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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3 05:41:25 조회 : 173         
서울의존강의20210610a 베드로전서5장 10절(낯선 배치)-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124.254.211.180)
서울의존강의20210610a 베드로전서5장 10절(낯선 배치)-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5장 10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주님 가신 영광의 나라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거면 세상 입장에서는 없는 겁니다. 적어볼게요. ‘영광의 나라는 없다.’ 이 세상에서는 없어요. 주님 가신 그 세계는 없습니다. 이 지상에서 잡아낼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17장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께서 갑자기 변화되었어요. 그래서 변화산이라고 하는데 다볼산 (Mt. Tabor)에서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되고 난 뒤 만약에 그 이튿날 다른 사람이 그 소문 듣고 다볼산 정상에 갔다고 치면 거기서 예수님이 기다립니까? 없죠. 순식간에 왔다가 순식간에 날라가버린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 야고보, 요한도 잠시 뭐 봤어요. 엘리야와 모세를 봤고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봤는데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다시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면서 그 현장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이더라’ 되어 있어요. 예수님만 보이더라.

그러면 자기가 엘리야, 모세 본 것은 가짜였습니까? 본인이 이건 진짜라고 우겨도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어떤 근거는 없어요. 네가 눈 두 개 가지고 나도 눈 두 개 가졌는데 네가 가진 두 눈으로 봤다면 나도 볼 수 있어야 네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거야, 이 베드로야. 그런데 너는 봤다고 주장하는데 그럼 가보자, 그 현장에. 어디, 어디? 돌밖에 없는데? 나무밖에 없네. 봐. 그 이야기 말고 네 나머지 이야기도 다 설득력이 없는 거야. 어디서 구라를 쳐? 이렇게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 난감하죠, 베드로 입장에서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봤는데 참으로 봤는데 난감하죠. 오늘 강의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고난’이라고 해요. 고난은 역경이 아닙니다. 고난≠역경. 고난은 역경하고 달라요. 역경은 힘든 장애물이거든요. 장애물이라고 우리가 인식이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계획한 게 있는데 그게 뭔가 껄끄럽게 잘 안될 때는 그것을 역경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말로 고생, 장애물로 여기지만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없는 것처럼 고난도 이 세상에 없어요. 고난은 그 안에 포착, 포획되는 거예요.

고난이라는 것은 성도에게 체험은 되지만 그것을 남한테 설득해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기껏 해봐야 “너 천당 가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지?” 이런 식으로 역경 정도로 그들이 곡해를 해버려요. 해석을 해버린다고요. 고난은 고생을 하는 게 아니고 내 역경이 아니고 그냥 예상 밖에 홀연히 등장한 그 모든 것이 고난이에요. 마치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고난도 인간의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혼자 바보, 등신 다 되는 거죠. 완전히 주님이 성도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의 물리법칙은 동일한 공식을 가지고 똑같은 결과가 계속해서 되풀이되어 나와 줄 때 그것은 정식으로 진리로써 인정받습니다. 한 번 한 것은 안돼요.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측정을 해서 동일한 결과가 되풀이되어야 그것을 진리라 하는 겁니다. 3×5가 한번은 15되었다가 한번은 12되었다가 그러면 3×5는 진리값으로 할 수가 없죠.

그래서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인간 손을 떠났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 손을 떠난 것처럼. 인간 세계 말고 다른 세계에 영광이 있는 것처럼 인간 손을 떠났어요. 떠났기 때문에 인간이 고난에 들어가서 구원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은 고난을 내 마음대로 활용하겠다는 음흉한 속셈에 불과합니다.

천국 가는데 고난이 있어야 되겠구나. 그럼 고난 받지 뭐. 고생 좀 하지 뭐. 선교사로 나갈까? 북한 갈까? 이런 식으로. 북한 가서 아오지탄광에 들어가서 거기서 복음 전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 자꾸 시나리오 쓰지 마세요. 역경을 기대한다는 것은 고난도, 하나님의 영광도 내가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는 건방짐에 해당됩니다. 교만에 해당돼요.

