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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7 07:08:15 조회 : 159         
20210604b 울산강의-역대기상 1장 1절 : 발산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10604b 울산강의-역대기상 1장 1절 : 발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내용에서 구심점 p, 모든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능력과 영생의 능력이 나오는 그 구심점 p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파내면 음각이 되는 음각 자체가 실체가 돼요. 경주에 가면 분황사 조각이 있지요. 구멍을 파내서 멀리서 보면 그 파낸 빈 공간이 분황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긁어내는 거예요. 내가 있던 자리를 긁어내는 거예요. 한때 너라는 괴물이 살았던 그 지점을 주님께서 깎아내는 버리는 겁니다. 그럼 텅텅 비겠지요. 빈 곳에서 뭐가 나오느냐? 부활의 능력이 나와요. 영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것이 그게 p점인데 p이 파낸 실체니까 p점은 하나님 자체가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 자체가 하나님의 죽은 자리에요. 하나님이 죽은 자리에서 부활의 능력이 나와요. 하나님이 죽은 자리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 있습니까? 이 땅에 없는 분으로 활동하죠. 이게 어려워요. 하나님은 없는 분으로 활동해요. 있는 존재가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인간 존재 자체가 있으니까 존재하는 인간이 붙드는 것은 전부 다 가짜 하나님이에요. 붙드는 나를 살려준다고 미리 예측하고 예상하는 하나님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믿고 내가 멀쩡하게 그대로 있으니까. 나의 존재가 하나님 믿고 난 뒤에 여전히 존재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말 자체가 나는 그동안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없는 분의 p점에서 양의 발산, divergence발산된다 했지요. 다시 p점으로 수렴되는 것을 음의 발산이라 하고. 또 이런 게 있어요. 0의 발산이 있어요. 0의 발산은 재밌는 게 구심점이 있어도 화살표, 벡터라는 수학의 화살표가 못 보고 덮치고 그냥 지나가요. 이게 0의 발산이에요. 발산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수학에서 벡터라는 방향을 가진 힘을 표시하는 이유가, 물리학에서 열이 어떻게 증가하는지 연구하기 위해서 물리학 이전에 수학이 등장한 거지요.

결국 이런 이야기는 뭐냐 하면 개체가 아니고 필드에요. 장이라 하지요. 어떤 영역을 구성하는 겁니다. 나 구원받았다, 너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케 하는, 아까 뭐라 했습니까? 판때기라 했지요. 오늘 제목을 판때기라 할까. 그 판때기란 모판, 그 필드,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공동의 것, 공동의 것이 이스라엘은 뭐였냐 하면 열두 지파 중 대표지파가 레위지파가 그렇게 해야 되고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었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걸 했으면 인격적인 왕이 필요하겠어요, 필요 없겠어요? 필요 없지요. 왜? 죽음이 제대로 가동되고 작동되거든요. 이스라엘이란 그 기계장치에 제대로 엔진이 가동되는 것은 죽음이 죽음답게 제대로 가동이 될 때 구심점은 거기서 죽은 자를 살려주는 복음의 힘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닮아서 저쪽 하나님 있으니까 저쪽 하나님 믿으니까 잘 사는 모양이라 해서 자기 분수를 넘쳐서 그만 우리도 잘 살아보자 해서 그런 바알 신을 믿잖아요. 힘을 주는 하나님, 나의 존재를 더욱 더 강화시키는 하나님, 나를 건강하고 부자 되게 하고 내 조직을 키우는 그런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 이거는 뭐 자기부인이 될 수 없지요. 하나님 덕분에 잘 됐다는 자랑거리만 계속 만들어내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없는 나라가 만들어졌잖아요. 그러면 없는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 기적이라면 그 기적은 한때로 끝나면 안 돼요. 이스라엘 내내 그 기적이 계속해서 유지가 돼줘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지속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명기 8장이나 9장에 보면 뭐냐 하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가서 집 짓고 배부를 때 갑자기 뭘 다 날려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날려버린 거예요. 그들이 구심점을 날려 보낸 거예요. 구심점을 뚜껑으로 덮어버린 겁니다. 이젠 자기가 구심점 되는 거예요.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사는 내가 구심점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p점에서 나오는 것은 운동이죠. 존재가 아니고 끊임없이 말릴 수 없는 운동입니다.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해볼게요. 지도에 보면 산들이 있을 때 산들 높이를 나타내는 이걸 등고선이라 합니다. 등고선은 지도라는 그냥 존재하고 있는 지도에 그림으로 표현되지요. 여러분 이 등고선에 올라가면 어지럽고 막 숨차고 그럽니까? 그냥 평면적 지도지요. 등고선, 이거는 500미터, 1000미터 등고선이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성경을 생각할 때 말씀을 생각할 때 이렇게 평면화 시킬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실제는 누가 실제냐 하면 성경을 보고 있는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등고선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이거는 지도책이고 참고도서에요. 성경은 참고도서지요.

