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HOME > 게시판 > 자유게시판
2022-10-12 07:07:00 조회 : 58         
20221010b 부산강의 : [시편]52(36:1)-말씀의 환경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96)
20221010b 부산강의 : [시편]52(36:1)-말씀의 환경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제사에 참여 못합니다. 할례 없으면 이스라엘 자체가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할례와 제사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제사제도 내부에서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번제, 다 태운다는 뜻이에요. 소제, 식물을 예물로 드리는 거예요. 화목제, 하나님께서 이 제사에 대해서 즐겁게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는 향기로운 냄새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에 반해 속죄제와 속건제는 내다버려요.

제사가 속죄제, 속건제부터 먼저 드리거든요. 내다버릴 것은 내다버리면서 받을 것은 받으신다는 다섯 가지 제사 내부의 이 구분을 할례 행한 인격체에 그대로 심어버려요. 버릴 것은 버리고 버렸다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주는 이 제사과정을 할례 행한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각인을 시켜버리죠.

그러면 할례는 뭐냐 하면 도려내는 거예요. 도려내면 여기서 빈 공간이 마련돼요. 잘라내 버렸으니까. 육신 때문에 가로막혔던 인간을 받아줄 없는 그 인간을 도려냄을 통해서 육신의 고리를 잘라냄으로써 받아줌이 성사될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마련하는 거예요. 앙꼬 집어넣기 전에 밀가루부터 붓는 거예요. 붕어빵에. 죄로 붕어빵 만들고 앙꼬는 제사의 이동로로 거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여기서 성립되는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 나옵니다. ‘동질성’이에요. 왜 이게 어려우냐 하면 사오십 년 교회 다니고 복음 알면서도 매일같이 떠오르는 의문점은 내 몸 따로, 예수님 몸 따로 인데 어떻게 예수님과 내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그 문제. 이거는 성경을 백독을 하고 아무리 심도 있게 읽어도 계속해서 막히는 게 주님 참 좋으신 분이고 훌륭한 분이고 우리를 위해 대신 희생한 분인데 내가 어떻게 그분에게 다가갈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분이 나한테 다가왔을 때 내가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느냐, 알 수 있느냐, 그걸 받아줄 수 있는가, 나의 오기 섞인 착각이 아닌가, 내가 구원 받기 위한 욕망 때문에 주님 오지도 않았는데 왔다고 스스로 조작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문제, 이게 바로 동일성 문제에요. 그리고 에베소서에 보면 주님은 머리고 우리는 지체라는데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렇다는데 그걸 현실로 우리가 받아주기에는 내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성경만 있을 뿐이지 나는 결국 버림받는 자인가? 이런 생각 들지요.

동질성의 반대가 이질성이죠. 같지 않다. 이질성을 시편 36편에서 죄악을 행하는 자에요. 죄악을 행하는 자가 12절에 보면 뭐라고 돼 있지요? 넘어지면 두 번 다시 일어날 수가 없다. 이왕 어렵게 한 것 더 어렵게 가봅니다. 할 수 없어요. 쉽게 한다고 이해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제사는 뭐냐? 시간의 축소에요. 다른 말로 역사의 축소, 과정의 축소. 시간이 관여하는 것을 제사 안에 전부 다 압축을 시켜놓은 겁니다. 그러면 제사가 완성되면 그 안에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지요. 그 의미 없음의 대표적인 것이 12절입니다. 한 번 엎어지면 끝, 끝이에요. 악인은 엎어지면 그다음 몇 년 뒤에 일어섰다, 그런 시간이 없어요. 시간요소가 없기 때문에 ‘그 뒤에’란 말이 없어요. 엎어지면 그걸로 끝이에요.

동질성과 이질성을 나눌 때에 제사를 여기다 집어넣음으로서 인간 쪽에서 본인이 본인한테 어떤 일을 벌이거나 용기를 내거나 어떤 신앙적인 노력을 해서 이질성을 동질성으로 바꾸는 그런 것을 어디서 차단하느냐? 제사가 차단시켜버렸습니다. 인간이 자기 인생에 손대서 개과천선하는 경우는 언약세계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밖에 있는데 나는 소원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데 내가 나한테 어떻게 손대서 노력해서 이질성 위치에서 동질성에 참여할 수 있을까? 이게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없는 교회에는 있어요. 교회가 엉터리죠. 성경에는 없는데 교회는 그걸 만들었어요. 왜? 교회는 사람 위로 못해서 환장한 동네거든요. 동정을 못해서 환장한 동네에요.