고난은 그냥 닥치는 거예요. 길에 가다가 바람이 불어서 휴지가 하나 얼굴에 딱 붙어 떼어보니까 이번 토요일에 당첨될 복권을 받았다. 그런데 버리고 싶어서 쓰레기통을 찾다가 쓰레기통이 아직 덜 차서 지금 버리나 안 버리나, 그냥 나중에 버릴 때 버리면 되지, 했는데 10억짜리가 되었다. 고난입니다. 역경이 아니고 고난이에요. 왜냐하면 그냥 공중에서 두 바퀴 반 돌고 얼굴에 붙었으니까. 세 바퀴 돈 것도 아니고 두 바퀴 반 돌았으니까. 나한테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죠.

그러니까 고난 속은 마치 하나님의 영광과 같아서 내가 익히 기존에 알던 나의 삶의 방식이 전혀 먹히지 않는 그러한 특이점을 가진 새로운 영토에요. 특이영역이에요, 특이영역. 물리에서는 이것을 특이점이라고 하는데 물리학에서는 이것을 블랙홀이라고 해요, 블랙홀. 기존에 있는 모든 물리법칙이 그 구멍 안에 들어가면 전혀 통하지 않아요. 양자법칙부터해서 상대성 원리도 통하지 않는 특이점이 있는 것처럼 특이영역입니다.

특이영역의 특징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과 모든 성경해석도 이 특이점 안에는 소용없어요. 내가 아는 신학으로 내가 아는 기도술로 불러내는 것은 사무엘을 불러내었던 여자 무당이나 하라 하세요. 병 고치는 권사나 하라 하세요. 왜 이 고난이 특이점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없는 나라에요. 보여야 있죠. 없는 나라인데 ‘없다’는 인간의 지식으로 인간의 능력으로 포착되지 않는다는 그 속성이 그대로 지상에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이것이 일종의 블랙홀이라면 특이점이라면.

그래서 인간이 고난을 받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고난에 낚여야 돼요. 고난이 덮쳐 와야 되지, 내가 고난을 찾아가면 안돼요. 그것은 유사고난종교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데 목재상에 가서 적당한 나무 잘라서 사가지고 집에서 못하고 망치로 못질해서 십자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단 주의할 것은 옆집에 방해되지 않도록, 똑딱똑딱. 만들어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치수 계산해서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적당히 무게감, 중량감 느끼도록 십자가 만들어서 연습 삼아 몇 번 져보는 거예요. 져보면 결리거든요. 결리면 어깨에 덧대서 안 다치게 해가지고 몇 번 져보는 겁니다. 십자가 만들어내서 십자가 질 수 있어요.

어디로 가야 됩니까? 어디 뭐 상도동 가야돼요? 버스 몇 번 타야 돼요? 어디로 갑니까? 주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했는데 베드로 하는 말이랑 똑같아요. ‘주여, 어느 방향으로 가셨어요?’ 주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가는 곳에 네가 못 온다는 겁니다. 아니 주님 가신 길에 베드로가 갈 수 없다면 그럼 그 전에 하신 말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따라오라고 해놓고 주님 쪽에서 네비 다 꺼 놔버리고. 그러면 어느 주소를 찍어야 갈 수 있어요? 어느 주소를 찍어야......

그럼 혼자 십자가 지고 벗었다 지고 벗었다 하면서 자기 가슴을 치면서, 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옆에 파스 열댓 장 사놓고는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외치면서 있으면 주님께서 대단하구나. 이렇게 겸손할 수가. 내가 찾아올게. 뭐 그럴 줄 알았지롱? 택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그런 건 없어요. 고난은 덮치는 것이고 남한테 설명해도 설명이 불가합니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릴 텐데 못 그리는 것은 여러분들 다 아시니까 감안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병아리 그림에서 머리 위에 얹어진 계란껍데기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막 계란 깨고 나왔다는 거예요. 이 껍질이 고난이에요. 하늘에 계신 주님이 이 땅에 올 때 뭐를 깼어요. 성령에 의해서 오셨거든요. 성령에 의해서 오셨기 때문에 항상 예수님 머리에는 이 하늘나라와 땅에서는 결코 연결점이 없음을 알리는 증표, 그게 바로 성령입니다.

