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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1 22:22:15 조회 : 64         
22 원주특강 / 천년왕국의 반복b / 요한계시록 22:5 / 220630(이근호 목사) 이름 : 정인순(IP:14.41.61.79)
22 원주특강 / 천년왕국의 반복b / 요한계시록 22:5 / 220630(이근호 목사)

이제 요한 계시록 한번 봅시다. 본문에 뭐라고 돼 있는지 본문은 도대체 똑같은 본문인데 본문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가지고 전천년주의 후천년주의 무천년주의 세대주의 왜 그런 구분이 왜 생겼느냐?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그거는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 보면 나옵니다.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천년이 차기까지,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말이 있죠. 까지. 성경을 문자적으로 볼 것인가, 상징적으로 볼 것인가, 알레고리로 볼 것인가 하는 그것은 언어학에 속하기 때문에 신학 하는 사람들이 언어학의 그러한 구분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이 차이가 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상징이나 문자는 둘 다 똑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는 실제와 똑같이 일치될 수가 없습니다. 상징적으로 하든 문자적으로 하든 문자적으로 한다고 그게 그 문자가 그 뜻이 그 뜻이 아니에요. 물이라고 한다고 해서 인간의 물은 물 대상 되는 물은 한시도 똑같은 물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대충 이렇게 얼렁뚱땅 범주를 정해가지고 여기서 여기까지 오는 걸 물로 치자. 물이라고 하자 라고 물이라고 영어로 water, 이렇게 일방적으로 언어를 정한 거예요.

언어는 인간의 편리 때문에 인간의 편리 편리성, 인간의 편리성인데 뭐 하는데 편리하느냐?인간과 인간 사이에 결속을 위해서, 너와 나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가 있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할 때 바벨탑, 11장에 바벨탑 무너뜨릴 때 주님께서는 불로서 무너뜨린 것도 아니고 물로서 무너뜨린 것도 아니고 주께서 그 바벨탑 건립을 중지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언어를 혼잡케 하는 것 그것뿐이었어요. 언어를 혼잡케 하는 겁니다.

인간은 합치면 무조건 자기가 신이 되겠다고 노력을 하기 때문에 우리 이름을 하늘에 내겠다는 그 본성을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숨기지 못하고 계속 그걸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말을 못했습니다. 말을 못했습니다. 일종의 벙어리가 된 거죠. 에스겔 같은 경우에 말을 못j했어요. 꼭 굳이 말한다면 흑 흑 또는 굳이 한다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어딜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을 묘사합니까? 있을 수가 없죠.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이 언어, 인간들이 자기네들이 결속해서 우리 신처럼 행세하자 라고 했던 그 수단, 그 죄악 된 나쁜 의미를 갖고 있는 수단의 방법이 언어인데 놀라운 사실은 이 언어를 하나님이 마음을 낮추어서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이 모형인데도 불구하고 그 모형을 기피하지 않고 모형 속에 이 추잡한 모형 속에 그대로 들어와서 활동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활동하시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 해요. 너희는 듣기로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봐도 알지 못하고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도무지 너희를 모를 것이다. 모든 말씀을 너희가 지키지 못한 이유는 내가 하는 그 말 한마디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간음하다가 뭔 뜻인지 모르고요 도둑질을 하다가 뭔 뜻인지 몰라요. 살인하지 말라가 뭔 뜻인지도 모르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가 무슨 뜻인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건 누가 아느냐? 예수님만 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 아신다는 이 말은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모든, 십계명도 예수님이 만들었거든요. 십계명과 모든 율법은 모든 말씀은 그 용도가 뭐냐 하면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 빼놓고는 모조리 다 더러운
속된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저주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로마서 3장 19절에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로 뭘 막고? 입을 막아버린 거예요. 김정은처럼 마스크 한 두 개 쓰든지, 입을 막아버린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나이다. 그 고백이죠.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3층천에 올라갔을 때 내가 여기에 대해서 말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이 세상에 없나이다. 그걸 표현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표현 못해도 괜찮아요. 왜냐면 실제로 일을 하시는 주체자는 예수님이 일하고 사도 바울은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니까요. 주님을 따르는 입장에서 주님은 안 보여요. 따르는 것만 보여요. 따르릉 따르릉. 따르는 것만 보여요. 따르릉 하고는 관계없다. 따르는 것만 보이는데 이 따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뭐라고 오히려 평가를 하느냐, 비판을 평가를 하느냐 하면 너의 지각과 너의 두뇌의 시냅스의 작용 호르몬 작용에 의해서 니가 행동과 결정을 하고 결심을 하고 니가 선택을 했구나. 이렇게 일방적으로 지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가 아는 철학과 언어학과 과학을 총동원해가지고. 본인은 지금 따르고 있는데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니가 어떤 결정을 어떤 의식에서 했는가? 아니면 너의 무의식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인간이 쓰는 단어를 가지고 감히 하나님이 그 인간을 죄인 되게 하시게 하는 그 놀라운 복음의 효과를 달리 해석을 해버려요. 달리 해석을.

