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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 07:04:57 조회 : 67         
20221010a 부산강의 : [시편]52(36:1)-말씀의 환경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1010a 부산강의 : [시편]52(36:1)-말씀의 환경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6편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악인’ 나오지요. 그리고 제일 마지막 12절에 ‘죄악을 행하는 자’ 나옵니다. 성경에서 이런 단어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상당히 섭섭하지요. 우리에게 위기를 초래합니다. 성경에서 악을 지적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에 대해서 주목을 유도하는 것, 이것은 악인이라고, 죄악을 행하는 자라고 규정한 하나님의 규정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인간은 악인 되기 싫어하는 다 알잖아요. 인간들도 그렇고 하나님도 아시고. 인간은 누구나 죄악을 행하는 자 그래서 처벌받기 원하는 자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런 단어가 있는 겁니다. 이런 내용이 있는 게 성경에서 아무도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세계라 하는 것은 인간에겐 기피대상의 세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좋은 사람이기를 확인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들만 모이고 싶지요. 그러나 성경은 좋은 세계다, 그런데 이게 왜 나옵니까? 좋은 세곈데 악인이 등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가 왜 등장하느냐 말이죠. 그것도 이스라엘 내에요.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들이 이 땅에서 어떤 인간과도 차별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보거든요.

그러나 특별한 존재에서 악인이 등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악, 죄악 이것은 하나님의 성경세계, 또는 말씀세계로 이끌림을 받아야 그 최종적인 진가로 비로소 밝혀지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좋은 것 알고, 자기가 복 된 것 알고 이러면 이것은 진리 안다, 라고 생각하고 싶어 해요.

인간은 좋은 것, 복 된 것, 괜찮은 것,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인간의 의도를 좌절시키고 악한 것, 죄악된 것 이것까지 함께 알아서 이게 뭘 안다? 진리가 안다고 될 수 있어요.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악이고 죄고 다 치워버리고 괜찮은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복 된 것 이것만 알면 우리한테는 내가 아는 것이 내게 보탬이 된다고 생각되겠지요. 나쁜 것은 걷어내고 좋은 것만 골라서 이렇게 알게 되면 나는 그걸로 얼추 우리 만족에 합당하잖아요.

우리는 앞에 이런 쓰레기까지 알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좋은 것만 보고 선한 것만 보고 싶을 때 진리를 확보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그런데 성경은 우리 의도완 달리 악한 것, 죄악된 것 빠뜨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의도 자체가 성경세계 앞에서 결국 뭐냐? 머뭇거리게 만든다. 뭐가? 이 성경이 말씀이 우리는 머뭇거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말씀을 잘 안 보는 거예요.

국민의 힘 국회의원들이 민주당 국회의원들과 섞이고 싶어 하겠어요? 아니지요. 머뭇거리지요. 초대해도 머뭇거리지요. 그건 왜 그러냐? 나는 좋은 편과 함께 있음으로서 내가 좋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자각하고 스스로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나는 여전히 좋은 쪽에 있고 오른 쪽에 바른 쪽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니 생각이고 사적인 생각이고. 주님이 만든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니고 성경세계에요.

이렇게 되면 눈치 빠른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악이 뭐냐? 악은 성경세계 속에 들어오지 않는 게 악입니다. 뭔가 주저하는 것, 머뭇거리는 것 이게 악이에요. 제가 설명했지요. 왜 머뭇거립니까? 내가 원하는 세상 그것을 깨지기 싫고 그것을 무너지기 싫어서 내가 내 안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 이게 뭡니까? 악이 되고 이것이 죄악이 되는 겁니다.

이걸 크게 생각하면 아담의 세계와 그리고 장차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세계 둘을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예수님 세계를 빼버리고 아담 세계, 우리 인간의 세계만 거기다만 몰입하고 몰두하고 있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라면 이 질문 하나로 시작이 될 수 있어요.

“뭐가 있지? 뭐가 있는데?” 이것을 굉장히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문이 있어요. 현대에 들어와서 이걸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 중에는 자연과학, 그리고 인문과학, 사회과학. 사회과학은 경제학 이런 것, 인문과학은 언어학, 인류학, 고고학. 심리학은 어디 속하는가? 심리학은 자연과학에 속하지요.