요단강에 성령 오실 때 마가복음에 뭐라고 표현되어있느냐 하면 하늘이 열렸다고 되어 있어요 (마가복음 1장 9절-10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그러면 성령오기 전까지는 하늘이 닫힌 거예요. 하늘을 열리게 하는 그 전담반은 성령이 하시지 인간이 못 엽니다. 인간이 낑낑거려가지고는 안 열려요. 하나님이 열어주고 성령이 열어준 그 가운데서 성령이 그 많은 인간가운데 예수님께 오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되시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인공 아닌 사람에게는 오질 않아요.

예수님께 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결코 영원토록 천국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의 다른 별칭이 ‘아들의 나라’에요. 예수님 나라가 천국이에요.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골로새서 1장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니까 너희들로 하여금 흑암의 권세에서 이끌어내사 아들의 나라에 들어가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내가 하늘에서 와서 이제는 아버지께 들릴 때가 되었다 (요한복음 12장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하늘에서 오셔서 나는 너희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 13장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12장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되어 있어요. 들린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 3장에도 나오죠 (요한복음 3장 13절-14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모세가 장대를 들 듯이.

장대를 든다는 말은 평소에 땅을 보며 늘 있던 백성들의 시선 처리가 항상 지표면,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민수기 21장에서 어느 순간에는 땅 보지 말고 뭔가 땅을 떠난 다른 시선처리를 모세가 요청한 적이 있어요. 땅에 주어진 이 불뱀이 땅에서 살던 불뱀인 줄 너희들이 알고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물도록 물어, 물어! 배후에서 시킨, 그 불뱀이기에 이 불뱀의 동작과 너희들을 공격한 그 점과 하늘에 계신 분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뱀모양의 놋뱀을 만들어서 장대형식으로 해서 아래가 아니라 위,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것을 보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불뱀처럼 땅에서 일어난 일과 하늘에서 일어난 일이 동질의 일로서 주님의 일은 땅에 일어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하늘에서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마라. 하늘의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땅에서 개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놋뱀을 든 것같이 땅에서 살던 인자가 십자가, 부활로 인하여 들릴 때가 온다는 겁니다.

니고데모보고 네가 유대인의 선생이면서도 어떻게 땅에서 하늘의 일을 못 찾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못 찾느냐? 옛날부터 모세는 이미 땅에서 일어난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누누이 당부를 했건만 어떻게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는 연결 사건들을 네가 왜 파악을 못 하느냐? 소위 선생이라고 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인간이 하늘 쳐다본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벌어진 하늘의 일과 관련성을 일찍 지어줘야 주님 가신 코스로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겁니다. 땅에서 일어난 주님의 일, 하나님의 일,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바로 고난이라고 하는 거예요.

고난이라는 말은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좀 쉽죠? 그런데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아무리 설명해도 난감한 이야기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그 다음에 나온 이야기에요. “그리스도” 그 다음에 뭡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 참, 그리스도 안. 이게 정말 어려워요. 아까 제가 제 딴에 쉽게 한다고 한 것이 바로 ‘특이점, 특이영역’이라고 한 거예요.

뭔가 안, 공간, 특이 공간. 안(in)이니까 공간성이잖아요. 반경 몇 km입니까? 를 물을 수 없는 공간이 있어요, 이 땅에. 뭐 그런 공간이 다 있어요? 면적이 얼마입니까? 를 물을 수 없는 공간. 그게 무슨 공간이냐? ‘그리스도’ 해놓고 ‘안(in)’ 이라는 전치사를 붙여버리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냔 말이에요. 어디 있는데? 우리는 ‘어디 있어? 그 형태가 어떻습니까?’ 이런 걸 막 묻고 싶은 거예요.

어렵지만 설명해야 되겠죠. 오늘 나오는 첫 번째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땅에서 시간과 공간 안에 있어요. 우리는 이미 안에 있다고요. 시간과 공간 안에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건 중요하기 때문에 한번 써볼게요, 시간과 공간 안에 개체가 들어있죠, 그렇죠? 그러면 ‘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낸 겁니다, 조성한 거고. 그래야 안(in)이라는 의미가 성립돼요.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디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 영역은 시간과 공간이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기존의 시간, 공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덮치는 거죠, 낙하산처럼 덮치는 겁니다. 사적으로 구원해달라고 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개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밖에 안돼요.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런 것밖에 안된다고요.

