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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6 08:34:19 조회 : 62         
광주강의20220624a 이사야6장 5절(거룩의 공격)-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하림(IP:219.251.37.139)
광주강의20220624a 이사야6장 5절(거룩의 공격)-이 근호 목사

p.221 밑에서 8번째 줄에, “성전은, ‘전쟁하시는 신’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기념 공간이기에” 간단한 말이지만, 전쟁이 없었으면 성전도 없다. 성전은 생기지 않는다. 전쟁하는 신이 성전을 만들어요. 그럼 누구하고 전쟁하는가?

전쟁하는 이유가 그래야 성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생겨나기 위해서. 그럼 누구하고? 이게 상당히 난해합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벌여야만 성전이 생긴다면 누구하고 전쟁하느냐에 대해서 인간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 자체는 속박되어 있습니다.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 자체가 자기가 속박되어 있고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눈에 보이는 인간으로 마감됩니다. 속박되었다? 그런 것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전쟁하시면서 너희들은 속박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전쟁을 시작해야 되겠죠. 인간은 속박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인간에게 제일 위험한 것이에요. 거룩이 가장 위험한 겁니다.

흔히 사람들 중에 이런 객기를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하나님 안 믿으면 어쩔 건데? 하나님이 날 공격하려면 공격하라 그래. 뭐 하나님한테 당하지.” 이렇게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의외로 굉장히 많거든요. 특히 불신자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예를 들어서 “내 목숨을 죽인다면 나를 죽인다면 죽지 뭐. 내가 아프면 아파서 죽으면 그만이지 뭐.” 그렇게 하는데 인간에게 무서운 것이란 흔히 말하는 건강하지 않은 것, 가난한 것 또는 가족이 불행한 것, 주로 이런 쪽으로 인간들은 미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예상해요.

그러면 이런 것을 예상했다는 말은 자기 각오도 비장한 각오를 갖고 있겠죠. 가족이 불행해도 ‘뭐 어떻게 인간이 참아야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갖는데 여기서 인간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이 거룩함, 거룩함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어느 인간도 상상을 못합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있었을 때에 갑자기 그 성전에 하나님의 거룩이 들이닥쳤어요. 천사 가운데 날개 여섯이 있고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면서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3)

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선지자는 알았어요.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거룩이다. 거룩은 다른 세계인데 거룩을 표방한 다른 세계가 등장해요.

이렇게 되면 여기서 ‘내가 아프면 되지 뭐. 내가 가난하더라도 굶어죽으면 되지 뭐. 내 가족이라도 내 몸이 아니니까.’ 이렇게 할 때는 나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개인에게 개인이 대처하면 된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이사야가 알았던 그 거룩은, 이사야가 속했던 전체가 더러운 세계였다는 겁니다. 거룩의 가장 극단적인 반대 개념, 더러운 세계인 거예요.

이 더러운 세계의 특징은 이 더러움이 바깥에 나와도 이게 더럽다는 사실이에요. 까만 개가 밖에 돌아다녀도 까만 개잖아요. 이 달라질 수 없는 운명, 영원히 저주받은 운명이니까 여기서 희망이라는 것 그리고 개선, 발전 이것이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서는. 해당되는 게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뭐냐? 본인이 그냥 감당하는 식으로 ‘내가 아파서 죽으면 되지.’ 할 때 죽음이 도피처거든요. ‘여기 있다가 죽음 세계 가면 되고 가난하면 가난해서 죽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죽음이 어떤 희망처럼 작용하는데 이 세계 안에서 살든 죽든 상관없이 전혀 달라질 운명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건, 확정된 본질. 어떻게 확정되었느냐? 죽든 살든 어떻게 됐든 저주받는 게 아니고 그 자체가 저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겁니다. 개선의 여지가 없어요. 희망, 개선의 여지가 없다니까요. 노력한 만큼 뭔가 달라진 게 있을 때 숨이라도 쉬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본질은 그게 되지를 않아요. 또 거기다 인간에게 더욱더 무서운 것은 왜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걸 누가 알았다 했습니까? 이사야 6장에서 누가 알았어요? 이사야가 안 거예요. 화로다 망한 백성 중에 있다. 이러한 확정된 저주받은 운명이라는 것은 무엇이 접근했을 때 무엇이 다가왔을 때 이렇게 되었습니까? 거룩이 다가왔을 때 바로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난 거예요.

