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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 10:04:50 조회 : 125         
2022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4강-에스겔: 새 성전-몸으로 나타난 계시 이름 : 오용익(IP:121.159.244.254)
2022 여름수련회 에스겔강해 제 4강 : 몸으로 나타난 계시 - 이 근호 목사

네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5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놓치기 쉬운 내용이 하나 들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읽고 설명해 보겠습니다. 【‘once and for all’, 즉 ‘모든 것에 대한 한 번, 모든 것을 위한 한 번’의 사건이 필요하다. 두 번이 되어서는 안 되는 영원히 단 한 번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 2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건이다. 그러면 단 한 번이 되는데 방해되는 요소가 뭐냐? 나라는 동질성이에요.

【‘나’라는 동일성 덩치가 알지 못하는 사건이 필요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이 나를 구원해야 된다, 그 말이지요.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이.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내가 아는 사건은 내가 모르는 사건을 핍박하고 모독하는 우상적 사건인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교회 다녀야 됩니다. 왜? 그게 우상숭배기 때문에 다녀야 돼요. 그러나 우상숭배를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되지를 않아요. 그다음 대목 보면 【‘죽기 전에 후회 없이 보람 있게 살아야 한다는 각오’와 무관한 노선이어야 한다. 즉 어떤 식으로도 나를 치료시키는 사건】이 되면 안 돼요.

구원은 치료가 아닙니다. 구원은 파괴지요. 파괴가 구원입니다. 치료가 되게 되면 그 괴물을 살려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 괴물을? 살아서도 우상 숭배, 죽어서도 우상 숭배. 천국 꼬라지하고는, 참! 살아서도 내 중심, 죽어서도 내 중심,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살아서 핍박 못 해서 한 맺혀서 천국 가서 주님한테 또 핍박할 거예요?

인간에게는 개과천선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개과천선이 수상해요. 개과천선을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괜찮아졌다는 그러한 환상을 자기가 또 조작해 내요. 하여튼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항상 목적하는 게 뭐냐? 자기 존재의 안일함, 자기 존재의 평화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가게마다 붙여놓은 것 있잖아요. “이 집에 들어오는 자마다 평화가 있을찌어다.” 아, 참 이거 무서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치료는 없습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지 나를 고치는 사건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나를 충분히 잊을만한 사건이어야 한다. 그래야 동일성에서 끊어낼 수 있다. 따라서 내가 죽는 ‘나의 죽음 사건’으로도 부족하다. 나의 동일성과 관련된 죽음】 내 동일성이 깨지는 죽음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차라리 내가 살아 있는 그 자체를 ‘죽음’이라고 선언】해줘야 내가 살아 있으면서 나의 동일성 때문에 죽어 마땅함이 여기서 들춰질 게 아니겠습니까? 뭐와 비교해서? 인자의 동일성과 비교하면서 ‘나는 안 되고 인자는 되어야 돼. 나는 부활 되어서는 안 되고 주님은 부활되어야 해’가 살아 있으면서 그게 드러나야 되거든요. 내 이름은 안 되고 주의 이름은 된다는 겁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를 나타내는 표시가 그 기표가 이름이라는 겁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여기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기에, 여기에 주님이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주님이 살아 있으면 나의 존재는 하나의 살아계신 예수님의 내부성으로 들어가야 되지요. 바깥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요.

내가 나 독자적으로 살아 있는 것은 없어요. 소위 성도치고는. 내가 여기 있음은 주님의 있음을 보여주는 주님의 내부성으로 이해하지요. 주님이 여기에 확실히 있음을 그걸 내부적으로 표시해주는 것이 나라는 존재일 뿐이에요. 성도의 존재가. 내 존재 과시하라고 여기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요.

【그것은 나에 대한 심판 사건의 도래이다. 꾸준히 내가 살아 있되 그 산 채로 심판하는 사건이 되어야 나의 죽음으로 나의 모든 죄가 사죄 받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내 죄가 용서받는 것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대목, 나는 뭐라고요? 【나는 교정(矯正)되지 않아야 한다.】 나는 고쳐진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개선되지도 않아야 한다.】

개선할 필요 없어요. 개선을 의도하고 개선을 노리지 마세요. 인간 안 됩니다. 인간 안 됨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요새 피서 즐기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인간 안 되는 것도 괜찮은 피서에요. 그래서 그 뒤의 말씀가운데서 중요한 것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그것과 같이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계속해서 심판의 효력이 살아 있어야 계속해서 사죄의 효력도 살아난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제사장들이 제사지내는 그 행위, 그 행위가 계속 살아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행위가 절대로 제사장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계속 제사장의 제사행위가 살아 있어야 돼요. 지금도 제사 드릴까요? 지금은 예배로 바뀌었잖아요. 교회에서. 계속 예배함으로써 예배드리는 행위가 절대로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할 때마다 그걸 자각하는 기회로 삼으시면 되고 그걸 즐기면 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구약의 제사장이 필요한 거예요.

