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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8 10:34:14 조회 : 44         
안양20220915a슥14장04절(최후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75.212.135.128)
안양20220915a슥14장04절(최후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14장1절부터 할 텐데요. 우선 7절하고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자, 이 스가랴14장 7절, 8절 말씀을 우리한테 턱 던져주는 거예요. 이 던져주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 건넴’. 말을 건넨다.

말이니까 이건 말씀이고, 인간은 자연 속에 있고, 말씀은 말씀하시는 분은 점선으로 되어있지요. 자연은 보이지만, 주님은 안 보이니까. 안 보이는 쪽에서 보이는 쪽으로 나타나는 방법은 말 건넴입니다. 말을 건네는 거예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을 건네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계시를 받는 겁니다. 그 선지자 중 한사람이 누구냐, 스가랴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보고 있는 스가랴14장에서 7절에서 8절.

말을 건넬 때에 인간들은 말을 건넨 것 가지고 이 말 건넨 내용을 자기 쪽에서 조립해보는 거예요. 조립해보면 조립이 안 돼요. 7절에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는데, 그래 그 날이 있어.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라. 이게 뭐예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다. 낮이면 낮이고 밤이면 밤이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런 하루 하루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자연이라는 일종의 스프 그 안에 들어있어요. 자연의 일부로 들어있어요.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들어있으면서 뭐라고 자처하느냐 하면 자연의 대변자로 자처합니다. 대변자. 자연을 우리가 정복했다. 자연은 우리 손아귀에 있다. 이렇게 우리가 다룰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자연의 일부가 아니고, 자연의 타자. 타자라 하는 것은 투수할 때 타자가 아니고 남이라는 뜻이에요. 자연을 지켜보고 있는 어르신네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어르신네.

어르신네가 되면서 인간들이 노리는 게 뭐냐 하면 자연을 알면 모든 것을 안다가 돼요. 자연을 알면 모든 것을 안다. 자연의 질서를 알면 우리는 진리를 획득했다. 동물이 죽고, 식물이 죽고, 인간이 죽는다. 아~ 그러면 죽음은 그걸로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끝이 된다. 인간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간다. 여러분, 대표적인 자연은 뭐냐 하면 인간의 구성요소는 세포다. 물질이다. 인간은 물질이다. 물질이고 물질이 죽어서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이건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정도만 알아도 우리는 뭐 얼추 알 것 다 안다. 이렇게 자연에 대한 어른으로 자부합니다.

자,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데 자신감을 갖을 때 뭘 놓치고 있는 거예요? 뭐를 놓친 겁니까? 말 건넴을 놓친 거예요. 인간은 이렇게 창으로 찌르면 피를 날 거고, 손에 못을 박으면 피가 나게 되면 그건 나중에 심장에 적용되면서 죽는다. 끝! 이게 바로 인간들이 자신감을 갖고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 진리 안에서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말 건넴에서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예언 성취가 부활로 증명된다는 것은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자기가 어른인데 눈에 보이는 이 자연세계에 대해서는 자기가 꽉 잡고 있어요.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우리보고 무식하다는 소리 하지 마! 모른다고 이야기 하지 마! 우리는 알아. 알아. 다 알아.” 창으로 찌르면 죽고, 손에 못 박으면 죽어. 끝. 끝이야. 그런데 부활했는데요. 심지어 창자국, 못자국까지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부활했어요. 이거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인간이 아는 진리라는 범주 안에 주님의 말 건넴은 애시당초 애초에 주님의 말씀은 인간이 설정한 진리 구역 안에 들어올 마음이 없습니다. 깰 마음이죠. 깨는 거예요. 인간이 자연을 보고 연구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뭘 원하느냐 하면 안정성을 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 중요하지만 들어보면 고요하고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 그걸 원해요. 모든 인간들은.