제대로 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뭐 말이나 잘해가지고 사람들 전도한다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자기 자신부터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확실히 아는 것이 선지자의 시작이죠. 내 자신부터. 내 자신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으면 선지자 하지 말래도 말려도 안돼요. 선지자하게 마련입니다. 견딜 수가 없고 참을 수가 없어요. 자기 자신을 알아버렸으니까.

내 자신을 이렇게 더럽고 저주받은 운명이다, 그것도 확정된 것이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이 확정된 것은 변하지 않는 운명이라는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온 거룩의 효과입니다. 이 땅의 거룩한 효과에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이 기쁜 소식을 여기 안 적을 수 없겠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 자체가 곧 저주이다. 저주를 표현할 때 나라는 인간을 통해서 저주를 표현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나님의 저주라는 것을 하나님이 스스로 표현하기 위해서 나를 만들고 인간을 만드셨구나. 그런 하나님의 취지를 누가 말립니까? 아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누가 반대해요? 존재자체가 저주인데요. 존재자체가 저주기 때문에 이것은 단정적입니다. 확정된 거예요.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죠.

그래서 “화로다 나여” 했으니까 나 안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저주가 들어왔죠. 이것을 거룩의 효과라 했습니다. 나 안에 저주가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나는 곧 저주가 되며 이것이 아까 한 것을 그대로 쓰면, 거룩의 효과. 또 달리하면 거룩의 작용. 이것이 곧 하나님의 활동성. 뭐 선지자는 땡 잡았죠. 선지자는 일회적인 자기 계획을 더 추가할 여지가 아예 없는 나라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쉽게 예를 들면 선생님이 애 뺨을 탁 때렸는데 뺨에 벌겋게 커다란 손자국이 새겨졌다 합시다, 벌겋게. 그러면 이 손자국이 있는 한 그 아이는 선생님께 맞아도 싼 아이로 이미 규정이 된 거예요. 그럼 걔는 ‘나는’ 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선생님의 활동 효과가 그대로 새겨진 존재가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 천주교에서 또는 다른 종교에서 자기를 낮추기 위해 그렇게 예를 써도 안 되는 일, 뺨때기 한방 맞으니까 더는 나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죠. 이것을 신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자유라 이야기해요. 자유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속박과 예속을 전제로 할 때 자유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게 자유죠. 그 자유를 다른 말로 하면 구출, 또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되는 거예요. 출(出)애굽이니까요. 그런데 구원이, 자유를 얻을 경우에만 내가 예속되어있었고 전에 속박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인간세계는 저주에 속박되었다. 저주에 속박되었는데 이 저주에 속박된 대상자가 인간뿐만 아니었어요. 악마가 저주받도록 되어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옳죠. 악마가 저주받는데 인간이 악마한테 꼬드김 당해서 같이 합류된 상황이다,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악마한테는 지상에 이름이 없죠. 지상에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으니까 악마는 자기의 이름을 누구의 이름으로 대응합니까? 인간의 이름으로 대응했죠. 모든 인간들의 뒷배니까요. 뒤에서 봐주고 있거든요, 인간을. 그런데 하나님은 이름이 있어요. 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으니까요. 하나님이 사람이 안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없어요.