지금은 못하지만 앞으로 몇 년 뒤에는 됩니다. 몇 년 뒤가 뭐예요? 이게 시간이죠. 시간과 역사를 자꾸 마감을 안 시키고 그걸 계속해서 어떤 여지로 남겨두는 거예요. 지금은 안 되지만 노력하면 됩니다. 자꾸 노력하는 시간 텀을 부여해서 희망을 갖게 만들어요. 하나님과 끊어졌지만 노력하시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럼 하나가 뭔데요? “목사님, 하나가 뭡니까?” 교인들이 물으면, “하나요? 주님과 하나 되는 겁니다.” “그게 어떤 상태인지 본인이 아십니까?” 알 턱이 있어요. 인간의 동질성,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어떻게 알아요.

제사에서는 이 동질성이 풀립니다. 일단 도려낸다는 거예요. 도려내서 빈 공간을 만드는 자체가 주님께선 이미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겁니다. “네가 손대지 말고 내가 손댈게. 네가 하나의 대리석원석이라면 그걸 깎아서 작품 만드는 것은 내가 할게.”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자인 동시에 창작자가 되는 거예요. 창조자도 되고 창작자도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깎아 만드는 거예요. 도려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깎아내면 우리 주위에 뭐가 됩니까? 나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스러기 파편들이 인생에 쭉 깔리겠지요. 그게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주께서 제거시킨 쓰레기들이 주변에 쌓여 있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이 주께서 깎아주니까 저게 이생의 자랑이고 욕심이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주님과 동질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깎아내는 작업이 무슨 과정이냐 하면 이게 바로 광야시절, 광야 통과 과정. 그래서 레위기의 제사법과 민수기의 제사법이 달라요. 레위기의 제사법은 이렇습니다. 생활공간과 격리되어 제사공간을 부각하는 것, 이게 레위기 제사법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핵심이죠. 민수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레위기에서 확정된 제사공간이 어디를 공격하느냐? 생활공간을 공격하는 것, 거꾸로 공격하는 것 이게 민수기에 나오는 추가적인 제물에 대한 세부사항. 이것이 어디서 이뤄지는가? 이스라엘 안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 끝부분 다시 할게요. 이스라엘이 광야 할 때 다른 민족, 아말렉 말고, 다른 종족 같은 것, 인간 말고 다른 인간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인간은 그 광야에서 누구와 협의하고 누구와 의논하고 누구로부터 대책이 있어야 앞으로 진전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아니면 진전 못하지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뭔가 어떤 방향을 정해주는 것도 일방적이죠. 뭔가 장애가 등장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장애를 주시는 거예요. 깎아내기 위해서.

여기에서는 제사공간만 남기는 거예요. 제사공간만 남기기 때문에 여기는 할례의 의미가 제사법으로 표현했다면 여기 민수기에서는 할례 의미를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해요. 내가 잘렸다, 깎여나가야 된다, 라는 것을 제사 이렇게 드리고 양은 이렇게 드리고, 그것 알지요. 저는 동일성 됐습니다, 라는 말을 함부로 못하게 만들어요. 네가 실제로 생활할 때 하나님의 제사공간이 생활 속에서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직접 마주치게 하고 체험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공간이 산 위에 있다면 산 아래까지 내려오는 겁니다. 민수기에 그런 사례가 굉장히 많은데 시간관계상 다 못하지만 여러분 아시는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드는 사건, 그리고 광야에서 그들이 너무 피곤하니까 불평분자들이 진의 행렬에서 점점 뒤로 가요. 원래 은혜 없으면 뒷자리 앉잖아요. 처음엔 앞에 앉다가. 처음에 교회 올 때 양복 입고 오거든요. 일주일도 안 돼서 사복 입고 나중엔 쓰레빠 신고 뒤에 앉고. 형식은 벗어났는데 본인의 이질성은 못 벗어난 거예요.