나이 60 넘었다. 그러면 60 넘으면 뭐 출세고 성공이고 돈 버는 것도 귀찮아. 그냥 안정적으로 살면 되겠어요. 한 달 수입이 이천정도는 되고, 아파트는 50평, 차는 한 3대 정도, 그 정도. 애들은 아무 때나 결혼시키면 돼요. 딸은 판사하고 결혼하고 아무 때나 시키면 돼요. 둘째 딸은 의사하고 하면 되고, 큰 아들은 한의사 며느리 만나면 되고. 그냥 아무 때나. 툭 던지면 그러면 부모로서 할 도리 다하고, 그냥 안정적으로 연금은 최소한 천만원 정도. 안정적으로. 그러면 됐지 뭐. 안정을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스가랴14장 안정적으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말 건넴을 통해서 그걸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예루살렘에 14장 1절, 2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이리 되어있어요. 인간은 안정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안정을 깨뜨려 버립니다. 와~~ 이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우리는 안정을 원해요. 자연에 알만큼 아니까 우리는 마음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마음 편하게. 골칫거리 없이. 아무 사고 없이. 무탈하게 살고 싶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안정을 흩트려버립니다. 그리고 다 깨져버린 이 도성, 인간이 원하는 안정된 도성을 하나님의 불안정으로 가득 채워가지고 우리에게 돌려보냅니다. 딱 돌려보내지요.

돌려보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시장에서 상인들이 계산할 때 이거 오만원인데 좀 깎으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고~ 이거 원가 남지 않는다 해놓고 계산기를 자기 쪽으로 내가지고 따따따 해가지고 딱 돌려보내요. 요기까지. 사만이천원까지 됩니다. 지금 사정이 이렇습니다. 말하기 싫거든요. 사람하고 말하기 힘들어 안돼요. 기계로 보여주는 거예요.

주께서는 예루살렘을 불안정으로 채워가지고 “이게 니 현실이다. 자, 봐라.” 하고 계산기를 돌려 보게 하듯이 우리에게 보게 하는 겁니다. 불안정입니다. 안정성을 얻고자 하는 너희들에게 살만한 도시는 예루살렘은 아니다. 예루살렘을 파괴시켜버려요. 그리고 왜 파괴시키느냐 여기에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말 건넴을 통해서 올바른 인간이 등장해야 되는데 인간들은 말 건넴을 차단하고 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자연을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을 지배하려고 한 거예요.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게 되면 자연 전체를 통치할 수 있고 자기 필요한 것을 빼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파괴한다고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선지자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선지자의 심정을. 선지자의 가장 기쁜 순간은요, 선지자가 제일 기쁜 순간은 내 살길이 열릴 때, 아닙니다. 내 미래가 안정적일 때, 아닙니다. 내가 숨통이 트여질 때, 아닙니다. 선지자의 제일 기뻐하는 것은 주님이 살아계시고 말씀대로 일하신다. 이 점입니다. 내가 일 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일하시는 것을 선지자는 제일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기가 수난 받을 때, 얼마나 욕을 얻어먹었을 거예요. 선지자가 수난 받으면서 인간은 자기 자리 위치 그것을 기초를 다시 보는 계기가 돼요.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게 정상일까, 내가 내 바탕이 온전한가를 사람이 자기 뜻대로 안되고 난간에 부딪히고 어려울 때 내가 누구야? 나 지금 제대로 사는 거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거예요.

사람이 수난 받지 아니하면요, 자기를 재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사는 대로 사는 게 제일 편하거든요. 지금 이 자연에 대해서 인간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연은 심판의 도구에요. 심판의 도구인데, 인간은 자기를 어디 봐서 나를 심판해? 자기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연을 잘 구슬려서 거기서 법칙을 끄집어내서 편리한 대로 밥 먹고 살면 되지, 자연에서 원하는 것만 빼내면 돼서 나만 살면 결국 헤헤 거리며 나는 이익 봤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선지자의 입장에서 이런 말씀한다고 선지자에게 돌아올 이익은 뭡니까? 선지자가 이런 계시를 받아서 이렇게 했을 때 선지자의 몫으로 돌아오는 게 뭡니까? 없어요. 이 말은 내가 어떻게 안정적이냐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하는 일이 얼마나 안정적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거든요. 주의 하는 일의 일관성. 그래야 내가 나를 안 믿잖아요.