육적인 피조세계에만 이름이 있습니다. 아담이 강아지고 소이고 간에 이름을 붙이듯이. 그런데 인간이 악마의 이름을 붙입니까? 아니죠. 천사의 이름을 누가 붙입니까? 하나님이 붙이죠. 가브리엘, 이건 하나님이 붙인 거예요. 그것은 각 천사마다 고유의 해야 될 업무가 있기 때문이에요. 총무부에 있는 사람에게 ‘어이, 김 총무.’ 이런 거랑 똑같아요. 자재과에 있는 사람보고 ‘어이, 최 자재.’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의 할 일을 가지고 이름을 붙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름은 이미 어디에 넘어갔느냐? 악마한테 넘어가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악마의 역할을 하거든요. 그러니 이름이 기능이라면 악마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보면 나와 있죠, 인간이 속박되었다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지만 여러분 연세가 많으니까 다 알고 있지만 행여나 또 모를 수가 있죠. 히브리서 2장 14절, “자녀들은 혈육(하나님의 백성)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주님께서 육으로 오심은, 그런 뜻이죠. 그다음에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누구입니까? 마귀, 악마죠. 이거 설명이 필요해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을 원수로 봐요. 히브리서 덮지 마시고요. 고린도전서 15장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최후의 원수를 사망으로 봅니다. 54절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인간이 왜 썩고 왜 죽느냐? 인간의 육이 육의 마음대로 자율성이 없고 어디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15장에 의하면 사망에 예속되었다는 거예요, 사망에.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악마는 눈에 안 보이거든요. 악마는 눈에 안 보이지만 악마의 기능은 현상적으로 인간의 모든 몸마다 현상이 나타나고 드러나고 발현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안 보입니다. 예수님의 기능이 인간의 몸을 통해서 발현된 것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되는 거예요. 부활의 반대 개념이 뭡니까? 사망이죠. 그런데 사망은 보편적이에요. 부활은 특수적이고. 따라서 보편적인 모든 인간은 어디에 예속되어있다? 사망에 예속되어있다. 악마가 인간의 몸에 작용하는 그 기능에 모든 인간이 예속되어있고 속박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서 유월절 날 왜 죽음을 야기시켰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세계에서 보편적이거든요. 보편적이라는 말을 달리하겠습니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바닥입니다.

인간이 쭉 세월 따라 죽는 것, 이게 아니고 인간의 죽음이라는 보드를 타고 다녀요, 보드를. 써핑하는 거예요. 죽음을 타고 가다가 어떤 사람은 96세에 보드 안에서 소멸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94세 하얀 눈썹 조순, 96세는 송해. 죽음의 보드를 타는 거예요.

인간은 보드 위에 올라타 있죠. 그러면 인간이 하는 모든 문화 가운데 제일 멋있게 보이는 문화가 뭐냐 하면 종교입니다. 인간에게 종교는 문화생활의 일종이에요. 교사들 수련회 갔을 때 다 기도하고 밥 먹는 거. 권사 아닌 사람 별로 없는 거. 이거 문화거든요. 종교. 신을 찾고 예수 찾고 교회 활동하는 게 문화 활동이라는 거예요.

문화 활동을 하지만 해본들 뭐합니까? 그건 누가 시킨 거예요? 활동하다가 죽는다는 게 아니라 그 문화 활동을 누가 시킨 거예요? 사망이 시킨 거예요. 악마가 시킨 거예요, 그 문화 활동을.

인간의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거 같으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 올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럼 예수님이 왔다는 말은 종교를 버리라 이 말입니다. 간단하죠. 되게 간단하잖아요. 네 문화생활을 놔버려라.

문화생활을 놔버리란 말은 교회 다니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참 마귀가 시켜서 이 짓 하고 있구나.’ 이걸 알라 이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놔버리면 재미없어서 못 살잖아요. 그렇다고 문화생활 한다고 카레이서하고 골프 치라고 할까요? 골프 치나 교회가나 똑같은 건데요. 죽음에 합류하는 그 지연된 시간동안 심심해서 어떻게 살 건데요? 바둑을 두던지 뭐라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니까 그걸 아는 거예요. 교회 다니기가 자유가 아니라니까요.

