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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2 10:28:04 조회 : 116         
나타난 성전(2022년 여름 수련회 교재) 이름 : 정석훈(IP:121.165.234.111)
[ 나타난 성전 ]

- 에스겔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동일성

어떤 대상 O(object)가 관찰 가능한 어떤 세상에서 어떤 속성 P(property)를 가진다면 오직 그때 속성 P는 대상 O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리고 가능한 세계 W1(world 1)에 거주하는 대상 O1이 W2에 거주하는 대상 O2와 동일성 관계를 만족하는지 여부는 동일한 속성으로 유지되는지를 파악하면 된다.

공 시간적 동일성과 관련되는 예를 들면, 어떤 큰 나무가 있는데 좌측 방향으로는 호랑이의 머리가 보이고, 우측 방향으로는 호랑이의 꼬리가 보인다. 여기에서 나무 좌우편에 보이는 “저 호랑이가 이 호랑이와 같은 호랑이인가?”를 물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몸 전체가 다 보이는 호랑이를 어제 보고, 오늘 또 본다면 그 호랑이가 과연 동일한 호랑이인지를 질문할 수가 있다.

이번에는 옷감을 잘라보자. 원단의 재질과 거기서 잘라낸 자투리 옷감의 재질은 동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 ‘잘라냄’이라는 행위의 요소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제대로 동일하다고 할 수가 없다.

인간은 무슨 대상이든지 일단 시간이 흘러도 동일해야만 거기서 제대로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는 그 인간 자신부터 과연 동일한지를 돌아봐야 한다.

인간들이 염두에 두는 구원은 결국 ‘자기 동일성 확보’이다. ‘영원토록 한결같기’를 노리고 구원을 생각한다. 과연 인간에게 이럴 권한이 있을까? 죽음은 이러한 인간의 자기 동일성 폭주를 저지하고 무효화시킨다.

2. 죽음이란 무엇인가?

(1) 각자 죽음?

죽음을 각자가 겪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접촉성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죽음에 접촉된 자는 죽음으로 인해 없어진다. 이러한 생각은 죽음을 죽음에 접촉된 자에게만 일어나는 불행한 사태로 본다. 반면에 죽음에 접촉되지 않은 자에게는 다행스러움과 여유로움을 부여한다. 마치 독성이 강한 약품에 접촉되지 않았기에 여유롭듯이 죽음과는 상관없는 여유로움이 있다.

하지만 내 쪽에서 조심한다고 해서 죽음이 나를 비켜 가지는 않는다.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죽음을 아무리 예상한다고 할지라도 막상 오게 되면 갑자기 온 것이다. 따라서 ‘나만의 특별한 죽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실존과 관련 있다’고 한다면 인간들은 강조점을 엉뚱한 데 두고 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자기 기만’을 획책한다. 그러나 죽음을 배타적인 주관적 관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2) 죽음을 미리 기다릴 수 없다.

죽음을 예상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정하게 결정된 과정들이 실현되는 중에 있을 때, 그 과정에서 하나의 결정된 사건을 기다릴 뿐이다. 연락을 미리 받아서 기다리는 식이 아니다. 죽음에는 ‘기다림’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죽음은 우연을 대동하고 등장하기에 ‘기다림’이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죽음은 ‘실현되지 않는 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도리어 나의 모든 가능성을 공격하고 무효화시키는 사태다. 이 우연성에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이미 함몰된 처지다.

죽음은 인간의 자율 기반 위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므로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모든 의미를 제거 당한다. 따라서 죽음에 관한 생각 자체도 제거된다. 죽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3) 나의 죽음은 타인에게 의미를 제공한다.

죽음을 대동하고 등장할 우연이란 벙커 속에서 타인의 죽음은 나의 죽음에 선행(先行)되고, 나의 죽음 또한 타인의 죽음 일부가 되며 타인의 기억 속에 편입된다. 지금까지 죽었던 모든 자의 죽음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나의 기억 내용을 채운다. 이렇게 되면 나의 삶은 타인의 죽음 위에 다져지고, 그 죽음의 연속적 사항으로 진척을 보인다. 우연히 동원한 죽음의 위세를 바탕으로 현 사회는 네트워크가 역사적으로 형성된다.