막달라 마리아가 모든 걸 버리고 주 앞에 향수를 뿌리니까 옆에 있던 가룟 유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저 돈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쓰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아까 한 거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겠지만 제가 또 다시 여러분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의 하나님의 메시아 왕국은 어떤 왕국이었다? 정치적 힘이 작렬하는 국가 조직체, 국가 조직체로서의 메시아 왕국이기를 원했다. 이거는 신앙이 아니고 뭐라 했습니까? 신념이죠.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으니까 신념을 갖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정치적 메시아 힘에 예수님이 걸그치니까 거추장스러우니까 제거해 버린 겁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우리가 용인하게 되면 로마가 그걸 빌미로 해가지고 우리에게 더 많은 세금과 우리에게 더 많은 사람을 노예로 잡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정치적 힘이 작용하는 거 이거는 교회 내의 교회법도 마찬가지요. 교단법도 마찬가지고. 교단법 감리교 아주 유명세 떨지요. 교단법. 목사들한테 연금 얼마나 최저 연금 얼마나 주나, 이걸 교단에서 결정하는 거예요. 전부 다 정치예요.

그러면 이 정치의 실체가 뭐냐? 정치의 실체는, 감추는 방식입니다. 뭘 감추느냐? 우리에게 진실은 없다를 감추는 방식이 정치에요. 정치의 힘입니다. 우리에게 진실이 없다는 것을 안 들키게 만드는. 진실이라는 건 절대적이에요.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죠. 절대적인 것을 이렇게 실현시키는 어떤 이념이 있는 이념들은 없습니다.

그러면 절대적 방식, 이 방법이 뭐냐? 이 방법이 적을 만드는 방법이에요. 정치적 현실 속에서 내가 진리를 품고 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인하여 방법은 뭐냐? 적을, 없는 적을 일부러 적을 만들어야 돼요. 우리 교회가 정통이기 위해서는 이단을 씹어야 돼요. 씹어야 맛이에요. 내 인생이 그나마도 숨 쉴 만하고 그나마도 보람이 있다는 것을 계속 증명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계속 저주하고 심판하고 비판하고 씹어야 돼요. 오징어 씹을 때 우리 스트레스가 풀리잖아요. 적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내에서 새로운 목회자가 임했다. 들어왔다. 근데 그 새로운 목회자가 보니까 전임자가 그 교회를 개척해가지고 500명 키운 교회다. 그러면 이 새로운 목회자가 이데올로기를 그 교회의 이념을 그 새 힘을 장악하려면 누구를 씹어야 돼요? 전임자를 씹어줘야 자기가 새로운 스타로 부각이 되어가지고 새로운 그 교회를 지가 장악하게 될 것이죠. 그 적이 누구냐? 전임자를 따르는 장로들을 제거해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제가 하는 방법을.

재벌들가에 일어나는 왕자의 난 같은 게 그런 겁니다. 둘째 아들을 아버지가 죽으면서 니가 그 다음에 후계자가 되라 할 때 둘째 아들이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 그러니까 큰 딸 두 딸을 전부 다 제거해버린 거예요. 이방원의 난, 이방원의 난이 그런 거죠. 세조가 그렇게 세조 되잖아요. 근데 이게 조선시대 때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사소한 모든 조직에는 전부 다 적을 만드는 자가 권력을 가진 자라고 자기 자신을 조작하는 행위가 정치적 행위입니다. 정치적 행위에요.

지금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애가 둘이고 부모까지 식구가 넷이라면 이게 정치적이 없는 줄 알아요. 내가 엄마 라인을 쫓을 것인가, 아빠 라인을 쫓을 것인가. 누나는 지금 엄마 라인 해가지고 받아야 될 거 다 받아내는데 아빠가 엄마한테 기가 눌려가지고 꼼짝 못하니까 나 아들로서 내가 얻어낼 게 별로 없다. 이게 형제간에 심적인 아픔과 갈등으로서 평생 갑니다. 심지어 사촌까지 가요. 하나 있으면 좋다면 좋은 점도 있어요.

왜 천년 왕국, 천년 왕국을 언급하느냐? 그것은 교회의 권력을 성경에 천년 왕국의 가시화, 가시화로 이걸 일치시키고 싶어서 그런 거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 당회장으로서 쥐고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온 천년왕국의 실제적인 모습이다. 그러니까 나를 따르라. 그러면 구원이 주어질 것이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목사가 아니니까 뭐 또 저 무슨 개소리 하고 이렇게 하지만 만약에 여러분의 동생이, 동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미국에서 이상한 데 가가지고 박사 받아와가지고 목회 한다고 큰 교회에 됐다고 해봅시다. 엄마가 그 다음부터 할 일이 뭔지 알아요? 주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누가 우리 아들을 욕해? 교회 다니면서 누가 우리 아들 욕하는 사람인가 어느 권사가 욕하고 집사인지 그거 색출하면서 그 역할을 해요. 가족은 전부 다 한 패니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완도에서 같이 죽고 다 같이 죽잖아요.

이 본성 어쩔 거예요. 이 본성을요. 이 본성을. 명분은 좋아요. 성경대로 말씀대로 이 진리대로 명분은 좋은데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가 없어요. 근데 여기에 5절에 보면 천년이 차기 까지라는 말이 있잖아요. 까지. 이 까지가 인간 세계에서 단어는 뭐냐 하면 a 시간을 이렇게 옆에 눕혀놓고요. 시간을 하나의 수가 있는 수가 매겨진 직선으로 보고 b c 차를 타고 제천이 있고 원주로 오게 되면 차를 타고 어디까지 왔는가? 원주까지라는 말은 원주에서 이게 최종점이 되는 거예요. 원주까지. 세상에서 '까지'는 이런 뜻이에요. 원래 의도했던 목적이 완료되는 그것을 까지라 해요.