“저 아니에요” 그걸 하는 거예요. “제가 제사 드려서 구원받는다고요? 감히요?” How dare you, 감히! 네가! 영어를 써서 죄송합니다. 날마다 자기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내가 감히, 감히 의미 있는 행동을 해? 이것은, 이것은 죽으려고 환장했지.’

살아 있는 동안에 계속 살아 있어야 될 이유는, 내 행위가 심판되어야 될 증거로써 똑똑하게 생생하게 살아 있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주께서 허락하는 대로 살아 있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단번, singularity, 단번에 사하심이 대조되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것이 바로 9장 28절입니다. 【영원히 죄도 살아 있고 심판도 함께 살아 있는 그 노선과 ‘상관없이 된’ 분만이 구원해주실 수가 있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기억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분의 난입, 침입, 이것은 나의 기억을 심판하는 방식으로 날마다 우리 안에 침범하고 침투합니다. 이러한 인간존재, 이것이 오늘날의 에스겔 저와 여러분입니다. 에스겔이 그 일을 그대로 당했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에스겔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제가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1. 벙어리 된 에스겔(3:26)
2. 좌편으로 390일, 우편으로 40일 스스로, (스스로입니다) 스스로 몸이 묶이다.(겔 4:4-8) 불편하다 그 말입니다.
3. 보리떡을 인분으로, 사람 똥으로 구워먹는다.(겔 4:9-12)
4.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다.(겔 5:1-4)

이것은 장례식에서 애도하는 표시에요. 그 다음에 이 머리털이 그냥 깎이는 것이 아닙니다. 3분의 1은 성읍에서 불사르고, 3분의 1은 성읍의 사방에서 칼로 치고, 또 3분의 1은 바람에 날려 보낸다. 이것은 살아 있는 자보다 죽은 자보다 더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칵, 죽은 것으로 그것으로 끝났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칵 죽는 죽음을, 그 경우를 늘여버렸어요. 확장시켜버립니다. 서서히 고통가운데 죽기는 죽지만 서서히 죽이는 것.

5. 아내가 죽는데 울지 말아야 하고 장례음식도 입에 대면 안 된다.(겔 24:15-17)

이게 에스겔이 온몸으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고 장차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시키는 이유는, “에스겔의 동질성 파괴”, 에스겔의 동질성을 파괴시키는 겁니다. ‘나는 나다.’ 계속해서 나는 나다.’를 끊어버리고 그걸 해체시켜 버리는 겁니다. ‘나는 나다.’

다시 나의 의미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그렇게 나가 해체되어버리면 그러면 에스겔은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께로 가는가? 하나님께로 가면 일자(一者)가 되지요. 우상이 되어버리지요. 우상이 된다고요.

그러면 어디로 가는가? 심판 그 자체입니다. 심판 그 자체. 폭풍 속으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폭풍 속으로 들어갑니다. 주님께서, 아버지가 준비한 저주 속으로 그냥 들어가 버려요. <십자가를 아십니까?> 이것은 책 제목입니다. 책 제목인데 “너는 아느냐?” 이렇게 되물음이 나올 수 있겠지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

그러면 이걸 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그럼 율법 행위 안에 안 놓이면 되지” 이러거든요. 그런데 그게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그런 인간이 없습니다. 육으로 태어났으면 다 자동적으로 율법 안에 속해 있고 율법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저주 아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요. 육으로 난 자, 육으로 난 자는 자동적으로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가짜존재거든요. 가짜존재. 제목으로 붙일까도 하는데요. 첫째 시간에 제가 한 것을 말씀드리겠어요. 첫째 시간, 둘째 시간에 너무 압축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갈수록 더 풀어집니다. 이 존재는 가짜 존재인데요, 존재의 반대말이 그냥 없음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형상이 돼요. 첫 번째 제가 이야기한 것이 뭐냐? 공간은 없고 형상만 있다, 했지요.

공간은 없고 형상만 있다. 어떤 특정 존재는 보이지 않는데 잔뜩 기능만, 어떤 활동성만 가득 찬 어떤 새로운 세계가 현재 어떤 일단의 이스라엘 또는 인자에게 밀려온 거예요. 활동만 있는. 만약에 어떤 존재가 밀려오면 인간들은 자기 존재를 살리기 위해서 ‘여기 있다가 저리로 옮겨 타야지. 공간으로 가야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렇겠지요.