교회 와서 예배 어떻게 드리고 복음 어떻게 듣나 그건 아는데 하나님이 자기의 일상생활 속에 하나님의 거룩이 침투되진 않은 거예요. 그저 지 편한 대로 사는 겁니다. 그건 아까 아브라함이 자기들끼리는 두려워했는데 밖에 나가선 나만 손해될까 싶어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이는 행위와 동일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요. 우리끼리 하나님 찬양합시다, 이렇게 한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 없다고 여기는 일상사람 만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같이 계신 줄은 상상도 못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동질성이란 내가 아는 동질성과 실제로 실생활에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동질성이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스스로 도 닦고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게 아니고 하나 되는 그 작업의 주도권이 주님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일상생활 속에서 아프지만 이질성이 깎여나가는 것, 다시 동질성이란 주의 이름과 나의 이름이 함께 하기가 동질성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세계에서는 나의 이름 중심으로 타인의 이름과 함께 하기에요. 나 중심을 인간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들 만나서 나한테 어떤 이익을 줄까? 인간은 포기할 수 없어요. 항상 집에 가서 수입 계산할 때 누구 중심으로 계산합니까? 오늘도 얼마나 벌었는지 보자, 내 중심이잖아요, 내 중심. 그런데 주님이 내가 보기에는 주의 이름으로 왔다는 타인의 이름으로 나한테 쳐들어오면 결국 우리는 내 이름 중심이 주의 이름을 핍박하는 방식이 돼버려요.

주님 복음 안다고 해서 나한테 도움 준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복음 알아도 이익 본 게 뭐가 있습니까? 이런 말이 서슴없이 막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말이 어디서 나쁘냐 하면 계속 주님을 내 바깥에 세워놓은 주님과 나는 이질적이라는 것을 본인 입으로 자백하는 바가 돼버렸어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고, 내 집에 있는 그릇 하나도 주의 것입니다.” 교회 있을 때는 이야기하는데 바깥에 나왔을 때는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모든 일어난 일이 내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막상 사회에 나가서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 만날 때는 그 이야기를 못하는 거예요. 동질성을 유지하려다보니까 어느새 자기가 주님과 이질성이 된다 말이죠.

이질성이 되니까 미안하잖아요. 미안해서 억지로 기도하고 헌금해서 회개한다고 이게 이질성이 동질성 됩니까? 기도 두 시간 반했는데 문제는 기도응답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 두 시간 반 동안 해도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 본성이 뭐냐 하면 애매한데서 확실성을 갖출 때 그제야 나는 믿겠다는 의도가 육신 속에 계속 남아있기 때문에 그래요.

모호한 것, 하나님의 기적, 하나님의 표적, 놀라운 하나님의 일 애매하지 말고 확실하게 넘어가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심보가 확실해야 믿음이 더 가고 모호하면 믿음이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확실한 하나님의 일을 모든 걸 수집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이걸 교회라 하는 거예요. 교회는 하나님의 일의 센터로서 우리가 믿을만한 건 다 갖고 와, 집에서 은혜 받은 것 다 갖고 와. 그래서 확실성의 집합체로서 교회를 설정한 거예요.

사람들이 집에서 예배드리지 않고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뜻이 뭡니까? 애매모호해서 확실한 것을 체험하고 싶은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이질성이란 것은 본인이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동질성 되기 위해서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노력하는 모습을 교회 중심의 생활로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이 사태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이게 뭔가 해결돼야 오늘 강의 끝나죠. 어떤 수단을 해도 교회 일로 귀결돼요. 근데 유대인 교회가 누굴 죽였습니까? 메시아를 죽였잖아요. 예수님을 죽을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너희들의 수고의 결집이 점점 더 나와 말씀과 이질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는 땅에 속해서 땅의 일만 생각하지. 이렇게 주님께서 그 말씀을 안 하면 좋겠는데 의도적으로 그 말씀을 끄집어내서 차이성과 결별돼 있음을 계속 차이를 강조하고 있으니까 그 차이성을 인간들의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이질성과 차이를 메워 동일성 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그들은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있잖아.” 제사 드리는 게 동질성입니까?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 내부에서 아까 할례 했지요. 할례는 도려내는 것, 파내는 것. 그런데 육신의 생식기 끝을 파내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에 의하면 뭘 파내야 돼요? 우리의 마음 자체를 파내야 돼요. 마음 파내버리면 내 마음자리가 어떻게 됩니까? 인간의 시작은 없음이죠. 마지막은 저주지요, 지옥 불이죠. 이걸 파내게 되면 없음이 되려면 있음이 파내져야 가능해요.