다시 한번 할게요. 자유란 저주로 확정된 운명인 것을 발견하는 게 자유입니다. 이미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 몸이 저주받기로 확정된 몸인 것을 아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듣고 걱정이 늘어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자유 받았으면 구원 받은 건데... 구원 받았다는 게 축복으로 확정될 것 같으면 이해하겠는데 저주로 확정된 이 몸이라니, 그럼 이 몸 가지고 지옥 가야 되는데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해놓고 내 몸은 지옥가고... 이게 모순되지 않느냐, 앞뒤가 안 맞지 않느냐 하는데...

오늘 p.221에 성전은 전쟁하는 신에 의해 만들어지죠.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에요. 임마누엘. 그 성전은 전쟁하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는다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전쟁이 없으면 성전이 없어요. 그럼 전쟁의 적이 누구냐? 적이 누구냐 이 말입니다. 전쟁할 때는 적이 있는데 그 적이 누구냐?

인간은 아니에요. 인간은 예속을 모른다니까요.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지, 이게 인간의 생각이에요.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그런 것은 인간은 아예 믿지를 않고 믿지 않는 이유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도대체. 앞뒤가 뭔지 몰라요. 바닥이 뭔지 몰라요. 이렇게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 기껏 인간은 그것밖에 몰라요. 성경에 대해서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적은 전쟁하면서 발굴되는 겁니다. “너 나와!”하고 주님께서 전쟁을 치르면서 꼬깃꼬깃 인간 뒤에 숨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 적이 전쟁하면서 고개를 내밀게 되어있어요. 고개를 내밀 때 그 악마는 어떻게 고개를 내미느냐? 사람의 이름을 앞장세우면서 고개를 내밉니다. 자기는 뒤에 숨고요. 그럼 전쟁의 외형적 양상은 하나님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과 애굽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과 바벨론의 이름, 느부갓네살의 이름, 그 이름들을 앞장세우는 거예요.

그럼 사람의 이름은 전쟁하면서 신을 도입하는데 이 신을 하나님의 이름 쪽에서 뭐라고 부르느냐? 이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우상을 믿는 게 아니고 인간은 우상과 떨어진 적이 없어요. 인간의 신이 악마거든요. 인간의 주인은 이미 악마입니다.

이걸 아까 고린도전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시 읽어보게 되면 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 사망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거예요.

그다음 55절에 누구를 부릅니까?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지금 사망이, 보이지 않는 악마가 현재 누구를 이기고 있다고 보는 겁니까? 악마가 인간을 체포, 예속했으니까 인간 입장에서 누가 이긴다? 항상 사망이 이기는 거예요.

일단 이렇게 해놓고요. 아까 히브리서 다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걸 전제로 되어야 돼요. 히브리서 2장 14절에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귀라는 것은 이 인간 세계에 마귀는 없어요. 왜? 육체적 존재가 없기 때문에 언어를 붙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은 성령으로 된 책이기 때문에 마귀를 실존 존재로 거론할 수가 있는 겁니다. 단어를 붙이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는 악마는 없어요. 그냥 현상만, 인간들이 내리 죽어가는, 죽고 또 죽고 죽어가는 현상만 일어날 뿐이죠.

그다음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끝났죠. 죽기를 무서워했다는 말은 이미 인간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서워한다는 것은 뒷배가 따로 있고 주인이 따로 있는 거예요. 아무리 인간이 까불고 자기주장 강하고 객기를 부려도 죽음 앞에서는 사망 앞에서는 발발 떠는 이것으로 이미 확정된 거예요. 이거는 날 때부터, 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거예요.

그래서 나오잖아요, 종이라고.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종이 그냥 가난의 종, 돈의 종, 건강의 종 같으면 나중에 건강하면 그만이고 부자 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망의 종이 됐다는 말은 평생에 종에서 풀려날 기미는 인간에게 그럴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또다시 강조합니다만 신자, 다른 말로 성도죠, 성도의 특징은 항상 내가 하지 못하는 것, 불가능성이 나와야 한다. 성도는 항상 불가능성이 나와야 돼요, 불가능성. 제가 지난 수요일에 기도할 때 기도제목이 이거였습니다. 내가 하지 않는 것을 찾아보라고. 내가 하지 않는 것을. 내가 노력하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을 생각해보라고.