내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건이 터져버리면 지나온 모든 안정성이 다 허물어지는 겁니다. 참 제가 이 말하는 제가 밉더라도 들어주셔야 되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58년 동안 살았다. 아무 문제없고 탈이 없고 살았다. 그런데 58년째 생일 그 다음날 탈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섭섭한 이야기지만 58년 산 거 다 날아갑니다. 이건 섭섭한 이야기지만 이게 사실이에요. 그러면 58년 그 다음날도 괜찮았다. 소용없습니다. 59년째 그 생일날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몰라요.

그러니까 이건 생각을 바꿔야 돼요. 내가 나는 안정적으로 원한다. 원하지요. 뭘 잘못되어서 원하지요. 말 건넴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니까. 자기 이익만 생각하니까. 늘 초조한 가운데서도 이만하면 선방했다. 하고 이렇게 하지요. 하지만 무슨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몰라요. 차라리 선지자처럼 생각을 바꿉시다. 내가 어떻게 되든 죽이 되던 밥이 되든 상관없이 주의 일의 일관성에다가 우리가 갈아타야 돼요. 버스 갈아타야 돼요. 내 몸을 내가 꾹 쥐고 있지 말고 내 몸에서 내가 탈출해야 됩니다.

내가 자연의 일부잖아요. 자연의 일부인데 내가 자연의 일부에서 탈출해야 돼요. 탈출하는 방법은 말 건넴이 올 때 이 나를 버리고 말 건넴에 나를 여기다가 올라타는 겁니다. 말 건넴에 나를 섞어 넣는 거예요. 섞어 넣으면 이게 오늘 제목으로 삼고 싶은데 이거에요. ‘최후를 넘어서서’ 한 번 따라해 보세요. 최후를 넘어서서. 감사합니다. 참새! 짹짹!


최후를 넘어서는 것. 최후를 두려워하고 기다리는 게 아니고 최후마저 넘어서는 거예요. 최후를 이렇게 바라보는 게 아니고, “저게 최후구나! 안 돼!” 마지막을 바라보지 말고, 마지막에 뒤편을 보는 거예요. 앞에서 보면 멋있는 디자인된 연극풍경이지만 뒤에서 보면 베니아판 누런 못질한 베니아판 나오지요. 이게 세트의 뒷모습입니다.

최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 세상에 그것보다 더 안정적인 사람 없습니다. 최고입니다. 그게 최고에요. 그 최후가 참 좋아요. 최후에 하고 난 뒤에 그걸 성령 안에서는 부활이라고 하는데. 성령 안에서 부활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방금 이야기한 최후를 넘어서를.

왜냐하면 성령은 마지막 때 오는 거거든요. 마지막을 받았으니까 마지막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뒤쪽으로 바라보면서 살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리 되는데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불가능하니까 건네진 말 위에 올라탈 수밖에 없어요. 그 안에 섞이면 돼요.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이건 인간이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이 스가랴14장 7절을 어떻게 조립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는 하루는 낮이든 밤이든 둘 중에 하나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그런 건 없어요. 그런데 7절 끝에 보면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이 말씀에 우리가 참여하고 뛰어들고 거기에 올라타고 하는 겁니다.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이건 내가 조립하거나 내가 구성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이미 말씀에 올라타 버리면 나의 주인장이 말씀이 되어버려요. 내가 굳이 도대체 그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니는 알 거 없어.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우리가 알아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그건 우리의 의지고 판단이지요.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 그러면 빛이 오기 전에 앞에 순서가 뭐다? 어둡다는 거예요. 그 어둡다를 저는 최후로 본 겁니다. 최후가 와야 돼요. 마지막이 와야 되고, 마지막이 온다는 그 절차를 걸쳐야 그 다음에 최후를 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경우가 생기는 거예요. 이런 자를 가지고 이걸 ‘남은 자’라 해요. 남은 자.

남은 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 모두 다 최후를 거친 자. 최후를 거친 자에요. 자, 자연세계에서의 최후라 하는 것은 죽음이에요. 흙이 되는 겁니다. 자연세계는 끝은 끝이에요. 끝 넘어는 없어요. 죽음은 죽음이지. 죽고 난 뒤에 만나자. 이런 거는 자연세계는 증명이 안 됩니다. 물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죽고 난 뒤의 모임 유령의 동우회 이런 것은 생물학적으로 그거 논문 제출이 안돼요. 박사학위 논문이 안 됩니다.