인간 마음에 원래 마음에 생긴 그 없음의 자리를 만들고 그 없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둘 중에 하나, 다시 말해서 하나는 복이고, 하나는 저주인 계획도 같이 여기서 주님이 개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돼요. 그리고 동질성이 딴 게 아니고 주님의 계획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작업하는 것. 이게 여러분들의 잘 아시는 마태복음 13장이에요.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다 걷어내 버리고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말씀의 밭으로 만들어버려요. 말씀의 밭이 있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농부가 되어 씨를 뿌릴 때에 밭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열매 맺는 데 있어서. 그리고 반대로 밭은 몰랐던 그 밭의 실정과 속성을 씨와 만남으로서 노출되고 발각되는 거죠.

어느 인간이 자기가 길가에 떨어진 밭이 되고 싶고, 어느 인간이 나는 돌이 박힌 밭이 되고 싶어,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어느 인간이 열매를 숨 막히게 만드는 가시덤불 밭을 누가 원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그런 밭을 원하잖아요. 그거는 네 안에서 네 자체적인 나와 나의 동질성이에요. 그러니까 나와 헤어지질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헤어지질 못하지요.

패티 김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 길옥윤 작사, 작곡 <이별>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요. 냉정한 사람이지만. 내가 나보고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돼요. “안녕 나, 잘 가 나. 전에는 내가 주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야.” 어제 낮 설교처럼 나는 누구누구의 집사. 집사가 뭐냐 하면 누구의 종이란 뜻이에요. 자기 일이 전혀 없어요. 누구의 집사에요.

그래서 설교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집사가 된 사람은 자기의 모든 난제가 해소된 사람을 말합니다. 인생문제, 자기 문제가 다 해결된 사람이 집사에요. 왜냐하면 자기 선에서 해결된 게 아니고 주인이 자기의 골치 아픈 문제를 다 해결해줬으니까. 그게 제사 안에선 어떻게 되나? 안수에요, 안수.

제사 할 때 속죄제, 속건제 양을 몰고 오잖아요. 본인이 안수해요. 잡는 것도 본인이 해요. 제사장이 다 못해요. 피 바르고 제단 올리는 건 제사장이 해요. 안수를 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와의 이별입니다. 자기와 이별이면서 자기 앞에 안수하고 그 양이든 염소든 안수하는 그 순간 헤어져야 돼요. 엄마가 아들 데리고 논산훈련소 앞에서 안수해야 돼. 머리 깎은 아들보고 안수해서 “너는 국가의 자식이지 내 자식 아니다. 뒤돌아보지 마. 앞을 봐. 조교 손짓하는 것 보이지, 빨리 가. 이제 엄마 품을 떠나서 조국을 위해서 살아라.”

개인의 존재에서 환경을 표현하는 존재로 그 환경 속에 집어던져버리죠. 나의 세계가 여기서 도려지고 와해되고 붕괴되고 그 제사의 환경 속에 들어갈 때 그게 바로 할례의 원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만 할 줄 알았지 할례의 뜻도 몰랐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나 신약의 로마서에 보면,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너희들은 할례를 행하면서도 그 의미가 인간의 힘으로 할례가 안 된다는 것을 왜 몰랐는가?

기도를 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기도가 안 된다는 걸 왜 몰랐는가?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지 왜 몰랐는가? 내가 내 이름으로 하거든요. 나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인간의 힘으로서는 동질성이 안 돼요. 주께서 주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을 부정하란 뜻이에요. 내 이름이 없는 이상은 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 다시 할까요? 죄가 죄답게 등장하지 않으면 숨어있는 실제 의가 되질 못해요. 더러움이 있지 아니하면 더러움이 규정이 돼야 이게 거룩함이 된다고요. 할례를 행한 것은 네가 더럽다는 겁니다. 그것도 네가 잘못해서 더러운 게 아니고 대대로 더럽다. 부모가 더러워서 네가 더럽다는 거예요. 더러움의 자식이다. 그걸 신약에선 어두움의 자식이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딴 게 아니에요. 아이디어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개인을 버리고 환경에 속하면 돼요. 참 쉽지요. 환경이 만들어낸 거예요. 내 인생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주변의 환경이 만들어낸 거예요. 그 환경이 어디 나오느냐? 오늘 본문 5절부터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하늘이 환경이죠.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뭐라 했습니까? 큰 바다지요.

하늘 나오지요, 산 나오지요, 바다 나오지요. 다 누구 것입니까? 여호와의 것이죠. 여기 여호와의 것이라 돼 있지요. 이것이 신약시대에 어떻게 성취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환경이 되면 동질성이 저절로 되는 거예요. 하나의 환경 속에 들어와 있으면, 개인적인 동질성은 개인이 죽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아니라 누가 와도 나와 똑같지 않아요.