과학에는 자연과학, 의학, 생물학 같은 것 다 포함되지요. 심리학. 그다음에 인문과학은 언어학, 고고학, 문학 같은 것. 그다음에 사회과학, 경제학, 경영학, 정치학. 대학에서 이것 빼놓고 딴 과 있습니까? 예술 하나 보태면 돼요. 지금 예술도 과학으로 포함되죠. 교육학은 어디 속하지요? 인문과학 속하지요. 유아교육 여기 속합니다. 모든 게 과학이죠.

과학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뭐가 있지’를 탐구하는 것, 뭐가 있는가, 뭐가 있는데? 여기서 빠진 게 있지요. 정답은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이게 이미 정답으로 내려져있어요. 천문학 같은 것, 별.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뿐만 아니고 에베소서 같은 경우에, 마태, 마가도 마찬가지지만 에베소서 2장 2절에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나오지요. 자, 공중 권세 잡은 자는 어느 과학에 속하지요? 속하지 않지요. 그러니까 과학에서는 성경 자체에 대해서 제가 처음에는 머뭇거린다 했는데 아예 머뭇거리는 게 아니고 배타시해버리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에 몰두하고 있는 나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내가 왜 굳이 그것을 봐야 되느냐? 눈에 보이는 것이 결국 우리에게 돈과 힘과 권력을 가져다준다 이 말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예수님을 공격했던 존재가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가 광야에서 주님과 일대일로 만났거든요. 일대일로 만났다는 것은 거기서 뭐가 다 빠집니까? 인간들은 가, 인간들은 가! 인간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것과 인간이 봐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존재와 일대일 매치를 한 장소가 광야였습니다. 그때는 놀랍게도 세례 요한도 빠졌어요.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악마를 이길 수 있다, 없다? 못 이기죠. 세례 요한도 예수님 보고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례 요한의 한계에요. 악마의 역량에 대해선 세례 요한도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세례 요한의 한계는 곧 인간의 한계며 인간은 자기 한계를 넘어서 악마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괴기영화 전부 엉터리에요. 마귀 영화, 그거는 인간이 그렇게 이쪽에서 있음을 근거로 해서 없음을 파악하는 것은 악마가 웃지요. 그거는 악마가 아닙니다. 악마의 세계는 인간이 손댈 수 없습니다. 관여할 수가 없어요. 왜 관여할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은 주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종은 함부로 주인의 금고에 손을 대는 게 아닙니다. 회사 직원이 사장님 금고 비밀번호를 알아서는 안 되겠지요.

뭐가 있지? 내가 있다. 따라서 뭐는 없다? 귀신, 마귀, 예수님, 신 이거는 어떻게 됩니까? 이거는 없는 겁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만 뭉쳐진 세계, 그걸 아담의 세계라 합니다. 아담의 세계는 끝이 있어요. 시작도 있지만 끝이 있는데, 인간의 세계의 시작은 없는 데서 있게 하죠. 없음이 되겠지요. 없는 데서 태어나니까. 아담은 없는 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태어남에 대해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요. “엄마, 아빠 나 이렇게 만들어줘” 이게 안 돼요. 엄마, 아빠가 결혼할 때는 자식은 없지요. “엄마, 아빠 이래야 돼” 요구할 순 없어요.

끝은 뭐냐? 창세기 5장에 나옵니다. 아담의 계보가 나오지요. 끝은 동일하게 끝나요. 이게 뭐냐 하면 끝도 없음인데 그냥 없음이 아니라 내용을 담고 있는 없음이에요. 이게 죽음입니다. 창세기 초반에는 그냥 죽음으로 끝나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가게 되면 이 죽음의 내용이 더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왜 죽느냐? 죽음이 어떤 고통이냐?

죽음이란 실제는 인간의 죽음이란 외형적 외피적인 모습이고 숨 끊어지는 것은 외피적인 모습이고 그 실제 죽음세계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진행되면서 그 내용을 채우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저주였고, 심판이었고,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불바다죠. 이게 지옥 불이죠.