그건 심령과학이지 심령과학도 아니다. 하여튼 과학은 그런 거 용납하지 않아요. 과학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 똑같은 일이 반복될 때 과학이에요. 반복되지 않으면 이건 요술이고 마술이고 미신입니다. 똑같은 경우와 똑같이 반복되어야 돼요. 똑같은 효과가 나야 돼요. 똑같은 동일한 결과가 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게 과학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과학이 진리라고 우길 때, 이 스가랴14장7절, 8절 같은 말씀은 이건 뭐 생뚱 맞는 이야기에요. 나 14장 7절, 8절 나는 거부할래. 나는 안 믿을래. 이리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최후의 세트장 너머를 못가지요. 최후를 넘어서지를 못하고 그냥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그 다음에 레비가 어떻게 작살날지 그건 버들버들 떠는 거죠. 주님께서는 이 자연을 통해서 뭐냐 하면 ‘자연을 통해서 심판하겠다.’ 뜻입니다. 심판하는 이유는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이게 심판의 이유입니다. 인간 같은 인간은 없다. 주일 낮 설교의 제목이 가짜인 거 아시지요. 인간 같은 인간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같은 인간은 어떠냐 하면 이런 겁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한창 전쟁이 심하게 일어났을 때에 우크라이나 농부들이 걱정하는 것이 먹을 게 없어가지고 감자가지고 요리를 해먹는데 감자가 없어가지고 씨감자까지 먹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씨감자를 먹어버리면 내년에 가면 농사는 어떻게 짓고, 없지요. 다음 해에 모종해야 될 곡식까지 소비를 해버리면 농사는 끝나는 겁니다.

아무 대비책 없는 거죠. 그래서 인간이라면 마지막은 다 하더라도 마지막 그것만큼은 여지를 남겨두는 거예요. 여지를. 말씀을 듣고 복음을 들을 때에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그 말씀을 받아들여요. 그 말씀이 옳다. 하지만 그 말씀이 엉터리일 경우에 나를 살릴 수 있는 씨감자 또는 모종할 수 있는 최후의 곡식만큼은 딱 꼬불쳐놓는다는 말은 딱 챙겨놓는 거예요. 그런 자세로 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자기의 최후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라도 예수님 앞이라도 나의 최후를 내드리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 혼자 죽을 수 없습니다.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작은 일말의 다시 내가 재기할 수 있는 그 마지막 재료하나 만큼은 못 놓겠다고 버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반면에 어떤 사람은 복음이 들어오면 그야말로 좋은 의미에서 멍청한 거예요. 그냥 믿어버려요. 저거 어떻게 하려고? 저거 어떻게 하려고? 이런 거요.

뒷감당 되겠어? 나는 그런 거 모르고 이 성경 말씀이 유일한 현실이다. 인간들이 하는 과학적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이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이 부활 때문에 그래요. 죽었다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거고요. 이순신 죽은 건 다 알아요. 1492년 십이지한테 다 아는데. 이순신 장군이 부활했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압니다. 지금 이순신 장군이 부활해도 안 믿어요. 부활하면 내 진리체계가 모독을 받기 때문에 용납이 안돼요. 죽은 이순신은 인정하는데 동상세우고 인정하는데 광화문에다가. 살은 이순신은 죽여 버려요. 사람들이 교회 와서 예수님은 존경해요.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의 인생을 이끈 것은 내가 아니고 주님께서 살아서 지금껏 우리가 살게 했다는 그 부활하신 주님은 만나면 죽여 버려요.

왜냐하면 나의 자유의 가치가 상실되기 때문에. 나의 선택과 나의 의지가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자존심까지 무너질 필요는 없다 이리 보는 거예요. 마지막 그 씨감자같이 마지막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이에요.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감. 그것마저 파괴된다면 우리는 무의미하게 되어버리지요.