죽은 자의 삶은 이미 완료되었다. 삶의 주사위를 더 던질 수도 없고 다른 기회도 없다. 활동도 못 한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들의 업적과 성과를 기억의 내용으로 삼고 사는 자들은 죽은 자들의 우연성을 자신들의 필연성으로 이용하려 한다. 곧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의 먹이가 되고, 기억이 식량이 된다. 우리 또한 장차 그렇게 될 것이기에 지금 우리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다. 이로써 삶은 근본적으로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사나 죽으나 주체성은 우연 속에서 무력하다. 엄격하게 말해서 나만의 죽음은 없고, 나는 거저 보편적 죽음의 일부이다.

3. 우상이란?

‘불투명한 심연으로서의 존재’를 이성적 사유를 통해서 뽑아낼 수 없어 우상이 발생한다.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오로지 지금 존재에 근거해서만 할 수 있다. ‘없음’은 기껏 ‘있지 않다’로 머문다. 존재에 대한 모든 부정을 존재 쪽에서 규정할 권리를 갖는 것이다. 규정에 존재를 할당하고 부정에 무(無)를 할당한다는 것은 존재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무가 갖는 현존은 존재에서 빌려온 것이다. 따라서 존재가 사라지면 무도 덩달아 소멸된다. 무는 그저 존재에 들러붙어 있는 무(無)다. 비(非)존재, 혹은 무는 존재의 표면에서만 있다. 그런데 존재가 비존재에 대해서 왜 신경을 쓰는가? 그것은 존재가 불안하고 공포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과거와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곧 무화(無化) 되는 것을 겁내는 것이다. 참으로 인간이 불안해하는 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나와 미래에 있을 내가 지금의 나를 압박해 들어와 지금의 나 자신을 옥죄기 때문이다.

공포는 불안과 다르다. 공포는 지금 같이 사는 현 세계의 존재들에 대한 공포이고, 불안은 자기 자신 앞에서의 불안정함이다. 현기증은 내가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절벽 밑으로 데려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로써 공포와 불안은 상호 배타적이다. 공포는 외부로부터 나에게로, 불안은 나에게서 나에게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무화(無化) 현상이다.

4. 구원이란?

욕망을 극대화하는 것이 구원이다. 존재가 뿜어내는 욕망이다. 이 ‘존재 욕망’은 계속 존재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것도 자신 속에 자기와의 분열된 간격이 없이 존재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존재 욕망이 먼저 있고 그 뒤에 구체적인 욕망이나 태도 및 감정이 있는 게 아니다. 자꾸만 발생한 외부 욕망 거리를 찾아 헤매면서 자신을 뛰어넘는 식으로 욕망은 작용한다. 이때 욕망은 ‘자기 공격적’ 성향을 띠게 된다. 나를 죽여서라도 나를 벗어날 것을 찾는 것이다. 일종의 내가 나를 극복하기 위한 ‘자기 반란’이다. 그래서 종교에서 구원 시도는 극단적으로 장렬한 모습을 띤다.

신을 거론하고 초월적 가치를 언급하는 것은 지금의 초라한 자기를 지우고, 자기가 짊어진 한계를 영구적으로 뛰어넘고 싶은 바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삶을 근원적으로 추동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일체의 것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자기 지식과 품속으로 쓸어 담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희망을 늘 코앞에 두고 따라잡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못하는 비극적 존재다. 하지만 이런 면이 애처롭기에 스스로를 위로의 대상으로 여긴다. 멈추지 못하는 욕망 발동이 긍정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람들은 이런 자세를 ‘자율’ 혹은 ‘자유’라고 부른다. 이로써 자유는 인간의 실존에 선행한다고 우긴다. 이 ‘자유의 진리’가 우상을 섬기는 필수요건이다. 스스로 무화(無化)할 수도 있고, 스스로 욕망을 키우기도 하기에 자유가 인간 존재의 힘이다. 이런 자유에 근거해야만 사람들은 진리라고 인정해준다. 즉 사람들이 찾는 진리는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자유를 비난해서는 안 되는 조건이 붙어있다. 곧 인간이 절대 자유자인 신이며 진리며 생명이 된다. 그래서 인간 자체가 곧 우상이다.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4).”

