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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6 12:01:20 조회 : 131         
190강-창 49장 16-18절(단에 대한 예언)190605-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61.84.208.92)
190강-창 49장 16-18절(단에 대한 예언)1906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16-18절입니다. 구약성경 79페이지입니다.

창세기 49:16-18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 지파에 대해서 주어진 예언이 섬뜩합니다. 이 예언을 할 때 자녀들이 골라잡아서 순서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야곱을 통해서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야곱의 자녀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지 그 당시 야곱의 아들들이 소원하고 원했던 그 상황, 그 미래상이 아니에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가 장차 천국이라든지 구원받는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원해야지 우리가 원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넓은 길로 가지 말라고 하고 그 길은 찾는 사람이 많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만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원하고 욕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영생으로 통하지 않고 지옥불로 통하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몰라요. 인간들이 갖고 있는 그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결국은 그 끝장은 지옥입니다. 왜? 많은 사람이 찾으니까. 그러면 소수의 사람이 찾는 것은 비록 좁은 길, 좁은 문이지만 영생으로 통한다면 소수라도 있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소수라는 것이 보통 사람과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냥 강제로 데려가는 거예요. 스스로 소수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외로우니까. 그러나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지 우리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서의 구원에서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우리, 또는 대다수가 생각하는 흔한, 들으면 쉽게 설득이 되고 동의가 되는 그런 천국, 완전히 가짜지요, 그런 천국 같으면 다들 가잖아요.

넓은 길이 된다 그 말이지요.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 대다수가 지옥으로 가지요. 지옥으로 가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의 특징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나 천국 가는 방법을 제시하면 그걸 본인이 지키려고 해요. 말씀을 주면 그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요, 말씀이 우리를 하나의 결과물로 낳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답게, 말씀에 합당하게 작품, 결과물이 영생 얻는 사람,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말씀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해야 돼요. 오늘도 말씀대로 주께서 나를 붙잡고 아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가는구나. 주체가 주님이지 말씀의 주체가 우리가 주체가 되면 안 되거든요.

우리가 교회 생활 몇 년 했는지 모르지만 한 번 뒤돌아보세요. 말씀을 지키려고 했는지 말씀이 나로 하여금 내가 원치 않는 인간상으로 바뀌어지게 했는지, 주도권이 어디에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대다수의 인간들, 지옥가는 대다수의 인간들처럼 내가 그 말씀을 지켜서 천국 가겠다는 그러한 기본적인 성향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말씀을 지키게 되면 이것은 선과 악이라는 뻔한 결과가 나와요. 선 아니면 악, 악 아니면 선,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어디든 간에 그 자체가 죄가 돼요. 선악과 따먹어서 선악에 대해서 안다는 자체가 죄가 되고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조건이 되는 겁니다.

구원 받겠다는 그 짓이 점점 더 구원 못 받게 하는 굴레가 되어버리지요. 물론 선악 이야기하고, 당신이 지켜야 천당 간다고 해서 많은 회원 수를 모집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큰 교회 짓고 부흥했다는 소리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넓은 길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새롭게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야곱이 이야기하는 이 예언은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켜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계획대로 진행될 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성취될 때 그게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되는데 천국은,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은 이처럼 그 조건과 요건이 야곱의 예언 속에 전부 다 함축되어서 들어 있어요.

이 열두 아들에게 한 예언 말고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있어줘야 전체가 이스라엘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나중에 구원받는 그 단체를 이스라엘이라고 하거든요.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잃어버린 양을 보충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만 구원되기 때문에 야곱의 예언에 포함되지 않는 조건은 천국 가는 조건이 못됩니다. 모든 조건은 이 안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조건중 하나가 오늘 16절에서 18절에 나오는 겁니다. 그 조건자체가 상당히 낯설고, 아까 제가 섬뜩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 지파는 그 백성을 심판할 수 있다. 이것은 열 두 지파가 자기 조상을 땅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한데 마치 단 지파는 자격도 없는데 그냥 심판을 잠시 하게 해주는 것 같은 그런 뉘앙스를 띄는 것으로 이 본문이 되어 있어요.

단 지파는 할 필요도 없는데 그래도 단지파도 백성을 다스릴 수는 있을 걸, 있게 될 걸,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16절에 나오는 대로, 다른 지파하고는 성격이 다른데, 근본적으로 달라야 되는데, 그래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는 기회나 여건은 아마 조성될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놓은 자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배제된 지파,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이유가 17절에 나오지요. “단은 길의 뱀이요” 단은 불길하고 기분 나쁜 불길한 짐승입니다. 자기 자식보고 아버지가 예언하기를 “너는 뱀이 되라.” 이게 뭐예요? 뱀술 담그라는 말입니까? “뱀처럼 살아.” 기겁할 일이에요. 특히 성경에서 뱀이라 하는 것은 악마를 의미하는 겁니다.