혼돈 또는 없음의 세계에서 인간이 등장했다. 그러면 인간의 시작은 없음, 끝은 지옥 불. 예수님께서 넓은 길, 좁은 길 이야기한 것처럼 없지요. 그렇다면 이 두 개를 시작과 끝을 하나로 합쳐보겠습니다. 합쳐보면 이렇게 돼요. 동그라미 안에 인간은 없는 데서 태어나고 다시 끝은 뭐냐 하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여기 없는 데서 태어났다는 것은 계시가 초반일 때는 “내가 없는데 부모가 나를 낳았네. 어, 있네.” 이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러나 끝부분에는 죽음의 없음이 아니고 이건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학문에서, 옛날에는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음은 없는 것이 아니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 있는데 둘 중에 하나에요. 어디서? 환경. 이게 지옥 환경이냐, 아니면 천국 환경이냐에 따라서 이게 내가 그냥 없음이 아니고 내가 결국 없음이 되죠.

내가 여기 있어요. 있는데 내가 주목받는 것이 아니고 지옥이란 게 주목받으니까 주목받는 그 지옥 앞에서 나는 뭡니까? 있으나마나 지옥을 지옥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의 재료로 거기에 가미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피조물의 운명이죠. 그러니까 성경의 세계란 나의 세계 아니고, 무슨 세계? 환경의 세계. 나를 죽여 놓은 환경의 세계가 성경의 세계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환경이 주인공이다. 이 환경이 말씀의 환경, 계시의 환경, 또는 이스라엘 같으면 언약의 환경. 성경의 환경입니다. 내 세계가 주인공이 아니고.

그러면 이 환경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걸 뭐라고 했습니까, 그 입구에 머뭇거리는 걸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바로 악이 되고 죄악이 되는 거예요. 잘못 생각했단 말이죠. 환경이 우선인데 너는 너만 우선으로 생각한 자체가 잘못 생각한 거예요. 나의 세계에서 그다음 환경의 세계로 이동돼야 되겠지요. 이동되는 그 시범케이스로 채택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나의 세계에서 환경의 세계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들을 강제로 이끌 때에 나의 세계가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다 끄집어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선택권, 결심, 오기 이런 거예요. 선택이에요, 선택.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위해 선택하지요. 선택할 때 인간이 선택을 합니까, 선택을 강요합니까? 환경이 우리 삶이 선택을 강요하게 하는 환경의 차가움.

그래서 인간사는 지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세상만사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분명히 우리는 내 마음대로 하는데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얼굴의 알레르기 내 마음대로 되는가요? 그냥 찾아오지요. 여러분 인간이 새장에 갇혔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나마 새장 안에서는 자유로워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새장이 아니고 인간은 새장 안의 곳곳에 힘의 역선, 힘의 망. 인터넷 세계에는 인터넷 망이 형성돼 있지요. 이 세상에는 말씀의 망으로 엮여져서 우리는 나를 위해 살기 때문에 뭔가 선택을 하는 거예요. 선택을 하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부딪치는 게 있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사전에 구조를 만든 거예요. 우리는 선택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뭐든지 선택해요. 오늘 공휴일인데 성경공부 참석할까, 말까? 뭐든지 선택하기 마련이에요.

그 선택은 누가 하느냐? 나의 세계가 하는 거죠. 자, 방금 우리가 공부했기 때문에 복습해봅시다. 나의 세계가 나를 선택한 이유가 뭡니까? 나는 좋은 것만, 나한테 유익이 되는 것만, 내게 행복이 되는 것만, 나한테 손해되지 않는 것, 내가 원하는 깨끗하고 나는 순수하며 거룩하며 착하며 의로우며 정당하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이고 누구한테 지적받을 일 없는 존재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는 거예요.

뭘 빠뜨렸다 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악과 죄악 그런 것은 보지도 않아요. 나는 좋은 것만 보기 때문에. 나는 착한 것만 보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에는 의도를 갖고 있어요. 동기를 갖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훌륭한지 증명하기 위해서 우린 선택하는 거예요. 우리 가정이 얼마나 옳은가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우리는 그 안에 갇혀있는 게 행복해.

문제는 새장으로 여긴다는 거예요. 새장이 아니고 그 새장 안에 촘촘히 가시가 있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있어서 새장 비유가 적절치 않아요. 험난한 가시밭길이에요. 보이지 않는 게 나를 공격하고 예상 못한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고. 우리는 착하고 싶은데 생각도 못한 사태가 벌어져서 착한 나를 아주 못된 나를 전환시키는 그런 사건들의 벌어져버리죠. 내가 이렇게 성질 더러운 인간이 아닌데, 이런 갑자기 본인에 대해서 수정이 가해지는 내가 누군지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거예요.