이 우상의 여파로 정신 활동이 벌어진다. 정신이란 단지 정신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의 귀결이다. 정신은 자기를 선출하고 파악하는 활동이다. 정신 안에는 내가 아닌 것은 내가 아니므로 정리해 나간다. 예컨대 돌, 풀밭, 중성미자, 은하 이런 것들은 ‘나 아닌 것’들이다. 자연은 ‘나 아닌 것들의 총체’이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알든, 무엇을 탐구하고 분석하든, 결코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인가 알아야 한다면 그 최종 것은 곧 ‘나’이다. 이로써 나의 정신은 나에게서 나와서 나를 추상화하고 도로 나에게 귀환하는 나의 확대 현상이다.

이는 곧 이 세상에 무엇이 출현해도 그 대상은 결코 ‘절대적 객관화’될 수 없음을 뜻한다. 무엇을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은 우상적인 나의 ‘정신 활동의 촉수에 걸려던 대상’이라는 말이다.

5. 동일성에서 비켜나기

두 개의 동일한 나뭇잎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것은 두 개의 나뭇잎이 완전히 동일한 발생 과정을 가진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만일 그렇다면 전체 상황이 변하고 새로운 속성들이 창조되는 가운데에서도 무한히 오랜 시간 동안 어떤 동일한 것이 존재해왔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이는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산소는 그 직전의 순간과 같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어떤 것이다. 이전의 산소는 다른 목적에 사용되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럼으로써 변형의 효과를 새롭게 가지는 새로운 산소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을 그들의 정열에 따라 새로이 규정하고 배치할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생명의 시작, 곧 출생 단계에서는 죽음으로 곧장 돌아가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게 보인다. 갓난아이는 무력한 존재다. 그러나 생명체가 점차 복잡화되고, 처음 원형질적 상태와는 갈수록 멀어짐으로써 죽음으로 통하는 절차도 복잡하게 이해되기 시작한다.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반발심을 드러난다. 벌써 동일성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죽음에 대항해서 삶을 연장하는 시도가 보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그동안 맺어왔던 과거와의 모든 관계를 끊게 하는 노선이 필요하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노선이 꽂혀야 과거의 연을 끊을 수 있다.

‘once and for all’, 즉 ‘모든 것에 대한 한 번, 모든 것을 위한 한 번’의 사건이 필요하다. 두 번이 되어서는 안 되는 영원히 단 한 번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 ‘나’라는 동일성 덩치가 알지 못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죽기 전에 후회 없이 보람 있게 살아야 한다는 각오’와 무관한 노선이어야 한다. 즉 어떤 식으로도 나를 치료시키는 사건이거나 노선이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나를 충분히 잊을만한 사건이어야 한다. 그래야 동일성에서 끊어낼 수 있다.

따라서 내가 죽는 ‘나의 죽음 사건’으로도 부족하다. 나의 동일성과 무관하되, 차라리 내가 살아 있는 그 자체를 ‘죽음’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사건이어야 한다. 그것은 나에 대한 심판 사건의 도래이다. 꾸준히 내가 살아 있되 그 산 채로 심판하는 사건이 되어야 나의 죽음으로 나의 모든 죄가 사죄 받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는다.

즉 나는 교정(矯正)되지 않아야 한다. 개선되지도 않아야 한다. 산 채로 계속 심판받는 경우가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그것과 같이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계속해서 심판의 효력이 살아 있어야 계속해서 사죄의 효력도 살아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영원히 죄도 살아 있고 심판도 함께 살아 있는 그 노선과 ‘상관없이 된’ 분만이 구원해주실 수가 있다. 그분이 바로 다른 노선, 곧 언약적으로 죽었고 언약적으로 살아나신 유일한 분, 예수님이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의 동일성이 정립되고 그 동일성이 반복적으로 새로운 노선을 이어간다.