‘그래,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고생 좀 하지 뭐. 한 뒤에 다른 공간으로 옮겨 타면 되지.’라고 생각하는데 이 새로운 공간은 어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존재나 공간 같은 게 없어요. 그걸 완전히 소멸시키고 파괴시켜 버렸으니까.

그러면 뭐냐? 형상만 있어요, 형상만. 형상의 특징은 언어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우리의 정신과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담론, 하나의 현실이라는 언어체제, 이 자체로 표현이 되지 못하고 누락이 되어버려요. 십자가를 천 번 만 번 한다고 그게 십자가가 아니거든요.

왜? 그걸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그 십자가의 원리에 도달되는 그 한계를 언어 속에 갖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믿습니다.” 하는 그 말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그러면 뭘 믿으란 말입니까? 아까 했지요. 나가 사라지고, 내가 다른 동네의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사라지고 어느 속으로 간다 했습니까?

심판 속으로 들어가면 돼요, 심판 속으로. 심판 속으로 들어갈 때 나는 우상숭배자임을 들키게 됨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들어가면 돼요. 내가 우상숭배자라는 것, 그걸 쉽게 말해서 내가 죄인의 괴수인 것. 디모데전서 1장에 나와요.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내가 죄인인 것을, 죄인의 괴수인 것을 알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럴 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천사가 찾아와서~, 사바사바!” 천사가, 천사가 찾아온 거예요. 이것은 언어로 표현 못하는 어떤, 천사라는 존재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천사의 기능이 자기 존재를 숨기면서 우리에게 찾아와요. 천사의 기능이.

주께서 시키신 천사의 기능이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의 차단막 그 뒤쪽까지, 그 뒤쪽에 세트장 있거든요, 뒤의 세트장, 배우들 옷 갈아입고 하는 거기, 그곳까지 간다고요. 그러면 거기 그 뒤쪽 천사들 옷 갈아입는 그곳까지 가면 거기 대기실이거든요. 천사는 자기 존재가 없어서 기능으로만, 즉 옷으로 가리면서 변신의 천재들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존재의 옷을 입지만, 옷을 벗겨놓으면 맨 그 육체 거기서 거기지만 천사는 기능적으로 움직이고 존재가 아니고 형상이기 때문에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 하는 일이 기능화 되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변신해서 튀어 들어오는 거예요. 변신해서.

그래서 어떤 때는 옥문을 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마리아한테 소식도 전하고, 가브리엘 천사죠, 어떤 때는, 미카엘 천사의 경우, 다니엘 같은 경우는 싸우기도 하고요. 본인이 싸우는 거 아닙니다. 누가 내려 보냈어요. 그래서 저는 천사를 뭐로 보느냐 하면, 특수요원이라, 국정원의 특수요원입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CC TV가 있는데 그 자체가 악합니까? 악하지 않지요. 그러면 천사가 유월절 애들까지 다 죽이는 그 천사가 악합니까? 악하지 않지요. 그러면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이 악합니까? 악하지 않지요. 그러면 누가 악합니까? 그러면 누가 악한 거예요? 저쪽이 선하다면 그러면 누가 악한 거예요?

주께서 율법 주신 것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발 좀 심판 좀 받자. 구원될 생각하지 말고” 심판 받아도, 그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제야 알게 된 것은 감사하는 거지요. 나의 교회 생활이 우상 숭배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꾸준히 교회 생활 잘 하시기 바랍니다. 즐겁게. 이걸 설명을 해야 되는데요.

1. 벙어리 되는 에스겔.

이 말은, 아까 벌써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언어와 언어를 주고받으면서 자기 내부에 있는 정신을 교환합니다. 정신을 교환할 때 그냥 교환하는 게 아니고요, 사실은 교환이 아니지요. 나와 어떤 측면에서 당신이 일치하는가를 찾는 식으로 언어를 내놓지요. 언제까지? 찾을 때까지.

그래서 혀가 길면 명이 짧다는 말이 있어요. 혀가 길면 명이 짧다. 말이 많으면 일찍 죽는다는 이야기지요. 계속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일치점을 찾을 때까지, 내가 원하는 동일성을 찾을 때까지, 찾아서 내 존재가 만족할 때까지, 내가 오늘 전화한 보람을 얻을 때까지 독하게 전화질을 해대는 거예요.