지도가 살아 있습니까, 내가 살아 있습니까? 세상 사람한테 물어보세요. 누가 살아 있어요? 어느 누가 지도가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자기가 살아 있지요. 그런데 성도는 이게 반대가 된다 이 말이에요. 뭐냐 하면 등고선을 가지고 물리학에서 스칼라양이라 해요. 절대 값으로 표현해요. 수학에선. 여기서 바람이 분다. 등고선에서 바람 불면 뭡니까? 이걸 벡터양이라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실제로 필드, 힘이 작용하는 필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이 지도가 성경책이라면 우리는 이 지도를 보는 게 아니에요. 지도에 의해서 성경에 의해서 오늘은 성경 보기가 성경에 의해서 지배당한 겁니다. 오늘의 일은 내가 정한 게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그냥 문자라고 여겼던 이 성경책이 오늘 나한테 성령의 힘으로 지시를 한 거예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말씀을 인간의 말로 듣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 나오는 그 말씀대로 사도 바울이 성도한테 그런 이야기했다고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에” 그 다음에 무슨 말로 돼있습니까? 사람의 말로 받지 않는다는 말은, 흔히 말하는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무엇을 훼방하고 무엇을 고발하는 기능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을 만드는 힘이 있어요. 인간의 말은. “코로나 조심하세요. 이것 누구 말이에요?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국가의 말이죠.

코로나 조심하세요, 듣는 순간 뭐가 묵사발 됩니까?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말씀이 지적하는 나의 본질을 깔아뭉개게 되는 겁니다. 아아, 마스크 쓰고 살아야지, 라는 생각이 들지요. 그처럼 인간은 중립이 아니에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면 인간의 말이 중요하냐는 그 틈새에 끼어있는 사이존재, 그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에요. 그 두 톱니바퀴 안에서 인간은 깔아뭉개는 식으로 인간의 운명은 그렇게 살아가게 돼있습니다.

성도 아닌 사람은 그럴 리 없고 성도라면 하나님 말씀이 우선이냐,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자체도 말씀이 필요해서 하나님이 필요해서 살아 있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필요해서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느냐? 내 구원받고 천당 가기 위해서 성경 보고 있느냐를 구분해야 돼요. 어떤 성경도 나를 구원하는 성경은 없어요. 그런 성경 없어요. 나를 죽이는 성경 밖에 없어요. 나를 살리는 성경은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그런 게 없어요.

여러분 장기에 보면 장기 두는 사람이 장기 알을 차, 포로 앞으로 밀고 당기고 옆으로 한 칸 뛰고 하잖아요. 그럴 때 만약에 주님이 장기 두는 분이고 내가 만약에 장기 알에 속한다면 어떤 장기 알을 여기서 저리로 옮긴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라는 말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이 일을 해서 나한테 어떤 이익이 오느냐가 아니라 어제도 그렇듯이 1년 뒤도 지금도 그렇게 주께서 나를 다루고 계시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나를 더 이상 다룰 어떠한 권한은 나한테 아예 박탈되었음을 감사하는 겁니다. 그걸 굉장히 고마워해요. 아휴 내 인생에 내가 관여하지 않게 되어서 이제는 손 놓게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이렇게 된다고요. 그런데 불신자들은 내 인생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나를 천당 보내줘? 내가 믿던지 사랑을 하던지 소망을 갖던지 뭘 해야지. 해야지 내가 그래도 꺼덕거려야 천당에 턱걸이라도 하지. 이러면서 벌벌 떨어요, 지금. 무서워서. 세상도 얻고 천국도 얻고 두 마리 토끼 다 얻고 싶은 거예요.