그걸 가정에서 할 때 사자성어로 ‘부부싸움’이라 하는 겁니다. “니가 뭔데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니가 뭔데? 내가 얼마나 착한데 네 말 한 마디에 아침부터 성질 다 버렸다. 니가 뭔데 나를 오늘도 나쁜 사람 만드느냐?” 본인이 나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착해지려고 애쓰는데 니가 내 성질 긁었다는. 그럼 뒤에 붙는 말이, “니가 내 마음을 알아?”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내 마음 나도 모르는데 니 마음을 왜 알아야 돼?”

“이게 부부야?” 부부가 뭔데? 이게 부부야, 할 때 여기 뭐가 빠졌어요? 악과 죄악이 빠진 상태에서 사용하는 거예요. 내가 악한 부부일 수 있다는 개념을 아예 지 마음대로 삭제시켜버린 거예요.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성경 속에 들어가면 나의 세계가 아무 의미가 없고 거기에 내가 모르는 예수님의 세계, 두 번째 아담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뭘 해도 악과 죄악을 발췌시키면서 악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없던 뭐가 생겨요. 죄가 발생되면서 없던 게 생겨요. 그게 뭐냐 하면 여기에 생명이 나오고 의가 비로소 나오고 거룩이 나오는 거예요. 우리는 악과 죄를 모르고 나는 당연히 의롭고, 당연히 생명을 얻고, 당연히 거룩하다고 성질 급하게 직접 알려하는데 주께선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게 아니고 악과 죄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내가 알던 생명 말고, 내가 알던 의, 거룩 말고 새로운 거룩이 등장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세계, 두 번째 아담의 세계, 말씀이 세계는 뭘 해도 그게 뭐가 되느냐? 뭘 해도 의가 되게 해요. 내가 분명히 이건 죄진 건데 그걸 의로 쳐주는 겁니다. 이게 무슨 종이냐? 의도 주도권을 가지기 때문에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 많은 너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의를 드러내가 위해서 생명을 드러내고 거룩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밖에 없는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전략이고 묘수입니다.

이게 시편 36편이 품고 있는 환경이라고 보시면 돼요. 별로 안 기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내가 뭘 잘못됐나 싶네. 그럼 시편 36편 들어가 봐야 되겠지요. 머뭇거리지 마시고 이미 우리는 죄와 악을 알지 못하면 의와 거룩도 전부 다 구라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돼요. 내가 이해하는 의와 거룩은 거기에 나도 잘났잖아, 라는 결부되지 말아야 될 게 막 섞여 들어가는 거예요. 나 잘났어, 그걸 떼놓고 의와 거룩을 생각해야 되는데 나 당연히 잘났지, 이것 들어가서는 이거는 성경세계의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신약에 보면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우상의 신으로 들어가거든요, 인간은. 우상의 신을 환상입니다. 왜 환상이냐 하면 나의 이상형이기 때문에. 신은 나의 이상형이에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거대하게 돼버린 상황, 그걸 우린 신이라고 부릅니다.

인도에는 삼억 삼천 개의 신이 있어요. 그걸 19세기 이후에 영국 사람이 ‘힌두교’라 불렀어요. 전엔 힌두교란 단어 자체가 없었어요. 그전에는 브라만교인데 이거는 신을 인정한 민간신앙을 전부 다 하나로 묶어버린 것이 힌두교에요. 힌두교는 신이 많아요. 지금 힌두교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라오스 돈 없으면서 해외여행 가고 싶은 사람들 많이 가는 곳 있지요. 돈 얼마 들지 않는. 유럽은 너무 비싸서 안 되고. 그 인도네시아 등 유적들이 다 힌두교에요.

내가 되고 싶은 신, 그리고 나는 미흡하고 그 미흡함을 복으로 그 간격을 채워달라고 비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칠성신, 북두칠성에게 옛날 할머니들이 집 뒤뜰에 정화수 떠놓고 북두칠성을 섬겼어요. 그걸 불교가 흡수했거든요. 불교가 그냥 흡수한 게 아니에요. 날짜를 정해서 흡수한 거예요. 왜냐하면 절에 가서 돈을 내는 날이 정해지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할 날짜가 정해졌어요.