그러나 성경에서의 까지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까지를 뭐로 보느냐? 여기서 수직적으로 시간에 매인 상태에서 예수님이 시간에 매였었거든요. 공생애 때. 시간에 매여있지 않는 새로운 완성의 나라까지라고 수직적으로 시간을 벗어난 다른 영역에 속했음을 까지라는 말을 가지고 표현해버리는 겁니다.

아까 그거에 대해서 뜻을 이야기했죠. 내 날개 아래 시편 57편 1절에 내가 주의 날개까지 니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든 니는 걱정하지 마라. 내 품 안에 있으라고 딱 품어버리는 거예요. 지상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온전한 상태까지 올라가 버려요. 그러면 그 온전한 상태를 지상의 언어로 표현할 때는 뭐냐? 천이라는 말 밖에 없어요. 왜? 항상 창세기 5장에 아담의 후손들을 수명을 할 때 까딱까딱 뭔가 남자 높이뛰기도 아니고 까딱까딱 하면서 자꾸 뭔가 어떤 절대 숫자에 빠져버리는 데까지 인간은 살아요. 9백 몇 살 구백 몇 살, 뉴욕의 마천루 같아요. 하지만 9백 몇 층, 구백 몇 층은 되지만 천 층은 용납이 안 돼요. 천은 인간은 피조성이고 인간은 한계가 있음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인간에게 약올리는 방식이에요. 인간은 백날 니가 노력해도 이 라인 넘어, 이 레벨 너머는 못 넘어서는 그러한 한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천이라는 숫자를 동원한 거예요. 인간 숫자를 동원한다 이 말이에요. 인간 숫자를 표현한 최종적인 거, 절대적인 걸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걸 가지고 무한이라고 하는데 무한은 아니고요, 절대적인 거예요. 무한 절대 그 차이는 비슷하다고 생각하시고요.

그래서 그 안에 있으면서 천년 안에 있는 사람은 뭐 하느냐? 구경하는 거죠. 요한계시록은 시간이 흐르는 것과 시간이 멈춘 장소 두 장소를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누어 버렸어요. 왜 나누었는가? 나누는 이유가 있어요.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역사에 있는 거, 시간이 흐르는 걸 역사라고 합니다. 역사가 아닌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언어니까 한계가 있어요. 역사 아닌 걸 뭐라고 하냐 하면 반대되는 걸 가지고 비역사라고 해요. 비역사니까 역사에 대해서 부정하고 심판하고 고발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고발과 부정과 심판을 하지만 이게 긍정적 의미는 담기지 않습니다.

역사에 긍정적, 반대되면서 긍정적 의미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묵시라고 이야기합니다. 묵시. 이거는 마치 먹구름 위에서 고개 하나 내민 상태, 먹구름 위에서 고개 하나 내민 상태. 지금 장마 져가지고 이렇게 구름이 꽉 끼었잖아요. 지상에서 봐서는 그래요. 지금도 칼 타고 유럽에 갈 때 비행기는 구름 아래 가는 게 아닙니다. 번개 쳐서 그건 위험해서 안 돼요. 구름 위에 올라가서 비행기가 날아갑니다. 따라따라라 바바밤 바바 팝송 CF 나와요 칼 CF 고요하게 조용하게 가면 저 구름 너머에 해 지고 해 뜨는 거 다 보입니다. 비행기 창가에 막 눈 햇살이 비추는 거 다 보죠. 안에는 시커먼데 위에는 하얀 솜털 위를 위에서 날아가죠. 내만 비행기 탔냐? 그건 아니죠. 제주도 갈 때도 그래요. 유럽 갈 때 그런 게 아니라 제주도 갈 때도 그래요.