뭐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합시다. 할 수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어요. 성경이 오죽 어려워야죠. 어떻게 설명해도 한계가 있어요.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되어있단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기가 먹고 살아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이 하는 행세, 그만큼 해왔던 짓을 보란 말이죠.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느냐?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 그게 가장 기본적이죠. 그것 말고 다른 기본이 없잖아요.

심지어 영화관에 가도 팝콘 들고 가잖아요. 뭐 배고픈데 영화가 재밌겠어요? 뭐 먹어가면서 버터발린 옥수수 팝콘 먹어가면서 배도 채우고 배가 차야 영화도 재밌잖아요. 그게 현재 기존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인 동시에 우리는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벗어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일말도 없습니다. 애한테 묻습니다. “너 커서 뭐 될래?” 그것을 왜 묻느냐. 커서 뭐 된다는 것은 이미 시간이잖아요. 우리가 무엇이 되어 만나리. 어디서? 공간이잖아요, 공간.

<엽기적 그녀>보세요. 그 영화 보면 나중에 나무 밑에다가 시간 캡슐 집어넣고 만나자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만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출세 못하면 부끄러워서 동창회도 안 나오는데 왜 만납니까? 사람이 10년 후에 만나자 해놓고 못 만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벌써 안목이 세련되어졌기 때문에 옛날 인물은 내 취향이 아닌 걸로 이미 달라졌어요.

촌에서 시골교회 피아노 치는 것도 아니고 풍금 치는 그 아가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죠. 왜냐하면 총 주민 546명 가운데 제일 예쁘니까. 뭐 반하고 난리 나죠. 네잎 클로바 뜯어가면서 문방구에 가서 반듯하게 비닐 코팅한 것 주면서 지장 찍고 이것처럼 영원하자. 그래가지고 걔가 서울로 이사 가서 유학가 보세요. 그다음 한 10년 뒤에 시간 캡슐 열려고 가보면 그 아가씨는 인물도 아니죠, 뭐. 촌닭이죠, 컨츄리 꼬꼬. 내가 미쳤지. 뭘 보고 십년을. 아이고 미쳤다. 그거 보고 그 다음부터는 약속시간 안 나가죠. 여자 혼자 기다리고. 내가 갑자기 드라마를 써버렸네. 이야 이거 재밌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드디어 약 올라서 보따리 싸가지고 수소문해서 찾아오는 그 장면, 아까 건 1회분이고 이제 드라마 2회분 들어간 거예요. 우연히 만나서 그 땐 누군지 모르다가 나중에 재벌3세 되서 결혼하고.

변동 상황에서 시간과 공간이 우리를 창조하는 겁니다. 그 때의 내가, 내가 아니에요. 우리는 어떠한 체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인간 자체가 세상 보는 눈이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합니다. 나도 내가 내일 어떻게 달라질지 몰라요. 변함없다. 우리 사랑 영원하자. 네가 영원을 알기는 알아? 여기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한번 읽어보세요. 더 어렵습니다. ‘하늘나라는 네가 살던 방식 아니다’ 그 말이거든요. 자 그다음 한번 읽어보세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 안에서...... 이것은 미치는 겁니다. 해석 자체가 안돼요. 해석을 하려면 다른 쉬운 것 가지고 어려운 것을 풀어줘야 해석인데, 너네 집 어딨노? 미장원 옆에. 미장원이 어디 있는데? 우리 집 옆에. 이게 해석이에요, 이게? 말이 안 되죠. 둘 다 동일하게 어려워요. ‘하나님 나라’ 해놓고는 ‘성령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럼 성령 안은 어디 있나? 하나님 나라에 있지. 지금 놀리는 거예요, 뭐에요? 들어오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들어오지 말라.

사도행전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되어 있죠. 그리고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자, 이 점을 이렇게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목숨 버릴만한 가치를 얻지 못하면 고난 속에 안 들어온 것이다’ 하늘나라 속에, 성령 안에 안 들어온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어떤 낯선 곳에 들어가려면 기존에 내가 나를 지키던 방식이 총동원되거든요. 들어갈 만해서, 내가 다칠까, 안 다칠까? 이거 너무 심한 모험이 아닌가? 수백 번도 더 검토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을 저는 두 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춤. 주춤하는 거예요. 또는 좀 천박한 말로 간보기. 깨작깨작 간보는 거예요.