이건 기독교도 마찬가지지요. 맥추절, 유월절 절기는 계속해서 종교단체에 돈을 내는 그 날짜를 정해줘야, 어제 낮 설교처럼 형식을 갖추어야 나를 그 안에 숨길 수가 있습니다. 나를 숨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죠. 그러나 형식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형식이란 여러분 생각하기에 종교의례, 그런 절차를 떠올리면 그건 작게 생각한 거예요. 더 크게 생각하면 이 형식은 종교 교리도 포함돼요. 주권사상, 예수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난 믿습니다, 이게 전부 다 형식이에요.

시편 36편에 들어가 봅시다. 여기서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면 1절에 보면,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20장 11절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만날 때 당신은 왜 당신 부인을 누이동생이라 속였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당신 때문에 우리 가문이 신의 저주를 받아 난처하게 됐는데 그 원인제공자가 당신이잖아. 당신이 아내라 하면 되는데 누이동생이라고 왜 속였습니까, 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답변하는 거예요.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동네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속이지 아니하면 내 아내를 온전하게 지킬 방도가 없다는 거예요. 자, 질문 들어갑니다. 지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까, 아비멜렉입니까? 아니면 둘 다 입니까?

지금 누가 안 두려워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동네에선 두려워했다고 하죠. 자기 동네에선 두려워했다고 하는데 자기 집에서 하나님 잘 믿는 것 왜 바깥에선 안 써먹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나와바리, 자기가 관여하는 동네에선 하나님 영광 해놓고는 바깥에 나가서는 하나님 안 믿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써먹던 방식으로서는 더 이상 우릴 지킬 방도가 없기 때문에 여기선 이쪽 방도대로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 하지 말자, 라고 선제해서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쪽에선 하나님 있지만 저쪽에선 하나님 없다고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죠. 누가? 아브라함이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누가 부딪칩니까?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모르는 그쪽에서 오히려 누굴 질책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했잖아요.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환경의 문제인 거예요. 환경 자체가 촘촘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약속의 사람 되게 하도록 아브라함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선택 당함의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란 집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집합체라고 해서 저거들이 결속을 다지는 겁니다. 우리 이스라엘은 이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만 모였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다 알잖아.” 인간의 심보가 이래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안에서 뭐가 피어났다? 시편 36편에 의하면 죄악,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비로소 제대로 된 죄가 발생되는 거예요. 아예 하나님을 몰랐으면 죄도 몰랐을 건데 두려워하지 않는 게 죄라는 걸 몰랐을 건데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그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만 등장하는 특징이 돼버렸지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단체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된 겁니다. 한 시간 동안 찬양했는데 그게 찬양이 아니고, 두 시간 동안 기도했는데 기도가 아닌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찬양하고 기도했다고 우기기 때문에 비로소 시편 36편의 죄가 구현되는 거예요. 그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죠.

그러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악인(1절)과 죄악을 행하는 자(12절), 이 말씀이 세계는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세계, 불가능한 세계에요. 12절 읽어볼게요.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이것 인간이 관여합니까, 관여 못합니까? 이 일 관여 못하지요. 만약에 인간이 관여한다면, “죄악을 행했구나. 내가 죄구나.” 일어서면 돼요. 그러나 죄인이 엎드러지면 다시는 못 일어서도록 하기 때문에 이건 인간의 선을 넘어선 거예요. 인간의 손댐을 능가한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죄가 발생되었어요. 다윗의 시니까 다윗 시대에 이미 엎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죄악 된 사람이 발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발생될 때 우린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죄진 사람 다시 일어나지 못하니 안 됐다, 불쌍하다. 인간 팔자 저렇게 끝나네.” 오히려 우린 측은해 하고 이러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건 관여할 수 없어요. 인간들은 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자꾸 안 된 사람에게 미래가 불행한 사람에게 동정하고 위로하려는 버릇 같은 게 있어요. 감정이입 돼서. 내가 저 사람 같으면 남들이 위로해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것처럼 내가 저 사람 엎어졌을 때 위로해주면 저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도움 돼서 뭐하는데? 도움 되면 안 되지요. 죄악을 행한 자는 두 번 다시 일어서면 안 돼요. 이게 시편 36편 12절입니다. 그러나 인간세계는 이게 없어요. 엎어진 사람 도와줘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세계는 엎어진 사람은 도와주면 안 돼요. 엎어지면 밟아야 돼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우리가 밟는다고 해서 또 안 일어서는 건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못 일어서는 건 아니지만 밟아줘야 된다고.