똑같은 취지입니다. 내가 애착하지도 않고 내가 가지지도 않았는데 어떤 가능성이 나에게 튀어나올 때 그게 바로 신자입니다. 예를 듭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나왔죠. 이사야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렇게 된 겁니까? 아니면 거룩 앞에서 졸지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입니까? 사적으로 나쁜 짓한 게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그 세계 자체가 거룩의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저주의 공격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안 거예요.

그거 알았다고 해서 이사야가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나는 저주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 중 하나가, 스랍이죠, 천사 중 하나가 뭔가 나풀나풀 날아왔는지 뭘 했는지 성전에 있는 숯불을 가지고 이사야의 입을 지집니다. 입에 딱 닿을 때 이사야는 속죄함을 얻은 거예요. 속죄함.

그러면 이사야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거룩과 영원한 저주, 그 사이의 차이가 있음을 그 차이 위에 선(線)상의 존재로서 이제는 마음껏 양쪽 세계를 그냥 외치면 되는 거예요.

차이의 반대말은 뭐냐? 이건 좀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여러분 수준 같으면 알아야 됩니다. 차이의 반대말은 동질성입니다. 항상 인간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개념위주이기 때문에 동질성으로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A, B의 차이, 이걸 극복하고 이걸 종합해서 하나의 개념으로 묶으려고 그렇게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 동질성이라는 것은 환상이에요. 동질적 개념이라는 게 없습니다. 사과라는 어떤 개념은 있지만 어떤 사과를 사과라고 하느냐에 대해서는 어떤 인간도 대표적으로 내세울 사과는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시간과 더불어서 모든 것이 변화합니다.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사랑을 예로 들어 현재 사랑한다면, 어제도 사랑했다 칩시다. 어제 사랑을 A₁이라 하고 지금 사랑을 A₂라 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그때, 그 사랑 개념이 왜 달라지는가? 어제 했던 기억이 침투한 사랑개념이에요. 지금의 사랑이란 어제 했던 사랑을 전제로 해서 그 차이남이 추가적으로 보태져있는 겁니다.

그럼 내일 돼서 만약에, 사랑한다 A₃가 돼버리면 이건 A₁이전에 있던 기억부터 밑으로 계속 들어와요. A₃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이걸 종합하는 게 아니고요. 종합하는 게 아니고 이전에 밑으로 들어왔던 기억들 중에 어떤 계기가 있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 사랑 안에는 밑에 잠재되어 있는 지나간 모든 사랑개념을 억압하면서 억누르면서 지금 필요한, 지금 효용 있다고 쓸모 있다고 여기는 그 개념만 따로 추렸지, 사실은 그걸 따로 추리기 위해서는 열 가지 사랑 개념 중에서 아홉 가지는 누르고 한 가지를 그때 그 순간 이용할 뿐이에요.

그런데 A₄들어가서 그때 A₃때 필요한 사랑 말고 지난 A₁이 필요할 때는 여기 또 다른 A₄의 사랑개념이 나오죠.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할 때 사랑개념이 달라지면 사랑개념을 고백하는 나도 다르고 너도 그때 너가 아닌 거예요. 이 세상에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동질성이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해요. 환상에 불과합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하면 주님께선 “네가 언제 주님이고 네가 아는 믿음의 종류 중에서 한 이만오천 오백다섯 가지 되는 것 중에 어느 믿음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란 없죠. 악마가 사망의 힘으로 묶어놓은 그 가운데서 악마가 허락한 그 순간, 그 사람은 나라고 우기는 거예요. 너는 너라고 우기고.