묵시 세계의 특징은 고요함이 있습니다. 무슨 일 있어? 대통령 선거한다고 뭐 우크라이나 전쟁? 그건 뭔데? 고요한 묵시 세계. 이 묵시 세계를 요한 계시록이 요한 계시록의 내용은요. 인간의 시공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파괴, 파괴 기록이기 때문에 이렇게 파괴되는 것을 아래쪽으로 눈을 아래로 해가지고 쳐다보는 여유, 그 평온함 이게 안식, 안식을 묵시 세계로 따로 이렇게 군데군데 설정해서 짝을 맞춰서 대비적으로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예를 들면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 밧모섬에 있잖아요. 밧모섬에 누가 나타났습니까? 혼자 있으면 역사예요. 밧모섬에 요한에게 누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나는데 예수님의 존재가 어떤 존재냐 하면 묵시적 존재예요. 역사적 그 예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까 말씀한 것처럼 묵시적 존재 앞에서 요한은 아무 소리 못하고 그냥 엎드려요. 뭐 같이? 죽은 자와 같이. 요한 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그냥 죽은 자예요.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요. 엎드릴 때에 요한아. 내가 이 세상을 이렇게 스케줄대로 간다. 근데 이건 요한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주와 함께 있으면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저 밑에 있는 이 세상에다 그냥 전달하면 그만이에요. 지키고 안 지키고는 없어요. 이미 확정된 것이기 때문에 누가 지키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대로 건질 자만 주께서 건질 뿐이지 새삼스럽게 요한계시록을 지켜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어야지 요한계시록 믿으면 안 돼요. 근데 신천지는 십자가가 아니고 요한 계시를 믿으라는 거예요. 그거 연구하고. 요한계시록 연구했다고 그 자부심을 가지고 온 동네 교회 다 다니면서 니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알아? 이거 자랑질 하면서 교회 빼 나가고 그 교인 빼 나간 거 등록금 학자금 다 빼내가지고 그거 가지고 자기 교단 세우는 자금 자본금 마련하고요. 그거 그 평소에 했던 그 짓을 흔히 말하는 새로운 교단, 이단이라고 하는데 그 새로운 이단들 하는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거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그게 과거에 똑같은 짓을 했다는 거, 유대인이 그렇게 했다는 것도 몰라요. 보이스피싱 한번 걸렸으면 정신 차려야 되는데 보이스피싱 한번 걸렸는데 또 걸립니다. 이유가 뭡니까? 본인이 구원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본인이 구원을 안 받았기 때문에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뭐 없나, 없냐 하고 봐서 채우는 거예요. 본인이 구원받는 것 자체가 이미 이단의 밥으로 이단에 그냥 미끼로 광고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까지’라는 말은 이렇게 위에 올라가는 겁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2장 봅시다. 마태복음 12장 20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이렇게 돼요. 심판이 끝나버리면, 심판이 끝나버리면 심판이 끝난 거예요. 아래쪽에 심판받은 자들의 그의 모습이 아래쪽에 보이는 겁니다. 수평적인 시간대 까지가 아니라 이게 위로 올라간다니까요. 위로 가니까 아래쪽이 다 보이는 거죠. 이 위는 세계와 아래까지 요걸 가지고 간격을 까지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에요. 차이를 보여주는 겁니다. 시간이 적용되는 것과 시간이 완료된 그 상태의 세계를 이 두 개의 접시를 비교하듯이 그 차이를 비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간이 적용 안 되는 세계니까 이게 묵시 세계니까 여기서 거기 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해요? 살아서 못 가죠. 살아 있으면 내가 육의 시간이 적용되니까 목 베인 영혼이 되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가 내려다보는 거예요. 죽은 자가 내려다 보니까 이 세상의 용어로 하면 이건 뭐냐면 이건 귀신인 거예요. 그래서 이거는 귀신이 되어 살아서 하는 그런 표현으로만 이 세상 인간들은 이해되지요.

그러나 사도 요한이 예수님 만났을 때에 자기가 분명히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는 을 분명히 느끼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그 증거가 어디냐? 세상이 어떻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이미 본인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2022년도 6월 달에 무슨 일이 있냐, 그걸 아는 게 아니고 2022년도가 되든 2050년이 되든 간에 그런 일어난 사건은 묵시적으로 사용된 단어 안에서 거기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죠. 맴돌고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너는 이미 사탄의 종이다. 또는 니가 악마의 인을 받았다 하면 그 단어 안에서 단어 안에 단어의 실제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갖가지 다양한 사건이 일어날 뿐이지 결코 이 단어 밖으로 튀어나가는 경우는 없는 거예요. 그게 성경 말씀에 이거는 댓방, 효과입니다.

인간들에게는 아무리 다양한 사건이지만 그 모든 사건은 예수님을 십자가 죽인 예수님으로부터 심판받을 그런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그들은 조금도 그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십자가 사건 밖에 벗어날 수 없었던 거예요. 그 증거가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옵니다. 요한 계시록 11장이에요. 8절에 보겠습니다. 여기에 7절에 그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너희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너희를 이기고 너희를 죽일 터이니, 할 때 이것을 여러분들이 지금부터 사도 요한의 안목에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안목에서 여기 나온 단어들을 무저갱 짐승 이런 단어들이 어떤 특정 시기에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고 세상 끝날까지 되풀이해서 사용되어도 무방한 단어들이 되는 거예요.

원래 악마의 고향은 무저갱이에요. 무저갱이라 하는 것은 바닥 없는 감옥이라서 이거는 그냥 주께서 일방적으로 풀어놨다가 쪼았다가 풀어놨다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하 감옥이에요. 그 지하감옥에서 악마를 집어넣었다가 주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필요하다 싶으면 잠시 풀어놨다가 도로 집어넣고 풀어놨다가 도로 집어넣는 거예요. 이거는 반복이에요. 반복. 오늘 제목을 정하라 하면 한마디로 하면 ‘반복’이에요. 개념 안에서, 주께서 주님이 정했던 그 개념 안에서의 모든 것은 반복 반복, 되풀이 되풀이입니다. 몸부림 쳐봐야 그 개념 안에서 갇혀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8절에 보면 저희 시체가 큰 성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 하고 애굽이라 하니 소돔이라고 애굽인데 소돔과 애굽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졌습니까? 그러나 같은 지점을 묘사하는 묵시적 개념인 거예요. 이걸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상징적으로 해서 상징적으로 하지말고 문자적으로, 문자나 상징이나 둘 다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신학적 견해는 이거 엉터리예요. 전부 다. 문자가 됐든 상징이 됐든 지금 초점이 우리가 어떤 지혜를 알면 구원받습니까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고 다 이루었다에 끝나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백날 연구해봐라. 니 구원받냐 이런 취지예요.