그러니 그게 우크라이나 전쟁 같아요. 서로서로가 지금 동질성 찾는 게 달라요. 자기 라인이 있고, 저쪽은 저쪽 라인이 있으니까. 둘이 미사일을 쏴 댑니다. 저쪽은 러시아제 초고속 미사일을 쏴대고 이쪽은 미국에서 온 미사일을 쏴대고. 그러니 대화 자체가 전쟁 중입니다. 대화 자체가.

그래서 부부라는 것은 전쟁하라고 있는 거예요. 대화가 없으면 이미 그것은 대화할 가치조차 없다고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대화해야 돼요, 끊임없이. 싸우라고 맺어준 상대거든요.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혼자 살지 말고 싸울 대상을 들춰보고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늘 물어뜯어야 돼요, 내가. 내가 얼마나 나다움이 드러나는지.

그런데 아예 “합죽이가 됩시다, 합!” 되어버렸어요. 에스겔은. “입 다물라.” 입을 다물라. 그러면 에스겔이 입을 다물게 되면 선지자가 하는 일이 설교하고 강의하는 그 일인데 입 다물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걱정하지 마라. 입을 다물 때 천사가 와서 찜을 해요. 이마에, 이마에다 표시를 한다고요.

그게 타우 표시거든요. 타우. 히브리어 제일 마지막 글자 타우, 이 타우표시가 ‘T’로 되어 있지만 고대의 타우표시는 이게 올라갑니다. ‘✝’ 딱 십자가지요. 이 표시를 이마마다 해요. 그걸 요한계시록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마에 표가 있는 자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죽을 것이다.

그 표 받은 사람의 비율이 몇 퍼센트냐 하면, 6분의 1이에요. 6분의 1. 6분의 1이 몇 퍼센트인지 한번 계산해 보겠습니다. 1 나누기 6 하면 되지요. 반올림해서 16.7퍼센트 정도입니다. 천사 여섯 명이 동원되어서 이마에 인을 찍는데 그 중 하나가 살아남을 사람에게 표를 찍어버려요.

그러니까 성도는 완전히 피동적이고 완전히 수동적이에요. 손들어도 “그 손 내려. 손 내려” 그렇게 돼버려요. 네가 손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요. “예수 믿는 사람 손들고 앞으로 나오세요. 환영합니다.” Welcome, Welcome to my world, “우리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저 예수 믿습니다.” “손 내려! 안 믿어.” 안 믿습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안 믿어요.

그 오홀라 오홀리바 그 대목, 에스겔 24장과 에스겔 16장에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요, 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방에 있는 그 머슴애들 앗수르와 바벨론, 북쪽에서 온 앗수르 남쪽에서 온 바벨론 남정네를 끌어당겨서 관계를 맺었다 하는데 그 뒤쪽에 반전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관계를 맺어놓고 그 이방 민족에서 하는 이야기가 너무나 축복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는 내 편 아니야.” 이방 민족이 전도해요. “우리 둘이 사랑을 나누지만 너는 나 같은 내 사람 아니야.” 떠나버립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불신자들이 알아요. “너는 좀 또라이 같아. 너는 내 사람 아니야.”

신자가 세상살이하려고, 이 근호 목사 말 듣고 보다 죄지으려고 그렇게 노력을 다했건만 저쪽에서 눈치를 채 버려요. “너는 우리 쪽 사람 아니야.” 놀라 자빠질 일이지요. ‘아, 주님의 내부성이구나. 주님의 여자구나.’ 이것은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주께서 이미 타입, type, 유형적으로 분류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에스겔이 벙어리 되는 것을 두고 ‘내가 말을 못 한다.’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내 자아에서 나오는 나의 변호, 나의 변명, 이런 것이 전혀 주님 앞에 먹히지 않고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였습니까?

2. 좌편으로 390일, 우편으로 40일 스스로, 스스로 몸이 묶이다.(겔 4:4-8)

1년을 하루로 쳐서 390일, 1년을 하루로 쳐서 40일, 이렇게 몸을 불편하게 묶으라는 거예요. 묶으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짐작하듯이 포로 되어 가는 그 모습입니다. 묶으라 하는 것은. 그런데 390일이니까 390년이지요. 선지자가 1년을 하루로 쳤으니까 그것을 풀어버리면 390년이 되는 겁니다. 390년+40년, 합하면 몇 년입니까? 430년. 430년 하면 생각나는 게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포로 된 기간이 430년이에요.

그렇다면 이 뜻은 뭐냐 하면, 애굽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던 어떤 종족, 히브리 족, 히브리인들을 히브리 족으로 만든 게 아니에요.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히브리인들을 히브리 족으로 만든 게 아니고 히브리 족을 하나의 이스라엘로, 이스라엘 국가로 만들어요. 민족이 하나의 국가가 된다고요, 국가가.