그렇게 되면 뭐냐, 수요설교 다시 해야 돼요. 인간이 걱정하고 무서워하는 이유는 내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고 티 날까봐. 짐승이 될까봐.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애써서 공들여 살아온 것이 다 의미 없을까봐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서요, 예루살렘을 시범조로 심판을 해버립니다. 심판하는 대목이 14장1절에 나오지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정리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예루살렘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과 그리고 심판이 없음을 이렇게 같이 대비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과 없음을.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채로 지금 있잖아요. 있음이 된다고요. 그러면 없음은 이건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니까 없음이 된다 말이에요. 없음이 있다는 말은 엉터리 말이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철저하게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이 예루살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간이 씨감자 하나 마지막 최후의 자존심 하나는 남기려고 버티잖아요. 그 사람이 만약에 예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는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메시아가 온다. 그전부터 이미 메시아가 약속했다. 이 말이에요. 예루살렘은 내가 다시 건설하고 든든하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만큼은 다치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이 이방민족한테 당하고 수모당해도 피할 자기 안정성, 인간은 안정성을 원하지요. 안정성은 어디서 마지막에 피난처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예루살렘인 거예요. 이게 시편에 가득 나와요. 시편에. 시온은 나의 반석이요, 안식처요,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결국은 여기서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되어가지고 우리를 찾으러 온다고 믿는 거예요. 예루살렘.

그런데 주님께서 여기서 예루살렘이 있는 여길 가지고 거세하는 거예요. 거세. 아무것도 아닌 자를 아무것도 아니 게 하는 절차를 통해서 그 아무것도 아닌 그 인간마저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 나를 없애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있다. 있다. 있다, 에다가 많이 양보해가지고 많이 스스로 겸손하고 양보해서 “하나님, 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죽어라.” 아무것도 아닌 이 정도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설마 이것마저 거세할까. 그거마저 거세해 버려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 가지고 뭔가 다시 한 번 나를 소생시킬 수 있는 마중물이라 합니까.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마저 주께서는 작살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뭐가 있느냐, 없음이 되어버려요. 여기서 유명한 어려운 단어 하나가 등장하는데 정말 어려운 단어인데요, 여러분 실력이 되니까 적어보겠습니다. ‘가짜가 원본이다.’ 아주 중요한 시점이에요. 가짜가 원본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내 가짜 되기는 이건 전부 다 엉터리에요. 진짜 우리는 내가 가짜 되고 싶어도 절대로 가짜가 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가짜라고 우기면서 그걸 진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마중물, 마지막 기초, 가느다란 기초, 가초라고 우리는 자부하는 겁니다. 온전한 가초가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온전한 가짜는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못하는 가짜를 주께서 대신 보여주신 겁니다. 어디를 봐서 예수님이 메시아입니까. 전혀 메시아답지 않아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그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는데 그 중에 유형 중에 하나가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낮춰가지고 바닥 인생을 살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걸 쿰란공동체라 해서 이스라엘 쪽으로 성지 순례하는 사람은 가는 코스가 있어요. 코스 보면 쿰란공동체 유적지가 발견되어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춘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을까요? 안 믿지요. 내가 겸손하고 낮추고 이렇게 나는 가짜라고 외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그것을 통해서 내가 진짜 될 수 있는 경계선, 그 위치에 나를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들은 실시한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심지어 수도원에 가면 이런 게 있어요. 침묵의 수도원. 봉쇄 수도원하는 게 있어요. 프랑스나 미국가면 한 두군데가 아니에요. 자발적으로 봉쇄하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반입하고 나머지는 자체적으로 농사 짓고 과수농사하고 최소한의 필요한 것만 하고 노동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침묵하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어서 주께서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더 살고자 하는 인간의 생존의 마지막 남은 생존욕구마저 마귀의 마지막 무기라고 자부하고 그것과 투쟁하고 싸우면서 침묵하면서 오직 기도하고, 노동하고, 최소한의 에너지만 공급하는 질 떨어진 양식만 먹는 수도원이 제가 알기로는 천군데가 넘어요. 이슬람교도 쪽에도 있어요. 물론 불교는 많고요.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그들은 가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가짜가 원본이기 때문에.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가짜라 하는 그 가짜가 인간이 본인이 자연세계에서 끄집어낸 지혜를 통한 진짜를 어렴풋이 마주하면서 내가 가짜가 되려고 하기 때문에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진짜 내가 가짜 인간을 알려면 반드시 뭐가 필요하냐 하면 거세를 해야 돼요. 이게 마지막 내가 쥐어놓은 것까지 주께서는 아주 냉정하게 그걸 잘라버려야 돼요. 뭐를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잘라버리면 그것이 바로 스가랴14장의 이야기입니다. 14장 1절부터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나오게 되면 14장 7절에 나오는 어두움이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빛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어두움에 가기 때문에.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요,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어떤 날이냐 하면 7절을 우리가 아는 우리가 체험하는 자연세계에 자연현상으로 하면 기껏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점점 더 밤이 깊어지고 어두워서 새벽인데 이건 뭐 동이 틀 때 쯤 해서 밤이야, 낮이야, 구분하는 경계선에서 조금 약간만 기다리면 드디어 새벽이 해가 떠올라서 낮이 된다.’ 기껏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밖에 안되거든요.