성경을 어떤 사람은 성경을 만독 했다는데 요한계시록 만독 했다는데 구라 같아. 만독해봐야 한독 한 거랑 별 차이 없고요. 만독을 하면 무슨 뜻입니까? 그 의미가 전부 다 자기 구원과 결탁되어 있는데 해봐야 만독을 해도 만독의 되풀이되는 반복되는 오류를 만독했을 뿐이에요.

14만 4천 같은 경우에, 14만 4천과 같은 경우에는 12 곱하기 12 곱하기 천이에요. 천이 들어간다고요. 천. 천이 들어간다고. 다 이루었다가 들어간단 말이죠. 왜 요한계시록이 이렇게 이중으로 이중 세계관을 구성하느냐? 인간 역사가 이렇게 과거부터 현재 내려가잖아요. 올라가는데 주께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보냈으면 이게 종말인 거예요. 이미 모든 것은 마지막이 된 겁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말씀을 한 사람에게 일임해서 그분이 제대로 완수했다는 뜻이에요. 이게 또 까지예요. 포도주 먹을 때까지 그분이 오실 때까지 포도에서 난 것은 다시 먹지 아니한다. 까지가 또 나와요. 까지가.

그분이 완성을 했잖아요. 완성을 했으니까 속도를 내봅시다. 속도가 하게 되면 이 속도가 이렇게 그냥 다가가 버리면 전부 다 이거 갉아 먹어요.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주님이 완성한 것을 속도 내보니까 이게 뒷차가 앞차를 속도로 올라간 거예요. 이게 이렇게. 나만 웃냐? 지금 웃고 있어요. 기어 올라가 보니까 이미 여기는 미완성이 돼버리고 완성된 위에 올라타는 모양이 되는 거예요.

사도 요한은 그 두 경계 지점에서 옛날에 알던 역사 속의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된 예수님을 만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이 깜짝 놀라요. 이런 분을 진정 몰랐습니다. 그분이 사도 요한에게 천사를 보내가지고 사도 요한과 더불어서 함께 성령 안에서 함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들이여. 성령이 너희에게 이야기하는 걸 들으라. 교회는 어디 속하는가? 여기에 속하죠. 그런데 일곱 교회는 다 망해요. 망해도 교회는 책망 받을 근거를 만들고 망해요. 이런 게 교회가 아니구나, 이런 걸 원하지 않는구나.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온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왜? 책망 들을 교회만 되풀이할 뿐이에요. 진짜 교회는 하늘에서 위에서 내려와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신부가 되어서 내려오는 거예요.

뭘 고칠 게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신부가 신부 대기실에서 결혼식 하기 위해서 나올 때에 뒤늦게 코디네이터가 와가지고 이거 좀 더 고치고 지금 결혼식 한창 하고 있는데 고치고 이런 거 하면 결혼식 망치잖아요. 온전하게 더 손댈 거 없이 완벽한 신부를 만들어서 딴딴따 하고 신랑을 내보냅니다. 신부가 위에서 내려와요. 내려오는데 이 신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 지상이 이 세상이 아주 극도로 지저분해야 되고 극도로 이 신부에 대해서 대들고 주님에 대해서 대드는 그 기세가 날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이게 특히 활발해야 돼요. 여기서 필요한 것이 뭐냐? 짐승이에요. 짐승이 설쳐줘야 악마가 설쳐줘야 이 짐승은 이 정치적 의미거든요. 이 땅에 국가가 설쳐줘야 예수님의 복음이 욕을 많이 얻어먹고 그래야 그들은 완전하게 저주받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천년왕국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 세계의 인간의 언어로 다른 하여튼 천국의 언어는 언어로 표현을 못해요. 표현을 못하는데 인간 사는 이 땅의 언어로 표현된 다른 세계를 천년왕국이라 합니다. 왕국이라는 말은 없고요,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거예요. 왕 노릇인데 왕국이란 말도 잘못된 말이에요. 왕노릇이지 왕국이 있는 게 아닙니다. 기존의 왕국을 부수는 왕국이기 때문에 왕국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냥 왕노릇하면서 왕 노릇이 뭡니까? 밟는 거예요. 니는 끝났어. 니는 내 신발에서 못 벗어나. 이게 왕 노릇이에요. 로마서 5장에 나온 이야기 아닙니까? 죄가 왕노릇 한다는 것은 니가 뭘 해도 죄를 안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죄의 왕 노릇입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무엇이 넘칩니까? 은혜가 넘치죠. 악마로 하여금 이 지상이 개판으로 될 때 성도한테는 그래야 돼. 세상이 개판 돼야 돼. 하고 도리어 기뻐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왜? 자기는 세상에서 기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못되고 엉망이 되면 될수록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다 이루심이 더욱 더 감격이 되니까 은혜가 더욱 더 되는 거예요. 은혜가 되니까 그 은혜를 바라본다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기 때문에 세상에서 어떤 비난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게 뭐 큰 문제가 아닌 거예요. 내가 버린 쓰레기를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침에 새벽에 쓰레기 봉투 내놓잖아요. 아파트 말고 일반 주택은 그래요. 내놓을 때 누가 그 쓰레기 봉투를 훔쳐가면 여러분이 화납니까? 나는 못 살아요.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 이렀습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해주죠, 누가 치우든 치워주면 되잖아요.