역대상에 나오는 족보 하나는 사건들에 연결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 하나하나마다 전부 다 사건들이 하나님이 장기 두시는 분이 되어서 장기 알로 사용하신 거예요. 이들이 우리의 족보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분명히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성경말씀은 내가 뭘 하면 구원받느냐는 개체가 아니라 하나에 공통된 판때기, 필드, 영역, 장, 영역 또는 영토를 구성하는 거예요. 그리고 영토에는 무슨 점이 있다 했습니까? p점이 있지요. 이 p점은 모든 에너지가 나오고 분출되고 모든 에너지가 거기에 쏠리는 그 출구내지는 입구 발산점이 있지요. 그 발산점이 뭐라 했습니까? 죽음의 자리. 시범조로 누가 먼저 죽었어요? 하나님께서 먼저 죽은 죽음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서만 능력이 나오고 성도는 매일같이 여기에 빨려 들어가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게 장이거든요. 영역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어떻게 윤리도덕 같은 것은 신경 쓸 겨를이 없지요. 왜냐하면 착하다는 자체가 이게 모순된 게 나의 개체가 착함이 돼버리면 내가 따로 살아 있는 내가 구심점이 돼버려요. 그러나 구심점은 조건이 뭐냐? 죽어있어야 돼요. 내가 살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은 뭡니까? 각자, 각자 본인이 멀쩡하게 살아 있다고 내 믿음 알아달라는 거예요. 내 신앙, 내 소망, 내 헌신한 것, 봉사한 것 알아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은 수렴돼야 돼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의 미래의 의미가 종결, 아까 내 하는 의미가 어디서 종결됐습니까? 인간들은 존재자들은 어디에 종결된다 했어요? 나에게 종결되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은 예수 믿는 누굴 믿어요?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거라고요. 그래서 만날 하는 소리가 나 복음 안다, 예수 믿는 걸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그것 알아서 뭐할 건데. 주님 증거하라고 하니까 자기 믿음 증거하고 있어요. 그것 알아서 뭐할 건데요. 지난 수요예배 때 기도제목이 그거였습니다. 남한테 사랑받을 생각하지 말고 남한테 존경받을 생각하지 말고 남의 처지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래서 이 사건의 나열, 사건의 배열, 사건의 나열이 적당하네요. 족보는 뭐라고요? 사건의 나열. 그 사건을 제가 종이를 준비해왔어요. 족보 인사들이 있는 종이라고 칩시다. 제가 점을 찍어보겠습니다. 점을 찍었습니다. 인간의 시간은 존재적으로 봐서 존재가 되게 되면 과거의 기억에 의해서 현재를 생각하고 현재에 입각해서 미래를 생각하거든요. 내가 존재가 되고 살아 있으면 시간은 항상 일직선으로 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이 시간, 점찍은 것을 이렇게 봅니다. 딱풀 준비해왔습니다. 순차적으로 차례차례 진행된다고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게 흔히 말하는 구속사라는, 구속사가 이렇게 돼요. 그런데 성경은 구속사를 거부합니다. 이게 아니에요. 점찍고요. 이걸 꼬아서 붙인다고. 이렇게 돌아가는 게 아니고 반대로 뒤집어서 붙여요.

뒤에서 붙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앞면과 뒷면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p점은 파내고 파내면 음각이 돼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보이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거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나타나는 거예요.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읽어봐요. 오늘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아니란 말이에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따로 구분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선진들 있지요. 제일 먼저 아벨 나오지요. 아벨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아벨을 보지요. 보는데 그들은 아벨의 가치를 못 보고 있는 거예요. 가인도 못 봤어요.

그러면 아벨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지요. 그러니까 나타난 것과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게 ‘아니요’가 돼버리는 거예요. ‘아니요’가 나타난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식으로 나타났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믿음이 아니라 이 말이죠.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여기 한 번 더 해야 되는데, 지금 화살표로 돼있지요. 화살표를 이런 식으로 뫼비우스 띠라 하는데(1858년 독일의 수학자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뫼비우스와 요한 베네딕트 리스팅이 거의 동시에 독립적으로 이 띠의 성질을 발견했다.) 꼬아서 해버리면 전부 다 화살표가 이렇게 되거든요. 안 꼬면 화살표가 아래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위, 위, 위, 위 언제까지나 같은 면이에요. 그런데 꼬아버리면 위와 아래와 위와 아래가 뒷면의 위, 아래가 나중에 아랫면으로 돼있어요.