국가하고 종족의 차이점은, 종족은 아비가 있으면 돼요, 아비가. 종족은 아비가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국가는 아비가 아니고 누구냐 하면, 여기에 왕이 등장하는 거예요. 히브리인은 조상이 있으면 돼요. 조상의 그 DNA, 조상의 그 취지가 남아 있으면 하나의 종족으로 유지가 되지만 종족에서 국가가 되려면 왕이 등장해야 돼요, 왕이.

그러면 종족에서 왕 되는 것, 이방 민족에서는 영웅을 왕으로 삼아서 그 혈육가운데 하나를 왕으로 삼아버려요. 이방 민족은. 이방 민족에 있어서는 그 종족이나 그 나라나 똑같아요. 그 종족이 곧 그 나라의 구성요소고 똑같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혈통적으로 민족에서 이스라엘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심판하시는 분이 개입되면서 이스라엘 국가가 되어버립니다.

히브리종족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한 언약해석을 너희들이 히브리인이라는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을 없애버리고 유월절 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와 언약을 내가 재해석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심판 앞에서 자신의 혈육이라는 의미, 가치는 이 이스라엘 국가에서는 개인적인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주일 낮 설교할 때 타입(type)과 토큰(token)을 구분했거든요. 타입을 유형이라 했고 토큰을 개체 또는 개체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걸 구분하는 이유가, 개체구원이 없습니다. 유형 구원밖에 없어요, 유형구원. 전체를, 전체를, 너나 구분 없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행했는가, 착했는가를 일체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하나의 유형으로 묶어 버리는 거예요.

광야 인도하면서 이스라엘의 처지를 보라. 그게 유형적이지 개체적이 아니에요. 그들이 거기서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돈 잘 벌고 얼마나 부자냐, 그런 것은 광야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동일한 하나로부터 나오는, 이게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10장에 보면, 단 하나에서 나오는 반석에서 난 물을 먹고, 똑같은 종류의 음료와 똑같은 종류의 양식을 먹어요. 그게 만나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유형을 확장시키는데 그게 뭐냐 하면 53절에,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즉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에게는 생명이라는 그러한 것을 누리는 단체는 생기지 않는다.” 그게 요한복음 6장이에요. 개체로 왔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개체잖아요. 그 개체가 주님을 경유하면서 이게 유형으로 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았는데 그 축복을 경유해서 어린이 도시락으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였던, 그 경유했던 예수님의 축복의 의미가 열두 광주리, 이스라엘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이렇게 유형적이지 개체적인 개인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쫓아와서 ‘우리를 더 배불리 먹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뜻으로 쫓아오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돌아봤겠어요? 휘익~! 돌아봤지요. 휙! 휙! huik, 그냥 휙! 휙 돌아봤어요.

“너희가 날 찾는 이유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맞지? 맞지?” 하고 밀어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손가락 가지고, 제가 늘 쓰는 표현인데요, 손가락가지고 이마나 혹은 명치, 여길 미는 거예요. “맞지? 내 말 맞지? 떡을 먹으니 내가 이용가치가 있다 그 말이지? 그래서 예수 찾고 교회 찾았지, 그지? 맞지?” 밀어내는 거예요.

육의 일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기어이 자기 존재가치를 위해서 “그러면 영의 일은 어떻게 합니까?” 할 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여기서 유형이 나와요. “내가 어떻게 주의 일을 하고 어떻게 영의 일을 합니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라는 행위의 자리에다 예수님 자신을 집어넣습니다. “나를, 내 행함을 믿는 것이 그게 바로 주의 일이다.” 네 행함 말고 내가 어떻게 행했는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주의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그만큼 나의 일이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말이에요. 나의 은근한 욕심이 주의 일을 훼방하고 있었다 그 말이에요. 그러고 난 뒤에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처럼 내가 하늘에서 떡을 줄 것이다.” 그 떡이 뭐냐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들은 생명이 없다.” 그 소리 듣고 그 왔던 많은 제자들, 성경에는 제자들로 표현되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다 사라졌어요. 다 사라졌습니다.

에스겔 적으로 하면 인자 곁에서 다 갔어요. 다 가야 됩니다. 다 가야 일이 돼요. 그리고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제자들보고 이야기합니다. “너희들도 가지 왜? 다른 사람 가는데 따라가야지. 다 같은 종류 아닌가? 따라가라.”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가 해놓고도 자기가 무슨 말이지도 몰라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주님께서 하는 말씀이 “그런 소리 하는 너도 가!” 마침 저 뒤에 지금 가시는 분이 계신데……, “그런 소리 하는 너도 가.” 갈 때 그냥 가는 게 아니라 네 속의 악마가, 가룟 유다가 팔아먹으니까 자동적으로 예수님은 별 볼일 없다고 떠나가는, 그래서 비로소 우리는 육의 한계에서 못 벗어남을 들통 내면서 떠나가게 되어 있지요. 들통 내면서.