우리가 아직까지 세상 것에 대해서 쓰레기라는 느낌을 못 들은 것은 아직까지 악마한테 덜 시달려서 그래요. 보이스피싱한테 사기를 덜 당해서 그래요. 진짜 완도까지 한번 가봐야 완도까지 가보고 이제 비트코인으로 망해봐야 나도 완도 가자 이렇게. 자식 기대할 때 자식 공부 못하고 해봐야 이 땅에 믿을 놈 아무도 없다는 걸 알 때 이것은 나의 신념 자체, 신앙이라고 우기는 그 신념 자체가 대상체를 잃어버리게 하는데 악마의 활동만큼 적절한 활동이 없어요. 악마는 우리를 자꾸 무서워하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너 그러다가 실패한데이. 너 그럼 어쩌려고 그래? 뭐 이런 식으로 약을 살살 올리죠.

그래서 여기에 소동과 애굽 그리고 또 8절에 보면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다. 이게 뭐 말이 돼요? 소돔과 애굽 십자가 달린 갈릴리 전부 다 지역이 다른데 그걸 하나로 보는 거예요. 하나죠. 하나일 수밖에. 위에서 보면 전부 다 아래쪽이 동일한 장소거든요. 그 장소가 여기서 2천 킬로 떨졌던 2만 킬로 떨어졌던 전부 다 한 통속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구약적 개념 또 신약적 예수님 개념을 가지고 그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한꺼번에 표현해버리는 겁니다.

12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그 음성이 일어 가로되 11장 11절입니다.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이미 그 영혼이, 영혼이란 말밖에 할 수 없어요. 사실은 영혼이 아닌데 육과 영혼이 아닌데 그냥 몸 자체인데 이 허술한 몸을 갖고 있어도 이미 구원받은 몸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령 안에 있는 몸인데 여기서 뭘로 표현하느냐? 구약적인 구약의 예언서에 의해서 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돼 있어요. 다니엘에 나온 예언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0장에 있어서요. 요한계시록 여기 보게 되면 너희들이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고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요.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고, 이렇게 해놨죠. 둘째 사망이. 보셨습니까? 그러면 누가 에스겔 37장 12절 한번 읽어보세요. 에스겔 37장 12절. 구약과 요한계시록이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제가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겔 37장 12절 누가 크게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는데 누구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뭘 경유해야 들어갈 수 있어요? 산 채로 못 들어가요. 뭘 경유한다? 예언이니까 미리 반드시 죽음을 경유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참 이게 재밌지요. 참 묘미가 있어요. 어떤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이 준비한 이스라엘 천국이 있다 이 말이에요. 천국이. 내가 들어가고 싶어요. 이거는 안 돼요. 왜냐하면 이게 자기 구원이 되기 때문에 내가 장차 잘 되고 싶은 여망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에 이건 안 돼요. 이거는 하나의 상상에 불과하고 마귀의 작동입니다. 종교적 작동이거든요. 인간이 어떤 힘을 갖든 간에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여버립니다. 죽일 때 그냥 죽이면 억울하잖아요. 뭐로 죽입니까? 율법으로 죽여버려요. 왜냐하면 율법에 의해서 죄 지으면 반드시 본인의 어떤 의가 없으면, 죄 지었다는 말을 다른 말을 하겠어요.

본인이 뭔가 살려달라고 할 수 있는 주장하려면 바탕에 잘한 게 있어야 돼요. 근데 율법이 와서 잘 한 게 하나도 없어. 못한 것 밖에 없다면 주께서 언제 죽여도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할 말을 잊었지만. 할 말이 없어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냥 죽여버리고 이스라엘에 가게 되면 이 통로가 죽음의 통로죠. 위에서 죽여버리죠. 그럼 죽음의 통로가 살아있으면 이거 이스라엘은 누가 갈 수 있습니까?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죽였다. 이스라엘 모였다. 이스라엘은 무슨 자의 집합이다? 죽은 자의 집합. 언약에 의해서 죽은 자의 집합, 그 최초의 인물은 언약에 의해서 죽은 최초의 인물은 누구입니까? 신약에 와서 누구지요? 예수님. 예수님 앞에서 같이 죽은 자만이 같이 사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같이 모인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는 죽은 자로 보고 하나님의 언약에서는 이걸 가지고 산 자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어야 언약을 앞두고 밑에서는 위를 이해 못하고 위에서는 밑을 다 이해하고.

내가 살려고 하는 내가 나를 내가 바로 주님께 살려고 하는 내가 나를 죽게 만드는 원인이었다는 것을 산 자는 알아요. 내가 살고 싶어서 구원받고 싶어 구원된 게 아니고 주님께서 원해서 사랑을 줘서 내가 우째 이렇게 구원이 됐는지 우째 이런 일이? 이 기쁨의 집합체예요.