이게 그렇게 되어버리면 예루살렘 심판한다는 내용이 여기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심지어 심판하는 모습을 봅시다. 4절에.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이건 감람산이 쪼개진다는 거예요.

감람산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 앞에 있어요. 예루살렘 앞에 있는 감람산이 쪼개진다는 말은 이건 감람산뿐만 아니고 예루살렘부터 애초부터 이건 예루살렘은 쪼개져 있다는 것을 감람산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부 다 모르겠지요. 이게. 그래서 이 문장으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사라지는 매개자’ 인간이 두려워하는 이유 중에 하나 무의미가 되는 것도 두렵다 했지요. 같은 뜻입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인이 사라질까봐 겁나는 거예요. 본인이 여기 있는데 있음이 없음 될까봐 겁나는 거예요. 기어이. 그래서 자식이 어디에 물에 빠졌다 하면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은 실종됐다 하면 그래도 죽었다 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사라졌으니까.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희망을 갖잖아요. 시체라도 찾아야 내 마음이 안정성을 얻겠다는 이유가 인간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굉장히 겁을 냅니다.

인간은 본인이 사라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에 스스로 사라질 수 없어요. 자살해도 안 사라져요. 그러면 인간이 스스로 거세한다든지, 스스로 가짜가 될 수 없고 가짜가 되는 흉내나 내는 기껏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 짓밖에 못하잖아요. 그러면 이 말씀은 전혀 이루지를 못합니다. 흉내 내기나 한다고 해서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일부가 아니고 자연에 대해서 인간이 무슨 짓한다? 지가 대장질하지요. 대장질. 지가 대장이에요. 대장 되어버리면 자연은 뭐냐 하면 내 관찰의 대상이 되고 지는 관찰한 것을 끌어 모아서 하나의 자연과 스스로 알아서 자연과 마주서는 존재가 되고 말아요. 아까 이 이야기는 내가 요런 표현은 안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는 했지요. 다시 하다보면 다른 표현이 돼요.

하나의 마주서는 대치가 되어버리면 이건 자연은 학대의 대상이 돼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우리 따로이 구성한 이걸 대타자, 큰 나. 나 니보다 노는 게 달라 씨~. 이리 되잖아요. 자기를 스스로 따로 나와서 자신을 독특한 존재로 구성이 되어버리면 상대방은 착취와 핍박과 학대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무리와 군중의 차이. 차이를 아셔야 돼요. 짐승은 떼지어 다니지요. 무리. 군중은 짐승을 가지고 군중이라 하지 않아요. 군중은 뭐냐, 인간사회에 적용됩니다. 인간사회는 여기 본인들이 지도자를 원해요. 본인들이. 대타자를 원한다고요. 큰 어르신네를 원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힘들어서 못 살아요. 만약에 어떤 여자가 싫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여자가 여쩔 수 없이 경찰에 고소해가지고 재판을 한다 합시다. 그런데 남자가 성질 나가지고 그 여자 따라 다녀가지고 칼로서 그 여자 근무하는데 죽여 버렸다 칩시다. 신당동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스토커해서 죽였어요.

