랑과 미움 이런 것은 상대 없으면 관계가 성립 안 되지요?




‘사랑 한다’는 것은 타동사가 되어서 반드시 목적어가 있어야 됩니다. 뭘 한다고 할 때는 목적어가 있잖아요. 무엇을 사랑하느냐 이렇게 따지잖아요. ‘나는 사랑이다.’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니까. 이 차이를 알겠습니까? ‘나는 사랑이다.’ 라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나는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성립이 됩니다.




‘나는 사랑이다.’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원래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참 어렵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게 성립 됩니까, 안 됩니까? 성립이 돼요. 그러나 ‘아담은 사랑이다.’ 이건 성립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왜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그가 따먹은 선악과는 모든 관계가 날아가 버리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끊어지면 남는 것은 달랑 자아만 남지요. 주체만 남지요. 이해되십니까? 이해되어야 하는데 참 어렵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있는데, 분명히 두 육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두 육체로 보지 않고 한 몸으로 보지요. 지난번 울산 강의에서 했지요? 두 육체가 뭐라고요? 두 몸이 아니고 한 몸이지요. 이것을 수학적으로 한 번 따져보세요. 이것이 맞는지. 말이 되는지.




그러면 1,000명이 모였다. 그러면 몇 몸이 되어야 합니까? 1,000 몸이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한 몸이라고 해요. 그 어떤 수학적 논리로 그것이 나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인간은 수를 세잖아요? 수를 센다는 말은 둘 이상이기 때문에 수를 세지요. 비타 500 하나, 비타 500 둘. 세잖아요. 센다는 말은 하나가 아니라 따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따로 존재한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 속에 있는 그 관계가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 인식은 이미 범죄하고 난 이후의 인식이기 때문에 1, 2, 3, 4 뭘 헤아린다든지, 내가 누구냐 혹은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을 때도 항상 주체를 전제로 하고 물어요. ‘나’라는 것을 먼저 설정하고, ‘저 사람을 미워할까 좋아할까?’ 항상 나를 먼저 전제하고 그 다음에 따집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 예를 들어도 이해 안 되면 그냥 집에 가야 된다.


군상상고와 경북고가 야구를 합니다. 그런데 운동장에 늦게 온 친구가 물었어요.


친구1: ‘어이, 몇 대 몇이고?’


친구2: ‘군상상고랑 경북고가 시합을 한단 말이야.’


친구1: ‘그래, 그건 아는데, 지금 몇 대 몇인데?’


친구2: ‘어허, 군상상고하고 경북고가 붙었다니까.’




내가 묻는 것은 어느 팀이 시합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지금 몇 회가 진행됐고, 현재 점수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9회 말인데 군산상고는 4점 경북고는 3점이다.’ 이렇게 답변하면 되지요. 그러면 9회 말은 누구 것입니까? 군상상고 것입니까, 경북고 것입니까? 아니죠. 관계지요. 그러면 4점은 군상상고, 3점은 경북고 이것은 알겠는데, 4대 3 자체는 누구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냥 4대 3이지요. 4점은 누구인가? 하면, ‘군상상고’, 3점은 ‘경북고’ 이것은 말이 되는데, ‘현재 9회 말이고 결과가 4대 3이다.’




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전화를 합니다. ‘목욕탕에 몇 명 있나?’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고, ‘목욕탕 물 뜨겁냐?’ 라고 물었어요. ‘지금 목욕탕에 3명 있거든.’ 몇 명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목욕탕 물이 따뜻하냐 이 말입니다. ‘따뜻하다.’ 하나님은 그걸 묻는 거예요.




‘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니고요. 저 여자가 따 먹었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갑자기 어떤 문제로? ‘선악과를 어떻게 했느냐?’ 묻는데 어떤 문제로 돌아갑니까? 너, 나의 문제로 분해되지요. 미끄러지지요. 정말 하나님께서 묻는 선악과는 없고, ‘내 책임인가, 여자의 책임인가’ 하는 책임 문제로 후퇴하잖아요.