과연 이 복음이 나를 살리고 천국 보낼만한 것인가 내 쪽에서 간을 보는 거예요. 그 간보는 것은 기존의 시간과 공간에서 인간이 살 때까지 해왔던 그 짓이에요. 저 사람이 나와 사귀고 난 뒤에 얼마나 많은 손해가 있고 얼마나 많은 이익이 있고. 그 손익계산을 해서 손해보다는 이익이 많다 싶으면 간보는 식으로 한번 사귀어 볼게. 그게 흥정이고 그게 하나의 기대잖아요.

사람이 결혼할 때 청첩장 돌리고 결혼식하고 뭐 그렇게 하는데, 이제는 말한다. 전에부터 이야기했지만 분명히 얘기합니다. 결혼은 동업이다. 결혼은 동업이에요. 저 인간 만나서 내 수입이 얼마나 증가하나. 내가 쇼핑하는데 지장 있겠느냐. 그거 계산하는 겁니다. 그걸 결혼 전에 누가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요. 사랑으로 하는 줄 아는데 사랑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랑은 없습니다. 잠시 있었는데 그게 돈으로 변해요. 돈으로 측정된다고요. 사랑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고 돈이 밥 먹여주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미 인간은 누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이미 정해졌어요. 나는 나만 사랑해요. 나만 사랑하니까 들어갈 틈이 없어요. 내 사랑에 협조 가능하면 사랑해주고.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내가 계속 존재하는데 필요한 돈이 필요한 거고 그 돈 대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까이 거, 사랑한다는 말, 그거 뭐 돈도 안 드는데 얼마든지 해주지 뭐, 해주면 되죠.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됐냐?”

남편이 있다가 아내보고 “당신 나 사랑해? 진짜 사랑해?” 두 번 물으면, “너 오늘 무슨 저지레했지? 야, 이거 안하는 짓을 하고 있네? 뭐 또 용서구할 게 있어? 사랑해. 들어보고. 일단 들어보자.” 들어본다는 말이 뭐냐 하면 저 인간이 저지레한 것이 돈으로 계산해서 얼마나 손해 봤는지 그걸 하는 거예요. 사실은 과속해서 7만원 긁혔어. 그러면 딱 계산해서 올해 들어 몇 번이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다 돈입니다. 동업이에요.

인간은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사랑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전부다 자기가 최종점이에요. 이것이 기존의 시간과 공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낯선 곳에 가더라도 자기 자신을 놓치거나 잊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신보고 이야기해요.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으면서)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맨션 세 채, 초막 세 채 짓자고 말한 그게 뭐냐 하면 이거 지어서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 거예요, 베드로가. 내가 살아왔던,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일체 용납이 안 되는 그런 세계가 올 줄은 베드로가 상상도 못한 겁니다. 내가 나를 지켰던 그 수법과 그 스킬, 기술이 전혀 먹히지 않는 그 세계로 주께서 데려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오지 말라고 한 거예요. 네가 올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상상한 세계가 아닙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갈 수 없다면,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아가서 한번 보겠습니다. 아가서 보고 사도행전 13장 38절 보겠습니다. 아가서에서 두 구절 찾아보겠어요. 아가 3장 6절,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그 다음에 나온 말이요,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냐. 솔로몬의 애인이죠, 술람미 여인. 거친 들에서.

주님께서 거친 들 같은 이 세상에 오셔서 거칠게 사시다가 주님께서 하늘나라 갔다면 그 코스는 이제부터 유일한 생명의 코스이고 다른 길은 없어요. 그 거친 들 이외에는 다른 길 없습니다. 주님 가신 길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거친 길이에요, 거친 길. 얼마나 거친지, 거칠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통과할 수 없는 망가질 대로 다 망가져버린, 파쇄 된, 종이 파쇄 되듯 다 파쇄 되는 것을 겪어야 되겠죠.