뱀이 예쁠 리가 있겠어요? 꽃뱀은 예쁘겠지만. 뱀이 예쁘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고 뱀이라고 해놓고 첩경의 독사, 아예 강조에 강조를 또 해놓았어요. 그냥 뱀이 아니고, 독 없는 순한 뱀, 애완용 뱀 말고 독사를 품었다는 거예요. 독사를 품은 것이 이스라엘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겁니다. 왜 아버지는 자기자식을 보고 이런 심한, 욕설보다 더 심한 이런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 독사의 성격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얍삽하잖아요. 정면으로 일 대일로 싸워서 지면 지고 이기면 이기고, 그렇게 나와야 되는데 이것은 길섶에 있다가 달려들어서 말굽을 물어요. 참! 남자에게 제일 심한 욕이 “얍삽한 놈아, 비겁한 놈아, 네가 남자답게 정정당당하게 나와라. 왜 남자답게 정정당당하지 못해?”

이게 남자한테는 큰 욕설입니다. 빌빌 기는 것, 이런 것은 아주 졸장부가 하는 짓이지요. 이것을 단지파에게 할당하는 겁니다. 네 몫은 이 몫이라고. 아, 여기서 야곱이 이스라엘을 전체로 구성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보고 고르라고 하면 멋있는 것 고르겠어요.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왕)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야, 이거 멋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야, 이런 패를 쥐고 있으면 이것은 신나지요. 그런데 “이 얍삽한 인간, 이 구렁이, 독사새끼 요거, 이거 네가 해라.” 그러면 황당합니다. 단 지파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이스라엘답지 않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뜯어먹는,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치고 해악을 하는 그런 쪽, 쓸모없는 지파, 있으나마나한 지파처럼 보일 거예요.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의 반전은 단 지파에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되려면 단 지파에 집결해야 돼요. 모든 자기지파 다 버리고 단 지파에 집결해야 됩니다. 독사의 독을 품고 집합해야 돼요. 왜 그런가? 1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 지파에게 예언을 하면서 야곱본인이 뭘 느끼느냐 하면,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구원, 나의 구원이 아니라 주님이 가져다주는 구원을 나는 기다리는 입장입니다. 어느 자리에서? 단지파의 자리에 서서 구원을 기다립니다. 다시 말해서 단 지파에 집결되지 아니하면 주의 구원은 주의 구원이 아니고 나의 구원이 되어버려요. 나의 구원. 내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생각만 하고, 착한 생각만 해서 그걸 끌어 모아서 구원 얻겠다는 심보는 그 사람 속에 단지파가 없는 이스라엘, 가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뱀의 기능은 뭐냐? 창세기 3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유명한 말씀인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뱀은 여자의 후손되시는 주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독사를 언급할 때 확정된 성질을 그대로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구원받은 이스라엘 속에 단 지파를 통해서 독사의 성질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마귀 없이 구원 없다는 겁니다. 마귀 배제하고 구원받을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어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게 되면 좋은 고기가 건져진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는데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하늘나라 이야기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면 반드시 좋은 고기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나쁜 고기도 같이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하면 나쁜 고기도 나타나고 좋은 고기도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구원이라는 것을 유일하게 언급한 대목이 단 지파 대목입니다. 이 말은 뭐냐? 단 지파, 독을 품은 그 독사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러한 역사를 일궈나갈 이 단 지파는 비로소 인간들이 몰랐던, 깜깜해서 인간이 전혀 알 수 없었던 구원이 유일하게 출몰하는 지점이에요.

구원의 원천지로서 단지파가 그 기능을 해야 되는 겁니다. 옛날 사람이나 요즘사람이나 마찬가지겠지요. 구원에 대해서 처음에는 답답해서 교회 와서 복음 듣고 합니다. 그런데 뭔가 설교 좀 듣고, 복음에 대해서 좀 알고, 십자가 알고 구원알고, 예수님도 좀 안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어디에 빠지느냐 하면, 안일과 나태함에 빠져버려요.

“아는데 뭐.” 이런다고요. 아는데. 어떤 사람이 굉장히 자기 마음에 든다. 자기 맘에 들어서 그 가수의 팬이 되어서 부산에서 진도까지 가서 악수 먹고 그럴 수가 있지요. 그런데 그게 아는 사이가 되어버리면 이제는 자칫 하면 돈 빌려 달라고 할 거예요. 십년, 이십년 지내버리면. 사기나 해먹고. 당신 더 키워줄 테니까 내 말 믿어라. 그렇게 될 거예요.