그걸 여러분들 결혼한 내내 체험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오십 년 살았는데 내 마음을 몰라? 내가 짬뽕 좋아하는데 맨날 짜장면 두 그릇, 내가 짬뽕 좋아하는 줄 왜 몰라? 개인이 살아 있으면 개인은 아무리 내 마음 알아주고 짬뽕 사줘도 딴 것 없나, 해서 남이 내 마음 같지 않아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자식 키우면서 그것 모르던가요. 자식이 이기적입니다. 잃어버렸던 나의 이기성을 자식을 낳으면서 다시 재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저렇게 못됐었구나. 네가 어디서 이런 게 나왔나, 이러지 마시고요. 내가 잃어버렸던 나의 죄를 아주 실감나게 생생하게 재방송해주는 거예요. 자기 과거의 모습을. 물론 반만 그렇게 하죠. 반은 네 탓이고 이렇게 하고 반만 챙기는 거죠. 좋은 것은 지가 챙기고 나쁜 건 딴 사람한테 넘기고.

개인이 있으면 동질성이 안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개인을 죽이고 환경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게 할례입니다. “가만있어 봐. 내가 파먹을 테니까. 내가 다 파줄게.” 속속들이 네 마음을 파주겠다는 거예요. 파주고 거기서 뭐냐? 제사 속에 나타난 제사장의 이동경로를 거기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하나의 개인이 육신이 뭐가 되느냐? 환경이 돼버려요. 전에는 몸이라 했는데 이 몸이 확장돼버립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이 돼버리죠. 본인도 본인을 무시할 수 없어요. 전에는 나 혼자 있던 몸인데 이제는 주님의 작업장이 되고 말았으니까 내가 내 몸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자, 신약에 있어서 환경이 어떻게 되느냐, 그게 궁금할 건데 궁금해 미치겠지요. 에베소서 3장 18절, 19절에 나옵니다. 그 환경이 나옵니다. 17절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주님이 들어오면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을 파헤치기 때문에 주님이 들어온 이상은 이질성 같은 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파헤쳤기 때문에 그래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절 보세요.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게 구약에서는 뭐냐? 하늘과 바다와 땅과 산들을 대체하고 완성시키는 모습니다. 왜? 구약에 나오는 하늘과 바다와 땅과 산은 불에 타버리기 때문에.

잘 못 믿겠다는 표시를 보내고 있는데 못 믿으시면 로마서 14장 보겠습니다. 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먹는 것 마시는 것을 여러분들의 개인적으로 하지요. 먹을 때 마실 때 개인이 다시 살아나요. 왜냐하면 내가 먹는데 옆에 사람이 배부르다,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먹으면 내가 배불러요. 어디까지나 개인적이에요, 사적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요, 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내 개인이 살아 있는 그걸로 끝장내고 그걸로 마감하는 것은 뭐가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희락, 기쁨이에요. 자, 오늘 강의 제일 중요한 문제를 던질 테니까 여러분 답변을 해보세요. 기쁨이 복음의 최종적, 그러니까 성도의 최종적입니까, 아니면 온전함이 최종적입니까? 온전한 쪽이에요, 기쁨이에요? ①기쁨, ②온전함. 거수합시다, 말할 필요 없어요. 아무 의미 없기 때문에.

온전함은 무엇이 살아 있느냐 하면 내가 주님 덕분에 온전했다, 내가 살아 있게 돼요. 그래서 개혁주의신학 같은 기존 교회에서는 목표가 뭐냐? 성도를 온전하게 만드는 게 목표에요.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라 했으니까 당신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하는 말이, “제가 당신을 신처럼 만들어드릴 테니까 교회 온 보람 느끼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교회 힘들게 와야 되고 봉사해야 될 여러분 목표가 생겼지요.” 이렇게 돼 버려요. 왜? 나한테 유익이 되기 때문에, 나한테 유리하기 때문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의 동질성입니까? 결국은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동질성이 되죠. 이게 브라만교에요. 이게 불교입니다. 불교의 해탈이 이런 거예요. 모든 종교는 본인의 온전함이에요. 천주교 수도원의 목표가 뭐냐 하면 기도하고 노동하는 것, 한 가지 더 보태면 침묵하라, 이런 것. 기도하고 노동하고 침묵하라. 한 가지 더 보태면 남과 절대 만나지 말고. 보통 두 가지로 기도하고 노동하라. 이게 모든 수도원의 목표에요.