기존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반복이 우리를 속박하고 파괴했다면 우리를 해방하는 것 역시 새로운 노선의 반복이다. 나의 죽음은 영원히 그분의 죽음에 종속적이다. 그분의 죽음에 의해서 새롭게 종속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성도의 죽음은 곧 예수님만이 부활이고 생명임을 증거하기 위한 사건의 일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우리는 흔히 반복을 어떤 첫 번째 것이 출현한 이후에 그와 유사한 두 번째 것이 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첫 번째 것과 유사한 두 번째, 세 번째, … n 번째 것들이 계속 생겨난다. 만약 이 첫 번째 항이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면 반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즉 여기에서 반복은 첫 번째 항에 종속되어 있으며, 반복되는 것 자체 내부에서부터 그것을 규제하는 법칙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에 대한 외적 규정일 뿐이다. 이런 반복은 법칙으로 정초 될 수가 없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에 반복이 의존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첫 번’으로서 기원이다. ‘한 번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 단 한 번만 등장한 채 되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은 십자가 사건의 단회성의 반복이다. 이 반복이 늘 새로움이다.

6. 에스겔의 성전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마 12:6/마 23:16-22).”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단회적 성전을 마련하신다. 당연히 기존의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 무너지는 성전의 특징은 인간의 손으로 지을 수 있는 성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히 9:11)”

손으로 지은 성전은 하나님의 영으로 지은 성전으로 인해 사라져야 한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왜 무너져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도저히 하나님께서 함께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육이 되는 존재는 하나님의 신이 함께할 수 없다(창 6:3). 성전 안에서 불이 나온다(겔 5:4). 자체적으로 성전을 폭파하는 방식이다. 성전을 불 속에 넣어 녹아버리게 하신다(겔 22:17-22). 예루살렘 주민들은 불에 태워질 화목같이 다루어진다(겔 15:2-7). 그렇게 되면 성전이 있는 곳은 황무지가 된다(겔 15:8).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속이 후련하다고 하신다(겔 5:13).

하나님의 보좌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따로 거두어내시면서 그 영광성이 떠나는 코스를 보좌의 이동과 더불어 보여주신다. 성전 법궤에서 동편 문을 거쳐 근처 동편 성읍에 머무신다(겔 10:18, 11:23). 성전이 무너지는 마지막 과정까지 지켜보면서 온전한 성전을 염두에 두시는 것이다.

성전의 소멸은 더는 이방 민족을 유지할 이유가 없음을 뜻한다. 그동안 미루었던 이방 민족 전반에 걸친 심판이 감행된다. 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가 나머지 모든 민족의 거부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동일성은 깨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잊지 아니하신다. 다윗 언약에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활동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새로운 신(神)을 받게 된다(겔 11:19). 언약이 새로워지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행한 일에 한없이 부끄러워할 뿐이다(겔 16:63).

그 언약은 다윗 언약에 따라 다윗이 등장하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 왕이 되신다(겔 37:24
-28). 그리고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신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군대가 되게 하시고(겔 37:1-10), 하나님의 신을 부여하사 옛 땅에서 함께 사는 식으로 사신다(겔 37:14).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천사에 의해서 지어지는 성전 측량에 들어간다. 완공된 성전 한가운데서 생명수가 흘러 나와서(겔 47:8-12) 주변 지역을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 스타일로 꾸미게 한다. 당연히 율법에 의한 절기와 제사는 연속적이다. 제사장과 레위 지파의 위상은 높아지고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제사 완성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겔 48:13-18). 그런 식으로 영원히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기 백성들 속에만 계신다. 이방인은 철저하게 배제된다(겔 44:7). 그것이 ‘여호와 삼마’다(겔 48:35). 즉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뜻이다.

Ⅱ. 본론

(줄거리)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땅 밖으로 추방됨으로 말미암아 옛언약의 체계는 화해되고 이스라엘마저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땅의 안식과 그 땅의 거주자 간에는 거리가 생겼다. 땅의 안식이 땅의 거주자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결과로 일이 진행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창조 행위로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또 어떤 창조적인 행위로서 구속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창세기 1:2에 나오는 방식을 취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형태이다. 선지자는 현 파국의 정화는 하나님이 어떤 구속적 의미를 지니고 등장하느냐에 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땅의 거주자와 약속 백성들의 등장은 태초에 하나님의 신이 개입한 형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는 땅의 거주자 문제이므로 노아 언약을 담고 있다. 그것이 무지개 영광으로 나타나 기조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 주체는 하나님의 신이다. 천사들의 분주한 활동은 그들이 누구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1:12).