처음에 교회 올 때 십자가 복음, 그거 좋아서 와 놓고 그 다음부터 교인들이 모이면 교회 키울 생각 합니다. 주님은 어디가고 없어요. 복음도 없어요. 어떡하면 처음에 한 투자금을 다른 교회보다 어떻게 더 키울 것인가, 그걸로 가버려요. 그러한 이유가 자기가 뭘 잊어버렸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독사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마귀가 먼저 선점하고 있고 마귀가 선점한 세상에서 구원이 나와요. 마귀 배제하고 마귀 생각 안하고 구원은 없습니다. 깨끗한, 중성적인 생각으로, 나는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다는 중성적인 입장에서 “주여,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렇게 자기가 예수 선택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잉크물처럼 시커먼 악마 속에 독사의 독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 자체가 얍삽한 짓이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지 우리 운명은 그런 거예요. 구원은 가장 악마적인 것에서부터 구원이 비로소 출몰하고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저주스러운 그 배경이 구원의 시작되는 자리에요. 그러면 복음을 알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오히려 그 저주스러운 배경을 확인할 생각을 해야지 뭐 나 하나 건졌으면 되었고 이제 내 맘대로 산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갈수록 그 복음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더 풍성해져야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기도를 이렇게 했어요. 갈수록 주님에 대한 사랑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더 커지고. 이게 바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한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살면 살수록 내 안에서는 유다를 원하고, 요셉을 원하지만 그 자체가 바로 내 주제를 모르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가 아직도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닫고 살고 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구원받을 때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배제하고, “저리 가, 저리 가!” 하고, 쫓아내고, 괜찮은 것만 긁어모아서 구원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는 그 배제된,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핍박받는 그 단 지파를 가지고 비로소 구원을 설명하는 거예요. 구원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었다.

네가 창세기를 보고 구원을 생각한다면 착각이었다. 구원은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주의 구원이지 나의 구원이 아니거든요.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받으면 구원은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내가 없는데 주의 구원이 들이닥쳐서 비로소 주의 구원이 들이닥칠 때, 단 지파까지 포함된 이스라엘이 들이닥칠 때, 통째로 들이닥친 그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맛보게 되는 겁니다.

단 지파를 두고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이렇게 했는데 단 지파는 나중에 사라집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단지파가 없어요. 상당히 의도적인 것 같아요. 요한계시록 7장의 14만 4천 나오는 5절에서 8절의 그 대목에서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라고 해서 유다지파 나오고, 르우벤지파 나오고, 갓 지파 나오고, 아셀 지파 나오고, 납달리지파 나오고, 므낫세지파 나오고, 시므온 지파 나오고, 레위지파 나오고, 잇사갈지파 나오고, 스불론지파 나오고, 마지막에 요셉지파 나오는데 합치면 열두 개에요.

원래 단지파가 들어갈 자리에 므낫세지파가 파고 들어가니까 단지파가 없는 거예요. 바로 없는 지파가, 바로 단지파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파의 중요성, 단지파가 지파의 핵심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구원받을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마치 단지파처럼 소멸되고 사라져버려야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열두 제자가운데 십자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열 두 제자 전부 다 자기지파 구원받는다고 여겼던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의 창세기를 보고, 모세의 축복을 보고. 내가 열 두 지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열 두 지파 덕분에 나는 구원받는다 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은 없습니다. 야곱은 미리 예언합니다. 나의 구원이 아니고 주의 구원입니다.

주의 구원은 단지파같은, 악마에 말굽이 물리는 그 지점, 그 장소, 그게 출몰장소에요. 마귀가 자기정체를 드러내는 그 장소가 주님이 비로소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장소, 그 장소는 핍박받는, 말굽이 물리는 그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말굽을 물던 그 악마, 왜 물겠어요? 그 안에 보편적인 모든 인간들의 구원의 경향성, 종교적인 경향성이 그 안에 다 함축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악마의 마음을 받았고 악마가 만든 종교 속에는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서, 선하게 지키면 천당이고, 악하게 하면 지옥이라는 이 악마적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진짜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가 발뒤꿈치 물리고 살해당한 겁니다. 독사에 물려서 죽으신 거예요. 구원은 없습니다. 다만 구원은 전달 될 뿐이에요. 택배로. 어떤 상태에서. 저는 구원될 자격 없음을 알게 된 사람과 더불어서. “이것은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이 구원입니다.” “너는 왜 구원이 안 되지?” “저는 단 지파거든요.”