여기서 그런데 여기서 보면 어떤 재미나는 현상을 이게 아주 재미나는 건데 뭐가? 그들의 눈으로 봤을 때 밑을 보거든요. 요한계시록은 진짜 밑을 봐요. 밑을 보니까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공통점이 있어요. 안 죽고 천당 가려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워가지고 교단을 세워가지고 몸부림 만부림을 다 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 거야? 뭐 이런 식으로. 내가 연기가 너무 약해서. 그리고 뭔가 자기 일이 잘 안 되면 그걸 다 가져가야 속이 시원했냐, 이런 식으로. 내 인생 다 가져가야 그렇게 속이 시원했나? 역시 연기가 많이 모자라. 많이 좀 늘었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드라마나 연극 영화 음악에 대해서 위에서 지켜보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게 인간이 스스로 구원되는 몸부림이 바로 박찬욱 영화고 또 홍상수 영화고 또 누가 있어요? 기생충 영화고. 상주고 임윤찬 피아노 치는 거고요. 임윤찬 요새 뜹니다. 피아노 상 받았다고. 이 세상에 있는 손흥민이고 이 세상 전부 다가 전부 다 이런 이야기예요. 복음 그 사람들 귀에 안 들어옵니다. 오직 누가 어떻게 잘 됐는데, 그것만 봅니다. 손예진 임신 3개월 됐다는 거예요. 손예진 임신 3개월 됐다는 그 이야기가 그게 왜 화제거리인가? 내가 지금 화제거리라고 지금 비난하면서 내가 또 입에 올린 내가 또 이상한 사람인가? 아무 관심도 없는데 내 혼자 관심있나. 왜 그러냐 하면 성도 입장에서는 근데 이미 멸망하기로 된 그런 자위 그런 형태를 성도 입장에서 이미 ‘까지’가 되어버린, 위에 올라가는 입장에서 느긋하게 관람하고 구경하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남아 있는 육의 인생을 즐기고 보내면 되잖아요. 그거 하라고 성경 준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뭘요? 봐라! 아래쪽을 봐라. 난리도 아니다. 구원받으려고.

주님께서는 천년 동안 하고 그 다음에 이 아래쪽은 악마를 계속 무저갱에서 계속 풀어줘요. 풀어줬다가 쥐었다가 풀어줬다 하면서 기어이 그들로 하여금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오지만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자기의 본색이 있는 대로 다 들추어서 예수님을 욕하고 옛날 예수님 십자가 못 박았던 그 심보 있잖아요. 그 심보를 세상 끝날까지 끌고 갑니다. 그 예수님 죽였던 심보가 뭐냐?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나옵니다. 왜 당신은 우리의 행함을 부정하십니까? 부정합니까? 우리의 행함을 부정한다면 당신이 우리 손에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나온 게 행함 책이에요. 행함 책. 행함 책은 짝을 이뤄요. 뭐냐 하면 아무것도 행한 것을 우기지 않는 사람과의 짝을 이뤄서 구원받는 사람은 자기 행함에 대해서 제가 행한 건 죄밖에 없는데 뭐 행한 건 뭐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생명체에 기록된 자들만 행함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게 심판이에요. 갈라내는 심판.

제가 어느 강의 땐가 대전 강의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사람들이 있으면 사람들이 보면 각 개성들에서 다 달라 보이지만 성경에서는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가라지와 알곡 왼쪽과 오른쪽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실 때는 자기 행함을 계속 고집하고 이렇게 잘난 나를 왜 하나님께서 섭섭하게 하십니까 이런 주장과 내가 행한 것은 이 말씀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사도의 말씀에 비하면 이거는 내가 살아있는 것도 이거는 덤으로 살아있는 것이고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내가 진작 죽어야 되는데 왜 아직도 살아 있지, 라고 오히려 의아해하는 거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점점 더 간격을 벌어지게 하는 그 작용을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교재를 내가 드렸기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를 7년 대환란, 한번 보게 되면 이거 있죠. 이거 7층 시루떡 칠층 있는 거예요. 여기 보게 되면 제일 밑에 있는 그림 한번 봅시다. 구약시대 예루살렘 초림 제일 밑에 그림 있거든요. 막대기 그림. 구약시대 예루살렘 초림 일 교회 시대 이 삼 사 천년왕국 오 육 영원한 나라 이래 돼 있죠. 1번이 뭐냐? 예루살렘 초림하고 난 뒤에는 오순절 2번이 교회 시대 다음에 2번 나오죠. 2번이 뭐냐? 배교와 적그리스도, 삼번이 뭐냐? 재림. 사번이 성도의 부활과 사탄의 결박, 천년왕국 있고. 5번이 천년왕국 뒤에 나오죠. 오번 악인의 부활 사탄의 결박과 무저갱에 갇힘. 4번이고요. 5번은 악인의 부활. 6번은 악인의 심판과 사탄의 심판. 그 다음에 영원한 나라. 이 스케줄을 누가 짰습니까? 이 스케줄을 생각하는 자체가 지금 몸부림 치고 있는 거예요.

유대교가 유대인들이 유대교 자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을 통해서 이걸 이런 것을 만들어 냈던 거예요. 십자가 없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에스겔이나 예레미야나 다니엘을 통해서 만들어낸 겁니다. 그 만들어낸 게 묵시문학이고요, 유대인 묵시 문학입니다. 그걸 그대로 요한계시록의 그 신약에서 그걸 그대로 사람들이 이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누굴 죽였느냐? 예수님을 죽였거든요. 예수님을 죽였던 그 아이디어로 시간 관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이런 순서로 되게 되면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이런 걸 따지는 거예요.