자, 그렇게 하는 이유를 이야기해보세요. 자기는 복음대로 성경대로 한다는 거예요. 그게 뭡니까? 내가 신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성 이건 어디서 나온 거예요? 첫 번째 아담이 몰랐던 아담을 둘러싼 환경이 있었지요. 거기에는 무엇의 힘이 작동해요? 선악과 따먹을 때 아담에게 작동하는 힘이 무슨 힘입니까? 악마의 힘이죠. 온전함의 모든 시도를 최극단까지 올렸다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의 누구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에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누구의 자식이다? 악마의 자식이다. 수도원들이 악마의 자식인 줄 모르고 그 짓하고 있어요.

우리 내부는 매일같이 올라오는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주님의 거룩의 공간이 우리를 계속 파헤치고 그걸 파괴시키는 거예요. 우리의 생활공간 속에서. 예를 들면 야구장에 간다고 칩시다. 생활공간이죠. 어제 복음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노는 날 야구장에 갔습니다. 야구장의 생활공간에서 주의 일은 뭡니까? 실습 돼야지요.

오늘 배운 걸 그대로 적용하면, 야구장엔 주의 이름이 없지요. 인간의 이름만 있지요. 롯데, 이러고 있는데 여기서 삼성, 하면 안 되죠. 가만있어야. 인간의 이름이니까 눈치를 보지요. 나는 삼성하고 싶지만 저들이 롯데가 하나님을 경외치 않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자칫하면 맞는 수가 있어. 욕 얻어먹을 수가 있어요. 눈치껏 해야 돼요. 그래서 9회 말까지 응원했다. 목쉬는 이상현상이 일어나죠. 삼성이 롯데를 7:8 케네디스코어로 이겼다. 기분 좋지요. 그 기분 좋은 것 얼마나 갑니까? 다음에 칠 때까지 가는 거예요. 이게 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러면 야구장에 누가 가게 하셨습니까? 주님 가게 하셨지요. 어젠 교회 갔거든요. 예배공간이었잖아요. 오늘은 실습해야지요. 생활의 공간 내려왔잖아요. 야구장에 가서 아브라함이 부인을 동생이라 했던 그 체험을 실제로 하게 되죠. 그런데 이기고 난 뒤에 기분은 좋았는데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게 뭐라고 내 목이 쉬었느냐? 왜 내 기분이 야구 한 게임, 한 게임마다 왔다 갔다 하느냐? 그렇게 되겠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질성 와해현상. 내가 종잡을 수 없음을 현장에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는 굳게, 굳게 다짐하고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을 다 허사로 만들어버리죠. 그러면 동질성이 와해되게 되면 여기는 비동질성이 돼요. 내가 누군지 본인이 몰라요. 이게 정상입니다. 만약에 내가 누군지 알아버리면 나는 외부에서 오는 것에 강력하게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반발하게 돼 있어요. “주님께서 야구장 보냈잖아요. 주님께서 삼성 이기게 했으니까 나는 찬양 드립니다. 됐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동질성이 와해되면서 이게 뭐로 바뀌느냐 하면 허탈과 허무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목이 아프다는 것은 내 신체가 아프죠. 아프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거예요. 아프다는 것은 고통이 살고 싶은 내 심정을 내 마음욕구를 이겨버린 거예요, 지배하는 거예요. 몸이 아프니까 지배하는 거잖아요.

그럼 나는 안 아프고 싶은데 내 주변의 환경이 어떤 환경이다? 나를 아프게 하는 환경이죠. 아담치고 고생 안 한 사람 있습니까? 잠시잠깐 기쁠 수는 있어요. 마약 같이. 야구장 가는 것도 마약이거든요. 당구내기, 그것도 마약이라고. 마약 같이 잠시 기쁠 수 있어요. “엄마, 나 사법고시 합격했어.” 사법고시 요새 없어졌구나. 변호사 돼서 좋아요, 이런 것 있잖아요. 그런 것 다 마약 같은 거예요. 나한테.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의 몸이라는 환경은 내 게 아니고 주님이 만든 환경은 나를 찌부러뜨려서 나를 점점 더 손을 쓸 수 없게 죽음에 가까이 접근하게 나를 뭉개버리는 환경이란 말이죠. 그 환경 속에서 애초부터 우리는 허탈하고 허무를 감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기쁨의 모든 노력이 나의 허무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이게 할례 받은 상태입니다.