단지파의 예언이 바로 우리의 예언입니다. 소멸되어버린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지파자체가 날라 가버렸어요. 요한계시록 7장이 신약이거든요.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구약이잖아요. 구약과 신약 그 사이에 이런 단 지파를 통해서 그 내용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점차 구체화되는가가 나옵니다.

우선 첫 번째, 단지파도 다른 지파와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한다는 이 대목은 사사기 13장 1절에서 2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 이스라엘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거의 소멸될 지경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언약이 같이 소멸되면 안 되겠지요.

여기에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그 마노아와 아내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는데 천사가 와서 마노아에게 나타나니까 자식을 줬는데 그 자식 이름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심판하고 재판하는 사람이에요. 사사는 심판하고 재판하는 사람을 사사라고 합니다.

자식이 없어요. 단지파 자체가 별로 이스라엘에서는 인기 없어요. 유다지파와 요셉지파가 투톱작전으로 가기 때문에 단지파는 별 소용도 없고 그 두지파에 기어 붙어 사는 형국이라는 말이지요. 그런 형국에서 백날 유다지파가 강해봤자 블레셋에게 지배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누가 해결할 거예요?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없는데 갑자기 불임여성인 마노아의 아내에게, 불임인데, 임신을 못하는데 애가 생겨버렸어요. 그게 뭐냐? 단지파 아이 삼손입니다. 삼손이 잠시나마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건사시켰어요. 그렇다면 이 단지파의 가치가 줄곧 가야 하는데 그 다음 두 번째로 봅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얍삽한 짓을 했지요. 뒤에서 공격하고 치는 거요. 이 내용은 사사기 18장에 나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브라임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이 레위지파, 소위 일 년 연봉과 생활터전을 마련해주면서 사적으로 자기집안을 위해서 하나님께 복 빌어주는 개인적인 목사를 고용한 셈이에요. 이 미가라는 사람이 부자니까. 이 집안에 고용된 레위인은 맨 날 그 집안을 축복하는 그 일을 한 거예요.

마치 오늘날 병원에 가면 원목이 있고, 군대에는 군목이 있고, 기독교 학교에는 교목이 있듯이. 그들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군목은 우리나라 지켜달라, 우리군대 지켜달라는 그 일을 하고, 병원의 원목은 그저 우리 병원에 손님 많이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교목은 우리 고등학교에서 서울대학 많이 들어가게 해달라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 목사는 그냥 목사인데 우리교회 부흥시켜 달라는 기도를 하지요.

똑 마찬가지에요. 월급주고 연봉주고 생활비 줘서 똑같은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투자한 그것으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 때는 하나님의 다윗,같은 왕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더러운 속성대로 다 한 거예요. 그럴 때 단지파가 땅이 없었습니다. 땅이 없어서 사적인 그 미가의 집에 가서 레위지파를 연봉 더 주겠다고 하면서 강제로 납치를 해 와요.

18절에 “그 다섯 사람이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만든 신상을 취하여.” 그러니까 세트가 된 거예요. 우상하고 제사장이 입는 옷하고 제사장하고, 이것이 삼종세트가 되어야 복이 온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이 개판이 되고 엉망이 되고 우상천지가 된 겁니다. 이것을 단지파가 그 미가의 개인집에 가서, 요새 같으면 폭력을 행사해서 그것을 취해서 가져옵니다.

가져오는데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물건이지요. 그 때 미가가 “왜 내 물건을 빼앗아 가느냐?” 하니까 그 단지파가 하는 소리가, 네가 죽을래 아니면 내 놓을래, 이렇게 깡패 짓을 해서 강제로 빼앗아서 그 사람들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저 이스라엘 최 북쪽까지, 제일 끝까지 그 우상을 가지고 가요. 이스라엘을 삼손이 지켜주던 그 시절은 이미 끝나버리고 후대에 와서는 단지파가 엉망진창으로 되어서 자기 맘대로 이스라엘 제일 북쪽 끝으로 가요.

제일 끝으로 가니까 제일 먼저 날라 간 지파가 단지파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지파 자체가 사라져 버려요. 남이 우상 섬기는 것이 부러워서 ‘야, 저 우상을 섬겨서 부자가 되었으니까, 그 집이 부잣집이니까 저 사람을 우리의 사설 목사로 세우면 우리 지파가 얼마나 번성하겠느냐?’ 이래서 강제로, 그것도 돈도 안주고 강제로 폭력적으로 강탈, 강도질을 해서 가져간 겁니다.