여기에 동원되는 그 개념은 인간들이 지가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나오는 개념들이에요. 그 다음에 그 막대기 위에 위에 막대기 있죠. 같은 막대기 시루떡 같은 거. 시루떡, 이걸 세대주의라고 하는데 이 세대주의란 말 자체를 붙이는 사람도 나빠요. 지는 뭐라고 또 세대주의를 붙여요. 구약의 다섯 세대, 그 다음에 초림, 오순절, 교회 시대, 그 다음에 시루떡 일곱 개 층이 있죠. 이거는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이걸 층을 올려놓고 여기에 잘못돼 있는데 성도의 강림이 아니고 성도를 위한 강림, 예수님이 은밀하게 휴거 쪽으로 한번 강림하고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이방인을 작살내기 위해서 그 칠년 대환란 이후에는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재림한다는 거예요. 재림 두 번 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천년 왕국. 천년 왕국은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 생기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는 의인의 부활과 심판 악인의 부활 심판은 주어진다. 그래놓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빠진 게 있습니까? 완벽하잖아요. 이러고 있다고 해요. 완벽하죠. 마귀가 만든 신학으로서는 완벽하죠. 완벽 아니고 계속 지금부터 수정 중입니다. 날짜 계산 해가지고 안 맞으면.

이장림 알지요? 1995년 10월 18일 지는 안 믿으면서 여기 돈 되니까 이걸 믿으라 해가지고 지는 거기서 앞으로 6개월 뒤에 딸 펀트까지 다 집어넣고 재림을 안 믿었다는 뜻이에요.
10월 18일 이후에까지 계산해가지고 적금 넣어놓고 지는 10월 18일 날 재림한다고 교인들한테 흰 옷 입고 와가지고 그때 흰 옷 장사하는 사람들 돈 벌었어요.

이제 요한계시록 그 마지막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그 내용은 역시 ‘까지’라는 것, 그리고 또 뭐냐 하면 ‘천년’이라는 거, 천년이라는 이 천이라는 숫자가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된 것을 인간의 한계는 인간이 넘볼 수 없는 거 접근 불가한 거 뛰어넘을 수 없는 다른 영역의 세계를 인간이 사용하는 숫자 가지고 표현한 거예요. 왜 인간 숫자와 언어로 표현하는가? 인간이 자기 언어 해석으로 그 세계에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도 요한처럼 주께서 성령이 함께 하시니까 이게 전부 다 예수님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구나 내가 뭐 추가해서 더 보탤 이야기가 아니구나 그래 아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천사가 무저갱 열쇠를 열고 무저갱을 열어서 천년이 미혹하지 못하게 하다가 또 미혹하게 하더라 하게 만들고 이런 것은 이제 악마가 그렇게 좀 설쳐대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어떤 인간도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는 그 죄에서 벗어날 위인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성령께서 니 죄 바로 니가 같은 인간으로서 예수님보다 니 행함을 주장하는 그런 인간으로서 니도 그런 인간이었잖아. 하지만 내가 내 피로 속죄함을 받은 그들에 의해서만 비로소 악마가 설쳐대는 것은 주의 뜻이 합당한 주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4만 4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 곱하기 언약이, 언약이 완성이 되는데 합당한 완성이 다 된 상태의 교회 또는 이스라엘, 12지파 12지파 완성된 거예요. 완성된 걸 말해요. 그렇다면 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구약의 또는 선지자가 사용한 단어 구약의 모세가 사용하는 단어 열두 지파라는 단어 말이죠. 12라는 단어, 선지자가 생각했던 그 무덤을 열고 나와서 이스라엘 땅에 간다는 이스라엘, 그 용어들은 전부 다 모형적인 거예요. 이 숫자 자체가 모형적이에요. 숫자가 14만 4천이 아닙니다.

완성이라는 완성된 숫자지요. 택한 자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양의 인을 받은 자의 총 집합을 지상에 언약적 숫자를 사용하다 보니까 12 곱하기 12이 곱하기 천이라고 묶어 절대 숫자로 묶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오늘 말씀을 강의를 맺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인간의 한계에서 나오는 인간의 육의 한계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육의 한계를 예수님이 육의 한계를 자진해서 그걸 본인이 받아들였다는 게 놀라워요. 받아들여서 인간의 방식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방식, 유월절의 피 방식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언약적 방식으로 다 이루어 놓고 지상에 그것을 너희들이 얼마나 한계가 있으면 한도가 있으며 허접하며 너희의 행함은 하늘에서 안 받는다는 사실을 성령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할 때 우리의 육은 이 땅에서 마음껏 허무를 즐기고 이 땅에 자신의 고생을 그냥 즐기면서 이 육을 떨어진 그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을 그날까지 주님 가신 그것을 반복해서 고생 좀 해라. 하지만 그걸 기쁨으로 우리는 이미 살았기 때문에 영혼을 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마음껏 예수님이 증거하라고 사도 요한처럼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말고 다른 분이 다 해놨는데 왜 우리는 우리 혼자 사서 걱정을 하고 염려를 합니까? 주여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흔적 없이 부활하셔서 오늘날 십자가만 앞장세워서 피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신 자가 영생을 얻었다고 진리를 알려주시는 그 진리를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영적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2 원주특강 천년왕국의 반복b 요한계시록 22,5 220630 (이근호 목사).hwp (35.0K), Down: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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