이게 뭔가? 선과 악이 전부 다 ‘악=선’이 되는 거예요. 선과 악, 위와 아래, 아래, 위, 위위, 아래아래 이게 전부 다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 땅에서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어요. 사적으로 개별적으로 내가 착하다, 악하다가 의미가 없다고요. 판때기가 율법 되는데 율법 안에서 악하다는 그것도, 죄인이라 하는 그것도 의미 없어요. 왜?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걸 새삼스럽게 죄인이라 해요.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하는 이것도 역시 있을 수 없고요.

필드라니까. 그 필드는 이러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선악이라는 하나님은 땅엔 없고 하늘에 있고 땅엔 인간들만 있고 하는 이 모든 개념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지워버리는 겁니다. 지워버리고 사건만 나열하는 거예요. 그 사건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땅을 파먹고 인간들 파먹는 식으로 진행되는 겁니다. 사건 하나하나가 세상의 종말의 의미를 담고 나타났다 이 말이에요. 사건 하나하나가.

여기에 역대상 1장 3절에 보면 에녹 있지요. 에녹이란 뜻은 새로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 에녹, 이미 시작했는데 새로 시작한대. 에녹은 그동안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기정사실화된 땅의 세계에서는 그는 죽음도 없어요. 에녹을 보는데 지금 에녹까지 계속 사람들이 아담 이후에 죽었더라가 연속되지요. 그럼 이 땅은 무슨 땅입니까? 죽었더라가 성립되는 땅이잖아요.

이 죽었더라가 있는 땅의 의미를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땅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에녹 때문에. 고로 따라서 에녹의 사건의 연속에 이어진 사람은 하나님과 이 땅에 살면서도 동행에 더 비중을 두면서 살아야 될 그러한 성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 등장하는 게 역대상 1장 4절에 보면 에녹 계열에 라멕 다음에 누가 등장하지요? 노아 등장하지요. 사건의 사건들을 배열을 하는 거예요.

그럼 노아가 훌륭합니까? 아니지요. 노아를 끊어버리는 노아가 죽되 노아가 훌륭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 모판에 그 판때기에 에녹 심고 그 다음에 라멕 심고 노아 심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은 연속적이다. 하나님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일은 멈추질 않고 다윗까지 왔다 이 말입니다. 역대상하는 그 목적이 다윗이 왕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율법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느냐? 문자인데 문자가 사람이 되느냐는 그 최정점에 이르러야 될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는 게 역대상하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셈과 함과 야벳이 있지요. 여기 6절에 보면,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디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다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더라” 그 다음에 8절에,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요” 이렇게 돼있지요. 이건 아나운서 수준 아니면 못 읽을 내용입니다.

자, 이들의 족보는 이들의 이름들은 바로 곧 땅의 이름이 돼요. 사건이 터질 땅의 이름, 그들의 출생 자체가 사건이 되는. 쉽게 말해서 장기 알들의 등장이에요. 하나님이 다루시는 장기 알들의 등장이에요. 여러분들은 어떤 차원에서 장기 알이 되었습니까? 무슨 기능을 받아서 무슨 역할 때문에 장기 알 되었어요? 이 물음이 여러분에게 의미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뭘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을 시키기 위해서 내일은 모르겠지만 오늘까지는 왜 살게 하셨는가?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산다는 것이 이게 과분한 일이란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 산다는 것이, 이것 뭐 안 살려줘도 되는데 왜 자꾸 살려줘요, 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기 때문에 더 살라는 게 아니고 뭘 하라는 일을 해야 돼요. 주의 일이 나와야 되지 살려주셨으니까 더 내가 살겠다는 의지가 나오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 의지를 중시시켜야 되지요.

목사님, 주의 일을 어떻게 합니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내가 안 살려 하면 주의 일이죠. 내가 살고자 해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더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하게 되면 그게 전부 다 마귀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 돼요. 베드로가 예수님 고난 받고 죽는다 하니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말릴 때 예수님이 베드로 보고 호칭이 달라졌지요.