아가 8장 5절에 보면,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그러니까 이 솔로몬은 무엇을 좋아하느냐 하면 자기 여자가 거친 들이라는 그 조건 자체를 짊어지고 오는 그 여인을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히 사랑해야 될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그 거친 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주제는 뭐냐. 고난을 통해서 구원이 아니라 그냥 고난이에요. 고난 자체가 걸어오는 거예요, 주님한테. 마치 아버지 앞에 주님이 고난 자체, 십자가 진 자체로 아버지한테 가신 것처럼. 자기 십자가 지고 그 고난 자체가 걸어서 너로 인하여 내가 흘린 그 십자가 피가 나에게로 오게 하라, 이 성도들아. 나에게로 오게 하라. 너 말고! 짊어진 그 십자가 피가 오게 하라. 그 놋뱀이 오게 하라. 너는 모세처럼 놋뱀이나 들어라 이 말이죠.

남이 욕을 하든 말든 내가 원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역경이 아닙니다. 역경을 내가 딛고 안 딛고. 역경은 내가 아직 살아있고 내가 부정되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고난은 고난이 나를 삼켰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는 고난만 돋보이고 나는 그 안에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없이 그냥 낯설기만 한 거예요. 무중력 상태에요. 오늘 제목을 ‘무중력 상태’로 할까? 무중력 상태. 자기 몸을 가눌 길이 없어요. 분명히 남들과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안에 살면서 본인만 무중력 상태에 포획 되었어요.

마치 베드로에게 이야기하듯이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처럼 베드로가 던지고 사도가 던진, 주님이 던진 그물에 포획된 고기처럼 뭔가 보이지 않는 그물이 나를 그 안에서 놀게 하는 거예요. 낯선 공간이 되게 하는 겁니다. 기존에 내가 했던 원칙, 착실함과 착함은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그 새로운 낯선 공간.

그 복음적 이야기를 어느 가수가 유행시켰어요. 가수 이름이 기억나요. 김용임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하는 노래가 있어요. 밧줄로 꽁꽁 나를 묶어라. 나를 사랑의 밧줄로 포로 잡아가라 이 말이거든요. 얼마나 출애굽적입니까? 김용임씨가 그걸 의식하고 복음적으로 한 건 아니지만. 사랑의 밧줄 꽁꽁 묶어라. 사랑의 밧줄로 당신한테 끌려가는 행복을 누려보자. 당신한테 포로된 행복을 누려보자.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면요, 사랑의 밧데리 같은 건 아무 필요 없어요. 밧데리는 갈아야 되잖아요. 이건 갈 필요가 없어요. 뭐 온 몸에 사랑의 자국이 있어, 너무 묶어가지고. 그러나 이걸 풀면 안돼요. 꽉 조여야 돼요. 꽁꽁 묶는 거예요. 내 욕망, 취지를 용납 못하게. 내가 내 힘으로 살겠다는 그 못된 옛 성품이 이 동네에서는 무용지물 되게. 김용임씨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왜 고난이라는 말을 하느냐. 이 세상 자체가 목숨을 끊는 세상이 아니거든요. 이 세상 자체가, 이 시간 공간이, 이 인간세상이 목숨이 끊길까봐 걱정하는 세계지, 목숨을 알아서 끊는 세계는 아니에요. 그래서 이질적이에요. 너무 복음이 좋아서 ‘그까짓 거 내 목숨은 어떻게 되도 괜찮습니다’ 이런 게 아니에요.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이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참 대담한 선언인데 선언하면서 이 형용사를 썼어요. ‘다른’. ‘다른’의 3종 세트에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라 했어요. 이 말은 성령, 예수, 복음이 유포되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세상에서. 단어가 유포되고 있으니까 그 단어를 쓰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가 아닌가? 이 단어 쓰는 것도 어디냐. 이 단어 쓸 정도 같으면 일단 그 사람은 구원된 사람이라고 봐주자. 안 그래도 지금 쪽수가 모자란 판에. 가뜩이나 숫자도 적은데. 대충 이 umbrella, 이 우산 속에 들어온나, 이 핵우산 속에.