여기 떡이 있는데, ‘이 떡 왜 이것밖에 안 남았어?’ ‘형님 먹었어요. 동생이 먹었어요.’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하나님은 떡에 관해서 묻는데, 인간들은 타락하고 난 뒤에 자아가 우선이거든요. 주체가 우선이기 때문에 ‘제가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고요, 저 여자가 먼저 따 먹으라고 해서 따 먹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정작 하나님이 찾는 한 몸 되기는 없고, 두 육체가 두 몸이 되었지요. 왜냐하면 한 몸에서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아주 깊은 말씀이에요. 오른 손이 하는 일이 왼손이 모르게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아무리 오른 손이 조용히 일을 해도 왼손이 나는 모른다고 할 수 없잖아요? 같은 몸이면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하는 것이고 같은 몸이기에 그렇게 되지요. 만약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른다면 이것은 같은 몸이 아니고 따로 논다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내가 잘못했습니까, 제가 잘못했습니까? 나 의롭습니까, 죄인입니까?’ 라고 벌써 출발점을 나로 규정짓는 그 자체로부터 너, 나의 책임이 없는 상태로 세상을 창조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너, 나를 이야기 안 해도 되는 상태. 너, 나가 빠져야만 되는 상태.




‘내가 죄 지었습니다. 저 여자가 죄 지었습니다.’ 라고 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 한 몸 상태. 한 몸 되면 되잖아요. 한 몸 되면 김 집사가 어떠니, 최 집사가 어떠니 싸우지 않게 된단 말이지요. 이 목사가 어떠니 박 목사가 어떠니 안 싸우지요. 왜냐? 한 몸이기 때문에. 싸운다는 말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말입니다. ‘너는 울산에 있고 나는 광주에 있는데 너랑 나랑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한 몸 되면, 내가 어디 있든, 네가 어디 있든 우리 관심사가 너와 내가 아니고 우리 둘 다 뭘 바라본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만 바라본다 이 말입니다. 이제 이해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뭔지 이해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따 먹었느냐?’ 하나님의 관심사가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이미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처지가 된 이상 선악과를 따 먹었지 않습니까? 선악과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로서 있던 선악과를,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는 하나님의 선악과도 되지만 누구 선악과도 됩니까? 인간의 선악과도 되지요? 인간이 아는 선악과가 되지요.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인간이 되었지요?




원래 선악이란 것은 하나님만 아는 것인데, 하나님만이 ‘나’라고 할 수 있어요. 여호와를 뭐라고 합니까? “나는 나다.” 하나님만 ‘나는 나다’ 할 수 있고 나머지는 ‘나는 나다’고 할 수 없는 주재에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뭐가 됐습니까? ‘나는 나다’로 궁극적으로 그쪽으로 응축될 수밖에 없어요.




응축이란 말 아시지요? 뭉치고 뭉쳐서 결국 한 점으로 모아지듯이, 이것을 블랙홀이라고 합니다. 중력이 잡아당기면 나중에 단단한 물체가 되어 그것이 폭발해버리면 블랙홀이 되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애쓰고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최고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도 이것을 깨달았는데 고행을 해서 알았어요. 결국 이 세상에는 누구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부처가 80평생 고생 실컷 하고 알았어요.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밖에 없어요. 단단한 쇠 공이예요. 단단한 쇠 공을 차면 발만 아파요. 이것은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밖에 없어요. 자기밖에 모른다고. 인간은 ‘나는 나다’고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에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어요. 마치 신처럼, 신이 알고 있는 선악 지식을 본인이 알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본인이 신이 되어버린 겁니다. ‘나도 안다. 선악에 대해서.’ 선악을 알아서 신이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주체가 하나님에서 떨어진 상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란 관계가 이미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유성처럼 떨어진 것은 ‘나’라는 외톨이. 자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는 하나님만이 사용할 말을, 우리 인간들이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 세상 자식이든 아내든 친구든 다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은 ‘나는 나다.’ 부모가 어떻고 스승이 어떻고 결국 갈래면 가라. 결국 남는 것은 나만 남았구나. 아, 외로워라. 이것을 니체는 ‘초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신이기에 신처럼 행동해야지. 예수도 초인이고 우리도 초인이고 수천의 신들이 우리 인간이다. 인간 자신이 신인데 왜 신을 찾느냐 이 바보들아. 따져봐라. 인간이 신이 아닌가. 알 것 다 안다. 사랑도 알고, 의도 알고, 죄악도 알고 다 아는데 자기가 신이지 인간 외에 신이 어디 있느냐?




심지어 니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신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고, 인간이 신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다? 나에게 있다면, 내가 신을 선택한다는 말은 결국 신은 강아지고 선택하는 내가 바로 주인이니까.