참 이게 재미나는 이야기예요. 개체, 개별로 뭔가 수작을 부리던 그것들이 결국은 주께서는 강제로 다 “가! 가! 가란 말이야. 네가 해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낙엽 막 던지면서 “가란 말이야. 가” 강제로 보내버립니다. 다 떠나보내지요. 제자들이 증거 했던 그 복음 안에 비로소 제자들은 십자가를 압니다.

내가 십자가를 믿을 수 있는 능력과 재주는 내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 속에서 내가 믿던 십자가는 이것은 가짜다, 하는 사실을 본인이 아주 즐겁게 받아들입니다. 즐겁다는 이야기를 계속하는데 지금 혼자 즐거운 것 같아요. 자, 390년 이야기했지요. 430년, 이스라엘에 있었던 그 출애굽 때의 하나님의 개입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말해서 그걸 내 쪽에서는 취소시키지 않고 그걸 밀어붙이겠다는 뜻에서 출애굽정신을 어디에 집어넣는가? 인자라는 개인에게 집어넣어요.

에스겔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그 점이에요. 마태복음 12장 6절 읽어봤잖아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지요. 성전보다 더 큰이. 성전은 물질로 만들었잖아요. 사물성, 사물성이에요. 사물성의 특징은 인간의 눈에 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물성.

그런데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그 사물성은 현장에서 떠나버리면 그게 안 보여요. 주님께서는 사물성은 눈에 보이지만 주님이 말하는 인격성은 떠나도 계속해서 계시는 방식이 주님이 확장 시킨 주님이 인격성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거기에 대해서 경상도 사람들은 “어데예? 어데예?” 이러지요. “언제예? 어데예?” 말이 안 되잖아요. “어데예? 언제예?” “함께 있으리라” “어디 있는데요? 언제요? 내가 아쉬울 때 온 적 있으세요? 안 왔잖아요. 어데예? 우리 애 사고 날 때 안 왔잖아요. 어데예? 안 왔잖아요.”

그러니 세상 끝 날까지 함께 있겠다는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빈말이에요? 믿을 것을 믿어야지. “확인이 되어야지요. 확인 안 되는 그런 이야기를 막 남발하시면 됩니까?” 이렇게 막 주님 꾸짖는 식으로 그렇게 되어버리지요. 그 이유가 에스겔처럼 스스로 묶이지 않았기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활동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선지자는 스스로 몸에 묶입니다. 뭘 하고 싶어도 묶여 있어요.

여기서 390일과 40일을 의도적으로 나누는 이유는, 40일이 최종적인 고난의 기간이거든요. 그 40일을 부각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430년을 나누어서 390년을 따로 떼 낸 거예요. 40일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며칠입니까? 430년 받은 것이 아니지요. 40일이에요.

그러니까 의미가 과거로부터 의미가 마련되어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인자되시는 예수님의 하신 일의 의미가 거꾸로 역류 되어서 구약까지 내려왔기 때문에 의미 찾기 위해서는 최종의미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고난,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있었던 그 고난의 의미를 예수님의 고난에서 찾아야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좌편으로 390일, 우편으로 40일, 선지자가 스스로 몸에 묶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고 내가 내 존재유지를 위해서 뭘 강제로 허락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의 실생활에서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뭘 하고 싶어도 여건이 되지 않아서 못하는 경우입니다.

수련회 오고 싶어도 여건이 되지 않아서 못 오는 사람이……, 여기서 거짓말하면 안 돼요. 갑자기 수천 명이라 하려다가 큰일 날 뻔했어요. 수백 명이 됩니다. 오려고 했는데 바이어가 만나자고 해서 못 오는 경우, 오려고 했는데 애 밥해준다고 못 오고 그런 거요. 어쨌든 남 보기에는 ‘아, 그런 것은 좀 극복하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 묶인 겁니다.

왜? 사람들은 다수성이거든요. 내가 일자가 아니잖아요. 내가 표준이 아니잖아요. 내가 신앙의 표준이 아니거든요. 다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선지자가 묶였다. 왜? 자기 뜻대로 못하도록. 그렇다면 똑같은 경우, 경험은 그 사람의 날짜가 문제가 아니고 형편의 문제와 관계없이 그 나름대로의 똑같은 하나님의 유형이 그들에게 골고루 확장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간에 동일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동일한 은혜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왜 이 일이 내 뜻대로 안 되지? 약속 다 해놨는데 왜 약속을 어기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묶이게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전에도 한번 예를 들었는데 어떤 산부인과 의사가 바둑을 좋아해요.