이 세상에는 차이밖에 없어요. 쉽게 말해서 정답도 없고 진리도 없습니다.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데 성경은 모든 것을 하나로 동일성으로 만들어버려요. 왜 그러느냐 하면 세상을 규정하는, 그 전쟁하시는 주의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도 다 동일해야 돼요. 어떤 차이가 있든 관계없이 동일한 개념으로 다 묶어버려야 돼요.

악마는 인간들을 각자 개인적 자아로서 전부다 풀어놨지만 주님께서 최종적인 자아로 오셔가지고 예수님께서 모든 걸 묶어버렸죠. 자아가 있으니까 이름이 있죠. 주님의 이름 앞에 모든 인간 이름이 대비적 이름을 갖습니다.

그래서 p.221에 ‘전쟁하는 신’이라고 한다면 외형적으로서는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과 싸우신다. 주의 이름이, 이름이 있어야 되니까요, 악마는 이름이 없잖아요,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과 싸우는 전쟁을 하는 겁니다.

인간의 이름은 몇 개냐? 인간의 이름은 하나밖에 없죠. 그냥 계속해서 변형될 뿐이죠. 인간의 이름은 계속 변형돼요. 마치 엘리야가 나와도 주의 이름이고 엘리사가 나와도 주의 이름인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다양한 선지자가 등장해도 그들의 공통점이 한결 같이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뭐라 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3:6) 명령입니다.

하나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그 명령은 예수님께서 이미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을 이겼기 때문에 아무리 악한 악마가 앉은뱅이를 쥐고 있어도 말씀 한 마디에 거기서 풀려나올 수 있어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무덤에 죽은 지 나흘이 됐다 이 말이죠. 죽은 지 나흘이 아니고 일주일 됐으면 어떻게 됩니까? 살아나오기에 약간 뻑뻑거리고 좀 힘들겠습니까, 안 그러면 똑같겠습니까? 일주일 됐다면? 똑같죠.

지금 이사야가 똑같아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그 구역, 그 영역 자체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똑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확정됐어요. 사망에 매여 있다, 못 빠져나간다, 예속되어있다. 여기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는 사망의 종이 되어있다. 우리가 아무리 대통령 되고 뭘 한다 할지라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나는 이미 사망된 자 또는 사망에 예속된 그 모양새만 보여줄 뿐이에요. 인간이 어떤 솜씨를 부리든 간에.

손 흥민이 한 골 더 넣든 간에...... 임 윤찬, 이 열여덟 살 먹은 애가 세계적인 피아노대회에서 천재적으로 우승했잖아요. 이게 무슨 모습입니까? 이게 무슨 모습이에요? 사망의 모습이라니까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의 눈에 어렵지 않습니까? 이 피아노 1등한 것이 사망의 모습이라는 것이 누구 눈에는 어렵지 않느냐 하면 이사야의 안목에서는 전혀 이게 난해한 문제가 아니에요. 왜? 한통속이니까요.

그런데 열여덟 살 먹은 애가 성령을 받아가지고 속죄함을 받았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피아노 잘 치는 나가 아니라 죄인인 나를 걔가 만약에 발견한다면 그 순간 걔가 피아노를 치든 다른 걸 하든 관계없이 걔는 차이성,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에요. 이 저주와 생명의 세계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 경계선이 바로 성전이에요. 자, 성전의 특징은 땅에도 있고 하늘에 걸쳐 있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만나는 그것이 바로 성전이잖아요. 성막도 그렇죠.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 회막,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함께 있는 곳.

땅에도 있고 하늘에 걸쳐서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의 몸을 뭐라고 합니까? 성전이죠. 거룩과 저주가 함께 공존하는 곳. 이걸 가지고 이스라엘 전쟁 역사에서 획득물이라 합니다. 전쟁할 때 전리물, 이것이 희생물이에요. 하나님의 흠 없는 희생물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되겠죠. 신약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또는 그의 피로 값 주고 얻었다, 획득물. 주님이 얻은 거예요. 우리가 얻은 게 아니고 주님이 구원을 얻은 거예요. 획득물을 얻은 거예요.