신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최고 높은 자를 말하잖아요. 높은 자란 선택권을 갖잖아요. 그러면 내가 신을 골라잡아 선택한다는 말은 신도 내 밑의 똘만이(부하)고 나는 신보다 높은 절대 신이 되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글을 썼지요? “기독교는 신앙이 아니고 하나의 문화다.” 기독교가 하나의 문화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교회는 문화센터지요. 문화센터가 뭐 하는 데냐 하면, ‘자기 자신이 곧 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입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곳입니다. 문화센터의 특징은 절대로 인간을 정죄해서는 안 돼요. 모독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신처럼 대우해야 돼.




신처럼 대우해 줄 때 문화센터는 융성하게 되고, 만약 인간을 모독한다면 그 문화센터는 문을 닫아야 됩니다. 문방구에 어린이가 와서 “지우게 있어요?” 하는데, “너는 죄인이야!”라고 하면 지우게 사겠습니까? “손님은 왕이십니다. 어떤 색을 원하십니까? 노랑, 빨강, 파랑?” 이렇게 모셔야 다음에 또 올 것 아닙니까?




교회가 문화센터가 되고 교회 활동은 문화 활동이 됐어요. 이런 시대에 돌입한 겁니다.




오늘 울산에 목사님 만나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 들었습니다. 옛날 기독교는 고함치고 기도하고 부흥회한다고 주여! 주여! 삼창하고 했는데, 요새는 어떤 것이 유행하는가 하면 고요하게 앉아서 침묵하는 것이 유행이랍니다. 이것이 일종의 참선이지요. 참선 중 한 방법이 ‘관’. ‘관’이 뭔 줄 알아요? 집중해서 한 곳을 관찰하는 거예요. 이거 불교에서 다 했고, 천주교에서도 한 것 아닙니까.




왜 이런가 하면, 웰빙 문화가 기독교에 까지 침투해서 기독교도 이제 웰빙에 보탬이 되는, 바꿔 말하면 인간을 초인으로 만드는 것. 다시 말해 ‘너가 신이니까 신처럼 살면 그것이 최 극상의 행복이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 자기보다 높은 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느냐?’ 높은 자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마음대로 설치면 벌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자기 마음대로 설치면 벌 받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행복하냐, 불행하지. 그러니까 내가 내 마음대로 설쳐도 누구한테 간섭 안 받을 때 그야말로 행복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십자가를 알 때 피폐해진다.’고 하거든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내 머리위에 어떤 놈이라도 앉아 있는 것은 싫다는 소리예요.




범죄하고 난 후에, 자기 딴에는 사랑도 알고 선악도 안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보시기에 다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이 신의 흉내를 내면서 ‘나는 나’라는 입장에서 거기다가 사랑을 집어넣고, 의를 집어넣고, 메시야, 언약, 십자가 어떤 개념을 다 집어넣어도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나’ 중심의 ‘주체’ 중심의 사상으로 하나님을 대하게 되면, 어느 인간이 ‘나는 마귀 자식이다.’라고 하는 인간이 있겠습니까? 모두 다 자기를 극상의 신의 아들로 간주할 것 아닙니까? 신의 아들로 간주한다는 것도 사실은 핑계고 자신이 극상의 신이지요.




농담으로 자신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사람은 있어요. 성철 스님. ‘나는 마귀가 좋다.’ 얼마나 신 같으면 자기는 마귀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진실로 ‘나는 마귀다.’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다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여전히 앞에 ‘나’가 있잖아요. 구원 받은 사람 같으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 앞에 뭐가 떨어져 나가야 합니까? 그냥 죄인이죠. ‘죄인이 바로 나다.’ 이렇게 나를 뒤에 넣어야지요.




‘나는 죄인이다.’가 되면, 나는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대지만, ‘죄인은 바로 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버둥대며 애를 써도 나는 죄의 범주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구원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되지요. 죄인이 왜 구원 받습니까. 죄인은 죄인으로 끝나야지 왜 구원을 받아요. 그렇잖아요?




죄인이면 ‘빨간 옷 입으셨네요?’ ‘예 빨간 옷 입었습니다.’ 이러면 되지, ‘저는 파란 옷을 못 입어 고민이에요.’ 이럴 필요가 뭐 있냔 말이지요. 파란 옷을 안 입어서 고민이란 말은, 앞에 뭐가 있다? ‘나는 파란 옷을 좋아하는데 지금 빨간 옷이기 때문에 싫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또 ‘나’가 앞에 등장하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죄인은 나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되는데, ‘나는 죄인이다.’고 하면, 뭐가 꿈틀거리느냐 하면 ‘빨리 이 죄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가 꿈틀거리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만난 후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때 ‘나’는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고, “떠나소서”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죄인은 바로 접니다.’라는 말이지요. 주님을 만나고 난 후 처음 알았습니다. 주님 세계가 따고 있고 내 세계가 따로 있구나! 나의 세계는 나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지 깝죽대면서 나의 세계를 탈출하려는 것은 말도 안 되는구나를 분명히 알았지요.