나의 허함, 빵구 난 인간, 망쳐버린 내 인생. 내가 좋아하는 일이 나를 망하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그 야구 때문에 망하고, 손흥민 좋아하면 축구 때문에 망해버려라. 축구 본다고 새벽 두 시까지 잠도 안 자고. 축구 때문에 망하고, 야구 때문에, 목사는 목사 때문에 설교한다고 망하고, 판사는 판사 한다고 망하고. 전부 다 각자 망하는 방식이 다 달라요.

그러나 공통점은 뭐냐? 사적인 기쁨, 망하게 하신 그 환경을 새로운 기쁨으로 맞이하는 거예요. 그럼 안 망하겠다는 기쁨에 반발하는 건 뭡니까? 나의 온전함에 대한 나의 목표지요. 온전함을 기뻐하는 게 아니고 온전함은 새로운 부정성을 낳아요. 나의 동일성은 온전 하자, 온전 하자, 오분 동안. 온전 하자, 십분 지났어요. 십분 지나고 온전함의 기쁨 있습니까? 벌써 없어졌어요. 나의 온전함의 기쁨은 십분, 이십분 지나가면 새로운 사태가 벌어진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누가 차를 긁어놓는다든지, 이러면 온전함 다 깨져버립니다. 상견례하려고 가는데 옷이 찢어졌어. 사돈 만나야 되는데 칠칠치 못하게 어떡해. 핀으로 임시조치하고. 누구 만난다고 머리했는데 누가 만져서, 사람이 제일 자기 본모습 드러날 때가 여자분들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 전체가 망가져서 뻥 뚫렸을 때 손으로 이리저리 만져도 수습이 안 돼요. 아직 머리 고칠 때는 정신 좋은 줄 알았지요. 치매 걸리면 이걸 할 줄도 몰라요. 인간은 찌부러집니다. 무너지고 있어요.

<런던은 무너졌다>(London Has Fallen)는 영화도 있잖아요. 런던만 무너진 게 아닙니다. 이 세상 전체가 무너집니다. 생활공간은 기존에 네가 사적으로 알던 환경은 제사환경으로 거룩의 환경으로 내가 교체해버릴 거야. 무너지게 할 때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서 새로운 나의 죄인과 여기서 계약이 맺어졌어요. 주님의 일방적인 계약, 이 계약, 이 언약을 뭐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이걸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생명을 소유해버리면 누가 살아 있어요? 내가 또 살아 있잖아요. 생명은 나를 파괴시키고 없애버리는 게 생명인데 나를 없애버리면 주님 쪽에서 계약만 드러나죠. 약속만 드러나죠. 그런데 그 약속을 누가 믿으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 해가면서. 그런데 믿을 게 너무 많아요. 창세기 1장도 믿씁니다. 2장도 믿씁니다. 주께서 답답해서 도대체 네가 몇 번 믿어? 하여튼 족족 다 믿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주께서 파괴할 대상이에요. 인간이 파괴되기 때문에 인간에서 나온 믿음과 소망과 사랑도 파괴되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은 뭐냐? 주의 믿음을 뭐로 받느냐? 선물로 받지요. 선물로 선물답게 되려면 어떤 경우입니까? 내 믿음이 파괴됐다는 것을 기쁘게 인정하는 거예요. 나에게 나오는 것은 믿음도 아니고 소망도 아니고 사랑도 아님을 감사히 받는 거예요.