그래서 환자가 없어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마침 환자가 와서 애를 막 낳으려고 하는데, 그 급한 순간에 의사가 꼭 있어야 되는데, 그리고 그 의사도 막 가려고 했는데 바둑판을 딱 보니까 이게 지금 한 수면 대마가 죽을 판이에요. 이게 묶인 거예요. 하~, 왜 하필이면 지금 내가 애를 받아야 될 그 시간에 왜 그쪽에서 마지막 최후의 공격을 하느냐 그 말입니다.

‘오, 신이시여! 왜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는 겁니까?’ 요거 묶인 겁니다. 묶인 종류도 가지가지지요. 묶인 종류도. 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식당에 들어가서 빨리 자장면 한 그릇 먹고 나오려고 했는데, 나와서 볼일 볼 계획이 있었는데 주방장이 나오더니 신상 짬뽕이 새로 나왔다고 그 짬뽕 먹고 가라고 해가지고 그거 먹는 바람에 그만 차를 놓쳤을 때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왜 맛있는 짬뽕이 그 때 나오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세상 모든 것이 묶인 거예요.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속 좀 시원하십니까? 여러분을 밧줄로 묶을 필요 없지요. 그냥 굴러가도 다 묶인 사람이에요. 묶인 사람.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에요. 여러분을 선지자 노릇하게 다 묶어 버립니다.

남들보고 비웃지 마세요.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에요. 바둑 한판 둔다고 30분 동안 긴장했는데, 마지막 지고 이기고 결정되는데 왜 애가 그때 나옵니까? 좀 더 늦게 나오지. 그다음에 세 번째, 그 전에 그래서 두 번째 결론은 뭐냐? 성도의 삶 자체가 고난이다. 왜? 성도 안에 누가 계시기 때문에? 성도 바깥에 예수님의 고난을 반영해주는 것이 하나의 성도의 삶으로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난을 이렇게 받았다는 그것이 성도의 삶의 체험과 경험으로 반영되는 거예요.

그걸 획일화하지 마세요. 그걸 조직화하지 마시고요. 어떤 틀을 만들지 마세요.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 선지자처럼 묶인 상태입니다. 자식한테 묶이고 심지어 손자한테도 묶이고요. 아내나 남편한테 묶이고.

3. 보리떡을 인분으로, 사람 똥으로 구워먹는다.(겔 4:9-12)

이건 뭐냐 하면, 에스겔 4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에스겔 4장 9절에서 12절에 나오는 이 말씀, 이것은 무슨 뜻이냐? 죽음을 야기한 그 죄를 끝까지 쓸어안고 가거라, 그 말이에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받아 마땅한 그 죄를, 네가 그 죄에 대한 값을 끝까지 네가 쓸어안고 포로 잡혀간다 그 말입니다.

전에 포로 잡히지 않을 때는 장작 가지고 보리떡을 구워 먹던 그 때 그 당시 유대나라 사람들은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줄 알았어요. 원래 인간은 그렇게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작 대신에 자기가 싸지른 똥으로 불을 피워서 보리떡을 구워 먹는다는 것은 자기 똥을 자기가 스스로 먹는 모습이에요. 선지자가 이걸 하는 거예요.

배설물은 성경에 의하면 더러운 거예요.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럽잖아요. 더러움을 내 양식으로 삼고 주께서 당할 모든 고난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모습을 선지자부터 먼저 시범해서 보여주라 그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선지자가 부탁했어요. “사람 똥 말고 소똥으로 대체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좋다. 소똥으로 대체해라.” 왜냐하면 의미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 똥이 아니고 소똥으로 대체해도 소똥을 사람 똥으로, 내가 싸지른 내 죄에서 나온 내 죄과 그걸 내가 담고 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가신 모든 고난은, 이것은 예수님이 지은 죄는 아니지만 육신의 몸을 입었다는 그러한 사명으로 인하여 자기백성이 싸지른 그 죄를 본인이 다 짊어지고 가는 모습을 똑같이 인자라고 호칭되는 에스겔을 통해서 먼저 이 역사 속에 보여준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흉내 내지 마시고요, ‘아, 내 행함 관계없이 주님의 행함으로 주님이 모든 말씀을 다 이루셨구나.’ 그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구워 먹는데 그 보리 떡 속에 밀, 보리, 콩, 조, 팥, 귀리, 이걸 390일 동안 먹습니다. 밀, 보리, 콩, 조, 귀리를 390일 동안 먹는데 ‘야, 이거 건강식이다.’ 이거 건강식 아닙니다. 지금 다이어트 하는 중이 아니에요. 굶어 죽어요, 이거! 그거 칼로리 계산 해보면요, 평소에 성인이 하루 먹는 칼로리의 6분의 1밖에 안 돼요. 그것도 390일.