하나 놓칠까 싶어서 대충 전부 다 들이는데 사도바울은 대담한 이야기를 해요. 다른 복음과 복음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나는 인정 못하겠다. 다른 예수와 진짜 예수님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없으면 나는 인정 못하겠다. 다른 성령과 성령을 구분할 줄 모르면 나는 인정 못하겠다. 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누가 줬느냐 하면 악마가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악마가. 그러면 악마 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바로 나오죠. 너 잘났다, 그래. 너는 뭐 그리 잘났는데 함부로 평하느냐? 너는 네 관점에서 보니까 네가 옳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논리에 일관성이 있어야지. 네 잣대만 옳고 우리 잣대는 틀렸다는 근거를 대라. 이렇게 나오겠죠. 네가 진짜 사도인지 증명해보라.

그 뒤에 고린도후서에 11장 이후에 쭉 나오는 이야기가 나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환난과 고난 받았다고 나오는 거예요. 환난과 고난 이야기가 쭉 나와요.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의 행적과 동일한 행적이 주께서 나에게 강제로 그 주님의 고난을 주님 스스로 재현하는 데에 자기를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 자기가 고난 받아서 이만큼 하면 천당 가겠지, 하고 노리는 게 아니고 지금 주님이 살아계셔서. 살아계신다는 말은 안 노시는 거예요, 살아있어서 계속해서 사도에게 묻는 것은 “네 목숨 건질래, 복음 건질래?” 라고 주께서 촉구하시면서 주님 가신 그 길로 가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게 했을 때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일단 주께서 사도바울에게는 챙길 것을 챙겨줬어요. 그게 뭐냐. 삼층천이라는 거예요, 삼층천. 그 삼층천을 사도바울은 은혜라 했어요. 그 삼층천에서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지적하는 것이 허용이 안 되는 세계에요. ‘나 여기 있습니다’ 가 허용이 안 되는 세계. 삼층천에서는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만 통용되지 나 여기 있습니다, 는 필요 없어요. 주님 거기 계시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거든요. 증인은 본래 증거 해야 될 본 주인이 없으면 증인 자체가 무의미한 거예요. 증인만 덜렁 있고 본 주인공 하나도 없으면 그건 말도 안 되죠. 아니 영화 보러 갔는데 등장인물 쭉 나오고 영화 끝나면 그게 무슨 영화에요? 보이지 않는 주인공 옆을 강강술래 하듯이 등장인물들이 둘러쳐서 뭔가 계시다고 한다면, 성령 받은 사람의 공통점은 각자 자기 자신을 안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 순간에 가운데 계신 분을 보고 있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는 분들은 주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를 안 하고 주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자기 이야기를 안 하니까 시비 걸 건덕지가 없죠. 너 이번에 기도 몇 시간 했어? 두 시간. 난 세 시간 했는데. 이런 이야기가 안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너 몇 시간 시켰어? 세 시간 시켰어. 난 두 시간 시켰는데 너 고생 좀 했네.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앞에 헌금 얼마 시켰어? 난 만원했어. 난 오천원밖에 안했는데 넌 돈 많이 날렸네. 이런 이야기.

항상 ‘주께서 살아계셔서 주께서 하게 하셨다’만.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저건 하여튼 교회 올 때마다 늦게 와.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저 사람은 하여튼 주께서 꼭 늦게 오게 하셨어. 그것도 매주 그것도 시간 맞춰서 꼭 35분. 예배 시작 10분 후에 와. 앞에 기도하고 그런 거 다 지나고 꼭 그 때 와. 아닐 건데 자기가 행사 싫고 설교만 들으려고 오는 거 아닌가? 한번 물어보자. 주께서 그렇게 하셨어. 이렇게 하네. 그럼 믿어줘야지. 그런데 너무 정확해. 주께서 하셨다면 그렇게 매번 정확할 리가 없는데 하여튼 믿음은 안가지만 말을 들어줘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데.

이걸 다른 말로 오늘 본문대로 하면 고난이 그렇게 내 머리 위에 계란 껍질 뒤집어씌운 거예요. 계란 껍질이 없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계란 껍질을 뒤집어 써야 돼요. 이걸 벗겨버리면 안돼요. 그럼 병아리 되어서 안돼요. 계란 껍질 있어야 이게 거듭났다는 뜻이에요, 이게. 방금 막 태어난 거예요, 병아리처럼 노랗게. 뭘 찢고 깨고.