우리 평소의 인식이 항상 자기를 선한 쪽에 서서 선한 행위를 하려는 의도가 굉장히 강렬해요. 강렬하다보니까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세계까지 지가 오지랖을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지만 나는 용서한다. 이게 천주교 성자들의 일대기에요. 완전히 뒤집어놨어요. 하나님도 포기한 자, 어떤 성녀가 나서서 건졌다, 이런 이야기. 그것 왜 건집니까? 경상도 말로 지가 뭔데? 서울말로 자기가 뭔데 왜 관여합니까. 왜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이 관여해요.

그건 하나님세계와 자기세계가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 이어진 것을 잘라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에 시편 36편 이전에 주신 율법이 있어요. 그 율법이 뭐냐? 할례입니다. 죄가 뭐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이건 아브라함 때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시대로 계속 이어지면서 죄의 개념이 점점 더 깊어진다 하지요. 그러면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악이 돼요.

할례는 뭐냐 하면 제거됨이에요. 인간의 육신을 제거하는 게 할례입니다. 네가 속해있는 세계는 육신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끊어진 세계다, 라는 그것을 네 육신에다 표식을 해라. 그래서 할례는 이스라엘의 시그니처signature에요. 대표적 표시에요. 문제는 이스라엘이 육체에만 표시했지 할례가 왜 하나님께서 내 육체에다 인간의 생식능력을 잘랐는지 하면서도 몰라요.

그런데 그걸 알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면서 벌어지는 사태들로 그 내용이 깊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깊어지게 되면 할례를 행한 자만이 뭘 행하느냐 하면 제사를 행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악은 뭐냐? 제사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악,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악,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이 악.

그래서 이스라엘은 제사 드려요. 제사 드리는데 제사의 형식 하나하나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제사 드릴 때 초반에 기본이 유월절이거든요. 유월절은 무엇과의 격리조치냐 하면 애굽과의 격리조치가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다음 애굽 떠나고 난 뒤에 끝났습니까? 아니죠. 그들이 어떤 공간을 통과하지요? 광야지요. 광야에서 사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이스라엘밖에 없지요. 광야에선 사람으로선 이스라엘밖에 없어요.

이스라엘 외에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사람 말고 다른 존재와 관계를 갖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만 상대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했던 그 시절이 애굽 시절이었지요. 애굽과 분리시켜놨어요. 사람 대 사람으로 분리시켜놨어요. 그런데 사람밖에 없잖아요. 사람밖에 없는데 광야라. 그럼 묻는 거예요. “사람아?” “왜?” “대책 있나?” 대책 없어요.

사람 같으면 절대로 광야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면 광야에서 생계 할 생각을 사전에 못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누가 우리를 단일화시켜서(단일화가 중요해요) 우리를 광야에다 밀어 넣었느냐? 누구냐, 어떤 인간이냐? 어떤 인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누구냐? 자연적으로 어떻게 돼요? 하나님이 요청되겠지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과 만남은 뭐부터 정리돼야 돼요? 인간과 인간이 대화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과학, 인문과학, 과학 눈에 보이는 전부 이것부터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비로소 자기 정체를 드러내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 ‘인간의 이름+인간의 이름’으로 형성된 것이 사회입니다. 인간사회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인간의 이름+‘주의 이름’이 등장하지요. 이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와요.

주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인간이란 먹구름 다 걷어지고 바로 주의 이름과 같이 연결이 되는 그 집단, 이스라엘입니다. 그때 인간과 인간이 마주했던 그 성질과 성격, 그러한 습관, 생활방식 밖에 몰랐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할지 깜깜한 거예요. 어떻게 대할지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때 이들은 생존해야 돼요. 그래야 가나안 땅 백성이 되니까.