그러면 인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간은 에스겔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자화 되어 있다. 인자란 바로 인간이 언약 파기 뒤에 나타난 결과로 비참성과 연약성, 쇠약성, 허약성, 부족성, 부패성, 무능성, 소멸성, 허무성을 한꺼번에 표현되는 모습이다. 에스겔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이 일이다. 이것이 곧 이스라엘 실패를 가장 단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제부터 선지자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자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포로 잡혀 온 민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2:1). 즉 인자와 대조되는 천사 혹은 하나님 신의 활동을 그들은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면, 천사들의 민첩성과 지혜와 용맹성과 근면성은 사실상 누가 그렇게 순종해야 하는가 하면 인자가 되기 이전의 이스라엘이 그렇게 해야 했던 속성이다(1:4-14).

이제 에스겔은 인자의 모습으로 이스라엘의 잘못을 깨우치기 위해 준비한다(2:6). 이것은 자칭 거룩이라고 주창한 이스라엘(선택적 관점에서)을 부끄럽게 할 조치다. 즉 어린 양으로 시작된 첫 번째 출애굽과는 달리 바로 인자화로부터 시작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여기서 새로운 선택, 그것도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근거를 이룰 수 있게 된다(18:20). 선지자의 비참한 모습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좋지 않은 음식(4:9), 불편한 잠자리(4:4), 밀어 버린 머리 모양(5:1), 이러한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치명적인 죄와 우상 숭배를 말씀 하고 있다(6:2-7).

이방 제단이 이스라엘에 남긴 영향은 바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7:10). 반면 올바른 성전관은 결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지 않는다. 이방 제단이 왜 나쁘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을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과 정반대의 성품이다.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 거민에 대한 진노(8:1-18)는 언약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기 형상 또는 이름과 관계하지 그 이외 것으로는 아니 됨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우상이란 언약 밖의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면 에스겔이 추구하는 언약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의 성전화 또는 성소화(11:16)이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해서 우상 숭배한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출애굽이 발생하여야 한다.

선지자는 여행을 떠나는 모습으로 행장을 차린다(12:3/ 12:7). 이 새로운 이주는 어떤 언약적 근거를 두고 있나? 여호와의 신은 성전의 파괴가 유다가 이방 신에게 경배한 것을 원인으로 보신다. 그 우상 숭배의 현장 즉 성전의 동문을(9:16) 그룹들을 통해서 임재 하신다(10:18-20). 그래 놓고 선지자(에스겔)에게 인자의 모습으로 결합한다(11:1).

세 번째로 하나님은 그 인자 즉 선지자를 바벨론으로 이주를 시킨다(12:3). 하나님의 신이 하시는 구속 사역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부정적 측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그들의 실패 현장을 담보로 해서 영원히 추궁하게 되는 것이다.

신의 창조 행위란 바로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회복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 행위에서 구속 행위로의 전환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창조의 실패가 유일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조의 실패가 결코 창조 행위의 실패는 아니다.

창조 행위가 그 고유의 목적을 향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에 참여하는 배경과 정신이 사랑과 낮아지심에 두고 있음을 보일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 기회 중의 하나가 바로 성전 파괴이다. 장차 주어질 영원한 성전은 언약 상대자인 이스라엘의 실패 위에 건립되는 것이다.

언약이란 결국 하나님이 누구시냐,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를 보이면 그것의 임무는 달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란 단순히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피조 세계에 대하여 희생과 겸비를 내용으로 한 사랑하는 자가 될 때 비로소 주가 되실 수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이 피조 세계에 자신의 모습과 형상을 충분히 남길 경우에만 가능하게 된다. 그 과정 중 한 과정이라도 인간의 도움을 받았다든지 협조가 요청되었다면 온전히 주가 되시는 데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 신의 역할은 언약이 주어지는 목적 즉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이 역사 속에 남길 때 결코 인간의 힘이 개입된 적이 없음을 보인다. 이로써 오로지 모든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돌려서 창조 시에 이미 제시된 언약을 하자 없이 완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신의 역할은 인간이 못한 부분을 기초로 하여 어떻게 해서 다시 언약은 지속할 수밖에 없는가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하게 될 하나님 신의 활동은 전 이스라엘을 인자화, 즉 비참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다음 나타날 성전은 어떤 형태일까? 인자를 극복한 인격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다. 그 이유는 실패한 인자의 모습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그러하다. 여기에 그동안 이스라엘이 알 수 없었던 다윗 언약의 참된 지향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선지자 에스겔은 참된 성전의 회복만이 다윗 언약의 영원함을 보장받는 증거라고 여겼다(14:23). 인간의 힘이나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선지자는 인간은 이미 실패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작품으로 완성될 성전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러기에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꾸짖는다. 먼저 선지자의 죄를 지적하고 그다음으로 장로들과 백성들의 죄를 지적한다(13:10-19). 이들 선지자의 신학의 잘못된 관점은 인간의 가능성을 근거로 하여 축복과 평안을 논했다. 이것은 여호와의 형상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방 우상에 해당하는 신학이다.