‘나는 죄인이다.’ 라는 사람이 만약에 구원 받고자 해도 기껏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는 의인이다.’ 라고 하지요. 이것이 구원입니까?


‘나는 죄인이다.’가 기껏 노리는 것이 뭐예요? ‘나는 죄인의 탈을 벗어버리고 나는 의인이다.’가 되겠지요. 이렇게 ‘나는 의인이다.’가 되면 또 앞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나’가 붙어 있잖아요. ‘나’가 붙어있는 이상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한 그 인간은 아니란 말이지요. 이것은 기껏 종교를 하나 선택한 것뿐이지 여전히 누가 살아있습니까? ‘나’가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죄인은 나다.’가 되려면, 죄인 상태에서 만약 구원 받았으면, ‘의인은 나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의인이고, 예수 안에서 나는 의인 되었다.’


‘예수 안에서 의인 되었다’는 말은 ‘나는 이제 죽으나 사나 의인이다.’ 이 말 아닙니까.




아담 안에서 ‘나는 죽으나 사나 죄인이야.’ 하다가, 예수 안에서 ‘나는 죽으나 사나 의인 되었다.’ 의인되시는 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 아닙니까. 의인은 예수님이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범죄하지 않는 것이 되지요.




범죄는 뭣과 연관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원래 그 관계가 없으면 죄고, 그 관계가 살아났으면 그것은 의가 되는 겁니다.




제가 약간 비약했는데, 좀 더 쉽게 해 봅시다.


야, 이것 참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네.




처음부터 다시 해 보겠습니다.


처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있었지요. 그 사랑의 증거가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것이 사랑 맞잖아요? 제 말 틀렸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랑이잖아요.




지금 악마는 뭘 깹니까? 악마는 사랑관계만 자르면 돼요. 아까 고기 먹었잖아요. 제가 칼을 들고 고기를 잘랐지요. 이처럼 마귀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 관계에서 사랑을 잘라내요. 잘라내니까 인간이 사랑관계에서 떨어져서 독자적인 관계가 되지요. 이것 이해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예야, 이왕 독자적인 관계가 된 것, 너 혼자 잘 해라.” 이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마귀가 잘랐던 그것을 그리워하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이지요. 그런데 인간이 떨어지고 난 뒤에 생각하는 사랑은 누구 중심의 사랑입니까? 이미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 있기에 나 중심의 사랑이 되겠지요? 인간들은 기껏 몸부림쳐봐야 ‘사랑’을 외쳐도 내 잘되는 사랑입니다.




수요일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주인공이 누굽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주인공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왜냐? 산타크로스를 사랑의 화신으로 보지요. 산타가 사랑의 화신이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선물을 주잖아요.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울지만 않으면 돼요.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울지만 않으면 선물 주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사랑의 화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다 죽이잖아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패버려요. 그러니까 두 종류의 사랑이에요.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고, - 너는 죽었어. 너는 죄인이야. 이게 주님 주시는 사랑이고, 산타는 시속 320Km 루돌프 설매 타고 와서 선물 주잖아요. 이 둘 중 어느 것이 주체가 납득이 되는 사랑입니까? 산타가 ‘나’라는 주체에, 내가 그리워하는, 평소에 내가 소망하고 있든 그 사랑에 합당하잖아요? 그 산타가 마귀고 예수님은 진짜 예수님인데 이 세상에서는 누가 마귀입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마귀가 돼버리고 산타가 메시아가 되잖아요.




이런 왜곡, 이런 거꾸로 된 원인이 뭡니까?


이미 관계에서 떨어져서 ‘나’라는 주체가 단단한 쇠 공처럼 누구도 건드릴 수 없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주인이라도 개가 밥 먹는데 건드리면 주인이라도 물지요.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빠 하며 좋아하다가도 먹는 것 빼앗으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지만 욕 나옵니다.