만약에 상상인데, 만약에 그 오빠가 있다면 1번 재판하고 싶다. 2번 그 남자 똑같이 칼로 죽이고 싶다. 몇 번이겠어요? 죽이고 싶지요. 재판하고 싶지 않아요. 그게 바로 현재의 미국 사정이에요. 미국에서 왜 무기가 갈수록 더 잘 팔리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당했던 피해를 국가가 제대로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점을 무기회사는 부각시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래야 만족스러워요. 사실은 우리의 욕망은 이빨 두 개 뿌렸는데 이빨 네 개 뿌려야 만족하지만 그건 너무 심한 거고. 최소한은 균형은 맞춰줘야 원한이라도 풀 수 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미국에 재판하면 석달이고 넉달이고 다하고 나중에 사형제도도 없고 거기서 국민 세금내가지고 잘 먹고, 남 가정 완전 사람 죽여 놓고 지는 거기서 교도소에서 고참 노릇하면서 사형 없는데 10년이고 20년이고 기술 배워가지고 훌륭한 사람 듣고 그리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피해자가 받은 억울함은 어떤 인간은 사람 죽여 놓고 편안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품에 안고 어떤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못 살고. 누가 감옥살이하는 거예요? 지금. 둘 중에. 가해자가 감옥살이하는 게 아니고 감옥 호텔에 사는 거고. 이 피해 입은 사람이 감옥살이하는 이 불합리한 세계에 이건 아무리 따져도 납득이 될 수가 없지요.

그러면 어떤 강도가 들어왔을 때에 “니 그러면 우리 경찰에 신고한다.” 이래서 될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쪽은 지금 총 들고 오는데. 그쪽은 총 들고 왔을 때에 LA에서 한인가게에서 만약에 내가 한인가게 편의점 한다. 어떤 흑인이 총 들고 왔다. 여기는 권총 들면 안 되지요. 장총 들고 들어가야 되지요. “기다렸다. 빵!” 쏴버려야지요. “왜 쐈습니까?” “먼저 쏠 것 같아서 쐈다” 하면 끝나는 거죠. 한 대 맞고 쏘면 안돼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쏠 수가 없잖아요.

이게 인간이 맞아요. 왜? 인간은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인간은 밉고 살인하고 싶은 충동이 우리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이게 인간다워요. 국가의 치안에 맡기세요. 이건 전혀 우리의 본성과 안 맞는 거예요. 따라서 복수를 해도 내가 복수를 해야 돼요. 피해자 내가 복수를 해야 돼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집집마다 총이 다 있고, 집집마다 방마다 총 다 있어요. 그렇게 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진짜 지옥입니다. 대혼란이에요. 총을 갖고 있어도 더 큰 문제가 일어나는 거예요. 오발 사건은 문제가 아니고 좀 기분 나쁘면 총 쏴버리는 거예요. 니 내 기분 안 알아줬다고 무조건 쏴버려요. 문자 씹었다고 쏴버려요.

어쩔 수 없이 총 다 빼앗고 어쩔 수 없이 교도소 만들어서 이런 식으로라도 불평 불만이 많더라도 할 수 없다 치고, 멀쩡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형제도 없애고 사람 죽인 사람은 교도소에 집어넣는 이 방식, 그렇게 할 때 어쩔 수 없이 뭐냐 하면 뭘 믿어야 돼요? 국가를 믿어야 돼요. 국
가가 타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예루살렘이고 그게 이스라엘이에요. 그것을 주께서는 폭격을 해버려요. 거세해 버리고, 심판해 버리는 거예요.

자연 안에서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국가의 법질서가 우리를 지켜주는 한 약간은 우리가 안정감을 숨을 쉴 수 있다, 라는 심지어 그것마저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니가 아직도 니가 가짜인 걸 모르는구나! 니가 거세 대상인 줄 모르는구나.” 하고 공격합니다.

공격하니까 국가가 공격하는 메시아를 어떻게 했습니까? 십자가에 죽여버렸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가 돼요? 하나님이 말씀 건넴으로 오신 그 분이 본인이 말씀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그 분이 곧 예수님이에요. 그 예수님이 어떻게 됐어요? 이 인간세계에서 사라져버렸지요. 누가? 하나님과 자기 백성을 매개하고 연결시켜주는 분이 중보자가 사라져버렸지요. 그러면 성도는 이게 말씀의 완성입니다. 성도는 사라지는 매개에 그 말씀에 올라타서 같이 사라지게 되면 아까 제목을 뭐라고 한다 했습니까? 최후를 넘어서.