이러한 단지파가 그 후대에 어떻게 되었는가? 열왕기상 12장 29절에서 30절을 보니까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는데 남쪽은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그 북쪽 이스라엘은 가짜지요. 남쪽으로 봐서는 이단인 겁니다. 어째서 이단이냐 하면, 솔로몬 이후에 남쪽 예루살렘이 중심이고 거기에 성전이 있으니까 그 성전에 사람들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상을 두 개를 만들어요.

한쪽은 벧엘에 두고 한쪽은 단에다가 만들어요. 성경 그대로 하면 28절에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애굽에서 인도한 그 신을 남쪽 벧엘과 북쪽의 단에 두고, 그 다음에 레위지파를 대신해서 보통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8월 15일을 유월절이라고 자기 맘대로 정해서 종교를 만들어놓고 가짜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로 섬기라고 한 거예요.

단지파가 섬겼던 그 우상을 제 아내하고 제가 직접 비행기 타고 가서 봤잖아요. 사진도 찍어 왔습니다. 그래서 북쪽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취급하지 않습니다. 아예 이방민족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단 지파는 날라 가 버립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단 지파는 이렇게 우상숭배를 했다, 하는 말을 할 잽이 되느냐 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단 지파 빼고 건전한 지파 우리끼리 구원하자 할 때 그것은 진짜 야곱이 예언한 그 주의 구원이 아니에요.

왜? 다들 자기 잘난 체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짜 구원을 핍박하고 배격한 그 당시 유대나라를 형성해버리고 말았어요. 우리는 건전한 사람이고 우리가 단 지파같이 그렇게 얍삽한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건전한 사람이고 우수한 존재다. 그렇게 해서 기본적인 선악에 의한 자기선행을 모집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바칠만한 교회, 하나님께 바칠만한 공동체, 그런 것들로 갖다 밀겠다는 그 의식자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리는 바리새인 같은 작당입니다.

오늘날 괜찮은 교회라고 하면 전부 다 공동체 운동하거든요. 민주화운동. 그것을 가지고 요새 좌파라 하는데 이걸 발음을 좀 빨리 하면 좌빨이라 해요. 전부 다 좌빨들.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 억눌린 자를 돕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예수님의 참된 낮아짐의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은 뭘 배제했는가? 그들이 뭘 배제했습니까?

악마를 배제한 거예요. 자기 속에 악마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십자가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의 대신 희생을 흉내 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되고,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자. 그걸 흉내 내고 있는 겁니다. 천주교가 그런 거예요. 천주교, 원불교, 모든 종교는 다 그래요. 사주팔자나 봐주는 기존의 조계종은 말고.

좀 건전하다, 배웠다, 의식 있는 목사, 의식 있는 신부, 의식 있는 중이라고 한다면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가장 악마적인 요소가 다 나오는 거예요. 자기들이 악마적이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악마적인 단 지파 같은 그런 것을 배제하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본문으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너와 갈라서라. 내가 건전하게 추구하고 싶은, 내가 건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것과 진짜 나와 갈라져야 돼요.

거기에 틈이 생겨야 돼요. 틈이 있을 때 그 틈에서 단이 올라오는 겁니다. 아, 내가 단 지파 같은 그런 위상과 그런 원천을 내가 갖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우리는 내가 원하고 요구하는 괜찮은 나, 멋있는 나를 갈라야 돼요. 균열이 일어나야 됩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세리, 창기, 강도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지 않고 차이를 구원해요. 내가 되겠다고 하는 그 나는 엉터리고 진짜 준비한 나, 그 사이에서 올라오는 그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하심, 바로 그것을 구원하지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차이 자체를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는 왜 복음 알고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지면 안 되느냐 하면, 매일같이 성령께서 우리차이, 틈을 보여주게 합니다.

잘난 체 하는 나, 복음 알았다고 으스대는 나.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바리새인들이 하는 그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상식이라면 누구나 동참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악마적 생각임을 우리는 상상도 못하지요. 건전한 나니까, 훌륭한 나니까. 그 나를 사실은 오늘 본문 말씀이 오히려 공격하고 있습니다.

건전함,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 오히려 독사의 독을 품은 것이 바로 접니다, 하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주의 구원이 얼마나 거저주시는 구원이고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간사하면서도 아닌 척 했고 세상 남을 이용하려고 덤비면서도 인격이 훌륭한 것처럼 착각한 저희들. 우리의 실상을 다 폭로시켜서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이는, 죄인의식을 가지고 십자가의 구원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90강-창 49장 16-18절(단에 대한 예언)190605-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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