내 귀한 자녀가 어디에서 저런 욕설이 나오는가? 너무 걱정 마세요. 부모 책임 아닙니다. 이미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주체가 확립되어 있어요. 자기 피부에 뭐가 건드리고 하면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아직 숙달이 들 돼서 자기 주체가 완벽하게 확립이 안 되었지만 머리가 커지고 두뇌가 발달하면 점점 더 자아 중심으로 가요.




두뇌가 IQ든 EQ든 발달하는 것이 방향 없이 발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 ‘나’ 좋아라는 식으로만 발달해요. 이웃사랑, 세계 핵문제 이런 것 때문에 발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다.’ 라는 것을 더욱 더 확인하고, 이것을 굳히기 위해서 두뇌는 발달하고, 조기유학 가서 영어배우고 다 하는 겁니다. ‘나는 나’ 되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삐아제는 ‘자아의식 확립’이라고 합니다. 자의의식 확립 안 된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자폐아’ 자폐아는 맨날 기대요. 나가라고 해도 기대고. 사람을 만나도 숨어있고. 자아가 확립이 안 돼서. 이것은 장애아지요. “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독자적인 언어를 구성 못하고 들었던 것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회에서 환영받는 사람은 자아의식이 강렬한 사람일수록 이 사회에서는 영웅으로 환영해 줍니다.




아무리 인간이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해도 그 중간에 ‘손대지 마. 절대 이것은 안 빼앗길 거야!’ 라는 것이 있어요. ‘신이시여, 내 뜻대로만 되게 해 주시되 내 뜻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런 것이 궁극적으로 들어있습니다. 이게 마귀의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게 어려운데 이해되든 안 되든 나도 모르겠다. 그냥 밀어붙여야겠습니다.


십자가 이후와 십자가 이전이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사건이나 에덴동산 사건은 원초적 사건입니다. 원초적 사건이란 말은, 이 사건은 역사 전부를 덮는 지붕 같은 사건이에요.




선악과 따 먹은 사건은 그 때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이 계속해서 지구 끝날 때까지 사건이 계속 지붕으로 덮여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했다. 이것은 아담만 범죄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자아의식이 있어서 ‘아담은 아담이고 나는 나다.’ 라고 우기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백날 우겨도 하나님은 ‘나는 전체를 아담 한 몸으로 간주하고 일을 개시한다.’ 그렇게 처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아담에 속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은 바로 우리다.’ 우리 후대를 100대를 잇고 1000대로 내려가도 범죄한 자는 우리다. 다른 말로하면 죄인은 곧 아담이다. 아담 속에 누가 있다? 우리가 있다. 따라서 죄인은 우리다. 죄인은 아담이다. 그러면 의인은 누구입니까? 의인은 예수님이지요.




하나님은 이 두 공식밖에 몰라요. 이 두 가지 공식에 의해서 창세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공식을 그때그때마다 적용시킨 겁니다. 죄가 얼마나 깊이 있고, 죄가 얼마나 다양한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율법은 사랑 관계 회복을 위해 주셨건만, 그래서 모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초점이 있건만, 인간들은 모든 계명을 자기에게 흡수해서, ‘나는 신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라는 자아 위주로 전부 흡수해서 이것을 순종, ‘지켰다’고 이야기합니다. 맞잖아요?




사울이 왕이 되고 나니까 그 나라가 누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난 뒤에 그 나라가 누구의 것이라고 봤습니까? 자기 것이라고 봤지요. 그때마다 주가 찾아옵니까? 사울에게는 사무엘이 찾아오고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지요. 너의 것이 없다는 거예요. 주님의 것으로 너지. 너의 것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모든 살아가는 것이 ‘나의 것’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개입하는 식으로 하지요. “비타 500 누가 먹었어요?” ‘내가 먹었어요.’


나, 너. 너라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너가 있고. 나가 성립되면 너가 생겨요.


주체가 성립되면 반드시 다른 주체를 상정하는데 그걸 객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주체와 객체 사이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고 섞이지를 않지요. 왜? 섞이게 되면 주체가 날아가 버리니까.




죄짓고 난 이후 주체는 포기 못하지요.


중요한 것인데, 다시 해 봅시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가 두 자로 뭡니까? ‘사랑’이지요. 이것을 테이프로 봅시다. 하나님과 우리를 묶는 테이프로. 테이프가 끊어지니까 인간은 나밖에 모르는 존재가 되었어요. 한 몸이 아니고 나 밖에 모르는 몸. 나 밖에 모르는 이것이 현실이잖아요. 나 밖에 모르는데, 아무리 ‘기독교가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해도 결국 나 밖에 모르는 것을 해체할 수 없지요?