모든 전쟁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으로 마감되기 때문에 우리는 피동적입니다. 얻어걸린 거예요, 얻어걸린 것. 내가 구원을 시도한 게 아니고 구원을 예상해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가 아니라 그냥 성도는 극히 피동적인 존재일 뿐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는 우리 성도를 의의 종이라 해요. 의의 종. 댕~~~하고 우리를 치면 의~~~하고, 의의의의의의의의~~~ 또 댕~치면 또 의~가 부산물로 나오죠. 우리는 저주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 속에서 의가 나오는 것이 주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에요. 죄인 안에 주의 이름이 있고 그 주의 이름이 하는 성과, 거룩의 효과가 의~~~ 하는 식으로 등장합니다.

이걸 아까 얘기한 자유라 합니다. 자유죠. 이 세상의 구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 속죄, 제단에서 나온 불로 이사야의 입을 지져야 그것이 나오는 것처럼. 지진다는 말은 제단에서 나온 불이잖아요. 그 제단 불은 위의 제물을 살짝 구웠다, 웰던이었다,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다 태워버렸어요. 완전히 다 태워버렸다 이 말이죠. 연기화시켰다, 연기화.

제물의 몸체가 연기로 전환되고 그 연기가 주님이 받으시는 음식이 되는 거예요. 제물이 된단 말이죠. 그 작업을, 이 세상을 제단으로 여기고 우리를 제단 위에 있는 하나의 희생물로 여겨서 육체가 죽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향기가 되고 양식이 되게 하는 그 작업을 주께서 제단을 통해서 해내십니다.

이러한 작업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시도하셔서 부활에 이르게 했죠. 아까 고린도전서 구절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천 번을 읽어도 뭐 괜찮을 거 같아요. 여기 보면 성도만이 외칠 수 있는 건데요. “사망아” 그다음에 ‘너’죠. 사망을 하나의 대상체로 보는 거예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하면서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거예요, 사망아. 기분 더럽게 만드는 거예요. 요기 이마 같은 데를 콕콕 밀면서. 코를 밀어도 괜찮아요.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가 큰소리 칠 잽이 되나, 이 사망아! 죽여라, 죽여! 이 사망아.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을 통해서 외부에서, 하늘나라에서 주어진 그 율법,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죠, 그 언약으로 하여금 인간들이 전혀 모르는 인간세계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죄가 왕노릇 하고 있다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모든 인간들 속에 규정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성경말씀 보면 볼수록 내가 내 힘으로 나의 일로 성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날마다 느끼죠, 날마다. 도둑질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십계명에 나오잖아요. 그걸 지키라,가 아니라 나의 일의 한계 너머로서, 내 실력으로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율법 주시고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에 속합니까? 이건 주님 자신의 거룩의 효과죠.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이 작용하는 바로 그곳이 뭐냐? 성전이고 그게 성도의 일상생활 아닙니까. 주의 일이 작용하는 거예요, 주의 일이.

내가 지켜서 넘어서는 건 없어요.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게 주의 일인 겁니다. 내가 거기에 추가해서 내 일 보탤 게 아무것도 남아있질 않죠. 그래서 요 근래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 행위를 쳐다보지 마라.

자기 행위를 쳐다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도 개념 이야기했지만 환상적인 개념, 환상, 망상이거든요. 자아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차이에서 순간적으로 포착할 때 그게 이미지가 돼요. 자아라 하는 것은 이미지의 일종이라서 자아에 대해서 볼 이유가 없어요.

그냥 여러 가지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이건 내가 했다, 하는 순간에 자아가 등장하니까요. 환상이니까 실체가 없는 거죠. 그 차이를 볼 필요가 없죠. 자기 자신의 행한 것, 볼 필요 없습니다. 내가 행한 게 아니고 그때 그렇게 행해졌어야 했을 뿐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광주강의20220624a 이사야6장 5절(거룩의 공격)-이 근호 목사.hwp (64.5K), Dow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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