“이 사탄아.” 그렇게 생각한 사고방식이 사탄이야. 네게 말리는 의도가 뭐냐? 도대체 뭘 노리고 무엇을 기대하면서 말리느냐? 우리가 이 땅에 사는데 왜 살려고 할 때는 뭘 기대하고 살려고 합니까? 뭘 원해서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해요? 뭘 기대하고? 말씀을 안 듣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무엇 때문에 말씀을 안 들으려고 그렇게 모든 모진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을 전하면 죽여 버리겠다. 그러한 마음이 무엇이 손해 본다고, 무엇이 다친다고 생각해서 그런 생각이 드느냐 말이죠. 그거는 나를 잃기 싫어서 그래요, 내가. 그동안 평생 살았던 고생했던 애썼던 내가 하나님한테 파냄을 당하기 싫어서 그래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보다 인생 실패처럼 느껴지거든요. 그 인간 없었다. 그것이 자기 자존감을 그렇게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여러분들이 땅의 사건, 장기 알들을 배치를 해봅시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땅의 일이니까 하나님이 없어요. 하늘 사진 찍어봐야 없어요. 땅의 일에 우수수 다 땅의 일에 하나님의 일이 등장합니다. 할 때 땅으로 그리지 말고 바다로 그리면 쉽습니다. 흑해 하나 그리시고 이쪽에 카스피 해, 둘 다 세계에서 제일 큰 호수들이죠. 그리시고 여기에 페르시아 만 그러니까 태평양 그리시고, 여기에 지중해. 바다만 그렸을 뿐인데 땅은 다 만들어졌어요.

이게 현재 터키거든요. 여기 야완, 여기 섬에 깃딤, 흑해와 카스피 해 이 사이에 두발, 메섹, 마곡,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지명입니다. 고멜, 도갈마. 에스겔 보면 나오는 거예요. 미스, 여기 현재 이란에 있는 것은 마대, 현재 시리아에 있는 아람,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는 것은 앗수르. 여기 아라비아 이쪽에 하윌라, 드단. 아프리카 이집트에 구스.

그리고 리비아 여기에 지중해 쪽에 붓, 이쪽에 가나안, 그리고 이쪽은 다 안 적겠습니다. 가나안에 있던 열 족속, 아모리 족속이 제일 밑에 있고, 헷 족속 있는데 열 족속(14~16절, 여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기르가스 족속, 히위 족속, 알가 족속, 신 족속, 아르왓 족속, 스말 족속, 하맛 족속).

여기에 지명들 나오잖아요. 터키는 오늘날 지명이고. 이 지명들이 누구 이름입니까? 사람이죠. 그럼 땅은 없고 뭐만 있다? 땅은 하나님의 사건, 장기 알 두는 의미의 역할을 보여주기 위해서 땅이 있는 거예요. 땅은 뭐냐? 공통 영역이에요.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은 땅의 속성에 의해서 누구든지 조금 살다가 전부 다 죽어야 되지요.

방금 제가 적었던 이것이 역대상 1장 1절부터 그 뒤에 구스, 구스는 이집트 여기까지 대충 그 동네 다 한 거예요. 가나안 땅에 블레셋도 있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역대상의 족보라는 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땅이 중요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에겐 장기 알이 중요한 거예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어요. 무조건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무의미한 인간 없고 인간이 보기에 무의미한 인간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아예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우선이고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을 지어낸 존재가 인간이다. 지어내는 그 방식이에요. 구스가 이집트도 되고 아라비아도 돼요. 이 동네에 흩어져 사니까. 1장 5절 봅시다. “야벳의 아들은”, 야벳은 아리안 족속의 원조입니다. 조상입니다. 아리안 족이란 것은 유럽과 현재 인도 종족의 원조지요. 유럽이나 인도 사람의 특징은 전부 다 코가 커요. 좀 서구 형이죠.

고멜은 갑바도기아, 터키 저쪽에 우크라이나. 마곡은 카프카츠 지방이고 마대, 메대는 현재 이란을 두고 메대라 해요. 메대 또는 마대. 야완은 에게 지역인데 현재 헬라인들이에요. 해안지역에 사는 현재 그리스 민족이 야완이죠. 두발,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 지역이죠. 그 다음에 메섹은 흑해 상단 지역에 있고요. 다시스라고 있는데 이건 해적 떼에요. 다시스, 7절에 나오는 해적 떼에요. 아스그나스라고 있는데 거기에 나올 거예요. 6절에 보면 아스그나스인데 이거는 앗수르 이 동네에 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 땅에 장기 알이니까 투하라 합시다. 딱 투하됐을 때 그 투하된 장기 알들이 어떤 본성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살고 너는 제발 죽어줘, 라는 범죄 한 악마에 속한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해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방법은 전쟁을 통해서 상호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 민족들이. 그게 사건이에요. 똑같은 인간이 똑같이 발작해서 똑같은 놈을 죽여라 이 말이에요.