그야말로 어디서 나왔는가? 거친 들의 생산품이에요, 거친 들. 이 세상은 거친 들 아닙니다. 주님이 거친 들이라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주님의 체험에 입각해서 그 동일한 체험, 거친 들의 체험이 흠뻑 젖어든 사람이 바로 고난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걸 사도행전 14장에서는 우리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된다고 이야기한 거죠.

그럼 아까 제가 남겨둔 이야기해봅시다. 사도행전 13장 38절부터 보면 이것 지금 사도바울이 설교한 거니까 제가 그냥 읽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사도 바울이 이 현장에 와서 저와 여러분들께 설교한다고 보세요. 사도이기 때문에 진짜 귀신이 알아 모시는 사도에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으니까. 귀신나라에서도 유명한 분이 설교할 때 어떤 식으로 설교하는가. 38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이 사람은 예수님이죠.

이게 설교내용이에요. 죄 사함이에요. 죄 사함이니까 이걸 듣는 우리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라는 반응을 보이면 안 되고 우리가 그동안 내가 있던 시공간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게 어둠의 권세거든요. 내가 뭐 남보다 나쁜 짓했습니까? 이렇게 되물으면 안 되고 태어난 그 자체가 죄에서 못 빠져나오는 형편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죄의 권세에서 못 빠져나왔으니까.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그까짓 내 목숨보다 더 월등하게 소중한 내용이에요.

나는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밥 먹고 살았다, 이 내용보다도 나는 주님이 오셔서 죄 사함의 능력을 받았다는 이것이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하다든지 그런 말은 그 앞에서 들이댈 가치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거예요. 내가 나 살려고 행한 내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심이 결국 우리에게 죄 사함으로 주어진 거예요. 이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내 힘으로 죄가 안 사해지니까 문제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식으로 착하게 해서 죄를 씻으려는 그 자체가 곧 지독한 죄였음을 다시 한 번 우리가 소급해서 정리될 수 있는 거예요. 39절에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갑자기 우리를 하나님께서 천하의 의인으로 대우해주시는 겁니다, 의인으로.

머리에 고난의 달걀 껍질 하나 덮였을 뿐인데 우리로 하여금 ‘반갑다 친구야’ 되는 겁니다. 이 천국 친구야, 이 의로운 친구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죄라는 죄는 하나도 묻어있지 않은 이 깨끗한 친구야. 형용사가 붙으면 붙을수록 점점 더 미안해지네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쁜 생각, 나쁜 말, 나쁜 의도 하나 없이 깔끔하게 된 나의 친구야. 돈보다 친구가 더 낫다, 돈보다. 이 친구.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다. 너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 이 이야기. 이게 귀신도 알아주는, 귀신도 저 사람은 사도 맞다고 인정해 준, 하나님이 보낸 사도라고 했던 그 사도 바울이 한 설교의 핵심 부분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설교가 뭐냐 하면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열심히 해서 구원받았다, 죄 사함 받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난 뒤에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48절 다시 보세요. 그럼 믿을 수 없는데 어떻게 그럼 천국 가는 사람이 발생되는가.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것은 주님의 일방적 조치로서만, 말씀만 준 게 아니고 말씀을 믿게 한 그런 어플리케이션, 그 앱까지, 아이디, 비밀번호까지 한꺼번에 다 준 거예요.

지식만 준 게 아니고 이 지식이 아니라 곧 너희에게는 현실 그 자체인 것을 알게 하는 눈까지 뜨도록 성령께서 영생 준 자에게 성령을 꽂아주는 겁니다. 꽂아주는 거예요. 야, 친구야 너 통장에 돈 십만원 넣어줄게. 넣어줄게. 벌써 세 번 네 번해도 소용없어요. 전화를 이렇게 해야 돼요. 친구야, 네 통장 한번 조회해봐라. 십만원 꽂혔을 거야. 꽂혔다는 말. 십만원 꽂혔다.

아무개야, 너한테 영생 꽂혔다. 성령 꽂혔다. 우리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성령 꽂혔잖아요. 정말 여러분 성령 꽂혔습니까? 10분 쉬는 동안 한번 확인해보세요.

 첨부파일 : 서울의존강의20210610a 베드로전서5장 10절(낯선 배치)-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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