따라서 나는 결국 내가 죽는 한 나는 안 죽지요. 야, 이 말 좋다. 오랜만에 좋은 말 했다.


내가 죽는 한 나는 안 죽지요. 내가 십자가 믿고 함께 죽어도 나는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안 죽지요.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고, 주와 함께 죽는다 해도 나는 안 죽어요. 왜? 나는 십자가와 함께 죽은 나가 되 버리지요. 그러니까 안 죽잖아요.




내가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할 때, ‘믿습니다.’ 고 하는 주체가 누구예요? 그 나는 살아 있잖아요. 그 나는 안 죽었잖아요. 예수 믿는 나는 누굽니까? 예수 믿는 나가 있잖아요. 안 죽잖아요. 나가. 아무리 예수 믿고 “나는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나니” 해도 나는 남아 있잖아요.




아무리 내가 성경을 외워도 나는 안 죽는단 말이지요. 이 말은 결국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이 있다, 없다? 없어요. 내가 나를 죽이는 방법이 없어요. 세상에 그 누가 자기 자신을 저주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도 축복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나를 죽이는 것은 내 계획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죽이겠다는 계획은 내가 세울 수 없어요. 그 계획은 다른 분이게 일임하세요. 누가 죽이십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자는 반드시 저주 받아야 되지요. 이 계획은 취소가 안 됩니다. 왜? ‘선악과를 따 먹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으니까. 그 죽이는 죽임을 누가 죽이십니까? 방금 제가 우리는 못한다고 했지요? 누가 하십니까? 예수님이 하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죽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죽입니다.




제 생년이 1953년입니다. 십자가는 구경도 못했어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지요. 바울도 십자가 근처에도 안 갔지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결국 십자가라는 것은, 십자가 전, 후를 따질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지요. 우리는.




십자가라는 것이 시간의 한 지점으로 머물 것 같으면 우리가 전, 후를 따지겠지만, 십자가란 것이 십자가 전, 후를 따지는 우리 자체를 완전히 죽여 버렸기 때문에 진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사람은 십자가 전, 후라는 생각도 못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와서 죽이면 비로소 안 죽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우리가 죽을 수가 있는 겁니다. 왜? 우리는 죽고 그 안에서 누가 살아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이 방법 외에는 사랑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를 형성시키기 위해서, - 그래야 언약을 완성하니까 - 모든 일을 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뭐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아무리 남한테 해준다 할지라도 해주는 주체가 나기 때문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는 상태가 아니고 아는 상태에서 해 버리는 거예요. 나는 나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았어요? 이스마엘이죠. 기껏해야 이스마엘이잖아요. 그러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이스마엘은 저주받을 자지요. 저주받을 자를 낳았다는 말은 누가 저주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저주 받아야 하지요. 그렇잖아요? 자기가 낳은 자식이 저주 받는다는 말은 그 부모가 저주 받을 자이기 때문에 저주 받을 자식이 나왔잖아요.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는 십자가에 죽어야 되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구원 받는 것은, 자기 스스로는 할 것이 없지요. 자기 스스로 해 봐야 이스마엘밖에 안 되니까, 그러면 뭘 해야 됩니까? 이삭이 와서 죽을 때 아브라함도 같이 죽고, 이삭을 살릴 때 함께 사는 것. 




이삭은 누구 작품입니까? 주님 작품이죠. 바로 주님이 와서 우리를 죽이고 살릴 때 비로소 그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당신 말대로 ‘나는 사랑의 대상이다.’고 할 때, ‘나’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드디어 하나님 사랑 맞네.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사랑을 증명하는 증인에 불과하지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랑은 여기 있다.” 라고 사랑을 증거하는 증인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왔잖아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지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기껏 하는 말이, 자기가 주체가 된 사랑이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사랑 말고. 나중에는 주께 맡겨버리지요. 그 사랑이 뭐냐 하면, 네가 원하는 대로 네가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주체를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짓밟고 우리 주체에서 하는 모든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주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밟고 지나가지요. 우리는 밟혀서 납작하게 되고. 요한을 내가 올 때까지 살려둔다고 해도 너는 상관 말고 너는 이 사랑 자체인 예수님을 생각해라. 그렇게 나옵니다.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시 쉽시다.




(06. 12. 29. 18:0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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