잘난 사람 없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각자 살아가면서 자기가 가진 모든 죄를 최선을 다하여 나만 살고 너는 제발 좀 죽어줘. 나는 오래 살고 너는 일찍 죽어다오, 라는 그런데 활용되고 그런 속성으로 마음껏 장기 알로 발휘되도록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들을 유포시킨 겁니다.

10절에 봅시다. 구스가 또 뭘 낳았다 했습니까? 니므롯을 낳았어요. 니므롯은 당대의 영걸이다. 이거는 창세기 10장에 보면 나오죠. 니므롯 고향이 바로 바벨탑이에요. 거기서 갈라지는데, 역대상 1장 19절에,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아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때에 땅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이란 나누어졌다는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을 통해서 바벨탑의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나라가 다 갈라진 거예요, 흩어진 겁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당부라 할까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도, 정리해봅시다. 이건 그냥 말도 할 게 아니라 써야 되겠네요. 나에게서 나온 어떤 행동, 나뿐만 아니고 남도 마찬가지고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은 나는 더 살고 너는 제발 죽어줘, 라는 이러한 본성이 나오도록 주님께서 사건화 시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철저하게 죄를 어떻게 됩니까? 철저하게 죄가 발산, 계속 죄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 나오는 죄 중에 가장 나쁜 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안다는 죄에요. 하나님은 믿는 죄에요. 행동보세요. 하나님 안다 해놓고 속으로는 뭡니까? 지 살려하고. 자기 사는 것과 하나님 믿는 것과 이게 매치가 안 되게 돼있거든요. 왜? 진짜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이지 사는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근데 자기는 안 죽으려 하고 자기는 살려고 애를 쓰고 그러면서도 하나님 살려달라고 믿으니까 이게 엉터리 하나님이 아니고 뭐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강도한테 죽은 게 아니에요. 세리, 창녀한테 죽은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한테 죽었어요? 천하 최고로 하나님 잘 믿는 사람한테 죽었잖아요. 그들을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믿는 곳에 항상 악마 있다고 보면 돼요.

자, 1장 1절 다시 봅시다. 아담 그 다음에 누가 나오지요? 셋 나오지요. 아담의 맏이가 우리가 알기론 셋이 아니고 누구냐 하면 가인이죠. 가인인데 여기 아담 다음에 아벨도 안 나와요. 아담 다음에 셋이 나온다고요. 뭔가 여기에 단절이 일어났지요. 끊어짐이죠. 끊어지니까 이거는 인간들이 아는 자손으로 이어짐이 아니고 자손은 사이사이에 끊어짐을 통해서 인간을 존재로 보지 말고 불연속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돼요.

이 말은 역대상에서 이스라엘은 다 토막 나있다는 것.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게 하는 것은 다윗을 향한 그 판때기가 연속적이지 그 위에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믿었던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전부 다 하나의 레고 조각처럼 전부 다 패널처럼 모자이크처럼 다 깨져야 돼요. 산산이 다 화장실에 타일 있잖아요. 타일처럼 조각조각 다 깨어진 거예요. 어쭙잖게 갖다 붙인다고 그래서 하나의 그림 만든다고 한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인간의 개별자는 개별자 자체로 다 깨어져있어요. 부부가 부부일 수 없고 자식과 부모와 한 가족일 수 없는 이유가 교회가 교인들이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개별자기 때문에 다 끊어져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교회들이 하나 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자기를 죽은 자로 보고 상대도 그렇게 볼 때 비로소 대화가 통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야기가 안 통합니다. 이야기해봐야 지 자랑밖에 안 되는데 무슨 이야기가 되겠어요.

그 다음에 28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이렇게 돼있지요. 이것도 창세기에서는 원래 이스마엘이 먼저 나와야 되는데 여기선 이삭으로 바꿨지요. 다시 말해서 옛날의 존재의 연속에서는 이스마엘이 먼저 우선이고 시간의식으로선 이삭은 나중이지만 지금은 다윗의 입장에서 볼 때 그건 존재의 연속이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먼저 장자로 만들었다는 사건으로 그때 그 존재를 보자는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28절에서 33절까지는 그들이 살던 동네를 쭉 깔아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봅시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생각은 나를 더 살고 너는 제발 죽어줘, 라는 이 부정적인 요소를 땅에다가 쫙 깔아버리는 거예요. 땅을 시커멓게 만들어버리죠. 시커멓게 만들어져야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 시커먼 것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p지점에서 나오는 구원의 생명의 부활의 그런 에너지가 사건으로 다윗이 율법이 왕이 돼야 된다는 그 절차를 정당화하는 겁니다.