그러니 이것은 양식이 바닥이 난 상태가 바로 너희들이 포로 잡혀간 상태인데 이것은 차라리 칼에 죽는 게 더 낫고, 포로 잡혀갔다는 것은 우리가 우상 숭배한 죄, 우리의 내부성을 외부 이방 민족과 더불어 했던 그 죄가 실제적으로 우리 내부에 어떤 고통으로, 압박으로 주어지는가? 그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시범조로 보여주는 거예요, 시범조로.

군인들이 고생해야 될 것을 시범조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해병대 아닙니까? 해병대, UDT. 이것은 모든 군인이 다 그렇게 해야 되지만 다 못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거쳐서 위험한 일을 감당해야 돼요. 바로 그 일을 이스라엘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 보고 “우상숭배하지 마. 왜 하는가? 왜 선지자의 말을 안 듣는가?” 하는데 네가 말한다, 네가.

이스라엘 욕할 것 없어요. 사람의 행동이라 하는 것은 환경 따라, 바람 따라 밀리게 되어 있거든요. 플럭스(flux)라 하는데 그게 흐름이거든요. 플럭스(flux), 흐름. 세상은 바람같이 왔다 갔다 대륙풍, 바람처럼 가만있어도 비바람 오고 태풍 와요, 태풍이. 교통순경 말도 안 듣고 그냥 제주도 올라오고. 왜 그러냐 하면, 플럭스, 흐름이거든요. 존재를 흐트러지게 만드는 흐름.

바르게 산다고요? 아니요. 흐름에 못 이깁니다. 밀면 밀리는 거예요. 지하철 사람 많을 때 가만 있고 싶지요. 저쪽에서 미는데 어떻게 합니까? 같이 밀리는 거예요. 저쪽에서 부도났는데 이쪽에서 부도나지요. 저쪽에서 코로나 오는데 마스크 쓰잖아요. 코로나 오라고 우리가 기도한 적 있어요? 없지요. 모든 게 플럭스, 흐름이에요, 흐름.

그래서 비참한 그 포로기의 흐름에서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개인적인 ‘나는 배불리 먹고 싶어요.’ 여기서 만약에 박 찬욱 감독 같은 사람이 등장해가지고 드라마 찍는다면 이렇게 됩니다. 애가 엄마한테 물어요. 포로 잡혀가면서 “엄마! 콩이나 조 말고 자장면 없어요? 돈가스 먹고 싶어요.” “조금만 참아라. 내가 다 해줄게.” 하면서 둘이 끌어안고 엉엉 우는 장면.

거기서 인간에 대한 연민, 인간에 대한 동정, ‘그래, 반드시 이기리라.’ 이러한 인간의 희망에 대한 독려와 좌절하지 않는 인간의 용기에 대한 찬양, 영화 같으면 그렇게 찍을 거예요. 에스겔은 그런 것 없습니다. “같이 죽어라, 인간아.” 그런 값싼 동정과 자기 연민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개체적이거든요. 유형적으로 봐야 되기에 개체적으로 어떤 인간도 개인의 욕구는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입니다.

4.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다.(겔 5:1-4)

아, 조금 빨리 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갔는데요. 머리털과 수염을 깎는다. 포로 잡혀 갈 때에 쓸데없는 전염병이 포로 가운데 퍼지지 않게 하기위해서 본인들이 깎는 게 아니고 강제로 깎아 버려요. 에스겔은 본인이 깎지만. 강제로 깎아 버립니다.

깎는데 에스겔 5장 2절에 “삼분지 일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다 죽는다, 그 말이거든요. “삼분지 일은 가지고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칼로 죽는다 그 말입니다. “또 삼분지 일은 바람에 흩으라.” 흐름에 플럭스(flux), 흐름에 실려 간다. 이 사람들이 이제 고역이에요. 차라리 죽으면 좋은데, 차라리 죽여주면 좋은데 안 죽으니까 모든 고생을 홀로 다 하는 거예요.

하지만 이 모습 자체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습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죄 있는 인간의 운명은 바로 이스라엘이 시범조로 먼저 보여줬다. 이것이 바로 인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식사하러 가야 되겠지요.
 첨부파일 : 2022 여름수련회 에스겔강해 제 4강.hwp (37.5K), Down: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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