하나님의 이름 쪽에서 먼저 인간과 하나님이 관계 맺을 수 있는 방안과 방도를 주의 이름 쪽에서 제시한 이것이 뭐냐? 이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제사란 거룩의 이동이에요. 거룩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보여줍니다. 제사법 안에 있어요. 제사하는 공간은 이걸 성소라 하지요. 성막에 보면 지성소, 성소 돼 있고, 그 앞에 뜰, 제단은 바깥에 있지요. 제단은 놋 제단이에요. 성소 안에 제단이 있어요. 이건 놋 제단이 아니고 금 제단입니다.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가? 놋 제단에서 들어와요. 일반인들도 출애굽기 29장인가 보게 되면 놋 제단까진 갈 수 있어요. 그러나 금 제단은 일반인은 못 들어가고 특별하게 거룩으로 완전히 덮어버린 제사장만이 금 제단으로 갈 수 있어요. 놋 제단으로 금 제단으로 이동하는 방법, 이게 뭐냐? 인간의 이름, 사람의 이름이 또는 아담의 이름이 주의 이름과 결합될 수 있는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그 방안을 제시했다는 거죠.

제사장이 이동하지만 사실은 제사장이 들고 있는 게 있어요. 뭘 들고 있겠습니까? 제물이죠, 피. 이동하면서 다섯 가지 제사가 동원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이것부터 레위기에 언급돼 있고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속죄제, 속건제 돼 있어요. 번제, 소제, 화목제의 특징은 놋 제단에서 다 태우고 들어가는 거예요. 다 태우고 피만 들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 피만. 속죄제, 속건제는 제단에서 기름만 태우고 나머지는 진 밖에 쓰레기장에서 태워요.

순서는 번제, 소제 해놓고 진짜 순서는 속죄제, 속건제 먼저 드리고 그다음에 번제, 소제 마지막에 화목제 드리게 돼 있어요. 화목제 드리게 되면 제사 끝나는 겁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친히 무슨 제물 됐다? 친히 화목제물 됐다는 것은 그 안에 이미 속죄제, 번제 다 포함이 됐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제사 드리는 행위의 주재자가 누구냐 하면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의 모습 안에서 제사장이 이동을 하고 있다는 말은 전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무슨 나라라 합니까? 제사장 나라. 왕이란 인간사회에서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왕이 필요 없어요. 왕이 필요 없다는 건 인간세계 필요 없다는 거예요.

왕이 필요 없다는 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힘을 모으는 그런 세계는 악의 세계고 죄악의 세계가 돼요. 어디에 못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세계 왜 나쁜 짓합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나쁜 짓하는 게 아니고 나쁘다, 안 나쁘다는 어디서 결정해요? 제사에서 결정해요. 제사에서 말하는 거룩에, 하나님의 이동, 제사장의 이동에 참여 못하면 무조건 그게 뭐가 되느냐? 악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의 성경세계에 못 들어오면 뭘 몰라요? 자기가 왜 죄악인 줄 몰라요. 왜 죄인이고 악인지 알 수가 없어, 이게.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만 하고 있다고요. “양심상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5장에서 뭐로 시작해서 뭐로 끝난다? 시작은 뭡니까? 없지요. 없는 게 왜 말이 많아. 애초부터 없었던 게 말을 해도 없음을 있게 하신 분의 말이 인간에 실려야 되지 왜 없는 인간이 왜 말을 많이 하느냐.

여러 가지 말 많은 것 있지만 티비에서 내가 보기에 제일 말 많은 게 <동치미>란 프로에요. 왜 그리 말이 많아. 쓸데없는 말이. 또 말이 많은 게 <미운 우리 새끼>죠. 또 말이 많은 프로가 <무엇이든 물어보살> 왜 말이 많습니까? 이 있음을 지켜내기 위해서 악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 악이 그 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발악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프로에 친근감을 느끼고 거기에 몰입하지요. 내 심정을 우에 그렇게 잘 이야기하느냐? 같은 아담이니까 그렇지요. 그럴 때 우리는 환경을 지금 나를 지켜주는 환경으로 착각하지만 우리는 새장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무서운 가시밭길 위에 촘촘히 꽂혀있는 그런 세계를 왜 주께서 만드는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알려면 10분 쉬어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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