왜 율법이 인간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가? 인간에게 맡겨놓으면 개판 됐죠. 인간은 물고 뜯고 물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그냥 지켜라가 아니라 결국은 이걸 다 지켰다는 인물로서 등장시키는 그 목적으로 인하여 왜 인간은 안 되는가를 미리 쫙 보여주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될 수 없는가를 보여주면서 이스라엘 왕이 등장해요. 그 보여주는 시점에서 최종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는 누구의 자손입니까? 다윗의 자손으로. 복음은 다윗으로 자손으로 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적어볼게요.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 반응. 기분 좋고 감사합니까, 아니면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런 냉소적이에요? 어느 쪽이에요?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이 긴 말을 줄여버리면 뭐냐 하면 인간은 지옥 가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이거든요.

자, 지옥 가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이 기분 좋고 감사합니까, 아니면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게 나는 나를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분 좋고 감사함으로 다가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말씀이고 주님이고 아무 관심이 없다니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래 성경에 그런 교리가 있대.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내 일 한다.” 너 해라. 나는 내 일 한다는 거예요. 자기 존재가 더 중요한 거예요. 주님의 사건보다도 자기를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존재로 보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있어야 돼. 지금 나는 존재한다. 내일도 존재해야 돼. 모레도 존재해야 돼. 왜? 나니까. 그것밖에 생각 안 해요.

그런데 성도는 이상해. 왜 내가 살아있지? 주여 이것 반칙 아니에요? 죄인 같으면 죽여야지요. 왜 저를 살려두지요? 이것 반칙 아니에요? 아아 뭘 일을 하시려는 모양이다. 나를 살려두는 게 목적이 아니고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죽으심이 나오는 그 에너지, 그 하나님의 죽으심에 관심사를 거기다가 쏠리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더 살게 하시는 거예요.

43절에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을 치리하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린 왕이 이러하니라” 이렇게 돼있지요. 왕국의 문제에 있어서는 에돔이 이스라엘보다 그러니까 에서의 후손이 야곱의 후손보다 왕국을 먼저 건설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민족적이기 때문에. 이방 민족적이라 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위해서 그것을 지키고 보호해줄 나라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영웅적인 니므롯도 나왔지요. 영걸, 영웅적인 사람을 옹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처음에 어떻게 돼요? 왕이 있다, 없다? 왕이 없어야 돼요. 죽어야 될 존재가 무슨 왕이 필요합니까. 살려면 왕이 필요한데 살아 있는 것도 웬 횡재인가, 이상하다 왜 살아있지, 이러고 있는데 무슨 왕이 필요합니까. 주님은 나를 살려주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은 나에게 일을 시키는 분이지 살려주는 분이 아닙니다. 일도 없으면서 살아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 아니에요? 할 일도 없는데 왜 살아 있어요?

그 할 일이 뭐냐 하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죽으셨다는 그것을 전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는 식으로 자기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 없는 곳이 뭡니까? 지옥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이 세상은 뭐다? 지옥이라는 것을 발설하기 위해서 발설 또는 발산, 오늘 제목 참 곤란하다. 발산으로 할까, 판때기로 할까.

발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살아 있기 위해서 아까 어떻게 합니까? 파내면 남는 응답이 곧 포인트, 하나님의 p점, 구심점이라 했지요. 그걸 위해서 오늘도 나의 살고 싶은 생각, 내가 내 위주로 사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성령께서 그걸 긁어내고 파내는 겁니다. 나로 하여금 있어도 없는 존재, 그 존재의 뚜껑을 여니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살아 있는 것만 생각했지 주님 살아서 일하는 것은 생각 못했습니다. 도리어 내 사는 것이 주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 짓의 반복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주여 날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뜯어내셔서 내가 한 모든 것이 죄고 주께서 한 모든 것이 그 죄를 의롭게 하신 일인 것을 그래서 구원하고 있음을 세상에 나가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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