제가 좋아하는 구절 여기서 등장해야 되겠지요. 한 달 전에 여기서 한 것 같은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누가복음 2장 28절, 29절 읽어보세요.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지금 시므온이 자기를 쳐다봅니까, 자기는 모르고 뭘 바라보고 있어요. 뭘 바라보고 있습니까? 시므온 눈앞에 누가 있습니까? 아기 예수죠. 지는 어른이죠. 이 세상에 아기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아기 예수를 보면서 시므온은 뭐냐? 다른 사람은 아기 예수에요. 시므온은 뭐가 없습니까? 본인 자기 자신은 아기 예수한테 녹아져버린 거예요. 그동안 내가 수고하고 애쓰고 행하고 내 믿음, 소망, 사랑 그걸 묵사발 만들어주신 분이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무의미함이 주는 여기 기쁨인데,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이냐? 나의 무의미함, 나의 의미 없음이 주는 기쁨이에요.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기쁨을 소유한 게 아니고 그 관계, 주님께서 내민 관계에서 기쁨이 계속 쏟아지는 거예요. 이래봐야 기쁨이 돌아서면 또 삼성이 이번에 들어가야 되는데,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런데 이 기쁨의 주님이 어떻게 됩니까? 세상에 느끼는 모든 것이 허탈하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작용해주십니다.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미 압축된 시간, 압축된 역사 이게 뭐라 했습니까? 제사지요. 제사 안에는 뭐가 있다? 거룩이 어디까지 미친다, 거룩이 어디까지 파고들어옵니까? 우리의 일상생활까지 파고들어오지요.

확정된 압축된 것 시간, 묵시지요. 그 묵시의 확정된 사태가 관계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무시해버리고 확정된 것만 우리 안에 계속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는 야구장도 가게 하고 축구도 보게 하고 사돈도 만나게 하고 일상생활 하는 거예요. 사돈 앞에선 그런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오면서 기쁨이 생겨요. 사돈이 뭐데, 내가 뭔데 누가 주선했는데? 중요한 것은 생명이란 계약이 중요하지, 사돈 보고 지옥 가려하나, 이런 식으로.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환경이에요. 내가 생각한 환경이 아니고 새로운 환경에서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 다시 드리겠습니다. 마음 그 카펫 걷어내고 무슨 밭? 말씀의 밭. 다윗의 인생은 무엇으로 깔아버리느냐? 시편 36편으로 완전히 새롭게 인테리어 새로 해버려요. 말씀으로 깔아요. 그 말씀 안에 누가 일하시는가? 주의 이름이 다윗이란 죄인을 통해서 시편 36편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깔아버리는 겁니다. 움직이는 말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오셨을 때 누가 알아봤습니까? 자기 온전함과 완전함, 자기 위대함, 자기 거룩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오신 거룩한 주님을 못 알아봤습니다. 이제 새로운 환경, 성령이 주는 환경으로 말미암아 주와 하나가 된 환경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시므온 같은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221010b 부산강의.hwp (63.0K), Down:5
게시물9,970건
번호 제 목 이름 날짜 읽음
10455   강남-누가복음 13장 25절 (말씀의 온전함) 221122b-이… 홍민희 22-12-05 37
10454   강남-누가복음 13장 25절 (말씀의 온전함) 221122a-이… 홍민희 22-12-05 46
10453   20221202b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 한윤범 22-12-05 36
10452   20221202a 울산강의-역대기상(16강) 13장 11절 : 언약… 한윤범 22-12-05 36
10451   21강-디모데전서 5장 3-16절(과부의 혁명)221204 - 이… 오용익 22-12-04 48
10450   28강-예레미야 4장 29~31절(초신성)221204 이근호 목… 송민선 22-12-04 39
10449   주일학교 설교 / 가짜 인간 / 221204 정인순 22-12-04 43
10448   강남 모임 안내 (12. 6. 화) 이명직 22-12-04 33
10447   수련회 교재(수정판) 서경수 22-12-03 87
10446   대구 모임 안내 이근호 22-12-02 31
10445   7강-하박국 2장 5-8절(본질과 모형)221130-이 근호 목… 오용익 22-12-01 55
10444   울산 성경공부 안내 서경수 22-12-01 33
10443   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13강) 마태복음23:12(뒤집기)… 한윤범 22-11-30 63
10442   대전-신명기(7강) 신4:24(불 싸대기) 20221128a 한윤범 22-11-30 34
10441   대전-지난설교 보충 20221128 한윤범 22-11-30 38
10440   내가 없는 세상살이 송민선 22-11-29 53
10439   광주강의20221125b 다니엘9장 24절(두 종류의 시간)-… 이하림 22-11-29 32
10438   광주강의20221125a 다니엘9장 24절(두 종류의 시간)-… 이하림 22-11-29 47
10437   27강-예레미야 4장 23~28절(두 질서)221127 이근호 목… 송민선 22-11-27 35
10436   20강-디모데전서 5장 1-2절(나의 정체성)221127 - 이 … 오용익 22-11-27 35
맨처음 이전 [1] [2] [3] [45 [6] [7] [8] [9] [10] 다음 맨끝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