최후를 넘어설 수가 있지요. 마지막을 넘어설 수 있는 거예요. 이 스가랴에서는 선지자가 대표자겠지요. 말씀을 넘어서게 되면 어두움이라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 모든 인간은 거세당해야 돼요. 빛을 기다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야 됩니다. 빛을 기다리고 싶은데 왜 빛이 안오지? 이런 인간도 하나도 생겨나지 않아야 돼요.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 빛이 왔으되 빛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만 있어야 돼요.

그래야 뭐가 성립되느냐 없음에서 있음이 순전히 사라졌던 매개자의 솜씨로 작품으로 이 새로운 성도가 생겨나는 겁니다. 어두움이 어두움다워야 그러니까 어두움 중에서 어느 한 인간도 빛을 기다리는 사람이 일체 없어줘야 그 때 빛이 오게 되어있어요.

최후는 우리가 기다리는 최후는 최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혼인잔치에 처녀 열명이 있었잖아요. 신랑은 하나고 열 명이 있었지요. 열 명 중에서 잠 안 잔 여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 명도 없어야 돼요. 모두 다 잠을 잤어야 돼요. 모두 다. 다만, 그 지혜로운 여인은 건네 온 말씀을 옆에 기름으로 생각하고 옆에 해놓고, “이 말씀의 실천자는 나가 아니다.” 라는 거예요.

잠 자지마라, 잠 자지마라. 하면 벌써 5분 뒤에 잠자고 있어요. 중얼 중얼. 잠자면 안 돼. 신랑 오면 못 만나, 못 만나. 자고 있어요. 왜냐하면 신랑 올 때 깨어있어야 한다는 그 말씀은 만나는 처녀가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처녀는 자야 돼요. 실천에 옮기지 못하도록 거세되어야 돼요. 거세. 잘려져야 된다고요. 내 희망, 내 구원, 내 말씀에 대한 기대가 다 잘려져야 돼요.

그 작업을 지금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보고 지금 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이루지 이 말씀 공부한 우리가 실천에 옮기는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냥 빵점 맞으면 돼요. 속 편합니다. 천하에 속 편합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 첫 강의에서 안정성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에 안정성이지, 내가 안정성을 기대하면서 하는 안정성은 이건 제거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가짜가 원본이라는 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이 땅에 원본은 없다는 겁니다. 원본은 없다에서 원본을 잘라버리면 어떤 경우에도 이 세상에 인간은 없는 거예요. 자연 앞에서 자연의 어른인체 하는 인간은 하나님은 주신 적이 없어요. 이유가 뭐냐, 물으신다면 자연의 대변자는 예수님입니다. 자연의 대변자는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겨냥하는데 인터셉트, 중간에 죄지은 인간들이 “자연아! 니는 나하고 놀자.” 하고 자연을 자기가 돌아가 가가지고 수력발전소 만들고 온갖 태양 팬을 만들고 자연을 자기 원대로 사용하고 활용하고, 하면서 또 어디서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창세기1장28절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건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경우지. 가짜 인간은 그런 자격도 안돼요. 범죄한 인간은 저주 받아야지요. 범죄한 인간의 그 위치. 주위는 부산강의에서 이렇게 했습니다.

땅 그려놓고, 땅에 못 그리는 그림 그렸습니다. 뱀 하나 그려놓고 인간은 여기 뱀의 자손이지요. 뱀의 자손 돼서 뱀처럼 땅에 엎드려서 땅에서 올라오는 모든 저주를 맡으면서 어떻게 산다? 기어가듯이 산다. 야~~ 참, 인간의 팔자의 서글픔입니다. 인간은 땅을 파야 살 수 있어요. 땅이 주인이지, 인간이 주인인지 분간도 안 되지요. 사실은 땅이 주인이지요.

땅이 제때에 비가 오지 않고 땅의 세계가 제때에 활용되지 않으면 인간은 굶어죽습니다. 땅에게 종속된 인간. 저주받은 뱀의 모습. 이게 무슨 진짜입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엉터리밖에 없었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220915a슥14장04절(최후를 넘어서)-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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