이 점을 선지자는 열매 없는 포도나무의 비유, 간음하는 여인의 비유, 두 독수리 비유, 신 포도주 비유, 암사자 비유,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간음 이야기, 끓는 가마 비유, 에스겔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울지 않는 선지자의 모습과 그 뒤에 이어지는 이방 민족의 심판 예언에서 이방 민족의 우상 숭배가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의 잘못된 언약관과 동일한 차원이냐를 보여준다.

즉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 민족의 대변자 자격으로 심판받으며 결국 심판의 첫 열매인 것이다(25장). 그러면 앞으로의 이스라엘은 어떻게 회복되는 것일까?

하나님 자신이 직접 그들의 목자가 되시겠다고 나선다(34:2-6/34:16/34:23-24). 그 목자는 양의 목에 있는 멍에를 벗겨 줌으로 하나님 자신이 목자 됨을 알린다(34:27-31). 이것은 그들을 종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함을 말하는데 다른 차원에서의 출애굽을 암시한다(34:27).

그 출애굽은 하나님 자신의 신을 주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이제는 바벨론이나 애굽이라는 역사적 차원이 아니라 우상 숭배와 죄로부터의 해방이다(36:25-29). 즉 개인적인 언약 밖에서의 해방이다. 그때의 권능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가 있느냐 하면, 마치 해골이 다시 생기를 얻어 군대가 될 정도의 강력한 권능에 비견될 수 있다고 한다(37장).

이들이 바로 영원한 성전이다(37:27). 이들이 바로 거룩이다. 모든 이방 민족은 이 거룩으로 인해 자신의 비거룩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고, 창조의 하나님 앞에서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38:16).

하나님이 구상하신 성전의 모습은 이미 정해진 치수를 갖고 있으며, 그 성전이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 위에 건립된다(43:1-5). 타락된 이스라엘을 영광으로 다시 채우시어 성전으로 삼으시고 그 성전에 하나님이 영원히 거주, 안식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만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거기에 합당한 영광이 가득하기 때문이다(43:9). 바로 그 성전에서 나는 생수가 온 우주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47장). 이 성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가 건설되고 성읍이 생기게 된다. 그 생명은 성전에서 나오는 생수로 유지될 것이다. 선지자는 이 성읍을 다음같이 불렀다. ‘여호와 삼마’라고. 풀이하면 여호와께서 계실만한 유일한 곳이다.

Ⅲ. 결론

주님의 아픔은 이스라엘의 우상 섬김을 통해서 나타났다. 이름이란 뭔가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존재자를 호명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쪽에서 연락이 되기 위해서 신에게 이름을 붙였다. 그래놓고 인간 쪽에서 신을 수시로 불러내는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 신이 곧 우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수한 민족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내셨다. 이름도 조상들에게 감추셨다(출 6:3).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실 때는 이 이름 안에 하나님의 고통의 역사를 쏟아내기 위함이었다.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자처하면서 동행하시는 신의 이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영원토록 함께 함이 된다. 아픔의 원인은 백성들의 죄였다. 광야를 통해서, 그리고 약속의 땅의 시절을 통해서 백성들은 쉴 새 없이 우상 숭배의 죄를 쏟아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땅에서 죽게 된다.

아픔을 넘어 비존재가 되신 것이다. 이로써 존재하는 자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신이 되셨다. 하지만 언약은 완성되어야 했기에 그 아픔의 사건 속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끄셨다.

이제 백성들은 각자의 부끄러운 이름은 떼어지고 단 하나의 이름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된다. 이게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하심이다. 이것을 ‘성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주님의 아픔을 부르는 식으로 사는 자, 그들이 오늘날 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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